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유래와 역사적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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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개요[편집]


우익이라는 정치적 용어는 프랑스 혁명 기간에 처음 사용되었는데, 국민공회에서 의장석의 시선을 기준으로 오른쪽(droit)에 지롱드파가 앉은 것이 그 기원이다. 지롱드파는 개인 권리 확립, 여권 신장, 인도주의 원칙 중시 등 전형적인 자유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는 호전론(好戰論)의 경향을 보였다. 이들은 국제 무대에서 이권을 쟁취하기 위해 적극적인 군사적·외교적 활동을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적인 정치적 이데올로기 를 드러내는 것으로, 그 최초 의 사용은 1818년 프랑스 샤토브리안이 자신의 잡지에 '보수주의자'라고 명명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우선 영국 에서 1835년, 이어서 19세기 나카 이후 유럽 각국에 있어서의 보수를 명하는 정당의 성립 이 배경이 되어, 이 의미에서의 보수주의라는 말이 일반화되었다.

정국을 주도하는 공화파는 루이 16세를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다시 국민공회 를 선언했다. 프랑스는 국민이 투표로 뽑힌 대표자들이 다스리는 공화국이 됐다. 국민공회에서는 다시 의견이 갈렸다. 왕을 처형해야 한다는 자코뱅파와 왕을 죽일 필요는 없다는 지롱드파가 대립했다. 서민을 대신해 급진적인 변화를 주장하는 자코뱅파가 왼쪽에 앉았고, 부자 계층을 대표하며 점진적인 변화를 꾀하는 지롱드파는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데올로기(Ideologie)는 인간이나 자연, 사회에 대해 가지는 이념적인 의식의 형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사물을 본인의 사회적·심리적·생리적 기반과 연관 지어 이해하고 관념을 형성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데올로기로서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는 프랑스 혁명과정을 통해 정립됐다고 볼 수 있다. 진보주의란 현재의 사회체제 문화 제도의 모순을 혁신적 개혁을 통해 새롭게 바꾸려는 성향이나 태도를 말한다. 혁명기간 동안 시민계급이 주로 진보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에 반해 보수주의는 현재의 가치나 체제를 보호해 안정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귀족계급은 그들의 사회적인 기반이 흔들리자 현 체제를 유지하려는 보수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보수주의적 심리태도는 각자 개인적 또는 계급적 이익과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조금 더 명확히 말하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발로라 할 수 있다.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상대적으로 가변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 초기에는 공화파가 진보를, 왕당파가 보수의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나 혁명 후기에 더 급진적인 자코뱅파가 나타나자, 온전한 공화주의자인 지롱드파는 보수주의가 됐다. 프랑스 혁명을 통해 제기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진보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체제 속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이후 자본주의의 모순에 반발해 사회주의가 형성됐다. 이렇게 되자 기존 질서인 자유와 민주주의는 보수로 간주되고, 새로이 평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는 진보로 불리게 됐다. 오늘날의 보수주의는 자유 경쟁과 시장경제는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진보주의는 평등한 사회를 위해 개인의 경제 활동과 경쟁에 어느 정도 제약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프랑스혁명 이후로 현재까지 진보주의는 좌파라 불리고, 보수주의는 우파로 불리고 있다.[1]


악의 승리에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수수방관하는 것이다.


최초의 근대적 보수주의자로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비교적 진보적인 당으로 생각되던 휘그당의 당원이었던 만큼 생전 스스로나 타인에게 보수주의자라는 정체성이 씌어진 적은 없었으나 그가 주장한 대의 정부, 자연적 귀족, 사유재산, 소집단의 중요성은 보수주의의 기본 특징이 되었다.

에드먼드 버크 에 의해 창립된 보수주의는 프랑스 혁명에 의해 제시된 < 사회계약 >이 아니라 <본원적 계약>을 중시한다. 다년간에 걸쳐 근본적으로 유지해 온 것 중에 본원적 계약의 존재를 보고, 그 표현인 조상으로부터 상속한 옛부터의 제도를 옹호하고, 그것을 자손에게 상속해 나간다고 하는 정치 철학이다. 이 때문에 자연적으로 발전하여 성장해 온 눈에 보이지 않는 <법>( 공통·로 )이나 도덕, 혹은 계급이나 국가는 물론, 가시적인 군주 제도나 귀족 제도 혹은 교회 제도에 있어서도 있다 세대가 자신들의 지력에 있어서 개변하는 것이 용이하게는 허용되지 않는 시효의 헌법이 있다고 가정한다.

