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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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투항자
국적
백제 → 당
이름
예식진(禰寔進)
아버지
예사선(禰思善)
형제
예군
묘지
당국 장안 고양원(高陽原)
생몰연도
615년 ~ 6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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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진의 묘지명 덮개.[1]


















1. 개요
2. 중국계였나?
3. 백제의 의문스러운 항복
4. 예식진? 예식?
5. 반론과 재반론, 그리고 결론
6. 평가
7. 예식진의 2살 형인 예군 묘지명의 일본 명칭 논란
7.1. 예군 묘지명에 대한 일본 측 반박
8. 같이보기



1. 개요[편집]




백제장군. 백제의 지방구분인 5방 중 하나를 담당한 북방령(北方領)이자 웅진성주였으나, 의자왕을 나당연합군에게 항복시킨 배신자이자 매국노.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웅진도독부의 동명주자사(東明州刺史)를 지냈다 한다.

2006년, 중국 뤄양시의 골동품상에 나타난 묘지명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출토지는 시안시라고 한다. 출토지는 시안인데 뤄양의 골동품상에서 판매한 건 출처를 숨기기 위한 일종의 '세탁' 과정 때문일 것이라 한다.

2007년, 지린성의 격월간 역사잡지인 《동북사지》(東北史地)에 기존의 다른 백제 유민들의 묘지명과 함께 처음 소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010년 4월, 시안 시내의 한 공사장에서 예식진과 그의 아들 예소사(禰素士), 손자 예인수(禰仁秀)의 일가족 무덤이 동시에 발견되었다. 특히 이들 가족묘에서는 예소사와 예인수의 묘지명이 동시에 출토되었고, 기존 <예식진 묘지명>에서는 분명하지 않은 예씨의 가족 내력이 드러났다고 한다.

묘지명에 의하면 무왕(백제) 16년(615년)에 태어나 당고종 대인 함형(咸亨) 3년(672년) 5월 25일 향년 58세로 죽어 그 해 11월 21일 장안(長安, 현 시안)의 고양원(高陽原)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가계도는 위로는 아버지는 좌평 예사선(禰思善)이고, 할아버지는 좌평 예예다(禰譽多)이며, 증조부는 좌평 예복(禰福)이고, 예복(禰福)의 증조부는 예숭(禰嵩)이다. 아래로는 아들은 예소사(禰素士)이고, 손자는 예인수(禰仁秀)이다. 옆으로는 형인 예군(禰軍)이 있다.

백제의 요충지인 웅진성을 거점으로 했던 것으로 볼 때 예씨(禰氏)는 웅진성을 기반으로 했던 대성팔족의 백씨(苩氏)가 몰락한 후에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된 유력 가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씨 일족이 대성팔족인 백씨들을 몰락시킨 것이라면 무령왕의 왕위쟁탈전에도 참여했을 것이다. 즉 예씨 일족은 무령왕의 최측근으로 활동했을 가능성도 높다.


2. 중국계였나?[편집]


<예인수 묘지명>에 의하면 선조는 《삼국지》에도 등장하는 독설가 예형(禰衡)이라고 한다. 다만 <예군 묘지명>, <예소사 묘지명>, <예인수 묘지명>이 서로 안 맞는 부분이 있어서 확실한 건 아니다. 하지만 예군, 예소사, 예인수 모두가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조상이 중국에서 왔음을 밝히고 있으며 특히 예식진의 형 예군이 자신의 묘지명에 중화와 조상이 같으며, 영가의 난을 피해 동쪽으로 이주해서 가문을 이루었다고 백제로 이주한 이유를 자세히 밝혔다. 또한 무령왕릉이 중국 남조 양나라의 무덤양식의 형태를 띄는 점을 통해 볼 때 백제의 예씨가 정말로 《삼국지》의 그 예형의 후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예씨가 중국계이거나 중국계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으며, 무령왕이 최측근으로 중국계를 많이 기용했음을 알 수 있다. 막연한 추측이 아니라 실제로 무령왕은 왕릉도 남조식 벽돌무덤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남조와의 교류에 힘썼던 인물이다.

