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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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
2. 해석
3. 실제 상황에서
4. 여담


1. 개요[편집]




'영웅을 좋아한다', 혹은 '색을 밝히는 버릇이 있다' 등을 의미하는 한자어. 보통은 여색을 의미하지만, 남색도 포함될 수 있다.

하렘물의 근간이 되어 주는 단어로,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


2. 해석[편집]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생겨난 이유를 해석하는 관점은 다양한데, 첫 번째는 영웅처럼 대단한 사람은 색에 대해서도 대단하니 저런 사람이 색을 밝히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발상에서 나왔다는 관점이다. 이는 전·근대 사회 특유의 낡은 사상으로 여겨진다. 하렘물 등지에서 언급될 때는 일반적으로 이러한 의미로 사용된다. 과학적으로 따지고 들어 남성 호르몬의 영향이라고 해석하는 관점도 있다. 영웅의 특징인 강한 근력과 과감성 등을 고려하면 영웅의 몸에 남성 호르몬이 풍부할 것은 자명한데, 남성 호르몬은 또한 성욕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영웅이라는 의미가 단순히 강한 힘을 상징하던 시절을 고려하면 나름 일리 있는 주장이다.

또 다른 관점은 영웅이라고 불릴 정도의 사람도 사실 밝힐 건 밝힌다는 소리로, 영웅도 사람이니까 영웅이라 불릴 정도의 사람이 색에 대해 관심을 보인다고 해도 놀라울 것 없이 생각해야 한다는 해석이다. 그 칸트도 음담패설을 즐겨 했다는 속설이 있다. 또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는 '군왕은 무치(無恥)'[1] 라고 해서, 군주가 색을 즐기는 것은 부끄러울 일이 아니라는 말이 따로 존재했다.

3. 실제 상황에서[편집]


실제로 카리스마권력이 있는 사람 주변에는 이성이 많이 꼬인다. 그 자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는 둘째 치고, 일단 많은 사람의 대시를 받는 것은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영웅이라는 단어는 현대적으로 돌려보면 '엄친아'라는 의미다. 성격이 아주 더럽다면 모를까 엄친아를 마다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거에는 별 문제 없었는데 시대상의 차이로 인해 현재는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축첩 문제. 조선에서 벼슬하는 자가 을 두는 건 별 논란거리가 아니었고 예를 들어 이순신도 정실부인 상주 방씨 외에 첩이 2명(해주 오씨, 부안댁) 있었다. 첩을 둔 건 확실하지만 그 외에 '여진'이라는 하녀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기록은 해석 논란이 있다. 아무튼 한국에선 역사적 위인을 흠결이 전혀 없는[2] 성인으로 성역화하는 경향이 중국이나 일본보다 훨씬 심하다보니 과거의 인물을 이런 식으로 비판하는 경우가 있다.

정치적 실리적 이유로 호색할 수도 있다. 전근대에서 영웅은 대개 왕이나 황제, 못해도 장군이나 재상 같은 높은 신분이 되기 마련인데 과거나 지금이나 고위층이 세력을 키우는 좋은 수단이 혼맥이다. 그리고 현대는 일부일처제지만, 전근대는 일부다처제나 축첩이 가능하다. 일반 양반이나 귀족은 첩은 명문가에서 들이긴 어렵지만, 군주라면 후궁도 유력한 집안에서 들이는 것이 가능하므로 세력 확장의 좋은 수단이 된다. 이의 대표적인 사례로 왕건이 있다. 또 아들 하나만 있으면 덜컥 죽기라도 하면 후계자가 사라지니 만약을 대비하여 자녀를 많이 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장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대비하고, 그런 일까진 안 일어나도 아들 딸이 여럿 있으면 다시 혼맥을 확장할 수단도 많아지고 왕족이 많은 것 자체가 왕실의 힘이 되어주기 때문에 군주 본인이 호색해서만이 아니라 왕권 강화와 자신 이후를 생각해서 여성을 가까이할 수도 있는 것이다.[3] 물론 그냥 자신이 여자를 밝히는 것이면서도 왕실의 번창을 명분으로 들어 호색을 정당화할 수도 있다.


4. 여담[편집]


간혹 '여색/남색이 영웅을 좋아한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한문 문법 자체를 무시한 해석이므로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 저렇게 해석되려면 '영웅호색'이 아니라 '색호영웅'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색이란 말은 '육체적 관계' 또는 '이성의 아름다운 자태'라는 뜻이므로 주체가 될 수 없다.

영웅이 남색을 밝혔던 사례로는 남총 문서 참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로마 장군 스키피오는 기회만 있으면 자신들이 여자에 대한 성욕을 초월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은 여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적수인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3세의 어머니와 아내를 너그럽게 대하며 그녀들에게 어떤 박해도 가하지 않고 자신과의 성관계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스키피오 역시 자신이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은 아름다운 여성들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고 약혼자에게 돌아가도록 배려해주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존경했던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도 페르시아 원정에서 붙잡은 여자 포로들에게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았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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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 여왕을 배출한 신라의 경우 여인이라 해도 성골은 무치(無恥)기에 예외적으로 해당된다.[2] 이 '흠결'도 당시 기준이 아니라 현대인의 잣대를 들이미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다.[3] 당연하게도 세상사가 항상 의도한대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오히려 군주 사후 보위를 둘러싼 피바람을 부른 경우도 많다. 왕건만 해도 본인 사후 고려 초기 정국은 숱한 정쟁과 모반, 숙청이 이어졌다.[4]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 도현신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