왜냐하면 어떠한 정체 에서도 참입법자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적절하고 충분한 인간의 힘과 국민에게 법적 판단의 권리나 의무를 갖게 하기 위한 공정한 헌법 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버크는 한편으로 프랑스 혁명을 격렬하게 비난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1688년의 명예 혁명 을 지지했다. 이것은 인민주권설에 의한 입장으로부터의 혁명이 아니고, 영국 고래의 헌정 정책 원리(구 휘그주의 )에 따라서, 민족 고유의 소산이며, 필연성(necessy)로부터 일어난 혁명이며, 혁명이 그것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1688년 혁명은 왕국의 고래의 기본적 국가조직 즉 본원적 계약을 국왕의 측에서 침해한 것에 원인이 있고, 그 회복과 유지에 노력했다고 한다.

또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받은 휘그의 동료들이 지지하는 <불가양의 인민주권>설을 비판한다. 즉 인민주권설에 의하면, 인민은 위반행위의 유무에 관계없이 왕을 처치할 수 있다. 인민은 수의적으로 스스로 어떠한 정체도 새롭게 마련할 수 있다. 위정자 는 의무만을 지고 아무 권리도 갖지 않는다. 그들의 치정의 존속기간은 계약의 고유의 과제가 아니라 인민의 의지에 달려 있다. 또 사실상 <사회계약>이 이뤄지고 그 구속을 받는다 하더라도 직접 계약에 관련된 사람들만이 대상이 되어 자손에게는 그리고 얻지 못한다. 버크는 <사회계약>이 가지는 계약성의 기만을 다만, <본원적인 계약>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고 한다.

영국 국민의 개개인이 누리고 상속해 온 「자유」 「명예」 「재산」은, 이 <본원적인 계약>의 옹호에 있어서, 또, 세대를 넘어 생명을 얻고 있는 관습·습속이나 도덕의 숙박 <중간조직>(intermediate social-group), 예를 들면 가족, 얼룩짐, 교회 커뮤니티 등의 옹호에 의해 지켜진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회계약론이 주창하고, 가상의 자연권 이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종류의 권리가 아니라, 현실의 영국의 역사가 저절로 형성해 온 섭리 이다. 그러나 동시에 흄 윤리학의 계보에 근거 해 경험론 의 한계에도 언급하고 있어, 역사로부터 도덕상의 교훈을 끌어내는 위험성에 대해 “역사란, 주의를 게을리하면, 우리의 정신을 흩뜨리거나 행복을 파괴하거나 하는데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버크 철학에서 인간의 지력 등은 조상의 지혜가 거대한 산처럼 퇴적하고 있는 옛부터의 <제도>에는 미치지 않는 왜소하고 결함 투성이인 것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이성주의', 즉 데카르트 적인 인간의 이성 에 대한 과신을 근원적으로 위험시하고 신중을 제기한다. 즉, 개별 인간을 많은 실수를 겪는 불완전한 존재로 간주하는 겸손한 인간관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가 매일 식사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과 양조장 주인, 그리고 빵집 주인의 자비심(慈悲心)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그들의 고려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 《국부론》제 1편 제 2장(p.19) 中


애덤 스미스는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의 경제학자, 철학자이다. 고전경제학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자본주의와 자유무역에 대한 이론의 기초를 제공했다. 그는 도덕철학과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대표적인 저서로는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이 있다. 스미스의 연구분야는 다방면에 걸쳐 있으나 <국부론>으로 체계화된 경제학 연구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국부론>은 경제학을 처음으로 이론. 역사. 정책에 도입함으로써 체계적인 과학으로 만들었다.

당시 영국의 자유통상정책으로 구체화된 중상주의 비판을 통하여 스미스는 부가 금. 은만이 아닌 모든 생산물이라고 규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부(富)의 원천은 노동이며, 부의 증진은 노동생산력의 개선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분업이 생산의 기초가 된다. 그는 분업과 이에 수반하는 기계의 도입을 위해서는 자본의 축적이 필요하며, 자유경쟁에 의해서 자본축적을 꾀하는 것이 곧 국부 증진의 정도라고 역설하였다.

