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레 드 발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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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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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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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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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위
100위
세르지 레기아니
프랑수아즈 돌토
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오노레 드 발자크[1]
Honoré de Balzac


파일:발자크.jpg

본명
오노레 발자크
Honoré Balzac
출생
1799년 5월 20일
프랑스 제1공화국 앵드르에루아르 투르
사망
1850년 8월 18일 (향년 51세)
프랑스 제2공화국 파리
국적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직업
소설가, 비평가, 기자, 인쇄업자
서명
파일:Honoré_de_Balzac_signature.png
사조
사실주의 문학
수훈
레지옹 도뇌르 훈장

[ 기타 정보 펼치기 · 접기 ]
학력
리세 샤를마뉴[1]
파리 대학교 (법학 / 학사)
가족
베르나르프랑수아 발자크[2] (아버지)
안샤를로트로르 살랑비에[3] (어머니)
로르 발자크[4] (여동생)
배우자
에벨레나 한스카 백작부인[5] (1850년 결혼)[6]
자녀
마리카롤린 뒤프레네[7] (딸)
묘지
프랑스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


[ 언어별 명칭 펼치기 · 접기 ]
한국어
오노레 드 발자크
일본어
オノレ・ド・バルザック
중국어
奥诺雷·德·巴尔扎克
독일어
Honoré de Balzac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폴란드어
러시아어
Оноре де Бальзак
그리스어
Ονορέ ντε Μπαλζάκ
아랍어
أونوريه دي بلزاك
히브리어
אונורה דה בלזק


1. 개요
2. 생애
3. 평가
5. 여담



1. 개요[편집]


프랑스의 소설가, 비평가, 기자, 그리고 인쇄업자다.

발자크는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인들의 삶을 다룬 인간극이라는 작품을 쓴 것으로 유명한데, 이는 무려 약 90여편[2]에 달하는 소설들을 하나의 시리즈 형태로 묶어놓은 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유럽 사실주의 문학의 창시자이자 '인간 재등장 기법'[3]을 최초로 사용해 일종의 유니버스를 확립한 대문호로 평가받는다.

발자크는 많은 예술인들과 지성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의 영향을 받은 인물로는 귀스타브 플로베르, 샤를 보들레르, 에밀 졸라, 마르셀 프루스트, 찰스 디킨스, 헨리 제임스와 같은 작가들, 폴 세잔,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화가들, 그리고 프랑수아 트뤼포, 자크 리베트와 같은 영화 감독들 등이 있다. 그리고 그는 빅토르 위고, 지그문트 프로이트,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발터 벤야민, 롤랑 바르트 등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작가이기도 했다.


2. 생애[편집]


1799년 5월 20일 프랑스 제1공화국투르 지방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베르나르 프랑수아는 나폴레옹 제정 시대의 투르 주둔군 병참 담당 군속이었고, 모친 안 샤를로트 로르 살랑비에는 파리 상인의 딸이었다. 부모의 나이차는 32살이나 되었고, 이들간에는 애정이 없었다. 본디 그가 태어나기 전 형(兄)인 루이 다니엘이 먼저 태어났으나 곧 사망했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가 이부동생[4] 앙리를 편애하여 크게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발자크는 유모에 의해 양육되었다.

1807년에 방돔(Vendôme)의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6년간 수학하였는데 교육 방식이 엄격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는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식으로 교육한답시고 재정지원을 안해줘서 곤란에 처했다. 결국, 그는 학교나 학우들에 적응하지 못했고, 걸핏하면 처벌을 받고 징벌방에 갇혀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건강이 나빠져 집으로 돌아온 뒤 1년간 요양하였다. 이후 1814년 9월에 투르 중등학교에 2달간 통학하다가 아버지가 파리의 군수품 조달 회사 책임자로 임명되어 일가가 파리로 정착. 발자크는 파리의 리세 샤를마뉴라는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마친다.

1816년에 소르본 법과대학에 입학하였고 1819년 1월에 법과대학을 졸업한다. 부모는 그가 공증인이 되기를 바랐으나 발자크는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부모에게 작가의 재능을 증명하기 위해 2년간의 유예기간을 얻어 파리의 비루한 쪽방에서 작품 저술에 몰두한다. 그러다가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의 생애에 대한 희곡 크롬웰(Cromwell)을 야심차게 저술하였는데 반응은 굉장히 나빴다. 한 대학 교수는 이것을 읽고 발자크의 모친에게 "아드님이 문학계에 발을 들이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야 합니다!"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데뷔작이 실패하고 결국 부모가 재정 지원도 중단하여 발자크는 본가로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는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나폴레옹 동상에 이런 낙서를 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칼로 이룬 것을 나는 펜으로 이룰 것이다!


