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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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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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夏) 초대 국왕
우왕
禹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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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우왕(禹王)
출생
기원전 2123년
사망
기원전 2025년 (향년 97~98세),[1] 회계

사(姒)

하후(夏后), 하(夏)

문명(文命)

고밀(高密)
아버지
숭백(崇伯) (鯀)
재위 기간
기원전 2070년? ~ 기원전 2025년? (45년)

1. 개요
2. 상세
3. 생애
3.1. 아버지 곤과 우의 탄생
3.2. 우, 치수공사에 돌입하다
3.3. 구주(九州)의 개통
3.4. 구산(九山)과 구천(九川)의 개통
3.5. 강역
3.6. 순과 고요
3.7. 우의 고견
3.8. 그대들은 모두 짐의 다리와 팔, 귀와 눈이 되시오
3.9. 단주처럼 오만해서는 안 된다
3.10. 우가 말하다
3.11. 순, 우에게 제위를 넘기다
3.12. 고요의 죽음
3.13. 우, 회계에서 세상을 떠나다
4. 행적
5. 논란
6. 가족 관계
7. 우의 무덤
8. 기타 창작물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그대는 물과 땅을 다스리는 일에 오로지 온 힘을 다 하시오. - 제순


진실로 덕정을 펼치면 일을 밝게 결정하고 군신이 화합할 것입니다. - 고요


“모든 일을 그렇게 하기란 요 임금도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을 알려면 지혜로워야 하고, 지혜가 있어야 사람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인민을 편안하게 해야 은혜롭다 할 수 있고, 그러면 백성들이 그 덕을 마음으로 따릅니다. 지혜롭고 은혜롭다면 환두(驩兜)를 근심할 필요가 없으며, 유묘(有苗)를 내쫓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 교묘한 말과 웃는 얼굴로 아부하는 자들을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중국 문헌에 최초의 세습 왕조로 기록된 하나라의 첫 번째 국왕. 이름인 우를 따서 우왕(禹王)이라 칭한다.

하나라의 실존여부가 불분명하지만, 우왕의 경우 고고학적으로 약 2900년 전인 주나라 중기 때 만들어진 청동제 예기 遂公盨에서 우왕의 치수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우왕의 치수 전설은 적어도 주나라 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2. 상세[편집]


곤의 아들이자 전욱 고양씨의 손자로, 중국사상 반(半) 전설상의 국가인 하나라의 건국자이며 초대 천자였다. 중국 신화삼황오제 중 제 유우씨에게 군주의 자리를 선양받아 하나라를 건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기》의 기록을 보면 뛰어난 능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 기록은 약 2,000년 뒤에 만들어진 기록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여기서 제순에게 선양을 받았는지 아니면 찬탈했는지에 논란이 있다. 역사적으로 제순이 제요 도당씨로부터 선양받은 것이 아니라 거의 찬탈에 가까웠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왕도 찬탈를 해서 군주가 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근거가 확실히 없으며, 제순처럼 제요를 감금하고 요의 신하들을 숙청한 기록도 특별히 없기 때문에 멋대로 우가 왕위를 찬탈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담으로 우는 이름인 사문명보다는 그냥 우왕으로 불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대우(大禹)라고 불린다. 4천 년이 넘는 중화 역사의 초대 천자임에도 불구하고 시호나 묘호를 후대에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한두 줄로 끝나는 다른 군주와는 다르게 본인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기록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중국 최초의 세습 왕조의 초대 군주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다.

이름인 문명은 '글월 문', '목숨 명'으로 '임금의 문덕(文德)의 교명(敎命)'의 뜻을 가진 '문명'과 한자가 같다. 또한 이름 대신 자주 불리는 '우(禹)'는 성으로도 쓰이지만 임금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이 글자가 원래부터 그런 뜻을 가진 글자였는지 우왕이 군주가 된 뒤 생겨난 뜻인지는 불명이다. 비슷한 길을 걸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이 훗날 '황제(Kaiser)'라는 단어의 어원이 된 것처럼 우왕의 '우(禹)'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만 있을 뿐.


3. 생애[편집]



3.1. 아버지 곤과 우의 탄생[편집]


우의 아버지인 곤(鯀)삼황오제 중 한 명인 전욱 고양씨의 아들이다. 전욱은 제위에 올랐으나 곤은 제위에 오르는 대신 제(堯) 도당씨의 신하가 되었다.