이 저서의 의의는 우선 자본주의 체제가 가격의 기능을 통해서 질서를 형성하고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경제학을 처음으로 성립시켰다는 것이다. 즉, 자원의 배분을 최적화할 수 있는 체제가 돋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 사이의 균형임을 밝힘으로써 시장경제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산업자본이 요구하는 시장에서의 자유경쟁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인도되어 결국 사회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킨다고 설명하여, 경제적 자유주의를 발전시킨 것이다. 또한 그는 자연법적 예정조화의 사상에 의해 고전파 경제학의 출발점이 되었고 동시에 이를 완성시켰다. 종합적으로 볼 때, 스미스는 무역의 차액에 의한 화폐의 축적이 곧 부(富)라고 생각하는 중상주의나, 농업노동만이 생산적이라는 중농주의에 맞서 산업혁명 초기의 영국에서 산업자본의 입장을 대표하는 이론을 수립하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2]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국부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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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영국 보수당 포스터.
야만적인 사회주의가 국가의 가치를 목조르고 위협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후 등장한 영국 보수당의 전신인 토리당은 1832년 영국의 개혁 법안 이 중산층에게 선거권을 확대 한 이후 "보수 협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보수당이라는 이름은 1830년 존 윌슨 크로커( John Wilson Croker )가 Quarterly Review 에서 쓴 당에 대한 설명으로 처음 사용되었다. 최초의 보수당 정부는 로버트 필 경(Sir Robert Peel )은Tamworth 선언문 (1834)을 통해 개혁과, 법과 질서의 필요성, 질서 있는 조세 제도, 지주와 무역 및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846년 곡물법( Corn Laws)으로 알려진 보호주의 규정의 폐지를 놓고 당이 분열되면서 30년 동안 보수당은 정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벤저민 디즈레일리에 의해 당이 개편하게 되었고 결국 그는 1868년 집권에 성공하여 1874~1880년까지 총리를 지냈다. 1870년 디즈레일리가 설립한 전문 조직에 의해 새로 형성된 당에 추가적인 통합과 힘을 주게 되었고 동시에 보수당은 강한 국력의 외교 정책과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해 사회 개혁에 대한 복지 개혁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보수당은 토지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에서 중산층과 새로 고용된 노동자로부터 지지자를 끌어낼 수 있는 정당으로 변화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보수정당으로써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3]



비전이 없는 사회의 인간은 틀림없이 망한다.

(1975년 2월 보수당 대표 수락 연설)

마가렛 대처영국 보수당 정치인이자 유럽 최초의 여성 총리이다. 1827년 이후 영국에서 가장 오랜 기간 총리를 역임한 그녀는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영국 경제가 국가주의에서 자유주의 로 발전을 가속화하는데 큰 도움을 줬으며 근현대 영국에서 윈스턴 처칠 다음으로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지도자이다.

1970년대에 영국은 물가상승률이 약 26% 에 달하는 매우 높은 인플레이션을 경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취임한후 이자율과 간접세를 인상하여 통화 공급의 증가를 늦추고 인플레이션을 낮춰서 불안정한 영국 경제를 크게 안정화시켰다. 인플레이션은 대처의 지도 아래 크게 떨어졌으며 매년 4-5% 정도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4]

이시기 영국은 고질적인, 오죽하면 ‘영국병’이란 불린 정치·사회·경제적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마가렛 대처는 사회 각 분야의 땜질식 개혁이 아닌 국가 개조 수준의 혁신과 사회 재건을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신념과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영국 총리의 권한을 강력하게 사용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비판도 있었지만 반대파이든 영국 국민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대처 수상의 순수한 열정과 자기 희생, 솔선수범의 리더십이다.

마가렛 대처는 국민의 손에서 복지를 일방적으로 빼앗지 않았다. 그녀는 물론이고 내각과 공공기관, 모두 허리띠를 졸라맸다. 정책의 강요와 무조건적 통보가 아닌 대국민 설득, 정책의 합리적 시행, 정확한 목표 의식,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도 특권을 버리고 그 정책에서 예외로 두지 않은 것이다. 이 같은 마가렛 대처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영국은 수십 년간 치유되지 않은 채 계속돼온 영국병을 비교적 짧은 기간에 치료할 수 있었다.

