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프 브로즈 티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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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 초대 대통령
요시프 브로즈 티토
Јосип Броз Тито | Josip Broz Tito


파일:브로즈 티토 (컬러).jpg

출생
1892년 5월 7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트란스라이타니아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쿰로베츠[1]
(現 크로아티아 크라피나자고레주 쿰로베츠)
사망
1980년 5월 4일 (향년 87세)
유고슬라비아 SFR 슬로베니아 SR 류블랴나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953년 1월 14일 ~ 1980년 5월 4일
서명
파일:Tito_signature.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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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프라뇨 브로즈
어머니 마리야 브로즈
배우자
펠라게야 벨로우소바 (1920년 ~ 1939년)
헤르타 하스 (1940년 ~ 1943년)
요반카 부디사블레비치 (1952년 결혼)[1]
자녀
4명
종교
가톨릭무종교 (무신론)
신체
172cm
소속 정당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최종 계급
대원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1. 개요
2. 약력
3. 생애
3.1. 초기와 공산당 입문
3.2. 반나치 지도자
3.3.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건국
3.4. 말년과 사망
4. 사후의 평가
5. 기타
5.2.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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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파일:티토 (유서프 카쉬 촬영 컬러).jpg}}}
요시프 브로즈 티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전 대통령이자 공산주의 정치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지휘관 경력과 제3세계의 주축을 맡았던 걸로 유명하다.

본명은 '요시프 브로즈'이며, '티토'라는 활동명은 고향인 크로아티아 지역에선 흔한 이름이었다는 추측과, 그가 노동운동에 가담한 시기에 사용한 가명으로 세르보크로아트어로 "네(Ti)가 이것(To)을 해라"라는 표현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추측이 있다.


2. 약력[편집]


  • 1939.1. 제4대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회장 (1939.1.5.~1980.5.4.)
  • 1944.11. 제19대 유고슬라비아 총리 (1944.11.2.~1963.6.29.)
  • 1945.3. 초대 인민방위부 장관 (1945.3.7.~1953.1.14.)
  • 1953.1. 초대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1953.1.14.~1980.5.4.)
  • 1961.9. 초대 비동맹 운동 사무총장 (1961.9.1.~1964.10.5.)


3. 생애[편집]



3.1. 초기와 공산당 입문[편집]


크로아티아의 작은 농촌마을 쿰로베츠(Kumrovec)에서 가난한 크로아티아인 농부 프라뇨 브로즈(Franjo Broz)와 슬로베니아인 마리야 브로즈(Marija Broz, 혼전성은 야베르셰크·Javeršek) 부부의 아들로 출생했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기술공으로 발칸 반도 여러 지역들을 떠돌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에 강제 징집돼 참전하게 됐고 러시아 제국 육군에 생포되기도 했다. 포로수용소에서 러시아 혁명을 목격하고, 이때부터 공산주의 이념에 동조하게 된다.

3.2. 반나치 지도자[편집]


귀국 후 유고슬라비아 사회당에 입당해 티토라는 가명으로 활동했고, 각 공장의 파업을 주도하다가 유고슬라비아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5년형을 받고 5년간 수감 생활을 한다.

이후 스페인 내전에 참가[2]하는 등 해외를 배회하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일으키자 귀국해 빨치산 부대를 이끌며 게릴라전으로 나치 군대와 맞서 싸운다.

1930년대 유고슬라비아 왕실은 독일에 우호적이였는데, 그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세르비아인들의 용맹함을 높게 산 아돌프 히틀러가 유고슬라비아에게 상당한 경제적 편익을 제공했고, 이탈리아와 헝가리가 유고슬라비아의 영토를 노리고 있어서 이를 막기 위해선 독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범슬라브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매우 극심한 반독감정이 있었고 개전 중 추축국에 가입하자 섭정인 파블레 왕자의 독단에 질린 왕 페타르 2세[3]와 반독 성향의 측근들이 영국의 후원을 받고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이로인해 새로 생긴 내각은 반독/친연합 성향을 보여서 이탈리아의 삽질로 인해 신경이 곤두서있던 히틀러를 자극해 유고슬라비아 침공의 계기가 되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11일만에 항복한다. 하지만 독일은 티토가 지휘하는 빨치산에 의해 적지 않은 피해를 본다.

티토가 지휘하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매우 효율적인 유격전을 벌였으며, 이탈리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는 자기네 구역만 지키고 있었던 탓에 다른 전선에도 병력이 부족했던 독일은 유고에 7만의 병력을 박아놔야 했고, 루마니아의 유전과 우크라이나 보급로와 연결된 중요한 지역이였던 탓에 극심한 병력 부족에 시달린 전쟁 후반까지 병력을 주둔시키게 하였다. 오죽 히틀러가 열받았으면 티토를 붙잡기 위해 오토 스코르체니가 지휘한 특공대가 투입되어 티토의 본거지를 급습하기까지 했고, 실제로 거의 붙잡힐 뻔 했으나 티토는 여기서도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후 잠시 아드리아 해의 휴양지 비스 섬에서 기거하면서 윈스턴 처칠 등 연합군 최고위층 인사들을 만나 파르티잔 임시정부의 지위를 놓고 회담을 하는 등, 거의 동맹국 수장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전쟁 전에는 무명인사에 불과했던 티토의 명성이 점차 높아진 것이다.

추축군 한복판에서 빈약한 장비를 가지고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이상의 전과를 올린 한편, 비록 공산주의자였지만 서방 측의 지원을 적잖게 받았을 뿐만 아니라, 소련과의 관계도 좋지만은 않던 관계로 양측의 사이에서 정치적 협상도 적지 않게 벌여 많은 실익들을 챙기기도 했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후에도 티토는 동유럽권에서 냉전 내내 서방 측과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해 낼 수 있었을 정도이다.[4]

소련군이 유고슬라비아 영토 내로 진입하여 독일 국방군을 몰아낼 때, 수도인 베오그라드 탈환을 소련군과 함께 함으로써 파르티잔의 손실을 줄임과 동시에 독일군을 유고슬라비아에서 퇴치하는데 성공한다. 한편, 소련이 파르티잔 투쟁 기간중 제대로 된 도움을 하나도 주지 않았다는 것과, 티토 자신의 명성이 서방세계에서도 높다는 점을 바탕으로 해서 심지어 소련군이 오래 주둔하면 소련군과도 싸울 생각이 있다는 의지를 보여 소련은 유고슬라비아에 상징적인 병력만 남기고 철수하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다른 공산정권이 들어선 동유럽의 국가들과는 달리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위성국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3.3.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건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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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티토는 연합군 측의 암묵적인 지지를 받아 유고 과도정부의 수상이 되었고, 1948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건국한다.[5]

이 과정에서 앞서의 약속을 깨고 유고슬라비아에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스탈린과 갈등을 빚어 같은 해에 코민포름에서 영구제명되고,[6] 매카시즘으로 인해 미국과의 사이가 멀어지는 등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그는 비동맹주의 외교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고, 냉전 당시 제1세계, 제2세계, 제3세계를 넘나드며 어느 국가와도 극단적으로 척을 지지 않는 실용주의 외교로 고립된 유고슬라비아의 위기를 반전시켰다. 그 일례로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서방 진영의 장폴 사르트르까지도 남한이 북침했다는 소련과 북한의 발표를 지지했는데도 유고슬라비아만 혼자서 남침설을 고수했고 다른 공산권 국가들과 달리 소련의 참전 요구에도 이를 거절하였다.(6.25 전쟁/전쟁 발발 문서 3. 용어 문단 하단 참고)[7] 1950년대에는 미국과 군사원조조약을 체결해 M47 패튼, F-86 등 미국제 장비를 대량으로 공여받았다.

