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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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식스·잉글랜드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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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플랜태저넷 왕조 제5대 국왕
에드워드 3세
Edward II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dward_III_of_England_%28Order_of_the_Garter%29.jpg

왕호
에드워드 3세
(Edward III)
이름
윈저의 에드워드
(Edward of Windsor)
출생
1312년 11월 13일
잉글랜드 왕국 버크셔 윈저 성
사망
1377년 6월 21일 (향년 64세)
잉글랜드 왕국 런던 리치몬드 쉰 성
장례식
1377년 7월 5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재위
잉글랜드 왕국의 왕
1327년 2월 1일 ~ 1377년 6월 21일
배우자
에노의 필리파 (1328년 결혼 / 1369년 사망)
자녀
흑태자 에드워드, 이사벨라, 조앤, 라이오넬, 존[1], 에드먼드[2], 메리, 마거릿, 토마스
아버지
에드워드 2세
어머니
프랑스의 이자벨
형제
존, 엘레노어, 조앤
종교
가톨릭

1. 개요
2. 즉위와 친정
4. 백년전쟁
5. 말년
6. 가족관계
6.1. 자녀
7. 영어의 수호자



1. 개요[편집]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 에드워드 2세이사벨라장남. 친조부는 에드워드 1세이고 외조부는 필리프 4세이며, 필리프 4세의 손자들 중 유일하게 생존한 사람이기도 하다.[3]


2. 즉위와 친정[편집]


에드워드 3세의 아버지였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는 왕위에 오른 이후로 의회와 반목을 일삼았을 뿐 아니라 실정을 숱하게 저질러 귀족들이나 다른 왕족들, 주교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결국 1314년에 배넉번 전투에서 패배하여 스코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하자 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사촌인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 등을 비롯한 의회의 주요인물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는 등의 강수를 두었지만 결국 아내인 이사벨라와 그의 가신인 모티머 등이 정변을 일으켜 에드워드 2세를 끌어내리고 대신에 그 아들인 에드워드 3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3세가 즉위했을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 어머니 이사벨라섭정을 받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에든버러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으로 스코틀랜드의 국왕 로버트 1세는 정식으로 왕위를 인정받았으며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 대한 모든 권리를 무상으로 포기하였다.[4] 그리고 1328년 조인된 노샘프턴 조약으로 로버트 1세와 정략 결혼을 맺어 양국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일설에 에드워드는 조부인 에드워드 1세의 유언을 생각하여 이러한 조치들을 못마땅해하였으나, 당시 세력이 강했던 그의 어머니의 압력을 받고 굴복하였다고 한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1330년 모후 이사벨라의 정부(情夫) 로저 모티머를 체포하여 처형하고 이사벨라를 수도원에 유폐하였다.

특히 모티머가 에드워드 3세의 숙부인 켄트 백작 우드스톡의 에드먼드를[5] 무고해 처형한 뒤, 스스로 켄트 백작이 되었고 이사벨라는 이를 감싸면서 귀족들이 반발하게 되었다. 그래서 에드워드 3세는 모티머와 이사벨라를 숙청할 때 귀족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모티머의 증손자인 3대 마치 백작 에드먼드 모티머는 에드워드 3세의 손녀사위[6]가 된다. 그것도 에드워드 3세 생전에. 그리고 그 후손인 요크의 리처드는 훗날 이 핏줄을 근거로 장미 전쟁을 일으킨다.


3. 스코틀랜드 정벌[편집]


왕권을 강화시키는 데 성공한 그의 첫 번째 목표는 스코틀랜드였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로버트 1세가 죽고 그의 아들이자 에드워드의 매제 데이비드 2세가 즉위했는데 그의 나이가 아직 어린 데다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를 이용한 에드워드 3세는 로버트 1세가 추방한 친잉글랜드 귀족들의 쿠데타를 지원하여 그들과 함께 더플린 무어 전투와 할리던 힐 전투에서 스코클랜드군을 격파해, 그들의 우두머리 에드워드 밸리올을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로 망명하였던 데이비드 2세가 1341년 다시 스코틀랜드 왕위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으므로 에드워드 3세의 야망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어 한동안 잉글랜드를 넘보지 못하게 했다. 데이비드 2세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막대한 몸값을 내기로 약속하고 풀려날 때까지 11년간이나 잉글랜드에서 죄수 생활을 할 정도로 굴욕을 당했다. 특히 잉글랜드의 공격으로 스코틀랜드는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재정이 심하게 악화되었는데 데이비드 2세의 몸값을 낼 엄두가 안 나 잉글랜드에게 사정하여 깎아야 했고 이를 에드워드 3세가 죽을 때까지 갚지 못할 정도였다.


