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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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칸의 역임 직책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올리버 비어호프
(1998~2000)

올리버 칸
(2000~2004)


미하엘 발락
(2004~2010)


FC 바이에른 뮌헨 주장

슈테판 에펜베르크
(1999~2002)

올리버 칸
(2002~2008)


마르크 판보멀
(2008~2011)


올리버 칸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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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파일:IFFHS골키퍼.png

1999 · 2001 · 2002
파일:골든볼.png

2002 FIFA 월드컵 골든볼

파일:야신상.png

2002 FIFA 월드컵 야신상



베스트팀
파일:European_Sports_Media_logo.png

1990-00 · 2000-01
파일:Kicker 로고.svg

1996-97 · 2001-02
파일: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심볼.svg





2001 Ballond'or
수상
마이클 오언
2위
라울 곤살레스
3위
올리버 칸
2002 Ballond'or
수상
호나우두
2위
호베르투 카를루스
3위
올리버 칸
2002 FIFA 올해의 선수
수상
호나우두
2위
올리버 칸
3위
지네딘 지단




올리버 칸의 기타 정보







독일의 축구인


파일:35e6513a77d106467802446954a94982.jpg

이름
올리버 칸
Oliver Kahn
본명
올리버 롤프 칸
Oliver Rolf Kahn
출생
1969년 6월 15일 (54세)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카를스루에
국적
[[독일|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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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학력
헬름홀츠 김나지움 (졸업)
하겐 원격 대학 (경제학 / 수료)
시버그 캐슬 대학교 (경영학 / MBA)[1]
종교
가톨릭
신체
188cm|체중 100kg[2]
직업
축구 선수 (골키퍼 / 은퇴)
축구 경영인
등번호
독일 대표팀
1번[3]
FC 바이에른 뮌헨
소속
선수
카를스루어 SC (1975~1987 / 유스)
카를스루어 SC (1987~1994)
FC 바이에른 뮌헨 (1994~2008)
경영
FC 바이에른 뮌헨 (2020~2023 / 보드진)
FC 바이에른 뮌헨 (2021~2023 / 의장)
국가대표
86경기 (독일 / 1994~2006)

1. 개요
3. 플레이 스타일
4. 행정가 경력
5. 평가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7. 어록
8. 여담



1. 개요[편집]


독일축구 선수 출신 축구 경영인. 포지션은 골키퍼였다.

선수 시절 바이에른 뮌헨에서 14년간 활약하며 분데스리가 8회 우승과 챔피언스 리그 1회 우승에 기여했고, 독일 대표팀에서는 2002 월드컵 준우승을 주도하였다. 또한 FIFA 올해의 선수 포디움에 1회, 발롱도르 포디움에 2회에 선정되고, 월드컵 골든볼[4]야신상을 1회,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를 2회, UEFA 올해의 골키퍼를 4회 수상하는 등 화려한 커리어를 자랑한다.


2. 선수 경력[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올리버 칸/선수 경력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가히 '짐승'[5]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반사 신경을 활용한 선방, 박스 장악력, 최후방에서 아군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리더십, 그리고 불 같은 성격과는 반대로 필드 위 페널티 박스 안에서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판단력과 무시무시한 카리스마까지 갖춘 선수였다.

골키퍼로서도 적당한 키에 공중볼 처리도 아주 능했으며 중거리 슛도 잘 막아냈다. 특히 1:1 상황에서 굉장한 능력을 보여 줬는데 그의 침착함과 민첩성이 이를 뒷받침했을 것이다. 또 반사 신경도 매우 뛰어나서 매번 탄성이 절로 나오는 슈퍼 세이브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공이 애매하게 오는 상황에서도 서슴없이 몸을 날려서 막아내는 투지도 겸비하고 있었다. 칸의 신체적 최전성기 시절엔 그야말로 난공불락과 같은 포스를 보였는데 1999년 그 피터 슈마이켈을 제치고 UEFA 올해의 골키퍼에도 선정되었다.

