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수(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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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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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찬회
제2대
안찬희
제3대
박배근
제4대
이재창
제5대
심재홍
제6대
박종우
제7대
최기선
제8대
이영래
제9·10대
최기선

제11·12대
안상수
제13대
송영길
제14대
유정복
제15대
박남춘
제16대
유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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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수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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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인천 계양구·강화군 갑)
제15대
이기문
[1]

제15대
안상수


선거구 개편
송영길[2]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인천 서구·강화군 을)
제19대
안덕수
[3]

제19대
안상수


선거구 개편
신동근[4]
안상수[A]
파일:국회휘장.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인천 중구·동구·강화군·옹진군)
선거구 신설
박상은[5][6]
안상수[A]

제20대
안상수


선거구 개편
배준영[7]
허종식[8]














제11·12대 인천광역시장
안상수
安相洙 | Ahn Sang-soo


파일:안상수.jpg

출생
1946년[1] 5월 28일 (77세)
충청남도 서산군 이북면 관리
(現 충청남도 태안군 이원면 관리)[2]
거주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현직
국민의힘 인천시당 고문
본관
순흥 안씨[3]
재임기간
제11·12대 인천광역시장
2002년 7월 1일 ~ 2010년 6월 30일
서명
파일:안상수 서명.svg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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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전처 정경임[1][2] (1983 ~ 2010)
후처 이름 미상[3]
학력
서산 이북국민학교[4] (전학)
인천 서림국민학교 (졸업)
인천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학 / 학사)
트로이 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병역
병역면제 (연령초과, 생계곤란)
종교
개신교 (감리회)[5][6]
신체
176cm
소속 정당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5, 19, 20
약력
데이콤 이사
동양종합금융증권 이사
동양종합금융증권 감사
동양종합금융증권 부사장
동양선물 대표
동양그룹 종합조정실 사장
제15대 국회의원 (인천 계양구·강화군 갑 / 한나라당)
제11·12대 인천광역시장 (민선 3·4기 / 한나라당)
인천 유나이티드 FC 구단주
대한적십자사 인천광역시 명예지사장
인천광역시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명예회장
새누리당 제18대 대통령 선거 경선후보[7]
제19대 국회의원 (인천 서구·강화군 을 / 새누리당)
새누리당 인천시당 위원장
제20대 국회의원 (인천 중구·동구·강화군·옹진군 / 무소속)
자유한국당 제19대 대통령 선거 예비경선후보[8]
제20대 국회 후반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
자유한국당 전국위원회 의장
자유한국당 인천시당 위원장
자유한국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미래통합당 인천시당 위원장
미래통합당 기독인회 회장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 부회장
국민의힘 제20대 대통령 선거 예비경선후보[9]
jp희망캠프 공동선대위원장 겸 인천광역시 총괄본부장
국민의힘 인천시당 고문

1. 개요
2. 생애와 가정사
3. 정치 활동
3.1. 민선 3 ~ 4기 인천광역시장과 이후의 정치 활동
3.2. 5년간의 야인 생활과 국회 복귀
3.3. 21대 총선과 낙선
3.5. 인천광역시장 재출마 선언
4. 저서
5. 여담
6. 선거 이력
7. 소속 정당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기업인 출신의 정치인이다. 민선 3·4기 인천광역시장과 3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소속정당은 국민의힘이며, 안상수한나라당 대표와는 동명이인이다.


2. 생애와 가정사[편집]


1946년 5월 28일 충청남도 서산군 이북면(현 태안군 이원면) 관리에서 시골 마을 가난한 어부였던 아버지 안완순(安完淳, 1926. 2. 19 ~ )과 어머니 무송 윤씨(1927. 4. 29 ~ )[6]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산 이북국민학교 5학년 재학 중에 인천으로[7] 혼자 유학을 갔고 이모 댁에 머물렀다고 한다. 인천중학교[8] 재학 시절에는 자취를 하고 신문팔이, 과외를 하면서 학업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당대의 최고 명문고등학교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으나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어머니가 등록금을 빌리러 다녀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학과(현 체육교육과)를 졸업하였다. 경기고등학교 3학년 때 3선 개헌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다가 주동자로 몰려 학교에서 법과대학 등 주요 학과의 입학원서를 써 주지 않아 사대 체육학과를 택했다고 한다.

