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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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호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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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83


파일:external/s20.postimg.org/doosan2001.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2001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33번}}}
결번

양승호
(1983~1985)


김인식
(1986~1989)
{{{#ffffff [[OB 베어스|OB 베어스]] 등번호 8번}}}
홍신차
(1984~1985)

양승호
(1986)


곽연수
(1989~1992)
{{{#ffffff [[OB 베어스|OB 베어스]] 등번호 71번}}}
최주억
(1992~1994)

양승호
(1995)


강만식
(1996~1997)
OB / 두산 베어스 등번호 73번
박동일
(1990~1993)

양승호
(1996~2005)


이철성
(2006)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80번
노상수
(2006~2008)

양승호
(2011~2012)


권영호
(2013)


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6010501000317600016821.jpg
양승호
梁承虎 | Yang Seung-ho

출생
1960년 1월 10일 (64세)
전라남도 진도군[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서울우이초 - 신일중 - 신일고 - 고려대(79학번)
포지션
내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3년 2차 3라운드 (해태)
소속 구단
상업은행 야구단 (1982)
해태 타이거즈 (1983~1985)
OB 베어스 (1986)
지도자
신일중학교 야구부 감독 (1988~1990)[2]
OB 베어스 2군 수비코치 (1995~1998)[3]
OB-두산 베어스 1군 수비코치 (1998~2003)[4]
두산 베어스 1군 수석코치 (2004)
두산 베어스 2군 수비코치 (2005)
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 (2006)[5]
LG 트윈스 감독대행 (2006)[6]
고려대학교 감독 (2007~2010)
롯데 자이언츠 감독 (2011~2012)
파주 챌린저스 감독 (2017~2020)
프런트
OB 베어스 스카우트 (1991~1994)
고양시 클럽야구 총괄단장 (2021~ )
상동고등학교 야구부 단장 (2023~ )
기타
디앤피파트너 대표이사 (2018~ )
병역
예술체육요원[7]
가족
아내 조미희, 딸 양희정, 아들 양우석, 조카 윤현민

1. 개요
2. 선수 경력
4. 입시 비리
5. 이후
6. 별명
6.1. 롯데 감독 시절 별명
6.2. 입시 비리로 인해 구속된 이후 생긴 별명
7. 여담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야구인.

현역 시절은 인상 깊진 않았지만 신일중, 고려대학교 감독으로 주목 받으며 인품과 능력이 훌륭한 지도자로 평가 받았고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 전임 로이스터 감독의 유산을 잘 활용했다는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사임 이후 고려대 야구부 감독 시절 비리가 드러나면서 감옥님이라는 멸칭을 얻는 등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게 됐다.


2. 선수 경력[편집]


파일:external/bm.gametree.co.kr/tu24la5z.jpg
젊은 시절인 OB 베어스 현역 때의 사진[8]

데뷔는 실업야구에서 했다. 프로선수로서는 1983년부터 1985년까지 해태 타이거즈에서, 1986년부터는 OB 베어스에서 뛰었다. 주로 백업 2루수, 3루수로 활약했고 한대화 트레이드[9]때 OB로 이적하여 김성근 감독 밑에서 1년을 뛰었다. 통산 타격 기록은 4시즌 동안 195경기 출장, 467 타석에서 타율 0.223, 홈런 4, 타점 41, OPS 0.585.

선수시절 자랑할만한 경력은 해태 타이거즈의 쟁쟁한 선수들을 제치고 4번타자를 한 달동안 맡은 것과[10] 1983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대타로 나와 결정적인 2타점 2루타를 때려낸 정도였다. 파랑새존에 대하여 언급할 때 나왔던 이야기.

롯데 자이언츠 수석코치인 박영태와 맞먹을 정도로 수비실력도 안 좋았는데 195경기에 출장하는 동안 실책을 18개 저질러서 경기당 평균실책수가 0.092.[11] 게다가 프로야구 첫 번째 끝내기 실책의 주인공이다.[12] 프로 경력을 실력이 없는 무명 선수로 마쳤다. 김응룡 감독의 욕을 실컷 얻어먹기도 했다고 한다.