하지만 묘지명의 선조가 예형이라고 기록한 것은 숭조사업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고대,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대륙계 시조들은 대다수가 모화사상에 의한 숭조사업의 결과물로 날조된 것이고, 특히나 백제를 뒤통수치고 중국의 벼슬을 얻어 중국에서 살게된 예씨 집안에서는 필수적으로 해야 했던 일인 것이다. 후대의 고려 왕실은 숭조사업을 통해 왕건의 증조부를 당숙종 황제라고 날조했다가 원나라 학자들 한테 까인 적도 있었다. 고려를 세우고 한반도를 기반으로 한 왕건도 대륙계로 숭조사업을 하는 마당에 백제를 배신하고 당나라의 벼슬을 얻어 중국에서 살게 된 예씨 집안으로서는 당연하다 할 것이다.

다만 예형이 황족이나 귀족의 신분을 가진자는 아니어서 숭조사업이 대상이 될만한 인물인가에 대해서 반론도 있다.


3. 백제의 의문스러운 항복[편집]


이에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演) 및 대신(大臣)과 장사(將士) 88명, 백성 12,870명을 당나라 수도로 보냈다.

於是, 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 定方以王及太子孝·王子泰·隆·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그 대장 예식이 또한 의자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으며 태자 융과 나머지 여러 성주가 모두 함께 보내졌다.

其大將禰植又將義慈來降 太子隆幷餘諸城主皆同送款

『舊唐書』 권83 蘇定方傳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와 함께 항복하였다.

其將禰植與義慈降

『新唐書』 권111 蘇定方傳

660년, 나당연합군 18만 대군이 백제로 쳐들어와 사비성을 공격하자, 의자왕은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옮겨간다. 당초에는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도망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은 나당연합군은 고대국가의 전쟁형태인 영토점령 전쟁 스타일이 아닌, 철저히 백제국 멸망을 목적으로 한 전쟁(수도 사비직공) 을 치르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의 지방군들은 나당연합군에게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상황이었다. 영화 황산벌의 초반부에서 의자왕계백에게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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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당초 계획

의자왕백제의 모든 지방군들을 동원하여 거대한 포위망을 만들고 15만이라는 거대한 덩치를 그대로 아사시키는 전략을 위해 사비성을 빠르게 포기하고 웅진성으로 지휘부를 옮긴 것으로 보인다. 평지에 있던 사비성은 수비에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지에 있는 웅진성이 보다 수비에 용이했다. 게다가 백제 귀족들이 비록 왕의 말을 잘 듣지 않을 만큼 독자성이 강했다고는 하지만 수백년간 달고 살아온 간판을 한 순간에 내던질 정도는 아니었다.

일례로 백제가 멸망한 뒤 지방의 귀족들과 잔존 왕족들을 중심으로 치열한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부흥운동이 수포로 돌아가고 신라에 완전히 합병된뒤에도 옛 백제지역의 "귀족" 유민들은 자신이 백제인 혹은 백제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였다.

또한 나당 연합군과 손을 잡는 건 실리적으로도 맞지 않았다. 신라와 당나라가 무리해서 지역 유지나 귀족들을 갈아치우진 않겠지만 당연히 백제 땅이 신라나 당나라의 영토가 되면 자신의 세력권인 백제귀족들은 그냥 촌뜨기 유지가 되는거기에 중앙정치에서의 영향력 등이 많이 상실될수밖에 없고 실제로 그리되었다.

의자왕이 백제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들과 대립해서 갈등의 골이 커졌다고 한들, 서로의 피로 피를 씻어온 적국인 신라와는 차원이 다르다. 백제 안에서는 유력한 귀족으로 권력의 핵심과 가까운데 존재하지만, 신라에 항복하면 수많은 귀족 중 하나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통일 이후 백제 유력 귀족들은 신라에서 진골은 커녕 6두품으로도 못 들어가고, 5두품 이하만 받았다. 이는 후에 신라 말기, 중앙정부에 반기를 드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이런 모든 계산하에서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지휘부를 옮겨 버티기 작전을 구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가설대로 백제군이 애초에 장기전을 노렸다면 성충의 간언대로 당군은 기벌포에서 막고 신라군은 탄현에서 막은 뒤 양군의 합류 자체를 저지한 뒤 시간을 끌었어야 한다. 하지만 백제는 당군이 금강 하구로 들어오고 신라가 황산벌에 이르기까지 피난 움직임은커녕 본격적인 전략적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이 점에서 백제의 초기 대응은 완전히 실패였던 것은 확실하다.