그녀의 목표는 부와 기회의 공평한 분배를 통해 노동자 계급을 사회의 중산층으로 상향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공영주택 입주 권리를 노동자에게 부여해 계급과 소득 향상의 첫 단계를 이루는데 정부의 힘을 집중했다. 그 결과 대처 취임 이후 중산층이 증가하여 빈민이 감소하는 긍정적 효과도 나오게 되었다.[5]



87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 자유의 정신으로 잉태되고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신념이 바쳐진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나라가, 아니 이러한 정신과 신념으로 잉태되고 헌신하는 어느 나라이든지, 과연 오래도록 굳건할 수 있는가 하는 시험대인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전쟁의 거대한 싸움터인 이 곳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그 싸움터의 일부를, 이 곳에서 자신의 삶을 바쳐 바로 그 나라를 살리고자 한 영령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봉헌하기 위함입니다.[6]

우리의 이 헌정은 지극히 마땅하고 옳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 땅을 헌정할 수도, 축성할 수도, 신성화 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싸웠던 용맹한 전사자와 생존 용사들이 이미 이 곳을 신성한 땅으로 축성하였기에, 보잘 것 없는 우리의 힘으로 더 보태고 뺄 것 따위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 하는 말들을 별로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을 것이나[7], 그 분들이 이 곳에서 이루어낸 것은 결단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오히려 이 자리에서 우리 살아있는 자들이, 여기서 싸웠던 그 분들이 그토록 고결하게 전진시킨 미완의 과업을 수행하는 데 우리 스스로를 봉헌하여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있는 그 위대한 사명, 즉 고귀한 순국선열들이 마지막 신명을 다 바쳐 헌신했던 그 대의를 위하여 더욱 크게 헌신하여야 하고, 이 분들의 죽음을 무위로 돌리지 않으리라 이 자리에서 굳게 결단하여야 하며, 이 나라가 하나님 아래에서 자유의 새로운 탄생을 누려야 할 뿐 아니라, 인민의,[8]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통치가 지상에서 소멸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 위대한 사명에 우리 스스로를 바쳐야 합니다. <게티즈버그 연설>

미국 공화당은 미국 북부로 노예제가 확산되는 것을 허용한 캔자스-네브라스카 법이 통과된 것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모여 1854년에 창당되었다. 공화당은 창당 이래 자유주의와 노예제도 반대를 내세웠으며, 경제 재편을 통해 안정적인 재정 운용을 요구하였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첫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며, 링컨과 공화당 의원들의 노력으로 결국 노예제는 미국에서 완전히 철폐되었다. 1912년 이후부터는 공화당의 주류 세력이 보수 우익으로 확고히 자리잡았으며, 특히 남부 지역에서 많은 지지를 받으며 주류 정당으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공화당의 전신은 현재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토머스 제퍼슨이 이끈 민주공화당(Democratic-Republican Party)이었다. 민주공화당은 이후에 친(親)앤드루 잭슨파와 반(反)앤드루 잭슨파로 분열되었으며, 1828년, 앤드루 잭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반잭슨파는 연방주의자, 남부 민주공화당원, 보수주의자들을 결집하여 휘그당을 창당하였다. 휘그당은 민주당과 함께 미국의 양대 정당으로 거듭났으나, 밀러드 필모어 이후 대통령 당선자를 배출해내지 못하며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중 1854년 캔자스 네브래스카 법이 입법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노예제 찬성론자와 노예제 반대론자들 간의 타협으로 여겨지던 1820년 미주리 타협과 1850년 타협이 무효화 되어버림으로써 휘그당 내부에서도 캔자스 네브래스카 법에 대한 찬반 논란이 극심하게 일어났고, 결국 휘그당이 분열되고 말았다. 이후 네브래스카 법을 반대하는 인사들이 1854년 3월 20일에 위스콘신에 모여 첫 공식 대회를 열었으며, 옛 토마스 제퍼슨의 민주공화당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공화'(Republican)을 새로운 당명으로 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1854년에 노예제를 반대하는 옛 휘그당의 인사들, 그리고 일부 연방주의자들이 모여 새로이 창당한 당이 바로 현재의 공화당이다.