3.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양승호/지도자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입시 비리[편집]


2012년 12월 13일, 고려대학교 야구부 감독 재임시절 입시 비리로 금품을 받은 정황이 포착되어 연세대학교 야구부 감독이었던 정진호와 더불어 긴급 체포되었다. 검찰에 따르면 2007~2010년 학부모와 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들에게 뇌물을 받고 고려대에 입학시켜 달라는 청탁을 들어주었는데, 받은 돈이 억대에 달한다고 한다. 검찰에서는 체포 이후 구속영장까지 신청할 예정이라고. # 만약 유임[13]이 되었다면, 롯데는 시즌 중에 현역감독이 체포당하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맞을 뻔했다.

당시 롯갤에서는 연말에 프런트에 을 조공하자며 기부금 모으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나, 돈을 모으니 마니 불발 될 듯하다가 양감독 체포 이후 떡에다가 ☆★축 양승호감독 경질 ☆★#을 새겨서 떡을 돌리자는 여론이 대세가 되었다. # 그리고 다시 2012 초보 야구 감독들의 신년운세가 주목받았다. #

선수단은 당연히 멘붕 상태였다. 실제로 시즌 중에 검찰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프런트는 몰랐다는 기사를 냈지만,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모른다는 입장을 발표한 그 기사에서도 짐작은 하고 있다는 어투. 프런트와 양승호 감독간의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012년 후반기 이후 사이가 급격히 악화된 것 또한 이 때문이었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12월 21일 부로 검찰에 구속 기소 되었다. 첫 재판에서 공소사실에 대해 인정하였다고 한다.# 2013년 4월 11일, 치질로 인한 병보석 석방이 허가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수감 생활 중 건강 악화로 병보석 허가.

2013년 6월 18일, 징역 2년이 구형됐다. 7월 4일 징역 1년 3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하겠다고 하였다.

2013년 11월 29일, 항소심 결과 원심과 같은 징역 1년 3개월에 벌금 1억 원이 확정되었다. 보석이 취소되어 재수감되었다.

2014년 3월 13일, 대법원은 징역 1년 3개월과 벌금 1억 원을 확정지었다. 1차 구속 4개월과 법정구속에서 확정까지 3개월을 구치소에서 보내고 이후 5개월 가량을 더 복역하다가 같은 해 8월 출소했다.

그렇게 양승호 전 감독은 입시비리로 인해 범죄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터뷰에서 본인이 말하길 받은 돈 수억 원은 쓰지 않고 모두, 전지 훈련비로 썼다고 한다. ##

하지만 양승호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마치 배임죄가 횡령죄보다 가벼운 듯 얘기하지만, 횡령배임은 그 범죄의 주체가 재물보관자인가 타인사무처리자인가에 차이가 있고 그 객체가 재물인가 재산상의 이익인가에 차이가 있을 뿐 처벌과 형량은 똑같은 범죄다. 또 양승호 감독은 단순한 배임죄도 아니고 배임수재죄다. 2심 판결에 따르면 1억 원 중 "일부"를 야구부 운영과 관련해 사용한 것으로 보이고라고 하여 일부가 야구부 운영에 사용되어 그 부분이 유리한 양형요소로 판단된 건 사실이지만 "전부" 쓰였다는 주장과는 차이가 있다.

