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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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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과 창작물 내 고유명사에 대한 내용은 야마토(동음이의어) 문서
야마토(大和 ) 왕권[3] , 야마토 정권[4] 또는 야마토 조정은 율령제의 정착 이전 일본 열도에 존재했던 고대 국가로, 현 일본의 직계 전신인 국가이다. 이름인 '야마토'의 경우 한자의 수입과 함께 '왜(倭)자로 쓰고 일본 고유어(和語)로 야마토(やまと)라 읽은 것이며, 이후 해당 독음은 '왜(倭)'에서 '화(和)'자로까지 확장되었다. 나라 시대 이후에는 야마토를 일본(日本) 또는 대화(大和)로 표기했다.
요컨대, 일본은 7세기 후반에서 701년 사이에 '니혼'(日本, 일본)으로 국호를 칭하기까지는 '야마토'였다. 동시대 중국 측 기록에서는 왜국(倭國 )이라는 표기로 등장하기도 한다. '왜국'으로 표기할 경우 중국어로는 워궈, 일본어로는 음독하여 와코쿠라 읽는다. 일본 내에서 '일본'이라는 국호가 정착한 뒤에 한반도 등 주변 국가는 정치 상황과 외교관계에 따라 '왜국'이라는 표기와 '일본국'이라는 표기를 혼용했다.
야마토의 한자 표기는 특이한데, '大和'는 일반적인 훈독이나 음독 방법으로는 야마토라고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본래 일본을 가리키던 고유어 표현인 やまと(야마토)를 '倭'(왜나라 왜)의 훈으로 읽은 데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倭를, 이와 음독이 'わ'(와)로 동일한 '和'(화할 화)로 순화하고, 앞에 '大'자를 붙인 大和를 정식 한자 국명으로 했다. 이를 읽을 때는 고유어 '야마토'를 계속 취한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 大和라는 표기를 음독하여 'だいわ'(다이와)라고 읽는 경우가 많다. 다이와 증권, 다이와 백화점, 다이와 중공업 등이 그 예이다.[5]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조선에도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조선인의 일본군 지원을 독려하던 선동 단체인 "야마토동맹"이 있었고, 윤치호와 박춘금 등이 이사로 활동했다. 해방 직후 신문에는 "대화동맹"이라고 나오지만, 없어지고 나서 야마토동맹을 조선어식으로 부른 것일 뿐, 당시 공식 호칭은 야마토동맹이었다.
현재 일본 국내 학자들에게 지지받는 유력한 학설은 원래 '야마토'라 불리던 지역이 후지산이 자리한 고원 지대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했다고 하여[6]山門 또는 山戶 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일부 학자들은 '산이 있는 자리'라는 뜻인 山跡(やまあと)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을 지지한다. 대체적으로 학자들은 야마토의 '야마'가 산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사실에는 동의하나 뒤의 '토'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에 대해 의견이 갈린다.
야마토가 '야마타이'(邪馬台)라는 고대 국가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야마타이의 '야마'가 산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위 가설과 맥락이 비슷하다. 그리고 소수설로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들이 일본에 상륙하면서 일본 열도를 가리켜 '염터'[7] 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 기원년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많으나 대개 야요이 시대 후기인 2세기경에서 고훈 시대인 3세기 중반으로 잡는다[8] . 《삼국지》 <위지> 동이전, 《삼국사기》 등에 여왕 히미코(? - 247?)가 다스리는 야마타이국이라는 지명이 나오며, 이는 기록상 교차검증이 가능한 일본 최초의 국가이다.
'야마타이국'과 '야마토 정권'의 지배 세력이 동계(同系)였는가에 대해서도 이견이 존재하나, 적어도 고훈 시대 이후 야요이계의 어느 세력이 중앙집권적인 국가로서의 기틀을 잡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현대 일본 역사책에서는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합쳐서 '야마토 시대'(大和時代, 250~710년) 혹은 '야마토 정권 확립 시대'로 분류하기도 한다.