공화당은 창당된 직후부터 사회, 경제 개혁을 기치로 내걸었으며, 노예제를 절대악으로 규정하고 규탄했으나, 실제로 미국 남부에서 이렇다 할만한 성과는 내지 못하였다. 1856년 당대회에서 공화당은 미국 영토 내에서 노예제가 더 이상은 확산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으며, 이와 같은 주장은 북부에서 상당한 호응을 얻어 당시 공화당측 대통령 후보였던 존 C. 프레몬트는 1856년 대선에서 제임스 뷰캐넌에게 패배하기는 했으나, 북부의 16개 주들 가운데 11개에서는 과반 득표를 보였다.

공화당은 1860년에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며 처음으로 여당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링컨은 재선에도 성공하였으며, 결국 공화당은 국민들의 지지를 통하여 1865년 12월에 13차 개정 헌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킴으로써 노예제 철폐를 헌법에 규정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이후 공화당은 남북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발판으로 삼아 민주당을 압도하고 1866년, 1868년, 1872년 의회 선거에서 과반수를 차지하며 국정을 이끌어나가게 되었다. 다만 1872년 이후에 당선된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이 지지부진한 경제적, 외교적 성과를 보이고, 특히 율리시스 S. 그랜트 행정부의 부정부패와 같은 사건이 연이어 터지며 공화당의 지지세가 크게 약화되어 1874년부터 1894년까지 약 20년간 2번을 제외하고는 원내 2당의 지위에 머무르게 되었다.

공화당은 19세기 내내 높은 관세를 통해 자국 산업을 보호할 것과, 높은 임금과 높은 생산성, 남북 전쟁 참전 용사들에게 연금 지급, (1893년 이후부터)하와이의 병합 등을 강조하였다. 당시 공화당은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상당히 높은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이후 미국의 국력이 북부를 중심으로 급성장하며 공장, 도로, 광산, 대도시들이 세워지고 일자리들이 급증하자 이와 같은 성과에 힘입어 국민들의 신임을 얻으며 고속 성장을 위한 정책을 펼쳐나갔다. 19세기 동안 연방의 강력한 힘을 추구하는 공화당 정권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며, 미 연방정부의 권력은 상대적으로 증대하게 되었다. 공화당 정권들은 국가 주도 철도 사업, 국책 은행, 대규모의 질 좋은 공립 교육, 전쟁 참전 용사들에 대한 연금 등을 지급하며 현 복지 국가의 기틀을 놓았다. 다만 외교 정책에서 파나마, 하와이, 필리핀과 같은 지역들을 군력으로 병합하며 일부 제국주의 성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현재 공화당의 주요 이념은 보수주의이며, 작은 정부, 적은 세금, 자본주의 체제, 이민 제재, 확장된 국방 운용정책, 총기 소유, 노동조합에 대한 엄격한 규제 등을 주요 정책으로 주장한다. 1973년에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사건에 대한 논란에 휩싸인 이후부터는 당의 공식 이념으로 낙태 반대를 내세우고 있다. 또한 20세기 후반 이후 시작된 급속한 세계화의 물결이 미국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판단, 미국의 보호무역을 옹호하며 관세를 통해 수출입량을 조절할 것을 주장한다.

공화당은 지금까지 총 19명의 대통령을 배출했으며, 이는 민주당을 포함한 미국의 그 어떠한 정당들보다 많은 대통령을 배출하였다. 2020년 공화당은 상원의원 선거에서 50석을 얻었으며, 주지사 선거에서는 민주당보다 4석 많은 27석을 확보하였다. 또한 미 연방 대법원 판사들 9명 중 6명이 공화당에 우호적인 인사로 알려져 있다. 공화당의 상징인 코끼리인데, 19세기 후반 미국의 정치만평가 토머스 네스트가 자신의 정치만평에서 민주당을 당나귀로, 공화당을 코끼리로 표현한 이래 코끼리가 당의 상징이 되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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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1888~1965)