또한 과거의 역사 내내 민족, 종교, 언어의 갈등 때문에 툭하면 내부에서 서로 싸우던 유고슬라비아의 사정을 감안해서 형제애와 일치 정책(brotherhood and unity)을 펼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등의 유고 내부의 민족주의적 사상을 제거하였으며, 각 구성 공화국내의 거주민들이 타 구성 공화국내에도 거주해서 살아가도록 혜택을 충분히 제공하여 성과를 이룩하였고, 이렇게 민족이 혼합된 상태를 가칭 유고슬라비아 민족이라고 설정하여 해당 상태가 지속되면 언젠가 유고슬라비아가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새로운 민족을 탄생시킴으로서 단일 국가로서의 정체를 확립함으로써 내전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위의 구상이 일부분 현실화되었기 때문에 성과도 있었으며, 티토 사후 지속적으로 각국의 이해를 조율할 정치가가 있었다면 진짜로 그런 가능성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후 티토가 죽고,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터진 다음에 이 지역 국가 사람들은 '티토 시절이 좋았다' 하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실제로 티토 시절엔 여러 민족들이 제법 화합을 이루며 잘 살았다는 증언이 많다.

한편으로 스탈린주의 및 소련과의 차별화를 위해 탈권위주의적인 개혁 정책을 펼쳤다. 1952년, 공산당의 관료화와 기득권화를 방지하기 위해 집권정당인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정치조직인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으로 재편했다. 아울러 공장, 공기업의 경영권을 공산당에서 노동자 자치위원회로 넘기는 "노동자 자주 관리" 체제를 도입, 실시하여 사적 소유의 철폐와 낮은 생산력 사이의 모순에서 나타나는 비효율과 국가의 과도한 권위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8] 그리고 민족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코소보의 알바니아인과 보이보디나의 헝가리인 주민들의 자치를 허용했으며, 전통적으로 발칸 지역에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홀대를 받았던 집시들에게도 유고슬라비아의 시민권을 부여하며 자국민으로 편입시키려고 했다.[9]

이런 행보를 보면 정적에 대한 탄압만 빼면, 당시로서는 베트남이나 중국의 개방 정책을 이미 실현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10] 또한 그렇다고 공산주의의 핵심인 생산수단의 노동자 소유는 노동자자주관리 제도를 통해 소련보다 훨씬 강하게 인정했다. 경제민주화 문서 참고. 게다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 대신 제3세계를 중점으로 비핵화와 후진국의 산업화를 추진하며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고쳐나가는 첫 모델을 티토가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덤으로, 티토는 유럽의 68혁명 당시 기존 정치체제의 입장에서는 지나치게 과격한 것으로 보이는 학생운동에 대해 공개적으로 지지한 유일한 국가 지도자이기도 했다.[11] 이 면에서는 급진적인 개혁 요구에 매우 개방적인 인물이었던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 단,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소련의 간섭에 위기를 느끼던 티토의 입장에서 소련군의 프라하 진주에 격렬히 반대하던 1968년의 학생운동에 대한 지지가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12]

그리고 장기집권을 하기는 했지만, 김일성이나 이오시프 스탈린, 마오쩌둥, 엔베르 호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같은 다른 공산권 국가들의 종신 독재자들과는 달리 정적에 대해서도 비교적 신사적인 대접을 했다. 1950년대 이래, 당내에서 티토의 반대파들이 추방되기는 했지만, 이들은 처형이나 투옥이 아니라 그저 고액의 연금을 수령하는 야인이 되었을 뿐이다. 다만 티토의 과거 부하이자 최대의 정적인 밀로반 질라스(Милован Ђилас / Milovan Đilas, 1911년 6월 12일 ~ 1995년 4월 20일)는 티토가 나치 독일과 뒷거래를 했다는 유언비어를 터트려 파르티잔 투쟁을 정통성으로 삼는 티토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에 허위사실 유포혐의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13] 또한 민족주의자나 민주화 인사, 친소파를 탄압하고 골리 오토크 수용소에서 이들을 분리 수감한 바는 있다. 거기에 인민들에게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UDBA라는 비밀경찰을 조직해서 억압적 통치를 하기도 했다.[14] 다만 티토가 사망하고, 냉전 체제가 종식된 후에 유고 전쟁이 벌어지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프라뇨 투지만,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와 같이 민족주의 노선을 내세운 각 구유고권 국가들 내 지도자들이 제노사이드와 전쟁을 선동, 조장하는 강경책을 서슴없이 행한터라 티토의 과오는 상대적으로 묻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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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의 티토. 유서프 카쉬가 촬영했다.


3.4. 말년과 사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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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티토 사망 2주기를 맞아 소련 체신청에서 발매한 우표.[15]
1974년 헌법 개정으로 종신 대통령이 되었기에 티토는 왕이나 다름없는 지위가 되었다. 그러나 말년에 가면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1980년 다리의 혈행장애로 입원해 여러 차례의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동년 5월 4일 투병 중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시 몸무게가 40kg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 88세 생일이 고작 사흘 앞이었다. 제3세계를 대표하는 지도자라는 생전의 명성답게 동년 5월 8일에 열린 그의 장례식에는 4명의 국왕들과 22명의 총리들은 물론, 31명의 대통령들, 심지어 47명의 외무장관들이 참석하여 당시 기준으로 가장 많은 나라의 국가지도자들이 참석한 장례식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티토의 장례식 모습(reddit)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인도, 이집트, 서독/동독 등 여러 나라들의 국가원수들을 비롯해 주요 정치 인사들은 다 참석했다. 대한민국에서는 티토의 장례식에 조문 사절을 보내지 않았지만 언론에서는 티토의 사망 및 장례식 소식을 올리며 제법 중요하게 다루었다.[16] 설령 외교 관계 개선차 가고 싶어도 최규하 대통령이든 전두환이든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당시 각국의 정치인 인사들은 다음과 같다.


