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세 타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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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작품 목록
4.1. 작사
4.2. 캐릭터 디자인
5. 수상 경력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やなせたかし[1]

1919년 2월 6일 ~ 2013년 10월 13일 (향년 94세), 도쿄도 키타구에서 태어나, 고치현에서 자랐다.

일본만화가이자 그림책 작가로 날아라 호빵맨의 원작자로 유명하다.


2. 생애[편집]


아사히 신문 도쿄 지부에서 일했던 아버지가 1924년 근무지에서 객사하여 야나세 본인은 큰아버지에게 거두어져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를 졸업했을 무렵 '소년 클럽'에 흥미를 가져 자주 읽으면서 자연스레 그림 분야에 관심을 얻었고, 관립 구제 도쿄 고등 공예 학교 도안과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1941년 야전 중포병으로 징병되어 중일전쟁에 참전하였는데, 을종 간부 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육군 군조로 임명되었고 주로 암호 해독 임무와 선무 공작으로 임하였다.[2] 근무한 지역이 전투가 드문 곳이었는지 야나세 자신은 한 번도 적을 향해 총을 쏜 적은 없었으나 군량 부족을 자주 겪었고, 남동생의 전사 소식[3]을 접하면서 전쟁에 대해 반대하는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굶어죽을 정도로 엄청난 기아를 겪어 음식과 배부름의 소중함을 알았다고 하며 이때의 경험이 날아라 호빵맨에도 들어 있다.

종전 후엔 고치 신문에 입사해 기자로 일할 때 훗날 자신의 아내가 되는 여성을 만났고, 1947년 도쿄로 이동해 미쓰코시로 입사해 선전부의 그래픽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동시에, 부업으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만화가 그룹 '독립 만화파'에 가입했지만 곧 '만화 집단'으로 옮겼고, 1953년 3월 미쓰코시를 퇴직하여 만화가로 전업하였다.[4] 허나 이 시기 데즈카 오사무 등의 만화들이 전국적인 인기를 얻은 상황 속에 '만화 집단'의 만화 발표 수는 줄어가고 있었으며, 1964년 NHK의 '만화 학교'에 강사로 고정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무대 미술 제작과 방송 작가 등 다른 업무를 맡아 업계 내에선 困ったときのやなせさん, 즉 '곤란할 때 찾게 되는 야나세 씨'로 불리기도 했었다.[5]

얼마 후 만화 집단의 전시회에서 산리오의 사장 츠지 신타로와의 만남을 계기로 산리오와의 인연을 쌓아가게 된다. 1966년 출판된 시집 "사랑 노래"가 대히트를 치면서부터 조금씩 그림책 만화를 그리기 시작해 1969년엔 처음으로 호빵맨을 연재하였다. 1973년 잡지 '시와 동화'의 편집장을 맡는 동시에 '만화가의 그림책 모임'을 시작하면서 시인·그림책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고, 호빵맨을 어린이용으로 각색시켜 발표했으나, 평론가·학부모·교육 관계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호빵맨은 1988년 날아라 호빵맨으로 애니메이션화되면서 닛테레의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해 캐릭터 상품 등도 폭발적으로 팔리는 등 야나세의 인지도를 높여주는 데 기여하였다. 1990년대부터 시상식들에서 초청받은 모습도 여럿 있었고, 1996년 7월 고향에 야나세 타카시 기념관 '호빵맨 박물관'이 개관하는 등 관청이나 지방자치단체, 공공 및 산업 단체 등에서도 인지도가 널리 알려져 마스코트로 캐릭터 디자인을 요구받기도 했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난다 난다 니얀다[6]가 애니화되던 2000년에는 일본 만화가 협회의 이사장에 취임해 자신이 지목했던 문제점인 '스토리 만화 이전의 만화가와 이후 만화가의 수입 격차를 어떻게 해소하느냐'에 관심을 가졌고, 자신이 경영한 회사의 빌딩에 일본 만화가 협회를 무임대로 입주시켰다. 이 무렵부터 '만화가라면 행동이나 언동도 만화처럼 재미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코러스에 선글라스, 카우보이 부츠란 옷차림으로 나타나는 등 일본 만화가 협회 회의에서 기존 만화가들의 이미지를 깨는 방식으로 연설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유쾌한 면모와는 별개로 야나세는 1980년대 중기부터 신장결석·백내장·심장질환·췌장염·탈장·녹내장·장폐색·신장암·방광암·폐렴 등의 수많은 질병에 시달렸다. 2011년 봄 시야가 흐릿해진 걸 이유로 만화가에서 은퇴할 것을 생각하고 마지막 무대로 생전에 장례식을 기획하여, 친구들한테 작별 문장을 써달라고 부탁해 위패도 마련했으나 개최 직전에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해 무산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빵맨 행진곡'이 사회 부흥의 테마곡으로 취급되고, 아이들이 호빵맨을 보며 웃음을 되찾았단 소식들을 접하면서 야나세 본인이 직접 피해 지역을 찾아가 호빵맨 포스터를 제작해 피해 주민들한테 전달해주거나, 기적의 一本松를 테마로 한 CD를 자체 제작하기도 했다.

