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란 페르손/일생/총리 재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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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융 위기 극복 및 경제성장
1.1. 재정건정성 확보
1.2. 노동 개혁
1.3. 국가 경쟁력 회복
2. 1998년 의회 총선거 및 군축
3. 경기 안정화
4. 닷컴 버블의 붕괴
5. 2002년 총선과 소수 정부
6. 유로화 도입 실패
7. 닷컴 버블 위기 극복
8. 2006년 총선 패배


1. 금융 위기 극복 및 경제성장[편집]



1.1. 재정건정성 확보[편집]


총리 재임 기간에도 1990년대 중반 재무장관으로서 자신이 시행한 정책들을 기반으로 경제 문제들에 지속적으로 집중하였다. 스웨덴의 만성적인 예산 적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영기업 민영화 같은 많은 노력을 했는데, 1994년에는 GDP 대비 예산 적자가 무려 13%에나 달하였지만, 과감한 복지 삭감과 세금 인상을 밀어붙인 결과 3년 뒤인 1997년에는 GDP 대비 2.6% 수준으로 감소하여, 1990년대 말에는 예산이 흑자로 전환되었다.

당시 스웨덴 정부 정책의 핵심 목표 중 하나는 1990년대 초에 높은 수준에 도달했던 인플레이션을 줄이는 것이었다. 재임기간 실시한 대손충당금과 자본적성성비율 요구 강화 등 정책들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세기말에는 인플레이션이 1-2% 수준까지 떨어졌고, 이는 중앙은행이 설정한 목표치와 일치했다.


1.2. 노동 개혁[편집]


페르손 내각은 금융부문 구조조정 외에도 노동개혁도 추진했는데, 실업급여 최장기간 단축, 구직·구직활동 요건 강화, 취업 지원책 확대 등을 담은 실업급여 제도 변경안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실업급여 개혁안은 구직자들이 일자리를 더 빨리 찾도록 장려하는 동시에 공공 재정에 대한 부담을 줄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실업 급여 뿐만 아니라 구직자들이 취업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지원 방안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안에는 성인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과 함께 장애 또는 기타 취업 장벽이 있는 구직자를 돕기 위한 조치가 포함되었다. 마지막으로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고 경직성은 줄이기 위해 단체교섭제도도 개혁했다. 이러한 개혁에는 임금 협상 방식의 변경뿐만 아니라 단체 교섭 협정에 대한 새로운 규칙과 지침의 도입이 포함되었다.

위와 같은 노동개혁은 스웨덴의 실업률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90년대 중반 12% 안팎의 정점이었던 실업률은 1990년대 말에는 5~6%대로 떨어졌다.


1.3. 국가 경쟁력 회복[편집]


당시 스웨덴 정부가 국가 경쟁력 회복을 위해 실시한 구조개혁은 인건비 절감, 노동시장 유연성 증대, 기업환경 개선 등을 통해 스웨덴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조치들로 기업들은 인건비를 절감함으로써 가격 경쟁력을 높이고 연구개발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위의 조치들은 단순히 투자 확배 뿐만 아니라 생산성의 증대로까지 이어졌다.

단순히 노동시장 개혁뿐만 아니라 교육 및 인재 양성에 적극적으로 투자한 결과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고도로 숙련된 노동력을 육성하였다. 이와 같은 고학력 노동력은 상술한 낮은 인건비와 결합되어 스웨덴을 외국인 투자에 매력적인 장소로 만들어 경기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개혁은 또한 기업 환경의 개선으로 이어졌고, 스웨덴을 소위 말하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여기에는 기업의 관료적 부담을 줄여 창업과 성장을 용이하게 하는 규제 완화 정책이 포함됐다. 정부는 또한 교통망과 통신 네트워크와 같은 기반 시설에 투자했는데, 이것은 효율성을 향상시키고 교통 비용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스웨덴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고, 이는 외국인 투자와 수출 증가로 이어졌다. 이는 결국 기업들이 영업을 확장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생산성 향상과 경제 성장으로 이어졌다.


2. 1998년 의회 총선거 및 군축[편집]


1998년 스웨덴 총선에서 과감한 개혁을 밀어붙인 사민당과 페르손 내각은 실각했던 1991년의 선거보다 훨씬 적은 표를 얻어 자칫하면 또 한번 정권 교체를 당할 뻔 하였으나, 녹색당과 좌파당의 신임 덕에 페르손은 가까스로 총리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같은 해 말, 스웨덴 정부는 스웨덴의 국방 예산을 대폭 삭감하자는 제안을 발표했다. 이러한 군축은 스웨덴군의 규모 축소로 연결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당내에서도 큰 비판을 받았지만, 페르손은 군축을 통해 절약한 예산은 의료, 교육 등 다른 분야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하며 스웨덴의 오랜 중립 정책과 비동맹 정책에 부합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스웨덴의 군사력을 현대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광범위한 노력의 일부라고 강조했다.

결국 스웨덴의 국방력에 대한 대중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군축을 강행했다.