결국 의자왕이 웅진성으로 피난했다면 급박한 상황을 일단 모면하기 위해 옮겨갔을 것이지, 처음부터 장기전을 노린다는 대국적 전략을 수행하려는 건 아닐 확률이 높다. 하지만 일단 백제본기에 따르면 당군이 상륙작전을 펼치면서 주둔하여 수비하고 있던 백제군 수천을 격퇴하였다는 언급이 있다. 기벌포가 금강 하류라고 해석한다면 합류지연을 노리고 요격하기는 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그보다는 요격 방식이 문제였다. 즉 1안은 당군이 상륙 자체를 못하게 막으면서 시간을 끌자는 안이었고, 2안은 당군을 백강 안으로 끌어들여 요격하여 큰 피해를 주어 물러가게 한다는 안이었다. 그 중 2안이 채택되었으나 현실은 당군의 수륙병진에 박살이 나서 기벌포의 방어선은 그대로 돌파되었고 어쩔 수 없이 남은 군대를 긁어모아 야전에서 당군과 맞섰으나 대패했다. 즉 백제의 초기 방어 전략은 장기전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의자왕이 대국적인 전략을 위해서든, 급한 불을 끄기 위함이든 웅진성에 들어 가는데 성공한 이상 곤란한 것은 나당연합군 쪽이었다. 웅진성은 한때 백제의 수도였던 만큼 비축된 물자도 있었고, 벼랑과 강으로 삼면에 둘러싸여 있어 군사적으로 제대로 공략 가능한 곳은 사실상 한 면 뿐인 천혜의 요새로서 아무리 대군을 몰고 닥돌해도 하루아침에 점령하기 힘들었다.

웅진성의 견고한 방어력은 아이러니하게도 200년 뒤 통일 신라의 대규모 반란이었던 김헌창의 난에서 잘 드러난다. 이 때 김헌창의 장안국 군대는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난공불락으로 꼽히는 삼년산성에서 방어전을 치르고도 순식간에 패배하는 등 '이렇게 못 싸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졸전을 거듭했지만 웅진성에서는 신라 대군을 상대로 열흘 이상을 버텼다.

또 고구려라는 변수도 있다. 당이 요동을 건드리는 양동작전을 제대로 펼치지 않는 이상 고구려 입장에선 바다를 건너온 당의 13만 대군을 그냥 두고보진 않았을 것이다. 백제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동맹이라는 고구려가 뭔가 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건 백제가 너무 빨리 항복해버려서 끼어들어 뭘 해볼 시간이 없었던 것이고, 실제로 좀 늦었긴 해도 백제부흥운동과 맞물려 신라 북부를 여러 차례 공격하기도 했으니 그것이 660년의 칠중성 전투, 661년의 술천성 전투와 북한산성 전투였다. 이 전투들은 신라군의 주력이 백제 땅에 있는 것을 노려 방비가 허술해진 신라령 경기도 지역을 공격한 것으로, 신라군이 백제부흥군 토벌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고 백제부흥군에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목적이 있었다. 다만 이 공격은 신라 측의 북한산성 성주 동타천의 철벽수비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런데 만약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버티고 백제 지방군들이 나당연합군을 공격하는 가운데 고구려군이 백제를 돕기 위해 남하한다면 나당연합군을 심리적으로 더욱 압박(특히 소정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다건너 10만이 넘는 대군을 투입한 당의 입장에서 제해권을 완벽히 장악하지 못한이상 고구려의 직접적인 참전뿐 아니라 고구려 수군(거기에 더해 백제 수군까지)에 의하여 해로가 위협받는다면 심각한 악재가 된다. 신라가 나당연합군 18만의 장기간의 보급을 제대로 대지 못한다면 당군은 적극적으로 끝장을 보려들기보단 적당한 선에서 협상하고 물러날 가능성도 높다.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백제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 신라 입장에서 보면 백제를 멸망시키지 못한다 해도 큰 타격을 준 이상 일단 숨통은 확보했고,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게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가 지지부진한 것도 뭘 어쩌려 하기전에 백제가 멸망해서 국내 방어에 집중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상황이 길어지면 땅을 신라에게 할양하고, 당나라에게 조공을 바치며 추후 고구려 공격시 도와준다는 약속을 하는 선에서 물러갈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어떠한 경우에던지 그동안 신라와 전쟁해서 얻어낸 땅이나, 추가적인 땅을 신라에게 잃을 것이며, 수도가 점령당하는 등 백제는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기에 이전과 같이 자주독립국의 형태를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추후에 백제가 배신을 하고, 고구려의 협력을 통해 신라를 공격해 다시 되찾을 가능성도 있기는 하겠다만.

