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가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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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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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구) 미에 1구)
제39대
이토 츄지
기타카와 마사야스
가와사키 지로
오카다 가쓰야
나카이 히로시

제40대
오카다 가쓰야
사카구치 치카라
가와사키 지로
기타가와 마사야스
나카이 히로시

선거제도 개편

파일:shuugiin_logo.png 일본 중의원 (미에 3구)
선거제도 개편

제41~49대
오카다 가쓰야


현직

































일본국 제137·138대 외무대신
입헌민주당 제3대 간사장
오카다 가쓰야
岡田克也 | Okada Katsuya


파일:오카다 카츠야.png

출생
1953년 7월 14일 (70세)
미에현 욧카이치시
현직
제49대 중의원 의원
입헌민주당 간사장
재임기간
제137·138대 외무대신
2009년 9월 16일 ~ 2010년 9월 17일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저출산대책·새로운공공·남녀공동참획)
2012년 1월 13일 ~ 2012년 2월 10일
부총리 겸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행정쇄신)
2012년 1월 13일 ~ 2012년 12월 26일
서명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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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오카다 타쿠야[1]
형제자매
형 오카다 모토야[2]
동생 타카다 마사야[3]
배우자
배우자 오카다 타츠코[4]
자녀
슬하 2남 1녀
학력
욧카이치시립 주부니시소학교 (졸업)
욧카이치시립 주부중학교 (졸업)
오사카교육대학 부속고등학교 이케다교사 (졸업)
도쿄대학 (법학 / 학사)
신체
176cm
소속 정당

파벌
소승회 (회장)
지역구
(구) 미에 1구 → 미에 3구
의원선수
11 (중)
의원대수
39[A], 40[A], 41, 42, 43, 44, 45, 46, 47, 48, 49
경력
통상산업성 관료
국민의 목소리 정무조사회장
민정당 정책조사회장
민주당 대표
미에현 제3구 중의원
민주당 간사장
민주당 대표대행
민주당 정책조사회장
제137·138대 외무대신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 / 간 내각)
부총리 겸 내각부 특명담당대신 (노다 제1차 / 제2차 / 제3차 개조내각)
민진당 대표
민진당 최고고문
입헌민주당 상임고문
입헌민주당 종합선거대책본부장 대행
입헌민주당 간사장


1. 개요
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
2.2. 정치 입문 후
2.3. 입헌민주당 시절
3. 정치적 성향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여담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일본정치인. 2022년 기준 중의원 의원이자, 마지막 민주당 대표, 초대 민진당 대표이기도 했다. 지역구는 미에현 제3구. 현재는 입헌민주당의 간사장이다.


2. 생애[편집]



2.1. 정계 입문 이전[편집]


집안 대대로 미에현 욧카이치시에서 집안 대대로 상업을 하던 욧카이치 오카다 가문(四日市岡田家)이었고 그의 아버지 오카다 타쿠야는 이온그룹[1]의 창업주이다. 즉, 재벌집 아들로 태어났다. 도쿄대학 법학부를 졸업했고, 1976년 통상산업성에 입성하여 공무원으로 중소기업이나 석유문제 등을 담당했다. 1985년 미국 하버드 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에 파견돼 1년간 연구원으로 지냈다.


2.2. 정치 입문 후[편집]


1990년 39회 중원선에서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을 역임한 야마모토 유키오의 후계자로 (구) 미에현 제1구에 출마해 4등을 기록했지만 결국 당선했다.[2]

자민당에서는 원래 다케시타 노보루경세회에 속해있었으나 하타 쓰토무의 개혁포럼21로 이동했으며, 이후 "한 나라의 총리대신 자리가 정치자금을 얼마나 잘 모으는가로 결정되선 안된다."[3]라는 말을 남기고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하여 신생당 창당에 참여했다. 이후 신진당에 참여하였으나 오자와 이치로가 신진당을 해산하면서 카노 미치히코 전 농림수산대신을 따라 국민의 목소리(정무조사회장), 민정당(정책조사회장)을 거쳐 민주당에 참여했다.

2002년, 제5회 당대표 선거에서 간 나오토에게 패해 간사장에 취임한다. 이후 2004년, 제6,7회 민주당 대표에 취임하고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을 한 석 앞서면서 주목받지만 예상보다 빠른 중의원 해산(우정 해산)으로 인해 실시된 총선에서 참패하면서 대표직에서 물러난다.

