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요리/원인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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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자연적 원인
2.1. 지리적 한계
2.2. 문화적 요리치(料理痴)설
3. 문화적 원인
3.1. 종교적인 제약
3.2. 식문화에 대한 경멸
3.3. 금욕적이고 변태적인 교육 방식[1]
3.4. 요리문화의 샐러드
4. 역사적 원인
4.2. 제2차 세계대전
5. 결론


1. 개요[편집]


오늘날 영국 요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발생한 원인으로는 여러가지 이유가 꼽힌다.


2. 자연적 원인[편집]



2.1. 지리적 한계[편집]


전 세계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냉동/냉장을 통한 식재료의 저장 및 유통, 장기간 보존 가능한 가공 방식 등의 기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신선한 식재료를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산업혁명 이전까지 음식이란 현지에서 확보 가능한 것으로, 그 식재료를 얻을 수 있는 시기에 빠르게 이용해서 만드는 것이 보편적인 진리였다.

영국이 있는 브리튼 섬은 흔히 영국하면 우산을 든 신사를 떠올릴만큼 기후가 좋지 못하며, 일조량도 높지 않다. 빈약한 일조량은 그대로 신선한 야채와 과일, 향신료의 결핍으로 이어졌다. 브리튼 섬의 토지 자체는 평야의 비중이 높고,[2] 토질이 비옥하기 때문에 곡물과 육류는 풍부하게 얻을 수 있었으나 나머지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영국을 둘러싸고 있는 북해는 해양이 거칠기로 유명한 바다이다. 어업 또한 근대 이전까지는 크게 발달하지 못했으며, 거친 바다에 대한 공포는 오징어나 낙지 같은 두족류에 대한 혐오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영국인들은 육류와 곡물 등의 식자재는 풍부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해산물과 향신료의 부재는 요리 가짓수의 단조로움으로 직결되었다. 괜히 영국을 상징하는 요리 중에 '로스트 비프'가 있는게 아니다. 그래서 영국인의 별명도 '비프 이터(Beef eater)'라고 한다. 해산물보다 쇠고기를 더 애용해서. 사시사철 빵과 스테이크는 먹을 수 있는 비옥한 토지지만 그것 말고는 마땅한 식재료가 없는 곳이 바로 그레이트 브리튼 섬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유럽의 다른 국가, 예를 들어 프랑스나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나라들 경우 풍요로운 토양에 넉넉한 일조량으로 이전부터 온갖 향신료와 채소를 이용한 식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으며, 지중해는 북해에 비하면 훨씬 안전하고 따뜻한 바다였기 때문에 어업도 일찌감치 발달했었다. 기본적으로 요리라는 것이 식재료에 따라 그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만큼, 많은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환경에서 좋은 식문화가 발달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볼 수 있다. 지금에야 냉동/냉장 기술이 워낙 좋기 때문에 전세계의 질좋은 식재료를 일반 서민들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편이지만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실 냉장 기술이 발달한 현대에도, 그 나라 토질에 맞지 않는다면 주력 '국민 식재료'로 써먹기에는 꽤 힘들다. 재료 자체를 구할 수는 있으니 별미로 인기를 끌 수는 있겠지만 모든 국민들이 매일같이 먹기에는 비용이나 공급량 등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3] 따라서 '지리적 한계'로 인한 '부족한 식재료 풀'이 영국 요리의 다양성을 저해시킨다고 볼 수 있다.


2.2. 문화적 요리치(料理痴)설[편집]


영국 요리의 악명을 단지 영국인들의 요리 솜씨나 지식, 또는 요리에 대한 관심이나 열의의 부족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자국 요리가 세계적으로 악평을 듣는다는 건 영국인 자신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요리를 잘 하려는 의욕이나 관심은 적지 않다. 그래서 영국 요리는 악평을 듣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도 TV 요리 프로그램이나 요리책이 잘 팔리고 있고[4] 고든 램지제이미 올리버같이 세계적인 스타 요리사들이 영국에서 배출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영국 음식에 대한 악평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5]

같은 영국 요리라도 다른 나라 사람이 조리를 하면 꽤 먹을 만하다고 한다. 그러니 영국의 재료나 레시피가 문제라기보다는 음식을 지나치게 삶고 찌고 튀기고 짜게 만들고도 그게 지나치다는 걸 느끼지 못하는 영국인의 요리에 대한 센스의 문제가 더 크다고 하겠다. 증언

또한, 요리는 미각적인 것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맛있어 보이게 만드는 것도 매우 중요한데, 영국 요리는 시각적으로도 다른 요리에 비해서 별로 맛있게 보이지 않는다. 영국 요리는 혀에 대한 테러일 뿐만 아니라 눈에 대한 테러이기도 하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기에는,괴상하거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요리를 하고도, 영국인들은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이것은 정말로 영국인들이 요리에 대한 열정이나 개념 자체가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거나, 다른 나라 사람들과 안드로메다급으로 다른 요리에 대한 개념이나 음식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향락적이기보다, 투쟁적이고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을 주장하는 개신교의 영향이 짙은 영국인의 인생관이 문제가 된 것이다. 사실, 영국인들의 인생관과 문화는 인생을 즐기면서 누리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참고 견디면서 투쟁하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그리고 이런 전투적, 자학적 인생관은 다양한 향락적 문화에 기반해 삶을 하느님의 선물로 보는 가톨릭, 남유럽 문화권에 정면도전하며 인간의 무지함과 비참함을 강조하며 따라서 유일한 희망은 교회가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 주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맡기는 북유럽 개신교권 전반이 공유하는 배경이다. 괜히 더글러스 애덤스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질 나쁜 영국 샌드위치를 들어 -그 잘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고 나오지만- '속죄 의식'에 빗대는 게 아니다. [6] 그래서,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은 스포츠나 전쟁에 관련된 무기 개발같이 경쟁을 하는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발전했지만 그에 비해서 전통적으로 음악, 미술, 춤이나 성문화나 요리 등 즐길거리는 대륙에 비해서 매우 부진했다. 한편 그 영국에서조차 백안시되던 급진적인 청교도들이 건너간 곳이 미국이지만 이들은 신대륙에서 남아돌아가는 식재료에 스페인인, 프랑스인 같은 나쁜 친구들을 사귀며 케이준 요리 같은 향락(?)적인 식도락에 빠져드는 타락(....)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영국인들은 좋은 요리를 먹어도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형편없는 요리를 먹더라도 그다지 불평도 하지 않고 그냥 만족하는 경향이 있다. 요리나 음식이란 생활의 활력이나 인생의 즐길거리가 아니라, 단지 자동차에 기름을 채우듯이 그저 생존을 위해 영양을 보충하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다.[7] 이런 식으로 좋은 요리와 나쁜 요리를 구별도 제대로 하지 못하니, 음식 솜씨가 전혀 나아질 수가 없는 환경이 된 것이다.

