안골포 해전

덤프버전 :


파일:이순신 수결 흰색.svg
이순신
관련 문서


[ 펼치기 · 접기 ]
소속
삼도수군통제사 · 선무공신
가족
아내 방수진

장남 이회, 차남 이예, 삼남 이면

맏형 이희신의 아들 이완 · 딸의 시아버지 홍가신

먼 친척 형 이광 · 19촌 이이

후손 (이봉상 · 그 외 후손)
관련 인물
친구 류성룡 · 류성룡의 제자 허균

육군 동료 (이일 · 신립 · 권율 · 이경록)

수군 동료, 부하 (이억기 · 권준 · 김돌손 · 김완 · 김억추 · 나대용 · 무의공 이순신 · 배흥립 · 안위 · 오계적 · 이영남 · 이운룡 · 정운 · 준사 · 최호 · 송희립 · 우치적 · 어영담 · 황세득 · 송여종 · 김인영 · 신호 · 원균 · 배설 · 이언량 · 류형 · 진무성)

주군 (선조 · 선조비 의인왕후 · 분조 광해군)
생애
생애 · 전투 관련 · 여담
관련 장소
이순신이 태어난 곳 한양 건천동 · 이순신 일가의 생가 아산

이순신의 묘소 장군묘 · 이순신의 사당 현충사

명량해전이 벌어진 곳 명량수도 · 노량해전이 벌어진 곳 이순신대교
관련 사건
탄신일 · 니탕개의 난 · 녹둔도 전투 · 이몽학의 난 · 백의종군

임진왜란, 정유재란 해전 (옥포 해전 ·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 · 사천 해전 · 당포 해전 · 당항포 해전 · 율포 해전 · 한산도 대첩 · 안골포 해전 · 장림포 해전 · 절영도 해전 · 초량목 해전 · 부산포 해전 · 웅포 해전 · 장문포 해전 · 명량 해전 · 절이도 해전 · 왜교성 전투 · 노량 해전)
관련 물건
쌍룡검 · 백원 주화 ·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작품
장계별책 · 난중일기 · 이충무공전서
기록에서의
모습 및 행적

용모 · 창작물
평가
관련 기록 · 평가 · 의문점
창작물
성웅 이순신(1962) · 성웅 이순신(1971) · 난중일기(영화) · 칼의 노래 · 천군(영화) · 명량 · 한산: 용의 출현 · 노량: 죽음의 바다 · 칼의 노래(뮤지컬)
파일:이순신 수결.svg

[각주]



임진왜란정유재란 전투 목록

[ 펼치기 · 접기 ]
임진왜란


음력
4월

부산진 전투[日] · 다대포진성 전투[日] · 동래성 전투[日] · 김해성 전투[日] · 경상도 방어선 · 상주 전투[日] · 충주 탄금대 전투[日] · 여주 전투[朝]

5월

한강 전투[日] · 기강 전투[朝] · 제1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朝] · 옥포 해전[朝] · 합포 해전/적진포 해전[朝] · 해유령 전투[朝] · 임진강 전투[日] · 정암진 전투[朝] · 사천 해전[朝]

6월

당포 해전[朝] · 제1차 당항포 해전[朝] · 용인 전투[日] · 무계 전투[朝] · 율포 해전[朝] · 여주 전투[朝] · 제1차 평양성 전투[日]

7월

웅치 전투[日] · 안덕원 전투[朝] · 전주성 전투[朝] · 이치 전투[朝] · 한산도 대첩[朝] · 제1차 금산 전투[日] · 안골포 해전[朝] · 우척현 전투[朝] · 제2차 평양성 전투[日] · 삭녕 전투[日] · 해정창 전투[日] · 영천성 전투[朝] · 지례 전투[朝]

8월

제3차 평양성 전투[日] · 청주 전투[朝] · 제1차 경주 전투[日] · 제2차 금산 전투[日] · 영원산성 전투[日] · 장림포 해전[朝]

9월

부산포 해전[朝] · 연안성 전투[朝] · 제2차 경주 전투[朝] · 북관대첩[朝] · 노현 전투[日] · 창원성 전투[日]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朝]

12월

독성산성 전투[朝]
1593년

1월

· 수원 전투[朝] · 성주성 전투[朝] · 벽제관 전투[日]

2월

웅포 해전[朝] · 죽주, 상주 전투[朝] · 행주대첩[朝] · 노원평 전투[朝]
강화협상 · 휴전기
제2차 진주성 전투[日] · 송유진의 난 · 제2차 당항포 해전[朝] · 장문포 해전[朝] · 이몽학의 난 · 기문포 해전
정유재란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日]