2006년, 민주당 개조인사로 부대표에 선출된다.

2009년 젊은 의원들을 규합하며 다시 대표선거에 출마하지만 하토야마 유키오에게 밀렸다. 이 때 선거 직전 민주당 인사들이 오카다에게 해준 말이 미국에는 오바마, 일본에는 오카다가 있다고 해주기도 했다. 패배 직후 간사장에 취임했다. 이후 민주당 정권에서 외무대신, 간사장, 부총리 등을 거치다가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야당 인사가 되었다. 외무대신 시절 식민지 지배에 대해 다시 사죄하고 식민지배의 강제성폭력성을 인정하는 간 담화에 관여했다.

2014년 가이에다 반리의 대표 사임으로 인하여 대표 대행이 되었고 2015년 다시 민주당 대표선거에 출마하여 호소노 고시를 제치고 마지막 민주당 당대표로 당선되었다. 야당 재편파로 유신당과 통합을 주장하는 호소노 후보에 비해 야당 재편에 신중하고, 경험 많은 당대표가 이끌어 선명한 야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오카다의 주장이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나 미에현지사 선거에서 민주당이 독자 후보를 옹립하는 것을 포기하고 보수 성향의 스즈키 에이케이 후보가 당선되는 등 자신의 지역구에서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다는 평도 받았다.

2016년, 민주당이 유신당, 개혁결집회(일부)와 합당해서 민진당이 창당되었고, 첫 대표로 지명되었다. 임기는 2016년 9월 30일까지이다.

2016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신의 중의원 지역구가 있는 곳이자 정치 기반인 미에현에서 민진당 후보가 낙선하면 다음 당대표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배수진을 쳤다. 미에현은 이번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과 민진당의 명운을 건 격전지인 총 32곳의 1인 선거구 중 하나였는데, 선거 결과 민진당에서 출마한 미에현 후보가 끝내 겨우 당선되어 그나마 한숨 돌리게 되었다. 당시 아베 신조와 오카다 가쓰야의 대결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곳이었다. 하지만 개헌선인 2/3을 자민당, 공명당, 오사카 유신회 등 개헌세력이 차지하는 걸 막지 못해, 이에 오카다 대표에 대한 책임론이 부상하였고, 결국 7월 30일 불출마를 선언했다.

8월 2일 양원의원총회에서 9월 2일 대표 선거를 고시하고, 9월 15일 투표와 개표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선거 결과 렌호 대표대행이 차기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진당 당적을 유지한 채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원래는 희망의 당에서 출마하려 했으나 거부당했고 입헌민주당과는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투표 결과, 64.3%(147,255표)를 획득하며 압도적인 차이로 자유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0선째 이후 한동안 민진당 출신 무소속 회파를 유지하면서 호헌 연대에 참여했다.


2.3. 입헌민주당 시절[편집]


2020년 들어 입헌민주당국민민주당 간 합당 논의가 본격화되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무소속 회파를 이끌던 노다 요시히코 전 총리 등과 함께 입당 의사를 타진하여 본인의 무소속 회파를 이끌고 통합 신당이 된 입헌민주당으로 입당하였다.

이후 2021년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입헌민주당 소속으로 지역구에 출마해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어 11선 의원이 되었다.

2022년 7월에 열리는 제2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입헌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 대행을 맡게되었다.

당의 참원선 완패 이후, 양원의원총회이 열려 선거에 대한 총괄적인 평가가 있었는데, 이즈미 겐타 대표에 대한 재신임은 2023년에 있을 통일지방선거 이후로 연기하고, 당면한 지방선거에 앞서 당의 조직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집행부 인원의 교체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났다. 이에 따라 니시무라 지나미 간사장도 교체됐는데[4], 오카다 전 대표가 그 후임으로 취임했다.#

간사장으로서의 첫 시험 무대로 9월 11일에 열렸던 오키나와현지사 선거에서 다마키 데니 지사의 무난한 재선을 이끌어냈다. 선거를 앞두고 재선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있었지만 기시다 내각에 대한 지지율 하락과 보수 성향 후보 분열과 더불어 후텐마 기지 이전에 대한 의제 단일화를 통해 야당 공투 구도 부활을 이끌어내면서 이를 극복해냈다.