애시당초 대법원에서 1년 3개월의 징역형이 선고될 정도의 범죄를 저질렀는데 '내가 정말 나쁜 행동을 한건가'라고 억울해 할 수 있는 건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한다. 2심 재판부는 1년 3개월의 형을 선고하면서 “특히 피고인은 스포츠계와 교육계를 위해 일하는 일종의 공인으로서 그에 합당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타에 귀감이 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의무와 기대를 저버린 채 공정성이 중시되는 교육현장에서 공무원의 뇌물수수에 버금가는 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사안이 중하다”라고 밝혔다. 또한, “나아가 피고인은 당심에 이르러 종전의 반성하던 태도를 번복하고 자신의 잘못을 전혀 뉘우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5. 이후[편집]


2015년 올스타전에서 김응용 전 감독 은퇴식이 열리자, 감사패 전달식에 참석했다. 당시 연예인 야구단 감독으로 있었으며, 또한 리틀 야구단 인스트럭터도 겸한다고 했다.

2016년에 들어서는 지인이 운영하는 항공 물류회사 직원으로 취직하여 제 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야구에 대한 끈은 절대 놓지 않으며 야구로 봉사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2016년 11월 파주에서 창단 예정인 독립구단의 감독으로 내정되어# 같은 해 11월 28일, 한국 3번째 독립야구단인 파주 챌린저스가 창단되면서 감독직에 임명되었다. 보수는 없으며 재능기부를 할 것이라고 한다.

2018년 11월 6일, 스포츠 에이전트사 대표가 됐다는 기사가 나왔다. 1호 계약은 전준우, 신본기. 하지만 어떻게 유소년 선수들의 입시 비리를 저지른 사람이 에이전트사를 운영할 수 있냐면서 안 좋은 말들만 많이 나오는 상황이다.

롯데 자이언츠에서 다시 한 번 감독 제의를 했다고 한다. 때는 2018년 시즌 후, 롯데가 조원우 감독을 경질하고 새로운 감독을 찾을 때 제일 먼저 연락해 감독 제의를 한 사람이 양승호였다.[14] 그러나 본인이 거절했고, 롯데는 결국 양상문으로 선회했다.[15] 그리고 그 결과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019시즌 이후 양승호와 계약을 맺은 선수들의 FA협상이 최악으로 치닫으며 에이전트로의 능력이 있긴 한가에 대한 말이 나오고 있다.[16]

한선태, 송윤준, 김동진 등 10명의 선수들을 KBO 리그로 진출시켰으며, 2020년 계약 만료로 파주 챌린저스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고양시 클럽야구 총괄단장을 맡게 되었다.

2021년 9월 22일 빙모상을 당했다.

전설의 타이거즈 채널에 송일섭과 함께 33번째 에피소드 게스트로 출연해 근황을 알렸다. 2023년 9월 6일 라이브 타이거즈와 녹화가 진행됐다.


6. 별명[편집]



6.1. 롯데 감독 시절 별명[편집]


2011년 초중반까지는 비꼬거나 부정적인 별명이 주류였지만 팀이 상승세를 보이면서 긍정적인 별명도 나오기 시작했고, 2011년 시즌 종료 이후엔 과거의 부정적인 별명들은 그대로 묻히게 되었다. 그러다 2012년 팀이 부진해지자 다시 일부 부활했으며, 팀 성적이 나쁘지 않을때도 팬들을 마치 폭도처럼 몰아붙이는 데 반감을 가진 일부 팬들은 부정적인 별명을 부르곤 한다.