제요는 넉넉했으나 교만하지 않고, 귀했으나 우쭐대지 않았다. 또한 누런 모자를 쓰고 검은 옷을 입었다. 하얀 말이 끄는 붉은 마차를 탔고, 덕을 밝히니 구족이 친했다. 구족이 화목하니 백관의 자리를 안배했고, 백관이 정치를 잘 하니 만국이 화합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때도 계속 평화롭지는 않았는데 바로 불덩이 같은 태양이 10개나 나온 것이었다. 하늘 용사 의 도움으로 태양이 겨우 1개로 줄었으나 기원전 3000년, 중원 땅에 대홍수가 들이 닥쳤다. 물이 범람하면서 골짜기에서 언덕 높이까지 온 땅이 물에 잠겼고, 해가 갈수록 집을 잃고 산으로 피신가는 백성의 수는 늘어만 갔다.

신하들은 이를 보고 제요에게 중원에 대홍수가 들이닥쳐 나라가 어지러우니 이에 대처하라고 간언하였다. 신하들의 간언이 끊이질 않자 제요는 먼 친척이었던 곤을 부르게 된다. 곤을 부른 제요는 곤에게 지금 중원에 대홍수가 들이 닥쳐 집을 잃고 피신가는 백성의 수가 셀 수 없다며 치수 공사에 돌입할 것을 명령하였고, 제요의 명령을 받은 곤은 치수 공사에 돌입하게 된다.

곤은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자 백성들을 위해 몰래 식양을 사용해 제방을 만들었으나 그는 식양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몰랐고, 9년 동안 둑과 제방을 쌓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중 제요는 아들이었던 단주 대신 순(舜)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제위를 물려 받은 제순 유우씨는 치수 공사를 맡고 있었던 곤의 능력이 물을 다스릴 능력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고, 곤에게 식양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관직을 박탈한 후 추방하였다가 이후 처형하였다. 그리고 처형당한 곤의 시체에서 우가 탄생하게 되었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서는 대부분의 내용이 같으나 곤이 식양을 사용했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으며 제요가 곤의 능력을 알고 걱정하는 내용이 나온다. 내용은 이렇다.

요가 말했다.

“홍수가 하늘까지 넘쳐서 물줄기가 산을 감싸고 언덕까지 덮치니 인민들의 걱정이 태산인데, 이 홍수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없겠소.”

그러자 신하들이 입을 하나로 모아 대답했다.

"전욱의 아들인 곤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는 이렇게 대답했다.

“곤은 명을 어기고 동족을 훼손시켰으니 안 되오.”

그러자 신하 중 한 명인 사악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시험해 보시고 안 되면 그만두게 해도 됩니다.”

요는 곤에게 명령했으나 9년의 시간 동안 대홍수를 막지 못했다.

요의 뒤를 이은 순은 곤의 능력으로 홍수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고 곤의 관직을 박탈했다.



3.2. 우, 치수공사에 돌입하다[편집]


제순은 곤의 아들인 우를 등용했고, 우의 아버지 곤이 실패한 치수 공사를 명령하였다. 우는 아버지 곤이 사용하였던 종전 방식을 완전히 바꾸었는데 그는 능력이 뛰어난 보좌관들을 데리고 온 나라를 여기저기 살피며 전국의 지형을 익혔다. 또한 여러 지역의 물의 수위와 물살을 배웠고 백성들과 함께 강바닥을 파냈다. 물길을 열어 물이 바다로 흘러가게 한 것이었다. 또한 수로 체계를 만들어 밭에 물을 댈 수 있도록 했다.

우는 이 일을 무려 13년 동안 꾸준히 하였다. 13년 동안 열심히 한 덕분에 홍수를 막을 수 있었지만 우가 흙탕물에서 일하다 보니 다리털이 모두 빠졌고,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장기간 일했기 때문에 피부가 짙은 갈색이 되었으며, 강바닥 파내는 일을 너무 오래 하다보니 굳은 살로 인해 손 모양이 일그러져 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13년 동안의 노력으로 2대에 걸친 치수 공사를 완수할 수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우는 결혼한 지 겨우 4일 만에 제순의 부름을 받고 집에서 나섰고 온나라를 순찰하는 동안에는 집 근처로 3번을 갔지만 집에 들르지 않았다. 자신의 가족을 만나는 일로 작업이 지연될 수 있기 때문에 들르지 않았던 것이었다. 또 어떨 때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 울고 있을 때도 집을 들르지 않았다.

《사기》에서는 우의 능력과 치수 공사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는데 내용은 이렇다.

우는 사람됨이 영민하고 의지가 강하며 부지런했다. 그 덕은 어김이 없었고, 어질어서 가까워지기 쉽고, 말에는 믿음이 있었다. 목소리는 화기애애했고, 행동은 법도에 맞았으며, 일을 공평하게 처리했다. 반듯하고 부지런하여 위아래의 모범이 되었다.