간사장 취임 이후인 2022년 하반기 아베 신조 피살 사건의 여파로 인한 통일교 게이트가 본격적으로 터지면서 기시다 총리의 지지율이 급락, 입헌민주당도 자칫 일본유신회에게 지지율을 역전당할뻔한 위기를 넘겼다. 오히려 하반기 국회에서는 유신회와 손잡고 이를 집중 추궁하면서 상상도 못했던 입헌민주당 - 일본유신회 연대가 구성되었다.

2023년 2월 26일에는 신년도 예산안 반대를 기치로 4월에 있을 제20회 통일지방선거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국민민주당과의 선거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3. 정치적 성향[편집]


아사히 신문 · 도쿄대 다니구치 연구실 공동 조사
2021년 중의원 선거 후보자 정보 - 오카다 가쓰야

이슈
질문
답변
개헌
헌법 개정
<colcolor#000> 중립

정부
사회복지 등 정부의 서비스가 나빠져도 예산이 들지 않는 작은 정부가 더 낫다.
조금 반대
일자리 확충
공공 사업을 통한 일자리 확충은 필요하다.
조금 반대
소비세
한시적이거나 영구적으로 소비세율을 낮춰야 한다.
중립
재정 지출
당장은 재정 재건을 위한 세출의 억제보다는 경기 부양을 위한 재정 투입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중립
격차 해소
A: 사회적 격차가 다소 있더라도 경제 경쟁력 향상을 우선해야 한다.
B: 경제 경쟁력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격차 시정을 우선해야 한다.
중립
제정 적자
A: 국채는 안정적으로 소화되고 있어 재정 적자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B: 재정적자는 위기 수준이기 때문에, 국채 발행을 억제해야 한다.
B
부자 증세
소득이나 자산이 많은 사람에 대한 과세를 강화해야 한다.
찬성
법인세 증세
기업들이 내는 법인세율을 인상해야 한다.
중립
산업
A. 국내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
B: 무역과 투자의 자유화를 추진해야 한다.
B

후쿠시마 오염수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처리수의 해양 방출은 어쩔 수 없다.
조금 반대
치안·인권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 정보 보호 및 개인의 권리가 제한되는 것은 당연하다.
조금 반대
동성혼
동성간의 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중립
동성애 법안
LGBT 등 성 소수자를 둘러싼 '이해 증진' 법안을 조속히 통과시켜야 한다.
찬성
외국인 노동
외국인 노동자의 수용을 추진해야 한다.
조금 찬성
탈원전
A: 지금 바로 원자력 발전을 폐지해야 한다.
B: 앞으로도 원자력 발전을 에너지 원의 하나로 유지해야 한다.
중립
부부별성
부부가 원하는 경우, 결혼 후에도 부부가 각각 혼전 성을 유지하는 것을 법률로서 인정해야 한다.
찬성

핵개발
비핵 3원칙[5] 을 견지해야 한다.
조금 찬성
국방
일본의 방위력은 더 강화해야 한다.
조금 찬성
선제 공격
타국으로부터의 공격이 예상되는 경우 선제 공격도 주저해서는 안 된다.
반대
대북관계
북한에 대해 대화보다 압력을 우선해야 한다.
조금 반대
후텐마 기지
오키나와현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 매립지 이전은 부득이한 일이다.
중립
미일안보조약
A: 위기 때 미국과의 협력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미일 안보조약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
B: 일본과 관계없는 전쟁에 말려들지 않도록 미일 안보조약 강화에 신중해야 한다.
중립
중국 위협론
A: 중국은 일본에 위협이 된다.
B:일본에 있어서 중국은 파트너이다.
중립

참의원 선거
A: 한 표 격차 시정을 위해서도 참의원 선거구의 합구는 허용돼야 한다.
B: 참의원 선거구의 합구를 해소하기 위해서도 일정 범위 내의 한 표 격차는 허용되어야 한다.
A

코로나19 대책
치료 체제의 확충, 급부금과 조성금의 확충, 치료약 및 백신 개발·확보
'조금'의 답변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자면(どちらかと言えば)'이며 '중립'은 '어느쪽도 아니다(どちらとも言えない)'이다.

