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위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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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위날다의 기타 정보





미국의 前 축구선수


파일:Wynalda_Profile_1.jpg

이름
에릭 위날다
Eric Wynalda
본명
에릭 보스웰 위날다
Eric Boswell Wynalda
출생
1969년 6월 9일 (54세)
캘리포니아주 풀러톤
국적
[[미국|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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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축구선수(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방송인
신체
179cm
소속
선수
샌디에이고 스테이트 아즈텍스 (1987~1989/ 대학)
샌디에이고 노마즈 (1988~1992)
샌프란시스코 베이 블랙호크스 (1990~1992 / 임대)
1. FC 자르브뤼켄 (1992~1994)
VfL 보훔 (1994~1996)
산호세 클래시 (1996~1999)
클루브 레온 (1999 / 임대)
마이애미 퓨전 (1999~2000)
뉴잉글랜드 레볼루션 (2000~2001)
시카고 파이어 (2001)
찰스턴 배터리 (2002)
베이커스필즈 브리가드 (2007~2008)
지도자
샌디에이고 플래시 (2010~2011 / 수석코치)
칼 FC (2012)
애틀랜타 실버벡스 (2012 / 임시감독)
애틀랜타 실버벡스 (2014)
L.A. 울브스 (2017)
라스 베이거스 나이트 (2018~2020)
뉴 암스테르담 FC (2020)
국가대표
파일: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엠블럼.svg 106경기 24골 (미국 / 1990~2000)

1. 개요
2. 클럽 경력
2.1. 경력 초기
2.2. 프로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은퇴 이후
5. 여담




1. 개요[편집]



파일:Wynalda_National_1.jpg


미국의 前 축구선수.

랜던 도노번 이전 90년대 미국 축구의 에이스이자 원조 캡틴 아메리카, 그리고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로 불렸던 선수이다. 또한 메이저리그 사커 1호골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2. 클럽 경력[편집]



2.1. 경력 초기[편집]


네덜란드계인 위날다는 캘리포니아주 웨스트레이크 빌리지에서 자랐다. 어린시절 지역팀인 웨스트레이크 울브스에서 뛴 위날다는 팀의 감독이었던 아버지의 지도 아래에 축구 실력을 쌓아갔으며 팀은 미국 유소년 축구 협회에 주관하는 리그에서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다. 울브스에서 16경기동안 58골을 넣으며 떡잎부터 달랐던 그는 이후 웨스트레이크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축구부에서 활동했다. 참고로 그와 같은 축구부에서 활동했던 선수 중 한명이 훗날 대표팀 A매치 최다 출전자가 될 코비 존스였다.

위날다는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샌디에이고 주립대학교의 축구부인 샌디에이고 스테이트 아즈텍스에서 선수생활을 하면서 3년간 34골과 24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다. 그는 1학년때 팀을 이끌고 전미 대학 축구리그에 참가하였지만 클램슨 타이거스에게 패하며 아쉽게 대회를 마무리했다. 아즈텍스에서 뛰는 동안 세미프로팀인 샌디에이고 노마즈에서 뛰기도 했다. 몰론 1988년에는 1경기, 1989년에는 5경기에 그쳤지만 말이다.


2.2. 프로 경력[편집]



파일:Wynalda_1.FC Saarbrucken.jpg


대학을 졸업한 위날다는 1990년 월드컵 본선에 앞서 미국 축구 협회(USFF)와 계약을 맺는다. 대회를 마친 뒤 그는 협회에서 연결해준 프로팀인 샌프란시스코 베이 블랙호크스에 임대선수로 계약한다. 허나 잦은 대표팀 차출로 인해 블랙호크스에서 뛴 경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 1992년, 위날다는 분데스리가1. FC 자르브뤼켄에 임대로 입단하게 되면서 최초로 독일 1부리그 무대에서 활약하는 미국인이 되었다.

그는 독일에 상륙하자마자 자신의 실력을 과감하게 선보이며 리그 17경기동안 8골을 득점하며 단숨에 자르브뤼켄의 핵심선수로 자리잡게 된다. 그의 놀라운 활약에 매료된 팀은 USFF에 45만 유로를 지불하며 완전 이적을 채결한다. 후반기에는 다소 주춤하며 15경기에 1골에 그쳤고 팀은 최하위를 기록, 2. 분데스리가로 강등된다.

