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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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근대사
2.1. 악숨 왕국
2.2. 자그웨 왕조
2.3. 솔로몬 왕조
3. 근현대사


1. 개요[편집]


에티오피아역사를 다루는 문서.


2. 전근대사[편집]


자신들이 인류 문명의 기원이며, '신이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는데 덜 구운 놈이 저기 백인이고, 탄 게 딴 나라 흑인들이며 우리가 정품'[1]이라는 신화를 가지고 있다.

인류 최초로 수수를 재배한 작물 재배 지역 중 하나였으며, 고대에는 나일 강의 상류 국가였기 때문에 그럭저럭 먹고 살만한 수준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 경 이전까지는 간간히 이집트인의 여행기에 등장하는 정도를 제외하면 뚜렷한 기록이 없다. 다만 수단의 카르마(Karmah 혹은 Kerma)와 교류하며 수단과 에티오피아 국경 지대의 가시(Gash) 델타에서 문명이 태동하기 시작한 흔적이 보인다.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지역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뚜렷한 국체(國體)는 D'mt라는 나사 빠진 이름으로만 남아 있는데, 셈어족 계통에서는 주로 모음을 생략하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이 국가는 '다못(Damot)'이라는 이름으로 주로 복원되는데 기원전 700년 경부터 400년 경까지 존속했으며, 수수를 재배하면서 관개의 흔적을 남기고 철기를 사용했으나 사료가 많지 않아 명확한 규명까지는 힘들다.

솔로몬에게 퀴즈 배틀을 신청한 시바의 여왕이 바로 에티오피아 여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기서 밑도 끝도없이 갑자기 제우스 못지않게 여자를 밝혔던 색골이었던 솔로몬과 성행위를 하여 자녀들을 낳았는데, 그 딸, 아들들은 대대로 유대교를 믿었다. 때문에 유대인들 중에는 에티오피아계 유대인도 많다. 다만 솔로몬과 교역한 시바 왕국은 현대에는 아라비아 반도 남쪽의 예멘이라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와 예멘 서로 국가가 진출하고 서로 병합하는 것을 여러번 반복한, 실질적으로 하나의 문명권이었던 관계다. 스바 왕국 자체도 예맨과 에티오피아 양쪽에 걸쳐 있었다. 하지만 어째선지 예멘보다는 에티오피아쪽이 관련 신화나 전설을 전부 선점한 상태.(...) H. 라이더 해거드가 쓴 '솔로몬 왕의 보물'의 배경 무대가 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2.1. 악숨 왕국[편집]


이후 수단쿠시(Kush) 왕조가 번성하면서 한동안 잠잠하던 에티오피아 고원에는 쿠시 왕조가 쇠퇴할 무렵 예멘의 시바 왕국에서 갈라져 나온 악숨 왕국이 등장하였다. 서기 1세기 무렵 에티오피아 고원 일대의 강우량이 증가했는데, 이로 인해 악숨 왕국의 농업 생산량이 대폭 증가하면서 인구가 증가하였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악숨 왕국은 한때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216년~274년, 3세기 살았던 인물)가 로마 제국·중국[2]·페르시아와 함께 4대 강국이라 했을 정도로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다만 실제 국력은 영토·인구·군사력·기술 등을 따졌을 때 저들에 비해 한참 부족했다. 악숨 왕국은 로마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많은 도움들도 받았으며, 당시 중국과 페르시아의 교역로 사이에 있는 길목이었던 홍해[3]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와 인도·중국 사이에서 중계무역을 했던 페르시아에 사는 마니가 악숨 왕국을 과대평가했을 수도 있다. (애초에 마니는 3세기 페르시아에 살던 인물이기에 그가 내린 평가가 무작정 정확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악숨 왕국은 당시 홍해에 진출하려던 로마와 이해관계가 맞아 손을 잡으면서 문명이 더욱 꽃을 피우게 된다.

350년 경에는 지리멸렬해진 쿠시 왕국을 병합하고, 소말리아예멘 지역까지 병합하며 교역의 핵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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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 기독교가 공인되고 20년 뒤인 333년에 에티오피아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339년에는 국교로 선언해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는 아르메니아조지아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나라였다고 한다. 참고로 시리아가 370년에 기독교로 국교를 선언하고 로마 제국은 392년에서야 국교로 선언했다. [4]기독교의 도입과 더불어 그으즈 문자가 도입, 보급되었다. 고대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동방 일대가 오늘날 이슬람 일색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1600년이 넘게 기독교 신앙을 지켜온 나라인 셈이다. 이후 이 나라는 7세기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슬람의 물결에서도 살아남아 기독교 신앙을 독실하게 유지했다. 다만 이슬람의 바다에 홀로 고립되어 있어서인지 기독교 신앙이 독특하게 발달해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정교 형식으로 발전하였다. 고대의 흔적이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이 또한 기독교 사학자들에게는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되고 있다.