티토의 묘지는 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있는 티토 기념관 내에 있다. 1980년대 후반에 민족주의의 바람이 거세게 일며 티토가 격하되고 그의 묘지에 드나드는 인원이 크게 줄기도 했지만 티토 사후에 발생한 각 공화국 간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티토 시절에 향수가 일게 되었고, 종전 이후 과거 유고 연방에 속해 있던 어느 국가에서든 존경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참배객들이 자주 드나들고는 한다.[19] 이와는 별개로 유고 연방 해체 이후 유고 연방에 속해있었던 각 나라들에서 유고슬라비아 시절의 잔재들을 청산하며 각자 새롭게 자민족 정체성들을 내세우며 국가적 이미지를 바꾸고 있고, 티토의 묘지가 있는 세르비아 국내에서도 티토가 세르비아계가 아닌 크로아티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 매장된 티토 기념관의 티토 무덤을 철거, 파묘하고 그의 유해를 본래 출생지인 크로아티아로 이장시키자는 주장도 소수나마 제기되고 있지만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승계국을 표방하고 있는 세르비아 정부에서는 세르비아인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티토가 유고슬라비아 연방 건국의 아버지라는 역사적 근거를 내세우며 세르비아 베오그라드에 위치한 티토 묘역을 철거하고, 그의 유해를 크로아티아로 이장시키자는 일부 주장에 반대한다.


4. 사후의 평가[편집]


공산주의 진영으로부터 소련을 배신하고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부역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례로 코민포름 제명 이후 영국 정보국에 소련의 군사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등 뒤끝있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그래도 흐루쇼프 집권기 이후부터 소련과의 사이는 우방국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어도 호전되어서 원만해지기는 했다.

티토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여론의 논지를 살펴보면 독자 노선을 택해 다른 공산주의 국가처럼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을 피했을 뿐 아니라, 제3세계를 주장하며 그 지도국격의 위치를 누린 점. 등거리 외교정책으로 서방국가와 많은 교류를 하였으며, 유고 인민의 생활수준도 높았던 점을 든다. 아울러 진보 진영에서는 그의 강한 민족주의 성향, 소련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배짱 있는 외교정책,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단점을 지양하려고 노력한 경제정책, 복지정책 등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일어나 각 지역 내에서 학살과 인프라 파괴작전 등이 거리낌없이 펼쳐졌고, 그러한 전쟁의 결과물로 유고슬라비아가 7개의 소국으로 분리독립했으며, 새로 독립한 7개 국가들은 과거의 유고 연방 시기보다 훨씬 못한 경쟁력을 지니게 되었다.[20] 이의 반작용으로 대대적인 티토 재평가가 일어났다. 특히 구 유고슬라비아 남부지역에 위치한 국가일수록, 티토 시절에 대한 향수도 강한 편이다. 이는 티토가 민족주의와 종교를 억압한 정책의 재평가가 되었는데 티토 사후 각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종교가 민족간의 갈등을 부추키는 불씨가 되어 참담한 전쟁으로 발전한 사실 때문이다. 각 민족주의자들과 종교인들은 타민족과 타종교에 맹목적 증오를 부추켜 유고슬라비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슬로베니아와 세르비아는 비교적 덜한 편이지만 그래도 제3세계를 대표한 지도자라는 점이나 비교적 풍족하게 이루어졌던 사회복지 정책 때문에 티토 시절을 좋게 생각하거나 티토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며, 크로아티아와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등지에서는 티토에 대한 향수가 더욱 강해져서 이들 지역에서는 티토를 신급으로 추앙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티토의 유고슬라비아 시절엔 꽤나 풍족하게 살았으나, 막상 독립한 이후에는 잔혹한 내전과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현재도 청년실업률이 높고, 상대적으로 1인당 GDP가 낮은 등 경제적으로 사정이 영 좋지 않다. 주요 기업들과 소규모 레스토랑에 이르기까지 티토의 이미지를 많이 차용해서 광고나 홍보를 하기도 하며, TV 프로그램에서도 티토에 대해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2000년대와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북마케도니아 등 구 유고권 국가들의 갈등이나 적대감이 조금씩 나아지고, 민족주의적 성향이 그나마 덜해진 것도 티토 덕택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다만 반대로 티토와 유고 연방 시기를 그리워하는 구유고 각국의 구 유고슬라비아 노스텔지어를 비판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시대착오적이고 개인숭배적인 동시에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인데 이들은 크로아티아 전쟁과 보스니아 전쟁 등 구유고 연방에 속해있던 동남부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분쟁과 갈등에는 이러한 민족/종교/지역 갈등을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하에 한 나라로 묶어서 억눌러 통치한 티토의 독재정치에 대한 반작용도 한몫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이후 경기침체로 지역별 불균형 발전이 쟁점화되고, 그 영향으로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 슬로베니아의 밀란 쿠찬 등 민족주의 노선의 지도자들이 속속 등장했는데, 이들은 티토 격하 운동을 벌였다. 그 영향으로 구유고권 국가들 각국의 도심과 공원에 있던 티토의 동상이 속속 철거되고, 티토도 과거의 유물로서 한동안 잊혔다. 심지어 티토 시절의 유고슬라비아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매국노로 모는 경우도 많았다.[21]

세르비아 우파로부터는 과도정부 수상 당시 유고 내 대표적 우익인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를 처형한 점이 비판받는다. '유고슬라비아의 독수리'라고 불렸던 이 장군은 체트니크라고 불리는 세르비아 민족주의 레지스탕스 조직을 이끌고 반나치활동도 했으나, 20만명 가량의 크로아티아인과 보슈냐크인도 학살했다. 전쟁 이후 그는 신생 유고 연방 정부 측에 체포된 후 전쟁범죄와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다.[22] 자신의 독재노선을 비판한 밀로반 질라스[23] 등에게 콩밥을 먹인 것 등으로 인해 미국의 유고슬라비아 이민자 사회로부터 욕을 많이 얻어먹기도 했다. 또한 어쨌거나 독재정치를 했다는 점 때문에 욕을 많이 먹기도 한다.

또 유고 통합을 위해 민족 이주를 통제하거나 행정구역을 마음대로 편입시킨 것이 오늘날 유고 해체 이후에 많은 문제가 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항구도시 네움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영토로 확정지은 것이다. 이것 말고도 두샨 바타코비치의 《세르비아 역사》에서 언급되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코소보나 마케도니아에서 살다가 전쟁 때문에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간 세르비아인들을 돌아오지 못하게 귀환금지령을 내린 일도 있었다. 정말 계획대로 통합이 이루어졌다면 아무 문제 없었겠지만, 통합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분할되어 버리자, 영토나 거주자를 재조직한 부분에서 분쟁이 발생한 것. 유고 연방이 붕괴하면서 내전 당시 인종청소가 빠르게 행해진 것도 이런 이유였다.

