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르 레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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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르 레토프
Егор Летов | Yegor Let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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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이고리 표도로비치 레토프
Игорь Фёдорович Летов
Igor' Fyodorovich Letov
출생
1964년 9월 10일
소련 러시아 SFSR 옴스크
사망
2008년 2월 19일 (향년 43세)
러시아 옴스크
국적
[[러시아|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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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직업
시인, 싱어송라이터, 음악가
가족
아버지 표도르 레토프(Фёдор Дмитриевич Летов, 1926-2018)
어머니 타마라 레토바(Тамара Георгиевна Летова, 1935-1988)[1]
형 세르게이 레토프(Сергей Фёдорович Летов, 1956-)
배우자 나탈리야 추마코바(Наталья Юрьевна Чумакова, 1969-)[2]
장르
펑크 락, 노이즈 록, 포스트 펑크, 사이키델릭 락, 익스페리멘탈 록, 개러지 록, 인더스트리얼, 싱어송라이터
악기
보컬, 드럼, 베이스, 기타
활동
1982년 - 2008년
소속
자파드(ЗападЪ), 포세프(Посев),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 피크 클락손(Пик Клаксон), 인스트루크치야 포 오보로네(Инструкция по обороне), 코무니즘(Коммунизм), 포그라니치니 오트랴트 그라지단스코이 오보로니(Пограничный Отряд Гражданской Обороны/П.О.Г.О.), 스핀키 멘타(Спинки Мента), 초르니 루키치(Чёрный Лукич), 얀카 이 벨리키예 옥탸브리(Янка и Великие октябри), 아나르히야(Анархия), 치가냐타 이 야 스 일리차(Цыганята и Я с Ильича), 쿠자 우오 이 흐리스토시 나 파페르티(Кузя УО и Христосы на паперти), 예고르 이 오피즈데네프시니예(Егор и Опизденевшие), 브라크 나로다(Враг народа), 아돌프 기틀레르(Адольф Гитлер), 폽-메하니카(Поп-механика)
1. 개요
2. 생애
2.1. 유년 시절
2.2. 포세프 및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결성과 강제 해산
2.3. 정신병원 퇴원 이후 그리고 "아돌프 기틀레르" 사건
2.4. 전기 민방위의 본격적 활동 (1988년경 - 1990)
2.5. 전기(前期)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 해체 및 정치 활동 (1990년대)
2.6. 2000년대 이후
3. 음악적 성향
4. 들어보기
5. 여담
6. 앨범 목록
6.1. 포세프 앨범
6.1.1. 정규 앨범
6.1.2. 기타 앨범 (컴필레이션 앨범, 비공식 앨범 등)
6.2.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 앨범
6.3. 솔로 앨범
6.4. 코무니즘 앨범
6.5. 예고르 이 오피즈데네프시니예 앨범
7.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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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리 표도로비치 '예고르' 레토프(Игорь Фёдорович 'Егор' Летов, 1964-2008)[3]는 러시아의 예술가로, 러시아의 유명 포스트 펑크/사이키델릭 락 밴드인 '민방위(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와 '예고르와 좆병신들(Егор и Опизденевшие)'[4] 그리고 전위예술 음악 프로젝트 '코무니즘(Коммунизм)'으로 유명하다.[5] 싱어송라이터였으며, 시인[6], 사운드 엔지니어, 아방가르드 예술가로도 활동하였다.


2. 생애[편집]



2.1. 유년 시절[편집]


Жизнь в России, как вечный концерт группы "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 с которого нельзя уйт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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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산다는 것은 마치 끝나지 않는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공연과 같다. 그런데,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공연 말이다.


1964년 시베리아의 옴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독소전쟁에 참전한 전쟁 베테랑이었으며 어머니(카자흐스탄 출신 코사크)는 의사였다. 가족 혈통을 따져보면 러시아인, 코미인, 모르드바인, 튀르크인 계열이 혼재되어 있다고 한다. 유년 시절 집 근처 환경이 열악한데다[7]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했던 편이라 어릴 적 자신의 형과 함께 몇 번이나 임상사[8]를 겪었을 정도로 몸이 허약했다고 전해진다[9]. 그의 형 세르게이는 노보시비르스크에 위치한 물리학 및 수학 학교에 재학하며 알게 된 더 후 등 영국 락 음반들을 예고르에게 소개해 주었으며 예고르는 강렬한 사운드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1980년대 초반부터 레토프는 시와 가사, 각종 단편 소설들을 쓰기 시작했으며, RIO[10] 및 프리 재즈 계열 음악에 심취하였다. 이 외에도 그는 철학 분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상당한 지식을 쌓았다.

1982년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예고르는 모스크바 화학기술대학교에 재학하던 세르게이를 찾아가 같이 살게 되었다. 당시 세르게이는 재즈 색소포니스트로 아크바리움, 알리사, 데데테 등과 활동하고 있었다. 예고르는 락 음악에 심취해 수많은 음반을 사들였으며, 드럼과 베이스 기타 연주법을 배우고 당시의 언더그라운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몇몇과 교류를 가지며 음악 활동을 시작하였다[11]. 기술 전문 학교에 들어가 미장이 일을 배우다가 1983년 3월 잦은 결석과 낮은 성적으로 인해 퇴학당하고 옴스크로 돌아가 경비원 및 선전 화가[12] 등의 일을 했다.


2.2. 포세프 및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결성과 강제 해산[편집]


1982년 레토프는 자신의 친구인 안드레이 바벤코(Андрей Бабенко)와 함께 개러지/하드/사이키델릭 락 밴드 '포세프(Посев)'[13][14]를 결성하였다. 바벤코가 일렉 기타를 맡았고, 예고르가 보컬, 드럼[15][16], 베이스를 맡았다. 이 외 포세프 결성 이전 레토프는 "자파드"(ЗападЪ)라는 밴드에서 활동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1989년 앨범 "포세프"에 해당 밴드 시절 작곡했다고 알려진 몇 곡이 실린 것 이외 알려진 정보는 극히 적다.[17]

1982년 포세프는 두 개의 인스트루멘탈 앨범을 녹음하였으나[18] 이 둘은 현재 내용은 물론 제목조차 유실된 상태이다. 1983년에도 "전략과 전술(Стратегия и тактика)", "프놈펜(Пномпень)", "머나먼 도시 옴스크에 보내는 편지(Письма в далекий город Омск)" 등 세 개의 앨범을 녹음하였으나 이 셋은 제목을 빼고 전부 유실된 상태이다.

1년 뒤인 1984년 예브게니 데예프(Евгений Деев, 베이스)가 합류하였고, 밴드는 추가로 두 개의 앨범 "갖가지 풍경들(Всякие картинки)" 및 "병영에 내리는 비(Дождь В Казарме)"을 취입하였다. 8월에는 올렉 이바노프스키(베이스, 어쿠스틱 기타)가 합류하였고, 두 개의 앨범 "늙은 사환의 이야기(Сказки Старого Юнги)"와 "사랑의 음악(Музыка Любви)"을 녹음하였다. 9월에는 포세프의 사실상 마지막 앨범이자, 훗날 레토프가 "포세프의 앨범 중 최고"라고 평가한 "레게, 펑크 그리고 락앤롤(Reggae, punk & rock’n’roll)"이 나왔다.[19]

이후 포세프에 콘스탄틴 랴비노프(Константин Рябинов)[20]가 합류하며 1984년 11월 8일 그 유명한 그라지단스카야 오브로나[21]를 결성하게 되었다. 1985년 8월, 이바노프스키를 제외한 3명(레토프, 바벤코, 랴비노프)이 "스스로 해라(Сделай сам)"를 낸 것을 마지막으로 포세프의 역사가 마무리된다.[22]



썩어빠진 젊은이(Поганая молодёжь, 1985)
낙천주이(Оптимизьм, 1985)[23]
위의 두 앨범은 1988년 재발매된 동명의 앨범들과는 다르다. 1988년본은 모든 곡들을 다시 재녹음한 것이고, 트랙리스트 또한 상당히 다르다.
가사가 상당히 혼란스럽다. 참고로 번역은 제대로 된 것이다.

포세프와 초기 민방위는 공식 무대에 선 적이 없으며 단순 락 지망생들의 "홈 밴드"에 가까웠다. 허나 여러 라이브 공연을 통해 그롭은 점차 인기를 얻어가기 시작했고[24] 1985년 그롭의 첫 앨범인 "썩어빠진 젊은이"와 "낙천주이"가 예고르의 집에서 제작되어 마그니티즈다트 형식으로 유포되었다.[25] 하지만 민방위의 저속하고 반권위스러운 음악은 당시 소련 체제와 공존할 수 없는 음악이었다. 민방위의 음악을 들은 바벤코의 모친은 소련 공산당원이었고, 자신의 아들이 반사회주의적 음악을 한다고 당에 신고했다. 이에 지역 당국은 이 훌륭한 먹잇감을 놓치지 않고 민방위 멤버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낙천주이' 앨범을 녹음하고 있던 민방위는 "테러적 행위"를 조직한 죄로 줄줄히 잡혀 들어갔다. 같이 활동하던 다른 음악가들과 일가친척에게 가해진 협박은 덤이었다.

전기 민방위(1984년 - 1990년)의 노래는 소련 당국과 억압적 체제에 대한 분노와 비판, 풍자와 조롱이 섞인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포세프부터 극초기 민방위 시절, 즉 1984-85년 무렵 민방위의 노래에서는 특별한 정치적 메시지나 소련 체제에 대한 비판, 풍자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노이즈가 가득 낀 조악하고 조악한 음질, 그리고 '아이들 옹알이를 떠올리는' 가사는 권위적이던 소련 정부에 있어 곱게 보이지는 않았단 것은 자명하다. 심지어 시기조차 이들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당시로 말할 것 같으면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잇달아 사망하며 소련 정국이 이른바 "기강잡기"에 들어가 있던 기간이었고, 실제로 이 시절 많은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은 몸을 사리는 모습을 보였다. 허나 민방위는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았는지, 아니면 자신들이 체포 대상이 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못했는지) 민방위는 음악 활동을 감추지 않았고, 이는 지역 당국과 KGB의 훌륭한 먹잇감이 되었다. 그나마도 소련 말기니까 끌려가는 정도였지, 스탈린 시절이었으면 밤중에 바로 총살당했을 것이다 대도시였던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였다면 상황이 조금 좋았을지도 모르지만, 시베리아 한복판에 위치한 도시의 무명 밴드가 탄압받는다고 해서 신경써 줄 사람은 많지 않았다.[26] 혹자는 당시 레토프가 체제에 위협을 주는 '반동분자'는 절대 아니지만 가사가 원체 그렇고 그런지라 정신병원 입원으로 타협을 본 게 아니냐는 드립을 치기도 하는데, 위의 노래 가사들을 보면 절로 수긍하게 된다(...)

심문 중 예고르는 당시 자신들을 심문하던 소령 블라디미르 메시코프의 압박에 못 이겨 자살한다는 내용의 쪽지를 남기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바로 발각당해 목숨을 건진다. 이후 예고르는 감옥에 가는 대신 정신병원에 끌려가게 되어 1985년 12월 8일부터 1986년 3월 7일까지 병실에 감금당하게 되고[27] 랴비노프는 심장 문제에도 불구하고 당시 다니던 대학에서 퇴학당한 뒤 군대로, 그것도 격오지로 취급받던 카자흐스탄의 바이코누르 우주기지로 끌려갔다.[28][29] 당시 이들이 작업하던 앨범인 "썩어빠진 젊은이"와 "낙천주이"는 파기당하게 되고, 암암리에 떠돌던 부틀랙 카세트를 기반으로 2000년 컴필레이션 앨범 "Поносные звучания I"이 발매되었다.[30]


2.3. 정신병원 퇴원 이후 그리고 "아돌프 기틀레르" 사건[편집]


3월 초 그가 풀려난 뒤에도 주변 음악가들과 친구들은 예고르와 얽히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서명한 상태였기에 예고르는 1인 밴드로 혼자서 음악을 연주하고 녹음하며 앨범 "전체주의"(Тоталитаризм), "네크로필리아"(Некрофилия), "쥐덫"(Мышеловка), "아주 좋소!!!"(Хорошо!!), "빨간 앨범"(Красный Альбом) 등 5개의 앨범을 제작하고 여러 크바르티르니크에 참여하며 활발하게 활동하였다.[31]

흔히 민방위 하면 상당히 비판적이고 날것인 가사 그리고 노이즈가 주를 이루는 락/펑크 스타일의 노래를 떠올리지만[32][33], 이 시절까지 레토프의 노래는 컬트스러운 가사와 웅웅거리는 듯한 노래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1987년 이후 몇몇 노래들을 제외하면 라이브에서는 점차 듣기 힘들게 된다.