마치 음의 높낮이나 장단의 어울림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노래를 못하는 음치(音痴)가 되는 것처럼, 어울리는 음식의 맛을 구별할 줄 모르는 미각치(味覺痴)이다 보니, 요리치(料理痴)가 되는 거다. 나무위키요리치의 현실 사례 항목에도 당당하게 영국인이 등록되어 있다.

또한, 영국인 문서 설명에도 전세계에서 인정한 요리치, 후각치, 미각치 집단이라고 나와있고, 실제로 미국의 저명한 과학잡지 사이언스에서 "영국인들의 유전자에 후각과 미각이 선천적으로 결여되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라고 주석까지 붙어있다.

3. 문화적 원인[편집]



3.1. 종교적인 제약[편집]


영국 특유의 청교도 금욕주의는 근대 영국 식문화의 발전을 저해하는데에 일조했다. 프랑스 요리를 비롯한 세계 여러 요리들의 발전 과정을 보면, 사치스러운 풍조와 화려한 식문화에 대한 특정 계층의 열의[8]가 전반적인 식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크게 일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프랑스 요리가 아주 좋은 예시인데,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프랑스 서민들의 식문화는 지금의 프랑스 요리처럼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혁명 전엔 귀족들의 고급 식문화와 사치스러운 풍조가 당시 프랑스 귀족들의 식문화를 보다 고급스럽게 만들었고, 이게 혁명으로 붕괴되자 귀족 문화를 본받아 자신들을 돋보이게 만들고 싶어했던 상공 계층 및 부르주아들에게 전파되었으며 차차 근대 이후에는 전국민에게까지 확산되어온 결과물이다. 한국에서도 궁핍했던 시절을 거쳐 70~80년대가 되자 늘어난 중산층들이 경양식 요리를 찾음으로써 외식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잡은 역사가 있고 비슷하게 2000년대 초반 패밀리 레스토랑 붐이 있어서 이러한 식문화가 정착하고 발전한 사례가 있다.

하지만 영국은 상류층과 서민 사이를 잇는 중간자 역할을 해야할 젠트리, 요먼 계층들이 대부분 청교도들이었기 때문에 청교도 특유의 금욕주의에 따라 식문화를 사치스럽게 만든다는 발상 자체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산업혁명 시기에도 고스란히 이어져, 기술의 발달로 식재료의 전국적인 유통과 국가간 수출입이 서서히 가능해지는 시기가 되어도 영국에서는 사치스러운 식문화 풍조 자체가 생성되지 않았다. 아직까지 돈없는 서민들에게까지 기술 발전의 혜택이 돌아갈 시기는 아니었기에 전세계의 풍부한 식재료를 끌어다모을 재력을 갖춘 계급들이 나서서 해줘야 하는데 금욕주의 풍조는 이때까지 이어져 식문화를 천대하는 경향은 여전했기 때문. 이로 인해 영국의 인도음식 침투도 영국 현지인들이 나서서 진행한 것이 아니고, 영국으로 이민을 온 인도와 파키스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청교도 금욕 문화가 널리 퍼졌기에 영국 기독교인들은 금요일엔 금육, 일요일은 교회에 가기 전까지 단식하는 교리가 있었는데, 이런 교리는 선데이 로스트와 피시 앤 칩스가 성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9] 여기에 한발 더 가서 영국 가정의 음식은 일요일에 엄청난 양의 고기를 구워서 그날 저녁에 먹고 남은 고기와 밀가루 기반의 요리들로 그 주의 메뉴를 편성하는 식으로 발전되었으며, 이의 여파가 다름아닌 셰퍼드 파이 와 파이 앤 매시, 샌드위치 등이 영국의 가정식의 필수요소로 자리매김됐다고 피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재료가 밀가루, 한번 구운 고기, 감자, 버터 및 제철 채소 등으로 제한되니 나올수 있는 결과들도 한정적이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 영국 요리에서 유별나게 스튜계열 요리가 적은 이유도 염장고기 조리의 산물이며, 가정이든 군이든 재료의 다양성이나 조리방식이나 생계 패턴이나 종교적 문화로 인해 상당히 경직적이고 요리 전반의 고착화를 불러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 결과 영국의 식문화는 왕족을 비롯한 소위 상류층 계급과 이를 제외한 하류층의 식문화가 서로 분리되어 있다. 영국 상류층들의 식문화는 어느 유럽 귀족 못지 않게 화려했으며 지금도 소위 '파인 다이닝'이라고 불리는 고급 레스토랑 식문화는 크게 인프라가 형성되어 있다. 괜히 영국에 세계적인 셰프가 즐비하고 고급 레스토랑이 런던에 넘쳐나는게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식문화는 일반적인 영국 서민들에겐 특별한 날에 한번 먹어볼까한 수준의 음식이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이 향유하는 '영국 요리'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고 볼 수 있는 것.

이런 종교적인 규제의 발생 원인 중에는 지리적 요인이 결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당장 이슬람권에서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 이유 중에 규율이 만들어질 당시 돼지 사육 환경이 열악했고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영국도 지리적 환경이 화려한 식문화를 일구기 좋은 환경이었다면 굳이 이를 종교적인 근거를 대며 제약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당장 영국에서 건너간 청교도들이 개척한 미국의 음식 문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미국은 현재는 물론 과거에도 영국 이상으로 종교의 영향력이 막강한 사회였는데도, 그리고 미국 요리 자체가 영국 요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도 미국 요리가 맛이 없다는 소리가 나오지는 않는다. 상대적으로 종교의 영향력이 덜한 북동부 미국 요리보다 아직도 종교가 강한 영향을 행사하는 남부 미국 요리가 더 맛있다고 평가를 받는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당장 프라이드 치킨이 탄생한 곳이 미국 남부다(...). 반대로 가톨릭 문화권 아일랜드는 음식 문화 면에선 영국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즉, 종교는 어디까지나 음식 문화에 영향을 주는 부수 요인일 뿐, 주 요인은 지리와 기후 같은 자연환경이다.

