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만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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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칼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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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칼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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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칼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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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칼리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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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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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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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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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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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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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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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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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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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지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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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리드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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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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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마이야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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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대
오스만 왕조

제101대
오스만 왕조

제102대
오스만 왕조

압뒬하미트 2세
메흐메트 5세
메흐메트 6세
압뒬메지트 2세
^^ 1 :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 알리 등 이 4명만 정통 칼리파로 인정받지만 하산도 잠깐 동안이지만 칼리파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포함한다.



아바스 왕조 제2대 칼리파
알 만수르
المنصور


이름
아부 자파르 아브드 알라 이븐 무하마드 알 만수르
أبو جعفر عبد الله بن محمد المنصور
출생
714년
우마이야 왕조 알 후메이마
사망
775년 10월 6일 (향년 61세)
아바스 왕조 메카
재위 기간
아바스 칼리파
754년 6월 10일 ~ 775년 10월 6일 (21년)
전임자
아부 알 아바스
후임자
알 마흐디
부모
아버지 : 무함마드 이븐 알리
어머니 : 살라마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아바스 왕조 2대 칼리파. 제국에 위협이 되는 수많은 정적을 처단하고 바그다드를 수도로 삼는 등 왕조의 기반을 다졌다.


2. 생애[편집]


714년경 빌라드 알샴 하와라(오늘날 요르단 후메이마 유적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알라로, 쿠라이시 부족의 하위 부족인 바누 하심의 부족장이다. 어머니는 살라마로, 베르베르인 노예였다. 일찍이 호라산 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호라산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여러 이슬람 학자들과 접촉하며 이슬람 교리를 숙지했다.

743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형 이브라힘이 아바스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그러나 745년 샤라반 이븐 압둘 아지즈가 이끄는 카와리즈파의 반란에 참여했다가 피살당했다. 나이 대로라면 그가 뒤를 이어야 했지만, 모친이 비천한 출신이었기 때문에 이복동생 아부 알 아바스가 아바스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747년 아바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혁명 성공에 일조했다. 특히 750년 1월 대 자브 강 전투 때 최전선에서 용맹을 떨쳐 우마이야 왕조 마지막 칼리파 마르완 2세를 격파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750년 8월 25일 마르완 2세가 이집트로 달아났다가 그곳에서 추격대에게 붙잡혀 처형된 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메소포타미아로 진군하여 마지막 우마이야 칼리프의 죽음을 널리 알렸다.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이라크 총독 야지드 이븐 우바이라 알 파자리가 와시트에서 농성하자, 그는 그 곳을 포위한 뒤 투석기를 대거 동원하여 도시를 폭격했다. 11개월간 이어진 항전 끝에, 주민들이 평화 협약을 맺어달라고 호소하는 걸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하고 사절을 보냈다. 그는 우바이라가 와시트를 떠나지 않고 아바스 왕조에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사면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우바이라가 배신할 기미를 보이고 있다며 우바이라 및 42명의 동료 및 친척을 긴급 체포해 모조리 처형했다.

아부 알 아바스는 혁명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아부 무슬림이 새 정권에 얼마나 충실할 지 확신하지 못했다. 이에 그를 호라산으로 보내 아부 무슬림과 접촉해서 확인하게 했다. 그는 아부 이슬람과 대면한 뒤 칼리파에게 돌아와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아부 무슬림은 거인 중의 거인이며, 그가 살아있는 한 인생을 즐길 수 없다."


하지만 아부 알 아바스는 이후에도 아부 무슬림을 우대했고, 아부 무슬림이 754년 메카로 순례한 뒤 호라산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줬다. 그러던 754년 6월 10일, 임종을 눈앞에 둔 아바스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지난날에 사망한 형 이브라힘의 아들 이사를 그의 후계자로 삼게 했다. 하지만 시아파 측은 새 칼리파는 자신들이 선출한 이맘이 되어야 한다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에 그는 시아파가 혁명 성공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지만 아바스 가문의 세습 집권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고 숙청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755년, 그는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여겼던 아부 무슬림을 제거하기로 했다. 우선 아부 무슬림의 주요 부관 중 한 명을 호라산 총독으로 임명하고, 아부 무슬림을 이집트 총독으로 선임했다. 아부 무슬림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그가 계속 부임을 명령하자 쿠파로 가서 호라산을 떠날 수 없는 사정을 설명하기로 했다. 그는 처음엔 아부 무슬림을 정중하게 맞이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그러나 마지막 만남 때 암살자를 시켜 면전에서 살해하게 했다. 이에 카렌 가문의 이란 귀족 순파드가 니샤푸르에서 아부 무슬림의 추종자들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켜 이라크로 진군했지만, 레이에서 아바스군에게 완패했다.