이 시절에도 레토프는 정부 당국과 지속적인 마찰을 빚어 왔다. 1986년 옴스크의 지방 언론인 "베체르니 옴스크"(Вечерний Омск)의 사설 "다른 이의 목소리대로(С Чужого Голоса)"[34]이 대표적인 사례로, 해당 사설은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루고 있다.[35][36] "쥐덫" 앨범에 실린 노래 "황색 언론"(Желтая пресса)은 이에 대한 레토프의 생각을 담고 있다.[37][38] 이 외 아파트에서 앨범을 작업하거나 공연을 열던 중 경찰 당국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1986년 여름 예고르는 올렉 및 예브게니 리셴코(Олег/Евгений Лищенко) 형제의 락 밴드 "피크 클락손(Пик Клаксон)"[39]에 참여하여 드러머로 활동했다.[40] 당시 피크 클락손은 앨범 "잉여 녹음들"(Лишние Звуки)을 녹음하던 중이었는데 이에 지쳐 기분 전환할 겸 프로젝트 "아돌프 기틀레르"(Адольф Гитлер)[41]를 발족했다. 부엌에서 담배를 피우며 예브게니 리셴코는 소련 말기의 체제의 부조리함을 나치 체제에 비유한 노래를 여럿 작곡했고, 이들의 연락을 받고 찾아온 레토프는 가사에 매우 흡족해 했다. 이후 이 셋은 리셴코 형제의 아파트에서 짧은 리허설 후 3시간 만에 20분짜리 "반파시스트적, 반고프닉적 의도를 담은"(Программа задумывалась антифашистской и анти-гопнической) 앨범 "병원"(Лечебница)을 녹음했다.[42]

Принципом написания песен стало доведение до откровенного и поражающего абсурда воззрений нацистской идеологии, в котором — словно в зеркале — отображалась бы другая идеология: зверство советского тоталитаризм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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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작곡의 원칙은 나치 이념의 시선을 솔직하고 또 충격적으로 부조리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었고, 그를 통해 마치 거울처럼 또다른 체제를 반사시켜 보는 것이었다. 바로 소비에트 전체주의의 잔혹함 말이다. (올렉 리셴코의 증언)


이후 1987년 4월 12일 노보시비르스크의 치칼로프 문화궁전(ДК Чкалов)에서 제1회 노보시비르스크 락 페스티벌이 개최되었다. 해당 페스티벌은 관제 페스티벌이긴 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의 영향을 받아 열린 노보시비르스크 최초의 락 페스티벌이었다. 당시 페스티벌 참가 예정이었던 즈부키 무[43]아우크치온이 '사상적 이유'로 참가가 거부되었고, 옴스크의 3인조는 이 페스티벌의 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항상 크바르티르니크나 비공개 소규모 라이브만 전진해 왔던 예고르 레토프에게 있어 첫 공식 무대의 데뷔이기도 했다. 이들은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의 이름으로 무대에 올랐고, 사회자는 이들을 "옴스크에서 온 착한 소년들"(пай-мальчики из Омска)이라고 소개했다. 옴스크에서 온 착한 소년들은 "병원" 앨범에 수록된 노래 다수와[44] 레토프가 작곡한 곡[45] 사회자의 소개가 무색하게도 이들의 공연은 20분 만에 중단되는 파국으로 끝나게 된다.


당시 공연. 한동안 부틀랙으로만 유포되다 2016년 불 테리어 레코드(Bull Terrier Records)에서 리마스터링되어 공식 발매되었다.

После первых отыгранных композиций «официальные лица», сидевшие в первых рядах, просто впали в состояние ступора. Сарказм песен был совершенно не понят жюри. Его члены были уверены, что видят перед собой на сцене, самых что ни на есть настоящих фашистов, призывающих молодёжь к идеалам, воспетым Геббельсом. Летовские же песни, включённые в выступление, поразили всех своим неистовым запалом, своей яростной антимилитаристской мощью. Зал, буквально, бесновался и сходил с ума. Но когда Егор стал в исступлении и с диким хохотом кричать на весь дворец культуры: «мне смешно на вас, страна дураков!», это было уже слишком. Аппаратуру отключили и группу фактически согнали со сцены. Так Советский Союз узнал о «Гражданской Обороне», а по стране пошло гулять выражение: «Панк рок существовал в СССР только 20 минут - во время выступления «Обороны» в Новосибирске. Всё остальное — это уже пост-пан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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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노래가 연주되자 좌석의 첫 줄에 앉아 있던 "관리"들은 그야말로 마비되어 버렸다. 심사자들은 노래의 풍자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말았다. 장담컨데 이들에게 있어 무대에 선 이들은, 젊은이들을 괴벨스가 불러제끼는 이념으로 끌어들이는, 그 누구보다 가장 극렬한 파시스트 분자들이었을 것이다. 공연 중에 포함된 레토프의 노래들은 모두를 격렬한 분노로 들끓게 했다. 청중은 문자 그대로 미쳐버렸다. 특히 예고르가 거친 웃음과 함께 문화궁전 전체에 "바보들의 나라, 전부 웃기기 그지 없어!"[46]

라고 광란의 외침을 질렀을 때 이들은 너무 나가버린 것이었다. 즉각 장비의 전원이 내려갔고 이들은 무대에서 그대로 쫓겨났다. 그렇게 소비에트 연방은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소련에서 펑크 락은 노보시비르스크의 "오보로나"가 공연하던 딱 20분 동안 존재했었다. 그 외의 것들은 전부 포스트 펑크이다!"라는 말이 전국에 돌게 되었다. (당시 관련자 증언 1)


Когда группа сыграла первые композиции, в рядах официоза начался столбняк, а зал в полном смысле сходил с ума. Это был дебют Летова и его друзей на большой сцене, и они умудрились устроить в столице Сибири натуральный Пер-Лашез. «Оборона» со своими антисоветскими текстами и грязным гаражным звуком начала крушить все подряд. Охваченный волной дикого кайфа, звукорежиссер «Калинова моста» Александр Кириллов схватил лист бумаги, написал печатными буквами: «Кто литовал?» и пустил эту парфянскую стрелу по рядам в направлении жюр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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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가 첫 노래를 연주했을 때, 관련자들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을 때렸고, 청중은 말 그대로 미쳐버렸다. 이 공연은 레토프와 그의 친구들에게 있어 대형 무대 데뷔 공연이었고, 이들은 시베리아의 수도에 페르 라셰즈를 열어버리고야 말았다.[47]

"오보로나"의 반소비에트적 가사와 거친 개러지 락의 소리는 모든 것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 거친 광란의 파도에 휩싸여, 칼리노프 모스트[48]의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알렉산드르 키릴로프는 종이 한 장을 낚아채 큼직하게 적었다. "지금 누가 노래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는 심사관들이 앉은 열을 향해 파르티잔 샷을 쏘듯 정확하게 종이를 날렸다... (당시 관련자 증언 2)


Тогда это был наш первый концерт на большой сцене. До этого все в подвалах каких-то играли, дома играли, в основном у меня в квартире давали концерты человек на десять-пятнадцать. После фестиваля, когда вернулись в Омск, я две недели записывал свои альбомы — две недели пока шла бумага из Новосибирска в Омск. Бумага от фестиваля — там выступили. Написал кто-то из организаторов, какие-то комсомольцы. Бумага имела хождение в Омске: вызывали всех подряд. Меня сразу же вызвали в психушку и решили там оставить. Т.е. вызвали, сказали что-то про новосибирский фестиваль и добавили, что «сейчас за тобой санитары придут и все». И пошли за санитарами. Тут я дверь открыл и убежал. Сразу «скорая помощь» на дом приехала — меня забирать. У меня с собой было сорок рублей и сумка со свитером. На сорок рублей я купил билет на поезд до Москвы и уехал. В бегах был три или четыре месяца. Начался розыск — это был как раз 1987-й год, все лето. Не помню, виделись мы с тобой тогда или нет? Я был в Симферополе, Киеве, Москве, Ленинграде. Я постоянно ездил. Познакомился с Шевчуком — со всей тусовкой. А потом позвонил домой, мне сказали, что дело прекратили и меня искать перестали. Вернулся с опаской, даже дома сначала не жил. Смотрю: меня никуда уже не вызывают. Всю зиму вообще не работал — никуда не принимали: я, вообще-то, художни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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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 전까지는 어디 작은 지하실이나 집에서, 내 아파트에서 많아봤자 열에서 열다섯 명 앞에서 연주했다. 공연 이후 옴스크로 돌아와서 나는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옴스크까지 소식이 전해질 2주 동안 앨범을 녹음했다. 어떤 콤소몰 조직원이, 해당 페스티벌의 관련자 중 한 사람이, 페스티벌에서 소식을 써서 보냈다. 소식이 옴스크 전체를 돌았고 관련자 모두가 소환당했다. 그들은 즉각 정신병원으로 날 불러 거기에 가두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날 불러 노보시비르스크 공연에 대해 뭔가 말했고 "당신에게 병원 간호인이 갈 것이고 그게 전부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간호인을 부르러 갔다. 이에 난 문을 열고 바로 튀었다. 그 직후 앰뷸런스가 날 데리러 집에 도착했다. 당시 내 수중에는 40루블과 스웨터 하나가 든 가방이 있었다. 40루블로 난 모스크바행 기차표를 사서 떠났다. 난 한 석 달에서 넉 달 정도 도망쳤다. 수색이 시작되었다. 1987년 초였고 수색은 여름 내내 이어졌다. 서로를 다시 보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난 심페로폴, 키이우,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에 있었다.[49]

난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난 셰프추크와 온 관중들을 만났다. 그리고 난 집에 연락했고, 가족들은 사건이 종결되었고 더 이상 날 찾지 않는다고 전해주었다. 난 조심스레 집으로 돌아가 보았다. 처음엔 아예 집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난 둘러보았다. 그 어디서도 날 찾지 않았다. 겨울 내내 일하지 않았다. 그 어디에도 난 고용되지 않았다. 이제 난 진정한 예술가였다.[50] (레토프의 증언 1)


Весной 1987-го мы вместе с «Адольфом» наскандалили, дали, что называется, говна на Новосибирском фестивале, на коем я, кстати, и познакомился впервые с Янкой, Чёрным Лукичём и другими, впоследствии героическими личностями. Снова начались гонения и дрязги. Меня попытались снова, запихнуть в психушку, но с благословенной помощью Янки я расторопно «двинул лыжи» и благополучно проездил все лето и осень автостопом по стране, находясь в розыск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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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봄 "아돌프"와 함께 우린 거한 사건을 쳤고, 그들의 말마따나 노보시비르스크 페스티벌에 똥물을 뿌렸다. 어쨌든, 난 거기서 얀카와 초르니 루키치[51]

그리고 다른 영웅적 면모를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수색과 압류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자들이 날 정신병원에 처넣으려 했지만 얀카 일행의 너무나도 고마운 도움과 함께 난 재빨리 챙길 걸 챙겨 수배 명단에 오른 채 여름과 가을 내내 안전하게 히치하이킹을 하며 돌아다녔다. (레토프의 증언 2, 1990년)


사실 첫 곡이었던 "나의 투쟁"(Mein Kampf)부터가 "짝불알 마조히스트 시클그루버 상병은 깜빵에서 나의 투쟁을 썼다네!" 같은 가사로 이루어져 있긴 했으나, 그리고 욕설을 자체 검열하는 등[52] 아돌프 기틀레르의 멤버들 또한 나름의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노래를 부르는 건 가히 "스캔들"이라 할 만했다. 80년대 말까지 노보시비르스크와 같은 지방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가 제대로 퍼지지 않았고, 그 시절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도 아닌 이런 지방에서는 펑크나 히피나 파시스트나 똑같이 '인민의 적'으로 인식되었다. 한때 한국에서 반체제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을 전부 "빨갱이"로 몰았던 역사가 있듯 소련 시절에도 사상적으로 좀 불순하다 싶으면 파시스트 아니면 디시덴트(반동분자)라는 딱지가 달라붙었다. 요약: 약 빠는 놈들을 쫓아냈더니 약 빤 놈들이 몰려왔다[53]

"— Дружок, после тебя еще будут выступать группы. Ты че там? Тебе что, похуй на наш фестиваль, да?"

"Сегодня мы закончили."

"Ты понял меня или нет?"

"Поня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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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여러분 뒤에 공연이 예정된 밴드가 여럿 있습니다. 뭐 하자는 겁니까? 뭐, 우리 페스티벌 따위 엿이나 먹어라, 그런 겁니까?"

"오늘 우리 공연은 끝났습니다."

"지금 제 말 이해하신 겁니까, 아닙니까?"