후술할 종교에서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종교에 회의적이었기도 했으며 공산주의자이기도 했는지라, 종교인들을 탄압한 행적들이 여럿 있다. 이런 종교탄압 행적 때문에 탈권위주의적이거나 개혁적인 행보에도 불구하고 자잘하게 비판받기도 한다. 1945년 티토하의 공산주의자들이 국가를 장악한 후, 곧 종교 박해 운동이 시작돼 가톨릭, 정교회, 이슬람교 지도자들이 투옥됐다. 개중에는 가톨릭의 알로이지예 스테피나츠(Alojzije Viktor Stepinac, 1898년 5월 8일 ~ 1960년 2월 10일) 대주교도 끼어있었다. 그는 1946년 9월 체포됐으며 반역죄로 판정받아 16년간의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 나중에 그의 재판을 지켜봤던 몇몇 증인들은 그들이 고문을 당했으며 그들 가족들은 위협을 당했다고 말했다. 가톨릭 유아 세례를 받았던 티토는 1951년 12월 스테피나츠 대주교를 사형시키진 않았고, 조건부로 석방했으나 그 대신 그의 고향인 크라식에 억류(가택연금)시켰으며 대주교는 끝내 완전한 자유를 다시 얻지 못한 채 1960년 2월 10일에 혈전증으로 사망하고 말았다.[24]

실제로 티토는 특히 가톨릭을 반동주의자들의 집합처로 간주하고 탄압했는데, 가톨릭은 유고슬라비아 22개교구 중 14개 교구가 교구장 주교를 잃었다. 약 350명의 신부들이 살해됐으며 다른 200명은 투옥됐다. 약 300개의 수도원 및 교회 기관들과 함께 18개의 신학교 중 3분의 2가 폐쇄됐다. 모든 교회 재산은 몰수당했으며 그리고 전쟁구호기관(현 가톨릭구제회) 종사자들은 모두 추방됐다. 또한 유고슬라비아는 교황청이 내정을 간섭했다고 비난하면서 바티칸과의 외교관계를 일방적으로 단절해 버렸다.

정교회 탄압도 심해서 전쟁으로 성당이 파괴된 자리에 파르티잔들을 기념하는 건물들을 세웠으며, 정교회가 소유한 토지와 건물 대부분을 압수했다. 정교회의 명망 있는 신부들은 수도원에 강제로 억류되거나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전쟁 후인 1950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특히 반공주의자이며 민중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스코페 관구장주교 요시프 츠비요비치(Јосиф Цвијовић / Josif Cvijović)가 세르비아 총대주교로 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반국가행위 죄목으로 체포했다.

단, 이러한 종교 탄압은 종교 자체에 대한 탄압이라기보다는 종교의 (지역)민족주의 성향으로 인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지역마다 주요 종교가 달랐고[25], 이로 인해 일부 종교 지도자가 각 지역의 지역주의를 주장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티토 사후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들이 타 민족종교집단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면서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된 것을 보면 티토 입장에서는 붕괴를 막기 위한 최선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21세기에 와서는 티토 1인의 억압적인 독재정치와 자신의 사망 이후의 대한 사후 대응 미비로 인해 유고슬라비아가 티토가 죽은지 약 11년도 안되어 종교, 민족 간 갈등과 분란을 제어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의 부재와 밀로셰비치나 카라지치, 이제트베고비치, 투지만 같은 각 연방내 국가들에 기반한 민족/지역주의 성향 정치인들의 득세로 국가가 해체, 붕괴되고 발칸반도가 혼란의 생지옥으로 변해버리는데에 직접적 원인으로 티토에게도 책임이 없지 않다는 부정적인 주장이 서방권 및 해외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생기고 있다. 자신의 카리스마 못지 않은 능력 있는 후계 정치인을 키워서 사후에 정권을 넘겨주던지, 아니면 자신의 사후에 인구 구성비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세르비아인들의 권력 독점만이라도 미리 차단하기 위해 수도인 베오그라드를 세르비아에서 분리시켜서 유고 연방 전체를 관장하는 연방 수도로 만들어놓거나[26] 정 그것도 힘들다면 수도를 베오그라드가 아닌 다른 연방 공화국의 도시들로 이전하거나,[27] 브라질브라질리아카자흐스탄아스타나와 같이 계획도시의 형태로 절묘한 국토 중앙부 위치에 새 연방 수도를 만들어서 그곳으로 수도의 기능을 이전하던지 사후에도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보다 더 강한 중장기적인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티토는 기존의 판도를 전부 다 엎어버리는 그러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을 뿐더러, 기존 국가 시스템과 공산당 1당 체제를 유지하는 상태에서 각 공화국의 대표들이 1년간 대통령직을 돌아가며 맞는 집단지도체제로 개헌하며 사망했다. 그리고 이는 유고슬라비아가 티토 사후에 개헌된 집단지도체제가 티토 생전 만큼이나 제대로 된 결속력을 내지 못하고 후일 참혹한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연방의 분열을 초래한 불씨가 되고 말았다. 특히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몰락이 티토가 사망한 이후에 제대로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던 집단지도체제 형식의 공산당 1당 체제와 이를 노려 각 지역에 기반한 민족주의 정치인들의 득세로 연방이 붕괴된 걸 감안해볼떄 결과적으로 사후에도 유고 연방이 지속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대응 자체를 하지 않은 티토 본인에게도 책임이 없진 않다.

평가와는 별개로 현실적으로 티토가 재평가되어도 유고 연방이 다시 생길 가능성은 매우 낮다. 구유고권 국가들에서 티토와 유고슬라비아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유고 연방 해체 이후에 갈라선 국가들이 다시 유고슬라비아로 통합할 만한 구심점이나 명분이 전혀 없다. 게다가 티토 사망 직후에 각국이 벌인 내전 와중에 종교, 민족, 상대국에 속해 있던 민간인들을 상호 학살, 추방하고 박해하던 각국 국민들의 악감정과 적개심 또한 만만치 않아 이 국가들이 다시 유고슬라비아 같이 통합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티토가 사망한 이후에 구유고 연방의 종주권을 쥐고 연방을 통제하려던 세르비아와 나머지 타 연방 소속국들이 갈등과 대립을 겪다가[28] 연방에 속해 있던 나라들이 연방 해체와 분리독립을 놓고 참혹한 전쟁을 벌인 전적 때문인지 이 국가들에서도 티토의 통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다시 유고슬라비아로 통일하자는 주장은 거의 없거나 미약하다. 또 하다못해 이민을 가거나 티토 사망 후 일어난 크로아티아 전쟁, 보스니아 전쟁 등을 피해 미국이나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지로 도피한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같은 구 유고권 국가 출신의 동부 유럽 이민자 후손들 사이에서도 전쟁으로 분열된 이 나라들을 유고슬라비아로 다시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나오지 않고 있다.

5. 기타[편집]


파일:Stevan_Kragujevic,_Ho_Chi_Minh,_Josip_Broz_Tito_and_Edvard_Kardelj,_Beograd,_avgust_1957.jpg
1957년 호찌민 전 베트남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는 티토.
  • 아버지는 크로아티아계, 어머니는 슬로베니아계였으며 두 나라 모두 가톨릭 신도가 많은 지역이다. 이와 관련해 티토의 어린 시절에 얽힌 일화로 티토 본인이 회고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한 번은 미사가 끝난 후 뚱뚱하고 큰 몸집을 가진 신부의 제의를 빨리 벗기지 못했지. 그랬더니 신부가 화를 내면서 나의 뺨을 갈기더군. 그 뒤로는 성당에 두 번 다시 가지 않았다네.
- 블라디미르 데디예르와의 회고에서[29]
다른 버전으로는 이러한 이야기도 있다.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 위치한 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어린 티토가 복사로 사제를 돕고 있었다. 그런데 어린 티토가 그만 실수로 주수병을 떨어뜨려 포도주를 흘리자 신부가 몹시 화가 나서 티토의 뺨을 후려치며 "당장 나가! 다시는 성당에 나타나지 마라!"라고 말했고,[30] 그 후 티토는 더 이상 성당을 찾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예화에서는 '말에 관련된 교훈'을 주기 위해서 미국의 폴튼 쉰 대주교[31]의 이야기를 넣으며 상황은 똑같은데, 신부가 그 어린 아이를 잘 타일러서 나중에 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같이 실리곤 한다.