그의 30대 초반에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또 안상수의 부인 정경임 교수는 결혼 이후 뇌졸중의 일종인 모야모야병이라고 하는 희귀성 질환을 앓다가 회복되었으나[9], 그 기쁨도 잠시 1999년 8월, 다시 쓰러져 2010년 11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식물인간으로 지냈다. 안상수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로 부부가 같이 살던 아파트를 아내의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에 기부했다. 이화여대는 '정경임 글로벌 인재 육성장학금'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제세산업을 거쳐 동양그룹에서 근무했으며, 1996년 신한국당의 전문경영인 영입 케이스로 정계에 입문하였다.


3. 정치 활동[편집]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인천광역시 계양구·강화군 갑에 출마하면서 정치 인생을 시작했다. 그러나 새정치국민회의 이기문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2년뒤인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한나라당 인천광역시장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당시 전국을 휩쓴 DJP 열풍과 불과 1년 전 전국민을 울렸던 IMF 사태의 여파, 그리고 인기 절정이였던 현직 시장 최기선 후보의 아성에 밀려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 이기문의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인해 치뤄진 1999년 재보궐선거에서 인천 계양구·강화군 갑 지역구에 한나라당 후보로 공천되었고, 송영길을 누르고 당선되어 약 1년간 제15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다시 송영길과 맞붙어 낙선했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인천시장으로 출마, 당선되었고 2006년 전임 시장인 열린우리당 최기선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각종 실정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으며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인천시장 3선에 도전했지만 송영길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3.1. 민선 3 ~ 4기 인천광역시장과 이후의 정치 활동[편집]


8년간 인천광역시장을 지내면서 건실했던 인천광역시의 재정을 파탄낸 것으로 악명이 높다. 얼마나 막장이었냐면 안상수의 임기가 끝나고 보니 인천광역시 자산 중 즉시 출금 가능한 금액이 수십만원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는 도시전설까지 존재할 정도다.

사실 민선 3기 시절까지만 해도 이 정도로 막장이진 않았고 무난한 행정능력을 보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재선까지 해냈다.[10] 당장 버스 무료환승제도를 도입한 것도 민선 3기 시절의 일이다.[11]

그런데 2006년, 뜬금없이 아시안 게임 유치선언을 한 것을 시작으로 세계 도시 축전이나 월미은하레일 사업 등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뉴타운 열풍에 발맞추어 루원시티, 도화도시개발사업를 야심차게 추진했는데 이게 대침체 때문에 다 망해버리면서 모두 빚더미로 돌아온 것이었다.[12] 결국 이러한 막장 행정으로 인해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본인이 3선에 실패한 것은 물론이고 헌정사상 최초로 민주당계 정당에 인천을 넘겨주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13]

3.1.1. 송도국제도시[편집]


송도국제도시를 추진하여 건설하였다.


3.1.2. 월미은하레일[편집]


위의 도시축전 개막에 맞추어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하다가 부실공사 논란에 휩쓸려 준공 승인 조차 못 받고 백지화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백지화된 이유는 2010년에 안상수가 퇴임하고 나서야 알려졌는데, 인천시가 의뢰한 감사원에서 밝혀진 바로는 무면허 업체가 하도급을 받아서 공사를 진행했다는 것까지 나왔다. 이로 인해 철도 동호인들에게 두고 두고 까이는 중. 자세한 건 해당 항목으로... 그리고 이런 진짜 뭐라 변명할 수 없는 최악의 실정이다.


3.1.3. 151 인천타워[편집]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착공식 이후 잠정 중단되었다.


3.2. 5년간의 야인 생활과 국회 복귀[편집]


낙선 이후 2년간 야인 생활을 하다가 2012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했으나 5위로 떨어졌다. 그 후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대선 캠프에서 공동선대위원장 겸 가계부채특별위원장을 맡았다.