3. 경기 안정화[편집]


1999년에 비로소 과감한 개혁들이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스웨덴의 GDP 성장률은 약 3.6%로 당시 유럽 평균을 크게 웃돌았고, 인플레이션은 진정되었으며, 스웨덴 정부는 1990년대에 처음으로 예산 흑자를 보고할 수 있었다.

사민당은 이와 같은 성과들을 엄격한 재정 정책과 사회 복지 프로그램에 초점을 맞춘 것에 대한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경기 회복을 지속하기 위해 사민당은 2000년, 소득세 감면을 제안했는데, 이는 경제 성장을 촉진하고 지출 확대를 촉질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소득세 감면은 당연히 공공 서비스의 축소로 이어지고 정부의 건정 재정 준칙을 저해할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사민당은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감세가 경제 성장과 사회 복지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주장했다.

전체적으로 1999년은 스웨덴 사회민주당에게 중요한 해였고, 스웨덴의 경제는 전환점을 맞았다.

2000년, 스웨덴은 비로소 강한 경제, 감소하는 실업률, 그리고 IT 산업의 부상으로 1990년대 초의 장기 불황 동안 사실상 회복 불가로 보였던 복지 사회의 "스웨덴 모델"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것처럼 보였다. 경제성장률은 유럽 평균을 상회하는 4%에 달했고, 실업률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막상 사민당은 이러한 경기 회복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시기 사회민주당의 인기 하락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한 요인은 당시 정부에서 시행한 국영 기업의 민영화와 같은 일부 개혁에 대한 불만이었다. 또 다른 요인은 당이 너무 우경화되어 전통적인 노동운동의 뿌리에서 벗어났다는 인식이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사민당과 연정을 구성하고 있던 좌파당은 공공 지출 확대를 옹호하고 스웨덴의 유로화 도입을 반대함으로써 이와 같은 경제 호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유로화에 대한 국민적인 반대는 유럽 연합에 대한 회의론과 국가 주권에 대한 지지라는 좌파당의 이념과 일치했다.


4. 닷컴 버블의 붕괴[편집]


2001년, 전세계를 강타한 닷컴 버블의 붕괴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많은 다른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스웨덴에도 지대한 경제적 악영향을 미쳤다. 스웨덴은 에릭슨과 같은 기업들을 선두로 하여 크고 성장하는 기술 분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더더욱 그러하였다.

에릭슨은 세계 최대의 이동통신 기업이었으며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스웨덴 경제 성장의 주요 동력이었다. 그러나 2001년 닷컴 버블이 붕괴하면서 에릭슨의 제품에 대한 수요는 급격히 감소했고, 회사는 구조조정을 통해 수천개의 일자리가 없어졌다.

스웨덴은 에릭슨 외에도 수많은 인터넷 컨설팅 회사와 닷컴 스타트업들이 많이 진출한 곳이기도 했다. 이들 기업 중 상당수는 벤처캐피털 자금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이 자금은 닷컴 버블이 터지면서 고갈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들 기업들 중 대다수가 직원들을 해고하거나 아예 문을 닫게 되었고, 이는 실업률의 상당한 증가로 이어졌다.

이러한 닷컴 버블 붕괴의 여파로 스웨덴은 2000년의 3.6%라는 경제성장이 무색하게 2001년에는 성장률이 약 1.5%로 급격한 하락을 맡게 될 것으로 전망되었다.소비자 신뢰를 높이고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정부는 여러 가지 조치를 시행했다. 여기에는 실질 가처분 소득을 늘리기 위한 감세, 보육비 보조금, 임금 인상 등이 포함됐다. 이러한 조치들이 소비자 신뢰를 높이고 소비를 증가시켜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특히 정부는 실질 가처분소득이 5.4% 증가해 소비지출이 크게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수출 또한 스웨덴 크로나의 약세에 힘입어 2002년에 회복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통화는 2001년에 미국 달러유로화에 대해 모두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고, 이는 스웨덴 수출품을 세계 시장에서 더욱 가격 경쟁력 있게 만들었다. 스웨덴은 전통적으로 국내 소비시장이 매우 협소한 만큼 경제 성장을 위해 수출에 크게 의존해 왔기 때문에, 수출 회복은 정부가 크게 기대하고 있던 부분이다.


5. 2002년 총선과 소수 정부[편집]


2002년 스웨덴 총선에서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은 의석을 기존 131석에서 144석으로 늘리며 제1당의 지위를 유지했다.[1] 의석이 늘었지만 다수당에는 미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과반에 못 미치는 소수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소수 정부를 이끌어가기 위해서는 좌파당, 중앙당의 지지 정당들의 도움이 불가피했는데, 특히 좌파당의 연립 정부를 요구했기 때문에 많은 논란이 되었다. 좌파당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페르손은 소수 정부를 유지하기로 결정한다. 이는 소수 정부가 더 효율적인 의사 결정을 허용할 것이라는 그의 믿음에 기초하였다. 그는 연립 정부가 더 번거롭고 필요한 개혁을 추진하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정권 유지에는 성공했지만 이전해에 발생한 닷컴 버블 붕괴의 여파로 스웨덴 경제가 직면한 문제들이 다음 총선까지 풀어나가야할 장애물로 있었다.