어쨌든 처음 야마토는 그냥 일개 연맹국가였지만 백제, 가야와 뱃길을 통해 교류하여 정치적으로 밀접한 협력 관계를 맺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문자, 철기, 건축, 농사법 등 각종 선진문물들을 신속하게 도입해나가면서 타 부족국가들과 연맹 국가들이 넘볼 수 없을 만큼 강성해졌고, 이를 토대로 주부나 시코쿠, 산인, 간토 등 다른 지역에 존재했던 부족국가와 연맹국가들을 차례로 복속시켜 나가며 큐슈 서북부와 간토 지역에 이르는 영역을 통합시킬 수 있었다. 또한 백제, 가야와 같이 신라를 여러 번 공격했지만,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패배했고, 4년 뒤 이들과 같이 고구려의 대방과 평양을 공격했으나 또 패배했다.
'일본'으로 국명을 개칭했을 무렵의 야마토가 차지하고 있었던 영역은 현대의 일본보다 훨씬 좁았다. 규슈 남부는 하야토라고 해서 야마토와 별개의 연맹국가들이 형성되어 있었고, 간토 이북 지역의 경우에는 아이누계 종족들이 부족국가-연맹국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9] 이들을 8세기~11세기경을 거쳐 정복하고, 근대에 류큐와 홋카이도를 편입시킨 것이 현재 일본의 영역이다.
야마토 정권의 시작은 시기뿐만 아니라 장소도 논란이 된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도쿄대학과 규슈대학 (및 규슈 소재 대학)이 규슈설을 지지하고, 교토대학 (및 나라 주변 소재 대학)에서는 나라설을 지지한다. 도쿄대학과 교토대학 사학과들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하다.
《일본서기》에서 니니기가 '천손강림'한 곳은 규슈 지방이며, 그 후손인 진무가 규슈에서 진격해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규슈 지방을 정권의 시발점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긴키 지방에서 성립한 정권이 굳이 규슈에서 왔다는 전설을 만들어가며 규슈를 '천손강림'한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 줄 필요는 없으니, 야마토 정권은 규슈 지방에서 시작된 것이 맞지 않느냐는 주장을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 거주지를 집단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고대에는 근대국가처럼 강력하고 거대한 집단 체제가 드물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주집단 역시 토착정권과 맞먹는 세력일 수 있었다. 그러나 토착 '정권'은 멸망했어도 토착 주민들은 대부분 살던 곳에서 계속 살아야 했고, 이들을 달래고(?) 납득시키는 과정이 자연히 이러한 설화로 굳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옛 지명 '야마토'가 지금의 나라현을 가리키는 만큼, 야마토 정권은 긴키 지방에서 성장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야마토 정권이 규슈에서 유래했다는 전설은 단순히 신화적 장치에 불과하다는 접근이다. 초대 왕을 강력한 정복군주로 묘사하기 위해 규슈에서 야마토 지방에 이르는 '여정'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야마토 조정의 입김이 많이 들어간 판본을 보면, 천손이 강림한 곳을 "왕의 덕을 입지 못한 불모의 땅"이라고 깎아내린다. 규슈 지방이 정말 야마토 정권의 시발점이었다면 그렇게 그 지역을 깎아내렸을 이유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땅이 나쁘다보니 진무 덴노가 동쪽의 좋은 땅을 찾아 정벌을 떠났으며, 정복전쟁 끝에 야마토 지방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는 결국 규슈 지방을 깎아내리고 야마토 지방을 좋은 땅이라 치켜세우는 내용이 된다. 그렇다면 야마토 정권이 긴키 지방에서 성장했다고도 할수 있다.[10]
한국에서는 '천손강림'한 곳이 실제로는 가야의 구지봉이라고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고고학적·인류유전학적·언어학적으로 야마토의 뿌리(야요이인)는 한반도에서 이주한 것이라는 게 정설이기 때문이다.
중국 사서에서는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일본에 사람들을 보냈고 그 사람이 일본의 왕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11] 중국인들 중에서는 2000년대까지도 이 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춘추시대)와 연관짓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본 주류민족과 문화를 지칭한다. 야마토 정권 및 일본을 설립한 민족이라는 의미다. 한민족을 한민족이라 부르는 것처럼 일본인은 자신들을 야마토 민족, 와 민족(和民族)이라 부른다. 흔히 일본의 전통 정신을 (보통 국수주의자들이) 관용적으로 표현할 때 야마토 다마시이(大和魂)[12] 라고 말하는 것이 그 예다.
