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골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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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임진왜란 초기 1592년 임진년 (선조 25년) 7월 10일 전라좌수사
이순신 (李舜臣)이 이끄는 조선수군 연합함대가 진해 땅 안골포에서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일본수군 정예함대 42척을 격파하여 승리를 거둔 해전이다.
2. 전투의 전개 및 경과[편집]
1592년 임진년 (선조 25년) 7월 8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경상우수사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연합함대를 구성하여 한산도 앞 견내량 바다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주력 함대 73척을 격파한 뒤 가덕도로 향하던 중 진해 땅 안골포에 일본수군의 전선 40여척이 머무르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7월 10일 새벽 작전 계획을 수립, 전라 우수사 이억기로 하여금 포구 바깥에 진을 치고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복병을 배치한 뒤에 달려와서 전투에 참가하여 협공을 하도록 지시한 뒤, 자신의 함대는 학익진을 펼쳐 선봉에 서고, 경상 우수사 원균의 함대는 그 뒤를 따르게 하면서 일제히 안골포로 돌격해 들어갔다. 이 때 일본군의 전선들은 모두 42척으로 그 중 각각 3층과 2층으로 된 큰 배(안택선) 2척은 포구에서 밖을 향해 떠 있었는데, 이는 지휘관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함대였다.[4] 특히 이 중에는 일본 수군 최대의 함선 안택선이 있었다.
그러나 안골포 포구의 지세는 좁고 수심이 얕아서 조수가 빠지면 육지가 되므로 판옥선처럼 큰 배는 쉽게 출입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번이나 왜선들을 포구 밖으로 유인하려 했으나 왜적들은 먼저 출동했던 73척의 왜선 중 59척을 한산도 앞 바다 가운데로 유인하여 남김없이 깨부수고 불태우며 왜적들을 참살했던 탓에 형세가 불리해지면 육지로 올라갈 속셈으로 험한 곳을 차지하고 배를 매어 두고 겁을 먹고 나오지 않았다. 이에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계획을 변경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교대로 포구 안으로 드나들면서 총통과 장편전 등으로 일본군을 공격토록 하자 마침내 일본군 병사들도 응전하기 시작하였다. 때를 맞춰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장수를 정하여 매복시킨 다음 급히 함대를 이끌고 달려와 합세하면서 전투는 절정에 달했다. 일본군의 대응 사격에 전사 19명, 부상 114명 이라는 이전까지 이어져 온 해전 중 조선 수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는 기록이 있다.[5] 물론 왜군의 피해에 비하면 경미한 수준이다.[6]
일본군은 사상자를 작은 배로 실어내고 흩어져 있는 병사들을 큰 배로 옮겨 가면서 구키 요시타카가 자신의 기함이었던 안택선을 방어벽으로 삼아서까지 총력전을 펼쳤으나, 종일토록 계속된 전투에서 20척을 잃고 많은 전사자[7] 를 낸 채 뭍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이순신은 버려진 적선을 모두 불태우면 고립된 적군이 백성을 해칠것을 우려하여,[8] 적선 중 일부는 남겨둔 채 포구 밖으로 이동하였다.
후에 견내량파왜병장에서 밝히길, 남은 적선들을 모두 태워 버리면 일본군은 육로로 귀환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숨어있던 안골포 백성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한산도 대첩처럼 수색 섬멸이 불가능한 점도 있었다. 구키 요시타카는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사히 복귀하는데 성공하는데, 마치 하늘이 도운줄 알았다고 한다.
이 날의 전투는 이틀 전에 있었던 한산도 대첩과 함께 일본군의 주력을 격멸한 빛나는 전과로서 의의를 가지며, 연이어 패한 일본군은 부산으로 움츠려들어 호남 진출을 포기하였고, 이로 인해 보급에 문제가 생긴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에 주저앉는 결과를 가져왔다.
항왜 준사가 이 때 투항해 왔다고 《난중일기》에 기록한다.
이충무공전서에 따르면 전사자 19명은 김봉수, 김두산, 강필인, 임필근, 장천봉, 배중지, 박응귀, 강막동, 최응손, 필동, 김말손, 정춘, 상좌, 귀세, 말련, 박무년, 이기동, 김헌, 맹수 등이다.