2014년 초까지 상대 후보였던 송영길의 실정, 그리고 인천시 기반 정치인 중 최상위권의 인지도를 가졌다는 장점으로 인해 새누리당 인천광역시장 후보로 거론되었다. 당시 유력 후보군으로는 친박 실세 윤상현, 이학재 등이 거론되었으나 두사람 모두 안상수와의 대결에서는 밀린다는 의견이 중론이였기에 충분히 해볼만한 대결이였고 안상수 본인도 경선에 의욕적으로 임했었다. 그러나 당시 수도권에서의 압승을 노리던 청와대와 새누리당 지도부는 친박 실세로 꼽히던 유정복 당시 행정안전부 장관[14]을 사퇴시켜 경선에 참여시켰고, 이에 안상수는 20년 동안 김포에서 정치하다가 낙하산으로 내려왔다며 네거티브 공세를 펼쳤으나 김포시장 경험 + 친박 마케팅을 내세운 유정복 후보에게 패하고 만다.[15]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는 인천 서구 강화군 을 선거구에 출마, 새정치민주연합 신동근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15년 만에 원내로 복귀, 이번에도 약 1년간 제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새누리당 공천에서 컷오프되어 새누리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인천광역시 중구·동구·강화군·옹진군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개표 결과 31.9%(41,504표)를 획득하며 당선되었다. 참고로 31.9%라는 득표율은 20대 총선 전국 지역구 후보 중 최소득표율 당선 기록이다.[16]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이 참패한 후 비상대책위원회 준비위원장이라는 역할을 맡았다. 이후 2018년 7월 16일 부로 후반기 국회 예결특위 위원장이 되었다.

2019년 12월 21일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범투본) 집회에 참석해 마이크를 쥐고 "전광훈 목사를 구속하면 그 다음 날로 정권이 망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또 청와대 선거 개입 의혹과 관련해 "3.15 부정선거 해서 당시 내무부장관[17]이 사형되지 않았느냐"며 "선거 조작한 사람들은 처단돼야 할 것이다. 맨 꼭대기에 누가 있느냐"고 말했다.

2020년 2월 1일엔 범투본 집회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를 통마늘 7개 넣고 끓인 물을 하루 3번 마시면 효과가 있다."란 헛소리를 퍼트리기도 했다. #


3.3. 21대 총선과 낙선[편집]


21대 총선을 앞두고는 본인의 지역구를 떠나 인천의 보수정당의 험지계양구 갑에 공천을 신청했다.[18] 20년 동안 보수정당이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험지이자 자신이 처음 정치를 시작한 계양구에서 문재인 정권 심판을 외치겠다며 출마의 변을 밝힌 것이다.

하지만 2월 28일, 미추홀구 을에 단수 추천되어서 다행히 비교적 무난한 곳에 출마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 이 지역구에서만 3번 연속 당선된 현역 의원 윤상현이 컷오프에 불복,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나섰는데[19][20] 선거 결과 안상수는 3위로 낙선하면서 다음 선거를 기약하기 힘들어졌다. 만약에 인천광역시 지역구 의원 중 누군가가 의원직을 상실하거나 사퇴해서 보궐선거라도 열리면 그 지역구에 출마할 거라는 예측도 있지만, 그런 일이 있기는 매우 힘든 일이고, 설령 하더라도 공천받을 거란 확률이 100%란 확률도 없다. 거기다 팔순에 접어든 고령이기 때문에 향후 정치 활동이 불투명해졌다.

그런 와중에 자신과 맞붙었던 윤상현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기소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7월 무렵 자신의 부하 직원을 시켜서 고소했을 때도 검찰은 경찰에게 윤상현을 입건하지 말라고 2번이나 말했지만, 10월 초 공직선거법 위반 공소시효 만료를 앞두고 안상수가 직접 고소장을 써서 내자 나흘 만에 수사를 해서 기소를 했다고... #


3.4. 제20대 대통령 선거[편집]


파일:안상수_제20대 대선 출마.jpg

문제는 경제다


2021년 7월 1일, 20대 대선 출마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2021년 현재의 대한민국이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주장하며 반드시 정권을 교체해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또 그는 대통령제가 수명을 다했다고 주장하며 제왕적 대통령제를 권력 분산형으로 개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선 토론회에서 토론 도중 마블 코믹스의 멤버인 영웅 토르의 망치를 들고 나와 이재명과 권순일 등 대장동 일당을 꾸짖는 퍼포먼스를 펼쳤고, 10월 1일 제5차 토론회에서는 망치와 더불어 관을 들고 나와 이재명을 비롯한 부동산 투기꾼들을 장고처럼 싸그리 묻어버리겠다고 일갈하였으며, 10월 5일 제6차 토론회에서는 후보자 소개 시간 때 이재명의 사진을 으며 등장하는 매우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큰 화제를 받았다.