2012년 6월 열린 일본 만화가 협회상 시상식에선 회장으로 취임해,[7] 명랑한 성격을 유지하면서 TV 인터뷰와 애니메이션 무대 인사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곧 나는 죽을 것이라고 웃기도 했다. 이듬해 7월 개봉한 호빵맨 극장판의 첫날 무대 인사에선 "어떻게든 지금은 죽지 않고 있는데 곧 죽는구나. 병원에서 이후 2~3주밖에 살 수 없단 말을 들었고, 죽어야 할 때 죽을 거야. 웃으면서 죽을 거야. 죽을 때까지 열심히 할 거야"라고 웃음 지으며 말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병원에 입원해 그해 10월 13일 오전 3시 8분에 심부전으로 도쿄도 분쿄구의 준텐도대학 의학부 부속 준텐도 의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4년 전 아카츠카 후지오가 사망한 장소와 동일한 장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소식은 다음날인 14일에 알려졌으며, 고치 신문은 호외 기사를 Web에 게재했다.

장례식은 야나세 자신의 뜻에 따라 친척들만으로 끝마치고 내년에 추모 모임을 열기로 해 2014년 2월 6일 도쿄도 신주쿠구에서 '감사합니다! 야나세 타카시 선생님 95세 축하합니다!'로 타이틀로 진행되었다. 치바 테츠야를 비롯한 일본 만화가 협회 소속 만화가들과 호빵맨 성우인 토다 케이코를 비롯한 여러 성우들 또한 참여해 그를 추모하였다. 사후 야나세 타카시 대전이 출간되었는데, 제작 자체는 몇 년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고 한다. 무덤은 고향인 고치현에 있는 '야나세 타카시 공원'에 마련되어 있는데, 무덤 옆에 호빵맨과 세균맨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3. 여담[편집]




  • 아침 식사는 빵을 주로 섭취하는 등 다이어트에 철저했는데, 본인 왈론 "은 배가 더부룩하기 때문에 반드시 을 먹고 있다"고 한다. 점심은 거의 류를 먹었고, 저녁은 반찬을 많이 소비하여 밥은 소량밖에 먹지 않았다고.

  • 애정이 갔던 캐릭터로는 호빵맨 말고도 카레빵맨, 롤초밥, 햄버거맨, 볶음국수빵맨, 대파맨이있다.

  • 만화가 레이몽 페네를 마음의 스승으로 에세이에서 말하고 있어, 페네 미술관이 개관했을 때 일러스트와 코멘트를 보내기도 했다.

  • 데즈카 오사무와는 말년까지 친분을 유지했으며, 2009년 에도 - 도쿄 박물관에서 개최 된 데즈카 오사무 전에서 "내가 배운 것은 데즈카 오사무의 삶에 대한 성실함이다. 재능은 노력으로도 무척 이길 수 없지만 성실하다는 것은 다소 그 마음만 먹으면 가능하다. 물론 한참 뒤떨어져도 약간은 접근한다. 데즈카 오사무 씨는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의 스승이다."란 코멘트를 남겼다.

  • 캐릭터를 만드는 데 열정이 가득하다. 특히, 메론빵소녀의 캐릭터 디자인을 위해 메론빵을 2년간 먹었을 정도.

  • 죽음을 앞둔 말년에 자신조차 놀랄 정도의 새로운 이야기를 구상해냈다고 하며 이것이 훗날 애니메이션 호빵맨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다만 자신은 그것의 완성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죽는 것이 억울하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20년 4월 5일자 '언빌리버블 스토리'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주 내용은 위에서도 언급된 날아라 호빵맨이 만들어진 계기.