우는 곧 익, 후직과 함께 임금의 명을 받들어서 제후와 백관들에게 사람들을 동원해 공사를 시작하게 했다. 산으로 가서 나무를 세워 높은 산과 큰 물들을 측정하는 표시로 삼았다. 우는 선친 곤이 공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이 마음 아파 노신초사(勞身焦思)[2]

하면서 13년을 밖에서 지냈는데 집 대문 앞을 지나면서도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입고 먹는 것을 간소하게 해서 귀신에게 정성을 다했으며, 누추한 궁실에 살면서 절약한 비용을 도랑을 파는 일에 들였다. 육지를 다닐 때는 수레를 탔고, 물로 갈 때는 배를 탔다. 진흙탕은 썰매를 탔고, 산길은 바닥에 징을 박은 신발을 신었다. 왼손에는 수준기와 먹줄을 들었고 오른손에는 그림쇠와 직각자를 들고 다녔다. 사계절을 측량하고 아홉 개의 주(구주, 九州)를 개척하고, 아홉 개의 큰 길(구도, 九道)을 뚫었다. 아홉 개의 큰 연못(구택, 九澤)을 조성하고, 아홉 개의 큰 산(구산, 九山)에 길을 냈다. 익에게는 백성들에게 볍씨를 주어 낮고 습한 땅에 심도록 명했다. 후직에게는 백성들이 얻기 어려운 먹거리를 나눠주라고 명했다. 먹을 것이 적은 곳은 남는 곳의 것을 조정하여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제후들의 균형을 맞추었다. 우는 또 다니면서 그 땅에 맞는 것을 공물로 삼되 산과 하천의 편리함에 따랐다.



3.3. 구주(九州)의 개통[편집]


우는 구주를 개통했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게임을 해본 사람이나 중국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다 알 것이다. 이는 사기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우는 기주(冀州)에서 일을 시작했다. 호구산(壺口山)을 다스리고 양산(梁山)과 기산(岐山)을 다스렸다. 태원(太原)을 다스리고 태악산(太嶽山, 항산) 남쪽에까지 이르렀다. 담회(覃懷)에서 공을 이룬 다음 장하(漳河)에 이르렀다. 이곳의 땅은 희고 기름져 세금을 내는 등급으로 1등급, 전답은 5등급이었다. 상수(常水)와 위수(衛水)가 물길대로 흐르고 대륙택(大陸澤)도 조성되었다. 오이(烏夷)의 공물은 가죽옷인데 오른쪽으로 갈석산(碣石山)을 끼고 바다(또는 황하)로 운송되었다.

제수(濟水)와 황하 사이에 연주(沇州)가 있다. 구하(九河)에 길이 나고 뇌하(雷夏)가 큰 호수가 되자 옹수(雍水)와 저수(沮水)가 하나로 합쳐져 들어갔다. 땅에는 뽕나무를 심어서 누에를 쳤다. 이렇게 (물이 물러나자) 인민들은 언덕을 내려와 평지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의 땅은 검고 기름지며, 풀은 무성하고 나무는 곧게 잘 자랐다. 전답은 6등급, 세금 등급은 9등급이었으나 13년 사업 끝에 같아졌다. 이곳의 공물은 옻나무와 견사, 대광주리에 담은 무늬가 있는 견직물이었다. (공물들은) 제수와 탑수(漯水)를 따라 황하로 통했다.

대해(大海)와 태산(泰山) 사이에 청주(靑州)가 있다. 우이(堣夷)를 평정하여 유수(濰水)와 치수(淄水)가 소통되었다. 그 토질은 희고 기름지고, 바닷가는 넓은 개펄이라 소금기가 있는 땅을 개간한 밭이 많다. 전답은 3등급이고 세금 등급은 4등급이었다. 이곳의 공물은 소금과 가는 갈포(葛布), 여러 가지 해산물, 태산의 계곡에서 생산되는 견사, 대마, 납, 소나무, 괴석, 내이(萊夷)의 축산물, 대광주리에 담은 작잠사(柞蠶絲)가 있다. (이 공물들은) 문수(汶水)에서 배로 제수(濟水)로 운반되었다.