5 ~ 6세기에는 동로마 제국사산조 페르시아가 기약 없는 전쟁을 벌이면서 홍해 방향의 무역로가 흥성했고, 악숨도 이 시기에 다시 한 번 전성기를 누린다. 당시 수도 악숨은 인구 2만의 국제 도시였다. 그러나 악숨 왕국의 해상 무역로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하던 예멘의 토후들이 충성 대상을 악숨 왕국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로 교체하고 그 이후 얼마안가 점차 아라비아 반도이슬람 세력이 성장하면서 해상 무역 이권을 상실하였다. 아라비아 반도의 패권을 상실한 이후 내분이 지속되고 세입이 감소하자 수단 지역에서도 노바티아, 마쿠라, 알와 등의 왕국이 성립하면서 힘을 잃어갔다.


2.2. 자그웨 왕조[편집]


악숨은 결국 7세기 이후 크게 쇠퇴하여 10세기 중엽 유대인 여왕 구디트 때 멸망했다고 전하며, 이후 한동안 소국들이 분립하는 혼란의 시기를 맞는다. 이 시대를 종결지은 것이 악숨의 봉신이던 아가우 족이 세운 자그위 혹은 자그웨 (Zagwe) 왕조이다. 기록의 부족으로 정확한 연대 추산까지는 아니나 대체로 1137년부터 1270년까지 5명의 왕에 의한 통치는 인정하고 있다. 이 왕조도 기독교 원리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초까지 자그위 왕조를 통치한 게브레 마스켈 랄리벨라(Gebre Masqel Lalibela)는 다수의 성당을 짓는 한편 이슬람교 세력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대신하여 자신의 국가에 '새 예루살렘'(랄리벨라)을 건설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한편 동부 지역에서는 소말리족을 중심으로 이슬람 공동체가 형성되어 갔다.

십자군 전쟁을 치르던 유럽 국가들과 에티오피아가 접촉한 것도 이때였다. 유럽 국가들은 이슬람교도들이 자기네 배후에 기독교 국가가 있다고 한 얘기를 믿고 기독교를 믿는 나라의 왕 사제왕 요한에 대한 이야기인 사제왕 요한의 전설을 지어내 퍼뜨렸는데, 이게 바로 에티오피아 정교를 신봉하는 에티오피아 제국에 대한 얘기였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는 이 이전에도 이미 잘 알려진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에, 중앙아시아에서 무슬림들을 박해하고 불교를(...) 밀어주던 카라 키타이 왕조에 대한 이야기가 와전되었다는 설이 훨씬 지배적이다.[5] 어쨌든 에티오피아는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 편에 서서 싸웠다. 킹덤 오브 헤븐 등에서 백인 기사와 흑인 기사가 편먹고 싸우는 좀 뜬금 없게 여겨지는 상황은 이래서 생긴 것. 에티오피아는 상술되었듯 흑인과 중동계 백인의 혼혈인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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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솔로몬 왕조[편집]


1270년, 악숨 왕가의 후예를 자칭한 예쿠노 암라크(Yekuno Amlak)가 쇼아 지방에서 봉기하였다. 그는 쇼아 술탄국의 도움으로 자그위 왕조를 무너뜨리고 쇼아 지방에 암하라 족 중심의 솔로몬 왕조를 세웠다. 에티오피아 제국의 시작이었다. 솔로몬 왕조는 초기 통치를 왕의 전사적인 영웅성과 악숨 왕조의 혈통으로 정당화했는데,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왕이 예쿠노 암라크의 손자로 14세기 초에 활동한 암다 세욘 1세(Amda Tseyon)이었다. 그러나 암다 세욘이 기독교를 앞세워 동부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한편 13세기 이래 티그라이 등지에서 수도원이 확산되어 나가면서, 기독교가 통치의 수단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는데 이를 왕의 통치와 연결시킨 인물이 15세기 중엽의 자라 야콥(Zara Yaqob)였다.

자라 야콥은 행정 구역을 통합하고 교구제를 강화하는 한편 악숨에서 대관식을 거행하는 등 왕권 강화를 위해 애썼다. 그러나 이는 종교를 이용한 권위주의적 통치로 여겨져 귀족들의 반발을 불렀고, 이어 어린 왕들이 연달아 왕위에 오르면서 에티오피아는 쇠퇴기를 맞는다. 이러한 16세기 초반 동쪽으로 쫓겨났던 하레르 술탄국의 아흐마드 빈 이브라힘 알 가지(Axmad bin Ibrahim al-Ghazi)가 에티오피아에 침입하자 서쪽에서도 쿠시족이 독립을 위한 반란을 일으켰고, 에티오피아는 1543년까지 14년 간 이슬람 세력에 의해 통치받게 된다.