그러나 웅진성에 들어간 지 5일만에 의자왕은 돌연 항복했다.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에 들이닥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모든 의문을 해결하게 한 것이 바로 2006년에 발견된 백제 웅진의 장군 예식진의 묘지명이었다.


4. 예식진? 예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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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진과 비슷한 이름의 예식(禰植)이란 인물이 구당서와 신당서에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 소정방에게 항복했다고 언급된다. 예식은 예식진하고 동일인물인 것으로 보이는데, 식(植)이라는 이름이 예식진의 원래 본명이거나, 혹은 그의 자(字)로 추정할 수있다. 예식진의 형 예군(禰軍)의 자가 온(溫)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식진의 묘지명에는 "예식진의 공은 김일제보다 더 위대하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김일제는 한무제에게 항복한 흉노족으로 이후의 중국역사에서 이민족 출신들의 공로는 김일제에 비교되곤 했다. 그런데 예식진이 세운 공이 김일제보다 더 위대하다라는 표현으로 결국 예식진이 세운 위대한 공은 의자왕을 사로잡아서 군에게 넘긴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더욱이 구당서와 신당서에 "데리고"라는 의미로 쓰인 한자 "將"은 강제로 끌고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서 결국 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하고 당나라에 항복한 것이 큰 공의 정체였다는 주장이다. 비록 묘비명에 이런 내용이 직접적으로 적혀 있지 않다 하나 정황상 그외에는 의자왕의 갑작스런 항복과 웅진성의 낙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자기 나라 왕을 잡아서 적에게 넘겨버린 사실을 자기 묘비에 직접적으로 적을 가능성인 대단히 낮다.

가족으로 형제인 예군이 있다. 역시 당에 항복하여 관직을 받았다.


5. 반론과 재반론, 그리고 결론 [편집]


하지만 상기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다.

  • 우선 묘지명 어디에서도 의자왕에 대한 예식진의 반란 및 배신을 직접적으로 시사한 글은 찾기 어려우며, 단순히 '데리고 갔다'는 그 기록을 무조건 '생포해서 바쳤다'고 봐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적인 분석이 있다.
  • 또한 '將'에는 '데리고 가다' 말고도 무려 21개의 뜻이 더 담겨 있는데, 이 기록에서는 '데리고 가다'보다는 '행하다(行)', '곁붙다(扶持)', '잇다(承)', '함께 하다(伴也)' 등의 해석이 적합하며, 이 경우 "그 대장 예식이 또 의자와 함께 와서(將) 항복했다"가 되어, 《신당서》에서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와 더불어(與) 항복했다"는 기록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다만 "다른 사서들에 예식진과 관련된 기록이 없으며, 《구당서》 <소정방 열전>의 기록도 "그 대장 예식. 그리고 우두머리 의자왕이 와서 항복하였다"라고 볼 수도 있기에 결함이 있다"라고 기술 되어있었으나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예식이 의자왕을 데리고(혹은 함께) 항복하였다.' 라는 기술은 《신당서》, 《구당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고[2]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예식(예식진)이라는 이름만 없지 '웅진방령이 함께 항복하였다'라는 기술이 존재한다.[3] 따라서 위의 《구당서》(<소정방 열전>)를 제외하고 예식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틀린 주장이다. 애초에 둘째 문단에서 《신당서》의 구절을 인용하고, 《구당서》를 분석하는 내용을 기술하면서 셋째 문단에서 《신당서》와 《구당서》 등 중국측 역사서에 그러한 내용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앞뒤가 맞지 않다.

