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시타 도모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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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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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
大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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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陸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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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海軍

야마모토 곤노효에 | 스즈키 간타로 | 사이토 마코토 | 나구모 주이치 | 요나이 미쓰마사 | 이노우에 시게요시 | 오카다 게이스케 | 시마다 시게타로
중장
中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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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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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다몬 | 오자와 지사부로 | 우가키 마토메 | 모리 쿠니조 | 기무라 마사토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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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 육군 제14방면군 지휘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山下奉文 | Yamashita Tomoyuk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28px-YamashitaTomoyuki.jpg

출생
1885년 11월 8일
일본 제국 고치현 오토요정
(現 일본 고치현 나가오카군 오토요정)
사망
1946년 2월 23일 (항년 60세)
필리핀 자치령 라구나주 로스 바뇨스
복무
일본제국 육군
최종 계급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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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참전
중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
싱가포르 전투
근무
제4사단
제25사단
제1사단
제14방면군
서훈 내역
욱일장
금치훈장
왕관장
오스트리아 공화국 대명예은성장
복무 기간
1905년 ~ 1945년
학력
육군대학교 (28기)
별명
말레이의 호랑이 (マレーの虎)


1. 개요
2. 행적
3. 최후와 평가
4. 어록
5. 여담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육군장군(최종 계급 대장). 이름을 도모유키라고 풀어읽기도 하지만 호분이라고 그대로 읽기도 한다. 신죠샤의 결정판 도큐먼트 태평양전쟁[1]에서는 야마시타 호분으로 읽었다.


2. 행적[편집]


코우치현 나가오카군 오오스기촌(현 오오토요 쵸) 출신이며 코우치현 해남중학교, 히로시마 육군유년학교, 육군중앙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18기), 육군대학교(28기)를 졸업후 스위스, 독일로 유학한다. 귀국후에는 육군성 군사과장, 군사조사부장등을 역임했다.

그는 싱가포르 전투에서 기동전으로 대활약을 펼치며[2] 말레이의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때 싱가포르를 함락한 이후 영국군 총사령관이었던 아서 퍼시벌 장군에게 '예스냐? 노냐?'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해졌지만, 실제로는 와전된 보도로, 정작 야마시타 본인이나 그 협상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그런 발언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하지만 "항복할 거야, 안 할 거야!!"라고 발언했다는 증언은 있다. Thames Television에서 만든 World at War, Bazai 편을 보면 협상에 참여했던 일본군 장교의 그 때 상황에 대한 인터뷰가 나온다. 야마시타와 퍼시벌이 포드 공장에서 만나서 협상을 하는데 퍼시벌 장군이 항복을 언급하지 않고 딴소리만 하며 시간을 끌자 인내심이 바닥난 야미시타가 책상을 쾅 치면서 '항복할 거냐 안 할 거냐' 라고 호통을 쳤고, 퍼시벌이 다시 대답을 돌리자 같은 발언을 반복하며 항복하지 않으면 야간공격을 감행하겠다고 협박한 끝에 퍼시벌이 항복 의사를 밝혔다는 인터뷰가 나온다.

후에 밝혀진 바로는 다음과 같다. 1942년 2월 15일 일본군 제25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와 영국군 사령관 아서 퍼시벌이 포드 자동차 조립공장 사무실에서 항복 협상이 시작되었다. 퍼시벌은 이런저런 조건을 제시했는데, 그 가운데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영국인 보호를 위해 영국군에게 치안을 맡겨달라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때 통역을 맡은 통역관이 기초적인 군사용어도 모르는 데다 레벨이 너무 낮아 양측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유명한 '예스까 노까'라는 말은 바로 이때 나온 말인데, 알려진 것처럼 야마시타가 퍼시벌에게 강압적으로 대놓고 윽박지른 게 아니고, 버벅거리는 통역에게 "복잡하게 말하지 말고 항복할 건지 아닌지 '예스까 노까'로 간단히 물어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장면을 창밖에서 취재하고 있던 기자가 각색(脚色)과 분식(粉飾)을 가미해, "야마시타, 퍼시벌에게 예스까 노까를 요구!" 하는 식으로 타전한 것이 야마시타가 퍼시벌에게 강압적으로 윽박지른 것처럼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결과론이지만 통역관과 기자가 '예스까 노까'라는 말을 만들어낸 공로자라고 할 수 있다.