  • 서방과 친했기 때문에 할리우드 영화 합작도 많이 진행했었다. 할리우드 영화 철십자 훈장은 당시 현역이었던 유고 연방군의 T-34-85가 소련군으로 대거 출연한다. 파르티잔 투쟁을 다룬 영화 네레트바 전투도 할리우드 배우들을 출연시킬 정도였다.[32] 율 브리너도 나온다. 리처드 버튼이 티토 역할을 수행한 영화도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여러 번 지상파를 탔는데 화염병으로 탱크를 불태우는 장면은 80년대에는 삭제 방영되었다. 한국에서 탱크하면 떠오르는 누구 정권 시절이던 것과 관계 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조지 오웰1984, 동물농장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세르보크로아트어, 마케도니아어, 슬로베니아어로 번역되어 나왔을 정도로 서방과도 적절하게 지냈다.

  • 비단 할리우드 영화뿐만 아니라 본인의 성향 자체가 전쟁 중 추축국의 끊임없는 추격을 받으면서도 항상 깔끔하게 손질한 정복과 반짝이는 구두,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에 위의 사진과 같은 활짝 웃는 살인 미소로 사람을 대하며 좋은 와인과 파이프 담배를 즐기는, 공산주의 혁명가 이전 영화 배우 같은 미중년의 모습으로 대중에게 자신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호남아 기질이 다분했다. 이념적으로 대치하면서도 티토의 깔끔하고 호방하면서도 세련된 자기 이미지 관리에 매료된 영국 측의 시선에서는 티토의 라이벌인 체트니크의 지도자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전형적인 발칸 깡촌 도적(...)으로 밖에 안 보였고 실제로도 도적떼나 다름없던 짓을 하던 것도 티토를 지원한다는 결정을 내린 요소 중 하나였다.
지금도 구글 등에서 티토의 사진을 검색해 보면 항상 말쑥한 제복이나 정장에 얼짱 각도로, 흔한 공산국가 서기장의 이미지보다는 영화배우에 더 가까운 이미지를 볼 수 있다. 사진작가 유서프 카쉬가 찍은 티토의 사진들. 당장 위의 호치민과의 정상회담 사진만 봐도 당시 공산국가 서기장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새하얀 정장과 백구두를 신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다만 체트니크 항목에 나오는 다른 사진처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도 사실 원래 동시대 발칸 반도 최대도시였던 베오그라드에서 자라서 사관학교 나온 당대의 엘리트, 교육 받은 근대인이었다. 사진으로 현대에 유명해진 풍성한 턱수염의 발칸 산도적 룩은 대전 발발과 유고슬라비아 점령 이후 게릴라가 되면서 세르비아 농민들에게 어필하게 위해 의도적으로 조성한 이미지였다. 같은 나치 점령하에 우파 민족주의자인 미하일로비치는 농민들을 주 대상으로 산도적 코스프레를 한 반면 공산주의자 티토는 열강들의 외교전에 데뷔하기 위해 부르주아스러운 깔끔한 신사 이미지를 조성했다는 것이 흥미로운 역사의 대칭점이다.


  • 전쟁 때 동지이자 이념으로는 사실상 적이었던 영국 수상 처칠을 보기 위해 영국에도 자주 방문을 했을 정도로 호감을 느꼈다. 이념만 맞았다면 거의 의형제 수준이고 영국을 정말 좋아했다. 반면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경우는 사석에서 비겁한 짓을 하는 것을 티토가 목격하고[33] 같은 공산권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혐오했다.

  • 소련에 반대하는 노선 때문에 19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레프 트로츠키와 더불어 공산권에서는 공공의 적으로 불리운 적이 있었다. 소련의 노선에 삐딱선을 타는 정치인을 티토주의자로 매도한 것이 대표적이다. 6.25 전쟁 전후 한국의 빨치산 및 용공분자 수감자들 사이에서도 수감자들의 정치활동에 냉소적인 사람은 다른 죄수들이 티토주의자라고 집단 괴롭힘을 하거나 비난을 가했다는 증언도 있다.

  • 한편 티토가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한장이 훗날 꽤나 주목을 모았다. 이 편지를 보내기 전에 스탈린이 티토를 암살하려고 자객들을 파견했는데 티토가 그들을 일망타진한 사건이 있었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Стаљину, прекини са слањем људи да ме убију. Ухватили смо их већ пет, једног од њих са бомбом, другог са пушком... ако не престанеш слати убице, ја ћу послати једног у Москву и нећу морати да шаљем другог.
스탈린 씨. 이제 날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벌써 다섯 명을 체포했는데, 하나는 폭탄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는 소총을 가지고 있었더군요. 만일 또 다시 사람을 보낸다면, 그때는 내가 모스크바로 하나 보낼 건데, 나는 두 번 보낼 필요는 없을 겁니다.[34]
해당 편지는 스탈린의 블라즈냐야 별장 서랍에서 발견된 세 편지 중 하나로 그 서슬퍼런 강철의 대원수에게 대놓고 '나 암살하려고 자객이나 보내는 이 비겁한 놈아, 어떻게 된 게 너네 비밀요원들은 들어오는 족족 나한테 다 걸리냐? 한 번만 더 나 암살하려고 자객 보내면 나도 똑같이 자객 보내서 니 명줄 끊어줄 테니 그리 알고 더 이상 깝치지 마라'라고 폭풍디스하는 편지를 부칠 수 있던 티토의 배짱과 깡다구를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데, 이를 두고 서비스는 깡패가 또 다른 깡패에게 편지를 보내 대들었고, 그리고 그 깡패가 스탈린에게 대들 수 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고도 평가했다.
위 편지는 티토의 무지막지한 깡다구를 보여주는 일화로도 유명하지만 스탈린에게 어찌저찌 남아있던 인간성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도 유명하다. 스탈린 사망 후 소련인들이 스탈린의 집무실 서랍에 고이 짱박혀있던 편지 세 통을 발견했는데 한 통은 자기 아내에게 난폭하고 무례한 짓을 한 스탈린에게 격노해서 사과를 요구한 레닌의 편지, 또 한 통은 평생의 친구이자 동지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숙청했던 니콜라이 부하린이 형 집행 직전에 보낸 편지,[35] 그리고 마지막이 티토의 편지였다. 다시 말해서, 티토의 편지는 평생 지도자로 섬기고 따랐던 레닌의 편지, 평생의 친구였지만 자신이 배신한 부하린의 편지만큼 스탈린에게 충격을 안겨 준 편지였다는 것.[36]

  • KGB는 티토를 암살하기 위해 페스트를 감염시키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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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키(Koki)라는 큰유황앵무를 기른 바 있다. 정확히는 손녀 알렉산드라에게 선물로 준 앵무였다. 티토 사후에도 그의 이름을 부르고는 했다. 그러나 이내 곧 차기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며 갈아타기를 했다고 한다. 이후 크로아티아의 브리유니 국립 공원에서 관리하고 있다.(홈페이지 설명) 이 공원의 명물이라서 관광객들의 관심을 독차지한다.(영상1[37], 영상2[38]) 티토가 이 앵무를 손녀에게 사준 시기는 1977년인데 2022년 기준으로 60세라고 브리유니 공원에서 설명했다. 참고로 큰유황앵무는 100년 넘게 장수할 수 있으며 최대 기록은 120세다.


