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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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Vabadussõda[1]
Estonian War of Independence
러시아 내전, 소비에트의 서방 공세의 일부

기간
1918년 11월 28일~ 1920년 2월 2일
장소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러시아 북서부
교전국 및 교전세력
[[에스토니아 제1공화국|

파일:에스토니아 국기.svg
]] 에스토니아 공화국
[[라트비아 제1공화국|

파일:라트비아 국기.svg
]] 라트비아 공화국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파일:영국 국기.svg
]] 영국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시아 백군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에스토니아 노동 인민 코뮌|

에스토니아 노동 인민 코뮌
display: none; display: 에스토니아 노동 인민 코뮌"
행정구
]]

파일:발트 독일인 깃발.svg
발트 향토방위군
[[자유군단|
]] 자유군단
지휘관
파일:에스토니아 국기.svg 요한 라이도네르

파일: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1918–1937).svg 요아킴 바체티스[2]
결과
에스토니아의 승리
타르투 조약 체결
에스토니아의 독립
1. 개요
2. 서막
3. 과정
3.1. 에스토니아군의 반격
3.2. 발트 향토방위군과의 전쟁
4. 타르투 조약



1. 개요[편집]


1918년 11월 28일에 일어나 1920년 2월 2일에 끝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간의 전쟁.

소비에트의 서방 공세 중 벌어진 전쟁 중 하나였다.


2. 서막[편집]


1918년 11월 말, 붉은 군대는 에스토니아로 진격했다. 제6 붉은 소총 사단은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국경 도시 나르바 를 공격했다.

제6 붉은 소총 사단은 보병 7000명, 야포 22 문, 기관총 111문 , 장갑 열차 1대, 장갑차 2대, 비행기 2대, 구축함 2척의 지원을 받는 보가티르급 순양함으로 공격했다.

붉은군대의 제2 노브고로드 사단은 7,000명의 보병, 12개의 야포, 50개의 기관총, 2대의 장갑 열차 및 3대의 장갑차로 남쪽에 두 번째 전선을 열었다.

당시 에스토니아 군대는 에스토니아 방위군에 속한 2,000개의 경무기정도가 있는 빈약한 무장을 했다.


3. 과정[편집]


2분만에 보는 에스토니아 독립 전쟁

49 붉은 라트비아 보병연대는 12월 18일 발가 철도 교차로를 점령하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에스토니아 제 2도시 타르투를 점령했다. 또한 크리스마스 이브에 제6 적보병 사단은 타파 철도 교차로를 점령하여 수도 탈린의 34km 떨어진곳 까지 진격했다. 그후 에스토니아 볼셰비키는 나르바에서 에스토니아 노동 인민 코뮌을 건국했다.

연말까지 제7 붉은 군대는 탈린에서 동쪽으로 34km, 타르투에서 서쪽으로, 아이나지 남쪽에서 전선을 따라 점령했다.

요한 라이도네르 대령은 에스토니아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1918년 12월 23일까지 600명의 장교와 11,000명의 의용군을 모집하였고, 특공부대와 함께 빅토르 푸스카 대령의 지휘하에 남부 에스토니아에 2사단을 설치하여 군대를 재편하였다.

에스토니아군는 외국의 지원을 받았다. 12월 5일 핀란드는 탄약과 함께 5,000정의 소총과 20문의 야포를 에스토니아에 지원했다.
영국 해군 중대는 12월 31일 탈린에 도착하여 6,500문의 소총, 200문의 기관총 및 2문의 야포를 전달했다. 함대는 두 척의 러시아 구축함 2척을 노획 하여 에스토니아에 넘겼다.


3.1. 에스토니아군의 반격[편집]


1월 2일, 2,000명의 자원병으로 구성된 핀란드 자원병 부대가 에스토니아에 도착하였다. 그후 안톤 어브 대위의 지위하에 3대의 장갑 열차가 탈린에 제작되었다.