야마시타가 후일 회견했던 일을 친구에게 말하면서 '예스까 노까'와 관련하여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의 '예스까 노까'를 창밖에서 본 사람 가운데에는 야마시타가 승리에 도취되어 으스대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오만한 태도로 비쳤을 수도 있다. 그렇게 봐도 나로선 어쩔 수 없지만, 신문에 '예스까 노까'로 집요하게 쓴 것에 대해서는 두 손 들었다. 지금까지 이것과 관련하여 단 한 번도 변명한 적은 없지만, 진실을 알릴 수 없는 것은 씁쓸하다."


평소에 일본군 현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다녔지만, 황도파 출신이라는 이유로 통제파인 도조 히데키에게 견제를 받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2.26 사건의 주동자들에 대해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히로히토 덴노도 야마시타를 꺼려서 싱가포르영웅임에도 불구하고 덴노 접견조차 하지 못하고 한동안 만주로 좌천되어[3] 활약할 기회가 없었다.

이후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만주에서 다시 불려와 필리핀에서 방어전을 지휘하게 되었으나 이미 패전이 거의 확실시된 상태라 그의 능력으로도 어떻게 수습할 도리가 없었다. 최초 방침이었던 루손 결전(혹은 지연전)도 대만 해협 항공전에서 일본이 거짓말로 승리했다고 하자[4] 대본영이 계획을 변경하는 바람에 휘하 병력이 레이테 섬 전투에 투입되면서 무산되었다. 병력의 태반은 수송 과정에서 수장당하거나 섬에 고립된 채 아사하는 등 제대로 된 전투조차 해보지 못하고 괴멸했다. 투입병력 8만 1천명 중에서 1천명 만이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필리핀 방어전에서는 야마시타는 마닐라를 무방비도시로 선언하고 잔존부대를 루손 북부의 산악지대로 이동시켜서 지연전을 펼치는 전략을 수립했으나, 당시 마닐라에 남아있던 해군소장 이와부치 산지 제독과 그가 이끌던 해군 육전대[5] 병력이 이 명령을 거부하였다.[6] 해군 육전대는 독단적으로 시가전에 돌입하였고, 그 와중에서 수많은 필리핀인들이 살해되며 이를 마닐라 대학살이라고 부른다.[7] 학살과 시가전으로 인해 사망한 민간인만 10만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8]

결국 해군 육전대는 마닐라 방어에 실패하였다. 해군 육전대 약 16,000여명이 옥쇄했으며 방어측이 더 유리한 시가전[9][10]에서 두개 사단 병력의 미군에게 약 1,000명의 전사자와 3,000명 수준의 부상자의 피해를 입히는데 그쳤다. 이에 반해 일본군은 미군에 포로로 잡힌 인원까지 합쳐서 300명 정도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당시 방어하는 지형적으로는 유리했겠지만 병력, 장비 등 모든 것이 열세였으며 당장 식량마저 부족해서[11] 아사하는 병사가 속출할 정도였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당시 마닐라에서 민간인 학살이 벌어지는 와중에 일본군은 일본 등 추축국에 우호적이었던 중립국 스페인의 영사관에 의도적으로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대검으로 찔러 죽여 50여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당연히 스페인은 1945년 4월 일본과 외교관계를 단절해버렸다.

그래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7개월에 가깝게 맥아더의 부대를 잡아두는데는 성공했다.[12] 결국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속에서 부하들의 할복 권유에 내가 여기서 죽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책임을 진다고 하면서 할복하지 않고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결국 이후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하게 되면서 그의 판단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또는 "천황으로부터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다" 라고도 한다.


