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의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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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나미에서 제작한 게임 - 왕가의 계곡(게임)
- 만화 라스트맨의 무대가 되는 지역 - 왕가의 계곡(라스트맨)
وادي الملوك
Valley of the Kings
1. 개요[편집]
이집트 남부 룩소르, 즉 과거 테베의 나일 강 서쪽편에 위치한 거대한 무덤군. 과거 고대 이집트 고왕국, 중왕국 파라오의 묘역 피라미드가 도굴을 안 당한 피라미드가 없을 정도로 도굴과 훼손이 심해 미라의 안전을 절대 보장할 수 없는 데다가, 수많은 인력과 재원이 낭비되고 오랫동안 혼란기로 피라미드를 짓지 않아 건설기술까지 실전되자 신왕국 때 파라오들을 장사지내기 위해 새로 조성한 비밀 묘역이다.
왕가의 계곡을 선정한 가장 큰 이유는 도굴꾼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룩소르 반대편인 나일 강 서안지대에[2] 왕가의 계곡이 있지만 얼핏 보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계곡처럼 보인다. 이는 앞서 말했듯이 지상에 노출되는 구조물을 건설하면 도굴꾼에게 털리므로 계곡에 구멍을 파서 묘실을 만든 다음에 파라오의 장례가 끝나면 입구를 봉인해서 위치를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외에 이곳의 엘쿠른(El-Qurn) 산꼭대기가 피라미드형이라[3] 당시 기준의 명당이라는 점, 나일강에서 멀리 떨어져 범람으로 훼손될 위험이 없고 사암지대라 터널식 석굴이 유지가 가능하다는 점도 여기에 비밀묘역을 조성하는 데 영향을 줬다고 한다.
건설시기는 대략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1000년으로 대략 500여 년간 이용되었다. 신왕조 제18왕조의 제3대 파라오 투트모세 1세가 왕가의 계곡에 파라오로서 최초로, 2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람세스 11세가 마지막으로 묻혔다. 다만 주인을 알 수 없는 KV39가 있어서 아직까지 확정된 것은 아니다.[4] 그리고 KV39는 말 그대로 왕가의 계곡(Kings Valley) 39호 무덤이라는 의미로 일괄적으로 매긴 번호를 말한다. 왕가의 계곡은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하는데 동쪽에 대부분의 무덤이 있다. 다만 서쪽의 무덤은 따로 WV로 매기기도 한다.
그리고, 파라오의 묘역이라고 하지만 왕비, 왕자, 공주를 비롯한 왕족들과 왕이 총애하던 신하들은 물론 심지어 왕들의 애완동물들도 묻혔다. 동물까지 묻힌 이유는 이집트 신화에서 소, 악어, 매, 원숭이, 개, 고양이 등 동물은 신들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제19왕조 이후로는 파라오를 제외하면 왕비, 왕자, 공주들은 인근 왕비들의 계곡에 묻히기도 했다.
2. 조성 사유[편집]
당시 파라오와 그 친인척들은 당시에도 횡행하던 도굴꾼들 때문에 중왕국 때까지 유행하던 피라미드같이 눈에 띄기 쉬운 건축물 대신, 인적이 드문 오지의 한적한 계곡 바위 틈이나 벼랑에 자기 무덤을 조성하기로 했다. 당시 이집트의 사후관에 따르면 먼 훗날 언젠가 자신의 신체(미라)에서 되살아날 수 있지만, 그 전까지는 영혼도 제사로 제공되는 음식을 먹고 살아야 하므로 제사를 바치는 신전에 주기적으로 오가야 했다. 이런 믿음을 고려하면 왕가의 계곡에 무덤을 짓기로 한 것은 상당한 결단이었다.