다만 《구당서》와 《신당서》에 등장하는 예식이라는 인물과 묘비에 기록된 예식진이 동일인이라는 추가적인 증거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2010년 예씨 집안의 가족묘가 발굴되면서 예식진의 선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기록이 기록된 묘지명이 발굴 되었으며 이 중에는 아들인 예소사(禰素士)와 손자인 예인수(禰仁秀)의 묘지명이 있어서 함께 세상에 드러났다. 그 중 손자인 예인수 묘지명에서 조부가 의자왕을 잡아다 바친 걸 대놓고 적고 있다. 예인수 묘지명에서는 即引其王歸義于高宗皇帝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구당서》 및 《신당서》와는 달리 "引"을 쓰고 있다. 즉 대놓고 의자왕을 끌고가 당고종에게 바쳤다고 기술하고 있어 더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어진 것. 때문에 예식진이 매국노임이 명확해졌다 (111차 신라사학회 참고)

애초에 유명하지도 않던 적장 한 명을 (요새로 피신한) 적의 왕보다 앞에 기록한다는 것부터가 의미심장한 것이다. 또한 반론에서 말하듯 의자왕과 단순히 더불어(與) 항복했더라면, 예식진이 당나라 대장군이라는 높은 지위를 획득한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공적이 있어야 벼슬을 받는다. 당나라 대장군이 단순히 항복했다고 주는 지위가 아니다. 예식진이 벼슬을 받을 만큼의 공로를 세웠다면 가능할 것이다.

6. 평가[편집]


예식진이 나라를 팔아먹을 당시 백제의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았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의자왕의 신변이 무사한 가운데 난공불락인 웅진성까지 도피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상황에서 나당연합군을 상대로 버티거나 승리하고 사직을 보존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수도였던 사비성이 함락되고 20만에 가까운 나당연합군이 백제 내부를 들쑤시는 상황에서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지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충상, 상영, 부여융 등이 예식진보다 먼저 신라나 당나라에 항복한 상황이었고, 기록에 남지 않은 경우까지 더 많은 자들이 연쇄적으로 항복하고 있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식진의 배신을 그 당시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합리화할 순 없을 것이다.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에 쳐들어 와 악전고투 끝에 더 버티기 어렵게 되어 항복한 것이라면 변명의 여지가 있겠지만,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왕을 사로잡아 항복한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앞에서 언급한 충상과 상영도 싸워 보지도 않고 항복한 게 아니라 황산벌 전투에서 참전하여 패배 후 포로로 붙잡히고 항복한 것이라 예식진과는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당나라 군대는 7월 9일 기벌포에 상륙하여 7월 18일 예식진의 배신으로 백제의 항복을 받아냈는데, 이는 당나라가 상륙한지 고작 10일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다.

적어도 웅진성에서 시간을 끌면 고구려의 구원군과 백제 지방의 지원군들을 기대할 수 있었으며, 왜국 또한 백제를 적극적으로 도왔기 때문에, 이러한 시간적 압박은 소정방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는 보급품을 배에 싣고 원정을 했기 때문에 한정된 양의 보급품을 가지고 전쟁에 임할 수 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속전속결하지 않는다면 크게 곤란한 상황이었다. 실제로도 이러한 보급의 문제 때문에 이후 당나라는 17만 대군을 이끌고도 신라에게 패하게 된다. 여러 상황을 종합해서 볼 때, 천혜의 요새인 웅진성에서 버티기만 해도 시간은 의자왕의 편이었던 것이다.

또한 예식진의 이러한 배신은, 질 싸움인 줄 알면서도 나갔던 계백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계백을 따르던 5천 결사대와도 비교가 된다. 백제가 망하자 곧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왜국의 도움을 받아 다시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던 역사도 있다. 그리고 예식진은 배신의 대가로 공을 인정받아 당나라 대장군이 되기까지 했다. 이 점은 나라를 일제에게 팔아 호의호식한 이완용과 비슷하다.


6.1. 나비효과[편집]


백제의 갑작스러운 멸망으로 인해 양면전선을 강요받아 국력이 급격히 소모당한 고구려까지도 결국 멸망한 것을 생각하면 예식진의 반역이 불러온 나비효과는 엄청나다고 볼 수 있다. 예식진이 매국노짓을 하지 않았다면 한국사의 방향성은 정반대로 전개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웅진성에서 백제의 저항이 더 길어지면서 백제의 멸망이 더 늦춰졌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백제부흥군이 결국 망한 이유 중 지도부의 분열이 큰 몫을 차지한 것을 볼 때, 의자왕이 왕좌를 지키면서 저항한다면 지도부의 분열 없이 당-신라군을 격퇴하고 후일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그랬듯이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백제의 국체를 당에게 다시 인정받을 가능성도 높아진다.