4. 백년전쟁[편집]


프랑스의 샤를 4세가 사망하고 카페 왕조가 단절되자 1339년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그는 필리프 4세의 외손자였으므로 왕위 계승을 주장했지만 살리카법으로 모계 계승은 인정받지 못했고 결국 발루아 왕조 필리프 6세에게 밀려 실패했다. 거기다가 데이비드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하자 프랑스 플랑드르 무역의 침해에 간섭하여 백년전쟁을 촉발시켰다.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의 활약으로 크레시 전투에서 대승하였고 같은 해 칼레를 점령하여 프랑스 침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1355년 재차 개전, 이듬해의 푸아티에 전투에서 승리하고 아키텐을 얻었다. 이후 1369년 재차 개전하여 또 승리를 거두었지만 잉글랜드군의 만행에 질려 했고 무엇보다 나라를 지키려는 강력한 프랑스 국민주의에 압도되어 대륙에서 철병했다.

1341년 프랑스 침공을 두고 손수 잉글랜드 해군함을 사전 검열했는데 이것이 세계 첫 관함식이다.


5. 말년[편집]


말년에는 의회의 반대에 시달리고 정부 앨리스 페러즈와 열애하는 가운데 4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에게 정권을 농단당했다. 그의 치세는 기사도의 최후를 장식하는 시대임과 동시에 장기간에 걸친 대륙 전쟁으로 인해 봉건 군제가 퇴색하여 봉건 말기의 양상이 조야를 뒤덮고 있었다. 흑사병의 만연은 그의 치세기에 해당되며 또 정치의식의 앙양으로서는 1376년의 선량 의회가 있었고 존 위클리프의 개혁도 이 시대에 발단하였다. 거기다 웨일스 지방에서 1372년 부터 흐웰린의 조카 오와인이 반란을 일으켜 그의 손자인 리처드 2세의 시기까지 날뛰었고 재위 기간 동안 전쟁 비용을 많이 써왔기 때문에 국가 재정에 대한 의회의 힘이 강해지게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가 자기보다 먼저 사망하자 아들을 뒤따르듯 다음해인 1377년 쉰 궁에서 사망하였다.


6. 가족관계[편집]



6.1. 자녀[편집]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흑태자 에드워드
(Edward, The Black Prince)
1330년 6월 15일
1376년 6월 8일
켄트의 조앤
슬하 2남[7]
1녀
베드포드 백작부인 이사벨라
(Isabella, Countess of Bedford)
1332년 6월 15일
1382년 10월 5일
코시 영주 앙게랑 7세
슬하 2녀
2녀
조앤 공주
(Princess Joan)
1333년 12월 19일 또는
1334년 1월 28일
1348년 9월 2일

2남
클래런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
(Lionel of Antwerp, Duke of Clarence)
1338년 11월 29일
1368년 10월 7일
얼스터 여백작 엘리자베스 드 버그
슬하 1녀
비올란테 비스콘티
3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John of Gaunt, Duke of Lancaster)
1340년 3월 6일
1399년 2월 3일
랭커스터의 블란체
슬하 1남 2녀[8]
카스티야의 콘스탄사
슬하 1녀
캐서린 스윈포드
슬하 3남
4남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
(Edmund of Langley, Duke of York)
1341년 6월 5일
1402년 8월 1일
카스티야의 이사벨
슬하 2남 1녀
조앤 홀랜드
3녀
브르타뉴 공작부인 메리
(Mary, Duchess of Brittany)
1344년 10월 10일
1361년 9월
브르타뉴 공작 장 4세
4녀
펨브로크 백작부인 마거릿
(Margaret, Countess of Pembroke)
1346년 7월 20일
1361년 10월 1일 또는 12월 25일
펨브로크 백작 존 헤이스팅스
5남
글로스터 공작 우르스톡의 토마스
(Thomas of Urstock, Duke of Gloucester)
1355년 1월 7일
1397년 9월 8일 또는 9월 9일
엘리노어 드 보언
슬하 1남 3녀

왕비 에노의 필리파와의 사이에서 5남 4녀의 적자녀들을 낳았다.