일본 민족주의자들이 '야마토'라는 개념을 쓸 때는 배타주의에 의해 현재의 일본국에 속한 류큐(오키나와 및 가고시마의 아마미 군도)와 아이누 그리고 재일 한국인 등은 제외된다. 재일 외국인이 완전히 귀화한 경우라도 차별적인 구분은 남아 있다.
오키나와에서는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본토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자주 쓰인다. 야마토를 오키나와어식으로 '야마투'(ヤマトゥ)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본토의 표준 일본어는 오키나와에서 '야마토구치'(ヤマトグチ), 또는 '야마투구치'(ヤマトゥグチ)라고 한다. 또 본토 일본인을 '야마툰츄'(ヤマトゥンチュー)라고 부른다. 여기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오키나와어를 '우치나구치'(ウチナーグチ), 오키나와 사람을 '우치난츄'(ウチナンチュー)라고 부른다. 주로 오키나와 문화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지만, 오키나와 주민들 사이에서도 쓰인다.[13]
야마토노쿠니(大和國 ), 대화국
오늘날 나라현 일대. 명칭의 유래는 당연히 위의 고대국가 야마토에서 왔다. 인류 사상 최대의 전함인 야마토급 전함 이름의 유래.
, 일본 각지의 지명에 대한 내용은 야마토(지명) 문서
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야마토(
요컨대, 일본은 7세기 후반에서 701년 사이에 '니혼'(日本, 일본)으로 국호를 칭하기까지는 '야마토'였다. 동시대 중국 측 기록에서는 왜국(
2. 표기[편집]
야마토의 한자 표기는 특이한데, '大和'는 일반적인 훈독이나 음독 방법으로는 야마토라고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본래 일본을 가리키던 고유어 표현인 やまと(야마토)를 '倭'(왜나라 왜)의 훈으로 읽은 데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倭를, 이와 음독이 'わ'(와)로 동일한 '和'(화할 화)로 순화하고, 앞에 '大'자를 붙인 大和를 정식 한자 국명으로 했다. 이를 읽을 때는 고유어 '야마토'를 계속 취한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 大和라는 표기를 음독하여 'だいわ'(다이와)라고 읽는 경우가 많다. 다이와 증권, 다이와 백화점, 다이와 중공업 등이 그 예이다.[5]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조선에도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조선인의 일본군 지원을 독려하던 선동 단체인 "야마토동맹"이 있었고, 윤치호와 박춘금 등이 이사로 활동했다. 해방 직후 신문에는 "대화동맹"이라고 나오지만, 없어지고 나서 야마토동맹을 조선어식으로 부른 것일 뿐, 당시 공식 호칭은 야마토동맹이었다.
2.1. 어원[편집]
현재 일본 국내 학자들에게 지지받는 유력한 학설은 원래 '야마토'라 불리던 지역이 후지산이 자리한 고원 지대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했다고 하여[6]
야마토가 '야마타이'(邪馬台)라는 고대 국가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야마타이의 '야마'가 산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위 가설과 맥락이 비슷하다. 그리고 소수설로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들이 일본에 상륙하면서 일본 열도를 가리켜 '염터'[7] 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3. 역사[편집]
그 기원년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많으나 대개 야요이 시대 후기인 2세기경에서 고훈 시대인 3세기 중반으로 잡는다[8] . 《삼국지》 <위지> 동이전, 《삼국사기》 등에 여왕 히미코(? - 247?)가 다스리는 야마타이국이라는 지명이 나오며, 이는 기록상 교차검증이 가능한 일본 최초의 국가이다.
'야마타이국'과 '야마토 정권'의 지배 세력이 동계(同系)였는가에 대해서도 이견이 존재하나, 적어도 고훈 시대 이후 야요이계의 어느 세력이 중앙집권적인 국가로서의 기틀을 잡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현대 일본 역사책에서는 고훈 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합쳐서 '야마토 시대'(大和時代, 250~710년) 혹은 '야마토 정권 확립 시대'로 분류하기도 한다.