  • 소통왕: 양승호 감독이 제리 로이스터 감독처럼 선수들과 소통을 더 많이 한다고 언론에서 붙인 별명. 물론 팬들은 기자들하고만 소통한다며 조롱하는 의미로 부른다. 8월 이후 팬들이 바라던 모습을 보여주며 팬들과도 소통한다는 진정한 소통왕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 야메떼: 일본말 맞다. 그리고 그 의미 그대로 '그만둬!', '그만해!'의 의미. , , 통령 등 다른 감독들의 별명과 맞추다 보니 자연스럽게 메떼가 됐다.참조 비슷한 의미의 다른 별명으로는 , 가 있다.
  • 양백정: 양승호 + 백정. 투수를 혹사시켜 잡는다는 뜻으로 생긴 별명.
  • 양쇼부: 양승호 + 쇼부(일본어로 승부). 2011년 08월 28일 경기에서 5회 말 번트 시프트로 무사 2루에서 3루로 가는 주자를 잡고, 6회 초 더블 스틸, 8회 초 황재균의 기습적인 홈 도루를 시도하여 유발한 포일로 득점하는 작전을 보여주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는데, 감독 인터뷰에서 '5회에 쇼부...아니 승부를 봤다'라고 한 것이 입에 짝짝 달라붙는다는 이유로 붙었다.
  • 양승호구: 양승호 + 호구. 양승호의 별명 중에 제일 널리 알려진 별명이다. 여담으로 네이버를 포함한 일부 포털 사이트에서는 봇을 돌리는지 호구라는 단어만 들어가면 리플이건 게시글이건 자동으로 삭제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각종 수학기호를 사용해서 9를 만들기도 하고 한자나 특문 등을 사용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 양승호굳, 양승호걸, 양승호감, 양승호쾌: 2011년 8월 당시 팀이 상승기류를 타고 있어서 붙여진 별명.
  • 양승호날두: 양승호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양승호랑이: 양승호 + 호랑이. 양승호의 호자가 범 호(虎)자인것을 생각하면 어떤의미로는 잘 어울리는 별명이다.
  • 양승호불호: 양승호과 양승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바람에 생겨난 별명.
  • 양승호카게: 직구와 조크볼에서 유래했다. 복장은 3대 호카게.
  • 양승홈리스: 선수들에게 방을 내주고 노숙자행...
  • 양올감: 양승호 올해까지 감독의 준말.
  • 원균: 능력있는 전임 감독이 물러나고 무능한 후임이 온 상황이라며 붙은 별명. 그리고 로이스터에게는 로순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 양일단: 경기 후 승장 인터뷰에서 모든 대답을 '음~ 일단은...'으로 시작하는 버릇에서 비롯된 별명.
  • 크로맨서: 다 죽어가거나 죽어있는 상대팀의 투수들을 부활시킨다고 해서 붙은 별명. 샤다라빠도 자기 블로그에 연재 중인 꼴데툰에서 죽은 투수도 살려내는 명의라고 대차게 깠다.#
  • 양호로: 양승호 + 호로XX. XX는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변할 수 있으므로 알아서 채우자.
  • 운장: 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따른다는 데서 온 별명. 7월쯤부터 슬슬 나오기 시작하다 8월로 들어와 박종훈과 김광수가 연달아 삽질을 거듭하면서 비난이 줄어든 데다 8월 18일 김성근 해고 사태로 3위까지 노려볼 수 있게 되어서, 천운이 따르는 운장 양승호.
  • 제갈양승호: 제갈량 + 양승호.
  • 태양승호: 태양 + 양승호
  • 호로로: 양승호 + 뽀로로
  • 호요미: 양승 + 귀요미. 한 혀갤러가 붙인 별명.
  • 제갈양승호날두: 제갈량 + 양승호 +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 양승호헤호헤호 박~기남 호헤호헤호: 양승호와 박기남 응원가의 절묘한 조화


6.2. 입시 비리로 인해 구속된 이후 생긴 별명[편집]


  • 양승호구속[17]: 입시비리 문제로 체포됬다.
  • 양승호주머니: 뇌물. 당연히 뇌물을 받아서 호주머니에 넣는다는 뜻의 말장난이다.
  • 양승호의호식: 뇌물 받은 돈으로 잘먹고 잘살았다는 이유였다.
  • 양승호감옥: 긍정적인 별명이었던 '양승호감'에 '감옥'을 합쳐서 부정적인 의미로 만든 별명이다.
  • 치질: 수감생활 중 치질 악화로 석방이 되었다.[18]
  • 레기: 승호 쓰레기.
  • 감옥님: 감동님의 변형.
  • 갓옥님: 갓 + 감옥님. 김시진 - 이종운이 롯데를 말아먹던 시기에 양승호 재평가론이 제기되며 나온 말이다.
  • 옥중감독: 2014 시즌 끝나고 4강에 못 간 SK, 두산, 롯데, KIA, 한화가 감독을 교체하면서 불타는 감독 시장이 열렸는데, 이때 양승호 전 감독을 복귀시키자는 떡밥이 나오자 다들 옥중감독의 교도소 매직으로 4강을 외쳤다.