전반적으로 입헌민주당 내의 중도좌파에 속하는 인사로, 안보관, 사회, 경제, 재정, 역사 문제에 있어서 굉장히 리버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인 주장으로는 아래와 같다.
  • 무라야마 담화를 답습해야 한다.
  • "아시아의 민주주의 국가는 일본과 한국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며 아시아를 축으로 한 관점을 중시한다.
  • 양안관계에 있어 대만의 독립을 반대한다.
  •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반대한다.
  • 동북아 3국의 비핵 3원칙[6]을 공유해야 한다.
  • '재일 한국인을 비롯한 영주외국인 주민의 법적 지위향상을 추진하는 의원연맹'의 회장으로서 북한을 제외한 특별영주권자 및 일반 영주권자의 통일지방선거 선거권을 주장한다.
  • 선택적 부부별성 도입을 찬성한다.

경제 재정 문제에 있어서는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를 표방하며 경제정책에선 정부의 역할을 인정하면서 리버럴한 면모를 많이 보여 민주당 내의 개혁파 중 한명으로 꼽힌다. 이 외에도 휘발유세의 잠정세율 폐지, 공공 사업 비용. 공무원 인건비 20%. 특별 회계 10% 삭감으로 세출 중단, 소득세 및 상속세의 최고세율 재검토를 포함한 누진과세 강화를 실행, 장래적인 소비세 인상의 논의, 적극적인 세원 인양으로 지방 주권을 추진하여 국가와 지방의 본연의 자세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 정치인 주체의 행정을 실현, "실질적인 기회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는 면모를 보인다.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90 - 1993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93
신생당 창당을 위한 탈당


1993 - 1994
창당


1994 - 1997
합당[7]

[[무소속|
무소속
]]

1997 - 1998
정당 해산

[[국민의 목소리|
국민의 목소리
]]

1998
창당


1998
합당[8]


1998 - 2016
합당


2016 - 2018
당명 변경[9]

[[무소속|
무소속
]]

2018 - 2020
희망의 당과의 합당을 반대하며 탈당

2020 -
창당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0
제3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구) 미에 1구

97,290 (13.8%)
당선 (4위)
초선
1993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2,215 (20.5%)
당선 (1위)
재선[10]
1996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미에 3구

108,690 (57.86%)
3선
2000
제4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7,868 (54.16%)
4선
2003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2,109 (62.05%)
5선
2005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0,954 (60.09%)
6선
2009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73,931 (72.20%)
7선
2012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6,679 (64.11%)
8선
2014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0,950 (64.03%)
9선
2017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
147,255 (64.34%)
10선
2021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4,688 (64.05%)
11선

정치 입문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낙선을 해 본 적이 없다.


6. 여담[편집]


  • 청렴하기로 유명해서[12] 별명은 'Mr.클린' 또는 '클린 오카다'. 게다가 자기관리가 투철해 '로봇 오카다' 라고 불린다. 거기다가 그 외모 때문에 '로보캅'이라고 불린다. 덕분에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리즈 시절에는 총리감 투표를 하면 항상 1,2위를 차지할 정도로 대중적 지지도가 높았다고 한다.#

  • 체질적으로 '파벌정치'를 싫어한다고 한다. 과거에 하토야마 그룹에 재적하고 있던 적도 있었지만 탈퇴 후에는 아래의 입헌민주당 합류까지 당내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민주당 시절 세력 중심의 정치를 해온 오자와 이치로와는 상극 관계였다. 다만, 2020년 9월 입헌민주당 합류 후에는 나카무라 기시로 등과 함께 소승회를 결성했기 때문에 현재는 회장으로서 파벌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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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미로는 독서, 영화감상 등이 있으며, 좋아하는 노래로는 GACKT의 네가 보고 싶어서가 있다. 또 위의 사진을 보면 10대 시절부터 개구리 인형을 모았다고 한다. 일본 밖으로 나갔을 때에도 싼 값에 어느 나라에나 있고, 또 선물로 무엇을 살 것인지 미리 정해 두면 고민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반드시 구입하도록 하고 있다. 도쿄의 의원회관 사무실에는 개구리 장식품이 대량으로 장식되어 있다. '개구리'는 두 가지 의미가 있고 하나는 '해외로 출장을 가도 무사히 아내나 자식들 곁으로 '돌아간다'는 생각, 다른 하나는 '정권을 '바꾼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오늘날에는 아시아 최대의 유통 그룹이 된 이온그룹이지만, 오카다의 소년기는 욧카이치 오카다가(오카다야 포목점)의 개인 장사를 발전시켰다. 아버지가 창업한 쟈스코가 미에현을 중심으로 한 지역 기업으로부터 칸사이 지방으로 진출해, 한층 더 일본 전국으로 확대해 가는 과정이며, 아버지의 고생하는 모습이 인상에 남아 있다고 한다.