3.2. 식문화에 대한 경멸[편집]


잉글랜드의 문화 인류학자 케이트 폭스가 쓴 <영국인 발견>을 보면 영국인들은 타 유럽인들에 비해 요리에 관한 열정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청교도 특유의 금욕주의도 국민 생각 전반에 잔존해 있어, 요리 자체에 관한 열정을 비웃는 분위기와 문화 역시 영국 요리의 질을 떨어뜨리는 데 일조한다고 말한다. 마치 북미에서 패션에 관심이 지나치게 많은 남성이 동성애자로 몰리는 것처럼 잉글랜드에서는 요리하는 남자들을 동성애자로 여기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10]

이 때문에, 영국 최고의 스타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는 언제나 거친 노동자 계급을 연상시키는 동부 런던 특유의 코크니 억양을 사용하고 스쿠터, 음악, 섹시부인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이성애자임을 강조한다.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는 고든 램지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온갖 욕설과 소리도 꽥꽥 지르면서 남자다운 거친 사나이 이미지를 어필한다.

거기에 요리 맛을 즐기는 것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아서 요리를 즐긴다기보다는 소비한다는 개념이 강하고, 좋은 요리에 대한 수요도 떨어진다. 이 때문인지 영국인들은 맛없고 투박한 영국 요리에 마초이즘을 느끼며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까지도 보인다. 물론 영국인 특유의 자학성 농담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을 뿐일지 모르지만, 그들은 영국 요리에 대한 농담을 즐겨한다. 당연히 모든 영국인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국 요리가 맛없다는 말에 분노하며 직접 만들어 보인 소녀에 대한 기사를 보면 소녀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3.3. 금욕적이고 변태적인 교육 방식[11][편집]


사실 중세 시대부터 영국은 유독 그리스도교, 특히 청교도의 영향으로 금욕주의가 매우 성행했다. 이 때문에 풍족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매우 좋지 않게 여겼는데 특히나 요리 쪽에서는 이게 매우 심했다. 실제로 1336년부터 사치금지법을 제정해 식탁에 오르는 요리의 수를 2가지로 제한하거나 하는 등의 시도가 이미 있었다.[12]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영국인들이 이러한 인식을 넘어 음식을 맛있게 요리하는 행위 자체부터 '망신스러운 수치'나 '용서할 수 없는 반역'으로 국가적 차원으로 매도한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인식이 공식적으로 엘리자베스 1세 시대부터 있었는데, 당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시행한 '부랑자법'에서 파생된 정책이 있었다. 그런데 그 정책이라는 게 바로 요리사들마저 허가받지 않은 부랑자로 간주하여 사형 선고를 받게 되어있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국가적인 차원으로 작정하고 영국의 '요리'라는 문화 그 자체를 말살시키려는 것이 아닐 수가 없다. 실제로 그 시대의 영국에서는 이런 이유로 많은 요리사들이 가톨릭 신자들과 더불어 처형되거나 해외로 도피하는 일이 매우 성행했다고 한다. 이런 풍조가 얼마나 심했는지 제이미 올리버가 영국 정부에게 찍혀가지고 미국이나 프랑스로 망명했다는 루머도 있었다... 이는 전술한 '식문화에 대한 경멸' 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이게 농담 같아 보인다면 7대 죄악 중 폭식이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 먹을거리에 탐닉함이 지나친 욕심이라는 시각은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오래된 전통이며, 그래서 종종 중세 시절에 거룩한 인물로 추앙받은 사람은, 적어도 전해오는 바에 따른다면, 이러고도 살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극단적으로 음식을 적게 먹었다. 그런데 왜 영국이 특히 문제가 되느냐면 유럽 대부분 나라에서는 중세 중후기만 되어도 덕목은 덕목이고, 거룩한 사람은 거룩하게 살겠지만 보통 사람은 좀 적당히 하자는 식으로 넘어갔는데, 정작 헨리 8세성공회를 만들면서 뛰쳐나온 영국이 이게 더 심해진 것이다. 다만 진짜 문제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성공회가 아니라 바로 한국에서도 주류 개신교 교단으로 널리 퍼진 칼뱅주의(장로회)가 문제라 할 수 있다...는 건 틀렸다. 애당초 이 당시 잉글랜드에서 국교회(성공회)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칼뱅주의자들은 다수가 아니었고, 대신 성공회 자체가 칼뱅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종교다. 따라서 당시 잉글랜드 국교회(성공회)내에서도 금욕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결코 무시할 만한 숫자가 아니었다. 당장 성공회 신자였던 엘리자베스 1세만 해도 청교도들을 그닥 탐탁치 않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요리에 대해서는 그들과 비슷한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본 문서에서 언급된 존 웨슬리 역시 성공회 사제였다.

한마디로 말해 유형적으로나 외형적으로 차이가 있을지언정 당시 청교도들과 성공회 모두 사상적으로 칼뱅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은 공통적이기에 청교도들과 성공회를 이분법적으로 칼같이 나눠서 일방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잘못된 서술이다. 오히려 칼뱅주의자들이 다수, 주류를 차지하고 국교화(장로회)한 곳은 스코틀랜드잉글랜드가 아니다. 개혁주의 교회가 영국 이상으로 크게 영향을 끼친 스위스네덜란드도 음식 문화가 매우 단순하며, 특히 네덜란드는 자국 요리가 변변치 않아 로테르담 시내에서도 자국 요리(?)는 끽해야 자판기에서 파는 크로켓 정도고, 오히려 제대로 된 레스토랑들은 인도네시아 요리를 파는 경우가 많다. 스위스의 경우 종교적 영향력과는 별개로 사회문화적으로 끊임없이 프랑스, 이탈리아권과 영향을 주고 받은 덕분에 딱히 악명이 높지 않은 거고, 사실 해당 분야에선 스위스 식료품이 인기 높아도 치즈, 육류, 초콜렛 같은 전형적인 산지 낙농업이나 스위스인들이 잘 하는 장인적 가공이 필요한 분야 말곤 스위스 음식이 딱히 유명하던가? 사실 결정적인 차이점은 그나마 대륙에 붙어있는 독일, 네덜란드, 스칸디나비아 같은 개신교권 국가들은 그래도 일단 농산물 국제 유통 자체가 더 활발하고, 여전히 미식과 음주를 하나님의 선물쯤으로 인식하고 웬만한 선 안에서는 죄악시하지 않았던 카톨릭, 정교회권과 교류가 끊기지 않았던 반면, 영국은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나 양쪽 모두 16세기 후반쯤 들어서는 적그리스도 교황과 부패한 가짜 기독교에 맞선 참된 개신교의 첨병이란 종교적 민족주의, 국가 정체성이 강하게 자리잡으면서 미식 같은 카톨릭 비스무리해 보였던 사회 일상 문화에도 종교적, 이데올로기적 의미를 부여하며 배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장 오히려 자국 밖에선 세련되고 아름다운 교양인으로 인식했던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자국 내에선 부패하고 타락한 세속적 기독교 문화를 몰고 온 마녀쯤으로 인식된 것만 하더라도 근세 유럽의 종교와 맞물린 사회적 변화가 영국 일상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걸 방증한다.