신전은 수요나 후원을 감안하면 대도시에 만들어야 하는데, 왕가의 계곡은 이런 대도시와 한참 떨어져 있다. 즉 당시 이집트 고위층들은 자기 영혼이 이런 거리를 매번 왕복하는 고생을 각오한 셈이다. 한마디로 신체가 탈탈 털려 바닥에 오체분시[5] 되거나 후환을 없앤다고 불태워질 바에야 그런 고생이 낫다는 셈. 또한 무덤 건설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노동자들은 외부 출입이 통제되는 마을에 모여살게 한 대신 아주 많은 임금을 주어 입을 막았다. 이 마을도 관광지가 되어 있으며 노동자들의 신전과 무덤들도 공개되어 관광객을 받고 있다.
이런 덕분에 이곳 파라오들의 무덤은 비교적 늦게 도굴당했다. 물론 당시 고대인 관점에서는 충분히 도굴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만한 지형이었다.
3. 도굴[편집]
이렇게 노력했음에도 재물을 노리는 작자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신왕국 말기에는 국가의 재정이 고갈되는 바람에 무덤 노동자들에게 임금 체불이 일상화되었고 그동안의 후한 대우에 익숙해 있던 노동자들은 빡쳐서 무덤을 털어버렸다. 나중에는 아예 몰래 무덤 입구와 도굴로를 동시에 만드는 상황까지 벌어졌고 장례식이 끝나면 도굴로를 열어서 전부 털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런 일은 파라오뿐만이 아니라 왕비, 왕족, 귀족, 평민들까지 가리지를 않았다. 심지어 어느 귀족의 경우 장례식을 하는 동안에 몰래 침입해서 보석으로 치장한 데스마스크를 털어가는 사례도 있었고 람세스 3세의 왕비 이시스의 경우에는 무덤 노동자들이 몰래 뒤에 굴을 파고 털어버리는 사례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값비싼 부장품들이 시중에 공공연히 유통되면서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이집트 경제는 더욱 나락으로 추락하는 악순환이 여전했다.
사실 이런 심각한 사실은 그 당시에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제20왕조 말기의 파라오 람세스 9세 때 대대적으로 조사를 했다. 제11왕조부터 제20왕조의 무덤 16개를 조사했으나, 그 중에 제18왕조 2번째 파라오 아멘호테프 1세의 무덤과 11왕조 인테프 2세의 무덤을 제외하면 모두 털렸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실 당시에는 사제들과 귀족, 도굴꾼이 한 패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재정이 부족해진 21왕조 파라오들은 선왕조의 무덤을 털어 재정을 보충하는 등 막장이었다. 예를 들면 21왕조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서는 람세스 9세의 반지와 19왕조 파라오 메르넵타의 관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이전 왕조의 무덤을 털어 재정은 물론 부장품으로 재활용했다는 좋은 증거이자 일례다.
이 당시 도굴꾼을 처벌한 기록들이 몇 개 있는데 그중에서는 17왕조의 파라오 소베켐사프 2세와 그의 아내 누브카스 왕비의 피라미드 무덤[6] 을 도굴꾼 아멘파누퍼와 그 일당들이 약탈한 사례가 있다. 왕가의 계곡 부근에 있었던 탄광에서 일하던 노동자였던 아멘파누퍼는 이전에도 도굴을 하다가 잡혔다가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고 풀려났었는데, 고위 공직자들과 결탁하여 도굴을 하다가 기원전 1111년에 람세스 9세에 의하여 체포되었다. 도굴꾼들은 이 무덤을 약탈하여 부장품들을 싹쓸이하고 왕과 왕비의 관에 불을 질러 관에서 금 14.5kg을 녹여 훔쳐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관에 불을 지른 이유는 미라를 불태워서 저주를 막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실제로 도굴꾼들은 미라가 부활할까봐 겁을 먹고 미라를 불태워버리거나 훼손하기도 했고 땅 속에 파묻거나 심지어 기념품(!)으로 챙겨가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11왕조의 파라오 세누스레트 3세의 피라미드의 경우에는 도굴꾼들이 무덤을 털고 무덤 벽에 파라오를 조롱하는 그림과 낙서까지 하고 갔을 정도다.