  • 고교 시절에 진학하고 있던 오사카 교육 대학 부속 고등학교 이케다 교사에서, 당시의 학원 분쟁에 휘말려 동교에는 후에 헤이그 사건을 일으키는 니시카와 준등이 중심이 되어 「학원 봉쇄」에 선두에 서 있었다.대다수 학생이 학원 봉쇄에 찬성했지만 오카다는 극소수 봉쇄 반대파의 입장으로 돌아서 고교생은 장래의 일본을 짊어지기 위해 지금은 공부해야 한다.정치 문제를 학교에 가져오는 것이 본말이 전도된 것 아니냐며 물러서지 않았다고 한다.

  • 출신지인 욧카이치시 주부지구는 욧카이치 공해 오염지구로 욧카이치 천식에 의한 희생자와 환자가 다수 있었다. 욧카이치 오카다 가문은 긴테쓰 나고야 선 서쪽 호리키에 집이 있어 오카다 가문은 부자이고 음식이 좋아 오카다는 체격이 좋은 건강체가 됐지만 오카다 가쓰야 역시 가벼운 기침이 나왔다고 한다.

  • 주부니시소학교와 주부중학교의 동급생(쇼와 28년도생)으로부터 <오카라 카츠야>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 대학 시절에는 공부보다 독서에 열중했다. 대학의 교양 과정에서는 사토 세이자부로의 명물 세미나에 소속되어 사회과학의 고전을 일주일에 몇 권씩 읽었다.당시 충격을 받은 책으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꼽았고 삼형제 중에서도 이반에게 공감을 느꼈다고 한다.

  • 존경하는 역사상의 인물로 오다 노부나가를 꼽았으며, 오카다 曰 "일본 역사상 최고의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변혁기·격동기에, 구래의 생각에 구애받지 않고 신념에 근거해 행동했다. 금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개혁정신과 실행력을 본받고 싶다. 방식은 거칠었지만 그 시절은 그것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 아내 타츠코는 무라카미 수군의 후예 가문으로서, 자민당의 무라카미 세이이치로[13] 의원의 여동생이다. 아버지 무라카미 신지로는 53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고 무라카미 가문의 가훈은 국가 대사를 위해서는 부모 형제의 시체를 넘어서라도 싸우라였다. 직업은 의사이다. 일본 최초의 '여의학교'인 도쿄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한 신경내과의사다. 오카다는 사법시험을 목표로 「도쿄대학 법률상담소」라고 하는 서클에 소속되어 있었다. 일본사 연호 암기에 서툰 오카다는 법령 기억도 서툴렀고, 오카다는 사법시험에 패배했다.이 도쿄대학 법률상담소 동아리에 있던 무라카미 세이이치로라는 친구가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와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했다. 중의원 의원총선거 선거 응원의 무라카미 후보의 지원 그룹에 여동생 타츠코가 있었다. 아직 도쿄여대의 여학생이었지만 이때만큼은 솔직한 오카다의 행동은 날렵했다. 타츠코의 형이 지역구인 에히메현의 에히메 2구 선거 활동에 묶여 있는 사이 연인 사이로 데이트를 거듭했다. 오카다는 자신의 여동생과의 교제가 무라카미 세이이치로의 귀에 들어갔을 때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 대신 키운 여동생에게 손을 대라며 그가 격노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 부부로, 2남 1녀의 세 자녀들이 욧카이치 시립 중부 서초등학교 운동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헤이세이 초기에 장녀(1978년생)의 유괴 미수사건이 있어, 욧카이치 미나미경찰서에 의한 가족에 대한 경비가 강화되었다.