3. 최후와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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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군사적인 능력을 지녔고,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동시에 뼛속까지 제국주의 사상과 천황 제일 사상에 젖어있던 군국주의적 인물이었다. 또한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하들을 가혹하게 다뤘고, 이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인 부하들은 민간인, 포로 학살을 저질렀다. 부하들이 저지르는 전쟁범죄를 방관 내지 장려한 죄로 후일 B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처형된다. 관련기사: 범죄로 얼룩진 '결전'... 교수형 전 대장의 자책

그는 어느 정도 독일식의 포로 자치를 생각했다고 하지만, 츠지 마사노부의 독단 행동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실제로는 포로 관리를 허술하게 했다. 당연히 이런 행위는 점령지의 국민들이 일본군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덕분에 덤터기를 쓰고 희생양으로 내몰린 인물이 홍사익.[13]

야마시타는 마닐라 전범재판에 B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그는 츠지 마사노부가 독단적으로 결행한 싱가포르에서의 대학살과 역시 해군 육전대가 독단적으로 결행한 마닐라 대학살의 책임 전범으로 기소되었고, 유죄가 인정되어 결국 사형당했다.

야마시타는 일본군 군인답게 최후까지 군복을 입은 채로 총살형을 받길 원했지만, 미국 정부는 일본 군인 전범들을 전혀 군인으로 대우 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14]야마시타는 하다못해 교수형으로 하더라도 군복을 입은 채로 교수형이 집행되기를 원했지만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결국 그는 다른 일본 군인 전범들과 마찬가지로 죄수복을 입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죽기 전 마지막 유언으로 "나는 도조 새끼에게 속았다!!" 라는 절규와 도조에 대한 욕설을 남겼다고 한다. 처형된 이후, 그는 다른 B, C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그것 말고도 야마시타가 처형되기 40분 전에 남긴 유언이 있는데,

군부의 압력으로 인해 겪었지만 모든 곤궁과 결핍에 견딘 10년 동안의 전쟁 체험은 반드시 여러분께 무언가를 줄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일본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우리 같은 과거의 유물인 군인, 혹은 아첨과 추종을 하는 절조 없는 정치가, 침략전쟁에 합리적 기초를 부여한 어용학자 따위를 결코 참가시켜서는 안 됩니다.


정리하자면 전쟁중에 그가 했던 일들에 대한 자책과 자유와 평화를 추구하는 새로운 일본에 대한 이상이다.

크게 나누면 4개로,

1은 일본인이 논리적 판단을 기초로한 개인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

2는 과학교육의 진흥이고,

3은 여자의 교육,

4는 다음 세대의 인간교육 에서의 엄마로서의 책임 등이다.


동시기 나치 독일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상당히 비슷한 인물. 일본 제국의 만슈타인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일단 만슈타인이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영.프군과 소련군을 박살낸 것처럼,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영, 미군을 상대로 뛰어난 전과를 올렸고, 그와 동시에 자국에서는 영웅으로 추앙받고 적국에서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도모유키가 철저한 군국주의적 인물이었듯이, 만슈타인 역시 나치즘을 긍정한 인물이었으며, 둘 다 부정하기 힘든 전범임은 확실히다. 그러나 야마시타는 부하의 잘못까지 자신이 책임자로서 총대를 메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반면, 만슈타인은 끝까지 잘못을 부인하며, 종전 이후에도 국가유공자 취급받으며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점에서 야마시타는 만슈타인과는 달리 최소한의 양심은 있었다는 차이가 있다.[15]


4. 어록[편집]


軍事は今や凶器であり、大きな罪悪である。

군사는 바야흐로 흉기이며, 큰 죄악이다.


それは責任回避だと考えられる。 東条が自殺を試みたと言ったが、それは責任回避であり、天皇に対する不忠だ。 私は天皇から自殺するよう命令を受けたことがない。

그것은 책임회피라고 생각된다. 도조가 자살을 시도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책임회피이자, 천황에 대한 불충이다. 나는 천황으로부터 자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


私の命一つで部下たち皆を助けられるなら犠牲することができる。

나의 목숨 하나로 부하들 모두를 살릴 수 있다면 희생할 수 있다.


指揮官の私が責任がないとすれば誰に責任があるのか? 私は絶対に卑怯にも部下に責任を押しつけることはできない。

지휘관인 내가 책임이 없다고 하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나는 절대로 비겁하게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 없다.