3. 아타케부네 (안택선)[편집]
- 안골포 해전 당시 구키 요시타카가 기함으로 사용하던 아타케부네 (안택선)도 참전했었다. 이 배는 한국에서도 상당히 유명한데, 이 배로 날아와 정통으로 꽂힌 대장군전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인터넷 상으로 돌아 다니는 내용인데 안골포 해전 당시 기적적으로 살아나 겨우 목숨을 건진 구키 요시타카는 자신의 아타케부네 (안택선)으로 날아와 꽂힌 대장군전을 패전하여 퇴각하는 가운데도 챙긴 뒤 종전 후 귀국했다.[9] 끝부분 철혹이 유실되기는 했지만 구키 가문에서 보관했고 지금도 일본 박물관에 잘 보존되어 전시되어 있다. 이는 유일하게 남은 임진왜란 당시의 대장군전 유물이다.[10]
- 안택선의 경우 당시 일본에서도 위상이 상당히 높은 배였다. 원래 이름은 키슈우(鬼宿)[11] 였으나 자신의 기함으로 선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안택선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다만 실제로 히데요시가 사용한 기록은 없고,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구키 요시타카에게 넘겨주었다. 구키 요시타카의 개인 행장록인 구키행공기(九鬼御伝記)에 따르면 안골포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맹공에도 침몰하지 않고 버텼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침몰하지 않은 배라는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분석하고 재건조 하라는 명을 가토 요시아키를 통해서 일본 수군에게 전달한다. 임진왜란 종전 후 안택선은 일본으로 돌아갔고 이후 정유재란에는 참여하지 않았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한 기록이 남아있다. 그리고 1856년까지 운용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보통 목재 선박이 20년 정도 사용하면 폐기하고, 아무리 관리를 잘 한다고 해도 5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름만 같을 뿐 다른 배라고 봐도 무방하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한산도 대첩과 이치 전투가 방영된 제 74화 중반~후반부에 나레이션으로 간략하게 묘사 되었다. 여기에서 단역으로 나온 일본수군 병사 1명이 실금하며 공포에 질린 장면과 조선 수군의 포격에 가토 요시아키와 일본수군 병사들이 나뒹굴었으며 구키 요시타카는 목숨에 위협을 느끼고 황급히 후퇴 명령을 내리는것으로 묘사되었다. 구키 요시타카가 타고있던 아타케부네 (안택선)가 전투 중 조선수군이 발사한 대장군전에 맞아 부서진 사실과 구키 요시타카가 그것을 직접 챙긴 뒤 퇴각하여 현재도 일본 박물관에 전시 및 보존되어 있다는 해설이 나오지 않은것은 아쉬운 부분이나, 워낙 짧게 다루어진 탓에 이런 자세한 내용까지 담아내기는 어려웠을것이다.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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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現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청안동[2] 첫 번째 결전은 한산도 대첩이다.[3] 조선수군이 직접 확보한 수급을 기준으로 한 수치이다.[4] 본래 계획은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함께 충무공에 대적하는 것이었으나, 와키자카는 한산도에서 먼저 박살이 났다.[5] 기본적으로 임진왜란 초기 해전 양상이었던 수성전이 아닌, 안골포에 숨어있던 잔여병력을 공격하는 공성전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 수군도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거기다 한산도에서 패배한 일본 수군의 뒤를 추격하여 궤멸시키기 위해 추격전을 벌이던 상황에서 발견한 것이라 충분한 휴식과 보급이 없이 밀어붙였기 때문에 조선 수군의 피로도가 높은 상황이었다. 거기에 수성하는 일본군의 지휘를 맡은 구키 요시타카는 해적 출신으로 일본 최고의 해전 전문가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이 점이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6]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는 이순신의 전술을 감안하면 그 이순신조차 일정 부분 불리함을 떠안고 싸웠어야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7] 250여 명의 수급 외에 헤아릴 수 없는 익사자라는 일본군의 피해 규모를 보고한 기록이 조선 왕조 실록에 있다.[8] #난중일기 임진년 양력 8월 16일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9] 혹은 상부에서 패전에 대한 책임을 물었을 때의 증거 자료로 쓰려 했다는 추측도 있다.[10] 2017년에는 구키 가문의 후손의 동의 하에 국립진주박물관에서 특별전시하기도 했다. ##.[11] 3원 28수 중 하나로 현재의 게자리에 위치한 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