2부리그로 강등당한 이후에도 위날다는 팀에 잔류하며 1993-94 시즌 동안 14골 25도움을 기록하여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14위에 그쳐 승격에 실패한다. 시즌이 끝나고 2부리그 챔피언으로 1부리그로 승격한 VfL 보훔으로 85만 유로의 이적료에 이적한다. 적지 않은 이적료를 투입하고 데려왔기 때문에 팬들과 구단은 그에게 기대가 컸으나 정작 1994-95 시즌 동안 22경기 무득점 3어시에 그치며 먹튀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팀도 한 시즌만에 2부리그로 강등당하면서 에이스로 활약해줬어야할 위날다에게도 강등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 시즌에는 8월 30일, 탈장 수술로 인해 전반기의 반 이상을 날렸고 1995년 10월 30일, 13라운드 SpVgg 운터하힝전에서야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반기동안 7경기에 나와 2골을 기록한다.


파일:Wynalda_San_Jose_1.jpg


1996년, 고국으로 돌아온 위날다는 마침 자국의 프로 리그가 새롭게 출범하면서 산호세 클래시에 입단하게 된다. 그리고 4월 6일, D.C. 유나이티드와의 개막전에서 후반 종료를 앞둔 43분, 득점을 성공시키며 역사적인 MLS 1호골의 주인공으로 영원히 남게 된다. 그의 결승골에 1:0으로 최초의 승리를 가져간 것은 덤이다. 이후에도 위날다는 클래시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리그 27경기 동안 10골 11어시를 기록, 팀의 MLS 컵 플레이오프를 이끌었으나 8강전에서 LA 갤럭시에 의해 발목을 잡히며 아쉽게 준결승 진출은 실패한다. 그래도 자국 대표팀의 에이스이자 팀의 원년 멤버로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인 위날다는 그 해 미국 축구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이후 두 시즌 동안은 부상으로 인해 결장이 잦아졌지만 나올때 마다 공격포인트를 틈틈히 적립하며 여전한 클래스를 보여주었다. 1999년, 멕시코 리그의 클루브 레온으로 임대 이적하게 된다. 그러나 위날다는 레온에서 무릎 전방십자인대와 내측 반월판이 모두 찢어지는 큰 부상을 겪게 되면서 몇 달 동안 경기에서 나서지 못하며 5경기 출전에 그치고 만다.

좋지 못한 멕시코에서의 생활을 마친 뒤 그는 2000시즌을 앞두고 마이애미 퓨전으로 팀을 옮겼으나 여전히 부상의 늪에 빠졌고 6월 7일, 뉴잉글랜드 레볼루션으로 팀을 옮긴다. 위날다는 시카고 파이어와의 경기에서 클럽의 첫 플레이오프 골을 포함하여 시즌 동안 2골을 기록했다.

2001년 5월 3일, 시카고 파이어로 이적한 위날다는 21경기동안 10골 4어시로 부활의 날개짓을 펼쳤고 팀을 MLS컵 플레이오프 준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1시즌 뒤 LA 갤럭시와 이적 협상을 했지만 무산됐고 USL 퍼스트 디비전의 찰스턴 배터리와 계약했다. 그러나 프리시즌 경기에서 다시 한번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되면서 단 한 경기도 소화하지 못한채 은퇴를 선언한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파일:Wynalda_National_2.jpg


1990년 2월 2일, 코스타리카와의 친선경기에 처음으로 A매치 무대를 밟았다. 3월 14일, 그는 미국 축구 연맹과 계약을 체결하여 전임 국가대표 선수가 되었다.

몇달 뒤 이탈리아에서 열린 1990 FIFA 월드컵 본선 무대에 참가하게 된다. 당시 미국 대표팀은 최고연장자가 28살(1962년생)에 불과할 정도로 어린 팀이었고 24개국 중 전력도 하위권이었다. 40년만의 월드컵 본선진출이었기 때문에 월드컵 본선에 대한 경험이 전무했던 선수단은, 젊음의 패기로 도전했지만 그러기엔 월드컵은 너무 큰 대회였다.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우승후보 이탈리아와 한조였던 팀은 1차전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1:5로 대패하며 곤욕을 치뤘다. 심지어 이 경기에서 위날다는 후반 7분, 심판에게 항의하다가 퇴장까지 당하며 대회 1호 퇴장선수이자 월드컵 역사상 최초로 퇴장 당한 미국선수라는 불명예까지 쓰고 말았다. 이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에게 연달아 패하며 조 최하위를 기록, 세계 축구의 높은 벽을 실감해야만 했다. 그렇게 위날다의 첫 월드컵은 쓰디 쓴 대회로 남았다.