1919년 초까지 에스토니아군은 8,000명의 붉은군대와 정면으로 맞서는 5,700명을 포함하여 총 13,000명의 병력으로 증강했다. 강화된 에스토니아군은 1919년 1월 2일과 5일 사이에 제7 붉은 군대의 진격을 저지하고 1월 7일 반격에 들어갔다.

타파는 이틀 후 매우 성공적인 장갑 열차의 활약으로 수복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전환은 1월 12일 라크베레가 해방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나르바를 해방시키기 위해 1,000명의 핀란드-에스토니아군 이 1월 17일 소련 제6소총 사단 후방의 위트리아에 상륙했다 . 그렇게 함으로써 붉은군대의 동쪽으로 후퇴하는 것은 배제되었다. 다음 날 나르바는 해방되었다.
결과적으로 북동부 전선은 나르바 강을 따라 안정화되었다. 11일 만에 1사단 은 200km를 전진했다.

남부 분쟁 지역에서 타르투는 기갑 열차와 타르투마 파르티잔 대대의 신속한 배치를 통해 해방되었다. 제2사단은 붉은군대의 저항이 커지면서 남쪽으로 계속 진격했다. 파주 전투에서 타르투마 파르티잔 대대와 핀란드 지원병은 1월 31일 발가에서 붉은군대 라트비아 보병을 몰아냈다.

1919년 2월 24일 에스토니아의 첫 번째 독립 기념일에 에스토니아군은 19,000명의 병력, 70문의 야포, 230문의 기관총으로 구성되었다.

2월 하반기에 붉은 군대는 에스토니아를 점령하기 위한 새로운 공세를 시작했다. 이를 위해 소비에트 러시아는 새로운 에스토니아 적군을 설립했다. 이들은 약 80,000명 이상의 징집병으로 구성되었다.

나르바 강변의 위치에서 에스토니아 1사단과 러시아 백군 북부 군단은 7차 붉은 군대의 공격을 격퇴했다. 붉은 군대는 나르바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하였지만, 점령하는데는 실패했다. 대부분의 적군은 남부 전선에 집중되어 있었다. 에스토니아 적군은 3월 15일까지 알룩스네, 세토마, 바스트셀리 이나, 라피나 교구를 점령했다.

증원을 받은 에스토니아 2사단은 3월 29일까지 페초리를 반격하여 탈환했다. 그 후, 에스토니아 적군은 강 뒤로 밀려났다.
3월 27일, 에스토니아 3사단은 남부 전선의 서쪽 측면을 따라 배치되었다. 버루에서는 4월 22일 붉은 군대가 1.5km 이내로 접근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결국 5월 상순까지 남동부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4월 25일, 라트비아 적군은 루지로서를 점령했지만 곧 3사단에 의해 결국 후퇴했다.

에스토니아군이 영토를 모두 수복했지만, 적군은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다. 에스토니아 최고 사령부는 러시아 백군 북부 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진격하기로 결정했다. 5월 13일, 북부군은 나르바에서 공세를 개시하여 적군을 기습으로 잡아 제6사단을 파괴했다. 공세는 핀란드만 해안을 따라 영국과 에스토니아 해군과 해병대의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제7적군은 증원을 받아 반격을 가해 러시아 백군을 후퇴시켰다.

5월 24일 페초리에서 공세가 시작되었다. 같은 날 제1 보병사단의 사단장 레온하르트 리트와 함께 적군 600명의 병력이 편을 바꿨다. 결국 에스토니아 적군을 파괴하고 5월 25일 프스코프를 점령하였다[3] 북부 군단은 프스코프의 주민들을 동원하였다.

프스코프 공세와 동시에 에스토니아 2사단과 3사단도 북부 라트비아를 향한 남쪽 공격을 시작했다. 5월 말까지 그들은 알룩스네와 발미에라를 점령했다. 라트비아 서부에서 독일과 라트비아의 합동 공격으로 인해 적군의 상황은 악화됐다. 5월 31일 에스토니아 기병연대 는 2대의 장갑열차를 포함한 많은 양의 열차를 점령했다. 2사단의 급속한 공세는 계속되었고 6월 6일에는 다우가바 강을 건너 젠카필스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3사단은 2사단의 진격을 더 이상 지원할수 없었다.