영국의 식문화가 본격적으로 나락에 떨어지게 되는 계기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인들의 아동학대로 보이기까지 하는 '금욕주의적이고 변태적인 교육 방식'에서도 큰 원인이 있다. 금욕주의적이었던 당시의 교육 풍토에서는 "사리를 올바르게 판별할 수 없는 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일찍 주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사고방식이 팽배했다. 일례로 감리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아이들에게 자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무지하고 미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해서 "즐거움을 안겨주는 맛있는 음식을 처음부터 먹지 못하게 해서 식탁에서의 기대감을 아예 꺾어놓는 방법이 특히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이런 그의 경향은 그의 어머니에게서 기인하는데(그리고 그 어머니는 당대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 수잔나가 그에게 참고하라고 보낸 그 자신의 양육 방침에 대해 상세히 기록한 편지글[13]을 보면,

"아이 스스로 골라 먹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른들이 골라준 것으로, 그것도 반드시 어른들 앞에서 하루 세 끼만 먹어야 하고 언제나 유동식만, 오로지 1가지 음식만으로만 배를 채우는 것을 허용한다."


"그 외 간식이나 기타 추가적인 음식을 입에 대는 것은 그런 일을 시도했을 시 그에 동조한 식모까지 덩달아 매를 맞을 만큼 철저히 금지한다."


"이런 식으로 애들을 기르면 애들이 무엇이라도 다 먹게 되고 맛없는 도 잘 먹게 될 것이다."


"아이가 무지하고 악한 존재라서[14]

그 고집을 아주 어린 시절부터[15] 어른이 강력한 처벌로 꺾어놓아 회초리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우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어 집 안이 아이가 사는 것 같지도 않게 아주 조촐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당시,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도 영국의 성인들이 티타임이라고 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간식을 먹어 대는 데 집착하는 문화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아이들의 영양 불균형을 방조하는 아동학대와 다를 게 없는 교육 방식이었다.

또한, 웨슬리는 존 로크타불라 라사 인식론[16]의 인식에 기인해 '어린 시절에 매우 강도 높은 교육을 실시해야 성인이 되었을 때 이상적인 인간이 될 것이라 여겼다'. 당시 영국의 상황은 가히 무정부적인 상황으로 하루에도 수없이 교수형이 집행되고 법질서 체제가 무색할 정도로 강력 범죄와 폭동, 대규모 소요 사태가 빈번히 벌어지는 것이 일상이었다. 자연히 종교도덕관은 이러한 상황에 반비례해서 더욱 보수화되고 금욕적이며 엄격해지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이렇게 금욕적인 방침으로 키워지고, 로크의 사상을 수용한 웨슬리가 감리회를 창시하고 위인이 되면서 그 어머니가 행했던 금욕적인 양육 방침이 이상적인 본보기로 내세워지고 사상적으로 정당화됨에 따라 그 이전에도 종교적 기준 하에 금욕적인 가치를 강요하던 사회에 쐐기를 박듯이 자리매김하게 되어버렸고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소위 소박하다고 칭해지는 시궁창 음식이 아닌 다른 맛있는 식재료들은 정신에 나쁘고 더 나아가 건강에도 좋지 않다는 마조히스트적인 미신까지 퍼졌던 것이다.

파이 헨리 채버스(Pye Henry Chavasse)[17]가 1839년에 펴낸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을 위한 조언(Advice to mothers on the management of their offspring)>을 보면[18]

"일단 애들이 젖을 떼면 반드시 1년 이상 묵은 감자를 뭉그러져 형태가 없어질 때까지 삶아서 소금 간 없이 먹여야 한다."


"치아가 나면 아침식사로는 1주일 이상 묵혀 말라빠진(!!) 식빵을 데운 우유에 넣어서 먹여야 한다."


"설탕채소는 아이들에게 독이므로 절대로 주어서는 안 되며 양파마늘은 성인에게도 독이므로 가급적이면 평생동안 먹지 말 것을 추천한다."


10살이 넘으면 이제 고기를 먹여도 되지만, 8년 이상 사육된 양고기[19]를 먹여야 한다. 돼지고기나 쇠고기는 먹게 되면 성질이 더러워진다고 여겨, 여전히 금지다. 그렇지만 역시 고기보다는 '1주일 이상 묵은 딱딱한 빵을 가루로 빻아 하루 이상 묵은 우유와 그 2배 분량의 물을 타고 3시간 동안 뭉근히 삶은 것을 3끼 먹는 것이 가장 좋다'고 되어있다. 맛이 없어서 안 먹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런 상황에 미리 대비해서 책에서는 "다른 음식은 주지 않고 그것만 준다면 분명히 먹을 것이다." 라는 공포스러운 강경 대처법을 적어놓고 있다. 게다가 이는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는 것이다.[20]

이런 쓰레기만도 못한 음식들만 먹고 자란 영국인들이 도대체 무슨 입맛을 알겠으며,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먹이겠는가? 게다가 성장기에 필요한 필수 단백질 및 미량원소와 무기염류의 섭취가 불가능하므로 아이들의 올바른 성장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이는 산업 혁명 시기의 아동 노동과 더불어서 영국 청년들의 신체에도 영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에 카를 마르크스는, 이 시기 영국군에 입대한 청년들이 전 시대보다 체격조건이나 질병 저항력이 매우 좋지 못함을 기술한 바가 있다.

동시기 작가였던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는 학대에 가까웠던 영국 아동들의 양육 실태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21] 비슷한 사례로 샬럿 브론테가 쓴 제인 에어에서도, 말 그대로 아동 학대 수준의 실태가 구구절절하게 나온다. 실제로 샬럿 브론테를 비롯한 집안 남매들은 어린 시절 이런 학대 수준의 양육 때문에 모두 건강을 해쳐서 샬럿 위의 언니 둘은 10살 남짓한 나이에 죽었고, 나머지도 40세를 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요절했다.

그런데 디킨스, 마르크스가 살던 시대는 영국 노동자들의 삶이 가장 막장이었던 시절이라지만 당시 영국인들의 평균 수명은 40세였다. 이것은 당시 중국인의 평균 수명 24세보다 훨씬 길어진 것으로 전반적인 식량 공급이 양호해진 결과였다.

마르크스 사상이 예견하는 자본주의의 미래와 웰즈의 <타임머신>이 묘사한 미래 영국, 아예 몰록과 엘로이로 분화한 두 계급의 미래는 저런 현실에서 나왔다고 보면 그렇게 틀리지 않으리라. 제2차 세계대전 때도 독일의 청년들의 평균적인 건강과 신체능력이 영국의 청년들보다 훨씬 나았다고 한다.