부동산 투기 마피아의 두목! 이재명! 이재명! 이재명! 당신의 추악한 가면을 찢어버리겠어! 자신을 뽑아준 성남시민들의 재산 오천억을 갈취하고 마피아 두목으로서 국민들에게 사죄는 하지 아니하고 온갖 거짓말과 개소리로 국민들을 농락하는 이재명 당신을 국민의 이름으로 심판하겠어!

10월 5일 제6차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토론 中


다만 이에 대해선 호불호가 꽤 갈렸는데, "사이다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 "씬스틸러다.", "재미있었다.", "응원한다." 등의 좋은 반응도 있었는가 하면, "토론회에서 저게 뭐하는 짓거리냐?", "보는 내가 다 민망하다.", "도가 너무 지나쳤다.", "역시 국힘도 인물이 없어도 너무 없다.",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다.", "국힘 수준이 대충 보인다.", "저러니까 국힘은 항상 뭘 하든 안 되는 거다." 등의 나쁜 반응도 있었다.

그러나 안상수 후보는 2강[21] 사이의 치열하고 날카로운 신경전 때문에 자칫 험악하고 국민들에게 위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을 국민의힘 대선 후보 경선토론에서 두 사람을 중재하고 다른 후보들에게도 웃음을 주는 역할을 하며 4강 경선에서 컷오프될 때까지 토론회의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10월 8일 있었던 4강 경선에서 컷오프 되었다.

10월 12일 홍준표 후보의 선거캠프 jp희망캠프의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위촉되면서 홍준표 캠프에 합류하였다.

11월 5일 국민의힘 대선 후보로 윤석열이 최종확정되자 국민의힘 살리는 선거대책위원회 인천공동총괄선대위원장으로 위촉되어 윤석열 후보의 승리에 기여하였다.

3.5. 인천광역시장 재출마 선언[편집]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둔 2022년 봄, 인천광역시장 재출마를 선언하였다.

4월 13일 있었던 경선 컷오프를 유정복, 이학재와 함께 통과하면서 3파전까지는 통과했지만, 최종 공천은 유정복이 받으면서 본인은 이학재와 함께 탈락했다.[2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때 윤석열 대통령, 오세훈 서울시장과의 연대를 통해 존재감을 과시하던 이학재를 근소하게나마 이긴 것을 보면 안상수 본인의 경쟁력은 어느정도 살아있긴 한 모양이다.


4. 저서[편집]


파일:뉴욕은 블룸버그를 선택했다.png
파일:국제금융 선물거래.png
파일:안상수의 혼이 담긴 인천이야기.jpg
파일:아 인천.jpg
파일:긍정이 멘토다.jpg


5. 여담[편집]