私は知らなかったしかし、私に責任が無いとは言えない。

나는 몰랐다, 그러나 나에게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5. 여담[편집]


  • 츠지 마사노부가 싱가포르 전투 당시 그 밑에서 참모로 일했다. 그러나 야마시타는 마사노부에 대해 큰 일을 맡겨서는 안된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 인간이 후에 엄청난 행위를 한 것을 보면 야마시타에게는 사람을 보는 안목은 있었던거 같다. 하지만 그런 야마시타 자신도 츠지의 월권과 학살을 통제하지 못한 데다, 도조 히데키는 그런 평가를 무시하고 츠지 마사노부를 중용했고, 그는 그들에게 파멸을 불러온다.[16]

  • 베트남 전쟁 당시에 미라이 학살이 논의가 되자, 미국에서는 현장 지휘자였던 켈리 육군 소위만 처벌하고 끝낼 게 아니라 야마시타 장군의 판례를 들어 웨스트모어랜드도 기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17]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국은 월맹한테 항복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월맹에 굴복했다면 또 모르지만.

  • 이외에도 야마시타는 점령지에서 수탈한 재산과 본토에서 받은 군자금을 몰래 은닉해서 필리핀 모처에 매장해 두었다는, 소위 "야마시타 골드"란 도시전설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심지어 조선판 야마시타 골드도 있다. 소위 황금백합(金の百合)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떠돌아다니는 부산 문현동 일대에 있다는 일본 해군 기지의 존재다. 다만 확실한 검증이 있지 않고 주창자가 특정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인 것을 보면 전쟁사에 기반한 음모론일 가능성도 있다. 위의 '조선판 야마시타 골드' 도시전설을 개작해서 갖다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항목 참조.

  • 야마시타 골드 도시전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미국과 일본이 이 '야마시타 골드'를 거대 규모의 지하자금으로 전환시켜 나누어가졌고 이 자금을 미국이 42개국 176개 계좌에 예치하여 사용하는 대신 일본은 전범책임에서 대거 벗어나거나 묵과받는 혜택을 누렸고 나아가 소련 및 중공에 맞선 태평양 방위선에 일본을 포함시켜 현재 자민당 정권을 이루게 했다는, 미국과 일본과의 야합을 다룬 이른바 '블랙 이글 트러스트' 음모론이 있다. (출처) 스털링 페기 시그레이브 저 / 김현구 번역 / 옹기장이 출간 '야마시타 골드', 2003


  • 인도네시아의 스릴러 영화인 데드마인에서도 도시전설인 야마시타 골드와 함께 언급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731 부대슈퍼솔져 실험을 받아 25사단 병력과 함께 봉인되었다가 풀려난다.