어쨌든 처음 야마토는 그냥 일개 연맹국가였지만 백제, 가야와 뱃길을 통해 교류하여 정치적으로 밀접한 협력 관계를 맺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문자, 철기, 건축, 농사법 등 각종 선진문물들을 신속하게 도입해나가면서 타 부족국가들과 연맹 국가들이 넘볼 수 없을 만큼 강성해졌고, 이를 토대로 주부나 시코쿠, 산인, 간토 등 다른 지역에 존재했던 부족국가와 연맹국가들을 차례로 복속시켜 나가며 큐슈 서북부와 간토 지역에 이르는 영역을 통합시킬 수 있었다. 또한 백제, 가야와 같이 신라를 여러 번 공격했지만,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에게 패배했고, 4년 뒤 이들과 같이 고구려의 대방과 평양을 공격했으나 또 패배했다.
'일본'으로 국명을 개칭했을 무렵의 야마토가 차지하고 있었던 영역은 현대의 일본보다 훨씬 좁았다. 규슈 남부는 하야토라고 해서 야마토와 별개의 연맹국가들이 형성되어 있었고, 간토 이북 지역의 경우에는 아이누계 종족들이 부족국가-연맹국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9] 이들을 8세기~11세기경을 거쳐 정복하고, 근대에 류큐와 홋카이도를 편입시킨 것이 현재 일본의 영역이다.
4. 시작 지역 가설[편집]
야마토 정권의 시작은 시기뿐만 아니라 장소도 논란이 된다. 일본 사학계에서는 도쿄대학과 규슈대학 (및 규슈 소재 대학)이 규슈설을 지지하고, 교토대학 (및 나라 주변 소재 대학)에서는 나라설을 지지한다. 도쿄대학과 교토대학 사학과들의 자존심 대결이기도 하다.
4.1. 규슈 가설[편집]
《일본서기》에서 니니기가 '천손강림'한 곳은 규슈 지방이며, 그 후손인 진무가 규슈에서 진격해 온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규슈 지방을 정권의 시발점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긴키 지방에서 성립한 정권이 굳이 규슈에서 왔다는 전설을 만들어가며 규슈를 '천손강림'한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 줄 필요는 없으니, 야마토 정권은 규슈 지방에서 시작된 것이 맞지 않느냐는 주장을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 거주지를 집단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고대에는 근대국가처럼 강력하고 거대한 집단 체제가 드물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주집단 역시 토착정권과 맞먹는 세력일 수 있었다. 그러나 토착 '정권'은 멸망했어도 토착 주민들은 대부분 살던 곳에서 계속 살아야 했고, 이들을 달래고(?) 납득시키는 과정이 자연히 이러한 설화로 굳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4.2. 간사이 가설[편집]
옛 지명 '야마토'가 지금의 나라현을 가리키는 만큼, 야마토 정권은 긴키 지방에서 성장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야마토 정권이 규슈에서 유래했다는 전설은 단순히 신화적 장치에 불과하다는 접근이다. 초대 왕을 강력한 정복군주로 묘사하기 위해 규슈에서 야마토 지방에 이르는 '여정'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야마토 조정의 입김이 많이 들어간 판본을 보면, 천손이 강림한 곳을 "왕의 덕을 입지 못한 불모의 땅"이라고 깎아내린다. 규슈 지방이 정말 야마토 정권의 시발점이었다면 그렇게 그 지역을 깎아내렸을 이유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땅이 나쁘다보니 진무 덴노가 동쪽의 좋은 땅을 찾아 정벌을 떠났으며, 정복전쟁 끝에 야마토 지방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는 결국 규슈 지방을 깎아내리고 야마토 지방을 좋은 땅이라 치켜세우는 내용이 된다. 그렇다면 야마토 정권이 긴키 지방에서 성장했다고도 할수 있다.[10]
4.3. 기타[편집]
한국에서는 '천손강림'한 곳이 실제로는 가야의 구지봉이라고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고고학적·인류유전학적·언어학적으로 야마토의 뿌리(야요이인)는 한반도에서 이주한 것이라는 게 정설이기 때문이다.
중국 사서에서는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일본에 사람들을 보냈고 그 사람이 일본의 왕이 되었다고 쓰여 있다.[11] 중국인들 중에서는 2000년대까지도 이 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춘추시대)와 연관짓기도 한다.