1822년부터는 가명을 쓰면서 상업소설, 통속소설이라고 할 만한 분야에 손을 대어 여러 편의 작품을 썼다. 이때부터는 로르 드 베르니 부인과 교제하며 조력을 받는다. 아울러 그의 육체적 경험의 첫 번째 상대이다. 그녀는 발자크보다 22살이나 많았고 모친과 이름이 같았다. 1836년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이 관계는 계속된다. 1825년부터는 다브랑테스 공작부인과 사귀기 시작하는데, 발자크의 인생을 보면 이렇게 문학적 조언자, 물질적 후원자를 해주는 여인이 항상 곁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후 인쇄업과 출판업에 손을 대지만 전부 실패하고 많은 빚을 지게 된다. 그럼에도 쉼없이 많은 작품을 저술하였는데, 매일 집에 틀어박혀 수도복처럼 긴 옷을 입고 하루에 50잔 가량의 커피를 마시며 15시간씩 글을 썼다고 하며 그 빚 덕에 빚쟁이들이 들이닥치면 그대로 도망치곤 했다고 한다. 발자크는 20년동안 97권이라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이 과정에서 진상에 편법도 서슴치 않았는데 일단 닥치는데로 원고 청탁을 받아와서 과거에 써놓았던 글들을 대강 짜깁기해 초본을 만들었다. 이걸로 원고료를 받아 챙기고 여유가 생겼을 때 새로 써서 교정쇄로 냈다. 늘 일을 2번 해야 했기 때문에 인쇄소 직원들은 발자크를 굉장히 싫어했다.

1830년에 <마법의 가죽(La Peau de chagrin)>[5]을 발표하여 이때부터 작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다. 1832년부터는 훗날 결혼하는 한스카 부인과 교제하기 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1833년에 <시골 의사(Le Médecin de campagne) 외제니 그랑데(Eugénie Grandet)> 등을 발표. 여담으로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이 <외제니 그랑제>를 읽고 영감을 받아 저명한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을 쓰기도 했다. 1835년엔 <고리오 영감(Le Père Goriot)>, <서른 살 여인(La Femme de trente ans)> 등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자신의 작품을 하나의 체계속에 집대성하려는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1846년엔 한스카 부인이 임신하지만 사산하고 만다. 그리고 이 해에 ‘인간극’을 출간한다.

1850년이 3월에야 한스카 부인과 결혼을 한다. 그것도 그나마 그가 병약해진 모습을 보고 한스카 부인이 동정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5월에 파리로 돌아와 살림을 차리지만 이미 발자크는 와병중이었다.

1850년 8월 18일 며칠을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있던 그는 51세의 나이로 영면하고 만다. 같은 시대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그의 죽음에 대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그가 동의했건 동의하지 않았건 인간극이라는 이 방대하고 비범한 작품의 저자는 혁명적인 작가들의 강렬한 혈족에 속합니다"라는 조사(弔辭)를 남겼다.

발자크는 자신의 작품 전체를 사회를 이해하는 도구로 삼고자 했고 철학적 사변이 두드러지는 풍자적이며 사실주의적인 그의 저서들은 오늘날 그를 대문호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3. 평가[편집]


발자크는 가장 위대한 인물 중에서도 으뜸이었고, 최고 중의 최고였다. 그의 모든 작품들은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데, 그것은 살아 있고, 빛나며 심오하다.

빅토르 위고


발자크라는 이름은 미래에 우리 시대를 알리는 빛나는 흔적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빅토르 위고


그의 작품은 유쾌한 역설로 가득한 소설이다.

카를 마르크스


나는 모든 역사학자, 경제학자, 통계학자를 합친 것보다 발자크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발자크, 그는 강력한 인간이었으며,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를 철저하게 이해한 인간이었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나는 발자크가 뛰어난 관찰자로서 명성이 높다는 점에 매번 놀란다. 내게는 그의 가장 큰 장점은 예언자, 그것도 열정적인 예언자라는 데 있다고 여겨진다.

샤를 보들레르


발자크가 소설이라는 평범한 장르를 놀랍도록 흥미롭고 숭고한 경지로 끌어올린 것은 그가 거기에 자신의 모두를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샤를 보들레르


발자크는 방대한 세계를 하나의 작품으로 완벽하게 구현해 냈다.

헨리 제임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19세기란 발자크의 거대한 발명품이다.

