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사 영산회 후불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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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2.1. 나라를 평안하게 하는 영국사
2.2. 도난 사건
2.2.1. 영국사 영산회상도의 도난
2.2.2. 도난 후 재판 통해 소유권 인정
2.3. 영산회 후불탱(영산회상도)
2.3.1. 영국사 영산회상도의 세밀하면서도 세련된 필치
2.3.2. 연대 명확-불화양식 파악에 귀중한 자료


1. 개요[편집]



파일:영국사 영산회상도.jpg


寧國寺 靈山會 後佛幀. 영국사 영산회 후불탱은 충청북도 영동군 천태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영국사(寧國寺)에 있었던 탱화다. ’영국사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1991년 영국사에서 도난되었다가 다행히도 무사히 환수할 수 있었다.

영국사 영산회 후불탱은 2004년 보물 제1397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편집]


  • 2022년 6월12일까지 불교중앙박물관에서 ‘환지본처(還至本處), 돌아온 성보문화재 특별공개전’에서 소개된 도난되었다가 되찾은 성보문화재 70여 점 중 하나

  • 크기가 3m에 가까운 대작으로 18세기의 서막을 여는 대표적인 불화로 손꼽힌다.

  • 환수된 문화재마다 사연들이 가득한데, 이 불화 역시 사찰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쉽지 않은 여정을 겪은 불화이다.


2.1. 나라를 평안하게 하는 영국사[편집]


충북 영동 천태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영국사는 빼어난 자연경관으로 유명하다. 신라 문무왕 8년(668년)에 창건된 영국사는 고려 명종 때인 12세기 원각국사에 의해 크게 중창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함으로써 국난을 극복하고 나라가 평안하게 되었다 하여 사찰 이름을 영국사(寧國寺)로 하였다.

영국사 앞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위엄이 느껴지는 이러한 오랜 역사와 함께 한 웅장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수령이 1000살 가량 되고 31m가 넘은 천연기념물인 은행나무는 오랜 연륜으로 지혜와 너그러움이 가득한 노인처럼 사찰을 찾는 이들에게 한결같은 편안함을 안겨주고 있다.

2.2. 도난 사건[편집]



2.2.1. 영국사 영산회상도의 도난[편집]


  • 1991년 11월 여러 불화가 모셔져 있던 영국사 불전에서 영산회상도와 삼장보살도를 도난당했다

  • 2003년에 이원석 검찰총장이 서울중앙지검 공판검사 시절 도난 문화재임을 증명하여 다시 사찰의 품으로 되돌아왔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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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도난 후 재판 통해 소유권 인정[편집]


  • 2003년 영국사 영산회상도가 다시 사찰의 품으로 되돌아오는데도 불교문화재 도난백서가 큰 몫을 했다. 이 불화는 2002년 한 고미술상에서 발견되었으나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상태였다.

  • 고미술상도 도난 된 문화재인줄 모르고 구입했다고(선의취득) 주장하여 재판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고미술상의 승용차에서 이 불화의 도난 내용이 실린 불교문화재 도난백서가 발견되면서 장물인줄 몰랐다는 주장이 거짓으로 밝혀져 영국사로 되찾아올 수 있었다.

  • 도난 당시에는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되찾은 후 보물로 지정되고 안전하게 불교중앙박물관에 보관하게 되었다.


2.3. 영산회 후불탱(영산회상도)[편집]


  • 영국사 영산회상도는 제목 그대로 <법화경>에 등장하는 영산, 즉 인도 영취산에서 석가여래가 여러 대중들에게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 <법화경> '서품(序品)'에는 제석천과 자재천, 범천과 권속들, 보살들, 용왕과 용녀, 팔부중과 수백 천의 권속들, 아사세 태자와 수백 천의 권속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한다. 영산회상도를 그린 작가들은 각각 자기의 특성을 살려 이들 인물을 취사선택하여 화면을 구성하였다.