"아 이해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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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중단된 후 사운드 엔지니어였던 알렉산드르 키릴로프와 예고르 레토프 간에 오간 짧은 대화 (위 영상 기준 27:14부터)


그렇게 사고를 친 레토프는 집을 떠나 얀카와 함께 도망길에 올랐다. 반 년 가까이 둘은 보초를 서가며[54] 심페로폴, 키예프,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등 상당한 거리를 히치하이킹으로 돌아다니며 숨어지냈으나 그 와중에도 자주 크바르티르니크[55]에 나타났다. 다행히 1987년 겨울 레토프의 친척들이 손을 써 주었기에 추적이 멈추었고 그렇게 "옴스크의 히피 펑크"는 사회로 돌아올 수 있었다. [56]


2.4. 전기 민방위의 본격적 활동 (1988년경 - 1990)[편집]


한 달 정도 조용히 있던 그는 앨범을 취입하는 등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1988년 민방위는 제2회 노보시비르스크 락 페스티벌에 또다시 민방위의 이름으로 참가했고, 이번에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피크 클락손이 빠졌고, 대신 올렉 '매니저 '수다코프(Олег "Манагер" Судаков - 보컬), 포세프 시절 같이 활동했던 예브게니 '존 더블' 데예프(Евгений "Джон Дабл" Деев - 보컬, 베이스), 드미트리 셀리바노프(Дмитрий Селиванов - 보컬) 세 명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절정을 달리고 있었고, 46분 간의 공연은 대성공을 이루었다. 이를 시작으로 민방위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공연은 녹음본으로만 남아 있으나, 당시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에 대한 다큐멘터리 팀이 찍은 짤막한 영상이 남아 있다.[57]

피르소프의 주선으로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발트 3국 등 여러 곳에서 라이브를 진행했으며 앞서 언급된 아우크치온 관련 에피소드 이후 집에서 본인이 자신의 걸작으로 꼽는 "러시아의 실험낭자한 대평원" 등 4개의 앨범을 취입한다.


1988년 12월 04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시락(СыРок) 페스티벌" 공연 영상.[58]



2.5. 전기(前期)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 해체 및 정치 활동 (1990년대)[편집]


1990년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는 탈린 콘서트를 마지막으로 잠시 해체되었다. 이후 레토프는 "코뮤니즘"[59]이나 "예고르와 정신줄 놓은 작자들" 등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 음악 활동을 계속하고 앨범을 취입하였다.

We have been playing together for a year and a half. There was some small period apart, just for the rest. We can’t live without each other. It’s like a commune. But I think that we must stop it after Barnaul. Now it’s that sort of situation in the country, that they make money by rock music. It’s just a profanation. People come to concerts as they would go to a discoteque, only for jumping and crying. Or there are some athletes who want to listen to some arpeggios or some timbre layers. I don’t think that rock is music or aesthetics. I think that it’s a kind of religious movement. I want to play the kind of music that we played in basements of Novosibirsk. It’s better to me if there are only ten persons in the concert hall, because they really want to listen to me. It seems to me that it’s absolutely impossible in our country to have such a small s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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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는 한 1년 반 정도 같이 공연해 왔다. 중간중간 단지 휴식을 위해서 잠깐씩 멈추었던 시기가 있기는 하다.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마치 공동체 같은 것이다. 하지만 바르나울[60]

이후로는 밴드를 그만 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요새 우리 나라의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록 음악을 한다. 그것은 신성모독이다. 사람들은 마치 디스코텍에 가는 기분으로, 그냥 단순히 뛰고 소리지르기 위해서 공연장에 간다. 아니면 웬 선수들이 와서 특정한 아르페지오나 음을 듣고 싶어한다. 나는 록을 음악이나 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록은 차라리 종교적인 행동에 가까운 것이다. 나는 우리가 노보시비르스크의 지하실에서 연주하곤 했던 그런 음악을 하고 싶다. 나는 차라리 공연장에 관객이 10명만 있는 상황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더 좋은데, 왜냐면 그 10명의 관객은 나의 음악을 진정으로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은 규모의 공연을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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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롭이 해체된 이유를 설명하는 1991년 5월 인터뷰 출처


KGB에 쫓기고, 잡혀서 정신병원에 수감당하고, 공산당에 의심당할 수준으로 저속하고 반항적인 가사가 가득 담긴 노래를 여럿 만들긴 하였으나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이후로 예고르 레토프는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61], 실제로 반문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있던 국가 볼셰비키 당(NBP)의 창설자 중 하나이자 초창기 맴버이기도 하였다. 소련 붕괴 이후, 옐친을 비롯한 여러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발생한 사회적 부조리와 갈등에 의하여 공산주의로 선회한 것으로 추정된다.

"Я — СОВЕТСКИЙ НАЦИОНАЛИСТ. Моя Родина — не просто Россия, идею которой отстаивают и полируют разные серьезные мужи, я не россиянин, хотя и натурально русский (корни мои по отцу — из беднейших крестьян Северного Урала, по матери — из казачьего рода Мартемьяновых). Родина моя — СССР. Россия — это дело частное, отдельное, такое же, как Германия, Франция, Китай и прочие отдельные государства. СССР — это первый и великий шаг вдаль, вперед, в новое время, в новые горизонты. СССР — это не государство, это идея, рука, протянутая для рукопожатия, и слава и величие России в том, что она впервые в истории человечества взяла на себя горькую и праведную миссию прорыв сквозь тысячелетнее прозябание и мракобесие, одиночество человека к великому единению — к человечеству. Я верю, верую во всемирную, вселенскую Революцию и готов воевать за нее и словом, и делом, как это делали мои доблестные предшественники, учителя и соратники от Достоевского до Маяковского, все те, кто всегда был против лжи, равнодушия, упадка, смерти, В 1917 году наша страна сделала первый шаг на пути к истине — да не бывать ему последни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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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비에트 내셔널리스트다. 내 조국은 높은 놈들이 찬양하고 세워놓은 러시아가 아니다. 나는 인종은 비록 러시아인이고, 내 아버지의 조상은 북우랄의 가장 못사는 농부고, 어머니는 마르테먀노프의 카자크에서 왔다지만, 러시아 국민이 아니다. 내 조국은 소련이고, 러시아는 그저 그 부분이며 분리된 것이다. 마치 중국이나 프랑스, 독일 같은 그 외 분리된 정부들처럼 말이다.

소련은 위대한 도약이자. 한 발돋움이다. 앞으로, 새로운 시대로, 새로운 지평으로, 소련은 - 정부가 아니라. 이데아요, 약속된 손이요, 그리고 러시아로써는 천년동안 이어진 무지몽매함을 타파할 중대한 임무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맡게 되었다는 건 영광이자 위대함이다,

외톨이였던 인간(러시아)을 - 인류(소련)로써 대통합을 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나는 곧 전세계, 전인류의 혁명이 일어날 걸 믿는다. 영원한 혁명을 위해, 나는 입으로도, 행동으로도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마치 우리들 선조들처럼, 선생이자, 동반자들인 도스토옙스키부터 마야콥스키까지, 모든, 거짓말과 무관심, 퇴폐, 죽음에 반하는 자들처럼 말이다. 1917년에 우리 나라는 진실을 향한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이 첫 걸음은 마지막 걸음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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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Я молодой" 22호 (1997년 5월지)에 실린 레토프의 인터뷰 중. 원문


2.6. 2000년대 이후[편집]


다만 소련 말기 권위적이고 부패한 모습을 보여주던 소련 정부에 대한 반대 기조는 버리지 않았으며, 2001년 발매된 앨범 "별똥별(Звездопад)"이 암시하듯[62] 90년대 말 이후에는 자신이 더이상 그 어떠한 정치적 운동과 관계가 없다고 발언하는 등 선을 긋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당시 몇몇 관련자들과 달리 극우 성향은 보이지 않았다.[63]

В связи с трагическим инцидентом, имевшим место 8.02.2004г. в Свердловске во время нашего концерта в ДК «Урал», мы делаем следующее заявление.

Ко всем ура-нациионалистическим движениям мы не имели и не имеем отношения самым решительным и активнейшим образом. Мы патриоты, но не нацисты.

Приходится констатировать, что в сегодня повсеместно наблюдается даже не рождение, а тотальное, агрессивное наступление ФАШИЗМА — не цветасто-отвлеченно-героического, но самого натурального, крысиного, насекомого, который мы уже в свое время испытали на собственной жопе. Каждый нелюбитель маршировать в ногу с кем бы то ни было, каждый, кто САМ, каждый, кто ЖИВ — борись с ним как можешь на любом участке пространства, пока еще не окончательно поздно, не стой в тупом наблюдении и раззявой печали. Все же тоталитаристы — правые, левые, всех цветов и мастей — ИДИТЕ НА ХУЙ.

Убедительная просьба больше не ассоциировать с нашей деятельностью вашу вонь.

Егор Летов и «Гражданская Оборона»

9.02.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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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8일 스베들로프스크 "우랄" 문화궁전에서 있었던 우리의 공연 도중 있었던 비극적 사고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합니다.

우리는 가장 단호하고 적극적인 방식으로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운동과 그 어떠한 관계도 없었으며 또 없음을 알립니다. 우리는 애국자이지만 나치는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세상이 "파시즘"이 단순한 탄생에서 벗어나 전체적이고 그리고 강렬한 공격을 수반하고 있음을 인정할 밖에 없습니다. 알록달록하고, 추상적이고, 영웅적이지 않은, 하지만 우리가 물리도록 겪은 가장 자연적인, 쥐새끼 같은 곤충의 꼬라지를 한 파시즘이 말입니다. 그 누구와도 발을 맞추어 행진하고 싶어하지 않는 이들에게, "자기 자신으로" 있는 이들에게, "살아 있는" 이들에게 말합니다. 너무 늦기 전에, 그 어디에서든 전력을 다해 파시즘과 맞서 싸우십시오. 바보같은 관조와 활짝 열린 슬픔의 편에 서지 마십시오. 그놈이 그놈인 전체주의자들에게 - 우파든, 좌파든, 어떤 색깔에 줄무늬를 내세우는 놈들이든 - 말합니다. 좆이나 까십시오.[64]

우리는 당신네 파시스트들에게 더 이상 당신들의 악취를 우리의 활동과 결부시키지 말아줄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예고르 레토프와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

2004년 02월 09일


이를 보여주는 사례가 2004년 2월 8일 예카테린부르크 공연에서 있었던 살인 사건에 대한 반응이다. 당시 공연장에서 대규모 몸싸움이 일어나 스킨해드 즉 극우파 성향의 팬들이 비슬라브인 팬을 구타하여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 이후 레토프는 자신과 민방위 명의로 공식 홈페이지에 성명문을 올려 "파시스트들은 좆이나 까라"라는 등 직설적으로 비판하였다.

또한 소련 붕괴 이전에는 단순한 반정부, 아나키즘적인 가사를 담은 노이즈 섞인 펑크 락을 주로 작곡하였으나, 소련 붕괴 이후에는 초월과 투쟁, 그리고 종교적 의미를 가사의 중심으로 사용하는 사이키델릭한 노래들을 작곡하였다. 초기곡만 보면 상상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그는 상당한 량의 독서량을 자랑하는 인텔리였다. 10분이 넘어가는 대작 "실험낭자한 러시아의 대평원"이나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존재"[65]등의 곡을 보면 그의 철학이 잘 드러난다.

2008년 2월 19일, 옴스크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수면 중 심장 질환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상당한 수의 팬들이 따랐으며, 옴스크 동부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묘비

Не теряйте надежды и совести, не впадайте в грех уныния, не складывайте оружия, не опускайте рук.

희망과 양심을 잃지 마십시오. 의기소침의 죄악에 빠지지 말고, 무기를 내려놓지도 말고, 두 팔을 들어 포기하지 마십시오.

Хватит заживо гнить в своих уютных капканах.

안락함이라는 올가미 속에서 살아 숨쉬는 채로 썩어들어가는 짓도 이제 충분합니다.

Покиньте свои пыльные, затхлые закоулки — выйдите на свет безбожный, вдохните полной грудью.

먼지 투성이 케케묵은 구석을 벗어나 신이 없는 세상으로 나와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십시오.

Родина ждeт вас — безнадeжно-молодых, отчаянных и непокорных. Требуйте и достигайте невозможного!

가망 없으리만치 젊어 활기찬, 결사적인, 굴하지 않는 조국이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이루어 내십시오!

Наступите на горло своей тоске, апатии, лени. Казните свой страх.

목구멍까지 차오른 우울함과 권태 그리고 나태를 짓밟으십시오. 그대의 공포를 처형해 버리십시오.

Действуйте так, чтобы Смерть бежала от вас в ужасе.

죽음마저 공포에 차 당신을 벗어 달아날 정도로 행동하십시오.

Мир держится — пока ещe держится! — на каждом из нас — живом и непобедимом.

삶이란 놈은 매달려 있습니다. 여전히 매달려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매달려 있습니다. 삶이란 놈은 살아 숨쉬며 또 무적입니다.

И пусть нас мало — нас и всегда было немного — но именно мы двигали и движем историю, гоним еe вперeд по сияющей спирали.

그리고 우리의 수가 적다 한들, 우리의 수는 언제나 적었지만, 역사를 움직여 왔고 또 역사를 움직이는 건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빛나는 나선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도록 재촉하고 있습니다.

Туда, где времени не было, нет и не будет.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도 시간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В вечность.

영원을 향하여.

Так не позорьте же себя и своe будущее.

그러니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모욕에 빠트리지 마십시오.