에티오피아는 포르투갈의 도움을 받아 국가를 회복했으나, 오로모인의 침입으로 남동쪽의 영토를 상실하고 수도를 곤다르(Gondar)로 옮긴 뒤 왕권은 급속히 쇠퇴한 상황이었다. 17세기에는 가톨릭 선교사들과의 충돌이 벌어졌는데 합성론을 믿는 에티오피아 정교회 성직자들은 가톨릭을 믿는 포르투갈인들을 고대 기록에 나오는 아리우스파네스토리우스파로 생각하기도 했다. 또한 기존 에티오피아 정교회 성직자들이 치료 목적의 주술을 행한 것과 다르게 포르투갈 배를 타고 온 예수회 성직자들은 에티오피아인들에게 이런저런 주술을 보여주는데 관심이 없었고 결국 가톨릭 선교사들은 에티오피아 현지 기독교인들에게 외면 받았다. 18세기에 들어서면 짧은 기간 내 다수의 왕이 교체되는 등 절대 좋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특히 1769년에서 1855년까지 '판관 시대(Zemene Mesafint)'에는 각지에서 왕을 옹립하기 위해 분란이 벌어졌고, 이집트의 헤디브 왕조가 에티오피아에 진출하기까지도 했다.


3. 근현대사[편집]


에티오피아의 근대적 개혁은 지방 총독이던 테오드로스(Tewodros)에 의해 본격화된다. 그는 군수공장을 설치하고 지방 군벌들을 억눌렀는데, 이 과정에서 교회의 토지를 몰수하려 하자 교회의 반발을 겪게 되고 1868년에는 영국 원정군의 침략을 받게 되어 자살했다. 이후 권력은 티그라이의 요하네스 4세에게 넘어갔고, 요하네스 4세는 에티오피아의 통일을 위해 군사력과 외교력을 총동원하는 한편 셰와의 메넬리크와 혼인 동맹을 맺는 등 역량을 총동원했다. 그러나 그는 수단의 마흐디 군과 전투하는 와중에 전사하게 된다.

이후 1889년 즉위한 이가 바로 메넬리크 2세였다. 메넬리크 2세는 셰와의 관료제를 국가 통치에 도입하는 한편, 아디스아바바로 천도하면서 전선과 전화, 우방국 프랑스식민지 프랑스령 소말릴란드의 중심도시 지부티와 아디스아바바를 잇는 철도 등을 부설하고 에티오피아 최초의 현대식 병원과 학교를 개축하면서 본격적인 근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또한 기관총을 비롯한 군사 무기의 도입과 군대의 육성에도 노력하여, 당시 우역으로 인한 기근으로 고통받던 남쪽과 동쪽의 오로모인을 대상으로 정복 활동을 펼쳤다. 당시 암하라인들이라고 기근으로 고통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기근의 주 원인은 가축 전염병이었고 농업 경제 비중이 더 컸던 암하라인들이 입은 피해는 반농반목을 하던 오로모인들에 비해 경미한 수준이었다. 오로모 부족들은 속수무책으로 에티오피아에 합병되었고, 에티오피아의 면적이 이전보다 두 배나 확장되었다.

그러나 주변 지역의 위험은 커지고 있었다. 프랑스는 홍해로 들어가는 길목인 지부티를 장악했고 영국은 수단 남부와 소말릴란드를 강탈했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뒤늦게 들어와 에리트레아와 지금의 소말리아 동남부 지역 일부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마침내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기 위해 내란에 가담하는 형식으로 에티오피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 등의 비호를 받던 에티오피아에 의해 1896년 아도와 전투에서 격퇴됨에 따라, 에티오피아는 라이베리아와 더불어 아프리카에서 사실상 유이한 독립국으로 남게 된다(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1913년에 메넬리크 2세의 손자인 이야수가 에티오피아의 황제로 즉위하었지만 행동거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1916년 에티오피아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달달 볶는데 혈안이 되있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 인들에 의해 권좌에서 쫒겨나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메넬리크 2세의 딸인 자우디투가 에티오피아의 여제로 즉위했으며, 그녀와 6촌관계인 타파리의 도움을 받으며 1930년 죽기 전까지 나라를 다스렸다.