수비리딩도 뛰어났다. 골키퍼로서 선방능력만큼 중요한게 바로 수비리딩인데, 2000년대 초 독일 축구의 암흑기[6]와 더불어 에펜베르크 시대 종결 이 후 바이언의 수비진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음에도[7] 클럽과 대표팀의 주장까지 역임해 수비라인을 진두지휘 했다. 2000년대 초반 서른 줄을 넘기며 칸의 운동신경이 하락해 이전같은 슈퍼세이브는 줄어들었음에도 불혹에 가까운 나이까지 바이에른의 최후방을 사수할 수 있었던 이유다.

약점은 빌드업 능력인데, 칸의 최전성기 시절에는 아직까진 골키퍼의 빌드업이 그리 대두되는 상황이 아니였기에 문제 없었다.[8] 게다가 최전성기 시절엔 슈테판 에펜베르크, 메멧 숄 등 클럽에선 데드볼 스페셜리스트들이 즐비했고 국대에서도 비록 암흑기였으나 크리스티안 치게가 후방 빌드업에 능해 칸의 빌드업 약점은 문제될게 없었다. 하지만 2002년 이후 30대 중반 신체하락과 더불어 이러한 약점이 부각되었는데 클럽에서는 데드볼 리스트인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떠나고, 당시 바이언의 수비라인의 후방 빌드업이 부족한 편이여서 리그와 달리 챔스에서는 2000-21 시즌 우승 이 후 2009-10 시즌 준우승을 거두기까지 4강에 들어서지 못했다. 국대에서도 크리스티안 치게의 은퇴와 옌스 노보트니의 장기 부상으로 필립 람페어 메르테자커가 나오기까지 클럽과 독일 대표팀의 모든 빌드업은 사실상 미하엘 발락 1명의 몰빵이였다. 이는 2000년대 초반 이 후 후방 빌드업 능력이 부각되는 시점[9]에 칸의 빌드업 약점이 노출되었는데 이는 칸의 문제가 아닌 당시 독일 축구의 인재풀 고갈로 인해 약점이 부각된 것이다.[10] 칸은 골킥이나 패스를 할때 항상 오른발로 차고 왼발은 못쓰는 수준이었다. 오죽하면 피파 온라인 4에서 약발 능력치가 1로 되어 있을 정도다.


4. 행정가 경력[편집]


5년 계약을 맺으며 2020년 1월 1일부터 이사회의 멤버로 활동 할 예정이다.

2021년 12월 31일 임기가 끝나는 루메니게의 후임으로 FC 바이에른 뮌헨 A.G의 이사장으로 취임할 예정이다.

보드진에 합류한 이후로 뮌헨 경기를 루메니게와 함께 직관하러 다니고 있다.[11]

2020년 2월 29일 호펜하임전에서 뮌헨 원정팬들이 호펜하임의 구단주를 모욕하는 걸개를 보이자 본인이 직접 관중석으로 걸어가 팬들에게 자제해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선수 시절의 포스가 여전하다.[12]

10월 1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앞으로 바이에른 뮌헨의 경쟁자는 레알 마드리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같은 클럽이 아닌 아마존, 넷플릭스와 같은 미디어 엔터테인먼트라며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

현재 보드진으로 올라와서 한지 플릭 감독과 토마스 뮐러의 재계약에 보탬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 티아고와 재계약에 근접해있고, 재계약 협상이 시원찮던 노이어와도 긍정적인 대화를 통해 풀고 있다고 한다. 결국 노이어도 재계약을 체결하며 칸은 부임 이후 감독, 주장, 부주장과의 재계약을 모두 성공시키는 행보를 보였다.

칸이 팀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부임한지 반 년 만에 팀이 트레블을 달성해버리며 그 역시 칭찬을 듣고 있다.

2021년 6월 1일자 루메니게가 CEO 자리에서 사임하고 칸이 그 뒤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적시장에서의 미적지근한 행보와 현재 스쿼드에 만족한다는 망언으로 욕을 시원하게 잡수고 계신다.[13]

21-22 시즌 챔피언스 리그 조추첨 현장에 바이에른 뮌헨 보드진 대표로 갔었다. 바이에른은 E조에서 FC 바르셀로나, 벤피카, 디나모 키이우와 같은 조가 되었다.