8월

고령 전투[朝] · 남원 전투[日] · 황석산성 전투[日] · 어란포 해전[朝]

9월

벽파진 해전[朝] · 직산 전투[明] · 명량 해전[朝] · 석주관 전투[日]

12월

사로병진책 · 제2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朝][明] · 울산성 전투[日]
1598년

7월

절이도 해전[朝][明]

9월

사천성 전투[日] · 2차 울산성 전투 · 왜교성 전투[日]

11월

노량 해전[朝][明] · 남해왜성 소탕전[朝][明]
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안골포 해전
安骨浦海戰

시기
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장소
조선 경상도 웅천현 안골포[1]
원인
남해안 재해권 확보 및 장악을 위한 두 번째 결전[2]
교전국
조선 파일:조선 어기.svg
일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
지휘관
충무공 이순신
원균
이억기
권준
어영담
무의공 이순신
김완
신호
정운
배흥립
김인영
이언량
송희립
나대용
황세득
우치적
이영남
이운룡
기효근
황정록
윤사공
가안책
송응민
최천보
이응화
박이량
손윤문
최도전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병력
판옥선 56척
거북선 2척
아타케부네 21척
세키부네 15척
고바야부네 6척
피해
전사자 19명
부상자 114명
함대 피해 없음
사망자 250명 이상[3]
아타케부네 반파
(대장군전 피격)
20척 침몰
결과
조선 수군의 승리
영향
조선 수군의 부산 제외 남해안 제해권 완벽 장악
1. 개요
2. 전투의 전개 및 경과
3. 아타케부네 (안택선)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임진왜란 초기 1592년 임진년 (선조 25년) 7월 10일 전라좌수사
이순신 (李舜臣)이 이끄는 조선수군 연합함대가 진해안골포에서 구키 요시타카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일본수군 정예함대 42척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둔 해전이다.


2. 전투의 전개 및 경과[편집]


1592년 임진년 (선조 25년) 7월 8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한산도 앞 견내량 바다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주력 함대 73척을 격파한 뒤 가덕도로 향하던 중 진해안골포에 일본수군의 전선 40여척이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7월 10일 새벽 작전 계획을 수립, 전라 우수사 이억기로 하여금 포구 바깥에 진을 치고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복병을 배치한 뒤에 달려와서 전투에 참가하여 협공을 하도록 지시한 뒤, 자신의 함대는 학익진을 펼쳐 선봉에 서고, 경상 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그 뒤를 따르게 하면서 일제히 안골포로 돌격해 들어갔다. 이 때 일본군의 전선들은 모두 42척으로 그 중 각각 3층과 2층으로 된 큰 배(안택선) 2척은 포구에서 밖을 향해 떠 있었는데, 이는 지휘관 구키 요시타카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함대였다.[4] 특히 이 중에는 일본 수군 최대의 함선 안택선이 있었다.

그러나 안골포 포구의 지세는 좁고 수심이 얕아서 조수가 빠지면 육지가 되므로 판옥선처럼 큰 배는 쉽게 출입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번이나 왜선들을 포구 밖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왜적들은 먼저 출동했던 73척의 왜선 중 59척을 한산도 앞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남김없이 깨부수고 불태우며 왜적들을 참살했던 탓에 형세가 불리해지면 육지로 올라갈 속셈으로 험한 곳을 차지하고 배를 매어 두고 겁을 먹고 나오지 않았다. 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계획을 변경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교대로 포구 안으로 드나들면서 총통과 장편전 등으로 일본군을 공격토록 하자 마침내 일본군 병사들도 응전하기 시작하였다. 때를 맞춰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장수를 정하여 매복시킨 다음 급히 함대를 이끌고 달려와 합세하면서 전투는 절정에 달했다. 일본군의 대응 사격에 전사 19명, 부상 114명 이라는 이전까지 이어져 온 해전 중 조선 수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는 기록이 있다.[5] 물론 왜군의 피해에 비하면 경미한 수준이다.[6]

일본군은 사상자를 작은 배로 실어내고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큰 배로 옮겨 가면서 구키 요시타카가 자신의 기함이었던 안택선을 방어벽으로 삼아서까지 총력전을 펼쳤으나, 종일토록 계속된 전투에서 20척을 잃고 많은 전사자[7] 를 낸 채 뭍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순신은 버려진 적선을 모두 불태우면 고립된 적군이 백성을 해칠것을 우려하여,[8] 적선 중 일부는 남겨둔 채 포구 밖으로 이동하였다.