7. 여담[편집]


  • 배우 윤현민이 외조카다. 아무래도 외숙부의 영향으로 야구선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 젊었던 현역 선수 시절 사진을 보면 묘하게 배우 이범수와도 닮은 느낌이 있다.
  • 양승호와 비슷한 케이스는 후배 야구인인 장정석이다. 장정석도 양승호처럼 무명이나 다름 없는 현역 시절을 보낸 뒤 지도자로써는 세 시즌 중 두 시즌을 연속으로 가을야구에 보내며 지도자 시절에야 본격적으로 빛을 발했지만, 이후 KIA 타이거즈 단장 시절 비리로 이미지가 추락한 점이 비슷하다.


8.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8 16:41:03에 나무위키 양승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포털에는 서울특별시 출신으로 나온다. 이는 아마 서울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것이 와전된 듯하다. 전설의 타이거즈 출연 당시에도 서울 아재로 표기되어 나온 것을 보면 어린 시절에 이주해서 출생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2] 46연승 기록. 야구인 출신이라 엄밀히 말하자면 공식 감독은 아니었다.[3] ~6월 21일[4] 6월 22일~[5] ~6월 4일[6] 6월 5일~[7] 1978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 준우승#[8] 선수 시절을 통틀어 성적이 변변치 못했다. 가장 성적이 좋았던 시즌 성적이 2010 시즌 불사조라면서 까이던 박영태 전 롯데 수석코치보다 못하다.[9] 한대화 ↔ 황기선·양승호, 서울 팀에서 뛴다는 생각 때문인지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10] 당시 해태를 말하려면 '소수정예'라는 말을 빼놓을 수 없을 정도였으며 선수층은 얇아도 주전의 수준은 무시무시했다. 당시 김성한, 김봉연, 김종모의 성적을 보면 실제로 양승호가 이들보다 더 잘한 건 아니고 김응룡 감독이 선수들을 자극하기 위해 잠시 넣은 것이다.[11] 단, 내야수였으니 실책 수가 많은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12] 1983년 8월 3일 경기였는데, 이 경기는 1984년 연감의 명경기에 소개되기도 했다.[13] 3년 계약이었기 때문에 그의 임기는 2013시즌까지였다.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사퇴했던 것이다.[14] 실제 입시 비리로 인하여 이미지는 좋지 못한다 할지언정, 21세기 롯데 감독들 중 가장 성적이 좋았으니 감독 제의가 다시 한 번 온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롯데 팬들도 21세기 롯데 최고 감독으로 제리 로이스터와 양승호를 언급할 정도로 여전히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15] 공교롭게도 앞에 언급된 양승호, 조원우, 양상문 모두 고려대학교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16] 전준우는 양승호 측에서 손아섭, 민병헌 등과 비교하며 80억 등의 언플만 해대고 협상에 전혀 진전이 없어 결국 결별하고 본인이 직접 협상에 임해 계약을 완료했으며, 고효준, 손승락은 입장 차이가 너무 커 사실상 결별 수순에 들어갔다. 결국 손승락은 양승호와의 연락두절인 채로 지내다 은퇴를 선언했다.[17] 물론 이것은 기존 별명이었던 양승호구구속을 한데 합친 것이다.[18] 물론 원래 있던 단어인 양치질이라는 기존 단어를 응용하여 '양'승호와 '치질'을 합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