  • 공교롭게도 동명이인 안상수와 나이도 같고 두 명 모두 서울대 출신[23]이라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많다. 거기에 둘의 경력도 꽤 비슷하다. 둘 다 같은 정당 소속으로 대한민국 국회의원시장을 역임했고, 비박, 친이 출신이며, 고령으로 병역면제를 받았고, 본관도 같다. 그나마 차이점이라면 이 문서의 안상수는 자녀가 없지만, 창원의 안상수는 슬하에 2남 1녀로 3명이나 두었다는 것과 종교도 이 문서의 안상수는 개신교(감리교)지만, 창원의 안상수는 개신교였다가 천주교개종하였다는 것과 정치 입문 전의 직업도 이 문서의 안상수는 회사원이지만 창원의 안상수는 법조인이라는 것과 각자 고향도 인천의 안상수는 태안군, 창원의 안상수는 창원시. 국회의원 선수도 이 문서의 안상수는 3선이지만, 창원의 안상수는 4선이다. 여담으로, 두 사람이 국회의원으로써 함께 일했던 시기는 제15대 국회만이 유일하다[24]. 줄여서 저 쪽은 '보온상수' 또는 '행불상수'로 불리고, 이 쪽은 인천시장 안상수로 불린다. 참고로 둘이는 한자 표기도 다르다. 인천 안상수는 安相洙, 창원 안상수는 安商守.
  • 3선 국회의원(15대, 19대, 20대)이지만, 3선 중 15대와 19대는 국회의원 임기 만료 1년여를 남긴 재보궐선거당선되어 실질적인 국회의원 활동은 초선 의원 임기의 절반인 2년 정도밖에 하지 못하였다. 더불어, 정식 총선에서는 모두 패하였으나 20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정식 총선에 당선된 경력을 만들었다[25].
  • 숫자 2와 연관이 은근히 많다. 인천시장 2번 당선, 인천시장 2번 낙선, 국회의원 2번 낙선, 게다가 '안상수'란 이름의 정치인이 2명이다.
  • 태권도 명예 8단이다. 실제로는 태권도 공인 2단인데, 아시안 게임올림픽에 태권도를 정식 종목으로 계속 유지하는데 도움을 줬다 해서 국기원 명예 8단이다.
  • 2022년 2월 24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를 지지 선언을 한 대한민국 헌정회원 316명의 명단에 동명이인과 같이 포함되었다.#
파일: 인천국회안상수.jpg
파일:인천상수.jpg
인천광역시장 재임 당시 모습
2022년 현재
  • 2023년 현재 만 77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15년은 젊어보이는 동안의 소유자다.
  • 파란색이나 빨간색 정장 같은 튀는 정장을 입고 공식 석상에 나오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 의외로 쇼맨쉽과 유머 감각이 상당히 뛰어난 정치인이다. 19대 대선 자유한국당 경선에서는 태권도 격파 퍼포먼스를 선보였었고, 20대 대선을 국힘 경선에서도 관이나 망치 등 소품을 들고 오거나 이재명의 사진을 가져와 찢어버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덕분에 젊은 보수층들로부터 상당히 높은 호감과 인지도를 얻기도 했다.[26]
  • 인천시장으로서의 악평과는 별개로 세상을 떠난 아내에게만큼은 순종적인 순애보였다. 선술했듯이 부인이 결혼 이후 모야모야병으로 쓰러졌고, 이 병 때문에 아이를 가지면 위험하다는 의사의 충고 때문에 자녀도 가지지 못했는데, 안상수는 태어나지 않은 자식의 몫까지 더 열심히 하기로 하고 아내를 더 사랑하기로 결심하였고, 아내와 사별한 그날까지 손수 병수발을 들면서 함께 했다.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 계양·강화 갑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24,697 (27.93%)
낙선 (2위)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인천광역시장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238,708 (34.26%)

1999
6월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인천 계양·강화 갑
36,784 (54.89%)
당선 (1위)
초선[27]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 계양
48,953 (44.41%)
낙선 (2위)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인천광역시장
393,932 (56.17%)
당선 (1위)
초선[28]
2006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526,932 (61.93%)
재선[29]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469,040 (44.38%)
낙선 (2위)

2015
상반기 재보궐선거
(국회의원)
인천 서·강화 을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33,256 (54.11%)
당선 (1위)
재선[30]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 중·동·강화·옹진

[[무소속|
무소속
]]

41,504 (31.87%)
3선[31][32]
2020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인천 동·미추홀 을

[[미래통합당|
파일:미래통합당 흰색 로고타입.svg
]]

17,843 (15.57%)
낙선 (3위)




7.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6 - 1997
정계 입문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1997 - 2012
합당[33]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 2016
당명 변경

[[무소속|
무소속
]]

2016
탈당[34]

[[새누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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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 2017
복당

[[자유한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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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 2020
당명 변경

[[미래통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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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합당[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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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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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둘러보기[편집]



