21-22 시즌이 종료된 현재 칸을 포함한 보드진 전체가 욕을 엄청 먹고 있다. 감독과 단장 간의 정치 싸움을 방관한 것은 물론이요 일부 선수들과의 재계약 협상이 지지부진하여 헐값이나 공짜로 매각해야 하는 상황까지 초래한 게 가장 큰 원인이다. 특히 니클라스 쥘레를 우승 경쟁팀인 도르트문트로 공짜로 보내 팬들의 뒷목을 잡게 했고, 대체불가의 에이스인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의 재계약 협상도 쓸데없이 끌다가 결국 환멸이 난 레비가 재계약은 없다고 통보하자 그제서야 부려부랴 대체자를 찾는, 말 그대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게다가 그렇게 생고생(?)해서 바꿔놓은 팀이 거둔 시즌 성적이 실망스럽자[14] 팬들의 민심은 이미 바닥을 뚫고 있다. 칸 뿐만 아니라 헤르베르트 하이너, 그리고 하산 살리하미지치가 모두 책임이 있는 상황이다.

다만 레반도프스키건은 레반도프스키가 에이전트 자하비를 통한 언플과 도를 넘는 인터뷰, 파브리지오 로마노에 의하면 바르셀로나와 이미 3월에 구두합의를 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보드진에게 손을 들어주는 팬들이 많아졌고, 이적시장에서 사디오 마네, 마테이스 더리흐트, 라이언 흐라번베르흐, 누사이르 마즈라위 등을 영입하며 어느정도 민심을 회복하였다.

2022년 11월 7일 독일 비즈니스 협회(DDW)로 부터 2022년 올해의 혁신가 상을 수상하였다.

카타르 월드컵에서 독일이 2연속 조별 리그 탈락을 기록하면서 DFB가 칸을 포함한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마티아스 자머, 루디 푈러, 올리버 민츨라프 5명으로 태스크 포스를 구성하였다. 스카이스포츠에 의하면 유로2024 및 플릭과 국대, DFB에게 조언과 지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22-23 시즌 도중 트레블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율리안 나겔스만을 경질하고 토마스 투헬을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그러나 DFB-포칼에서는 프라이푸르크에게 져서 탈락하고,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맨체스터 시티에게 합계 1-4로 지고 탈락하자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게다가 분데스리가 선두 자리도 도르트문트에게 내주며 투헬 선임 효과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결국 플로리안 플레텐베르크 기자 왈 그의 위치가 점차 위태로워지고 있다고 한다.

결국 2023년 5월 28일, 바이에른 뮌헨은 시즌 최종전에서 역전우승에 성공하며 분데스리가 11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지만, 뮌헨의 이사진은 올리버 칸과 단장인 하산 살리하미지치를 해고하였다고 한다.


5. 평가[편집]


제프 마이어, 마누엘 노이어 다음으로 평가 받는 FC 바이에른 뮌헨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이자 페테르 슈마이켈잔루이지 부폰 사이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세계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 받는다.

클럽 커리어는 뮌헨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면서 분데스리가 8회 우승, DFB-포칼 6회 우승, UEFA 챔피언스 리그 1회 우승과 1회 준우승을 기록하는데 크게 공헌하면서 뮌헨을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유럽의 대표 강팀으로 만드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2000-01 시즌은 리그에서는 4분 챔피언이라는 기적적인 우승을 경험하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결승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3개의 PK를 막아내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팀의 통산 4번째 챔스 우승을 안겨준다.

국가대표 커리어는 녹슨 전차 군단이라 불린 암흑기의 독일 국대를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하드 캐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조국을 준우승에 안겨주고, 칸 본인은 무려 대회 야신상과 골든볼을 동시에 수상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준다.

개인 커리어도 화려한데 발롱도르에서는 2001년과 2002년 모두 3위를 차지하면서, 골키퍼로서는 흔치 않게 2년 연속 포디움에 선정되었고, FIFA 올해의 선수상도 2002년 2위를 기록한다. 또한 월드컵에서도 대회 야신상 수상과 동시에 골키퍼로서는 사상 최초로 골든볼도 수상한다. 또한 UEFA 올해의 골키퍼상도 1999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4회 연속 수상을 하고, IFFHS 올해의 골키퍼에도 총 3회 선정되었다.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도 2000년과 2001년 2년 연속으로 수상한다. 또한 ESM 올해의 팀은 총 2회 선정되고, Kicker 올해의 팀도 2회 선정되고, 2002 한일 월드컵에서도 대회 올스타팀에 선정되었다.