2.3.1. 영국사 영산회상도의 세밀하면서도 세련된 필치[편집]


영국사 영산회상도에는 어떤 인물들을 그렸는지 살펴보자.

화면 정 중앙에 석가여래를 크게 그려 본존임을 강조하였고, 그 주위를 에워싸듯 보살상과 제자들, 그리고 여러 신중들을 배치하였다. 석가여래는 커다란 키형 광배를 등지고 높은 3단의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으며, 깨달은 붓다가 되었음을 상징하는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이 불화는 가운데 본존을 중심으로 양쪽에 인물들을 대칭적으로 배치하였다. 제일 하단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협시보살인 문수·보현보살, 그리고 그 양옆으로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1존씩 그렸다. 그 윗단에는 부처님 제자 가운데 항상 석가여래 좌우에 등장하는 가섭과 아난존자를 배치하였고, 양옆으로 사천왕을 안치하였다. 그 위의 단에는 보살상을 2존씩 양쪽에 배치하였고, 제일 윗부분에는 좌우에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를 제외한 8대존자와 용왕과 용녀, 금강역사 등을 그렸다.

중앙에 본존을 압도적으로 크게 그려 집중시키고, 나머지 인물들은 위로 갈수록 작게 그려 평면의 화면에 원근감을 나타냈다. 전체적인 구도는 깔끔하다. 석가여래의 법화경 설법을 듣기 위해 모인 여러 인물들은 석가여래처럼 정면향을 하기도 하고, 좌우로 측면향을 적절한 곳에 배치하여 화면이 경직되어 보이는 것을 피했다.

인물들 위의 최상단에는 부드러운 중간 색조의 황색 색구름을 둔 뒤, 배경을 검은색으로 칠해 깊이 있는 공간감을 표현하였다. 색깔은 홍색이 가장 많이 쓰였는데, 선명하고 밝은 홍색이어서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인상을 준다. 보살과 사천왕의 광배에는 녹색이 쓰였고, 대좌와 석가여래가 입은 옷, 사천왕의 갑옷 등에 금으로 문양을 새겨 화려함을 더 했다. 또한 사천왕의 옷과 협시보살의 옷에 옅은 갈색으로 바탕색을 칠하고 그 위에 구불구불 선으로만 문양을 대신한 기법은 독특하다. 이러한 구불구불한 선들은 본존의 가슴에 물결치는 모양, 가섭존자의 목 주변을 나이테처럼 표현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인물 묘사를 보면 석가여래의 얼굴은 갸름한 편이고 눈, 코, 입이 가운데 몰리게 그렸으며, 눈은 짧고 코는 긴 편이며, 입은 약간 벌리고 있다. 늙은 수행자의 모습인 가섭존자의 얼굴은 실제의 노스님을 보는 듯하고, 반대로 젊은 아난존자는 생기 있어 보인다. 사천왕의 이국적인 얼굴은 4존마다 각각 특색 있게 개성을 부여하였다. 본존의 손 표현 등에서 부분적으로 다소 경직된 면이 있기는 하나, 단순한 듯 세밀하면서도 세련된 필치를 보여 뛰어난 솜씨를 볼 수 있다.


2.3.2. 연대 명확-불화양식 파악에 귀중한 자료[편집]


불화 하단 중앙 부분에 먹으로 쓰여 있는 화기 중에 ‘강희사십팔년사월일(康熙肆拾捌年四月日) 신화성영산일부봉안우(新畵成靈山一部奉安于) 화사(畵師) 인문(印文) 민기(敏機) 세정(洗淨)’이라는 내용을 보아, 강희 48년(숙종 35년)인 1709년에 인문을 비롯한 민기, 세정스님 등이 참여하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화사 인문스님은 조선 후기의 불화승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베 바탕에 그린 이 불화는, 18세기로 들어선 직후 비교적 이른 시기에 그린 불화로 17세기 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불화양식 흐름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또한 조성연대(造成年代)와 제작자가 명확할 뿐만 아니라, 대작에 속하는 작품성이 뛰어난 불화로 평가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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