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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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끼고 형성된 주택가와 카스바 (성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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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이후의 주요 건축물인 시디 부 마클루프 모스크



1. 개요
2. 역사
2.1. 고대 (시카)
2.2. 중근세
2.3. 근현대
3. 갤러리
3.1. 성벽과 카스바
3.2. 로마 유적
3.3. 시디 부 마클루프 모스크
3.4. 전통 미술 박물관
3.5. 성 베드로 바실리카
3.6. 옛 금요 사원

아랍어: الكاف
프랑스어: Le Kef
영어: El Kef

1. 개요[편집]


튀니지 서남부의 도시. 베자에서 서남쪽으로 60km, 카이라완에서 서북쪽으로 100km 떨어진 구릉 지대에 위치한다. 아우레스 산지 동부의 주요 도시로, 알제리와의 국경에서 불과 30km 떨어져 있다. 인구는 5만명에 불과한 중소 도시이지만, 고대와 중세 시기 유적이 많아 튀니지의 숨은 여행지로 평가받는다. 해발 800m의 고원에 위치한 덕에 겨울에는 간혹 영하로 떨어지기도 하는 등 비교적 선선한 기후를 지니고 있다. 고대에는 시카 베네리아, 율리아 키르타 등으로 불렸다. 로마 시대 목욕탕과 성 베드로 바실리카, 오스만 시대의 카스바, 도시의 수호 성인이라 할 수 있는 시디 부 마클로프 영묘 등이 주요 볼거리이다. 프랑스 지배기의 지명은 르 케프였고, 튀니스에서 이어지는 철도의 종착지이다.

2.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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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유적, 중세 이슬람 사원, 근대 오스만 성채

카르타고 시기에 시카로 불렸고, 이후 로마 제국기에 시카 베네리아로 명명되었다. 식민도시로 승격되어 콜로니아 율리아 키르타로 다시 명명된 도시는 키르타 노바, 샤크바나리야 등으로 불리다가16세기 무렵 아랍어로 '바위'라는 의미인 알 카프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른다.

2.1. 고대 (시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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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의 목욕탕 유구

먼 옛날부터 케프 (시카)는 테베사 (테베스테), 베자 (바가)와 함께 아틀라스 산맥 동부 고원지대의 주요 도시들 중 하나였다. 제1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에 대한 배상금 지불로 재정이 빠듯해지자 카르타고 정부는 누민디아 용병들을 시카에 결집시키고, 자금이 마련될 때까지 그곳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시카에 머물며 용병들은 카르타고 장군들이 실제로 주려는 생각도 없이 장담한 금액을 세어본 후 지급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카르타고 장군 한노가 파견되어 과한 요구는 포기하라고 설득하려 했는데, 기다리던 차에 분노한 용병들은 반란을 일으켜 카르타고를 향해 진군하였다. (기원전 241년) 이렇게 시작된 반란은 튀니스를 거점으로 1년여간 이어지다가 카르타고의 명장 하밀카르 바르카에게 진압되었다.[1]

제2차 포에니 전쟁 후 시카는 로마의 동맹 누미디아의 영토가 되었다. 다만 누미디아 내전 중 유구르타에 의해 로마인이 살해되며 유구르타 전쟁이 터졌고,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로마군이 파병되었다. 전쟁 도중 메텔루스는 부관 마리우스를 시카로 파견해 보급품을 징발하게 하였다. 이를 알게 된 유구르타는 병력을 이끌고 시카로 향하였고, 성문을 나서던 로마군과 전투를 벌이며 성내의 주민들로 하여금 로마군의 후위를 포위하게 하였다. 하지만 마리우스 휘하의 로마군은 필사적으로 싸워 주민들이 전투 대형을 꾸리기 전에 누미디아측 봉쇄를 뚫고 도주하는데 성공하였다. 얼마 후 집정관이 되어 돌아온 마리우스는 술라와 함께 유구르타를 사로잡고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이로써 시카는 로마령이 되었다.

2.1.1. 로마 제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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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바실리카 (다르 엘 코우스) 유적

팍스 로마나 시기 카르타고에서 군단기지인 테베스테로 향하는 로마 가도가 놓인 시카에는 일대의 농산물이 집산되었다. 또한 베누스 여신의 성지가 자리하여 당대 지명인 시카 '베네리아'의 유래가 되었다. 다른 베누스 신전들과 마찬가지로 그곳의 여사제들은 매춘을 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풍조는 3세기 들어 기독교가 전래되고 일찍부터 주교구가 설치되며 사라졌다. 서기 265년에는 갈리에누스 황제에 반발한 프로콘술 (집정관 출신 총독) 비비우스 파시에누스와 리비아의 장군 파비우스 폼포니아누스는 인자하고 유능한 장교 티투스 코르넬리우스 켈수스를 시카에서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들은 여신상에 걸려있던 황실 예복을 가져와 켈수스에게 입히며 위세를 보였다. 하지만 불과 일주일만에 켈수스는 갈리에누스의 사촌 갈리에나에게 살해되었고, 황제에 충성하던 주민들은 그 시체를 수습하지 않고 들개의 먹이가 되도록 방치하였다. [2]

5세기 초엽 현지 성직자인 시카의 아피아리우스 (Apiarius of Sicca)는 시카의 주교 우르바누스에 의해 파문당한 후 로마 대주교, 즉 교황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며 구제를 청하였다. (418년) 그의 청원을 수용한 교황 조시무스는 아피아리우스의 복권 판결을 내렸는데, '로마 주교'의 월권이라며 반발한 북아프리카의 주교들은 419년 5월 카르타고 공의회를 열어 아프리카 교회의 자치를 의결하고 재차 아피리아누스를 파문하였다.[3] 로마 주교의 아프리카 주교들에 대한 개입을 두고 벌어진 갈등은 이후로도 계속되다가, 439년 반달족의 침공으로 도나투스파가 득세하고 주류 교회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5세기 후반, 가프사토주르 등의 내륙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시카 일대 역시 베르베르 인들의 영토가 되었다.