이런 칸의 뮌헨과 독일 국대에서의 엄청난 활약상은 그를 뮌헨 명예의 전당과 독일 축구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게 만들었다.

다만 행정가로서의 평가는 다소 아쉬운 편인데, 상술했듯 22/23 시즌의 절정기에 충동적으로 율리안 나겔스만을 경질하고 토마스 투헬을 선임하는 도박수가 대실패로 돌아가자 시즌이 끝나자마자 해임되었다.

6. 기록[편집]



6.1. 대회 기록[편집]





6.2. 개인 수상[편집]




7. 어록[편집]


"스포츠맨이라면 지는 법도 배워야 한다. 비록 후보로 벤치에 앉을지라도 월드컵에 출전하여 나의 경험으로 후배들에게 힘이 되겠다."

- 자국에서 열린 2006년 월드컵에서 결국 경쟁에 밀려 세컨드 키퍼로 이름을 올렸지만 프로정신을 지키겠다며 언급했던 말


패자전은 없다.

Es gibt keinen Trost


"실점은 수비수 탓이다."


"내가 막는 골대에는 무슨 이유라도 골이 들어갈 수 없다."[15]


골이 아닌 유효슈팅 개수는 의미없다. 어차피 내가 다 막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서 사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이 자리는 제게 정말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2004년 친선경기 방한 후 차범근을 만나서 한 말



8. 여담[편집]


  • FM2007에서는 리더쉽 20의 막강능력치를 보여준다(기타 신체능력도 마흔에 가까운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수준급). 여담이지만 풋볼 매니저에서는 자신의 본명을 올리기 보다는 자신의 라이벌인 옌스 레만과 자신이 인터넷에서 아이디로 쓰는 mustermann을 합쳐서 jens mustermann을 자신의 호칭으로 써달라고 하였다고 한다. 버젼마다 좀 달라서 본명인 올리버 칸이 올라오기도 하지만 저 이름이 보인다면 그건 올리버 칸이다. 은퇴 후에도 여전히 유지되는지 FM 2022에서는 "Jens Freund"라고 나오고 있다.

  • 경영학 석사 학위가 있으며, 주식투자에도 조예가 깊다. 은퇴 후 ZDF에서 주로 A매치나 메이저 대회 경기들의 해설을 맡았다. 목소리도 세련되고 깔끔하다.

  • 위까지는 정상적인 내용이고, 이 아래로 내려가면 볼 수 있듯 기행인이다. 대표팀 라이벌이었던 옌스 레만도 마찬가지. 독일 골키퍼는 기행을 해야 들어갈 수라도 있는지 이런 똘끼는 마누엘 노이어가 잘 물려받았다.

  • (루머) 인상적인 일화로는 일본에서 어린이 10명과 PK를 치러 골이 들어가는만큼 한 골당 100만 엔씩 주최 기업 측에서 기부를 한다는 내용의 자선 행사에 참여했다. 물론 사람들은 그가 대충 봐주리라 생각했지만 차는 족족 모두 막아내어 결국 한 골도 허용하지 않았고 '아무리 가벼운 놀이용 게임이라도, 내가 지키는 골대에 골이 들어가게 할 순 없다'며 모두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다. 다들 벙쪄있는 찰나 '하지만 기부는 꼭 해줘'라며 자기 명의의 1,000만 엔짜리 수표를 꺼내 사인을 하고 기부함에 넣었다는 훈훈한 이야기다. [16]

  • 저런 일화와는 대조적으로 사생활은 깔끔하지 못하다. 아내가 임신 중이었음에도 다른 여자를 끼고 을 마시기도 했다.