그는 쿠파에서 승전보을 전해 듣고 전리품 목록을 조사하기 위해 관료를 보냈다. 그러자 토벌대 지휘관 자와르는 그가 전리품을 독점하려 든다며 분개해 병사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그가 압도적인 병력을 갖춘 토벌대를 급파하자, 자와르는 이스파한으로 후퇴한 뒤 농성하다가 토벌대가 압박해오자 다시 아제르바이잔으로 달아난 뒤 산악 지대에서 762년까지 항전했으나 끝내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는 시아파를 권력에서 철저히 배제하고 아바스 왕족과 비아랍 무슬림들을 요직에 대거 기용했다. 758년, 아들 무함마드에게 시아파 이맘인 알리 자인 알 아비딘이 메카 순례를 떠날 때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무함마드는 아비딘을 체포해 처형했지만, 그의 두 아들인 무함마드와 이브라힘을 잡는 데 실패했다. 이브라힘은 바스라로 도망친 뒤 바스라 지역에서 카와리즈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합세했다. 그러자 그는 주변 일대에 온건한 평화 협약을 맺으면서 고립시킨 뒤 강경 진압했다. 다만 이브라힘은 사전에 사막 지대로 도피했기에 잡지 못했다. 한편 무함마드는 아들 알리와 함께 이집트로 달아났다. 그는 추격대를 급파했고, 761년 무함마드의 아들 알리와 일가가 모조리 체포되었다. 그는 무함마드의 아들 알리를 채찍형으로 죽이고, 이브라힘의 아들 무함마드를 벽으로 둘러싸인 움푹 들어간 곳에 산채로 눕혀서 질식해 죽게 만들었다.

762년, 무함마드는 일가족을 학살한 그에게 복수하고자 메카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메디나 총독이 포로로 잡히고 히자즈 일대가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그는 즉시 토벌대를 급파했다. 762년 12월 14일 토벌대는 메디나에서 반란군을 격멸했고, 무함마드는 전사한 뒤 수급이 베어져 쿠파에 있던 그에게 넘겨졌다. 한편, 이브라힘은 바스라로 재차 이동한 뒤 형제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모집했다. 그러나 바스라 총독이 잡으려들자 그곳을 떠나 후제스탄의 아바즈에 도착한 뒤 763년 시아파를 대거 결집해 반란을 일으켰다. 여기에 쿠파와 모술 일대에도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면서, 아바스 왕조의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이후 쿠파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처음에는 18,000명의 선봉대 중 500명만 살아남는 등 크게 고전했으나, 바스라에서 파견된 증원군이 이브라힘의 군대 후방을 공격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브라힘은 화살에 맞아 죽었고, 그의 수급이 베어져 대중에 공개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알 만수르는 이브라힘의 반란이 벌어진 이래 근심에 사로잡혀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하렘 출입도 삼갔다. 전투 당일에는 아군이 고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레이로 피신할 준비를 했지만, 이브라힘의 머리를 전달받자 옷을 갈아입고 하렘에 들렀다고 한다. 시아파는 마그레브와 남부 아라비아, 이란 북부 등지로 흩어졌다.

이렇듯 각지의 반란을 모조리 제압한 뒤, 우마이야 역대 칼리파들의 무덤을 모조리 파헤치고 시신을 짓밟음으로서 이전 정권을 철저히 부정했다. 다만 우마르 2세의 무덤만은 보전하게 했는데, 이는 비아랍 무슬림들을 공정하게 대한 우마르 2세를 인정하며 자신 역시 그를 본받겠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그는 학문적으로 뛰어났던 이란인들을 중용했고, 개종자들에게도 여전히 지즈야를 부과하던 악습을 폐지해 비아랍인들의 개종을 유도했다. 그 결과, 압바스 제국 내의 무슬림 비율은 그의 치세 동안 8%에서 15%로 늘어났다.