  • 정치인이 된 이유는 국가 국민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기보다는 존 F. 케네디미국 대통령이 된 것과 같고, 아버지인 오카다 타쿠야가 품은 야망인 욧카이치 오카다 가문이 번영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명예를 얻을 필요가 있으며, 아버지로부터 기대를 받은 둘째 아들인 본인이 정치인이 되었다. 현지의 욧카이치시에서는 1965년대에 욧카이치 시장이었던 쿠키 키쿠오와 같이 「욧카이치의 케네디」라고 평가되고 있다.

  • 정책통으로서 알려져 환경으로부터 경제, 안전 보장까지 폭넓은 분야에 정통하다.

  • 세습 정치인으로서[14] 국회의원이 지반을 승계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강력한 지반이 있으면서도 본인의 선거구인 미에 3구를 자녀 등 혈연자에게 세습하지 않을 방침이다. 고이즈미 가문 4대가 세습 정치인으로 강력한 지반이 있는 가나가와 11구의 고이즈미 신지로 중의원 의원과 마찬가지로 고이즈미 신지로와 오카다 가쓰야는 가문의 힘으로 강력한 지반이 있고 소선거구 제도의 혜택을 받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289개인 소선거구 가운데 선거전에 고생하지 않는 전국 유수의 낙승으로 당선되는 무풍선거로 치러지고 있다.

  • 민주당 당대표 시절에는 견실한 수완으로 보텀업[15]을 통한 만장일치주의 당 운영을 했다. 한편, 당내에서 의견이 갈렸을 경우에는 대표 보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 연설 내용이 세밀해 오시타 에이지의 저서에 따르면 민주당 후지타 유키히사 전 중의원 의원이 유권자들에게 고이즈미 총리는 생명보험 캐치프레이즈를 제시했지만 오카다 대표는 약관을 읽고 있다는 야유를 받았다고 했다.

  • 민주당 정권이 성립한 후의 여당 시대에 이르러서는 공무의 사정과 경비의 중요함으로 횟수가 적어졌지만, 야당 시대부터 선거 활동으로서 정기적으로 몇 번이나 본인 지역구인 미에 3구(쿠와나시·이나베시·욧카이치 북부 「토미타 지구」·코모노쵸의 4곳을 중점)에 좌담회라고 불리는 대화 집회를 실시하고 있다.

  • 오카다 가문은 미에 2구[16] 출신으로 출신지에서 고려할 때 미에 2구[17]에서 입후보하는 것이 정당하고 출마계획도 있었지만 스즈카시를 지반으로 하고 있던 기타가와 마사야스 미에현지사의 후계자가 된 나카가와 마사하루와의 조정으로 결국 미에 3구[18]에서 입후보하기로 했다.쿠와나시 출신의 야마모토 유키오로부터 쿠와나시의 지반과, 야마테 미츠오[19] → 타나카 사토루 前 미에현지사가 지반으로 하고 있던 오카다가의 출신지인 욧카이치시를 오카다가 지반으로서 계승했다.

  • 미에 3구에서는 대립 후보 히라타 고이치가 욧카이치시 북부의 토미타 지구·토미스하라 지구를 지반으로 하고 있어 인근의 미에군 가와고에초에 오카다 가쓰야 선거 사무소를 설치하고 욧카이치시 북부를 중심으로 선거 활동을 하고 있다. 욧카이치시 북부에서는 오카다야 포목점을 전신으로 하는 슈퍼 경영자인 욧카이치 오카다 가문과 치요다 건재를 전신으로 하는 건재점 히라타 가문이 벼락부자로 된 욧카이치 오카다 가문과 욧카이치 토미스하라 히라타 가문이 라이벌 관계이다.

  • 미에 3구에서는 서로 국회의원으로서 결여되어 있다고 유권자들이 보고 있는 결점을 극복하기 위해 오카다 가쓰야와 히라타 고이치 양 진영은 서민적 정치인이라고 어필하는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 세습 의원이나 부자 정치인이 많이 다녔던 사립학교 출신이 아니라 공립학교 출신임을 알리는 것을 선거 전술로 삼았다. 오카다는 자신의 경력이 욧카이치 시립인 주부니시소학교, 주부중학교를 졸업한 후 오사카교육대학 부속고등학교 이케다 교사와 도쿄대학을 졸업한 학력이며 공립소학교, 공립중학교, 국립고등학교, 국립대학 출신으로 일반적인 빈곤가정과 같은 진학처로 아버지나 형과 달리 자신은 부자가 아닌 서민적인 생활을 하고 있음을 어필했는데, 오카다는 욧카이치시 중부지구 출신임을, 히라타 고이치는 욧카이치시 도미스하라 지구 출신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오카다와 히라타 고이치는 서로 지연을 소중히 여기고 있음을 어필하는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

  • 대립 후보 히라타 고이치는 미에현립 욧카이치 고등학교 동문회의 지연과 미에현의 현립 고등학교에서 톱 클래스의 역사와 대학 진학 실적이 있는 현지(욧카이치시) 명문고의 미에현립 욧카이치 고등학교 동창회의 지원을 중시하고 있어 지연과 학벌을 선거 활동의 전술로 하고 있었다.