  • 2002년 한일 월드컵으로 내한 당시 베지밀을 마시고 신이 내린 음료라 격찬하고 박스째로 구입해서 독일로 공수했다는 루머가 있다. 박스째 공수해서 가져간게 사실인지는 몰라도 베지말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 게 한둘이 아닌 걸로 볼 때,[17] 신이 내린 음료라고 극찬한 것은 아니더라도 즐겨마신 적이 있다는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 2001년 FC 한자 로스토크와의 리그 경기 중 2:3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경기 종료 마지막 코너킥 상황에 상대편 골로 쇄도하여 펀칭으로 골을 넣은 기행을 벌인 적이 있다.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실수로 손에 맞았거나 한 것도 아니고 아예 손을 뻗어서 말 그대로 펀칭을 해버린다. 결국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했고, 경기 후 키퍼가 골 에어리어에서 펀칭을 하는 게 뭐가 문제냐라고 하기도. 그게 상대편 골 에어리어라서 문제였다. 물론 정말 모르고 그랬을 리는 없고, 퇴장을 당한 후에 씩 웃으며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1998-1999 시즌 후반기 도르트문트 원정에서 상대 공격수 스테판 사퓌자에게 옆차기를 날리고[18] 헤어초크의 목을 물어뜯는 시늉을 해[19] 빈축을 샀다. 이후 도르트문트 팬들은 홈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경기할 때 칸에게 바나나 껍질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풍습은 현재 뮌헨의 수문장인 마누엘 노이어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의 인상적인 활약으로 일본에도 팬이 많다. 팬이 많다기보단 뭔가 네타 요소로 활용되고 있다는 게 정확한 것 같지만 독일 국가에 맞추어 바나나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감격의 매드무비가 유명하다.

  •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2년 만에 대한민국독일부산광역시로 무대를 옮겨 리벤지 매치를 치렀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올리버 칸은 무려 3골을 얻어맞고 무너지는 굴욕을 당했다.[20]

  • 성질머리와 카리스마, 박스 장악력은 세계 최강이다만... 칸의 유일한 천적은 칸 이전의 바이에른의 주장이었전 슈테판 에펜베르크. 그에게 훈계를 하다 역으로 사자후 관광을 당한후 순한양이 된 칸의 모습이 나름대로 개그다.[21][22][23]


  • 현역 시절에 가장 위대한 선수는 당연히 호나우두라고 했지만 가장 악몽같은 선수는 바로 수페르 피포 필리포 인자기.[24]

  •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바이에른 뮌헨의 클럽하우스를 찾아왔을 때, 지붕 위에서 누군가가 던진 물벼락을 맞고 말았다. 범인은 바로 꼬마거인.

  • 라트비아계 혼혈 독일인이다. # 그래서 UEFA 유로 2004에서 라트비아전을 앞두고 빌트지가 할머니 에리카 알크스니스가 라트비아 출신인 사실을 공개했었다. [25]


  • 2000년 4월 12일 SC 프라이부르크 원정 경기에서 골킥을 차던 중 프라이부르크 관중석에서 날아온 골프공에 관자놀이를 맞았다. 칸은 피치에 쓰러졌고 간단한 부상 치료 후 담담하게 다시 골문 앞에 섰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자마자 그의 통제력은 끝났고 광분하며 프라이부르크 관중들과 선수들에게 화를 내며 욕을 했다고 한다. 당시 팀 매니저였던 울리 회네스가 진정시키려했지만 실패했다. 당시 감독이였던 오트마어 히츠펠트는 공이 좀더 옆으로 갔으면 눈에 맞아 실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2001년에는 팀에게 4분 챔피언이라는 극적인 리그 우승과 긴장감 넘치는 승부차기 끝에 빅 이어를 안겨주면서 발롱도르 3위를 차지하고, 2002년에는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활약하면서 조국에게 준우승을 안기고 본인은 골키퍼로서는 현재까지 유일무이하게 월드컵 골든볼과 야신상을 동시에 수상하고 발롱도르 3위와 FIFA 올해의 선수 2위를 기록하면서 당대 최고의 골키퍼라는 것을 증명했지만 정작 이 두 해에 있었던 UEFA 올해의 팀 골키퍼 자리에 본인은 선정된 적이 없었고, 그 이후에도 선정된 적이 없었다. 또한 FIFA FIFPro 월드 XI에도 단 한 번도 선정된 적이 없었다.[26]

  • 분데스리가, UEFA 챔피언스 리그, FIFA 월드컵과는 좋은 인연이 있었던 반면에 유난히 UEFA 유로와는 인연이 적었다. UEFA 유로 1996은 조국이 우승했지만 본인이 주전이 아니었고, UEFA 유로 2000UEFA 유로 2004에서는 본인의 활약 이전에 조국인 독일의 전력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아서 조별리그에서 광탈당하고 말았다.[27]

다음 대회에서 아시아 팀에게 또 어이없는 굴욕패를 당하고 조별리그 탈락했을땐 눈깔 돌아갔을꺼 같다(..).