Встаньте!

일어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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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토프의 유언으로 알려져 있던 문구.[66]


3. 음악적 성향[편집]


꽤 적지 않은 러시아의 록 뮤지션이 그러하듯 레토프도 초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초기는 욕설이 난무하며, 가망이 없는 소련 사회에 대한 절망과 무력한 공산주의자들과 온갖 학살과 범죄를 주도한 높으신 분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슬픔이 담겨있고 녹음을 하고 나서 편집을 하지 않은 듯한 펑크 락의 날카로움과 날 것의 감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의 후기는 종교적 키워드, 시적 은유, 그리고 앞과 뒤가 모순되는 가사의 요소들을 통해서 알아 들을 수만 있다면 마음을 울리는 사이키델릭한 깊음, 그리고 좀 더 부드러우면서도 소리를 지르는 듯한 모습들이 상당히 인상적인 것들로 다가온다.

남자의 '그곳'(욕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4. 들어보기[편집]



'펑크 락과 락앤롤(Панк и рок-н-ролл)'. 포세프 시절의 곡.


'우리는 얼음이다(Мы — лёд, 1987)'

네크로필리아(Некрофилия)



'KGB-락(КГБ-рок, 1987)'


'모든 것은 계획대로(Всё идёт по плану, 1989)'


'총알에 대한 철학적인 노래(Философская песня о пуле, 1989)'. 솔로 앨범 수록곡.


'펄쩍-펄쩍(Прыг-скок, 1990)'. 그롭 해체 이후 '예고르와 좆병신들' 시절 곡.[67]


'지점(Солнцеворот, 1997)'[68].


'어느 바보에 대하여(Про дурачка, 2005)'


'사이코넛들에게 영광을(Слава психонавтам, 2007)' [69]


'나 없이(Без меня, 2004)'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곡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5. 여담[편집]


  • 민방위 앨범 커버에 대한 글
  • 레토프 노래들의 특징 중 하나는 "매우 많은 테이크"이다. 레토프는 같은 노래를 여러 테이크로 제작했으며 이들은 특별한 고지 없이 여러 초판과 재판 앨범들, 컴필레이션 앨범들과 미공개 작업물들 사이에 뒤죽박죽 섞여 있다.[70]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다
Очень богатыми на раритеты оказались сессии альбома «Прыг-скок». Так, помимо дублей, вошедших в переиздание, известно также ещё по одному дублю песен «Про дурачка» и «Иваново детство» (входили в «Прыг-скок» в издании ХОР, BSA 1994 года, Moon Records «чёрной серии» и кассетное издание Звукореки / BSA), «Про червячков» (входил в «Прыг-скок» в издании BSA 1993 года, винил Золотой Долины и магнитоальбом), ещё два дубля «Песенки о святости, мыше и камыше» (один входил в «Прыг-скок» в издании BSA 1993 года, винил Золотой Долины и магнитоальбом, а другой — только в магнитофонный сборник «Попс 1984–90»). Еще один ауттейк из этих сессий никогда не входил в «Прыг-скок» — это заговор на смерть под названием «Песенка, сулящая несчастье», который можно услышать в магнитофонном сборнике «Хуй через плеч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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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Прыг-скок" 앨범 작업 당시 수많은 희귀본들이 녹음되었다. 재판본[71]에 포함된 또 다른 테이크와 함께, "Про дурачка" 및 "Иваново детство" 노래의 또 다른 테이크가 존재하며(ХОР 음반사, 1994년판 BSA 음반사, Moon Records 음반사의 일명 "검은 시리즈" 판본 및 Звукореки / BSA 음반사의 카세트 판본에 포함) "Про червячков"(1993년판 BSA 음반사, Золотой Долины 음반사의 LP 및 기타 마그니티즈다트[72]에 포함) 또한 마찬가지이다. "Песенки о святости, мыше и камыше"의 경우 서로 다른 두 테이크가 더 존재한다. (하나는 1993년판 BSA 음반사 및 Золотой Долины 음반사의 LP 및 기타 마그니티즈다트에 포함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컴필레이션 앨범인 "Попс 1984–90"에 포함) 이 세션 당시 녹음된 테이크 중 "Прыг-скок" 앨범에 수록되지 않는 노래로 "Песенка, сулящая несчастье"라는 제목을 단 테이크가 있으며, 이 테이크는 컴필레이션 앨범인 "Хуй через плечо"에서 들어볼 수 있다.[73]

  • 이런 문제는 특히 자파드나 포세프 시절부터 초창기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 시절 작업본에서 그 절정을 찍는다. "시베리아 펑크 지망생 불순분자들의 아마추어 연주"는 당시만 해도 아카이빙할 가치가 없었기에 유실된 것도 몇 있고, 당시 소련 상황상 질 좋은 녹음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기에 상태 또한 좋지 않다. 여기에 이들 대다수는 알 수 없는 경로로 유출되어, 제대로 분류되지 않은 채 저질 카세트를 통해 마구잡이로 유통되었기에[74] 표지갈이가 상당히 심한 편이다.[75] 이에 대한 장문의 글(러시아어) 여기서 굳이 정본을 찾는다면, 2000년대 초반 레토프와 추마코바가 대대적으로 리마스터링하여 발매한 Выргород(비르고로트) 음반사 버전이 "정본"에 가까울 것이다.
    2022년 1월, 나탈리야 추마코바는 현재 보유하고 있는 레토프의 아카이브를 재정리하여 포세프 및 극초창기 음악들을 재발매하겠다고 발표했다. VK 게시글 추마코바는 이를 2022년 내에 공개하겠다고 말했지만, 아카이브 자체의 문제[76]현 러시아 시국상 실재 공개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측되었다. 실제로 2022년 내에는 발매되지 못했고, 2023년 비르고로트를 통해 당시 작업물들 중 일부가 포세프의 명의로 발매되었다.[77]

  • 여러 노래에서 북한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
Я купил журнал Корея, там тоже хорошо (나 "조선" 紙를 한 부 샀다, 그 곳도 마찬가지로 좋다)[78]
Там товарищ Ким Ир Сен, там тоже что у нас, (그 곳엔 김일성 동지가 있다, 그 곳 사람들도 우리와 다를 것 없이 살아간다)
Я уверен что у них тоже самое, и всё идёт по плану (그들도 우리처럼 살고 있다고 나는 믿고, 모든 건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다)
- Всё идёт по плану (모든 것은 계획대로, 198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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Цель оправдывает средства, давай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나니, 어서)
Убивай, насилуй, клевещи, предавай (죽여라, 강간하라, 비방하라, 배신하라)
Ради светлого, светлого, светлого, светлого, светлого здания идей Чучхе (밝디밝게 빛나는 주체사상의 건물을 위하여)
- Харакири (할복, 1988)[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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Идеями Чучхе да насыщаются народы (인민들은 주체사상에 배불리 자라났다)
Пронзительно взывая героическим сознаньем (영웅적인 의식에 통찰력 있게 호소하며)
В далёкий Пхеньян наши помыслы струятся (저 머나먼 평양으로 우리의 사상이 퍼져나간다)
Там наш великий вождь — сын прославленной Отчизны (그곳에 우리의 위대한 수령님이, 명성 높은 조국의 아드님이 계신다)
Навеки все мы все — Паломники в Корею (언제까지나 우리 모두는 조선으로 향하는 순례자이다)
- Паломники в Корею (조선으로 향하는 순례자, 1989)[82]
이후 나즈볼 활동을 하며 공산주의에 심취한 모습을 보이던 90년대 공연 세트리스트를 보면 미국에 맞서 6.25 전쟁에 참전한 중국 의용군을 기리는 "Песня про китайского народного добровольца"(젊은 중국 인민군의 노래)가 자주 나타나는데, 이 노래는 북한의 시인이었던 조령출(조명암)가 지은 동명의 시의 러시아어 번역본에 멜로디만 덧붙인 것이다.[83][84]

레토프의 이러한 성향에 대해 약간의 변론(?)을 해 주자면, 그가 활동하던 90년대만 하더라도 북한의 막나가는 실상이 현재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보니 북한을 "굶어 죽어라도 마이웨이를 시전하는 소비에트적(?) 미친놈들에 대한 로망"이 담긴 시선에 입각해 호의적으로 바라보던 것으로 추정된다. 레토프는 2008년 사망하였기에 북한의 폭압적 진실을 잘 알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의 행실을 고려해 보았을 때 그가 2010년대 이후까지 살아 있었다면 북한을 더 이상 호의적으로 보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이 가능하다. 장폴 사르트르마오이즘남침유도설을 옹호하고 존 레논마오쩌둥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사례와 비슷한 맥락으로 보면 된다.

  • 형인 세르게이 레토프는 현재 러시아에서 유명 색소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원래는 항공공학 분야를 전공하였고, 부란 우주왕복선 개발에도 참여한 적 있는 우수한 재원이라고 한다. 현재 레토프의 미망인 나탈리야 추마코바와는 여러 개인적 문제로 인해 서로 적대하는 사이이다.

  • 초기 가사만 보면 상상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상당한 인텔리였다고 한다. 그의 집에는 상당한 양의 장서가 있고, 니콜라이 고골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도스토예프스키는 젊은 시절 옴스크에서 유배 생활을 보낸 적이 있다. 실제로 그의 가사를 분석해 보면 수많은 소설, 영화, 시에 대한 레퍼런스가 가득하다.

  • 생전 고양이와 선인장을 좋아했다고 한다[85]. 그의 곡 중에서는 자신의 죽은 고양이에게 바치는 노래[86]도 있다.

  • 축구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죽기 몇 년 전에는 로만 아브라모비치 때문에 첼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러시아 사업 역사상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자한 건 처음 봤다는 게 그 이유. 그의 유일한 법적 배우자 나탈리야 추마코바 또한 그의 축구에 대한 애정을 공유했는데, 그녀의 최애팀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고 한다.

  • 원래 이름은 이고리지만, 레토프의 부친에 따르면 이름이 너무 평범해 보인다는 이유로(그리고 이름을 가능한 한 가장 바보같이 짓는다는 이유로) "뒤진 예고르(Егор Дохлый)"라는 예명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허나 후일[87] "Дохлый"는 빠지고 예고르라는 이름만 남았다.

  • 아버지 표도르 레토프는 전직 군인으로[88] 붉은 군대 합창단에서 잠시 노래를 부른 적이 있으며, 형 세르게이 레토프는 유명 재즈 색소포니스트다. 부친의 회고에 따르면 예고르의 첫 베이스 기타는 세르게이가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한다.

  • 또 다른 시베리아의 여성 가수 얀카 댜길레바와 80년대 동거했으며, 두 사람의 유명세로 인해 예고르는 얀카를 가장 사랑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표도르 레토프의 회고에 따르면 둘의 관계가 그렇게 좋기만 한 건 아니였으며[89], 오히려 당시 예고르가 가장 좋아하던 여자는 얀카의 친구이자 가수였던 안나 '뉴리치' 볼코바(Анна "Нюрыч" Волкова)였다고 한다. 둘은 90년대까지 동거했으나 좋지 않게 헤어졌고[90], 레토프의 유일한 법적 배우자는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베이시스트이기도 했던 나탈리야 추마코바(Наталья Чумакова)로[91] 이 둘의 관계는 레토프의 사망 때까지 유지되었다[92].

  • 2000년대 이전 라이브에서는 이 영상[93]같이 춤을 추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 춤이지 얼핏 봐서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허우적거림(...)이다. 러시아인들 입장에서도 웃긴 건지[94] 유튜브에서 이 영상같은 패러디 영상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95] 사실 춤 정도면 양반이고, 원체 독특하고 똘끼넘치던 양반인지라 꽐라가 된 채 공연을 강행하는 등[96] 전위적 행동을 자주 선보였으며, 팬들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똘끼가 넘쳐 서로 술마시고 패싸움을 벌이거나 무대에 난입해 대신 노래를 부르거나 경비원들과 레토프를 가지고 줄다리기(...)를 하다 구타하는 등 기행을 선보이는 걸로 유명했다.[97][98] 1998년 5월 모스크바 공연 영상. 파도마냥 무대로 향해 뛰어들려고 시도하는 관중과 이들을 잡아 내팽개치듯 던져버리는 가드들을 주목. 결국 막판에 가면 레토프가 크라우드 서핑을 시전하고, 누가 윗옷을 가져가 버린다(...)