탐구의 종착점은 우리가 출발한 곳에 도착하는 것이고 첫 장소를 알게 되는 것이다.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은 1888년생의 시인, 문예평론가이다. 엘리엇이 태어난 영국에서는 문학을 통해 정치를 비판하는 경우가 많고, 그의 정치사상적인 주장도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엘리엇은 질서와 전통을 중시해야한다고 말하였다. 원래 문화라는 것은 세대를 넘어 계승할 수 있는 것으로, 그것이 전통이 된다. 그리고 문화는 계급이나 가족에 의해 지지되어 그것이 큰 사회로 이어진다고 주장하였다.그러나 이 가족이나 계급이라는 집단문화가 단편화되어 집단이 서로 의사소통하지 않게 되면 문화가 붕괴되어 문명을 만들수가 없게 된다. 이처럼 엘리엇은 사회주의라는 이상적이고 급진적인 혁명에 의해 가족이라는 사회가 망가지면 문명을 잃어버린다고 우려하였다. 당시의 엘리엇을 따르던 문인들은 예술이나 문화는 보수적인 지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발전해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유란 단지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자유야말로 다른 도덕적 가치의 근원이자 전제조건이다. 자유로운 사회는 개개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이상의 것을 가져다 준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로 시장경제의 열렬한 옹호자이다. 1931년 런던 정경대학 교수가 되었고, 미국 시카고 대학(1950-62), 독일 프라이부르그대학(1962-68) 등에 재직했다. 1974년에 군나르 뮈르달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에 칠레 피노체트 군사정권의 자유주의 경제개혁을 지지했고, 70년대 후반부터는 대처 수상이 이끈 영국 보수당의 경제정책 자문 역할을 했다. 주요 저서로는 「노예의 길」(1944), 「자유헌정론」(1960), 「법 입법, 그리고 자유」(1976-79) 3부작, 최후의 저서로 「치명적 자만」(1989) 등이 있다. 하이에크가 젊은 시절을 보낸 1920-40년대는 대공황으로 자본주의 모순이 드러나고, 사회주의체제가 성립하며, 독일 등에서는 파시즘체제가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전후에는 대부분의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도 케인즈 경제학에 기반한 국가의 경제 개입이 보편화되었다. 이 가운데서 그는 사회주의경제와 국가의 경제 개입을 비판하고 자유시장 자본주의경제를 옹호하는데 평생을 바쳤다.[10]

전쟁 기간 정부의 통제하에 생산과 분배가 이뤄진 경험은 생산력의 극대화와 완전고용의 달성을 이룬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에 있다고 봤다. 슘페터의 '기업가 정신'을 생각해보라. 애덤 스미스는 이기적인 동기를 가진 사람들이 경제의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이 시장이라고 일찍이 지적했다. 이때 형성되는 가격은 시장 참여자들에게 어떤 재화가 더 필요하고 덜 필요한지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한다. 하이에크는 거기에 덧붙여 경쟁이 가격 발견 과정을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상품을 만들 때 어떤 제조 방법과 경영 기법을 사용해야 가장 비용이 낮아지는지 실제로 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도전적 기업인이 새로운 시도를 성공했을 때 그 노하우가 널리 퍼져나가면서 경제 전체의 진보가 이뤄진다. 경쟁은 이런 식으로 최적의 생산방식과 그때의 가격을 드러나게 한다.

반면 사회주의파시즘 정치 모두 마찬가지로 시장에 개입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경쟁을 제한한다. 정부는 구성원 삶의 수준을 개선하려고 노력하지만 시장 개입을 통한 시도는 경쟁을 제한하고 시장과 가격의 기능을 마비시킨다. 이자율 제한이나 생필품 가격 통제, 최저임금제 등이 그 사례다. 높아진 우유 가격은 낙농업자에게 우유 생산을 늘리라는 신호가 되지만, 생필품이라는 이유로 가격을 상승하지 못하게 한다면 생산 증가 시도는 없어지고 빈민들은 여전히 우유 부족에 시달릴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집산주의 자체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또 사유재산제를 통해 생산수단이 분산돼 있으면 권력 또한 분권화되지만 사회주의 체제처럼 생산설비가 정부에 집중돼 있으면 아무에게도 견제받지 않는 '독재' 상태가 되며 개인의 성취욕은 감소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경제적 자유를 상실하면 결국 정치적 자유 또한 상실하고 '노예'가 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11]


『사회주의체제에서는 생산수단의 수요와 공급이 국가기관에 의해 독점되어 화폐 가격이 객관적으로 성립될 수 없으며, 생산수단의 상대적 희귀성을 반영하는 화폐 가격 없이는 합리적 경제계산은 불가능하다.』 - 《사회주의》 中에서