  • 2020년에 FC 바이에른 뮌헨 보드진에 합류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구단의 공식발표를 통해 단순한 소문이 아닌 사실로 밝혀졌다. 2022년부터는 바이에른 뮌헨의 CEO로 활약할 예정이다.

  • 2022년 2월 9일 과속으로 1개월 면허정지를 당해서 구단으로 출퇴근할 때 아내가 운전을 해줬다고 한다.

파일:골닷컴 시대별 최고의 골키퍼.png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골키퍼 5인을 선정했는데 1990년대 최고의 골키퍼 1위에 이름을 올렸다.

  • 22/23 시즌 도르트문트 원정에서 뮌헨이 극장골을 허용하며 승리를 놓치자 관중석에서 엄청 찰진 리액션을 보여주었다(...).
[1] 2011년 취득.[2] 선수 시절 93kg.[3] 후보로 출전한 1994 월드컵에서는 22번을, 그리고 유로 1996, 1998년 월드컵, 2006 월드컵에서는 12번을 달았다. 현재는 노이어의 등번호.[4] 골키퍼 최초이자 유일한 수상.[5] 칸은 자신을 일컬어 '내가 집에서 기르고 있는 짐승'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6] 크리스티안 뵈른스, 옌스 노보트니의 장기 부상과 크리스토프 메첼더도 유리몸화로 인해 페어 메르테사커가 등장하기 전까지 독일 센터백은 사실상 괴멸 상태였다.[7] 토마스 링케의 노쇠화와 파트리크 안데르손의 이적(이전에는 유리몸화라고 적혀 있었으나, 해당 문제는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이후에 발생한 것이다. 즉, 에펜베르크가 주장이었던 때의 뮌헨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이유는 당연히 이 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엘 쿠포르의 기량 하락, 믿었던 발레리앙 이스마엘의 부진 등으로 올리버 칸 시대에 믿을만한 뮌헨 센터백은 사실상 루시우가 유일했을 정도다.[8] 아이러니한건 동갑내기인 옌스 레만의 경우 이런 빌드업 능력이 좋은 골키퍼여서 당시 아스날의 패싱 축구에 플러스요인으로 준수환 활약을 펼칠 수 있었다.[9] 안드레아 피를로 문서를 참고.[10] 물론 발락 외에도 베른트 슈나이더디트마어 하만이라는 데드볼을 가진 선수들이 있었으나 슈나이더는 플레이메이킹 능력 보단 드리블러에 더 특화된 선수었고 하만은 강력한 킥력이 상징인 선수와 다르게 고전적 수비형 미드필더 스타일의 선수였다.[11] 여담으로 칸이 경기를 보러오면 이상하게 노이어가 클린시트를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팬들은 농담삼아 올리버 칸이 경기를 보러 안 왔으면 좋겠다고 하는 중.[12] 실제로 미국의 폭스 스포츠 해설자 왈: "저기 올리버 칸이 걸어오는군요. 저라면 저 분한테는 함부로 대들지 않을 겁니다."[13] 현재 바이에른 뮌헨의 스쿼드 자체는 훌륭하다고 볼 수 있으나 주전과 서브의 격차가 매우 큰데 주전 선수가 부상을 당하면 기량 미달의 서브 선수가 나오게 된다. 이는 결국 팀의 성적에 영향을 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팬들은 영입을 요구하고 있으나. 칸을 비롯한 보드진들은 현재 스쿼드에 만족한다는 소리만 하고 있으니 팬들의 속은 터질 수 밖에 없다. 피엘 팀들은 물론이고 분데스리가 내의 타팀들도 나름대로의 보강을 하고 있는 와중에 이적시장이 다 끝나가는 데도 영입 소식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14] 분데스리가 우승에는 성공했지만 포칼과 챔피언스리그에서 참패했고, 기껏 우승한 리그에서도 근 10년간 최저 승점을 기록했다.