4. 예상 밖의 보존 사례[편집]
그나마 그 중 하나 비교적 멀쩡히 살아남은 것이 바로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발견한 18왕조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도굴을 피할 수는 없었는데 무덤의 봉인을 보면 2번 정도 도굴당한 흔적이 있다. 그러나 가볍고도 가치가 높은 귀금속류와 귀한 연고류가 주로 분실되었고 관리 마야가 후속 조치를 잘해서인지[8] 그 후에는 도굴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20왕조 파라오 람세스 6세의 무덤을 만들던 노동자들이 그의 무덤 위에 오두막을 만들고 시간과 세월이 흐르면서 모래가 쌓이고 잊히면서 20세기 초에 와서야 발견되었다. 하워드 카터는 여러 증거들을 통해 이 곳을 발굴했다. 자세한 것은 투탕카멘의 무덤 문서 참조.
참고로 피라미드의 전성기였던 이집트 고왕국 시대도 후기에 들어오면 피라미드 중 도굴꾼에게 안 털린 피라미드가 없었다. 따라서 파라오의 주요 임무 중 하나가 털린 피라미드를 수선하고 미라를 수습하며 재봉인하는 것일 정도였다. 게다가 이 임무도 나름 돈과 수고가 많이 들어가서 나중에는 임무를 포기한 후, 아직 멀쩡하게 남은 미라를 한 곳에 모아서 땅 속에 석실을 세우고 그냥 공동묘지처럼 한 곳에 묻어버렸다. 사제들이 이 일을 맡았는데 남은 부장품들은 대부분 거둬들여 재정으로 썼다. 이들은 왕가의 계곡과 인근 무덤들을 다니며 남아 있던 파라오, 왕비, 왕족, 기타 인물들의 미라를 거둬들이고 다시 염습한 다음 소량의 부장품과 함께 2곳의 은신 무덤에 재매장했다.
이런 식으로 공동묘지화된 곳은 2개가 발견되었는데 앞서 말했듯이 부장품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묻혔으므로 누구도 도굴할 생각을 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세월이 지나면서 진짜로 잊히는 바람에 근대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일단 두 곳중 전자는 왕가의 계곡 근처에 있던 깊은 암굴 무덤(DB320)[9] 으로 원래는 21왕조때의 대사제였던 피네젬 2세와 그와 가까운 가족들의 무덤이었다.[10] 후자는 이미 고대에 도굴당한 20왕조 파라오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KV35)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공동묘지로 쓸 무덤도 재활용한 셈이다.
그리고 후자는 1896년 3월 프랑스의 빅토르 로레가 발견했다. 이 무덤에서는 무덤 주인 아멘호테프 2세, 아멘호테프 3세를 비롯해 15구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물론 미라들이 이미 도굴당한 무덤에서 수습된 미라라서 상태는 좋지 않다.[11] 예를 들면 DNA 검사로 아멘호테프 3세와 티이의 딸이자 아케나텐의 여동생이며 투탕카멘의 어머니인 것으로 확인된 여자 미라는 입이 찢어지고 오른팔이 없어지고 흉벽이 무너져 내부가 드러나 있다. 이것은 도굴꾼들이 보물을 찾으려고 마구잡이로 유린한 흔적이다.[12]
그러나 귀중품 따위는 없고, 부장품도 거의 없이 묻혔기 때문에 대량의 미라가 장기간 보존될 수 있었던 좋은 방법이었으며, 그래서 의외로 많은 수의 미라가 현재도 박물관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파라오의 미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파라오/미라 문서 참조.