3.1. 하일레 셀라시에[편집]


1930년 자우디투가 죽자 타파리에게 제위가 넘어왔으며 하일레 셀라시에라는 칭호를 얻었다. 셀라시에는 메넬리크 2세의 현대화 정신을 계승하여 1931년 에티오피아 최초의 성문헌법을 채택했다. 그는 곧 입헌군주제를 실시하였으며, 여러 근대 문물을 들여온 근대화의 상징으로써 존경받았다. 이탈리아에 대한 항전에서도 크게 활약하였고, 현재 아프리카 연합의 전신인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창설을 제창하였으며 자메이카에선 라스타파리안 운동이라고 하여 살아있는 신으로 모셔진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1935년,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기어코 에티오피아를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국제연맹에서 제명을 감수하면서까지 전쟁에 집중한 무솔리니는 피에트로 바돌리오, 로돌포 그라치아니를 시켜 독가스까지 동원하였으며, 1936년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고 에티오피아를 에리트레아와 소말릴란드와 통합시켜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식민지를 수립했으나 완전하진 못했다.[6] 강점 기간 내내 이탈리아 군대는 에티오피아 전역을 장악하지 못하고 저항 세력의 게릴라전에 시달렸으며, 에티오피아 고원 지역 일부는 1941년 영국군 주도 연합군이 에티오피아로 진격할 때까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지지하는 에티오피아 저항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초반 1941년 5월, 아프리카 전쟁 시작 과정에서 영국군 주도 연합군의 도움과 저항 세력의 내부 호응으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이탈리아군을 아디스아바바에서 쫓아내고 권좌에 복귀했다. 1941년 12월, 에티오피아는 정식으로 연합군 진영에 참여했으며, 1947년 이탈리아와 연합군 진영 간 조약인 '평화협정(Treaty of Peace)'에도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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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군대를 파견한 나라였으며, 1968년에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한국을 방문했을 정도로 한국과 가까운 사이었다. 국가기록원 영상자료에 보면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방한 영상이 있다. 당시 황제의 방한 영상[7] 에티오피아의 영토였다가 1880년대에 이탈리아에게 빼앗겼던 홍해 연안의 에리트레아를 1952년 에티오피아가 다시 차지했다. 원래 이탈리아가 소말릴랜드처럼 신탁통치를 시도했지만 에티오피아의 강한 반발로 좌절되었다.

이후 황제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어정쩡한 태도로 남았는데 경제개발 실패가 이어졌다. 하일레 셀라시에는 근대 기준으로는 명군이었을지 몰라도 2차대전 이후 세계 경제가 급격하게 발전하던 시대 기준으로는 특히 내치분야에서 빵점짜리 군주였다. 현대 경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그는 자국 국민 상당수가 포장도로도 안 뚫려있는 산간 마을에서 소똥으로 만든 원시적인 초가집에서 자급자족하는 사회를 그대로 방치했던 것이다. 의료 기술의 향상으로 인구는 급속히 증가하는데 농경지는 한정된 이유로 극심한 기근과 실업 또한 심각한 문제가 되었으다.1960년 에티오피아는 남동부에 있는 오가덴 지역을 두고 소말리아와 분쟁을 일으키는가 하면, 1961년 에리트레아가 독립을 주장하자 정부가 에리트레아 의회를 해산시켰고 그 결과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1960년대 당시 에티오피아가 잘 살지는 않아도 나름 먹고 살만한 국가였다가 1974년 군부의 쿠데타로 들어선 공산 독재 정권 체제 하에서 최빈국으로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공산정권 성립 이전 제정 시기의 에티오피아도 여타 아프리카 국가들과 다를 게 없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후진국이었다.[8]

제위 말 에티오피아 제국 전역에서 대기근이 발생하자 외국의 구호 단체들이 구호 물자와 식량을 가지고 들어오자, 제국 관리들은 "기근이야 늘상 에티오피아에 있던 것인데, 왜 겨우 이런 일로 우리 일에 간섭을 하는가? 관세를 내지 않으면 구호 물자를 가져올 수 없다."라고 억지를 부려 막대한 이득을 취했으며 그나마 구호물자 대부분은 암하라인 위주로만 분배되었다. 이 때 당시 기근으로 희생된 오로모인, 소말리인, 티그리냐인들은 엄청난 원한을 품게 되었으며 이는 오가덴 전쟁, 에리트레아 독립, 오로미야 분리주의 운동 등으로 촉발되었다.