오스카 와일드 #


30년 전부터 발자크를 읽고 또 읽으며, 언제나 거듭 경탄하게 된다. 발자크는 젊은 작가들에게 시적 가능성의 화신이었고, '문학의 가능성' 자체이기도 했다.

슈테판 츠바이크


발자크는 정확한 지형적 등고선을 그려 세계의 신화적 정체성을 확고히 세웠다. 파리는 그의 신화가 자란 곳이다.

발터 벤야민


발자크의 예술은 결점을 들춰낼수록 그 마술적 영향력이 늘어가기만 한다.

아르놀트 하우저


발자크는 인간의 모습을 한 소설, 소설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고 간 소설, 이를테면 소설의 결정판이다.

롤랑 바르트


도시연구자로서 '인간극'을 읽는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다. '인간극'은 한 도시에 대한, 그리고 그 소설이 아니었다면 계속 숨겨져 있을 역사적 지형에 관한 온갖 양상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데이비드 하비


발자크는 천재다. 아니, 천재라고 불릴만한 사람이다.

레프 톨스토이


발자크는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가다.

- 게오르크 루카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

- 서머싯 몸



4. 인간극[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인간극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여담[편집]


  • 본명은 '오노레 발자크'지만 평민 출신인 자신을 귀족처럼 보이고자 de를 이름 가운데에 넣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드―' 형식으로 된 성씨는 전형적인 귀족 가문 출신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다소 게걸스럽다 할 정도로 엄청난 식탐이 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을 매우 좋아해서 하루에 백 마리씩 먹어치웠다고 한다. 또한 도박광이어서 "도박은 병보다 치명적인 열정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게다가 발자크는 생계는 물론, 빚을 갚기 위한 돈을 벌기 위해[6] 잠에 들지 않게끔 커피, 그것도 독한 터키쉬 커피를 하루에 대략 30~60잔 정도 마시며 하루 15시간씩 글을 썼다고 한다.[7] 평생 동안 그가 마신 커피의 추정량은 약 3~5만 잔.[8]

  • 발자크가 활동했던 당시에는 글자 수에 따라 원고비를 지급했기에[9] 이렇게 마구 글을 쓴 노력 끝에 빚은 모두 갚았지만 결혼한 지 5달만에 사망했는데 연구에 따르면 커피를 하루에 규칙적으로 이 정도 양을 마시면 카페인 중독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실제로 발자크의 유력한 사망원인으로 카페인 중독이 꼽힌다.

  • 유언으로 "비앙숑을 불러줘! 그만이 나를 치료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 비앙숑은 그의 작품인 인간극에 등장하는 인물로, 직업은 의대 수련생이다.

  • 파리 8구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발자크 로(Rue Balzac)'가 있다. 샹젤리제 거리 124 - 포부르 생 토노레 로(rue du Faubourg-Saint-Honoré) 193을 잇는다.

  • 초등학교 중퇴생인 토마스 에디슨과 더불어 정규교육에서는 부진했던 '꼴찌 천재'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기숙학교 시절 고압적인 교육 방식을 따라가지 못해 주로 도서관에서 독서를 했다고 한다. 강압적인 교육방식이 오히려 그의 재능을 사장시킬 뻔했다. 그나마 독서라도 하지 않았으면 발자크는 사회에서 완전히 낙오되었을 것이다.

[1]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로망스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기 때문에 '드발자크'가 맞으나, '드 발자크'로 띄어 쓰는 것이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관용적 예외로 인정된다.[2] 미완성작까지 포함하면 100여편이 넘는다.[3] 이전 소설에 등장했던 인물이 다른 작품에서도 등장하는 방식이다.[4] 즉 어머니의 불륜으로 인한 사생아[5] 우리나라에서는 <나귀 가죽>으로 번역되기도 했다.[6] 발자크는 도박 외에도 인쇄소 등 여러 사업에 손을 댔다가 대부분 파산했다.[7] 하루의 태반을 자신만의 블렌딩을 만드는 데 소비했다고 전하는데, 발자크의 블렌딩은 레시피는 남아있지만 그가 사용했던 원두들이 지금은 멸종되어 구할 수 없다.[8] 아예 발자크가 "커피는 내 삶의 위대한 원동력"라고 말할 정도로 커피중독에 빠졌다.[9] 원래는 행수. 즉, 몇 줄이냐에 따라 고료를 매겼는데 고료는 비싸지만 성격은 게을렀던 알렉상드르 뒤마가 아무 의미없는 단답형 대화문으로 끝없이 행수를 늘려 원고를 받아먹는 편법을 자꾸 쓰는 바람에 글자 수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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