사실 이집트 파라오 중에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파라오는 현재 21왕조 파라오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뿐이다. 이 무덤은 투탕카멘 무덤 발굴에 맞먹을 엄청난 고고학적 성과이나 왕가의 계곡에서 발견된 무덤이 아니라 나일 강 삼각주 지역에 있는 타니스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제2차 세계대전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고 나일 강 삼각주라는 지형의 특성상 부장품들이 대부분 박살나고 훼손되었으며 프수센네스 1세의 미라마저 습기가 많은 환경 때문에 훼손되어 해골만 남은 상태였다. 그나마 남은 것이 위에도 있는 원래 메르넵타의 관이었던 금속제 관이나 데드 마스크 정도인 수준이다. 따라서 별다른 이슈가 되지 못하고 묻혔다. 물론 현재까지 나머지 파라오들은 죄다 도굴당하거나 무덤 자체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5. 결과[편집]
결국 왕가의 무덤도 도굴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서 털린 무덤들의 미라를 한 곳에 모아 놓은 공동묘지는 근대까지 무사했다는 것을 볼 때 무덤을 엄청난 비용과 수고를 들여서 비밀스럽게 마련하느니, 차라리 반짝거리는 귀금속과 보석 등 값비싼 부장품을 일절 무덤에 넣지 않는 편이 더 좋았다는 것이다. 물론 부장품이 상식이던 그 시절 높으신 분들이 쉽사리 그들이 사용하던 고급 명품을 다 버리고 미라만 달랑 혼자 어두운 석실에 묻히기는 싫었으므로 그렇게 되진 않았지만.
결국 왕가의 계곡도 안전하지 않음을 절감한 20왕조의 마지막 파라오 람세스 11세는 기껏 왕가의 계곡에 무덤을 만들었으나, 정작 그는 이곳에 묻히지 않았다. 이렇게 람세스 11세가 만들고 버린 그의 무덤 KV4는 이후 파라오의 미라를 새로 염습하고 남은 부장품을 국가 재정으로 활용하기 위한 작업장으로 활용되고 중세에는 은자들의 은거지로 활용되었다. 이것을 보면 그 무덤에 묻히지 않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 후에는 공식적으로 왕가의 계곡에 묻힌 파라오는 없었지만 일부 무덤에 투장하는 사례는 종종 있었다.
6. 배치[편집]
왕가의 계곡 내부에는 총 63개의 무덤들이 있어, 모두 번호를 매겼는데, 그 앞에 'King's Valley'의 약자인 'KV'를 붙여서 부른다. 예를 들어 람세스 2세의 무덤은 KV7라고 부르고,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은 KV62라는 번호가 붙여져 있다. 내부가 가장 아름다운 무덤으로 꼽히는 세티 1세의 무덤은 KV17이다. 투탕카멘의 무덤을 제외하면 모든 무덤들이 도굴꾼들에게 신나게 털려나갔고, 이미 오래전부터 텅텅 비어버린 상태로 남아있었다. 왕가의 계곡 내부에는 파라오 뿐만 아니라 왕비, 왕자, 대귀족들의 무덤도 많지만 하단에 서술할 무덤들은 오직 파라오들이 묻혔던 무덤만을 소개한다.
참고로 파라오들을 위해 지어진 무덤과 귀족들을 위해 지어진 무덤은 격이나 규모 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 대귀족들의 무덤들은 파라오들의 무덤에 비해서 규모도 훨씬 작고, 안에 새겨진 장식이나 벽화들도 파라오의 것들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게다가 귀족들의 무덤들은 유난히 파손된 정도도 심하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보통 파라오들의 무덤만을 둘러보고 가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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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매체에서의 등장[편집]
이 왕가의 계곡을 소재로 쓰여진 《빛의 돌》이라는 소설이 있다.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자크의 작품. 왕가의 계곡에서 무덤을 파고, 안을 장식하고, 각종 부장품들을 제작하는 장인들의 마을 '진리의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의 창작소설이라고는 하나 실제 발견된 문헌에 어느정도 근거하고 있으며 등장인물들도 그 문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과 특징을 가져다 쓴 것. 당시 이집트의 생활상이나 과학, 의학 등의 높은 지식수준을 엿볼 수 있다. 크리스티앙 자크는 소르본 대학에서 이집트학 박사학위를 받은 전문가로, 베스트셀러 《람세스》를 시작으로 《투탕카멘》《검은 파라오》[13] 《오시리스의 신비》같은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유희왕 DM에서는 아무래도 주인공이 파라오이기 때문에 등장할 수 밖에 없다. 1960년대에 무토우 스고로쿠가 궁극의 게임을 찾아 발을 들인 곳으로써 처음 등장한다. 이후에는 주인공 진영과 도적왕 바쿠라 진영의 격전지로도 나오며, 마지막에는 아템이 명계로 돌아가느냐 마냐가 걸린 결전이자 유우기와 아템이 진정한 최강을 가리기 위한 의식인 '싸움의 의식'을 치룬 곳으로 나온다.[14] OCG에서는 왕가의 골짜기-네크로밸리란 카드가 왕가의 계곡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게임 타이탄 퀘스트에서는 액트 2 이집트 미션의 던전 중 일부로 등장한다. 특히 람세스 2세의 무덤이 중요하게 나온다.