  • 티토에 대해 알기 위해 읽어 볼 만한 책은 영국의 작가 재스퍼 리들리가 저술한 평전 '티토: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이 있다. 2004년에 을유문화사에서 출간했으며, 현재는 절판되어 인터넷 중고서점 등을 통해 구할 수 있다.

  • 시메 브르살코의 증조부가 티토 정권에게 찍혀 처형당했다. 참고로 이 사람과 그의 아들(축구선수 시메 브르살코에겐 할아버지)도 이름이 시메 브르살코.

  • 오스트리아 출신의 쿠르트 발트하임을 UN 사무총장으로 선출하기 위한 로비 과정에서 발트하임에게 유고슬라비아의 최고 훈장 중 하나를 수여했으나, 사실 발트하임은 나치 돌격대 기마대원으로 근무했다는[39] 사실이 폭로되었다. 물론 이는 티토가 발트하임의 실체가 폭로되기 5년 전인 1980년에 죽었기에 발트하임의 실체를 알 기회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하지만, 어쩼든 이로 인해 반나치 파르티잔으로 명성을 얻은 사람이 민간인 학살에 관여한 나치 전범에게 최고 훈장을 준 꼴이 되었다.(...)

  • 세르보크로아티아어외에도 독일어, 러시아어, 체코어, 슬로베니아어, 카자흐어를 구사하였으며 프랑스어이탈리아어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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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슬로베니아 국경 근처의 도시.[2] 이에 대해서는 최근까지도 논란이 많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이 티토의 내전 참가를 부인하였기 때문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주장은 실제로 스페인에서 싸운 것은 아니고, 국제여단 지원자들을 파리에서 모아서 스페인으로 보내는 코민테른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면서 관리 차 스페인에 여러 번 왔다 갔다는 것.[3]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페타르 2세의 어린 나이로 인해 섭정이 통치하고 있었다.[4] 이 때문에 마피아들의 밀무역 루트로 애용되었다. 200척의 밀수선을 잡는 이탈리아 해경선은 1척이라는 말까지 나왔다.[5] 본래 영국에 망명해 있던 페타르 2세는 이때 귀국하여 다시 집권하려 하였지만 아무 생각 없이 독일을 최대치로 자극해 국민들을 나치의 학살로 고통받게 해두고 혼자 도망간 페타르 2세를 국민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연합국도 그리 좋게 보지 않았다. 결국 페타르 2세는 미국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게 된다.[6] 이 직전에 베를린 봉쇄가 있었다. 때문에 베를린 봉쇄는 미국의 물량 때문에 현실적으로 큰 의미가 없을 것임을 알면서도 유고의 코민포름 제명으로부터 눈길을 돌리려는 스탈린의 계책이었다는 일각의 주장도 있다.[7] 중공군이 개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헝가리 인민공화국, 폴란드 인민공화국, 독일민주공화국, 몽골 인민공화국 등 공산권 국가들도 6.25 전쟁에 참전하였고 이는 1.4 후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북한은 오랜 기간 유고슬라비아를 비난해 왔다.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찌또도당, 현대수정주의자 등의 용어를 사용하며 극도로 강한 어조로 비난하였다. 1950년대부터 시작된 티토의 제3세계 비동맹운동(북한식 표현으로는 '쁠럭불가담운동')에도 엄청난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1960년대 중반에는 <조선중앙년감>에 유고슬라비아가 6.25 전쟁 당시 북한을 비방하고 미제를 변호했다며 징징거리기도 했다. 이 외에도 미제와 손을 잡았다느니, 무역 자유화를 하여 경제가 파탄났다느니 하면서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 오죽하면 1960년대 말이 되면 <조선중앙년감>에서 유고슬라비아를 김일성 교시까지 들먹이며 깠으며, 급기야 1969, 1970년판에서는 유고슬라비아를 오스트리아, 핀란드 등 중립국은 물론 프랑스 뒤에 놓으면서 유고슬라비아를 사회주의 국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1970년 제25차 유엔총회에서 유고슬라비아가 공산권이 발의한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해체안에 찬성하며 기류가 바뀌기 시작했으며, 이듬해 양국이 외교 관계 복원에 합의하면서 완전히 풀리게 되었다. 특히 김일성이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비동맹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티토와 가까워지기 시작했으며, 1975년 김일성이 유고슬라비아에 방문하여 티토와 정상회담을 하면서 매우 가까운 관계로 바뀌었다. 이 때부터 북한은 티토를 찌또동지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8] 다만 그 덕분에 물품이 풍족하게 생산되었기는 했으나 동시기 타 공산국가와는 다르게 임금 상승으로 인한 물가상승률이 상당해서 이 문제로 골치 좀 썩혔다고 한다. 노동자 자주관리의 비판으로 흔히 드는 사례이다. 한편 90년대 초반 여러 공산국가들도 체제전환을 하게 되면서 이와 비슷한 부작용을 겪게 되었는데, 이 경우 당관료들이 국영 기업을 불하받으면서 독과점이 일어나 발생한 것으로 유고슬라비아와는 원인이 다르다.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한 체 게바라는 유고슬라비아의 자주관리기업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쿠바의 산업정책에 적용을 시도하기도 했다.[9] 덕분에 구 유고 연방이 내전으로 해체된 현재에도 세르비아나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북마케도니아 등 예전 유고 연방에 속해있던 국가의 집시들은 티토를 구유고권 국가들의 남슬라브족 계열 현지인 못지 않게 추앙하거나 티토의 집권 시절을 그리워하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한다. 자세한 건 집시 문서 참조.[10] 실제로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쳤을 때 적극적으로 참고했던 나라가 기업별 독립채산제를 유지하던 헝가리와 노동자 자주관리체제의 유고슬라비아였다는 이야기도 있다.[11]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도 지지의사를 표명하기는 했지만, 공식적인 지지 표명은 아니었다.[12] 특히 68운동 내에서 기존의 공산당 및 소련에 대한 혐오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13] 그래도 처형은 당하지 않았다. 질라스는 티토 사후 1990년대 초까지 살아있다가 1995년에 사망했다.[14] 골리 오토크 수용소는 티토가 사망한 직후인 1980년대까지 정치범 수용소로 활용되다가 1989년에 폐쇄되었다.[15] 사실 스탈린 시절에 앙숙이었다고 해도 1955년에 니키타 흐루쇼프와 만나면서 화해했으니 기념우표를 발매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16] 당시 대한민국은 냉전의 최전방에 있었기에 공산권 국가의 수반이 사망해도 정부에서 함구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티토가 죽은 시기의 대한민국은 혼란기였다. 서울의 봄으로 신군부와 국민들이 대치했고 곧이어 5.17 내란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17] 1950년대만 해도 김일성이 티토를 수정주의자라고 비난하면서 관계가 냉랭했지만, 1970년대에 북한 역시 주체사상을 통해 소련과는 다른 독자노선을 걷게 되면서 유고슬라비아와 북한의 관계는 매우 돈독해진 상태였다. 1977년에는 티토가 직접 북한을 방문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18] 시리아 대통령인 바샤르 알아사드의 아버지이다.[19] 옛 구 유고 연방 출신 국가 사람들이 아닌 다른 나라의 외국 관광객들도 찾기도 한다.[20] 이들 중에는 아예 동유럽 최빈국으로 전락한 나라도 있었다.[21] 실제로 티토가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을 방문했을 때에도 이들 구 유고권 국가 출신 이민자들 사이에서 티토를 규탄하는 시위 데모가 일어났을 정도였다.