  • 유명세와 여러 '독특한' 가사와 공연 및 생애 등으로 러시아 웹에서는 심영 비스무리한 합성물 주제로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자면 이 영상[99]. 2018년 등장하여 한때 소소하게 유행하였다. 이런 것도 있다. AI 기술을 이용해 목소리를 추출해 낸 것.[100]

  • 1980년대 중후반에는 반삭 모히칸 스타일로 공연을 하는 일이 잦았고, 밴드 피크 클락손(пик клаксон)[101]과 함께 아돌프 기틀레르(адольф гитлер) 프로젝트를 같이 하던 시절에는 무려 고스 스타일의 메이크업을 하고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특히 이 시절의 검은 안경과 데님 자켓으로 대표되는 펑크 스타일의 복장은 80년대 예고르 레토프를 상징하는 스타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102][103]
    90년대에는 스타일이 좀 '얌전해져서' 단정한 가죽 자켓 차림과 함께 종종 뿔테 안경을 썼고, 이 때부터 머리를 장발로 기르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급속한 노화와 함께 머리칼도 마녀마냥 부스스하게 변했고, 사이키델릭한 무늬가 프린트된 티셔츠를 즐겨입었다.
    이 장발에 관련된 아이러니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당시 예고르는 반옐친 편에 가담하였고, 시위와 가두행진에도 여러 번 참가하였다. 옐친 측의 유혈 진압이 시작되자 형 세르게이 레토프는 예고르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고르는 진압이 본격화되기 하루 전 모스크바에서 옴스크로 가버렸기에 목숨을 건졌다. 옴스크로 간 이유에 대해 레토프는 옴스크에서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예고르 사후 세르게이는 한 인터뷰에서 가두행진 당시 몇몇 노파들이 장발의 예고르에게 "이 히피족야, 어긴 너희 같은 놈들이 있을 곳이 아니야, 썩 꺼져" 같은 말을 던졌고, 이 '모욕'이 레토프가 모스크바를 떠난 것에 영향을 미쳤다고 증언한 바 있다.

  • 레토 감독인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영화 '페트로프의 감기'에 레토프의 곡들이 대거 삽입되었다. 주로 오피즈데네프시니예 시절 작업물들.

6. 앨범 목록[편집]



6.1. 포세프 앨범[편집]



6.1.1. 정규 앨범[편집]


제목
발매 연도
특이 사항
(제목 미상)
1982
레토프, 바벤코 참여, 앨범 유실됨. 인스트루멘탈 앨범이라는 기록만 남아 있음.
(제목 미상)
1982
레토프, 바벤코 참여, 앨범 유실됨. 인스트루멘탈 앨범이라는 기록만 남아 있음.
전략과 전술
Стратегия и тактика
1983
레토프, 바벤코 참여, 앨범 유실됨. 제목과 인원 관련 기록만 남아 있음.
프놈펜
Пномпень
1983
레토프, 바벤코 참여, 앨범 유실됨. 제목과 인원 관련 기록만 남아 있음.
머나먼 도시 옴스크에 보내는 편지
Письма в далекий город Омск
1983
레토프, 바벤코 참여, 앨범 유실됨. 제목과 인원 관련 기록만 남아 있음.
여러 풍경들
Всякие картинки
1984/2023
레토프, 바벤코, 데예프 참여, 1984년 여름 녹음
나탈리야 추마코바의 감수 하에 2023년 9월 비르고로트 음반사에서 재발매
병영에 내리는 비
Дождь В Казарме
1984/2023
레토프, 바벤코, 데예프 참여, 1984년 여름 녹음
나탈리야 추마코바의 감수 하에 2023년 9월 비르고로트 음반사에서 재발매
병영에 내리는 죽음
Смерть В Казарме
1984
싱글 앨범. 레토프, 바벤코, 데예프 참여, 1984년 여름 녹음
늙은 사환의 노래
Сказки Старого Юнги
1984
레토프, 바벤코, 데예프, 이바노스프키 참여, 1984년 8월 녹음
사랑의 노래
Музыка Любви
1984
레토프, 바벤코, 데예프, 이바노스프키 참여, 1984년 8월 녹음
레게, 펑크 앤드 락앤롤
Reggae, punk & rock’n’roll
1984/2023
레토프, 바벤코, 데예프 참여, 1984년 9월 녹음
나탈리야 추마코바의 감수 하에 2023년 11월 비르고로트 음반사에서 재발매
스스로 해라
Сделай сам
1985
레토프, 이바노프스키, 랴비노프 참여, 1985년 08월 24일 녹음
회오리바람. 여름철 녹음물
Смерч. Летние записи
2023
레토프, 바벤코, 데예프 참여, 1984년 06월-07월 사이 녹음
KGB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병역 판정 검사를 받던 시절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녹음물을 정리하여 발매한 앨범.
현재까지 비르고로트에서 발매한 앨범 중 유일하게 포세프 현역 시절 발매되지 않은 앨범으로, 추마코바는 해당 테이크에 녹음된 노래 중 가장 유명한 노래("Смерч")의 이름을 따서 앨범 제목을 지었다고 밝혔다.

6.1.2. 기타 앨범 (컴필레이션 앨범, 비공식 앨범 등)[편집]


제목
발매 연도
특이 사항
1982-85 포세프: 일대기
История: ПОСЕВ 1982-85
1989
민방위 이름으로 발매.
2005년 "포세프(ПОСЕВ)"라는 제목 하에 보너스 트랙과 함께 재판[104]
옴스크 펑크의 역사: 1탄 (영혼의 노래들)
История Омского панку: том 1 (Душевные песни)
1985
민방위 이름 하에 녹음[105]
옴스크 펑크의 역사: 2탄 (의미를 찾는 이들)
История Омского панку: том 2 (Кто ищет смысл)
1985
민방위 이름 하에 녹음[106]
펑크와 락앤롤
Панк и рок-н-ролл
?
1984-85년 녹음물로 구성한 컴필레이션 앨범.
자파드-포세프-초기 민방위 곡이 혼재되어 있다.[107]
듣기 끔찍한 녹음물 2
Поносные звучания II
?
1985-86년 녹음물로 구성된 컴필레이션 앨범.
포세프와 민방위 곡이 혼재되어 있다.

  • 위 앨범들 중 몇몇은 민방위 앨범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1984년-1986년 작업물들은 포세프로 봐야할지 민방위로 봐야할지 애매한 경우가 많다.

6.2.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 앨범[편집]


번호
제목
발매 연도
특이 사항
01
썩어빠진 젊은이
Поганая молодёжь
1985
1989
1984년 11월부터 1985년 초에 작업한 동명의 앨범[108]을 바탕으로 추가 작업을 거쳐 1989년 공식 발매하였다.
02
낙천주의
Оптимизм
1985
1989
1984년 11월부터 1985년 초에 작업한 동명의 앨범[109][110]을 바탕으로 추가 작업을 거쳐 1989년 공식 발매하였다.
*
사이키델리아 투데이
Psychedelia Today
1985
알렉산드르 로지코프(Александр Рожков) 및 레토프-랴비노프 듀오의 합작으로 작업한 앨범이다.
"알렉산드르 로지코프와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명의로 발매되었으며, 인지도 문제 등으로 인해 그롭의 디스코그래피에는 포함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111]
*
돼지들 앞에서 구슬치기
Игра в бисер перед свиньями
1985
붉은 앨범(Красный альбом)의 어쿠스틱 버전 앨범이다.
독립된 앨범으로 많이 유통되었으나, 비르고로트에서는 발매되지 않고 아주 좋소(Хорошо!!) 및 붉은 앨범의 보너스 트랙으로 삽입되었다.
앨범 제목은 헤르만 헤세의 작품 "유리알 유희"에서 따왔다.
03
쥐덫
Мышеловка
1987
일명 "1987년 연작"의 첫 번째 앨범. 포세프 시절의 곡 일부 및 1986년 작업물에 기반하고 있다.
04
아주 좋소!!
Хорошо!!
1987
일명 "1987년 연작"의 두 번째 앨범. 1986년 가을부터 1987년 초 작업물에 기반하고 있다.
05
전체주의
Тоталитаризм
1987
일명 "1987년 연작"의 세 번째 앨범. 1986년 가을부터 1987년 초 작업물에 기반하고 있다.
여담으로, 얀카 댜길레바의 첫 스튜디오 앨범 데뷔곡이라 쓰고 시 낭송이라 읽는 "어떻게 살 것인가"(Как жить)가 수록되어 있다.
06
네크로필리아
Некрофилия
1987
일명 "1987년 연작"의 네 번째 앨범. 1987년 봄부터 동년 6월까지 작업물에 기반하고 있다.
07
붉은 앨범
Красный альбом
1987
일명 "1987년 연작"의 다섯 번째 앨범. 1983-1985년 사이 작업물 및 1986년 작업물에 기반하고 있다.
08
모든 것은 계획대로
Красный альбом
1988
일명 "아돌프 기틀레르 사건"으로 얀카와 함께 러시아 전역을 떠돌며 도피하던 시절에 작곡한 노래들에 기반하고 있다.
09
그렇게 강철이 단련되었다
Так закалялась сталь
1988
1988년 작업물에 기반하고 있다.[112]
제목은 소련의 작가 니콜라이 오스트로프스키의 동명의 소설에서 가져왔다.
10
전투 감각
Боевой стимул
1988
"모든 것은 계획대로" 및 "그렇게 강철이 단련되었다"의 수록곡들의 다른 버전(alternative takes) 및 1988년 작업한 새로운 곡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다.
11
구토
Тошнота
1988
1988년 작업곡들 중 일부 노래에 기타 솔로를 덧붙이는 등 재작업을 거쳐 발매한 앨범이다.
제목은 사르트르의 동명의 소설에서 가져왔다.
12
기쁨과 행복의 노래들
Песни радости и счастья
1989
콘서트 투어 당시 아욱치온의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노래들 및 공연 리허설 당시 녹음하나 노래들에 기반하고 있다.
13
전쟁
Война
1989
1988년 및 1989년의 여러 노래 및 녹음에 기반하고 있다.
14
영원불멸 할지어다
Здорово и вечно
1989
아욱치온 스튜디오의 작업물에 재작업을 거쳐 발매한 앨범.
2014년 그롭을 다룬 동명의 다큐멘터리가 개봉한 바 있다.
15
아마겟돈-팝스
Армагеддон-Попс
1989
아욱치온 스튜디오의 작업물에 재작업을 거쳐 발매한 앨범.
16
러시아의 실험낭자한 벌판
Русское поле экспериментов
1989
1988년 이어진 일련의 앨범 작업의 마무리이자, 사실상 전기(前期)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마지막 앨범이다.
해당 앨범에 수록된 14분에 달하는 길이의 동명의 곡은 레토프가 자신이 작곡한 최고의 곡 중 하나로 지목한 바 있다.
17
생존 지침
Инструкция по выживанию
1990
로만 '로미치' 네우모예프(Роман 'Ромыч' Неумоев)가 결성한 동명의 시베리아 펑크 밴드가 작곡한 곡들의 커버 앨범이다.[113] 앨범 출판 이후 레토프는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해체를 선언하였다.
이후 레토프는 해당 앨범을 그롭의 디스코그래피에서 배제하였으며[114][115] 2000년대 초반의 비르고로트 재판 당시 이 앨범을 제외하였으나, 레토프 사망 이후 2013년 나탈리야 추마코바가 LP로 재판하였다.

6.3. 솔로 앨범[편집]



6.4. 코무니즘 앨범[편집]



6.5. 예고르 이 오피즈데네프시니예 앨범[편집]


번호
제목
발매 연도
특이 사항
01
펄쩍-펄쩍
Прыг-скок[116]
1990
"펄쩍-펄쩍: 어린아이들의 노래"(Прыг-скок: детские песенки)로도 불린다. 1990년 5월-7월 녹음하였다.
02
백 년의 고독
Сто лет одиночества
1993
1991-1992년 녹음하였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동명의 소설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레토프 본인은 이 앨범을 전기 그롭 및 오피즈데네프시니예 앨범을 통틀어 가장 최고의 앨범 중 하나로 꼽은 바 있다.
03
사이키델리아 투모로
Psychedelia Tomorrow
2002
앨범 커버에는 "오피즈데네프시니예"(Опизденевшие)라고만 적혀 있다.
한정판으로 발매되었으며, "백 년의 고독" 앨범 작업 시절 작업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레토프의 증언에 따르면 트리플 앨범으로 구성할 예정이었으나 앨범의 볼륨 문제로 사이키델릭 장르의 잼(jam session) 녹음분들로만 채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7.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 2019년 얀덱스 무지카(Яндекс Музыка)에서 제작한 레토프 트리뷰트 영상.[117] 레토프의 가사에 대한 레퍼런스가 가득 담겨 있다.