  • 야마시타의 신장은 175cm였다. 부인과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부하들의 자녀들이나 이웃의 어린이들을 꽤나 예뻐했다고 한다. 다만 처음보는 어린이들은 야마시타의 인상때문에 상당히 무서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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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다큐멘터리는 한국 국내에서는 NHK 제작판과 신죠샤 제작판이 섞여 돌아다니고 있다. 원래는 NHK 스페셜 시리즈의 일환으로 총6집이 제작되었는데, CP인 야마모토 하지메의 성향이 반영되어 반전주의적이고 구 일본군에 비판적 입장이었다. 결정판 도큐먼트 태평양전쟁은 이후 우익 성향인 신죠샤(후지TV와 동일 계열이고, 소위 '새역사교과서'를 찍어낸 곳도 이곳이다)가 따로 7부작으로 제작한 것이다.[2] 소위 일본판 전격전이라고 한다.[3] 그것도 싱가포르에서 만주의 벽지로 직행하도록 강요받다시피 했다. 사실상 옷을 벗으라는 압박인 셈.[4] 실제로는 일본군의 참패였다. 대만 항공전에서 미군의 피해는 군함들의 손상과 장병들의 피로도 밖에 없지만, 일본군은 3일만에 500대 이상의 비행기 자체가 사라져서 이후 필리핀 전역과 오키나와 전투에 영향을 전혀 끼치지 못했다. 그리고 대만 항공전의 미군측 지휘관인 제 3 함대 사령관 윌리엄 홀시 제독이 태평양 함대에 그 희대의 드립성 보고를 전문으로 보낸 항공전이기도 하다.[5] 한국식으로 말하면 해병대[6] 당시 일본군에는 육해군을 통합한 지휘 계통이 부재하였기 때문. 따라서 한 방어전에서 육군 측 지휘관과 해군 측 지휘관이 동시에 존재하였고, 이 둘의 권한은 동등하였다. 육군과 해군과의 관계가 얼마나 험악했는지 증명되는 사건이다. 그나마 육해군 공조가 잘 된 작전이 미국에게는 악몽을 가져다준 오키나와 전투였는데, 사실 해군 측이 상당부분 군령권을 포기하고 육군 측이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 그나마도 종결 국면에 유격전을 벌이자는 제안을 해군이 해군 보유 요새에서 옥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육군은 이 제안을 지금까지 협조해준 해군에 대한 감사로 수락하였다. 그런데 마닐라에서 벌어진 저 사건은 이와부치 산지 해군 '소장'이 육군 '대장'의 명령을 씹은 거다. 아무리 자기가 속한 집단이 먼저이더라도 저러면 영락없는 하극상이다.[7] 태평양 전쟁 최후의 전투인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해군 육전대는 후방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방어진에서 최후까지 저항한다. 오키나와에서 그렇게 행동한 것은, 명예로운 죽음을 바라는 것을 제외하면, 시간 끌기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또 이 때에는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 부대 이동 자체가 힘든 상태기도 했다.[8] 그런데 이 학살에서도 학살에 참여하지 않고 대민지원을 하며 민간인을 지킨 부대도 있다. 도미나가 교지 휘하의 육군 제4항공군이 그들. 특히 도미나가 교지는 자기 담당 구역에 온 다른 군에게 "우리와 싸우자는 거냐?"라며 학살을 대놓고 막았다.[9]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방어측이 제대로 된 전략을 세울 경우는 병력차이와 무장의 차이를 무시하고 거의 교환비가 1대1이 나올 수도 있다. 실례를 들자면 1차 걸프전에서 미군 본대가 만일 바그다드 시가전을 벌일 경우에는 이전 모든 전투의 사상자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다.[10] 현대 미군 역시 시가전 상황에서 건물 안에 있는 적병 1명을 안전하게 제압하기 위해서는 최소 5명이 필요하다고 판단, 건물 확보팀을 운용한다.[11] 섬이 미 해군에 의해 봉쇄당한 상황이라 병력보충 및 보급 등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12] 교환비 자체는 사상자비가 미군1:일본군40으로 처참하지만 이미 화력에서 차이가 많이 났고 결정적으로 필리핀 주둔군은 일본제국이 재해권, 제공권을 잃는 바람에 제대로 된 지원을 못 받고 싸워야 했기에 사망자의 대다수가 굶주림, 질병 등으로 저 세상 간 비전투 사망자였다. 순수 교환비를 따져보면 1:3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나름 분투했다.[13] 이때 홍사익은 남방총군의 병참감으로 종군했다. 그는 실제로도 전적으로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군의 후방지원을 책임졌다. 그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야마시타가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 주둔한 20사단 예하 연대에서 근무할 때 홍사익을 만나서 친교를 맺은 인연으로 그 자리에 부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인사는 야마시타가 육군성에다가 "홍사익을 보내주지 않으면 나 제대로 못 싸우겠다!"라는 식으로 나온 것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14] 이는 미국에서 독소전쟁의 소련처럼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때문에 지옥같은 경험을 해서 그렇다. 일본군도 미국에 의해 해산 상태이기 때문에 이들을 군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15] 다만 만슈타인도 비교적으로 잘 산 것이지 이 사람도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될 뻔했다.그나마 4년형으로 감면되어 잘 살 수 있었던 것이다.[16] 물론 츠지 마사노부를 쓰지 않았어도 파멸은 왔을 것이다.[17] 야마시타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아닌데도 관리 소홀로 인해 사형이 정당화되었다. 웨스트모어랜드 역시 학살은 그 휘하 소대장인 켈리가 저질렀지만 어쨌든 상관으로써 관리 책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