후에 견내량파왜병장에서 밝히길, 남은 적선들을 모두 태워 버리면 일본군은 육로로 귀환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숨어있던 안골포 백성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한산도 대첩처럼 수색 섬멸이 불가능한 점도 있었다. 구키 요시타카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사히 복귀하는데 성공하는데, 마치 하늘이 도운줄 알았다고 한다.

이 날의 전투는 이틀 전에 있었던 한산도 대첩과 함께 일본군의 주력을 격멸한 빛나는 전과로서 의의를 가지며, 연이어 패한 일본군은 부산으로 움츠려들어 호남 진출을 포기하였고, 이로 인해 보급에 문제가 생긴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에 주저앉는 결과를 가져왔다.

항왜 준사가 이 때 투항해 왔다고 《난중일기》에 기록한다.

이충무공전서에 따르면 전사자 19명은 김봉수, 김두산, 강필인, 임필근, 장천봉, 배중지, 박응귀, 강막동, 최응손, 필동, 김말손, 정춘, 상좌, 귀세, 말련, 박무년, 이기동, 김헌, 맹수 등이다.

3. 아타케부네 (안택선)[편집]


  • 안골포 해전 당시 구키 요시타카가 기함으로 사용하던 아타케부네 (안택선)도 참전했었다. 이 배는 한국에서도 상당히 유명한데, 이 배로 날아와 정통으로 꽂힌 대장군전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인터넷 상으로 돌아 다니는 내용인데 안골포 해전 당시 기적적으로 살아나 겨우 목숨을 건진 구키 요시타카는 자신의 아타케부네 (안택선)으로 날아와 꽂힌 대장군전을 패전하여 퇴각하는 가운데도 챙긴 뒤 종전 후 귀국했다.[9] 끝부분 철혹이 유실되기는 했지만 구키 가문에서 보관했고 지금도 일본 박물관에 잘 보존되어 전시되어 있다. 이는 유일하게 남은 임진왜란 당시의 대장군전 유물이다.[10]
파일:external/pacific.valka.cz/nihon_maru1592.jpg
안골포 해전 당시 구키 요시타카아타케부네(안택선)와 조선수군 거북선의 대치 상상도
  • 안택선의 경우 당시 일본에서도 위상이 상당히 높은 배였다. 원래 이름은 키슈우(鬼宿)[11]였으나 자신의 기함으로 선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안택선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다만 실제로 히데요시가 사용한 기록은 없고,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구키 요시타카에게 넘겨주었다. 구키 요시타카의 개인 행장록인 구키행공기(九鬼御伝記)에 따르면 안골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맹공에도 침몰하지 않고 버텼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침몰하지 않은 배라는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분석하고 재건조 하라는 명을 가토 요시아키를 통해서 일본 수군에게 전달한다. 임진왜란 종전 후 안택선은 일본으로 돌아갔고 이후 정유재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고 1856년까지 운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보통 목재 선박이 20년 정도 사용하면 폐기하고, 아무리 관리를 잘 한다고 해도 5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름만 같을 뿐 다른 배라고 봐도 무방하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5.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7 20:46:59에 나무위키 안골포 해전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청안동[2] 첫 번째 결전은 한산도 대첩이다.[3] 조선수군이 직접 확보한 수급을 기준으로 한 수치이다.[4] 본래 계획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함께 충무공에 대적하는 것이었으나, 와키자카는 한산도에서 먼저 박살이 났다.[5] 기본적으로 임진왜란 초기 해전 양상이었던 수성전이 아닌, 안골포에 숨어있던 잔여병력을 공격하는 공성전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도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한산도에서 패배한 일본 수군의 뒤를 추격하여 궤멸시키기 위해 추격전을 벌이던 상황에서 발견한 것이라 충분한 휴식과 보급이 없이 밀어붙였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피로도가 높은 상황이었다. 거기에 수성하는 일본군의 지휘를 맡은 구키 요시타카는 해적 출신으로 일본 최고의 해전 전문가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 점이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6]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는 이순신의 전술을 감안하면 그 이순신조차 일정 부분 불리함을 떠안고 싸웠어야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7] 250여 명의 수급 외에 헤아릴 수 없는 익사자라는 일본군의 피해 규모를 보고한 기록이 조선 왕조 실록에 있다.[8] #난중일기 임진년 양력 8월 16일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9] 혹은 상부에서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었을 때의 증거 자료로 쓰려 했다는 추측도 있다.[10] 2017년에는 구키 가문의 후손의 동의 하에 국립진주박물관에서 특별전시하기도 했다. ##.[11] 3원 28수 중 하나로 현재의 게자리에 위치한 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