비록 독일독재위해서 한 짓이긴 했지만, 그나마 학교에서 아동/청소년들의 식사와 운동을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했으며 전쟁에 나가서 싸워야 하는 젊은 인재들의 영양 불균형을 절대로 방관하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독일의 중ㆍ고등학교를 뜻하는 단어인 '김나지움(Gymnasium)' 은 고대 그리스어체육관을 뜻하는 '김나지온(Gymnasion)' 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독일의 학교에서도 체육 활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청년들의 체육 활동을 장려하려면 건강한 신체가 중요하므로, 당연히 올바른 영양 섭취에 크게 신경을 썼던 것이다.[22] 하지만, 영국은 노동환경은 나아졌을 망정, 아이들의 영양상태는 그다지 나아진 것이 없었던 듯하다.

3.4. 요리문화의 샐러드[편집]


대영제국의 형성과 국가 간 인적, 물적 자원 이동의 활성화에 힘입어 영국에도 다른 나라의 요리들이 여럿 전파되었지만, 원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요리'가 부실하다 보니, 영국에는 특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여러 나라의 요리들이 한데 섞이고 그중 일부가 그 나라 요리의 일부로 흡수되는 '인종의 용광로\'가 아닌, 각 국가의 요리들이 따로 난립하는 '인종의 샐러드\' 현상이 벌어진 것. 다시 말해 영국의 식문화는 많은 국가의 요리들이 난립한 '요리의 샐러드'라고 할 수 있다.

런던에 가면 가장 맛있는 '인도 요리'를 먹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는 여기서 나온 말이다. 실제로 런던에는 약 1만 개 이상의 인도 요리점이 성업 중이며, 미쉐린 가이드를 받은 런던의 요리점들도 프랑스, 이탈리아, 인도 요리들이 매우 많다. 그리고 여기에 영향을 받아 많은 영국인들이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국적의 요리들을 먹고 자라며, 외식과 관련된 추억들에도 인도 요리 등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다른 문화의 경우 영국이 세계로 퍼뜨린 것이 많다. 운동이야 영연방 국가에 널리 퍼져있는 크리켓 문화나, 두말하면 입 아픈 전세계인의 스포츠인 축구가 있고, 차 문화도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 등 영국이 거쳐간 지역에는 밀크티나 이를 응용한 음료가 남아있다. 예술 쪽에는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모든 게 설명된다. 하지만, 식문화만큼은 오히려 본 주인이 일정 부분을 빼앗긴 형국인 셈이다.

자국의 요리 문화가 어느 정도 발전되어 있어야 다른 나라의 요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변형시킬 수 있다는 점은, 한국 요리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부대찌개6.25 전쟁 이후 스팸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었고 이를 한국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요리인데, 여기에는 국물이 들어간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한국 요리가 이전부터 다양한 국물 요리를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새로운 식재료에도 한국식 요리법을 적용시켰을 수 있었던 것이며 이것이 나아가 '새로운 요리'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이다. 양념치킨도 기본 치킨 요리법에 고추장, 간장, 마늘, 파 등의 한국식 향신료가 첨가된 새로운 형태의 요리라고 볼 수 있다. 해당 요리에 대해 한식이냐 아니냐 논란이 일부 있긴 하지만, 논란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동화주의의 훌륭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어느 누가 봐도 한국적인 요소가 없다면 그냥 '서양 요리'로 분류했지, "한식에 포함시킬 수도 있겠다"는 발상 자체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

하지만 영국의 경우, 어떤 영국인들도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먹고 자란 인도 카레를 영국 요리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국에서 먹을 수 있는 인도 카레에는 '영국화'된 부분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영국 본토에서 먹을 수 있는 인도 카레는 인도 현지인들도 인정할 정도로 인도 고유의 카레 요리를 잘 보존시켜 왔으며 정통 인도 요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다. 이처럼 기본 베이스 자체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보니 새로운 식재료나 새로운 나라의 요리가 들어와도 그게 동화되지 않고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는 것은 영국 식문화의 특이한 점이라 볼 수 있다.


4. 역사적 원인[편집]



4.1. 산업 혁명[편집]


영국은 세계 최초의 산업 혁명으로 인해서 많은 농민들이 농토를 상실하고 도시로 이주했다. 이로 인해 농촌 사회에서의 전통적인 식단은 자연스럽게 단절되었고 중세시대의 농노만도 못한 삶을 강요당했던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환경은[23] 맛있는 음식에 대해서 신경을 쓸 경제적, 시간적 여유를 아예 빼앗아가 버렸다. 살인적인 노동 끝에 요리할 시간도 여력도 없어 음식을 사서 먹어야 하는데, 하다못해 비스킷 살 돈이 없다보니 질량 대비 높은 칼로리를 보장하는 설탕을 퍼먹고[24], 그 단맛을 좀 중화시키고자 차에 설탕을 타서 마시는 게 아니라 설탕에 차를 부어 먹고, 힘든 삶을 잊고자 싸구려 진을 들이키고...

실제로, 한국 역시 산업화로 접어들면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에서는 3첩 반상과 같은 기본 상차림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국밥처럼 아예 밥이 말아서 나오는 경우도 태반이었고, 간장 대신 소금, 이후에는 간을 할 필요조차 없는 고추장 양념 일색으로 바뀌었다는 점도 상기해보기 바란다. 오늘날에 들어서야 밑반찬의 가짓수가 너무 늘어나서 음식물 쓰레기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재밌는건 일본 또한 비슷한 시기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규동초밥이 만들어졌다. 물론, 초밥은 에도 시대 이전부터 기원해왔지만 패스트푸드화한 것이 현재의 초밥이다.

또한, 국제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의 도시는 천연재료의 산지와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신선한 음식을 싼 가격에 대량으로 생산하여 운송을 하는 수단이나 오랜 기간 동안 식료품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냉장고같은 물건이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런던은 100만 이상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었지만, 여전히 운하를 통해서 마차가 끄는 운반선으로 실어온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따라서 런던의 도시 사람들은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식품에 주로 의존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절인 채소류와 고기, 그리고 냉장할 필요가 없는 근채류가 그것이다. 이런 식재료만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식문화를 향상, 유지하는 것은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신선한 식재료를 구하기 어려웠던 문제가 조리법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고기건 야채건 선도가 떨어지는 탓에 말라비틀어질 정도로 바싹 굽는 습관이 생겼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런던 사람들이 남 부럽지 않게 신선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냉동, 운송 기술이 나올 무렵에도, 그들은 이미 빅토리아 시대의 형편없는 식습관에 익숙해져 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식재료에 들어갈 돈으로 영국의 희석식 소주라고 부를 수 있는 싸구려 술인 (Gin)을 사서 마셨다. 칵테일 중에 진을 베이스하는 종류가 많은 것은 맛없던 진을 맛있게 먹고자 했던 노력의 산물이라고. 맛없는 식사를 먹을 돈으로 기분 좋게 마실 술을 사 마시는 격으로 이 당시의 정신나간 사회상은 "진의 거리"[25] 라는 삽화로 묘사되기도 했다.