[1] 순흥안씨대동보 17권 628쪽에는 1948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3] 판관공파(判官公派) 27세 상(相) 항렬.[4] 이전 유튜브 채널 '안상수너튜브'가 2022년 4월 초 유튜브 커뮤니티 가이드라인 위반으로 삭제되었다.[5] 아카이브[6] 윤영환(尹永煥)의 딸이다.[7] 수도국산 밑 송림동에서 살았다고 한다.[8] 현재 연수구 연수동의 있는 그 학교이긴 한데, 원래는 제물포고등학교와 같은 핏줄의 학교였기에 안상수가 재학하던 당시에는 중구 전동에 학교가 있었다. 특히 중학교 입시 폐지 이전에는 인천에서 학력 수준이 가장 높은 명문 중학교로 이름을 떨쳤다.[9] 이 병 때문에 슬하에 자녀도 전혀 가지지 못했다. 당시 의사가 애를 가지면 위험하다고 해서 애를 가지지 말라고 충고했기 때문이다.[10] 애초에 3기 시절부터 그랬다면 재선 자체를 못 했을 것이다![11] 하지만 무분별하게 환승하도록 제도를 만들어서, 문제가 생겼고, 결국 2006년이 돼서야 제도를 수정하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인천광역시 시내버스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12] 송도국제도시영종국제도시, 청라국제도시 등 경제자유구역은 최기선 前 시장이 추진해 안상수 전 시장 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시작된 사업이다. 사실 인천경제자유구역 사업 자체는 당시 크게 적자도 아니었고 나중에는 당연히 흑자 사업이 되었고 문제가 아니었으나 경제자유구역 개발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아시안 게임, 도시축전 등으로 재정이 악화되었다.[13] 여담으로 부채를 9조7202억원으로 만든 안상수를 꺾고 당선된 송영길 인천광역시장은 각종 사업 취소 및 축소와 매각(151 인천타워, 루원시티, 송도 6·8공구와 신세계백화점이 입점한 인천터미널 등 자산 매각, 공무원들의 수당 삭감 등)으로 긴축 재정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안상수와 같은 당인 새누리당 유정복 시장이 인천을 탈환하게 된다. 하지만 유정복 시장도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의 성공적 개최 실패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인천시장 선거에 출마한 박남춘에게 다시 인천을 빼앗겼다. 그런데 이 박남춘 시장도 앞 전 시장들에 버금가게 일을 못 한다. 인천 붉은 수돗물 사태 당시 이미 전조현상이 충분했는데도 이를 방관하다가 사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수만명의 피해자가 속출하고 2000여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는데도 보름이 지난 뒤에 대책을 내놓았다. 그 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유정복 전임 시장이 현역 박남춘 시장과의 선거에서 승리하고 재선 인천시장이 되었다.[14] 당시 유정복의 지역구는 경기 김포시였기 때문에 경기도지사 후보군으로 꼽히고 있었다. 이 때문인지 처음 출마설이 돌때만해도 후보 본인이 신문보고 알았다며 황당하다는 식의 인터뷰를 했었다.[15] 사실 안상수는 인천을 기반으로 오랫동안 활동해왔지만 도시축전과 월미은하레일 사업을 대차게 말아먹는 바람에 인지도는 높아도 당 내에서도 무능하고 구태적인 이미지가 쌓여있었는데 경쟁상대였던 유정복 후보가 김포시장 및 두차례의 장관 경력과 박심 마케팅을 내세워서 이 틈새를 잘 파고든 것이 결정적이였다. 당시만해도 박근혜 대통령이 집권 초반이라서 지지율이 꽤나 잘 나올때라 이런식의 선거전략이 충분히 잘 먹혔고 본선에 가서도 세월호 사건이라는 엄청난 디매리트를 안고도 현직 시장을 꺾고 당선되었다.[16] 그런데 만약 강화군이 선거구에 합구되지 않았다면 안상수가 낙선할 수도 있었다. 왜냐면 같은 선거구 내에서도 자치구별로 1위가 달랐기 때문이다. 중구와 옹진군에서는 배준영 후보가 1위였고 동구에서는 조택상 후보가 1위였다. 결국 강화에서만 안상수가 1위를 하고 나머지는 다 2위를 했는데 보수정당 지지세가 강한 강화군 지역의 득표율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덕에 당선될 수 있었다.