  • 일본에서 드문 기독교 신자다.# 호빵맨이 배고픈 친구들에게 머리에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고, 새 빵 머리를 얻으면 다시 힘이 돌아오는 등의 호빵맨에 대한 묘사가 예수 그리스도성체성사 등의 요소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다고 평가하는 팬들도 해외에는 간혹 보인다.#

  • 고치현 카미시 카호쿠쵸(香北町)에서 자랐다. 카호쿠쵸에는 야나세 타카시 기념관 호빵맨 뮤지엄이라는 이름의 시립()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 그의 어록을 엮은 《やなせたかし 明日をひらく言葉, 야나세 타카시의 내일을 여는 말》(2012)라는 책이 있는데 한국에서도 2019년에 《나는 마흔에도 우왕좌왕했다》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 2025년 NHK에서 방송 예정인 연속 TV 소설 앙팡에서 야나세 타카시 부부의 일대기를 다룰 예정이다.##

4. 작품 목록[편집]


애니화된 작품은 볼드체 표기.

  • 12개의 진주(十二の真珠) (1969)
  • 날아라 호빵맨(それいけ! アンパンマン) (1969(원안)[8]/1973~2011/1988~(TVA))
  • 주먹밥맨(おむすびまん)[9]
  • 머나먼 자장가/상냥한 사자(やさしいライオン) (1969/1970(애니메이션 영화)/1982(그림책))[10]
  • 아가짱만(あかちゃんまん)(1982)[11]
  • 하얀 말
  • 치린의 방울(チリンのすず)[12] (1978/1978(애니메이션 영화))[13]
  • 굿바이 점보
  • 난다 난다 니얀다(ニャニがニャンだニャンダーかめん) (1996~2000(원안)[14]/2000~2001/2000~2001(TVA))


4.1. 작사[편집]




4.2. 캐릭터 디자인[편집]




5. 수상 경력[편집]


  • 1967년 주간 아사히 만화상
  • 1969년 다이토 노부오상
  • 1989년 제19회 일본 동요상 특별상
  • 1990년 일본 만화가 협회상 대상
  • 1991년 이사오 사 등 서 보장
  • 1994년 고치현 가미 카운티 香北마치 명예 읍민
  • 1995년 일본 만화가 협회 문교부 대신상
  • 2000년 일본 동요 협회 공로상
  • 2000년 일본 아동 문학 작가 협회 아동 문화 공로상
  • 2001년 제31회 일본 동요
  • 2002년 고치현 특별 권성 공로자
  • 2003년 제50회 교통 문화상 국토 교통 대신 표창
  • 2004년 신주쿠 구 명예 구민
  • 2008년 도쿄 국제 아니메 페어 2008 제4회 공로상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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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명은 柳瀬 嵩. 필명은 본명을 히라가나로 풀어 쓴 것을 사용한 것이다.[2] 이 때 그림 연극을 만들어 현지 주민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고 한다.[3] 하필 가이텐 승조원으로 징집되었다고 한다.[4] 전업을 결정한 계기는 만화에서 얻는 수입이 미쓰코시의 월급보다 3배 가량 웃돌 것이라 예상해서 독립을 결심했다고 한다.[5] 야나세 본인은 '그 시절의 나를 아는 사람은 나를 만화가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상당히 있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6] 야나세 타카시의 작품 중에서는 호빵맨 다음으로 유명하다. 2004년 재능방송에서 방영. 항목 참조.[7] 후임 이사장은 치바 테츠야가 맡았다.[8] 원안이 《12개의 진주》에 수록된 작품 중 하나이다. 문서 참조.[9] 이후 주인공 주먹밥맨은 날아라 호빵맨 TV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한다.[10] 개별 문서가 생긴 두 작품만큼은 아니지만 꽤나 뭉클하면서도 가슴 아픈 이야기 덕분에 일본에서도 꽤 인지도가 있는 편. 해당 작품의 애니화를 데즈카 오사무가 담당했는데, 이것을 계기로 둘이 친해지게 된 듯하다.[11] 여기에 나온 주인공 베이비맨은 날아라 호빵맨에 등장인물로 투입된다.[12] 영화판에서는 すず가 동일 발음의 鈴으로 바뀌었다. すず는 방울(鈴)을 히라가나로 쓴 것.[13] 이 작품은 야나세 타카시의 다른 작품과는 다르게 어둡고 암울한 스토리로 유명하다. 동년에 카미야 아키라, 가토 세이조, 마츠시마 미노리 등이 출연한 애니메이션 영화로 나왔으며, 1983년에 미국에서 개봉하였다.[14] 원안은 신문만화였으며 당시의 이름은 「ピョンピョンおだすけかめん」(깡총깡총 도와가면)이었다. 특이하게도 니얀다 애니판 방영이 시작된 이후에 완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