전쟁이 길어지며 결국 당나라 입장에서 반대로 양면전선, 거기다가 토번까지 합치면 삼면으로 대적하게 되어 엄청난 소모전으로 비화, 고구려 역시 더 오래 존속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될 경우 오랫동안 고구려의 예속 하에 있던 거란, 말갈, 실위 등이 그대로 고구려의 지배권에 붙들려 있어, 차후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가 역사에 등장하지 않게 될 수도 있었다는 부분까지 고려하면 동아시아사 전체를 뒤흔들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다만 이는 말이 안되는 것이, 고구려가 그때까지 존속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발해도 말갈 관리를 제대로 못한데다 요나라와의 관계가 파탄나는 바람에 200년 만에 망했는데 고구려라고 다를 리 있었겠는가?

특히 예식진의 반역은 한국 민족주의자들이 큰 의미를 부여하는 부여계 직계 국가인 백제와 고구려를 한국사에서 뿌리뽑아내버렸다는 면에서 이완용급 혹은 그 이상으로 비난받고 있다.

또한 야마토 정권이 다량의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받아들여 '일본'이란 국가를 형성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는 면에서 예식진의 반역은 일본에도 만만치 않은 영향을 주었다 평가된다.

7. 예식진의 2살 형인 예군 묘지명의 일본 명칭 논란[편집]


예식진 묘지 발견 이후, 다시 예군의 묘를 발견하게 되는데, 여기에 일본(日本)이라는 글자가 존재해서 논란이 되었다.

이에, 오늘날 일본의 국호는 원래 백제 땅을 일컫는 말이었으며, 왜나라(倭國)에서 일본(日本)으로의 국호 성립에 백제인들이 관여했다고 일본 고대사학계 권위자인 도노 하루유키 나라대 교수가 말했다. #

실제로도 예군(禰軍)의 묘지명에서 실제 왜국은 '부상(扶桑:중국 전설에 나오는 아침해가 뜨는 나무)'으로 표기 되어 있다. 따라서 일본(日本)은 본래 백제를 부르는 말이었다는 것.

원문을 보면,

이때 日本(일본)의 남은 백성은 扶桑(부상)에 의지하여 주벌을 피하고 있고, 風谷(풍곡)의 남은 백성들은 盤桃(반도)를 의지하여 굳세게 저항했다.

于時日本餘噍, 據扶桑以逋誅; 風谷遺甿, 負盤桃而阻固.

라고 쓰여있다.

도노 교수에 따르면, 묘지명에 기록된 당시 백제, 고구려, 신라 등 중국의 주변 나라는 국호를 쓰지 않고 '부상·풍곡·반도' 등 자연환경적 특징에 근거한 은유적 명칭을 썼는데, 유독 일본만 공식 국호를 썼을리 없다는 논지다. 묘지명의 ‘일본’은 중국에서 볼 때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으로 곧 백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군의 묘지에는 동방을 지칭하는 많은 용어와 함께 ‘일본’이 사용되고 있지만, 정작 동 시기에 사용되던 국호는 하나도 기록돼 있지 않다. 이성시 일본 와세다대 교수는 이 같은 사실이 예군 묘지가 제작된 시점, 즉 678년에 ‘일본’이 국호로서 성립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고 강조했다. 예군 묘지는 일본 국호의 성립이 678년 이후의 일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료란 것이다. #

반면, 《구당서》 <동이전>과 《삼국사기》에서는 670년에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바꾼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본국은 왜의 다른 이름이다. 나라가 해가 머무는 곳에 있으므로해서 이름지었다. 혹자는 왜국 스스로 그 명칭이 우아하지 못하다고 해서 싫어하기 때문에 일본(日本)으로 고쳤다고 말한다."(日本國者倭之別稱也 以其國在日處故爲名.或曰倭國自惡其名不雅.故改爲日本) 이성시 교수의 말은 여기에 나오는 《구당서》와 《삼국사기》의 내용이 틀렸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일본이라는 국호의 공식 사용701년 《다이호 율령》 이후에 쓰이게 된다.