한편 그 당시 영국 노동자의 평균 수명을 40세로 만든 원인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전근대 사회에서 평균 수명이 24~25세에 불과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오히려 증가한 수치다.

1820~1830년대 맨체스터, 리버풀 등 공업도시에 살았던 노동자의 평균수명은 겨우 15~19세였다고 한다. 다만, 이 때 평균수명이 매우 낮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엔 약간의 통계적 오류도 포함되어 있다. 당시 열악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처참한 위생 환경 및 식습관, 과도한 아동 노동[26]으로 인해 아동 사망률이 극도로 높았기 때문이다.

다만, 산업화 과정은 굳이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어지간한 나라들은 다 거친 것이다.[27] 이 부분에 대해서도 국가 간의 비교가 요구된다.


4.2. 제2차 세계대전[편집]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 공급되던 식품들 중 특징적인 6가지. 군용으로 대량생산되는 빵, 스코틀랜드에서 쏟아져나오는 감자들, 파이, 파우더 형태의 건조 달걀, 우유, 그리고 전 세계에 주둔 중인 영국 군인들에게 줄 특별식으로 대량생산되는 크리스마스 푸딩.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당시 영국의 배급제를 설명하는 미국 방송 프로그램.

Oh, the Glories of Pre-War Days![28]

1939년 후반 2차대전 독일의 유보트 공격으로 인해서 해상 봉쇄를 당하자 영국은 배급제를 시작했데 사회주의 국가에서 실시하는 공짜 배급제가 아니라 1인당 1주일에 살 수 있는 생필품의 갯수를 제한하는 것이다.[29] 얼마 뒤 1940년대 부터는 고기, 시리얼, 비스킷, 설탕, 버터, 홍차, 베이컨, , 유제품 등 거의 모든 필수 식료품으로 확대되었다. 후술하겠지만 전시에 식량 증산 운동을 한다고 난리법석을 떨어봤지만, 결국 도시에서는 제대로 된 식자재가 항상 부족했으며 (당시 농부들이 배급제 하에서 몰래 작물을 빼돌린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외곽에서 작물을 생산하는 농부들을 제외하고는 정상적인 요리를 만들 재료조차 모자랐다. 덤으로 수많은 식당카페들이 식료품의 부족으로 인해 폐업을 하게 되면서 영국 요리가 더욱 창궐하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배급제에서 빠진 품목이라면 피시 앤드 칩스 정도인데, 예외없이 영국 요리의 새로운 전설을 창조하고 현재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그나마 당시에 미국에서 질리도록 보급해준 스팸으로 전쟁을 버티고 연명했다.

영국 역사 속의 배급제(영문).

우리는, 전후에도 욕조에 완전히 앉지 않으면 무릎까지 차오르지 않는 물에서 목욕을 했어요. 당근을 씹으면서 달다고 생각하며[30]

우리는 부모님에게 전쟁 이전에 대해 말해달라고 조르죠. 그리고 그들이 말해주었던 담배 모양의 초콜릿통조림이 아닌 진짜 파인애플에 대해서 생각해보곤 했죠.[31][32]

영국작가 수잔 쿠퍼(Susan Cooper)


(전후) 인생이란 살아남는 것, 있는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1948년에는 배급량이 전시 때보다도 떨어졌다. 빵은 분필을 씹는 것 같은 맛이었다.[33]

그리고 으깬 감자에 돼지기름, 약간의 설탕, 말린 과일밀가루를 넣고 후식(dessert)이라 부르는 것이 평범한 레시피였다.

세라 라이얼(Sarah Lyall) The Anglo Files: A Field Guide to the British, 2008, P. 212)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도 승전국인 주제에 배급제가 1954년 7월 4일까지 계속되어 휴전협정 이후에도 영국은 배급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바로 원조를 끊어버렸고, 덕분에 영국의 경제는 끝없이 나락으로 추락했다. 미국이 승전 이후 1가정 1자동차가 가능해질 정도로 호황을 누리고, 패전국인 서독동독, 일본, 이탈리아가 전후 복구를 끝내고 엄청난 호황을 누리고 있을 순간에도 영국 정부는, 아직도 버터의 양이나 고기의 무게 같은 것이나 따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정말 막장이 아닐 수 없다. 덕분에 영국 국민들의 생활은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처럼 처절했다.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냐면 당시 나이 어린 학생들이 겨우 식빵 2조각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일부 영국인들은 15년 전(대공황 당시)의 서민 경제가 훨씬 더 나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게다가 50년대 이후에도, 영국의 경제상황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해서 낙제점을 면치 못했다. 광산업계의 파업은 끊이지 않았고, 1979년의 이른바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 영국병 참조) 때에는 사회 전체가 파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일 정도로 나라 전체가 스톱했다. 아니 후진한 건가? 그 당시에는 묘지를 파는 인부들까지 파업해 내각은 쌓이는 시신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했다고. 오죽하면 1976년에 국제통화기금으로부터 금융구제를 받았을까?

(...) 최근에 경작이 끝난 땅에 콜리플라워를 심습니다. 이런 유리 온실은 신선한 야채가 모자라는 겨울에 채소를 제공해주는 귀중한 자산이었죠.

-The Wartime Kitchen & Garden, BBC2



아이러니한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고기류의 배급이 모자랐던 탓에 없는 땅까지 파내서 곡물과 채소류를 자체적으로 경작해서 먹어야 했는데, 이 때문에 당시의 영국인들은 영양학적으로 가장 균형 잡힌 식사를 했다는 점이다.[34] 이런 상황에 맞는 요리법도 개발되었다. 가정학자 마거릿 패튼[35]은 배급제에 시달리던 워킹맘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레시피 개발에 앞장섰다. 가짜 크림, 분말 달걀, 다람쥐 고기 같은 걸 썼다고.