[15] 실제로 일본에서 올리버 칸을 초청해 자선 행사의 일환으로 일본 어린이 10명과의 PK대결을 하였는데, 그때 일본은 "아무리 그래도 어린이 인데 봐주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칸은 넌 못 지나간다를 시전하며 전부 막아버렸다. 어린이들이 득점한 만큼 기부가 진행되는 방식이었는데, 행사 후 사비로 10명분의 금액을 기부한 것은 덤. [16] 이 링크에 따르면, 그가 2008년 고별자선경기에서 얼척없이 PK를 막아선 것 자체는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아마추어 선수들이 PK를 차고 넣으면 10만 유로를 선수에게 지급, 막으면 10만 유로를 기부하는 룰이었는데 굉장히 열심히 막는 영상을 볼 수 있다. 그것이 9세 어린이었다거나, 일본이었다거나 하는 내용에는 근거가 없다. 아마도 일본으로 흘러간 이야기에 살이 붙어서 생긴 루머로 보인다.[17] 독일의 한인마트에서 베지밀을 마시는 것이 목격됐다는 썰도 있다.[18] 경기가 과열된 상황에서 사퓌자가 오프사이드가 선언됐음에도 멈추지 않고 달려오자 빡친 칸이 옆차기를 날렸다. 직접적인 가격은 아니었고 살짝 스치는 시늉만 했기에 카드는 안 나오고 주의로 끝났다.[19] 역시 경기가 과열된 상황에서 골대 바로앞에서 칸이 공중볼을 잡으려할때 헤어초크가 칸을 밀어 골을 넣으려하자 빡친 칸이 뺨과 목을 물어뜯는 제스쳐를 취했다.[20] 선술 했듯이 올리버 칸은 차범근을 만나자 차범근의 사인을 꼭 받고 싶었다고 했다. 아마 칸도 어렸을때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한 차붐을 보고 많이 동경하고 있는듯 하다.[21] 근데 에펜베르크와 찍힌것중 칸 뒷모습 사진을 보면 관광당하는거 같지만 옆에서 본 사진은 그냥 둘다 포효하면서 기뻐서 미쳐 날뛰고있는 사진이다.[22] 그래도 실제로 에펜베르크의 포스에 칸도 긴장빨았던건 사실. 특히 인터뷰때 에페가 기자 말을 잘 못알아듣자 칸이 말해주려하는데 '넌 입좀 다물어'라고 쏘이며 관광당한 일화도 있다.[23] 또한 2001년 분데스리가 우승을 확정지은 4분 챔피언 사건 당시 뮌헨이 마지막 순간에 얻은 간접 프리킥을 칸이 에펜베르크한테 자기가 차게 해달라고 했는데, 에펜베르크가 너 미쳤냐는 식으로 노려보니까 조용히 수비벽에 가서 서 있기도 했다. 참고로 두 사람 대신에 해당 프리킥을 차게 된 선수는 당시까지만 해도 프리킥으로 득점한 경험이 없는 파트리크 안데르손이었고, 한 방에 성공시키면서 마이스터샬레를 가져오게 된다.[24] 왜 썅욕나오는지는 인자기의 바이에른 뮌헨 전적에서 4경기를 치렀는데 총 합쳐서 7골의 득점력을 보여 줬다. 왜 싫어하는지에 대한 답이 여기 있다. 사실 키퍼 입장에서도 어디 있는지 모르게 가만히 있다가 툭 튀어나와서 골 넣는건 무진장 싫을 것이다.[25] 할머니가 리에파야 출신이었으며, 그곳에서 발트 독일인 출신인 할아버지와 만나 칸의 아버지을 낳고 독일로 건너 오셨다고 한다.[26] 물론 UEFA 올해의 팀은 2001년부터 시행되었지만 선정 방식이 그저 인터넷 팬투표로만 선정이 되는 방식이어서 실력과 카리스마로 팬도 많았지만 여러 가지 구설수도 같이 있었던 칸인 만큼 안티도 많았던 그가 투표에 안 좋은 영향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는 점과 FIFA FIFPro 월드 XI은 애초에 세계 최고의 골키퍼 자리를 잔루이지 부폰, 페트르 체흐, 디다 등에게 넘겨주었던 2005년에 처음 시행되었다는 것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27] 노이어는 월드컵 우승 경력은 있지만 유로 경력은 최고 기록이 4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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