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사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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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설명
3. 언어의 역사성과의 관계
4. 관련 문서 및 링크


1. 개요[편집]


파일:언어의 사회성.jpg

“언제나 똑같은 책상, 언제나 똑같은 의자들, 똑같은 침대, 똑같은 사진이야. 그리고 나는 책상을 책상이라고 부르고 사진을 사진이라고 하고, 침대를 침대라고 부르지. 또 의자는 의자라고 한단 말이야. 도대체 왜 그렇게 불러야 하는 거지?”

그래서 그는 주위의 모든 사물을 다른 이름으로 바꿔 부르기로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옛날에 쓰는 언어를 거의 잊어버리게 되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사람들도 그를 더 이상 이해할 수 없게 된다.

페터 빅셀, 책상은 책상이다 중에서

'언어의 사회성'은 의사소통으로 말미암아 언중들 간에 만들어진 사회적 약속임을 뜻한다. 이는 언어에 대한 사회적인 약속은 어떤 개인이 임의로 언어를 바꿀 수 없다는 뜻이고,[1]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적 영향력이 셀수록 언어에 미치는 영향력도 세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2] 단어의 변용을 개인이 바란다고 항상 모든 이들이 사용해주지는 않는 것을 보여준다.


2. 설명[편집]


대표적인 예시는 '부탄', '나트륨', '칼륨'으로 대한화학회에선 미국식 발음에 가까운 '뷰테인', 그리고 미국식 표현인 '소듐', '포타슘'으로 공식 표기를 바꿨지만, 일상생활에선 여전히 독일어식 이름인 '부탄(Butan)', 라틴어식 이름인 '나트륨(Natrium)', '칼륨(Kalium)'으로 통하며, 정작 마트에 가서 "뷰테인 가스 주세요"라고 하면 대부분 "뷰테인 가스가 뭐죠?"라고 하면서 못 알아듣는다. 또 "소듐 섭취를 줄입시다.", "포타슘은 신장질환이 있는 환자에게 좋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소듐·포타슘이 뭐죠?"라고 반문하기 십상이다. 결국 '부탄'과 '뷰테인', '나트륨'과 '소듐', '칼륨'과 '포타슘'이 복수표준어로 인정되었다.

개인이 사회적으로 정의된 단어의 의미를 바꿀 수 없다.[3] 예를 들어 '인디 게임'의 정의는 사회적으로 '소형 개발사가 대형 회사의 지원 없이 제작한 게임'라고 정해져 있는데, 어떤 개인이 나타나 '인디 게임은 1인 개발자가 만든 게임이다'라고 의미를 바꾸거나 '상업적 목표를 두고 만든 게임은 인디 게임이 아니다'라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4]

명칭이 바뀌었지만 전에 쓰던 명칭이 훨씬 더 많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사회복무요원이 있다. 사회복무요원은 이전에는 '공익근무요원', 축약어 '공익'으로 불렸다가 2013년 12월부터 '사회복무요원'으로 이름이 변경되어 법적, 행정적으로 사라졌지만, 실생활에서는 "저는 사회복무요원이었습니다"보다 "저는 공익이었습니다" 식으로 '공익'이라는 단어가 훨씬 더 많이 쓰인다.

세대에 따라 예전 명칭을 그대로 쓰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초등학교'가 있다. 초등학교는 1996년 3월에 '국민학교'에서 이름이 변경됐지만 어르신들은 여전히 '국민학교'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국명도 기성세대들은 과거의 국명을 그대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중장년층은 러시아, 미얀마를 각각 '소련', '버마'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5]

사실상 한 언어의 화자들이 같은 곳에서 대화할 수는 없기 때문에 언어권 내에서 더 작은 규모의 커뮤니티가 형성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예가 바로 사투리은어, 민간어원이다. 그리고 그 단계에서 새로 만들어지는 무수히 많은 낱말들은 제 나름의 사회성 검증을 통하고, 그 가운데의 몇몇은 다른 언중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한다. 위키에 등록된 각종 문체를 보면 한국어 화자 전체를 아우르는 사회성을 충족하지는 못했어도 특정 집단의 사회성 차원에는 부합하는 언어를 볼 수 있다. 이는 거짓짝과도 관련 있다. 또, 규범상은 옳은 번역(정역)이지만 사람들은 잘못된 번역(오역)으로 오해할 수도 있고, 그 반대도 있다.

형용사 '없다'와 '있다'의 관형사형이 '없는', '있는'인 것처럼 어떤 말이 불규칙으로 활용되거나 '' 받침처럼 어떤 구조의 낱말 수가 적거나 '관하여', '불구하고', '위한'처럼 불완전하게 활용돼도 그런 말들이 자주 쓰이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어 문서에도 적혀 있듯이 국어를 배우는 사람에겐 복잡하고 어려워도 해당 국어 화자들은 거의 자연히 숙달해서 그렇게 잘 안 느낀다. 이는 '비효율의 숙달화'의 예로 볼 수도 있다('경로의존성' 문서 참고).