당시 서구권의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북한방문하기도 하였다.


방북 당시의 모습을 담은 스웨덴 국영방송의 다큐멘터리

6. 유로화 도입 실패[편집]


당시 스웨덴의 유로화 도입 문제는 2000년대 초반 상당한 정치적 논쟁과 논란의 대상이었다.

잉바르 칼손 재임 당시인 1995년에 스웨덴은 유럽 연합의 회원국이 되었지만, 유럽의 단일 통화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 경제 통화 동맹(EMU)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 결과로 유로가 등장한 이후에도 스웨덴은 자국 통화인 크로나를 유지했고, 자국 통화 정책을 지속적으로 관리했다.

이로 인해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스웨덴 국내에서는 EMU에 가입하고 유로화를 채택해야 하는지에 관한 크고 작은 논쟁이 있었다. 유로화 지지자들은 유로화 도입을 통해 경제적 안정성을 증가시키고 통화 위험을 줄이는 것뿐만 아니라 무역과 투자를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페르손도 유로화 도입을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특히 사회복지와 노동권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우려하는 좌파 정당과 노동조합 사이에서 유로화에 대한 극렬한 거부가 있었다. 심지어 많은 스웨덴인들은 또한 국가 주권이 위협받을 수 있단 우려로 유럽 연합에 대해 전반적으로 회의적이었다.

그러던 2003년, 결국 스웨덴은 국민투표를 통해 유로화를 채택해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했다. 국민투표는 양측의 열띤 캠페인에 앞서 진행되었는데, 유로화 지지자들은 그것이 경제 성장과 안정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반대자들은 사회 복지와 국가 주권에 대한 잠재적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국민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페르손은 유로화 도입을 촉진하는 캠페인에 깊이 관여하였는데, 그는 단일 통화를 채택하는 것이 스웨덴에 경제적 안정성 증가와 국제 시장에서 더 잘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 다양한 혜택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유로가 스웨덴인들이 유럽 전역을 여행하고 사업을 하는 것을 더 쉽게 만들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국민투표는 유권자의 56%가 크로나 보유를 선택하면서 반유로 캠페인의 근소한 승리로 귀결되었다. 이 결과는 유로화 도입을 강력하게 추진해온 페르손 내각에 큰 타격을 입혔고, 더 나아가 유럽 연합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고 평가받는다. 이러한 투표 결과는 주권 상실에 대한 우려와 유로화가 사회 복지와 노동 권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를 포함하여 많은 요인들이 기여했다.

페르손은 국민투표 결과에 실망감을 표시하며, 스웨덴이 유로화를 도입하지 않아 중요한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놓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스웨덴 국민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는 점을 인정하고 민주적 절차를 존중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7. 닷컴 버블 위기 극복[편집]


닷컴 버블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를 안정시키고 성장을 촉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정책에는 정부는 수요를 자극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인프라 프로젝트와 기타 공공 투자에 대한 지출을 확대와 같은 재정 부양책, 금리 인화를 비롯한 통화정책, 기업 지원확대, 그리고 사회 복지 확대가 있다.

이러한 정책들의 결과로 2002년 -0.3%를 기록하며 역성장을 했던 것에 반해 내수 확대와 수출 증대로 2004년에는 건전한 4.5%로 성장률이 반등했다. 더불어 정부의 재정 부양책과 기업 지원은 2002년과 2004년 사이에 고용률을 69.2%에서 71.2%로 증가시키는데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정부의 통화정책과 기업에 대한 지원도 스웨덴 경제에 대한 투자를, 특히 통신분야에서의 투자를 장려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전반적으로 시행한 정책은 닷컴 버블 위기 이후 몇 년 동안 스웨덴 경제를 안정시키고 성장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강력한 사회 복지 제도는 성장 촉진 정책과 결합되어, 성장기에 오히려 불평등을 줄이고 빈곤률을 감소시켰다고 평가받는다.


8. 2006년 총선 패배[편집]


스웨덴을 두차례나 경제 위기에서 구해냈지만, 결국 2006년 스웨덴 의회 총선거에서 패배하며 프레드리크 라인펠트에게 권력을 내어주게 된다.

이와 같은 패배에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했는데, 무엇보다도,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던 것, 이민 문제, 선거를 앞두고 사회민주당을 강타한 부패 스캔들이 주요 요인이었다. 이 외에도 일부 10년이라는 장기 집권에 지친 유권자들 사이에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여론이 강했다. 게다가 정부 소유의 비행기를 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한 것도 밝혀지며 대중적인 이미지가 손상된 것 역시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접전이었던 선거는 결국 라인펠트가 승자가 되고, 페르손은 총리직 사임과 동시에 국회의원까지도 사임하며 일선 정계에서 물러난다. 이로써 10년간의 장기 집권이 종식된다.

[1] 막상 사민당과 연정을 유지했던 좌파당의 의석은 13석이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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