문명 5에서 이집트 문명의 고유 건물로 나온다. 정확히는 매장식 무덤(Burial Tomb)이라는 이름이긴 한데, 게임 내 설명으로 왕가의 계곡이 나온다. 사원을 대체하는데, 유지비를 먹지 않고 행복을 제공한다. 대신 이 건물이 있는 도시를 점령당하면 적에게 금을 2배로 내주지만, 도시를 뺏긴다는 것 자체가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많은 도시를 확보하는 전략을 세웠을 경우 무척 유용하며, 빠르게 지을 경우 일찍부터 신앙을 많이 확보해 우수한 종교관과 종교 교리를 선점할 수 있다.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의 DLC 파라오의 저주에서 등장한다. 네페르티티, 아케나텐, 람세스, 투탕카멘의 무덤에 들어갈 수 있고, 이곳을 통해 사후세계인 아아루, 아텐, 헤브 세드, 두아트로 갈 수 있다.
8. 여행 정보[편집]
룩소르 일대 관광 지도
- 룩소르의 호텔들은 대부분 왕가의 계곡 건너편에 있는 나일 강 동쪽에 있으므로, 많은 관광객들은 버스를 이용한다. 호텔들의 대부분이 버스 여행객을 모집하고 있으므로 이 버스들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렌터카로 이동하는것도 가능은 하다.
다만 버스 여행의 경우 시간을 넉넉히 주지는 않으므로, 더 많은 돈을 지불하더라도 긴 시간을 두고 왕가의 계곡을 여행을 하고 싶다면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택시 기사들이 쇼핑을 권유하는 일이 많은데, 미리 확실하게 거절하는 의사를 전해야 한다.
- 왕가의 무덤 입구에 코끼리 열차 비슷한 차량이 있으며, 걸어서 이동해도 된다.
- 과거에는 입구에서부터 왕가의 계곡 외부 뿐만 아니라 무덤 내부에서의 사진 촬영을 엄격하게 금지하였지만, 현재는 별도의 사진 촬영 티켓을 구입하면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는 조건으로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다만 일부 이집트인 가이드들이 관광객들이 들어갈 수 없는 무덤 깊은 곳의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별도의 돈을 요구하는데, 적발되면 처벌당하므로 거절해야 한다.
- 겨울에도 날씨가 아주 덥고 그늘이 거의 없는 데다가, 무덤 내부는 습기까지 높기 때문에 여행자들의 주의가 필요하다. 석실들의 거의 모든 벽에 빼곡히 적힌 히에로글리프를 넋놓고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새 찜질방 수준으로 주변 온도가 올라가있는 꼴은 직접 겪어봐야 안다...
- 무덤 모두를 구경하려고 하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간을 넉넉히 준비하거나 구경할 무덤을 미리 선택하는 것이 좋다. 보통 티켓 1장으로 3개의 무덤을 구경할 수 있으나, 투탕카멘의 무덤은 별도로 티켓을 사야 입장할 수 있다.
- 이집트인들이 무덤 입구에서 가이드를 해 주겠다고 나서는데, 돈을 요구하므로 거절하려면 의사를 확실하게 드러내야 한다.
8.1. 하트셉수트의 장제전[편집]
자세한 내용은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하트셉수트의 장제전의 모습.