한국과의 관계도 후술할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 급격히 냉각되어 현재는 뭐…[9] 그 외에도 쿠바 역시 한국전쟁 때 대한민국에 여러 지원을 해주었지만, 그건 바티스타 정권 때였고, 피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후 공산주의 국가가 되며 대한민국을 적대시하며 북한에게 친화적으로 변했었다. 이와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3.2.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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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민심이 황제를 떠났고 얼마 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중령을 중심으로 한 군의 소장파 장교[10]들이 1974년 쿠데타를 일으켜 에티오피아 제정을 폐지했다.[11] 그 결과 에티오피아는 멩기스투에 의해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하였으며 멩기스투 정권은 소련과의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오가덴 전쟁에서 소련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하였고 미국은 에티오피아에 대한 견제로 전쟁 이후 친미로 돌아서게 된 소말리아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하게된다.

멩기스투는 귀족들이 소유한 거대한 장원을 해체해 모든 땅을 국가에로 귀속시켰다. 이후의 혼란은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정점을 찍었다. 멩기스투는 토지개혁에 반대했던 금수저 고위인사를 학살하고 산업을 국유화하는 등 공산주의 정책을 시도했다.

결국 멩기스투는 별볼일 없는 능력으로 쿠바와 소련의 지원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멩기스투는 당시 이미 전근대 상태 그대로 낙후된 에티오피아 각 지방을 스탈린의 5개년 개발 계획을 바탕으로 근대화한다는 프로젝트를 세웠지만, 멩기스투는 운이 지지리도 없었다. 원래 5개년 계획에서 기한을 5년으로 잡은 것은 저개발 농업 국가가 공업화를 할 때 농업의 흉작이나 풍작에 영향을 받게 되므로,[12] 작황에 따른 변화를 고려하여 장기간의 개발 계획을 구축한다는 의미가 더 강했다. 그러나 5개년 개발 계획 당시 소련과 다르게 그의 재임 시기 에티오피아는 기후 변화의 영향으로 거의 계속 흉년이 들었다. 특히 1984년엔 1973년 대기근 못지않은 참혹한 대기근이 발생해 엄청난 양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물론 소련이나 쿠바에서 보내준 돈으로 경제개발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문제는 경제성장 속도보다 인구성장 속도가 더 빨라서 급격한 경제개발 계획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더 가난해졌던 것.

멩기스투는 에티오피아 내 각 민족 사이의 평등을 주장했으나, 1977년엔 에티오피아 내 소말리족 거주 지역을 병합하길 원했던 소말리아가 소말리인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동쪽 국경을 넘어왔다. 이 상황에서 멩기스투도 민족 평등 정책을 때려치고 오로모인, 암하라인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게 되었다. 당시 에티오피아의 북부 해안지대는 이탈리아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비교적 인프라가 풍부한데다가 해안 지대라서 그나마 경제가 발전한 편이었는데, 에티오피아 제국 영토로 편입된 이후에는 소수민족으로서 차별을 받은데다가 에티오피아 대기근 당시 구호식량이 제대로 분배가 안되어 해당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분리독립 의지가 강해진 상태였다. 결국 티그리냐인(티그라이인), 티그레인 등등 북부의 소수민족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하면서 에리트레아 독립 전쟁이 터졌다.

국교인 에티오피아 정교를 믿는 국민(약 45%)과 이슬람교를 믿는 국민(약 40%)의 대결, 부족 간의 내란, 지역 분쟁, 소말리아와의 전쟁, 수단과의 분쟁, 국내 정치 혼란, 경제 빈곤화, 사막화 문제, 극심한 가뭄과 식량 부족 문제, 에이즈 환자 폭증 등이 중첩, 이쯤 되면 하늘도 무심하시다 국가 역사상 최악의 국가 막장 테크를 타며 극도로 쇠약해졌다.

결국 에티오피아군은 압도적인 인구 우세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에리트레아 독립군이나 티그리냐 반군(TPLF)에게 밀리게 되었다. 에티오피아군 탱크가 에리트레아 독립군에게 포위당하자 에티오피아 군은 탱크 부대가 항복하면 적군에게 노획될 것을 우려하여 전폭기를 출격시켜 자국 탱크 부대를 공격하여 파괴시키기도 했다. 지도부 딴에는 탱크는 비싼데 인력은 남아도니 이런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이는데, 현실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무슨 게임도 아니고 일선에서 싸우는 병사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소모품 취급 받는다는 생각이 들며 사기가 꺾일 수 밖에 없었다.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 공화국 군대가 제대로 된 전투의지가 생길 리 만무했다.

1987년 멩기스투는 에티오피아 인민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고, 민정으로 복귀한다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였으며, 국회의원도 선출했지만 사실상 군 지도자들이 여전히 요직을 잡고 있었으며, 멩기스투는 대통령에 오르게 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웃 소말리아가 먼저 막장화되면서 1988년에는 28년간 지속되었던 오가덴 전쟁이 끝나고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 사이에 평화협정을 체결되었다.