3.2. 발트 향토방위군과의 전쟁[편집]


발트 향토방위군과의 전쟁은 1919년 6월 5일 라트비아 남부전선에서 발발했다. 카를리스 울마니스가 이끄는 라트비아 민주주의자들은 에스토니아에서 독립을 선언했지만, 소비에트군의 공격으로 리에파야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독일 제국 제6예비군단이 적군의 진격을 막았다. 뤼디거 폰 데어 골츠 백작이 이끄는 독일군은 발트 독일인으로 구성된 발트 향토방위군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은 독일 제국사단에서 근무했던 예비보위사단으로, 라트비아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또한 발트 자유군단도 이들과 함께 싸우고 있었다. 서구 연합군과의 휴전 협정에서 동부에서 볼셰비키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그대로 유지한다는 조항이 있었기에 발트 향토방위군과 같은 단체가 설립될 수 있었다. 제6 예비군단은 라트비아 임시 정부에 충성하는 라트비아 민족으로 라트비아 제1 대대도 포함되었다.

독일군은 라트비아 국가군 조직을 파괴했고 1919년 4월 16일 임시 정부는 친독일 괴뢰 정부인 라트비아 임시정부로 대체되었다. 라트비아 임시정부는 안드리예프스 니데라가 이끌었다. 울마니스는 증기함 사라토프를 타고 피난을 갔다. 제6예비군단은 소비에트군을 격퇴하고 5월 23일일 리가를 점령한 후 북쪽으로 진격을 이어갔다. 이들은 에스토니아군에게 북부 라트비아 점령을 끝낼 것을 요구했다.[4]

6월 3일 에스토니아 총사령관 요한 라이도네르는 독일군을 남쪽으로 격퇴시키고 예리키와 굴베네 사이의 철도를 에스토니아의 통제 하에 두어야 한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에스토니아 장갑열차가 6월 5일 이러한 요구가 이행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동하는 동안 발트 향토방위군은 장갑열차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다음 날 발트 향토방위군은 체시스를 점령했다. 6월 8일 에스토니아군의 반격이 격퇴되었다. 첫 충돌을 통해 에스토니아군은 제6예비군단이 소비에트군보다 더 잘 무장되어 있고, 더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6월 10일 협상국의 주도로 휴전이 성사되었다. 협상국이 독일군에게 에스토니아가 요구한 선으로 철수할 것을 주장했지만 골츠 장군은 이를 거부하고 에스토니아에게 라트비아에서 철수할 것을 주장했다. 6월 19일 발트 자유군단이 림바지와 스트라우페에 있는 에스토니아 제3사단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재개되었다. 에스토니아 제3사단은 크리차니스 베르키스가 이끄는 제2 라트비아 체시스 여단을 포함해 5,990명의 보병과 125명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에스토니아 거점에 대한 독일군의 집중 공격은 6월 22일까지 이루어졌지만 독일군은 목표를 달성하지 몫했다. 6월 23일 에스토니아 제3사단이 반격을 가해 체시스를 탈환했다.

에스토니아 제3사단은 리가를 향해 진격을 계속했다. 7월 3일 에스토니아군이 리가 외곽에 도달했을 때 협상국의 요구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울마니스 정부가 리가로 돌아왔다. 독일군은 라트비아에서 떠날 것을 지시받았고 발트 향토방위군은 라트비아 임시정부의 지휘에 편입되어 붉은 군대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협상국의 지시를 피해 해산된 제6예비군단은 철수하는 대신 독일 괴뢰 라트비아 정부가 공식적으로 고용한 서부 러시아 의용군으로 들어갔다. 1919년 19월 서부 러시아 의용군이 리가를 공격하면서 전투가 재개되었다. 라트비아 정부가 도움을 요청하자 에스토니아는 독일군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2개의 장갑열차를 보냈고, 적군으로부터 라트비아를 보호하기 위해 루반스호 북부에 방어군을 지원해주었다.