당시에는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아 왕족으로 태어나도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게 당연시 되는 시대였고 이로 인해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은 많은 왕족들과는 다르게, 에드워드 3세는 왕비 에노의 필리파와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낳았고 성인으로 장성하고 혼인하여 후손을 남긴 아들만 해도 5명이나 되었다. 하지만 그의 장남 흑태자 에드워드는 부왕보다 먼저 병사했고, 흑태자의 아들이자 에드워드 3세의 손자였던 리처드 2세가 왕권을 이어받아 즉위했다. 하지만 어린 리처드 2세가 즉위한 틈을 타 에드워드 3세의 나머지 자녀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왕위 계승 분쟁을 벌였다. 특히 3남 클라렌스 공작 앤트워프의 라이오넬[9], 4남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 5남 요크 공작 랭글리의 에드먼드의 후손들 사이에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분쟁이 터졌으며 이는 결국 백년전쟁 종전 후 장미 전쟁으로 표출된다.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인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John of Gaunt, 1340∼1399)의 후손으로 코난 도일[10], 베네딕트 컴버배치[11]가 있다. 즉 이 둘은 32촌 관계인 것. 이쯤되면 그냥 남이다.[12]


7. 영어의 수호자[편집]


에드워드 3세는 처음으로 영어를 장려한 왕이기도 하다. 당시 잉글랜드 지배층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프랑스어만을 썼다. 국어가 오히려 하층민의 언어로 취급됐었던 셈. 그러나 백년전쟁을 일으키면서 대규모 군대를 소집해야 하는데 당시 잉글랜드의 군사들은 농민들로 이루어진 징집병들이 대부분이었기에 하층민들의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고, 여기에 영어를 이용해 민족감정을 고취시킨 것이다. 어떻게 했는고 하니, 필리프 6세가 잉글랜드를 침략하고 민중들을 프랑스화시키며 잉글랜드인의 언어인 영어를 말살하려고 한다는 선전을 펼쳤다. 그리고 에드워드 3세는 곧바로 전쟁 준비를 위한 의회를 소집했는데, 본래는 프랑스어만 사용되던 의회에서 귀족들에게 이제부턴 공식적으로 영어를 사용할 것을 강요했고, 이게 지배층 사이에서 영어가 공식 언어로 채택된 첫 번째 일이었다.

이런 영어 장려 정책은 에드워드 3세 이후로 리처드 2세, 헨리 4세 등을 거치며 이어졌고, 마침내 백년전쟁이 끝날 때 즈음에는 완전히 영어가 잉글랜드의 언어로 굳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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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사람이 곤트의 존이다. 이 곤트의 존의 증손녀가 튜더 왕조의 시조 헨리 7세의 어머니인 마거릿 보퍼트이며 또 곤트의 존의 3녀인 캐서린은 카스티야 왕국의 왕비가 되었으며 3녀 캐서린의 친손녀는 이사벨 1세이다.[2] 이 사람의 증손자인 에드워드 4세의 장녀가 헨리 7세의 왕비 요크의 엘리자베스다.[3] 필리프 4세의 장남 루이 10세는 외아들이자 유복자인 장 1세를 낳았지만 그도 태어난지 고작 5일만에 사망했고, 차남 필리프 5세는 어거지로 살리카법을 확대해석하며 즉위했지만 정작 본인도 아들없이 딸만 두었으며, 삼남 샤를 4세마저 딸만 낳고 남성 상속자없이 사망하면서 일어난 결과. 그나마 필리프 4세의 살아남은 손는 에드워드 3세 뿐이지만, 손들은(루이 10세의 딸이자 나바라의 여왕 잔느, 필리프 5세의 딸 마르그리트) 결혼도 하고 후손도 남겼다.[4] 사실 모티머도 스코틀랜드를 멸망시키려고 원정을 시도했지만 웨어데일 전투에서 패하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다.[5] 에드먼드의 딸이 훗날 에드워드 3세의 맏며느리가 되는 켄트의 조앤이다.[6] 차남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의 외동딸 필리파와 결혼한다.[7] 리처드 2세 등.[8] 포르투갈의 왕비 필리파, 헨리 4세 등.[9] 앤트워프의 라이오넬은 사실 서른살도 되기 전에 요절했고, 아들은 없고 외동딸 필리파만 있어서 그의 자손들은 이용당하고 휘둘리기만 하는 입장이었다.[10] 곤트의 존의 15대손[11] 곤트의 존의 17대손[12] 실제로 7촌이 넘어가면 유전적으로도 남이라고 한다. 본관 같은 할아버지-손자뻘 항렬의 남남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