3.3. 1990년대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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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멜레스 제나위의 좌익 성향 반군과 에리트레아 독립군, 그리고 보수 성향 반군과 오로모족과 소말리족, 아파르족 등의 반군은 쿠바소련, 북한 등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 공산 정권과 맞서 싸웠으며 이 과정에서 최대 140만 명이 사망했다. 1990년 먹고 죽을 돈도 없던 소련이 지원을 중단하자 위기에 빠진 멩기스투는 그제서야 시장경제를 도입,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고 비공산주의자도 정계 출마를 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했지만 이미 늦어 1991년 멜레스 제나위가 이끄는 에티오피아인민혁명민주전선(EPRDF)이 멩기스투 정권을 무너뜨리고 에티오피아를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북부 티그라이주의 소수민족이었던 티그라이인들은 에티오피아의 실세 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1993년에는 내전과 평화 협상 끝에 에리트레아가 기어이 독립해 떨어져 나가면서 내륙국이 되어 경제적 타격을 받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에리트레아 측은 항구 이용 금액을 마음껏 올리고, 에티오피아 돈은 받지 않으면서 그 타격이 엄청났고, 에티오피아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에리트레아에 대해 경제 제재를 단행하면서 서로 원한이 쌓여 갔다. 여기에 국경분쟁까지 곁들어서 결국 두 나라는 원수지간으로 1998년부터 2년 동안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을 치뤄야 했고 계속된 분쟁을 거듭하다가 간신히 2018년경 마무리 지었다.

전쟁 당시 미국과 이스라엘, 러시아가 강력하게 지원하면서 한 때 에리트레아 공군력 대다수를 소탕하며 막대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번에는 리비아, 불가리아 및 우크라이나가 에리트레아를 지원하면서 전쟁은 일진일퇴를 거듭해 전투에 이기고도 뭐 하나 이득이 없었다. 게다가 과거부터 존재하던 빈곤이 냉전 종식과 함께 더 심해지면서 민심 이반이 심해진 것도 한 원인이었다.[13]

거기에 1990년 이후 소말리아가 지옥으로 변하고, 그 여파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에티오피아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한편 오가덴 반군의 지원을 차단할 생각으로 소말리아를 공격했는데 그 결과 졸지에 소말리아와도 원수지간이 되었고,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2007년 소말리아 몇몇 항구도시를 공격했지만 이후 삽질을 거듭하다가 2009년 철수를 단행했다. 안 그래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에티오피아에겐 이런 전투에 나서는 것도 상당한 부담이었기 때문.[14] 그러다보니 오늘날에도 여전히 에티오피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어쨌든 혼란 속 에티오피아는 새 헌법을 지정해 의원내각제연방제 국가가 되었다. 첫 총선에선 멩기스투에 맞서싸운 EPRDF가 오로모와 암하라, 티그레 민족주의 정당과 연대해 승리를 거두었다. 2000년 두번째 총선에서 EPRDF가 의석의 88%를 싹쓸이해 갔는데 이때부터 부정선거 의혹이 일기 시작했다. 2005년 총선에서 EPRDF가 또 압승을 거두자 야당을 중심으로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되고 시위가 일어나자 경찰이 발포해 193명의 시위대가 사망했으며 전국적으로 6만 명이 체포되었다.

1980년대 초반, 미국 유명 가수들이 모여 부르던 위 아 더 월드와 그 유명한 라이브 에이드도 바로 에티오피아 기근 및 난민 피해자 성금 모금을 위하여 기획된 노래였다. 하물며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 나라는 어렵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탓에 에이즈 환자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엄청난 문제가 되고 있지만, 에티오피아 정부는 사실상 별 대책이 없는 것 같다.

2006년에는 오가덴 지역에 대한 소말리아 측의 개입을 봉쇄할 목적으로, 대외적으로는 이슬람 법정연대의 극단적인 행보[15]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내전 중인 소말리아에 군대를 투입하며 군사개입을 펼쳤지만, 하필 그때만 소말리아 군벌들이 똘똘 뭉쳐서 에티오피아에게 저항하고, 여기에 소말리아 과도정부도 비협조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전쟁수행에 어려움을 겪자 2009년 철수하였다.

단, 2010년대 들어 어마어마한 경제적 성장을 이룬다. 터키나 몽골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경제위기를 기회로 맞아들인 국가들 중 하나. 다만 빈부격차만은 해결은 고사하고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추세라 장기적으로 경제 규모는 올라가겠지만 그와 별도로 남아공 비슷한 처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평가된다.

2010년 총선에서도 EPRDF와 동맹 정당이 국회 536석 중 534석을 차지하고 지방 선거 의석 1,904석 중 1,903석을 차지하였다. 이에 야당이 재선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한편 이 해 G20정상회담에서 말라위와 함께 옵서버(관람객)로 초대되었다.