534년경 시카를 포함한 튀니지 일대는 동로마 제국에 의해 수복되었다. 베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시가지 북쪽 언덕에 성채를 세우고 시내의 성당들을 비잔틴 양식으로 재건하였다. 한편 기독교화의 결과로 북아프리카의 여러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에게 충성을 표하기 위해 로마 카피톨리눔의 주신인 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를 모시던 주신전 (카피톨리눔)은 성 베드로 바실리카로 개조되었다. 이슬람 정복 후 성당은 모스크로 전환되었고, 1891년 약간의 보수를 거친 후 다시 성당으로 활용되었다. 다만 지붕이 없는 상태이기에 종교적 목적으로 활용되기에는 제약이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는 성당도 모스크도 아닌 일반 유적지인 다르 엘 코우스로, 주요부가 잘 보존되어 있다.

2.2. 중근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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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디 부 마클루프 모스크

반달 왕국 시대의 쇠퇴를 극복하지 못하고 중소 도시로 유지되던 시카는 688년 우마이야 왕조에 의해 습격당한 후 정복되었다. 도시의 기독교 공동체는 빠르게 소멸하였고, 성당들은 점차 버려졌다. 성채 기슭에 4세기경 세워진 사각꼴의 건축물은 금요 모스크 (자마아 엘 케비르)로 전환되었다. 특별한 사건 없이 중세 내내 유지되던 도시는 16세기 들어 기존 지명인 시카 혹은 시카 베네리아가 와전된 샤크바나리야로 불리던 도시는 아랍어로 '바위'를 의미하는 케프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그 무렵 수피 성인 사이디 압둘라 부 마클루프가 가족과 함께 정착하였다. 음악을 통한 해탈을 중시하던 아이사위야 종단의 설립자엘 하디 베네스 엘 메크네시의 제자인 그는 마그레브 일대를 여행하며 설법하다가 엘케프에 정착하여 사망하였다. 1600년을 전후로 하여 지어진 그의 영묘 (자위야)와 모스크는 튀니지의 수피 건축물 중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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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이니야 카스바

17세기 들어 튀니지 일대를 요새화하던 오스만 제국은 케프에도 1612년에 기존 비잔틴 성채를 보수하여 현재의 카스바를 세웠고, 상설 수비대 (우자크)의 주둔을 위한 병영도 지어졌다. 1679년, 1740년, 1806년에 알제 총독령과 대립하던 튀니스의 베이들에 의해 증축이 이루어진 카스바는 2개의 성채를 지닌 강력한 요새가 되었다. 그럼에도 1756년 케프는 알제리 군에게 함락되어 약탈당하였고, 1881년 4월에는 프랑스 군에게 점령되었다. 바르도 조약에 반발하여 봉기가 벌어진 도시들 중 초기에 함락된 경우에 속하는 케프의 카스바는 프랑스 지배기에 유적 박물관으로 활용되었다. 1884년 7월 8일, 프랑스 당국은 군정을 끝내고 케프를 정식 코뮌으로 승격시켰다. 케프는 프랑스령 튀니지에서 처음으로 정식 도시가 된 지역이었다.

2.3. 근현대[편집]


2차 대전 기에는 튀니지의 임시 총독부가 위치하였고, 전후 벌어진 알제리 독립전쟁 시에는 프랑스 당국의 감시를 피해 알제리 국경과 가까운 케프에 민족해방전선 (FLN)의 지휘 본부가 들어섰다. 이러한 연관성 덕에 1973년, FLN 출신의 알제리 대통령 우아리 부메디엔은 케프에서 튀니지 대통령 하비브 부르기바와 정상 회담을 갖고 튀니지-알제리 연방 구성을 제안하였다. 다만 회담 결과 후자는 연방 수립은 거부하고 대신 양국 간의 경제 협력 강화에 합의하였다. 다만 현재까지도 숙원 사업인 알제리 방면 철도 연결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3. 갤러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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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성벽과 카스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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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기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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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바 건물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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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로마 유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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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유적 기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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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문틀 장식과 기독교 묘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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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시디 부 마클루프 모스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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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장식

[시디 부 마클루프 사원 기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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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전통 미술 박물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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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년 수피 라흐마니아 종단의 자위야 (수도원)으로 세워진 건물로, 1970년 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3.5. 성 베드로 바실리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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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성당 기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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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옛 금요 사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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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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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르타고 정부는 명망이 높은 장군 게스코 등의 사절을 보내어 설득하려 했으나, 강경파인 스페디우스와 마토스의 선동으로 용병들은 게스코를 포함한 사절단을 구금하였다. 이에 카르타고가 전쟁을 선포하자, 반군은 사절단의 손과 발을 자르고 참호에 던져버렸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반란이 진압된 후 카르타고 측은 반군을 모두 십자가형에 처하였다[2] 또한 켈수스의 흉상을 만들고 이를 십자가 위에 올린 후 주변에서 춤을 추며 승리를 기념했다고 한다[3] 몇년 후 그는 결국 자신이 틀렸다고 자백하며 은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