4. 타르투 조약[편집]


소비에트 러시아는 1919년 봄까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자 했다. 1919년 4월 25일 헝가리 공산주의자들이 볼셰비키와 에스토니아 사이의 협정을 중재하고자 했다. 그러나 월터 코원은 헝가리의 중재를 수락한다면 에스토니아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겠다고 경고했다. 러시아인들은 4월 27일부터 28일까지 라디오 방송을 통해 평화회담을 주선하고자 했다. 6월 5일 에스토니아 코뮌이 폐지되었고, 7월 21일부터 러시아인이 주도한 방송은 영국 기자 아서 랜섬이 평화회담을 위해 게오르기 치체린이 노력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로 인해 소비에트 정부는 1919년 8월 31일 공식적으로 협상에 대해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에스토니아는 이 평화협상을 9월 4일 수용했고, 실질적인 논의는 9월 16일부터 시작되었다. 에스토니아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핀란드가 협상에 참여하기 전까지 협상을 중단하자고 제안했다.

가을에 북서군은 백검 작전을 개시해 페트로그라드를 점령하고자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무기를 제공했고 영국 해군과 에스토니아군이 작전 지원을 하면서 1919년 9월 28일 북서군은 공세를 개시했다. 에스토니아는 협상국의 요구로 인해 북서군을 지원했다. 에스토니아군은 크라스나야 고르카 요새에 육해군합동공격을 개시했고, 에스토니아 제2사단은 옐리카야 강에 놓인 교량들을 파괴하려고 했으며 에스토니아 제3사단은 피탈로보를 향해 진격했다. 북서군은 페트로그라드로부터 16km 떨어진 지역까지 진군했으나 붉은 군대는 나르바 강까지 백군을 몰아낸다. 백군의 불신으로 인해 에스토니아 최고사령부는 무장해제를 하고 북서군의 남은 병력을 국경 지역에 구금했다.

소비에트 제7군과 제15군은 붕괴된 백군을 추격하면서 나르바 강 일대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거점들을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첫 전투가 11월 16일 루가 강에서 발발했는데 120,000명의 적군과 40,000명의 에스토니아군이 충돌했다. 반복되는 공격을 통해 붉은 군대 제7군은 소소한 성과를 거두었다. 11월 말 적군이 병력을 보충해야 했기 때문에 전선의 상황은 고요해졌다. 에스토니아를 평화 협상에 나오도록 압박하기 위해 12월 7일 적군은 공격을 재개했다. 12월 16일 붉은 군대 제15군의 선봉부대가 나르바 강을 건너면서 에스토니아군의 상황이 위급해졌고, 에스토니아 최고 사령부는 전투 기간 동안 제1사단을 보충하고 제3사단의 본진을 보냈다. 35,000명의 붉은군대 군인들이 사망한 이후 붉은 군대는 12월 말 전투 능력을 소진했다.

11월 19일 얀 투니손이 이끄는 새 정부는 다른 발트해 국가가 참여하지 않더라도 소비에트 러시아와 회담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협상은 12월 5일 재개되었고, 주요 의제는 영토 문제에 관한 논쟁이었다. 12월 내내 회담이 이어졌고 양측은 그들만의 영토에 대한 요구를 주장했다. 협상 와중에도 나르바에서 전투는 이어졌다.[5] 1919년 12월 31일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1920년 2월 3일부터 효력을 발휘했다.

이 조약으로 에스토니아군은 이반고르드와 패초리를 포함한 영토를 할양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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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 전쟁'을 뜻한다.[2] 라트비아인으로, 라트비아식 이름은 유쿰스 바치에티스였다.[3] 며칠 후 러시아 백군이 프스코프에 도착했지만 스스로 도시를 방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부 에스토니아군은 프스코프에 남아 있었고 나머지는 국경으로 후퇴했다.[4] 제6 예비군단의 목적은 에스토니아를 독일 지배 하의 괴뢰국에 편입시키려는 것이었다.[5] 서로 이익을 더 많이 챙기기 위해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