2012년 20년 가까이 집권해 오던 멜레스 제나위 총리가 사망했고, 후임으로 하일레 마리암 데살렌 총리가 들어왔다. 전임총리와 마찬가지 노선으로 기자와 정치범을 수천 명 가까이 잡아가두더니 이에 반발을 샀다. 2013년 6월 3일 아랍의 봄의 여파를 받은 거센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물론 에티오피아는 아랍권은 아니지만) 기사

2015년 12월에는 50년 만에 발생한 최악의 가뭄으로 에티오피아 주민 1000만명 이상이 식량 부족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경고가 나올 정도로 현재까지도 에티오피아의 상황은 막장이다. 기사

2018년 6월 2일에 에티오피아 정부는 4개월동안 실시된 국가비상사태해제를 추진한다고 BBC가 보도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새 총리인 아비 아머드 알리는에리트레아와의 국경분쟁을 끝내고 에리트레아와 화해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에티오피아가 평화협정을 수용한다고 발표하자 에리트레아측도 긍정적인 신호를 나타내면서 국경분쟁도 해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18년 6월 26일에 에리트레아 대표단이 에티오피아를 20년만에 방문하면서 양국간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시작되고 있다.# 거기에다 에티오피아 총리는 에리트레아와의 항공편도 개설될 것이라고 밝혔다.# 결국 20년만에 양국은 관계를 정상화하기로 합의했고 대사관도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20년만에 에티오피아에는 에리트레아 대사관이 개설되었다.# 거기에다 에티오피아-에리트레아 노선망이 20년만에 재개설되었다.# 그리고 41년만에 에티오피아-소말리아 노선(!)도 개설되었다.#

2018년 8월 8일에는 반군과의 적대행위도 중단했다.#

2018년 10월 25일에 에티오피아에서는 처음으로 여성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에티오피아에선 2019년 6월 13일부터 메시지기능이 차단되고 11일부턴 많은 지역에서 인터넷이 차단되자 국민들이 불만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리고 6월 22일에 에티오피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쿠데타는 실패했다고 총리가 밝혔다.# 또한, 쿠데타를 일으킨 주도자는 사살되었다.#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하면서 최소 16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반발은 점점 거세지는 상황이고 총리 퇴진 요구도 강해졌다.# 그리고 시위서 67명 사망한 것도 집계되면서 민족·종교 갈등 양상도 보이기 시작했다.#

2020년 6월 30일에 에티오피아에서 유명 가수가 피살된 사건이 발생되자 시민과 경찰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시위가 격화돼 최소 166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소요사태로 인해 사망자가 239명으로 늘어났다.#

에티오피아 남부에서 시위가 발생해 17명이 사망했다.#

2020년 12월 26일에 에티오피아 서부에서 종족분쟁이 발생해 200명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에티오피아 보안군이 2020년 6∼7월에 소요 당시 75명 이상을 학살하고 200명 가까이 다치게 했다는 내용의 새로운 보고서가 나왔다.#

2021년 6월 21일에 총선이 실시됐다.#

2023년 2월 1일, 아비 총리가 티그라이 반군 지도부와 만났다.#

3.3.1. 2020년 에티오피아 내전[편집]


에티오피아의 티그라이에서 연방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방의회 선거에 돌입했다.#

11월 4일에 에티오피아 북부 티그라이 지역에서 정부군과 지역 반군 간 교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에티오피아 정부에선 티그라이에 군대를 파견했다고 밝혔다.# 11월 6일에 에티오피아 공군은 티그라이의 무기고 등을 폭격했다.# 11월 9일에 아비 아메드 총리는 곧있으면 내전이 종식될 것이라고 밝혔다.# 수천명이 수단으로 피난을 갔다.#

에티오피아 정부와 티그라이인민해방전선간 갈등이 장기화되고 있다.# 앰네스티측에서는 티그라이 분쟁중 민간인 학살이 대거 발생되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에티오피아와 티그라이간의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에리트레아도 큰 피해를 입고 있다.# 또한, 주변국에도 영향을 줄 우려를 낳고 있다.# 에티오피아군이 티그라이 주도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 전투가 격렬해지면서 티그라이 주민들이 수단으로 피난을 가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어서 국제사회에서도 에티오피아에 압력을 주고 있다.#