[22] 체트니크는 티토의 파르티잔과의 항쟁과정에서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함께 파르티잔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이로 인해 체트니크를 지지하던 연합국은 체트니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파르티잔을 지원했다.[23] 티토와 같이 게릴라 운동을 같이 한 동지이자 초기 권력의 2인자였으나 티토의 독재정치를 비판하면서 반체제 인사로 돌아선 사람이다. 심지어 질라스는 공산당 비판 작품들을 저술하여 투옥, 가택연금 상황 속에서도 정치 민주화를 주장하는 등 티토와 대립하였고 1980년 티토가 죽자 독재자가 죽었을 뿐이니 슬퍼할 필요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전쟁 당시 연방의 분열을 막으려다 1995년 의문사했다. 정작 질라스 자신은 평생동안 국제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유지했다고.[24] 스테피나츠가 우스타샤 협력자라며 맥락 자르고 단순화되는 경우가 있으나, 일단 협력자는 아니였으며 오히려 사적으로는 우스타샤를 비판했다. 다만 공적으로는 미온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크로아티아 역사가 Jozo Tomasevich는 저서 War and Revolution in Yugoslavia, 19411945: Occupation and Collaboration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1) 개인들과 집단들을 돕는 사적인 행위에서는 "그의 행동이 항상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최고의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다(deserves highest praise, although his actions were not always successful, 563쪽)" (2) 그러나 "세르비아 대상 제노사이드와 우스타샤 정권에 대한 스테피나츠의 언행에는 심각한 결핍이 있다.(there are serious shortcomings in Stepinacs statements and actions toward the Ustashe regime and its genocidal actions against the Serbs and the Serbian Orthodox Church, 564쪽)", "스테피나츠 대주교도 그 나라의 어떤 가톨릭 주교도 ... 공적 저항의 말을 하지 않았다.(neither Archbishop Stepinac, nor any other Catholic bishop in the state...uttered one word of public protest, 537쪽)"[25] 정확히 말하면 대부분의 유고슬라비아인들은 혈통적으로는 서로마 제국 멸망 당시 발칸반도로 이주하여 정착한 슬라브인(슬라브인중 가장 남쪽에 정착하였기에 남슬라브인이라 불리었으며, 이것이 남슬라브인의 땅(=유고슬라비아)의 어원이다.)의 후손들이고, 언어로는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사용했다. 즉 민족을 '혈통과 언어로 구별되는 공동체'로 본다면 이들은 같은 민족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별개의 민족으로 구별된 이유는 바로 종교적 차이였다. 남슬라브인의 주요 민족 구성 자체가 크로아티아인=가톨릭, 세르비아인=정교회, 보슈냐크인=이슬람 이라는 종교적 정체성을 통해 탄생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래서 탄압이 정당한가는 별개의 문제지만) 보편적인 유고슬라비아인에 의한 민족국가를 지향했던 티토와 각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서 정치적 정면충돌의 발생은 불가피했던 것.[26] 자국의 수도가 연방 수도 개념으로 별개 행정구로 나뉘어져 있는 미국의 워싱턴 D.C., 호주의 호주 수도 준주, 인도의 델리 연방 수도구역 등이 대표적인 사례. 다만 전통적으로 무굴 제국때부터 영국의 식민지 시절까지 줄곧 인도의 경제, 정치적 중심지였던 델리나 행정구역들을 신설하는 과정에서 연방 전체를 관할하는 수도권 행정구를 새로 만든 호주의 사례와 달리 베오그라드는 유고 수립 이전부터 세르비아의 전통적 중심지였던데다 도시 인구의 대부분이 세르비아인들이 워낙 많았기에 티토가 인도나 호주의 사례가 같이 베오그라드를 연방 수도의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거나 설령 했다 해도 티토 사후 연방의 붕괴를 막지 못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27] 낙후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지역 경제 발전을 노리기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로의 수도 이전을 고려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28] 티토 사후이던 1980년대에 각 연방내 국가 출신들이 대통령직을 번갈아가며 통치하는 집단지도체제로 개헌되었으나, 밀로셰비치의 공작 아래 세르비아가 연방내 주도권을 독점하는 형국으로 변질되어 집단지도체제는 유명무실해졌다.[29] 출처: 티토: 위대한 지도자의 초상(2003), 제스퍼 리들러, 을유문화사. 54페이지[30] 사실 미사/성찬 전례트리엔트 미사 문서에 나온 것처럼 복사가 포도주를 취급했다면 그 순서는 가톨릭 미사에서 포도주가 예수의 피로써 특별한 종교적 의미를 가지기 전이므로 포도주를 흘린 것이 종교적 의미로도 큰 실수가 아니다. 더군다나 아이가 실수했다고 뺨을 후려치고 욕설을 퍼붓는 것은 성인으로서 그리고 아이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절대 해서는 안되며 그걸 하는 순간 전례의 기본 정신은 완전히 상실된다. 미사/자세 문서 참고.[31]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책의 저자다.[32] 한국에서는 1989년 주말의 명화에서 방영해준 바 있다.[33]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그가 루마니아를 방문했을 당시에 집권한 지 얼마 안 되었던 차우셰스쿠와 함께 사냥하러 나갔다. 이때 티토는 사냥터에서 산탄총을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으로 동물들을 잡은 반면에 차우셰스쿠는 쏘는 족족 빗맞았다. 그런데 사냥 도중에 갑자기 차우셰스쿠가 달려오더니 티토가 사냥했던 멧돼지 한 마리를 그가 가려채려고 들자 어처구니가 없어져 버린 티토가 "당신의 총알은 땅바닥에 떨어져 있겠지."라고 차우셰스쿠에게 대꾸한 후에 총탄에 맞은 멧돼지를 챙겨서 갔다.[34] 출처: 역사학자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의 저서 『스탈린 전기(Stalin: A Biography)』. 하버드 출판부, 2005년.[35] 내용은 딱 한 줄이다. '코바, 당신에게 왜 내 죽음이 필요하지?' 그러니까 스탈린에게 숙청당해 곧 죽을 상황에서조차 스탈린을 애칭으로 부르면서, 원망하기보다는 왜 굳이 자신을 죽여야 하는지 오히려 의아해 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던 것. 다만 스탈린의 그의 죽음을 고소해하며 다시 편지를 보며 기쁨을 얻기 위해서라는 시각도 있기는 한데, 사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하는 사람은 로버트 서비스뿐이다. 보통은 <다른 고참 볼셰비키 지도자들과는 달리 부하린은 스탈린과 개인적으로 아주 친밀한 사이였던 점>이나 <스탈린은 부하린의 편지 뿐 아니라 회고록까지 잘 보관해 놓고 있었던 점>,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경우 재판 직후 바로 처형해버린데 비해 부하린의 경우 재판 이후 숙청까지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던 점>, <스탈린의 정적으로서 부하린의 위상은 최강의 강적이던 트로츠키를 일단 격파한 뒤 짬을 내서 격파한 (각각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이던)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격파한 뒤 남는 짬에 격파해버린 정도로, 굳이 말하자면 '사천왕 중 최약체' 정도였으니 정적을 꺾은 기쁨을 되새기기 위해 뭔가를 남긴다면 차라리 트로츠키와 관련된 것을 남기는 것이 더 어울렸을 것이라는 점> 등의 정황을 감안하여 스탈린에게도 부하린을 숙청하기 전에 상당한 심적 갈등이 있었다는 근거로 해석하는 쪽이 더 일반적이다.[36] 후에 소련이랑 치고 박던 마오쩌둥조차도 스탈린 치하 소련한테는 감히 대들지 못했다.[37] 2분 11초에 티토라고 말한다[38] 2분 52초에 티토라고 말한다.[39] 그것도 단순 입대 정도가 아닌, 포로와 인질, 심지어는 민간인에 대한 처형을 협조하거나 직접 지시하기까지 한 악질적인 전범이었다.[40] 출처는 영어판 위키백과.