5. 파생 의미[편집]
5.1. 일본의 별칭[편집]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본 주류민족과 문화를 지칭한다. 야마토 정권 및 일본을 설립한 민족이라는 의미다. 한민족을 한민족이라 부르는 것처럼 일본인은 자신들을 야마토 민족, 와 민족(和民族)이라 부른다. 흔히 일본의 전통 정신을 (보통 국수주의자들이) 관용적으로 표현할 때 야마토 다마시이(大和魂)[12] 라고 말하는 것이 그 예다.
일본 민족주의자들이 '야마토'라는 개념을 쓸 때는 배타주의에 의해 현재의 일본국에 속한 류큐(오키나와 및 가고시마의 아마미 군도)와 아이누 그리고 재일 한국인 등은 제외된다. 재일 외국인이 완전히 귀화한 경우라도 차별적인 구분은 남아 있다.
오키나와에서는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본토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자주 쓰인다. 야마토를 오키나와어식으로 '야마투'(ヤマトゥ)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본토의 표준 일본어는 오키나와에서 '야마토구치'(ヤマトグチ), 또는 '야마투구치'(ヤマトゥグチ)라고 한다. 또 본토 일본인을 '야마툰츄'(ヤマトゥンチュー)라고 부른다. 여기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오키나와어를 '우치나구치'(ウチナーグチ), 오키나와 사람을 '우치난츄'(ウチナンチュー)라고 부른다. 주로 오키나와 문화의 고유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지만, 오키나와 주민들 사이에서도 쓰인다.[13]
5.2. 일본 나라현의 옛 지명[편집]
야마토노쿠니(
오늘날 나라현 일대. 명칭의 유래는 당연히 위의 고대국가 야마토에서 왔다. 인류 사상 최대의 전함인 야마토급 전함 이름의 유래.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8 12:16:37에 나무위키 야마토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일본서기》의 서술로는 무려 기원전 6~7세기경의 사건으로 서술되나, 《일본서기》의 날짜 기록은 일본 황실과 역사를 포장하고 기릴 목적으로 몇 세기 앞당겼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러한 일본의 동진은 실제로는 고훈 시대가 시작되는 3세기에서 4세기를 전후하여 일어난 행적일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해서는 이주갑인상 및 결사팔대 문서로.[2] 이 시대에는 천황이 붕어할 때마다 궁성을 옮겼다. 따라서 역대 중심지가 야마토 지방(나라 분지) 곳곳에 산재해있다.[3] 일본 중등 역사 교육과정 표기.[4] 한국 중등 역사 교육과정 표기.[5] 이 때문에 이 단어로 된 항목을 번역기로 돌리면 같은 이름의 전함 때문에 '전함 다이와'가 튀어나오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6] 실제로 교토 동부부터 시가현, 기후현, 야마나시현, 나가노현, 군마현 등지에 이르기까지 고원지대가 펼쳐진다.[7] 고유 한국어로 '바위로 된 섬'을 뜻하는 말인 '염'과 장소를 뜻하는 '터'가 결합하여 '바위섬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 되었다.[8] 황기, 즉 신화상으로는 진무 덴노가 즉위한 기원전 660년을 일본의 건국년도로 표방하고 있으나, 이는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전제로 계산하는 기년법인 '단군기원'과 마찬가지로, 그 역사적 증거가 부족하다. 고고학적으로 기원전 660년은 일본의 신석기 시대인 조몬 시대 후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9] 당시 야마토에서는 이들을 에조, 에미시라고 칭했다.[10] 고주몽의 고구려 건국 신화와 비교하자면 고주몽은 부여에서 나와 고구려를 세웠다면서,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다뤄지고 있다. 또한 백제 건국 신화에서도 고구려에서 이동한 외래인 집단이 나라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를 우리는 신화적 장치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이해한다. 단군신화도 외래 이주집단이 토착 부족과 융합되는 과정을 신화화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처럼 다른 신화에서 외래인 시조가 나오는 경우 보통 외래 이주 집단과의 융합으로 해석된다.[11] 서귀포시에도 그렇게 해서 보낸 서복이 서귀포 지역에서 '서쪽으로 돌아갔다'(西歸)라는 전설이 있다.[12] 독음으로 읽을 시는 다이와콘.[13] 아이누어에는 야마토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단어로 일본인을 지칭하는 샤모(シャモ)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