3. 언어의 역사성과의 관계[편집]


언어/낱말이 탄생하고, 변화하고, 사어가 되는 것도 언중들의 약속에 기반하므로 '언어의 역사성'과 연계된다. 단어가 새로 만들어지거나 단어의 뜻이 달라지거나 단어에 다른 뜻이 더해져 사용되는 때에 사회성을 얻었는지 여부를 가리게 되고, 반대로 자주 쓰이던 단어가 다른 단어에 밀려 잊어진 때에는 사회성을 잃었는지 여부를 가리게 된다. 이는 어떻게 보면 어떤 개인이 임의로 언어 변화를 막을 수도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 표준어가 아니던 '짜장면'은 나중에 그 사회성이 인정되어 표준어의 지위를 얻었고, '너무'는 부정의 의미를 나타낼 때만 쓸 수 있는 말이었지만 나중엔 긍정과 부정을 가리지 않고 쓸 수 있는 말이 되었다.
  • 경칭이나 평칭으로, 또는 중립적으로 쓰이던 말이 비칭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부정적 느낌이 세서인지 그 반대는 드물다.
    • '당신', '양반'은 과거에는 경칭으로 쓰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가치가 하락하여 현재는 별로 듣기 싫어하는 호칭으로 통용된다.
    • '오타쿠'가 처음에는 '전문가'나 '마니아'와 같은 뜻이었어도, 그것이 부정적 느낌으로 바뀌어 통용되는 사실 자체는 부정할 수는 없다.
    • 특정 집단이 썼다고 금지어로 찍히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예로 '인민'이 있다. '인민'은 원래 법적 용어로 '자연인'을 대체하는 단어였지만 북한에서 국명 및 선전도구로 쓰다 보니 남한에서는 아무도 '인민'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만약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누가 국민을 '인민'으로 지칭하면 종북주의자라고 생각될 것이다.
  • 이름과 실제가 다르게 통용되기도 한다.
  • 어떤 말이 무의식적으로 자주 쓰이다 보면 규칙 의식이나 어원 의식이 옅어지면서 규칙대로이지만 불완전하게 활용되거나 어느 규칙에서 어긋나게 자주 쓰이게 되어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규칙 의식이나 어원 의식이 더더욱 옅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문법화나 불규칙 활용이 생기기도 하고, 차용어도 귀화어가 되기도 한다. 또한, 불규칙 활용형으로 널리 쓰이다 보면 그런 활용형에서 기본형이 거꾸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 콩글리시재플리시가 생긴 까닭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 동음이의어에서 밀린 등으로 말미암아 '강낭콩'의 옛말인 '강남콩'처럼 비표준어가 되었거나 '구축(驅逐)'처럼 여전히 표준어이지만 그다지 쓰이지 않는 낱말도 있고, 비표준어가 되었어도 다시 표준어가 되는 경우도 있으며, 옛말 또는 사어가 되었어도 부활하는 경우도 있다.
  • 어떤 낱말이 다른 언어에는 외래어로 남기도 하지만, 자국어에서는 사라질 수도 있다.
  • 이런 변화로 말미암아 언어유희도 새로 만들어지거나 사라질 수도 있고, 현재는 표준어이건 비표준어이건 그다지 쓰이지 않으나 자전 등 사전 속 단어의 뜻풀이나 번역어로서는 계속 쓰이기도 한다.

언어의 변화에 따라 언중의 역사 의식 수준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이것도 참고하면 좋다.

이것과 참조해도 되겠다("언어는 인간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생멸(生滅)을 거듭한다. 이 같은 언어의 역사성으로 인해 완벽한 번역은 불가능한 것이 된다. 그러나 벤야민은 ‘번역불가능성’보다는 ‘번역가능성’에 주목한 철학자이다.").


4. 관련 문서 및 링크[편집]


언론사는 사회적 영향력이 센 기관인데, 특히 언론에서 국어 규정을 무시하고 잘못 쓰고는 한다. 해당 문서의 '관련 문서 및 외부 링크' 문단의 외부 링크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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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어 누가 혼자서 "나는 '가방'을 '나강'이라고 불러야지"라고 생각하고 사람들 앞에서 '가방이 예쁘네요'를 '나강이 예쁘네요'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가방이 예쁘다는 의미라고 하는 것을 절대로 알지 못한다.[2] 개인의 예로는 '옥동자'가 있다. 없거나 드문 용법이 유명한 곳에서나 유명인에게서 나왔다고 수많은 언중이 편승해 뜻을 바꿔버린 흔치 않은 경우이기도 하다.[3] 다만 '고증' 같은 예외도 있다.[4] 실제로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트위터에 있었는데, 대부분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고 질책되었다. '인디 게임'이라는 단어가 가진 사회적인 정의를 무시하고 아무런 근거 없이 본인의 해석(제작 목적과 인디 게임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만 밀어붙이다가 봉변을 당한 셈. 이미 보편적인 뜻이 있는 단어를 마음대로 해석하지 말고 '나는 돈만 보고 인디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 싫다.'라고 표현했으면 논리적 오류 없이 본인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5] 그리고 2022년에 국명을 바꾼 '튀르키예'도 실생활에서는 '터키'로 부르는 사람이 훨씬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