  • 사후인 1985년 유고슬라비아 디나르 지폐에 도안으로 등장했다. 다만 처음으로 지폐에 들어간 건 앞의 사례가 아닌 1980년에 발행된 아프리카기니 500실리인데, 티토가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과 자치를 옹호했고, 정치, 경제, 군사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서 이들에게도 이미지가 좋은 편이었던 걸 감안하면 그럴 만도 하다.



5.1. 티토주의[편집]


해당 문서 참고.


5.2. 매체에서[편집]


  • 굽시니스트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존 티토로 패러디되었다. 그의 비범하고도 개념찬 행각들은 다 미래를 예지한 덕분이라고 한다.
  • 세계정복자 4라는 2차 세계대전 배경 전략게임에서는 누군가가 장군 추천을 요청할 때 티토를 추천하는 밈이 있다.
  • Hearts of Iron IV에서 유고슬라비아를 플레이할 때 티토의 공산정권 트리가 가장 강력했었다. 또 유고가 연합국이나 추축국에 가입하면 반란이 일어나는데 공산주의일 때는 안 일어난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침공[41]으로 추축국의 공격이 시작되는데 지정학적으로 포위된 상태[42]라 매우 불리하다.[43] 지금은 유고슬라비아를 분할시켜서 재결합하는게 불가리아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일대에 핵심주를 얻을수있어서 티토의 공산주의 정권은 사실상 사장된 추세다. 하지만 먼닉 방송에서 공산정권으로 내전을 시작하고 분할시켜서 재결합하는 루트를 탈 수 있다는 게 확인되었다.
이스트에그로 나오는 요시프 데프레[44]라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기병 장교를 투옥시키기도 했는데 개발자의 증조부이다. 투옥 사유는 불명이나 그가 왕국의 장교였다는 점에서 왕당파에 붙었거나 연루되어 화를 당했다 정도의 유추는 될 법하다.[45] 개발자의 말로는 초창기에 추축국과 친하게 지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46] 어지간히 성격을 안 건들이면 투옥도 안시키는 티토의 성격상 죽이진 않았겠지만 목숨의 위협을 느껴 처음엔 바로 옆인 오스트리아 그 다음엔 반공주의 정치적 난민 신분으로 미국으로 망명해서 93세까지 장수했다고 한다.
  •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는 주인공 유진킴이 발칸에서 새로운 전선을 열 수 있는지, 전후 미국과 친선을 맺을 수 있는지 탐색할 목적으로 몸소 잠수함을 타고 넘어가서 회견을 했다. 역사적 공통점과 술을 매개로 친분을 맺게 되었으며, 오토 슈코르체니가 벌인 작전으로 붙잡힐 뻔했지만 유진의 임기응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에도 절친한 사이가 되었지만, 원 역사에서 그랬듯이 서방에 유연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은 변함이 없어서 냉소적인 면모도 갖고 있다.
  • 2011년작 크로아티아 영화인 'Josef'에서는 1차 세계대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으로 참전한 티토가 군복과 인식표까지 바꿔가며 살아남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영화 트레일러
  • Equestria at War라는 판타지/스팀펑크 게임에서 나오는 스타리 나이트라는 여성공산주의자 파르티잔 지도자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단 스타리의 경우 되게 불쌍한 최후를 맞는데 헌법을 만들려는 도중 연인 골든 모닝에게 배신당해서 죽게 된다.#. 이후 유령으로 나타나서 골든 모닝을 용서한다.
  • 유녀전기를 쓴 작가로 유명한 카를로 젠의 작품 중 <약속의 나라>의 주인공은 티토를 모티브로 한다.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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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이탈리아가 친선하는 선택지도 있지만 거의 반드시 침공한다고 보면 된다.[42] 독일은 안슐루스 합병 이후라서 국경이 닿아 있으며, 이탈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역사적 루트일 경우 헝가리와 루마니아도 추축국으로 들어가버린다. 거기에 알바니아도 역사 루트에서는 이탈리아에게 합병당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사방에서 쳐들어온다.[43] 그나마 공산 정권 쪽으로 가면 소련이 독립보장을 걸어줘서 버텨볼 만한 희망은 생기게 된다. 다만, 소련이 자체적인 디버프를 떼지 못한다면 제대로 도와주지 못하고 독일군에게 밀릴 수 있다는게 문제.[44] 능력치는 2/1/3/3, 기병장교, 천재까진 아니나 그럭저럭 쓸만하다.[45] 내전이 터지면 왕실이 있는 쪽에 자주 붙는다.[46] 그 당시 유고슬라비아가 추축국에 포위되다 싶이한 형국이라 친한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지도에서 사라질 위험이 커서 왕실은 친하게 지내려고 했다만 국제정세와는 별개로 국민들은 반독주의 감정이 대단히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