미국의 경제학자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결정과정에 무수히 많은 경제주체들의 폭넓은 참여가 보장되는 자본주의와 달리 사회주의에서는 모든 생산활동을 지시하는 오직 하나의 분리불가능한 의지를 설정하며, 이에 따라 오로지 하나의 행위자에게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권력을 부여하게 된다고 비판하였다.미제스에 따르면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반감을 갖는 반자본주의 심리는 원망과 시기심, 그리고 삶을 실제의 모습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상 속에서 삶의 도피처를 찾는 푸리에 복합감정이라고 하는 일종의 정신병에 기인한다고 말하였다.

나의 불행은 나의 실책이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유재산, 경쟁 등등에 기인한다고 생각하고, 이것을 뒤엎어 사회주의가 되면 온전히 행복한 왕국에서 자신의 꿈도 이루어지리라는 망상을 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전쟁이나 기아 등의 비극에서 벗어나 희망을 찾으려면 자유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며, 아직까지 자유주의가 완벽하게 실현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유의 원칙을 더욱 확대할 여지가 많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진정한 진보가 이뤄진다고 미제스는 말했다.그는 현재도 사회주의의 침투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며 이 싸움의 결과에 모든 사람의 이해가 달려있기 때문에 관심이 없다면서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사회주의와의 이 지적인 투쟁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촉구를 하였다.[12]

파일:Michael_Oakeshott.jpg
마이클 오크숏 (1901~1990)

보수적이라는 것은 미지의 것보다 친숙한 것을 선호하는 것, 시도하지 않은 것보다 시도된 것을 선호하는 것, 신비보다 사실을 선호하는 것, 가능한 것보다 실제를 선호하는 것, 무한한 것보다 제한된 것을, 먼 것을 먼 것을 선호하는 것, 과잉된 것보다 충분한 것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 편리함을 완벽하게, 현재의 웃음을 유토피아적 행복으로.

마이클 오크숏 은 1901년생의 영국 정치학자로 보수주의적인 사상가이다. 그는 보수주의의 입장에서 합리주의자를 비판했다.

합리주의자는 이성을 강조하고 권위, 전통, 관습 등으로부터 정신의 독립을 주장합니다.


「옛 전통에서 벗어나 이성의 힘으로 사회를 바꾸어 가자」


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크 숏은 그러한 이성을 강조하는 합리주의자를 비판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은 관습이나 전통과 같은 과거의 실천 속에 숨겨져 있는 것이며, 거기에서 이성만을 독립해서 꺼낼 수 없다고 생각했기때문이다. 따라서 '정의', '자유' , '민주주의' 와 같은 이념도 긴 역사적인 경험 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이며, 거기만 꺼내 다른 사회에 심을 수 있을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가 발흥한 시대의 보수주의자들은 이성에 의해 혁명을 일으키려고 하는 사회주의에 대해 “이성은 경험에서 멀리 존재할 수 없다” “이성은 만능이 아니다” “이성 을 과신하지 말아라」라는 메시지를 전해 사회를 바꾸려는 풍조에 이의를 제기한것이었다.[13]

기본적으로 우파는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는 것을 선호하나, 우파 내에서도 국가의 역할을 상당히 인정하는 권위주의적인 우파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자유주의 우파로 나뉘게 된다. 흔히 보수주의는 권위주의적 우파에 해당하지만, 보수주의가 우파의 본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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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2] #[3] 출처[4] 출처[5] 출처[6]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A new nation → that nation, a great civil war → that war, a great battlefield → that field 등으로 지시형용사 that이 일관되게 사용되며 문장을 긴밀하게 연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that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모든 that마다 '바로'라고 칭하였다.[7] 링컨이 자신의 연설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는 발언이기도 했다. 위에 적혀있듯, 자신의 연설이 실패했다고 연설 뒤에 회고하기도 했고 말이다. 물론 우리는 그 결말을 안다. 이 연설은, 향후 몇백 년 간이나 회자될 명연설이 되었음을 말이다.[8] 이 부분이 뒤로 가는 번역도 있다.[9] 출처[10] 출처[11] 출처[12] <선택할 자유> 자유기업원2003[13]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