  • 오자와 이치로 대표의 선거 전술로서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오카다 가쓰야가 미에현 제5구(미에현 남부의 이세시·오와세시·도바시·시마시·구마노시·와타카이군·기타무로군·남모로군)에 입후보하는 선거구의 안장 전환 작전이 부상했다. 2010년 주간 대중 등의 주간지 보도에 따르면 히라타 고이치 의원을 지지하는 토미스하라 지구의 자민당 관계자로부터 증언이 있었으며, 오카다 가쓰야의 사설비서는 미에 3구에서 이온그룹의 조직력과 민주당의 강력한 지반으로 소선거구제에서의 낙승 분위기가 있어 긴장감이 없고 느슨해졌으며, 제45회 중원선 기간 중 욧카이치시 마츠바라쵸의 만화방 주차장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고 보도되었다. 중선거구제 시대는 오카다 가쓰야의 자신의 후원회와 친정 이온그룹이 지원 조직이었지만, 소선거구제 시대가 되면서, 자신의 조직에 덧붙여 일본사회당 출신의 이토 츄지의 정보노련·미에현의 일본 교직원조합·NTT 노동조합표·좌익표와 민사당 출신의 나카이 히로시의 전일본 노동총동맹, 속칭 동맹 노조표가 민주당 및 오카다 가쓰야를 지지하는 지원 조직이 되고 있다.

  • 2004년 당시 오카다와 민주당이 비판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근무실태가 없는 부동산 회사에 관한 프로필 기재 문제와 관련해 자신의 통상산업성[20] 근무시절 오카다가의 자산관리회사 이사를 맡았던 점, 자신의 프로필에 그 사실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주간문춘 취재 결과 밝혀졌으며 이것이 공무원의 겸직금지 규정 위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며 대표 정례회견에서 해명, 사과하고 있다. 이날 회견에서 스스로 추궁해 온 고이즈미 문제와 비교한 질문에 대해 설명의 장을 마련했다는 이유로 격앙된 고이즈미와 함께 논의되는 것은 극히 본의 아니라는 취지의 변명을 했다. 아베 신조 당시 자민당 간사장은 오카다의 국가공무원법 위반에 대해 오카다 씨는 연금 문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입시학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강도 높게 비판했다.자신이 명백히 법령을 어겼다면 큰 책임문제 아니겠느냐고 비판했다. 또 자신의 해명이 언론 취재까지 이뤄지지 않아 결과적으로 공소시효 이후까지 시간이 걸린 점, 자신의 프로필에 공무원법 위반 시 근무처 기재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경력을 어디까지 쓸지는 본인에게 맡겨져 있다고 주장하며 숨긴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 이 주장으로 자신이 추궁해 온 고이즈미 문제에 대해 스스로 보증하게 되면서 이 문제는 사라졌고 겸직금지 규정 위반과 해명에 이르는 일련의 경위에 대해 당시 국가공무원법을 몰랐다는 오카다의 설명에 대해 오카다가 법대 출신이라는 점 등을 들어 갑자기 믿기 어렵다는 주간문춘이 비판하고 있다.

  •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4시 반에 알람시계를 세웠지만 1시간을 늦춰 인생 처음으로 늦잠을 잤다. 다음날도 늦잠을 자버려 이상하다고 생각해 시계를 조사해보니 망가져 있었다고 한다. 그 시계는 초선 이래 20년 가까이 계속 사용하던 것이었다.

  • 업계 정치헌금뿐 아니라 지지자들의 선물은 일절 받지 않고 친필 예장을 첨부해 돌려보낸다고 하지만 선물로 온 왕새우를 받지 못해 썩어 버리거나 생화 선물도 거부해 시들어버린 일도 있었다. 또 오카다와 마찬가지로 선물은 일절 받지 않는 주의를 가진 사람은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있다.