알 만수르는 치세 초기엔 쿠파에서 권력을 행사했지만, 반란을 모두 평정한 뒤 쿠파에 시아파가 들끓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수도를 옮기기로 마음먹었다. 768년, 티그리스 강의 서쪽 강둑에 마디나트 앗 살람(Madinat as-Salam: 평화의 도시)를 세우기로 했다. 지름 약 2.4km, 둘레 10km의 원형 도시는 쿠파, 시리아, 호라산, 바스라라는 이름의 4개의 문이 있는 이중 방어벽으로 둘러싸였다. 그는 칼리프의 궁전과 주요 모스크를 도시 중앙에 세우게 했다. 하지만 그가 지은 이름은 서류상에서만 유지되었고, 나중에는 기존의 지명인 바그다드로 대체되어 현재에 이른다.

새 수도 바그다드는 이슬람 세계 전역에서 몰려온 다양한 신앙과 문화를 가진 남녀들로 가득찼다. 바그다드에는 무슬림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 조로아스터교인, 유대인 등이 있었는데, 모두 아랍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또한 농업 진흥 정책, 과학 후원, 체계적인 관료 제도 구축 등 여러 정책을 단행했으며, 천문학, 수학, 의학, 철학, 등 여러 분야의 저서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특히 이란 서적 번역은 아바스 왕조 지식인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었다. 그의 이같은 정책은 훗날 바그다드가 학문과 과학의 세계적 중심지로 거듭나는 배경이 되었다.

한편, 그는 그동안 우마이야 왕조 타도와 내전 수습에 치중하느라 외세의 침략에 소극적으로 치중했던 정책을 공세로 전환했다. 동로마 제국령 아나톨리아에 습격대를 잇따라 파견하여 약탈을 일삼게 했으며, 763년 후우마이야 왕조를 멸망시키기 위해 토벌대를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했다. 그러나 공세 정책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스 5세의 지휘하에 무슬림군을 번번이 격퇴했고, 이베리아 반도로 파견된 토벌대는 아브드 알 라흐만 1세에게 대패했다. 그는 암살자를 잇따라 보내 라흐만을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그는 라흐만을 "쿠라이시의 매"라고 불렀다고 한다.

765년 카롤루스 왕조 최초의 군주 피핀 3세가 사절을 보냈다. 그는 사절단을 융숭하게 대접했고, 768년 자신의 사절단을 프랑스로 보냈다. 피핀 3세는 아키텐에서 무슬림 사절단을 만나 선물을 교환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사실을 근거로 아바스 왕조가 이 시기에 카롤루스 왕조와 동맹을 맺었다고 주장한다.

알 만수르는 당초 칼리파로 즉위할 때 이복형 이브라힘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이사 이븐 무사를 후계자로 삼기로 약속했다. 이사 이븐 무사는 763년 이브라힘의 반란 진압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라크 서남부에 궁전을 세우는 등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알 만수르는 아들 무함마드 알 마흐디를 후계자로 세울 계획을 품고, 파르스 총독 할리드를 시켜 이사를 뒷조사하게 했다. 할리드는 부정부패를 저지른 혐의로 이사를 고발했고, 이사는 무함마드 알 마흐디에게 쿠파 총독 자리를 내놓고 은거했다. 할리드는 이 공적으로 중용받았고, 그의 바르마크 가문은 약 40여년간 권세를 누리다 하룬 알 라시드에게 숙청되었다.

775년 10월 6일, 만수르는 메카로 순례를 가다가 바니 아미르 정원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그는 우마이야 칼리파들의 무덤들을 파헤친 일이 자신에게도 닥칠 것을 우려해 수백 개의 가짜 무덤을 조성해서 진짜 무덤을 숨기게 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죽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한 순간의 꿈을 이루기 위해 삶을 희생했다!"


사후 아들 무함마드 알 마흐디가 새 칼리파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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