11월 17일에 아비 아머드 총리가 티그라이에 대한 군사작전이 최후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티그라이에서 일어난 내전이 인종차별로 비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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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티오피아에 관심이 있으면 알겠지만, 에티오피아인은 흑백혼혈들이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사람들보다 피부색이 옅다.[2] 마니가 살던 시절 중국은 분열기였다.[3] 19세기에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뚫은 것도 이 홍해 루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으며, 현대 미국도 홍해를 중요하게 여기고, 중국 역시 이 곳을 핵심 이권이 달린 지역으로 여겨 최초의 해외 군사기지를 이 지역에 위치한 지부티에 건설하였다.[4] 이 서술은 좀 이상한 게 370년 당시 시리아는 독립국이 아닌 로마 영토였다.[5] 이런 들쑥날쑥한 소문들이 발생한 원인은 1210년에서 1220년까지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중동의 모든 국가들이 순식간에 칭기스칸에게 정복당하면서 주체의 구분 없이 십자군 측에 전달된 데 있다. 쿠츨루크와 칭기스 칸의 이야기가 뒤섞였거나, 혹은 특정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선전용 낭설인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사제왕 요한이 죽었다는 소식도 한동안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게 했는데 1248년에 몽골 제국 장군 엘지기데이가 보낸 네스토리우스파 사신들이 키프로스에서 프랑스 루이 9세를 접견했는데 그들은 루이 9세에게 요한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편지를 전했다. 이런 이야기를 유포한 데에는 몽골제국이 유럽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제왕 요한을 정복한 것이 자신들이라고 강조하여 유럽의 자발적 복속을 유도함으로서 유럽을 손쉽게 식민지로 만드려는 의도와 동시에 이는 몽골 제국이 세계정복 과정에 유럽을 대상으로 만들어낸 교묘한 정치적 선전이었다.[6]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패배하여 5년여 동안 강점되었으나 역사가 다수는 이를 에티오피아의 식민화라고 인식하지 않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 이탈리아와 에티오피아를 포함한 연합국 진영 간의 '평화협정(Treaty of Peace)'에서도 이탈리아의 강점은 법률적으로 그 합법성이 부정되었고, 오히려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에 전쟁 배상금 성격의 배상금을 지급해야만 했다.[7] 지금도 강원도 춘천에는 황제가 직접 심은 상록수가 엄청 커서 잘 자라고 있으며 관광명소중 한 곳인 공지천 근처에 이디오피아 참전기념관이있으며 이디오피아의 이름을 딴 유명한 커피샵도 있다.[8] 그나마 정치, 경제 모두 불안정하여 허구언날 내전 벌어지던 다른 국가들과 달리 그나마 안정적이긴 했다.[9] 에티오피아가 공산화 이전에 부국이었다는 말이 있으나 1970년 에티오피아의 1인당 GDP는 UN에 의하면 83$에 불과하다. 즉 에티오피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원래부터 극히 가난한 나라였던 것. 멩기스투가 잘살던 에티오피아를 말아먹은 게 아니라 이전부터 막장이던 걸 더 막장으로 만든 정도에 불과하다. 종종 에티오피아의 1인당 GDP가 6.25전쟁 당시 3천달러였다는 설도 인터넷에 떠도는데, 이 수치도 비현실적인 것이 세계은행 자료에 의하면 독일일본이 1인당 GDP 3천달러를 돌파한 시점이 각각 1971년, 1973년이다. 심지어 미국도 1962년에 가서야 3천달러를 돌파한다.# 그 시기는 달러가 금본위제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엄청나게 가치가 높은 화폐였다.[10] 공교롭게도 주동자인 멩기스투는 황제가 매우 아끼던 장교였다.[11] 이때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살해되어 유해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한편 멩기스투 몰락 이후에 와서야 옛 왕궁을 파서 황제의 유해를 찾았다.[12] 본격적으로 2차산업이 발전하지 않은 국가 입장에서는, 농업 같은 1차산업 생산물을 수출해서 벌어들이는 돈이 주요 외화 수입인 것은 물론, 도시 노동자들에게 공급할 식량이 부족하면 해외에서 수입하기도 어렵다.[13] 실제로 국내 언론에 따르면 1990년대 말 전쟁 당시 에티오피아 국민들은 정부가 미친 게 아니냐며, 국민은 굶어 죽는데 무슨 전쟁질이냐고 대놓고 욕했다고 전하고 있다.[14] 물론 전면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듭했다. 상대는 에리트레아군보다 못한 이슬람 법정연대 소속 민병인 반면 에티오피아군은 동아프리카의 정규군이니. 하지만 그 다음 통치가 문제였다. 게다가 소말리아는 북한과 달리 외부에서의 지원이 상당히 용이한 게 특징이기도 하다.[15] 다만 법정연대는 오늘날의 IS나 알카에다 같은 국제 테러조직보다는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 민족 무장집단인 탈레반이나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민족주의 저항 단체인 하마스와 더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