  • 2022년 발매한 시리어스 샘 시리즈의 스탠드얼론 확장판인 "Serious Sam: Siberian Mayhem"에 레토프를 오마주한 인물인 이고리 레도프(Igor Ledov)가 등장한다. 선글라스와 가죽 자켓 등 외모부터가 80년대 레토프와 판박이고, 동료 중에 "나탸샤"라는 사람이 있으며[118], 언더그라운드 음악 활동을 한다는 것에서 확인사살.
  • 사이버펑크 2077에 등장하는 이스터에그로, 돌아다니다 보면 벽면에 Мы - лёд под ногами майора!(우리는 대령 발 밑의 얼음이다!)라고 적힌 낙서를 볼 수 있는데, 민방위 시절 동명의 곡에 대한 오마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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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혼전성 마르테미야노바(Мартемьянова)[2] 1998년 결혼하였으며 둘 다 아이를 원치 않았기에 자녀는 없다. [3] 발음: [ˈiɡərʲ ˈfʲɵdərəvʲɪtɕ jɪˈɡor ˈlʲɛtəf\]. 본명은 "이고리"고 예명은 "예고르"다.[4] 의역이나 오역이 아니다. '좆되다'라는 의미의 동사 "опизденеть"의 복수 형용사 형태인 "Опизденевшие"이다.[5] 이고리 "예고르" 레토프, 콘스탄틴 "백치 쿠자" 랴비노프, 올렉 "마나게르(매니저)" 수다코프 3인이 활동하였다. 1980년대 말-1990년을 기점을 14개의 앨범을 내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나 이후 활동이 중단되었고, 2020년 앨범을 끝으로 해산하였다. 마지막 앨범 제작 중 랴비노프마저 사망하였기에 수다코프 혼자서 정리해 출간하였으며, 마지막 앨범이라고 발표하였다. "프로젝트 밴드"라는 러시아어 위키피디아 설명이 대변하듯 공개 공연은 한 번도 하지 않은 프로젝트성 밴드에 가까웠으며, 작품들 또한 노래라기보다는 사운드 콜라주 혹은 실험적 음악에 가깝다는 평을 받는다. 14개의 앨범 전체를 통틀어 봐도 레토프나 랴비노프 등 멤버들이 직접 쓴 가사로 구성된 노래는 많지 않고, 대다수가 기존의 노래나 시 혹은 텍스트에 멜로디만 추가한 형태이다. 이 멜로디 또한 다른 곡에서 가져온 경우가 상당히 많으며, 심지어 타인의 노래나 라디오 녹음 등을 통째로 수록한 경우도 많다.[6] "내가 훌륭한 가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훌륭한 시인이라고 할 수는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 자신의 가사와 작품을 모아 시집도 두 권 출간했다.[7] 그가 살던 거리는 원래 활주로였던 곳이였다고 한다. 이 외에 예고르의 부모는 핵실험으로 악명높았던 비밀도시 세미팔라틴스크에서 만나 초창기 그 곳에서 살았으며(핵 실험으로 인해 집의 창문이 깨지는 건 예사였고 한 번은 지붕이 통째로 날아가기도 했다고 한다) 예고르의 형 세르게이 레토프 또한 세미팔라틴스크 출신이다. 이러한 환경이 그에게 유해한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8] Clinical death. 의학적으로 보았을 때 죽은 건 아니지만 겉보기에는 죽은 상태.[9] 여기에 이후 숲을 산책하다 진드기 감염으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하고(해당 경험은 "펄쩍-펄쩍" 앨범에 수록된 동명의 곡의 제작 동기가 됨) 알코올 중독에 시달려 병원 집중치료실 신세를 지기도 하고(해당 경험은 2005년 앨범 "소생"에 수록된 동명의 곡의 제작 동기가 됨), 마약을 빨다 애시드 트립을 겪는 등(해당 경험은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의 마지막 앨범 "왜 우리는 꿈을 꾸는가?" 앨범의 제작 동기가 됨) 막말로 몸을 굴리며 살았고, 결국 나이 50도 못 넘기고 사망한다.[10] Rock in Opposition. 1970년대 후반 프로그레시브 락 밴드들이 뭉친 활동으로 자신들의 음악을 거부하던 당시의 기성 음악계와 맞서 투쟁하였다.[11] 1983년 초 그는 소련의 유명 아방가르드 음악가이자 대규모 음악 프로젝트 '팝-메카니카'로 유명한 음악가 세르게이 쿠료힌의 즉홍 연주 당시 베이스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하였다[12] 공장 등에 레닌 초상화를 위시한 체제 선전을 그리는 화가.[13] 한국어로 '파종', '파종한 종자' 등을 의미로 러시아의 반사회주의 집단이던 НТС(Национально Трудовой Союз, 러시아 사회 연대주의자들의 연합)의 공식 잡지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 잡지는 2023년 지금도 간행되고 있다.[14] 2023년 나탈리야 추마코바가 밝힌 바에 따르면 남아있는 자료에서 'POSEV', 'POSSEV' 등 다양한 철자를 시도한 흔적이 보인다고 한다. 2023년 비르고로트 재발매본에서는 그래서 밴드 이름이 'THE POSSEV'로 되어 있다. 이 외 훗날 알려지게 되는 그롭 스튜디오(GrOb studio) 명의 이전 1980년대 극초기 자료에서는 '마이단 레코드'(Maidan Records)라는 이름도 등장하는 것이 밝혀졌는데, 추마코바나 생존하고 있는 타 동료들도 이에 대해서는 미스테리라고 밝힌 바 있다. 일단 '마이단'은 우크라이나어로 광장을 의미하는데, 레토프의 모친에 우크라이나계 혈통이 섞여 있어 레토프는 우크라이나어를 모르지는 않았던 것으로 사료된다.[15] 제대로 된 드럼이 없어 피오네르용 장난감 드럼부터 서류가방, 쇳덩어리(...)까지 별의별 걸 가지고 두들겼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제대로 된 드럼의 부재는 포세프부터 초기 민방위 시절까지 이어지는 고질적인 문제였다.[16] 전기 민방위 시절 공연에서는 레토프가 기타를 잡는 일이 잘 없었다. 보통 랴비노프 같은 타 멤버들이 기타를 맡았고 레토프는 보컬과 기괴한 춤동작을 맡았다. 다만 2000년대 이후에는 공연에서 레토프가 리드 기타까지 잡는 경우가 많아졌다.[17] 당시 자파드에는 알렉산드르 클리모프라는 멤버가 소속되어 있었고 클리모프가 레토프에게 랴비노프를 소개시켜 주었다. 이후 레토프와 클리모프 간 관계가 악화되며 자파드는 와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18] 당연히 제대로 된 스튜디오 취입은 아니라, 그냥 카세트테이프 레코더 등으로 집에서 대충 녹음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게 당시 환경에서 포세프 본인들이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지만.[19] "펑크와 락앤롤(Панк и рок-н-ролл)"과는 다르다. 이 앨범은 "레게, 펑크 그리고 락앤롤"의 일부 트랙을 기반으로 한 포세프 시절 컴필레이션 앨범이다. 한동안 두 앨범은 혼동되어 유통되었지만, 2023년 11월 30일 비르고로트에서 진짜 "Reggae, Punk & Rock’n’Roll"을 리마스터링해 발매하면서 이제 두 앨범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20] 흔히 별명인 '쿠지마(Кузьма: 러시아 속담에 등장하는 사악한 인물. 때에 따라서는 악마를 의미하기도 한다. 니키타 흐루시초프의 일화에서도 등장하는 존재)' 혹은 '백치 쿠자(Кузя УО: 'УО'는 옛 소련 속어로 지체장애(умственно отсталый)의 두문자어이며 '쿠자'는 '쿠지마'의 다른 이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020년 3월 심장 문제로 사망하였다.[21] 러시아어로 "민방위"를 의미한다. 줄여서 '그롭(ГрОб)' 아니면 '게오/고(ГО)'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중 '그롭'은 의도적으로 지은 역두문자어인데, 러시아어로 관짝을 의미한다. 당시 레토프의 앨범에 인쇄되어 나오던 스튜디오 이름도 '그롭 레코드(GrOb Records)'였다.[22] 여담으로 이 시절 앨범들을 들어보면 속도와 피치가 빠른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는데, 레코딩용 테이프마저 부족하던 80년대 당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음악을 녹음하려던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의 눈물겨운 산물이다. 오리지널 앨범속도 조정+리마스터링을 거친 앨범을 비교해보자.[23] "낙천주의(Оптимизм)"의 오자가 아니다. 레토프 본인이 만든 트랙리스트에 실제로 저렇게 적혀 있다. 의도된 오자로 추정된다.[24] 레토프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자신들의 추종자는 물론이요 자신들을 다루는 팬 잡지까지 있었다고 한다.[25] 정확히 말해 당시에는 앞서 언급한 45분짜리 두 앨범이 "썩어빠진 젊은이"라는 이름 아래 90분짜리 사미즈다트로 유통되었다. 이후 1986년 레토프가 이 제작물을 리믹싱할 때 현재처럼 "썩어빠진 젊은이"와 "낙천주이" 두 개로 나누었다. 이는 앨범 한 개의 길이가 45분이어야 한다는 당시 관행에 따른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레토프는 일부 판본에는 실험 삼아 리버브(reverb) 효과를 넣고 좀 더 '앨범처럼 보이도록, 앨범처럼 들리도록' 내용물을 좀 다듬기도 했다.[26]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쪽은 대도시이기도 했고 좀 더 사람들의 시선이 열린 편이어서 똑같은 언더그라운드 음악 활동이라도 그나마 사정이 좋은 편이었다. (물론 경찰의 공연 방해나 깡패들의 습격은 피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지방으로 들어가면 탄압 강도가 세지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도시의 크기와는 상관이 없어서, 대도시인 볼고그라드에서 활동하던 크루이스나 마찬가지로 대도시인 우파에서 활동하던 데데테가 비슷한 시기 전부 해산 크리를 맞았다. 결국 크루이즈는 발레리 가이나를 중심으로 멤버를 재결성한 뒤 지역을 옮겨서 몰래몰래 활동해야 했고, 데데테는 한 차례 완전히 해산한 뒤 리더인 유리 셰프추크가 레닌그라드로 이주하여 완전히 새로운 멤버로 재결성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27] 당시 소련에서는 반체제 인사 등을 죽이기는 좀 그랬으니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감시키는 방식으로 수감했으며, 이 과정에서 강제로 정체모를 약물을 주입하거나 침대 시트로 전신을 완전히 싸맨 뒤 몇 시간 동안 방치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등 각종 고문을 자행하는 일이 빈번했다. 레토프 또한 의사들이 자신에게 강제로 여러 종류의 약물을 주입했다고 자서전에서 증언하였다.[28] 원래는 레토프 또한 강제로 입대시키려 했고 실제로 끌려갔으나, 1984년 7월 3일 재차 치러진 병역 판정 검사에서 레토프는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선천적인 허약함과 정신적 문제로 추정) 84년 6월과 7월 사이 병원에 살며 조사를 받는 와중도 레토프는 스튜디오에서 두 개의 테이크를 녹음하는데, 이 테이크의 존재는 기존에 알려져 있지 않다가 추마코바의 감수 아래 비르고로트에서 포세프 시절 녹음물들을 복각하는 과정에서 발굴되어 2023년 11월 30일 "회오리바람. 여름철 녹음물(Смерч. Летние записи)"이라는 이름 하에 발매되었다.[29] 다만 최중요시설 중 한 곳이 있는 곳이라서 그렇지, 최전방처럼 삭막하고 빡빡한 곳은 아니었다. 소련 시절 카자흐스탄에 주둔하는 사단들은 한국에 비유하자면 전부 향토 사단과 비슷한 사단들이었다.[30] 부틀랙 테이프 기반이라 음질이 좋진 않지만, 당시 열악했던 환경을 고려해 보았을 때 마스터 테이프의 음질도 그리 좋진 않았으리라 추정된다. 참고로 이 앨범은 비공식 앨범이다. 레토프는 포세프~극초기 민방위 시절을 시절을 부끄럽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굳이 재발매를 하거나 공개를 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던지 저 앨범들을 복간하거나 재발매하지는 않았다. 대신 1989년 포세프~극초기 민방위 시절 곡들을 모아 재녹음하거나 손을 좀 본 뒤 컴필레이션 앨범인 "포세프(Посев)"로 발매했다.[31] 당시 녹음 중 일부는 훗날 "돼지 앞에서의 유리알 유희"(Игра в бисер перед свиньями), "허공 속으로 향하는 노래들"(Песни в пустоту) 등의 앨범으로 발매된다.[32] 이는 단순히 열악한 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민방위 특유의 이념적, 음악적 무기로도 기능하였다. 이후 레토프는 1989년 세르게이 피르소프의 소개로 레닌그라드에서 밴드 아우크치온의 고품질 음악 장비를 사용할 기회가 있었는데, 해당 장비들을 사용해 본 뒤 이런 고품질 녹음 장비는 자신의 음악에 있어 무언가 중요한 것을 없애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고했다.[33] 피르소프는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서 일했는데 레토프와 알렉산드르 바실라초프의 이름을 알리고 빅토르 초이의 그 유명한 캄차트카 보일러실 취직을 도와주는 등 80년대 러시아 락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34] "С Чужого Голоса"는 앵무새처럼 남의 목소리를 따라하기만 할 뿐이라는 의미의 러시아어 숙어이다. 