[17] 여기서 말하는 처형된 내무부장관은 최인규를 일컫는다.[18] 계양구는 인천에서 민주당계 정당의 지지세가 가장 강한 지역이다.[19] 공교롭게도 이전 선거에서도 안상수와 윤상현은 나란히 새누리당 공천을 못 받고 탈당해서 무소속으로 나왔다가 당선된 이후 복당한 전례가 있다.[20] 사실 윤상현이 친박 이미지와는 별개로 지역구 내 평판은 상당히 좋기 때문에 안상수가 해당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될 거라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해당 지역구 한정으로 입지가 탄탄한 윤상현과 다르게 안상수는 인천광역시장 재임 시절 평가가 상당히 나빴다는 것도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다.[21] 윤석열, 홍준표[22] 사실 안상수가 경선에서 이길 가능성은 희박한 편이였는데 시장 재임 시절의 이미지가 너무 안좋은데다 나이도 너무 많아서 강화군과 송도국제도시 지역을 제외하면 평판이 매우 나빴다. 이에 반해 유정복 전 시장은 선거 2연패에도 불구하고 시장 재임 시절에 안상수, 송영길이 남겨놓은 인천시의 채무를 대부분 정리해서 인천의 재정을 정상화시켰고 인천발 KTX, 청라, 송도, 루원시티, 계양테크노벨리 등 전임자들이 추진하던 인천의 역점 사업들도 안정적으로 추진해서 연이은 낙선과 친박이라는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평판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결과는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23] 다만, 둘 다 학과가 다르며, 또한 학번도 4년이나 차이가 난다. 이 항목의 안상수는 68학번 체육학과이고, 창원의 안상수는 64학번 법학과이다.[24] 그조차도 인천의 안상수는 제15대 국회가 거진 끝나가는 때인 1999년 재보궐선거를 통해 최초로 국회에 입성했는지라 기간도 그리 길지 않다. 게다가 이후에도 16대, 17대, 18대까지 국회의원을 3번 더 역임한 창원의 안상수와 달리 인천의 안상수는 16대는 낙선하였고, 이후에는 재선 인천시장으로 일하면서 중앙정치와는 오랫동안 거리를 두었다가 19대 때인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를 통하여 15년 만에 국회에 재입성했지만, 이 때 창원의 안상수는 본인의 고향창원시로 낙향한 뒤였고, 이후 창원의 안상수는 창원시장을 1번 역임하면서 중앙정치로는 돌아오지 않았다.[25] 재미있게도 20대 총선에서는 공천 불복 후 무소속으로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다시 말해 정식 총선에서 제대로 공천받아서 이긴 경험이 없다는 진귀한 기록을 가지게 된 것. 그리고 안상수의 지역구가 개편되어 동구 부분은 전희경이, 나머지 부분들은 배준영이 그대로 공천되었다. 또한 안상수는 21대 총선에서는 윤상현의 지역구인 동•미추홀 을에 공천되었는데, 여론조사에서 윤상현은커녕 오히려 더불어민주당남영희보다도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3위로 낙선해(심지어 득표율은 15%를 겨우 넘어 선거비 전액 보전도 아슬아슬했다) 이 기록은 계속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26] 다만 안상수의 시정을 경험했던 인천의 장년층 보수층들은 인천 재정 말아먹은 주제에 무슨 경제냐며 극딜을 박는 사람도 있다.[27] 이기문(새정치국민회의) 당선 무효로 인한 재선거[28] 11대, 민선 3기[29] 12대, 민선 4기[30] 안덕수(새누리당) 선거법 위반으로 인한 의원직 상실[31] 본인 선거이력 중 첫 국회의원 선거 본선에 당선되어 국회의원 본 임기 4년 모두 마쳤다. 그 전에도 15, 19대 국회의원을 역임해 재선 국회의원 이었으나, 둘 다 모두 잔여임기 1년짜리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되었다.[32] 20대 총선 당선자들 중 전국 최저 득표율로 당선. 2016.06.16 새누리당 복당[33]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34] 총선 공천 탈락 불복으로 인한 탈당[35]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