아비도스에 남아있는 세티 1세 장제전의 모양이 하트셉수트 장제전의 1층과 비슷하다. 단 크기는 하트셉수트 장제전이 더 크다.
8.2. 멤논의 거상[편집]
본래 아멘호테프 3세 장제전 앞에 세워져 있던 조각상이다. (기원전 1400년경 건설) 그리스인들이 전설 속의 에티오피아 왕 멤논의 것이라 여겨 이렇게 명명되었다. 기원전 27년 지진으로 붕괴하였다. 붕괴 당시 생겨난 틈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면서 노래와 비슷한 소리가 발생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를 멤논의 노래라고 불렀다. 서기 199년 로마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멤논의 거상을 보수하였고, 더 이상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8.3. 메디넷 하부[편집]
왕가의 계곡 앞에 있는 많은 제전들 역시 볼만하다.
9. 기타[편집]
왕가의 계곡에 있는 유적지중 내부모습을 VR뷰로 제공하는 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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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운데의 KV62 무덤이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이다.[2] 고대 이집트 시대에는 묘지를 태양이 지는 서쪽으로 정했다. 카이로 부근에 있는 피라미드도 나일 강 서안에 위치해 있다. 반면 나일강 동쪽은 해가 뜨는 곳이므로 생존을 위한 신전을 지었다고 한다.[3] 고대 이집트어로는 '타-데헨트(Ta Dehent)'로 불렸는데, '산봉우리'란 뜻이다. 하토르여신과 관련있는 곳이며, 엘쿠른의 바위가 코브라 형상을 하고 있는 점에서 왕가를 수호하는 코브라 여신 메렛세게르의 성소로도 간주되었다.[4] 투트모세 1세의 선왕인 아멘호테프 1세의 무덤으로 추정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5] 이는 도굴꾼들이 이왕 온 김에 체내에도 있을지도 모를 귀중품들을 찾으려는 것 때문.[6] 17왕조는 중왕조와 신왕조 사이의 혼란기였던 제2중간기였다. 고왕조와 중왕조 사이에도 제1중간기라는 현시창 시기가 있었으나, 이때 파라오의 권력이 추락하고 많은 무덤들이 도굴되었다. 제2중간기는 이민족이었던 힉소스의 침입을 받아 남북 대결을 하던 시점이었는데 당시 무덤은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무덤이 아니었다. 암굴을 만들거나 땅에 매장해서 위에 작은 피라미드를 세워 표시하는 무덤이었다.[7] 왕가의 계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들 중 하나로 꼽힌다.[8] 무덤 벽화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다.[9] 라술이라는 자가 깊은 구덩이에 빠진 염소를 구하러 내려갔다가 발견했는데 거기서 조금씩 부장품을 꺼내 팔다가 프랑스 출신 이집트 학자 가스통 마스페로에게 딱 걸렸다.[10] 재미있게도 피네젬 2세는 생전에 당대 파라오인 시아문의 지시를 받고 이미 도굴당한 신왕국 파라오들의 무덤을 돌며 미라를 수습해서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 매장했었다. 자기 자신의 무덤도 같은 방식으로 재활용된 셈이다.[11] 아멘호테프 2세의 미라만 멀쩡한데 그나마 무덤 발견 후 도둑이 들어 관에 부장되어 있던 활과 배모형 등 일부 부장품을 도난당했다.[12] 최근에 실행된 검사에 따르면 팔과 가슴의 손상은 도굴꾼들의 소행이 맞지만 입가의 구멍은 살아있을 때 생긴 상처라고 한다. 해당 미라는 The Younger Lady라는 별칭으로 검색해볼 수 있다. 약 25세 정도의 젊은 여성이며, 입가에 있는 그 상처로 인해 사망했을 거라고 한다. 상처가 아문 흔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BBC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The Younger Lady의 상처는 아마도 말발굽에 차인 듯하다고 한다.[13] 고대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던 누비아 인들이 잠시나마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었던 제25왕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14] 정확히는 왕가의 계곡에 있는 '운명의 석판'이 잠든 지하신전에서 치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