즉 이 제목은 (당국의 입맛에 맞는) 러시아식 음악 대신 (불건전한) 서구 음악을 맹목적으로 따라하기만 할 뿐이라는 경멸적인 의미를 담고 있으며, 당연하게도 지역 공산당이 사실상 강요한 사설이나 다름없다. 여담으로 데데테 또한 우파에 거주하던 시절 우파 지역의 일간지에 실린 같은 제목의 사설로 공격당한 일이 있다.[35] 특기할 사항으로, 해당 사설에서는 당시 "썩어빠진 젊은이" 작업에 참여한 민방위의 멤버로 셋을 언급하며 이들을 각자 가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고리 "예고르" 레토프(Игорь Летов)는 올레크 스베토프(Олег Светов)가 되었고, 안드레이 "쿠르트" 바신(Андрей Васин)은 알렉세이 바긴(Алексей Вагин), 콘스탄틴 "백치 쿠자" 랴비노프(Константин Рябинов)는 니콜라이 로가초프(Николай Рогачёв)가 되었다. 이 외 안드레이 디덴코(Андрей Диденко)라는 인물도 언급되는데, 이 인물이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정확히 불명. 가명을 실제 이름과 비슷하게 들리도록 적은 것으로 볼 때, 포세프 멤버 중 하나인 안드레이 바벤코(Андрей Бабенко)를 가리킬 가능성이 존재한다.[36] 이후 이 가명들은 일부 마그니티즈다트에 실제 이름 대신 올라가기도 한다. # [37] 이 노래는 1986-87년 사이 일부 공연에서 등장한 기록이 있으나, 그 이후에는 사실상 묻혔다. 그러나 1998년 (뜬금없이?) 한 공연에서 레토프가 선보인 바 있다.[38] 문제의 기사가 작성되고 33년이 지난 뒤 작성된 베체르니 옴스크의 또 다른 기사. 2019년 작성된 이 기사는 레토프를 "뛰어난 러시아의 락 뮤지션이자 시인"(выдающийся российский рок-музыкант и поэт)이라 기리고 있어 시대의 변화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39] 1979년 리셴코 형제가 옴스크에서 창설한 밴드. 개러지 락/포크, 포크 락, 하드 락, 사이키델릭 락 등의 장르에서 활동했다. 1990년 예브게니 리셴코가 폐암으로 사망한 뒤에는 클락손 감(Клаксон Гам)으로 이름을 바꾸어 올렉 리셴코가 중심이 되어 1인 밴드로 존속했고, 타 음악과들과 협업하며 활동하다 2004년 올렉 리셴코의 사망과 함께 해체되었다.[40] 얀카 댜길레바의 앨범에서 보이듯 레토프는 많은 음악가들과 협업했으나 이들의 음악에도 자신의 스타일을 충분히 가미하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피크 클락손 시절은 예외로 이 시절 노래들은 전부 피크 클락손의 스타일을 잘 담고 있다. 사실 당시 레토프의 스타일과 리셴코 형제의 스타일이 여러 부분에서 비슷하긴 했지만.[41] 아돌프 히틀러의 러시아식 표기. 러시아어에는 /h/ 발음이 없어서 현대에는 이를 Х(kh)로 전사하나, 과거에는 Г(g)로 전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크라이나어 같은 경우 아예 Г가 유성음 /h/로 발음되는 등의 영향도 있고 해서, 러시아권 사람들은 Х보다는 Г가 /h/에 더 가깝다고 인식했다. 지금도 독일어권 인명/지명의 경우는 여전히 Г로 표기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42] 이 앨범은 "1986년 옴스크 라이브"(Live in Omsk 1986)라는 제목으로도 유통되었다. 녹음 당시 괴성과 고함을 질러대며 녹음한 나머지 본의 아니게 류베르의 어그로를 끌어 싸울 뻔했다고 한다.[43] Звуки Му('무' 소리). 1983년 모스크바에서 결성된 인디 밴드로 얼터네이티브 락, 포스트 펑크, 아방가르드 락 음악을 선보였다. 몇 차례 활동 중단을 거치면서도 계속 활동해 왔으나, 2021년 밴드의 리더였던 표트르 마모노프(Пётр Мамонов)가 코로나19로 사망하면서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44] Mein Kampf(나의 투쟁), Эй, брат любер!(어이, 류베르 형제!), Тридцать доводов(서른 가지 이유), Железный карантин(강철의 격리), Третий рейх(제3제국), Сядем на танки(우린 탱크에 앉아)[45] Тоталитаризм(전체주의), Я бесполезен(난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Зоопарк(동물원), Страна дураков(바보들의 나라). 이 중 Я бесполезен과 Зоопарк는 정신병원 수감 전에 작곡한 노래고 나머지는 정신병원에서 나온 이후 만든 노래이다.[46] 레토프의 노래이자 당시 공연의 마지막 곡이었던 "바보들의 나라"(Страна дураков) 가사.[47] 노보시비르스크는 러시아 제3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으로, 시베리아의 가장 중심지가 되는 도시이다. 페르 라셰즈는 프랑스의 유명한 공동묘지이다.[48] Калинов Мост. 1986년 드미트리 레뱌킨(Дмитрий Ревякин) 등이 결성한 노보시비르스크의 락 밴드.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 민방위와 접점이 있었으며, 이들의 초기 노래 중에서는 얀카 댜길레바와 협업해 쓴 곡도 있다. 여담으로 한 인터뷰에서 빅토르 초이는 이들을 언급하며 음악을 칭찬하기도 했다.[49]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심페로폴까지는 거의 4,500km에 달한다.[50] 소비에트 시절 직업이 없다는 것은 형사 처벌의 사유가 되었으며 모든 인민들에게는 직장이 배정되었다.[51] Чёрный Лукич. 바딤 쿠지민(Вадим Кузьмин)이 이끌던 노보시비르스크의 락 밴드. 쿠지민과 레토프는 초르니 루키치의 전신인 밴드 스핀키 멘타(Спинки Мента) 시절 같이 활동했으며, 이후에도 서로의 노래를 커버하는 등 상당히 친했다.[52] 예를 들어 마지막 노래인 바보들의 나라(страна дураков)에는 원래 "좆같기 짝이 없다"(какая хуйня)라는 가사가 있지만, 보컬을 맡았던 레토프는 욕설 부분인 좆같다(хуйня) 부분은 일부러 묵음 처리를 했다. 근데 썅(бля)은 검열하지 않았다[53] 원래라면 공연을 뛰어야 했던 즈부키 무는 과거 대마초에 손을 댄 전력이 있었다.[54] 과장이 아니다. KGB 추적을 우려하여 심할 때는 서로 불침번을 서가며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고 한다.[55] 당시 소련의 개인 아파트에서 이루어지던 작은 라이브 연주회를 가리키는 고유 명사. 언더그라운드 밴드 등 당시 소련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음악가들 및 밴드들은 크바르티르니크를 통해 팬들과 소통하고 자신의 음악을 알렸다. 참고로 당시 크바르티르니크를 조직하는 행위는 발각될 시 처벌받을 수 있는 행위였다(...) 음악가들은 하루 정도 유치장에 구류되는 선에서 끝날 수 있었고, 조직한 사람은 최악의 경우 몇 개월 간 금고를 살 수도 있었다.[56] 서구권 문화에서 "히피"와 "펑크"는 웬만해서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지만, 당시 시베리아 언더그라운드 문화에서는 "공식적이지 않은 이데올로기"들은 전부 섞여 하나로 융합되는 모습을 보였다. 동시에 언더그라운드 문화는 주류 문화에 대한 반대적 입장을 취했는데, 그러다 보니 소련 전에는 반소련을 외치던 밴드들이 소련 붕괴 이후에는 다시 소련 시절과 공산주의 이념을 추종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사실 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가 너무 개판이다 보니 소련에 대한 향수라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했지만[57] 노래는 공연의 첫 곡이었던 즉홍 세션 '펑크는 죽지 않았다'(Punk's not dead)로 매니저의 보컬과 레토프의 드럼으로 구성된 간단한 서곡이다. 자막은 무시하라[58] 80년대 레토프 하면 떠오르는 모히칸 스타일의 머리, A가 그려진 가죽 자켓, 동그란 선글라스 그리고 막춤이 잘 드러나는 영상. 특히 위 영상의 23:54 부분부터 시작되는 10초 간의 막춤은 지금도 러시아 웹에서 간간히 필수요소로 인용될 정도로 유명하다.[59] 1989년 결성. 레토프, 랴비노프, 올렉 수다코프(Oleg Sudakov) 등이 활동[60] Барнаул, 시베리아에 위치한 도시 이름 - 편집자 주[61] 헌정 위기 당시 그는 반옐친 측에 서서 가두시위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형 세르게이 레토프는 예고르가 살아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옐친의 명령 하에 본격적으로 군이 진압을 시작하기 하루 전 집에 돌아왔다고 한다.[62] 해당 앨범은 소련 시절에 발매된 여러 노래들의 리메이크 앨범이다. 원래는 백치 쿠자와 함께 코뮤니즘의 명의로 발매하는 (더블 혹은 트리플 앨범으로 구성된) 대규모 앨범 제작 프로젝트가 될 예정이었으며, 평소에 자신이 좋아하던 영미권 음악들의 커버와 소련 노래들의 커버로 구성될 예정이었다고 한다.[63] 사실 나즈볼 활동 당시에도 레토프는 리모노프와 함께 좌파 쪽으로 분류되었다.[64] 과한 의역이 아니라 원문부터 강도 높은 욕설이다.[65] 밀란 쿤데라의 동명의 서적에서 제목을 가지고 왔다. 레토프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줄기와 뿌리",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등의 제목을 차용했지만 정작 내용은 해당 저서와 상당히 동떨어져 있는 곡들을 많이 작곡하였다.[66] 1993년 10월 "리몬카"(ЛИМОНКА) 신문 제 1호에 실린 내용으로, 인터뷰어의 마지막 질문이었던 "예고르, 당신을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들과 독자들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Егор, что бы ты хотел пожелать своим слушателям и читателям?)에 대한 대답이다.[67] 레토프가 진드기에 물려 병에 시달리던 도중 착상했다고 알려져 있다.[68]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이후 작곡된 곡이라는 점과 예고르 레토프의 해당 사건에 대한 태도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곡이다.[69] 사이코넛은 정신(psycho)을 탐험하는 우주비행사들(astronauts)을 의미하는 영미권 신조어로, 좋게 말해 명상 등 모든 요소를 동원해 정신 세계를 탐험하는 사람들을 말하지만 특히 환각제 등 불법 약물에 취해 헤롱헤롱거리는 사람들을 말한다. 당장 레토프 본인이 알코올 중독자에 마약도 좀 했으며, 해당 앨범의 제작 동기 또한 애시드 트립으로 알려져 있다.[70] 특히 민방위 시절 연속적으로 발매한 1988-89년 사이 앨범들은 들어보면 같은 노래를 서로 다른 테이크로 수록해놓은 경우가 많다. "그렇게 강철은 단련되었다", "전투 감각", "모든 것은 계획대로", "구토" 등이 그 예시로 트랙리스트를 보면 적지 않는 노래들이 겹치는데 다들 들어보면 어딘가 약간씩 다르다. 보컬 녹음이 다르다던가, 악기 반주가 약간씩 다르다던가, 시작과 끝부분이 몇 초씩 더해지거나 빠진다던가 등등.[71] "Сто лет одиночества" 앨범의 비르고로트 2016년 재판본을 말한다. 이 재판본의 경우 보너스 트랙으로 "Прыг-скок" 세션 당시 녹음된 여러 테이크가 들어 있다. 다음 앨범인 Сто лет одиночества(번역자 주)[72] 마그니티즈다트는 불법복제 카세트 빽판을 말한다. (번역자 주)[73] 출처: http://grob-hroniki.org/article/2018/art_2018-02-01a.html [74] История омского панка, The Best of G.O., The Best of ПОСЕВ, Поносные звучания 등 여럿 혼재하고 있는데, 비공식 컴필레이션도 있고 실제 데모 앨범이 유출된 경우도 있다. 여기에 팬들이 마그니티즈다트(카세트 빽판)로 유통된 것도 많고, 여러 음반사에서 불법으로 찍어내 팔아치운 것들도 많다. "썩어빠진 젊은이"나 "낙천주의"같은 초기 앨범들을 보면 ХОР, Мистерия Звука, Выргород, UR-Realist, Moon Records 등등 음반사마다 트랙리스트가 다르거나, 트랙리스트는 같아도 각기 다른 트랙을 쓰는 경우(예를 들어 이 판본은 1985년 녹음본인데 저 판본은 1986년 녹음본이라던가)가 흔하다.[75] 이 카세트판들은 현대 들어서는 디지털 파일로 처리되어 VK나 얀덱스, 유튜브 등을 통해 유통되고 있다. 다만 표지갈이 문제는 여전하다. 팬들의 노력을 통해 이 노래가 언제 어디서 녹음된 건지, 어떤 앨범에 수록된 건지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늘고 있지만, 그럼에도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76] 보관 상태도 좋지 않고, 제대로 라벨도 붙지 않은 여러 카세트와 릴테이프가 섞여 있는 상태라 이 녹음이 언제 녹음된 건지 어느 앨범에서 가져온 건지 파악이 힘든 상황이라고 한다. 덤으로 레토프는 생전 추마코바 등 타인이 이 아카이브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고 하기에 파악된 게 많지 않다.[77] 레토프의 생일에 맞춰 09월 10일에 발매되었다. 