그리고 4년 뒤, 그는 1994 FIFA 월드컵의 참가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자국에서 열리는 대회만큼 위날다를 포함한 대표팀은 지난 대회처럼 개망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착실히 준비해왔다. 그리고 확실히 지난 대회보다는 선수들은 많이 성장했고 홈팬들의 응원까지 힘입은 대표팀의 경기력은 확연히 달랐다.



스위스와의 개막전에서 나온 멋진 프리킥 골

그리고 스위스와의 개막전에서 위날다는 1:0으로 지던 전반 44분, 25야드 거리에서 멋진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며 동점을 만들었다. 위날다의 골로 귀중한 승점 1점을 얻은 팀은 이후 콜롬비아를 격파하며 16강 진출의 9부 능선을 넘었고 3차전 루마니아에게 0:1 패했지만 승점 4점을 얻은 팀은 조 3위팀들 중 4위까지 진출할 수 있는 토너먼트에 3위에 자리하며 역사적인 토너먼트 진출을 일궈냈다. 이후 16강에서 만난 축구 강호 브라질을 상대로 대표팀은 선전했지만 후반 27분, 베베투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허용하며 도전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패배에도 홈팬들은 최선의 경기를 펼친 대표팀에게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냈고 그 중심에는 대회기간 맹활약한 위날다가 있었다. 지난 대회의 아픔을 이겨내고 확실한 대표팀의 에이스로 성장한 뜻 깊은 무대였다.

1995년,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하여 칠레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 득점을 기록했다.

본인의 3번째 월드컵인 1998 FIFA 월드컵에 참가하며 제프 아구스마르셀로 발보아에 이어 3번의 월드컵을 참가한 미국 선수로 기록됐다. 선수 본인과 팀은 아쉬운 경기력으로 전패를 기록하며 허무하게 대회를 마무리 했다.

2000년, 10년동안 미국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고 106경기 34골을 기록한 위날다는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그의 34골은 2007년, 후배 랜던 도노번CONCACAF 골드컵 결승전에서 멕시코를 상대로 페널티킥 골을 기록하며 동률을 기록할때까지 대표팀 최다 득점 기록이였다. 이후 도노번은 2008년 1월 19일, 스웨덴과의 친선경기에서 페널티킥 골을 성공시키며 그의 기록을 경신시켰다.

현역선수에서 은퇴한 그는 국가대표에서의 맹활약을 기려 Honda U.S. Player of the Decade for the 1990s와 90년대 CONCACAF 올스타 팀에 선정되었으며 2004년에는 미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4. 은퇴 이후[편집]



파일:Wynalda_Retired_1.jpg


은퇴 후 위날다는 2005년, USL 리그 2의 베이커스필즈 브리가드의 단장으로 재임했으며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잠시 선수생활을 하기도 했다. 또한 대표팀 동료였던 알렉시 랄라스와 존 하커스 그리고 전 프랑스 국가대표 프랑크 르뵈프등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헐리우드 유나이티드에 입단하여 30대 이상의 아마추어 팀에서 선수로 뛰었다.

이후 미국의 하위리그인 NASL, USL의 팀들의 감독을 맡아 지도자 커리어를 밟고 있는 동시에 ESPN, FOX Sports에서 축구 해설 및 전문가로 활동하며 방송인으로도 종종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5. 여담[편집]


  • 세이부 컵 축구[1]에 미국 대표팀 주장으로 등장한 적이 있다.
  • 2014년, 2번째 부인 아만다 플레처와 결혼했다. 그들은 각자 이전의 결혼에서 얻은 자녀들과 함께 싸우전드 오크스에 거주 중이다.
  • 2018년 11월, 웨스트레이크 빌리지에 있던 그의 집이 화재로 인해 불타버리는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다. 위날다와 그의 가족들은 캘리포니아주의 코로나에 위치한 친적집으로 대피했으며 그 곳에서 TV를 통해 화재 장면을 시청했다. 게다가 웨스트레이크 빌리지에 있던 162채의 집 중 그의 집만 불타버렸다.


[1] 8,90년대 동네마다 있던 오락실 대부분의 게임제목으로 90년대 우리나라 축구를 대표했던 선수인 김주성의 이름을 딴 김주성 축구, 김주성과 붉은악마 등의 타이틀이 쓰였다. 심지어 어떤곳은 김주성의 분노라고 써붙이기도 했다는 전설이 있다. 나이지긋하신 형님, 삼촌들에게 물어보라. 이 게임에서 김주성이 나온 것은 한국-일본 버전이고, 다른 국제 버전에서는 한국과 일본, 미국 대신 스페인프랑스, 네덜란드가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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