2차대전 종전 후 영국미국의 푸들 혹은 세컨드 보스 정도 취급이지만, 그 이전까지는 윈스턴 처칠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과 함께 얄타 회담에 초대되는 등 세계구급으로 놀았던 거대한 대영제국이었다. 그러니까 이러한 악독하고 영양가도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배는 차니까)은 음식들은 30~40년대를 겪었던 사람들에게는 "그래도, 그 때는 우리가 어마어마했었지?" 라는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 비단 음식뿐만 아니라 전쟁을 겪은 이 세대의 사람들의 생활 자체가 영광스러웠던(?) 전쟁시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라 라이얼에 의하면 이들은 해가 완전히 져서 자연채광이 없어질 때까지 집안의 전등을 켜지 않고, 욕조에 으로 선을 그어 그 위까지 물이 넘치지 않게 하고 또 목욕한 물을 쓰지 못할 때까지 재활용을 한단다. 오죽하면 엘리자베스 2세(그녀도 전쟁 당시 전차정비공으로 활약한 전쟁세대이다)도 지금까지 버킹엄 궁내의 화장실을 돌아다니며 작아진 비누들을 모으고 전등 전구들을 일부러 희미한 걸로 바꾸고 다닐까? 이게 단순히 일시적으로 그친 일화가 아니라, 2013년에도 궁전에 비치된 견과류를 경비병들이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접시에 줄을 그었다는 일화가 기사로 전세계에 게재되었을 정도니 말이다.[36]

5. 결론[편집]


영국 요리가 악명을 얻게 된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영국은 지리적 한계로 식재료 풀이 부실했고 향신료 사용이 미비했으며, 요리 문화 자체가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는 식문화로 만들어졌다. 이는 청교도 교리와 결부되면서 더욱더 강해졌고 금욕적인 식문화를 미덕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요리에 정성을 들이는 것 자체를 악마의 유혹이라며 터부시하게 되었다.

산업 혁명으로 인한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과정에서 영국의 국민들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계층이 탄생한 것은, 영국 요리가 변화할 수 있었던 찬스인 근대화 시기에도 이를 저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도시 이주와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하여 그나마도 다른 나라에 비하면 미약했던 전통 농촌사회에서의 식문화마저 상실하고 이를 회복, 유지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또한, 엘리자베스 시대부터 시작해서 빅토리아 시대까지 이어진 금욕주의를 무조건적으로 강조하는 교육제도는 열악한 식문화를 개선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권장하고 합리화하게 되었다.

여기에 추가로 제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영국의 경제는 극도로 침체되어, 근현대시기마저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후 영국의 식문화는 개선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쟁을 겪었던 세대는 보급에 의지하는 식생활을 꾸려 나가며 열악한 수준의 악독한 음식들을 계속해서 아이들에게 먹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영국은 별로 좋아지지 않는 경제 속에서 싸고 질이 나쁜 음식만이 나돌았고 영국인들에게 이러한 식생활은 점차 당연시되어 갔다. 전후 보급은 1954년 끝났지만 어디까지나 제도의 종결이며 그 이전과 이후의 시기까지 포함하면 상당히 긴 세대가 여기에 영향을 받았다. 이는 '영국의 식문화'를 안 좋은 쪽으로 바꾸고 고착화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37]