앨범에 적힌 감사의 말에 보면 "나타샤, 우리 포세프 앨범 어디 있어요?"라고 재촉한 사람들에게도 바친다는 재미난 말이 들어 있다 [78] 여기서 "조선(Корея)"은 한국을 말하는 게 아니라, 북한이 러시아에서 발행하는 체제 선전용 잡지의 제목이다.[79] 다만 레토프는 해당 노래에 대해서 "평범한 소련 인민이 죽을 듯 지친 체 일터에서 집에 돌아와 (프로파간다에 점령된) TV를 보면서 쉬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 노래를 썼다고 밝혔기 때문에, 단순히 북한 찬양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체제선전용 잡지인 "조선"만 보고 저 "시베르나야 까레야" 또한 우리처럼 살고 있다고 지레짐작하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면 된다. 저 노래의 가사 자체가 "우리 레닌 짱짱 페레스트로이카 우왕굳 공산주의 만세" 식으로 서술되어 있어 표면만 보면 착각하기 쉽다. 참고로 레토프는 당시 수많은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이 그랬듯 페레스트로이카를 비판의 대상으로 보았고, 당시까지는 레닌이나 공산주의 또한 타도의 대상으로 보았다.[80] 블러Song 2보다 몇 년 앞서 나왔음에도 비슷한 구조를 가진 탓에 러시아 웹에서는 "서구가 우리의 음악을 베꼈다"라고 간간히 말이 나오는 곡이다. 물론 농담이다. 블러가 이 시베리아 깡촌 밴드를 알았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하니...[81] 1993년 이후에는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공연을 할 때면 저 "주체사상의 건물"을 "민주주의의 성당"(храма демократии)으로 바꿔 불렀다.[82] 이 노래 또한 약간 이론의 여지가 있는 것이, 노래 마지막에 보면 "Восславим же все вместе Михаила Горбачёва"(우리 모두 다같이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찬양하자)라는 가사가 나오고 그 뒤로 "야루젤스키 만세", "카스트로 만세" 등 공산권 독재자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온다. 레토프를 위시한 당시 펑크 씬은 고르바초프에 대해 부정적이었기에, 저 노래 또한 약간의 야유와 반어법을 담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83] 사실 이 노래를 잘 뜯어보면 딱히 북한 만세 같은 메시지는 나오지 않는다. 우리 우방 중국 만세 미국 꺼져라 같은 메시지가 나올 뿐이다. 여담으로 반미 코드가 러시아 팬들의 취향을 직격한 건지 이 노래는 현재도 많은 러시아 팬들 사이에서 인기곡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레토프 본인도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사이에는 아주 자주 부른 노래이기도 하다.[84] 레토프는 한국어(표준어든 문화어든)를 구사하지 못했기에, 어디서 이 북한 시의 러시아어 번역본을 구했는지는 미스테리이다. 민방위 공식 사이트에는 레토프가 부른 거의 대다수의 노래 가사를 올려두었는데, 이 노래의 경우 "Тё Рен Чур"의 가사를 기반으로 하였다고 올려두었기에 한동안 러시아 웹에서는 이 "툐 렌 추르"가 누구냐는 팬들의 질문이 종종 등장하곤 했다.[85] 어린 시절 레토프는 배지, 우표, 동전 등을 수집하는 게 취미였으며 상당한 규모의 선인장 컬렉션 또한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86] "과다복용(Передозировка)", 1992년 앨범 '백 년 간의 고독(Сто лет одиночества)' 수록. 한국어 자막 영상 [87] 최소한 1985년 이후에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88] 예고르가 자신의 밴드 이름을 "그라지단스카야 오보로나(민방위)"라고 붙였을 때 부친은 예고르에게 "지금 날 놀리기 위해 그런 이름을 지은 거냐"라고 물었고, 예고르는 "몇몇 사회적 밴드의 사회적 보호"를 의미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친은 인터뷰에서 이를 회고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놀리려는 의도 또한 없지는 않을 것이라 여전히 생각한다고 덧붙였다.[89] 두 사람은 서로를 남편/아내라고 부르기까지 했지만 80년대 말 헤어졌는데, 히피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둘은 이에 대해 (히피들처럼) 관계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했다. 얀카는 1991년 사망했는데(공식 원인은 실수로 강에 빠져 익사했다는 것이지만 자살설과 타살설이 존재하며 주변 지인들은 자살설을 더 신뢰하는 편) 장례식 당시 레토프는 그녀의 죽음이 긍정적인 면도 있으니("жизнеутверждающая"라는 표현을 사용) 울 필요가 없다는 말까지 했으며 자신과 얀카 사이의 편지를 모조리 가져가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예고르는 장례식 날 밤 슬픔을 못 이기고 자신의 팔에 크게 자해를 했다고 한다.[90] 부친의 회고에 따르면 둘이 언젠가 모스크바에 갔을 때 다른 여자 하나가 레토프에게 집적거린다는 이유로 볼코바가 그 여자를 때렸고, 이에 레토프가 볼코바를 멍이 들 정도로 때렸다고 한다. 그 일이 있고 일 주일 뒤에 볼코바하고 완전히 헤어졌다고 한다.[91] 얀카의 장례식에서도 둘이 만났다는 기록이 있어 이 둘의 관계가 상당히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둘 다 알코올 중독 증상이 있었다고.[92] 여기까지 작성된 내용은 표도르 레토프를 인터뷰한 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 기사를 참조함.[93] 노래는 '소총은 축제요(Винтовка - это праздник)'[94] 참고로 해당 영상의 가장 위에 올라와 있는 댓글 "Охеренный танец)"는 'ㅈ나 죽여주는 춤이네 ㅋ'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러시아웹에서 문장이나 단어 뒤에 붙는 )는 한국어의 ㅋ나 영어의 :)와 유사한 의미이다.[95] 이 영상의 원본은 1988년 옴스크 시락(СыРок) 공연인데, 이 장면이 원체 인상적이라(...) 레토프 관련 밈 영상에 단골로 등장한다.[96] 두 클립 모두 1999년 이젭스크 공연의 일부로, 중간중간 술을 마셔대며 만취한 채 공연을 강행하였다. 한국어 자막은 무시해라 [97] 사실 이런 팬들의 양아치스러운 행위는 90년대 많은 러시아 밴드들이 겪던 문제였다. 당시 러시아의 정치/사회/경제적 상황은 막장을 달려가고 있었고, 훌리건들은 음악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공연장에 가는 일이 빈번했다. 이런 막장 환경 속에서 많은 음악가들은 음악을 그만두거나 해외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 크루이즈의 발레리 가이나, 마스테르의 안드레이 볼샤코프, 알파의 세르게이 사리체프 등이 그 예시.[98] 저런 기행만 보면 왜 저리 저 미치광이가 인기를 끌었나 싶을 수도 있지만, 저래 보여도 레토프의 가사와 음악은 대학교에서 연구 강좌가 개설될 정도로 철학적/정치적/사회적 메시지를 한가득 내포하고 있으며 (레토프가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를 즐겨 읽던 인텔리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실제 공연 참석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또라이스러운 행실'을 압도적인 분위기 속에서 발산해 관객들마저 광기로 물들게 하는 경우가 잦았다고 한다.[99] 2004년 곡 "죽여라(Убивать)"의 후렴 부분만 가져와 붙여넣기 한 것. 참고로 해당 노래는 흑백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서로 배척하고 죽이는 인류에 대한 노래다.(Переключить на чёрно-белый режим - и убивать!)[100] 영상 자료는 위에서 언급된 1999년 이젭스크 공연에서 가져왔다.[101] 예브게니 및 올렉 리셴코 형제의 2인 밴드. 레토프도 같이 활동했으나, 주로 스튜디오 앨범 작업 시에만 같이 활동했으며 철저히 프로듀싱 및 드럼 부분에 한정되었다. 레토프는 특히 80년대 많은 음악가들과 협업했으나 이들의 작업물에 자신의 당시 음악 스타일을 많이 도입했는데(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얀카 댜길레바의 작업물) 리셴코 형제의 피크 클락손 작업에 있어서는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102] 팬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검은 안경+데님 자켓 코디는 1989년 02월 26일 하리코프에 위치한 문화궁전 "헴스"(ДК "ХЭМЗ", Харьков)에서 있었던 합동 공연 "스탈리니즘에 반대하는 락"(Фестиваль «Рок против сталинизма»)에서 마지막으로 선보였고 이후 이 차림으로 공연에 나오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103] 사실 민방위는 이 공연에 초청받지는 않았는데, 공연이 끝난 뒤 갑자기 튀어나와서 15분 동안 공연을 선보였고 청중들은 미쳐 날뛰었다고 전해진다. 실제 공연의 마지막 타자였던 락 밴드 "라즈니에 류디"(Разные люди)"의 증언에 따르면 원래 자신들이 무대를 마치고 들어갔다가 다시 등장해서 앙코르 공연을 할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민방위가 등장해서 15분 가까이 연주를 했다고.[104] "История: ПОСЕВ 1982-85" 및 "ПОСЕВ" 앨범은 그 바리에이션이 상당히 많은 편이며, 이 중에서는 제작자의 의도와 달리 여러 음원들이 마구잡이로 섞여 비슷비슷한 제목 하에 유통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음원은 잘 따져봐야 한다.[105] 공식적으로 발매된 적은 없다. 그 존재 자체는 확인되었고 인터넷 등지에 상당수 공개되었으나, 실제 해당 앨범인지 아니면 여러 부틀랙 녹음들을 짜집기하여 표지갈이만 한 채 유통되고 있는지는 확인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106] 공식적으로 발매된 적은 없으며, 그 존재 자체는 확인되었으나 인터넷 등에서도 찾기가 극히 힘들다.[107] 비공식 컴필레이션으로 추정된다. 포세프의 사실상 마지막 앨범인 "레게, 펑크 앤드 락앤롤"과는 엄연히 다른 앨범인데, 두 앨범이 혼재되어 유통되고 있는 상황이다.[108] 해당 작업물은 2000년 "Поносные звучания I"이라는 비공식 카세트 컴필레이션 앨범으로 공개되었다.[109] 해당 작업물은 2000년 "Поносные звучания I"이라는 비공식 카세트 컴필레이션 앨범으로 공개되었다.[110] 레토프 본인이 작성한 당시 트랙리스트에는 앨범 제목이 "낙천주이"(Оптимизьм)로 적혀 있는데, 고의적인지 실수인지는 불분명. 전자일 가능성이 높긴 하다.[111] 부틀랙으로만 돌다가 2017년에야 정식으로 발매된 것이 크게 한 몫 했다. 노래 다수는 포세프 시절부터 존재하던 노래인데, Ветер с гор(이후 Страна дураков로 발표)나 Возвращение(이후 Среди заражённого логикой мира로 발표) 등 훗날 더 다듬어 발표된 노래들도 많이 실려 있다.[112] 앨범 수록곡들은 전부 레토프의 노래이나, 그 중 "각자의 집에서"(В каждом доме)는 얀카와 레토프의 합작곡이다. 원래 노래 2연은 레토프-얀카 이중 보컬로 구성하려 했으나 녹음 전 레토프와 얀카가 말다툼을 한 뒤 레토프 혼자서 전체 보컬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113] 앨범 자체는 평론가 및 대중의 호불호가 약간 갈리는 편이나, 상당한 인기를 끌었기에 이후 "생존 지침"의 곡들이 그롭 혹은 레토프의 곡으로 알려지는 일이 잦았다.[114] 1990년대 중반 이후 네우모예프와 레토프가 불화를 빚은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레토프는 불화의 정확한 원인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으나, 네우모예프의 회고에 따르면 레토프가 얀카에 대해 보인 질투가 갈등의 시작이었다고 한다.[115] 2008년 사망 직전 레토프는 이 앨범에 대해 질문한 팬에게 해당 앨범의 재출간은 없을 것이며, 앨범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라는 답변을 했다. 추마코바의 증언에 따르면 한창 앨범 리마스터링 작업 중이던 2000년대 중반 네우모예프와 레토프 간의 갈등은 정점을 달리고 있었고, 당시 레토프는 오피즈데네프시니예 앨범에 수록된 네우모예프의 노래까지 삭제해 버릴 지경이었다고 한다.[116] 캥거루 등이 펄쩍 펄쩍 뛰는 모습을 표현한 러시아어 의성어[117] 얀덱스는 러시아 최대의 포털 사이트로, 현지화하자면 네이버 뮤직과 비슷하다 보면 된다.[118] 레토프의 배우자가 "나탈리야"(나타샤) 추마코바이다. 근데 저 시절 오마주면 나타샤가 아니라 얀카가 들어가야 하지 않나? 얀카하고 만나던 시절에도 레토프가 추마코바를 알고 있긴 했다 여기서도 잊힌 뉴리치 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