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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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Omri_Rex.jpg

이름
오므리 Omri
출생
기원전 940년
미상
사망
기원전 874년경
사마리아
소속
미상
재위년도
기원전 885년~기원전 874년
약 12년
국적
북이스라엘 왕국
자녀
아합
이전 국왕
시므리
다음 국왕
아합

유다 임금 아사 제삽십일년[1]

에 오므리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열두 해 동안 다스렸는데 (중략)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는데 그 이전의 어떤 임금보다도 더 악한 짓을 하였다. - 열왕기상 16장 23~25절


북이스라엘 왕국의 6대 국왕, 오므리 왕조(아합 왕조)의 시조.

북이스라엘의 군사령관이었으며 시므리가 왕위를 찬탈하자 군의 지지를 얻어 시므리와의 내전에서 승리해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또 다른 군의 실력자 디브니 역시 왕위에 오르고자 했고, 이후 4년에 걸쳐 내전이 벌어졌다. 4년 후 내전에서 이겨 디브니를 제거하고, 왕위를 공고히 했다. 왕위에 오른 뒤 세멜에게 2달란트를 주고 산을 사서 요새화시켰다. 그리고 그 성읍의 이름을 세멜의 이름을 따서 사마리아라 하고 북이스라엘 왕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거듭되는 왕위 쟁탈전은 오므리의 승리를 기점으로 일단 안정되었고 북이스라엘은 안정기에 접어든다. 이후 왕조 교체 후에도 주변국에서 북이스라엘을 오므리 가의 땅[2]이라고 부를 정도로 오므리가 북이스라엘에 미친 영향은 크다.[3]

참고로 성경에서의 평가는 아들과 마찬가지로 나쁜데 여로보암 1세부터 시므리까지의 평가는 전부 여로보암 1세와 똑같은데 오므리는 그들보다도 더 하느님의 눈에 거슬렸다고 되어 있다. 아무래도 이방인 공주인 이제벨이 아합의 아내가 된 일이나 이후 아합이 추진한 이방신 숭배 등이 오므리와 관련이 있는듯.

현대 성서비평학과 고대 이스라엘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비록 다윗솔로몬의 실존이 증명되면서 최소한 다윗-솔로몬 왕계의 존재가 사실이었음이 입증되기는 했으나, 최근 학계 동향에 따르면 다윗과 솔로몬이 직접 지배한 남부 지역, 즉 유대 지역은 북부의 이스라엘 지역에 비해 매우 뒤떨어졌고, 성서에서 나온 것과 같이 유대 지방의 주도로 이스라엘을 복속시켜 통일왕국을 이룩한 것은 (고고학적으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하며, 북부 이스라엘 지역이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왕조를 설립했을 때 오히려 북부에 예속된 지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성경 편집자들의 견해가 어떠하든, 오므리 왕조의 출현과 함께(오므리 886-875; 아합 875-853; 요람 852-842) 북이스라엘 왕국은 처음으로 완전하게 조직된 강력한 지방 국가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에 에프라임과 유다 산악지방에 군주들이 존재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 이스라엘과 유다의 임금들에 대한 성경의 계승 기사는(1열왕 12-15) 왕조 실록을 기초로 한 것 같다 - 오므리 왕조의 등극은 중대한 전환기를 형성한다. 이때부터 북왕국에는 주요 건축물들로 확인되는 발전된 형태의 제반 공사, 관료 조직, (전차부대 등) 평원에서의 전투를 위해 조직된 상비군대, 이웃 국가들과 맺은 상업적이며 정치적인 관계가 등장한다.
성경과 성경외적 자료들은 오므리 왕조의 이스라엘 왕국이 에프라임 산악지방의 이스라엘 지역을 넘어 가파르게 확장함으로써 북부로는 이즈르엘 골짜기에서 갈릴래아 북쪽까지, 동부로는 요르단 건너편의 주요 부분에 이르는 지방을 통제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주기 위해 규합된 것들이다. 유다는 아마도 북 왕국에 예속된 지방 정도였을 것이다.[4]

(중략)

모압에서 요르단 건너편의 남부까지 펼쳐졌던 오므리 왕조의 이스라엘 통치는 쉽게 확인된다. 메사 임금이 모압어로 현무암 위에 새긴 중요한 비문 하나가 840-83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문에서 요르단 건너편의 주군 메사는 오므리 후계자들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기술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이스라엘의 임금 오므리는 수많은 날 동안 모압을 억압했다. [모압의 신] 케모스가 자기 나라를 거슬러 진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그를 계승했으며, 그는 '나는 모압을 억압하리라'라고 말했다." 한편 성경 본문은 모압이 오므리에게 지급했던 조공을 언급하며(2열왕 3,4-5), 아합이 죽자 모압이 일으켰던 반란과(2열왕 1,1) 요람이 모압의 요르단 건녀편 지방을 손아귀에 넣기 위한 시도도 마찬가지다(2열왕 3).

아합 치세를 묘사한 성경 본문은 오므리 왕조의 이스라엘이, 페니키아 출신의 유명한 왕비 이세벨이 왕궁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증언해주듯이, 비교적 중요한 외교 망을 펼치는 국제적 왕국을 이루고 있었음을 밝혀준다. 몇몇 예언자 세계와 바알 숭배자들 사이의 - 특히 엘리야에 관한 기사군이 참고하고 있는 - 충돌과 논쟁은, 추정컨대 에프라임 산악지방의 전통적인 종교 지도계급과 오므리 왕조가 사마리아에 심어놓은 보다 '국제적인' 지도계급 사이의 알력을 증언하는 것 같다.

오므리 시대 동안 다마스쿠스의 아람 왕국은 이스라엘의 위협적인 적대 세력이었다. 이 두 왕국 사이의 무력 관계에 관한 정보들은 요람 시대(852-842)까지 이스라엘 왕국이 분명 우세했음을 일러준다. 텔 단의 아람 비문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이 옳다면, 아람 임금 하자엘에게서 비롯된 이 비문은 842년의 사건 이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람의 영토 일부를 잠식시켜 나갔음을 분명히 한다. "이스라엘 임금은 예전에 내 아버지의 땅을 침입해 들어왔다."

Jean-Daniel Macchi, "이스라엘의 역사. 기원에서 바빌론 지배 시대까지", Thomas Römer 외 공저, 《구약성경 입문》(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 제1권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9), 85-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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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므리가 27년인데 왜 4년의 간격이 벌어지냐 싶겠는데 이 4년간은 내전기였기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2] בת עמרי. 베트 오므리, 비트 훔리. 즉 "오므리 가"[3] 다만 이는 오므리 왕가를 도륙하고 왕위에 오른 예후가 주변국에는 자신이 오므리 왕가라고 뻥친 탓도 있을 것이다. 예후가 뻥친대로라면 오므리 왕조는 130여년간 유지된 셈인데 이는 북이스라엘 왕국 존속기간의 반이 넘어가는 기간이며 혼란스럽기 짝이 없던 북이스라엘이 그나마 안정되어있던 시기의 거의 전기간이다.[4] 이 말인 즉슨 오해하면 안되는게, 그렇다고 오므리가 남부 유다 지역까지 직접 통치했고 성경에 등장한 남유다 왕국의 왕계는 개뻥이다! 라는 식으로 이해해선 안된다. 남부 유다 왕국이 북부 오므리 왕조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복속되어 있었단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