심지어 제이미 올리버의 학교급식 개조 프로그램 중에 등장한 급식사는 너겟을 튀기는 것 이상의 요리가 지나치게 손이 많이 간다면서 눈물을 보이는 장면마저 등장한다. 즉, 그 이상의 조리에 대해서는 경멸을 넘어서서 불필요함을 주장하고 있기까지 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렇게 요리를 하는 과정마저도 힘들어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말하는 수준이니,[38] 노력과 정성도 없이 요리가 맛있어지리라 생각하는 것이 도저히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시작부터 막장이었던 환경 등 선천적인 요소를, 여러 중간과정을 통해 더더욱 막장으로 몰아가며, 막장 속의 막장으로 틀어박히길 1000년 넘게 이어진 결과가 바로, 요리 문화의 완전사멸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1] 악마의 정원에서 - 스튜어트 리 앨런 저 中 인용.[2] 아일랜드를 제외한 그레이트 브리튼 섬의 면적은 한반도와 비슷하다. 하지만 평야의 비율은 브리튼 섬이 훨씬 높다.[3] 과일이 대표적인데, 하우스 농법 등의 발달로 제철에 관계 없이 모든 과일들을 구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제철에 나오는 싼 과일들을 주로 먹는 경우가 많다.[4] 현재 영국의 TV에서는 요리 프로그램들이 수도 많고 인기도 높다. 또한, 적지 않은 요리 서적들이 서점의 베스트셀러를 차지하고 있다.[5] 2012 런던 올림픽은 영국 음식에 대한 세계인의 악평을 바꿀 좋은 기회였으니 선수촌 식당의 요리사는 영국에서도 나름 잘한다는 요리사들이 투입되었을 텐데도 선수촌 음식은 여전히 많은 악평을 들었다.[6] 물론 국교회 자체가 가톨릭과 복음주의 개신교 사이 왔다갔다하는 종파인 만큼 이런 칼뱅주의적 급진적 인생, 신학관에 반발하여 여전히 '가톨릭적' 고급 문화를 추구했던 귀족, 성직자 계급도 항상 존재해왔지만, 적어도 청교도 혁명 이후부터 전반적인 국정 운영과 주류 문화 형성 과정에서 이들은 확실히 소수였다[7] 그런데 애초에 그 베어 그릴스도 맛있는 음식은 사기 충전에 도움이 된다면서, 늘상 하는 벌레 먹방 대신 진짜 먹을 만한(랍스터나 사슴고기 등등) 음식을 먹으면 해당 대사를 친다.[8] 주로 신흥 부르주아 계층 등 소위 말해 졸부 계층.[9] 지금도 영국인들은 매주 금요일날 점심에 피시 앤 칩스를 먹지 않으면 뭔가 찝찝하다고 할 정도다.[10] 당연히 이는 편견에 불과하다. 실제로 요식업은 고화력의 불과 날붙이를 사용해서 위험한 것은 물론, 매우 바쁘고 힘쓸 곳도 많은 중노동 직종이라 아무래도 남성이 많이 종사한다. 요리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아는 유명한 주방장들도 대부분 남자다. 후술되는 사람들도 그렇고, 백종원 같은 사람도 한 덩치에 한 성깔하는 사람이다. 실제로 직접 조리해서 밥 차려 먹는 것 자체가 힘들고 귀찮기에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다" 라는 말도 나오는 것이다.[11] 악마의 정원에서 - 스튜어트 리 앨런 저 中 인용.[12] lbid.,P152; 이지은, 감각의 미술관' 2012, p167 참조.[13] 퍼시 파커, '존 웨슬리의 일기',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1984.[14] 예수는 천국은 아이같은 사람들이 갈 수 있는 곳이라 했는데 이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선한 일을 해서 천국에 갈 수 없음과 자신의 전적인 무능함을 인정하고 아이처럼 온전히 예수의 공로에 의지해야만 하는 의존성을 가리킨 것이지 아이가 선하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다. 성경의 주장은 성악설이며 따라서 이는 아이러니가 아니다.[15]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16] 새로 태어난 아이의 지성은 마치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백지와 다름없다. 비모순의 법칙을 포함한 모든 지식은 경험을 통해 습득된다. 그러므로 모든 지식은 선험적이 아니라 후천적이다.[17] 직업은 외과 의사. 귀족 혈통이며 1810년에 출생하여 1879년에 사망했다. 총 12권의 육아 관련 서적을 저술했으며 그 중 몇 권은 부인 Frances lzon과 공동저술이다. 그 중 2권은 사후에 출간되기도 했다. 그의 후손들은 아직도 영국에 있다. 다만 파이 헨리 채버스의 외아들 Reverend William Izon Chavasse는 아버지처럼 의학이 아니라 예술 분야에 종사했고 두 아들 중 막내 John Evelyn Chavasse가 2살의 나이로 죽자 그 충격으로 신부가 됐다. 그가 부모의 육아법을 따랐는지는 불분명하다.[18] 구글 도서에서 무료로 볼 수 있다.[19] 양이 이렇게 늙으면 노린내가 상당하다.[20] 물론 이런 변태적인 사고방식이 다른 나라에도 없는 건 아니었는지 그 유명한 장 자크 루소도 에밀에서 육식이 영양분도 불충분하고 면역력을 떨어트리는 등 악영향만 끼친다고 써 놓았다. 하지만 루소는 18세기 사람이다. 위로 올라가서 저 책이 나온 연도랑 비교해 봐라. 결정적으로 루소는 채식까지 깎아내리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유모와 아이 양쪽에 채식을 권장했다! 이것만 봐도 당시 영국인의 식재료에 대한 관점이 전 세기의 사람만도 못한 막장이라는 걸 알 수 있다.[21] 여기서 올리버 트위스트는 고아원에서 배고프다고 말한 것 때문에 악마에게 사로잡힌 정신나간 미친 놈 취급을 당했을 정도다.[22] 사실, 교육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고대 그리스 때부터 젊은 청년들의 교육을 담당한 시설은 신체를 단련할 수 있는 체육관이었다. 체육관에서는 우수한 군인들을 양성하는 것에 주된 목적이 있었으며 체조, 격투, 레슬링, 검술, 마장술 등을 익히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뜀틀은 말에 올라타는 기술을 익히기 위한 실내 운동이었다. 그렇게 체육관이 생기게 되자, 자연스레 땀을 씻을 수 있는 목욕탕 같은 시설과 책상이나 의자 같은 교육에 필요한 도구와 시설들도 같이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숙련된 기술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교사도 필요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 몸싸움만 아니라 머리 싸움도 잘 하게 만들기 위해서 역사, 군사학, 철학, 예법, 언어, 문자, 과학 등등도 같이 가르치게 되어, 오직 신체 단련만 담당했었던 체육관은 어느 샌가 아이들의 기초교육을 담당할 수 있는 교육시설인 학교로 기능이 확장하게 된다.[23] 농사는 노동 시간을 여섯시간에서 열두시간으로 늘린다고 생산이 두 배가 되는건 아니지만 공장 노동은 두 배에 가까운 유의미한 생산 증가를 기대할 수 있다. 공장주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두 배로 굴리려고 애를 썼고, 식사 시간마저 박탈해 가면서, 아동 노동을 시키면서까지 생산 증가를 위해 온갖 수단을 썼다. 거기에 이윤을 위해 임금을 '안 주느니만 못한' 수준으로 주고, 반발하면 '너 말고도 일할 사람은 많아~'라며 해고 및 해고 협박으로 일관.[24] 플랜테이션 등으로 인해 이전까지 매우 비쌌던 설탕은 산업 혁명 당시에는 하층민들도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이 상당히 내려간 상태였다.[2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eer-street-and-Gin-lane.jpg ('맥주 거리 / 진 거리', 윌리엄 호가스, 1751. 2차출처 위키피디아)[26] 10세 전후의 어린이들이 하루 10시간도 넘게 일하는 경우가 흔해 빠졌다.[27] 저장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19세기 한정.[28] 제목은 "오, 전쟁 이전 (기간)의 영광이여!" 라는 뜻이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라고 자부하던 대영제국을 그리워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29] 영국뿐만 아니라 미국도 같은 형식의 배급제를 실시하였다.[30] 설탕과 유제품 비축량이 계속 부족해지면서 아이스크림 생산이 엄격하게 통제되자, 정부에서는 '아이스크림보다 당근이 건강에 좋다'고 선전하면서 나무 막대기에 아이스바 대신 생당근을 꽂아 팔도록 했다. 다만 당시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도 아이스크림 생산이 줄어들긴 했다.[31] 아가사 크리스티의 전후 작품에도 비슷한 분위기가 자주 언급된다.[32] 사실 당근 케이크는 영국 요리가 아닌 스위스 요리였지만 영국으로 건너가면서 뭔가 이상한 물건(?)으로 둔갑했고 그게 유명해진 것이다.[33] 실제로 대영제국 시대 때 빵의 표백을 위하여 분필이나 백반을 섞었다고 한다.[34] 일례로 영국 정부는 밀가루 소비를 줄이기 위해 소위 "국가빵 (National Loaf) https://en.wikipedia.org/wiki/National_Loaf"이라는, 정제하지 않은 통밀로 만든 빵을 1942년부터 장려했는데, 흰 빵에 비해 더럽게 맛이 없었지만 흰 빵에 비해 영양가가 더 풍부하고 밀가루 수입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었다.[35] 2015년 6월, 99세로 별세.[36] 물론 견과류 얘기는 살짝 와전된 것인데, 이 견과류는 여왕의 간식으로 왕실 직원이 차려놓은 것인데 오며가며 집어먹는 놈들이 너무 많아서 줄로 그어 표시한 뒤 "내 땅콩에 그 끈적거리는 손 치우라"고 메모를 적어놓은 것이었다.[37] 당장 현대 한국에서 당연시되는 '겸상 문화' 또한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전혀 없던 문화였다. 조선시대만해도 '독상'이 당연한 것이었는데 6.25 전쟁과 전후 극빈국의 세월을 보내면서 여유가 없다보니 겸상 문화가 생긴 것이다.[38] 최소한 3개 정도의 반찬을 급식으로 먹고, 그렇게 해주지 못하는 부실한 학교는 급식이 사진으로 박제되어 인터넷에서 조롱거리가 되는 환경에서 자란 한국인이 보기엔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인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