  • 자민당 시절, 총무회에서 가메이 시즈카와 맞붙은 싸움을 해서 신문에 실린 적이 있다.

  • 오자와 이치로는 초선 당시 간사장이자 이후 신진당 해산 당시까지 행동을 같이하며 스스로 '정치 세계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후에는 오자와의 민주당 입성 후에도 미묘한 관계로, 「제대로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다」라고 여겨진다. 2010년 오자와의 국회 유치를 둘러싸고, 오카다가 간사장, 오자와가 평의원과 입장이 역전되어 있었지만, 오자와와의 회담을 하는 데도 고생하는 모습이었다.

  • 의원 재직 당시 오오하시 교센이 마이니치 신문 인터뷰에서 오카다의 진지함을 의회가 끝나면 바로 도서관이라고 형용했다. 오오하시 방식의 비유였지만, 오오하시에 의하면, 훗날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오카다가 「저는 의회 후 도서관에 간 적이 없습니다」라고 진지하게 반박했다고 한다.

  • 시간 엄수에 민감해 2011년 3월 11일에 발생한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에서도 정기 개최하기로 한 실무자 회합에 대해 논의 내용보다 개최 시간(1시간)에 강한 고집을 보여 실제로 제1회 실무자 회합에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 문제로 논의가 진행되는 중에 '시간도 없으니 물자 수송 건으로 옮깁시다'고 발언하여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의 논의를 중단하고 시작부터 정확히 1시간 후에 종료 선언하고 회합 자체를 중단했다.

  • AERA는 성실한 성격이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어 거리 연설에서는 한류 스타와 같은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다고 기사화했다고 한다.

  • 일본 정치인 중에서 친한적인 인사로 분류된다. 방한 당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과거사 문제에 대해 사과한 적도 있다. 그리고 일본 국회 내에서도 재일 한국인을 비롯한 영주 외국인 주민의 법적 지위 향상을 추진하는 의원 연맹 회장을 맡고 있다.

  • 2017년 48회 중원선 이후 소속당인 민진당과 희망의 당을 어떻게든 엮어 정계개편을 도모하는 듯 보이지만 과연 그의 미래나 일본 야권의 앞날로 봤을때 잘 될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2018년 5월 7일 민진당과 희망의 당이 국민민주당으로 합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민주당에 합류하지 않았다.[21]

  • 신장 176cm로, 동년배인 1955년생 일본 남성의 평균 신장이 162cm임을 감안하면 상당한 장신이다.


7. 둘러보기[편집]












[1] 한국에서는 미니스톱으로 잘 알려져 있다.[2] 중선거구제 시절이었고, (구) 미에 1구의 의원 정수가 5석이라서 가능했다.[3] 다케시타 노보루는 정치자금 모으기의 진수를 보여준 정치인이었고 결국 리크루트 사건으로 퇴진했다.[4] 정확히는 대표대행으로 자리를 옮겼다.[5]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6]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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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개혁연합|
자유개혁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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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신설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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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신설 합당
[9] 당적과는 별개로 무소속 출마, 2017년부터는 국회에서 무소속으로 활동.[10]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마지막 중선거구제.[11] 당적을 가진채 무소속 출마했다.[12] 재벌집안 출신이라 굳이 더러운 돈을 받을 필요가 없다. 한국으로 치면 정몽준과 비슷한 케이스다.[13] 에히메현 제2구의 중의원 의원이다.[14] 엄밀히 말하면 오카다 가쓰야의 조상 중에 정치인이 있기는 했지만 본인은 기업인 자녀이지, 세습 정치인이 아니다.[15] 실무진이 낸 의견을 토대로 윗사람이 결정하는 것을 가리킨다.[16] 욧카이치시 중부지구.[17] 욧카이치시 남부·스즈카시·가메야마시[18] 욧카이치시 북부·쿠와나시·외가메시·이나베시 등[19] 토요 방적 출신의 욧카이치시의 정치가이다.[20]경제산업성[21] 최소한 그는 민진당과 희망의 당이 합류한다고 해도 국민들의 지지를 못 받을 것과 입헌민주당만이 국민들의 지지를 어느 정도 받고 있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