678년
예군의 묘에 '日本' 이라는 글자 (백제를 뜻함)
701년
《다이호 율령》으로 일본(日本) 국호 공식 사용
945년
《구당서》 편찬 - 여기서 670년에 왜가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었다고 나옴
1145년
《삼국사기》 편찬 - 670년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었다고 나옴. [4]


애초에 670년에 왜(倭)에서 일본(日本)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구당서》의 잘못으로 보임[5]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일본’이란 단어가 일본에서 생산된 용어라기보다는 한반도에서 사용됐던 용어이며, 일본의 국호 제정 과정에서 백제 유민들의 지적인 역할을 추정케 해준다”고 말했다.

또한 《구당서》에 "일본국은 왜국의 다른 종족이다. 그 나라가 해의 가장자리에 있기 때문에 일본(日本)이라 이름하였다. 혹자는 왜국이 스스로 그 이름이 우아하지 못한 것을 싫어해서 일본으로 고쳤다고 말한다. 혹자는 일본(日本)은 옛날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의 지역을 합병하였다고 말한다."고 씌어있다.
<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爲名. 或曰: <倭國>自惡其名不雅, 改爲<日本>. 或云: <日本>舊小國, 倂<倭國>之地.

《구당서》에 일본이 왜국의 땅을 합병하였다는 말이 이때까지 이해가 힘들었는데, 여기서 일본(日本)을 '백제의 유민들'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왜국으로 넘어간 '백제의 유민들'은 스스로를 왜국과 다르다고 인식하여 일본(日本)이라는 이름을 썼을 것으로 추정. 왜국은 난쟁이를 연상케하는 비하의 뜻이 있기 때문에 백제 유민 입장에서는 사용하기 싫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이라는 말은 해가 뜨는 곳을 말하는데, 이는 중국이나 한반도의 입장에서 봐야 일본 열도의 위치가 해가 뜨는 동쪽이 된다. 즉, 일본(日本)이라는 이름 자체는 일본의 입장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타지역 사람이 일본으로 유입된 이후 왜국을 대체하기 위해 제시되었다는 것이 중론. 유민들이 이후 왜국의 지도층이 되어 일본을 정식 국호로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7.1. 예군 묘지명에 대한 일본 측 반박[편집]


일본측의 해석은 묘지명의 일본을 '일본'이 아닌 '일'과 '본'으로 끊어 읽어서, 사실은 '일본'이 아니라는 해석이다. 전체문장은 "于時 日本餘噍 據扶桑以逋誅 風谷遺甿 負盤桃而阻固" 인데, 여기서 '일'과 '본'을 끊어서, "于時日 本餘噍 據扶桑以逋誅 風谷遺甿 負盤桃而阻固"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다.

그러나 당대 문장에서 '이때'를 于時로 표현하지 于時日이라고 쓰는 경우는 전무했다. 또한 묘지명을 쓴 방식은 대구를 이루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 문장만 해당 방식으로 끊어 해석하는 것은 어색하다.

이와 비슷한 문장의 용례를 찾아봐도

佛說超日明三昧經

於時日王白佛言:“唯願大聖,枉屈尊神到宮小食,令諸導御虛空神天皆蒙大恩,聞深妙法悉發道意所度無量

여기서 얼핏보면 於時日이라고 해야할 것 같지만, 글의 전체 문장을 보면

於時日王白佛言。唯願大聖。枉屈尊神到宮小食。令諸 導御虛空神天皆蒙大恩。 聞深妙法悉發道意所度無量。 時佛默然已受其請。日王見佛已許就請。

"於時日 王白佛言"로 읽어서 "왕이 부처에게 말하길"이라고 보고 싶지만, 결국 "於時 日王白佛言"으로 읽어야 제대로 된 해석이 된다. 다음 문장에 "日王見佛已許就請"라고 나와서, 日王이 명사로 쓰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당시 한문 어느 표현에도 "於時日" 이라고 표현했던 곳은 없었으니 일본 측의 반박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8. 같이보기[편집]



[1] 현재 중국 낙양 2이공대학 문물연구실에서 보관중이다.[2] 《구당서》권83, <소정방 열전> "其大將祢植, 又將義慈來降" 《신당서》권111, <소(蘇)열전> "其將祢植與義慈降"[3] 《삼국사기》태종무열왕 7년(660년) 7월 18일조,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 自熊津城來降."[4] 《삼국사기》는 《구당서》를 참조[5] 왜에서 일본으로 국호가 바뀐 후 250년이 지나 《구당서》를 지었으니 틀릴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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