대해와 태산, 회수(淮水) 사이에는 서주(徐州)가 있다. 회수와 기수(沂水)가 다스려지고 몽산(蒙山)과 우산(羽山)에 나무를 심었다. 대야택(大野澤)이 호수가 되고 동원(東原)이 평탄해졌다. 그 토질은 붉고 기름지며 풀과 나무가 갈수록 무성해졌다. 전답은 2등급이고 세금 등급은 5등급이었다. 공물은 오색토와 우산 계곡의 꿩, 역산(嶧山)의 남쪽에서서만 나는 오동나무, 사수(泗水) 가의 부석으로 만든 경(磬), 회이(軛夷)의 진주와 어류, 대광주리에 담은 흑백의 견직물이다. (이 공물들은) 회수와 사수에서 배로 실어 황하로 통한다.

회수와 대해 사이에는 양주(揚州)가 있다. 팽려(彭蠡)가 호수가 되자 기러기가 살게 되었다. 세 개의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진택(震澤)은 잘 정리되었다. 대나무가 곳곳에서 자라고, 들풀은 무성하며, 나무는 크게 자란다. 토질은 습기가 많은 진흙땅이다. 전답은 9등급이며, 세금 등급은 7등급과 6등급 사이다. 공물은 세 종류의 금속, 옥돌, 대나무, 상아, 가죽, 깃털, 검정소의 꼬리, 도이족(島夷族)이 입는 풀로 짠 옷, 대광주리에 담은 오색 비단이다. 때로는 포장한 귤과 유자도 공물로 바쳤다. 이 공물들은 장강과 대해를 따라서 회수와 사수로 들어온다.

형산(荊山)에서 형산(衡山) 이남까지는 형주(荊州)다. 장강과 한수(漢水)가 종묘를 향해 흘러 가듯 바다로 들어간다. 아홉 줄기로 나누어진 강물이 중앙을 관통하며 흐르고 타수(沱水)와 잠수(涔水)가 소통되니 운택(雲澤)과 몽택(夢澤) 지역이 다스려졌다. 그 토질은 습기가 많은 진흙땅이며 전답은 8등급이고 세금 등급은 3등급이었다. 공물은 깃털, 검정소 꼬리, 상아, 가죽, 세 종류의 금속, 참죽나무, 산뽕나무, 향나무, 잣나무, 숫돌, 노석(砮石), 단사(丹砂), 세 제후국에서 바치는 유명 특산물인 균죽(箘竹)과 노죽(簬竹), 호목(楛木), 잘 포장한 정모(菁茅), 대광주리에 담은 진홍색 견직물과 꿰미로 엮은 진주이며, 때로는 구강(九江)의 큰 거북도 있었다. 이 공물은 장강과 타수, 잠수, 한수에서 배에 실어서 낙수(洛水)를 지나 남하(南河)로 운반했다.

형산(荊山)과 황하 사이에는 예주(豫州)가 있다. 이수(伊水), 낙수(洛水), 전수(瀍水), 간수(澗水) 모두 황하로 흘러들어가고, 형파(滎播)는 물이 모여 호수가 되었다. 하택(荷澤)의 물길이 잘 잡혀 명도택(明都澤)으로 잘 흐른다. 토질은 부드러운데 지대가 낮은 곳은 검고 기름지다. 전답은 4등급이고, 세금 등급은 2등급과 1등급을 오간다. 공물은 옻나무, 견사, 갈포, 모시, 대광주리에 담은 가는 솜이며, 때로는 석경을 만드는 돌을 바쳤다. 이 공물은 낙수에서 배에 실어서 황하로 운반했다.

화산(華山)의 남쪽과 흑수(黑水)사이는 양주(梁州)이다. 민산(岷山)과 파총산(嶓冢山)이 개발되어 타수와 잠수가 모두 소통되었다. 채산(蔡山)과 몽산(蒙山)까지 잘 정비되어 화이(和夷)가 이득을 보았다. 토질은 검푸른 색이다. 전답은 7등급이고 세금등급은 8등급이나 풍년과 흉년에 따라 7등급과 9등급을 오간다. 공물로는 좋은 옥, 철, 은, 강철, 노석, 경쇠, 곰, 말곰, 여우, 너구리, 융단이 있다. 서경산(西傾山)의 공물은 환수(桓水)를 따라 운반했는데 잠수(潛水)에서 배에 실어서 면수(沔水)를 지나서 위수(渭水)로 들어가서 황하를 건넜다.

흑수와 서하(西河) 사이는 옹주(雍州)이다. 약수(弱水)는 서쪽으로 흐르고, 경수(涇水)는 위수와 합류했다.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는 순조롭게 위수로 흘렀고, 풍수(澧水)도 역시 위수로 합류하였다. 형산(荊山)과 기산의 길을 닦으니 종남산(終南山)과 돈물산(敦物山)에서 조서산(鳥鼠山)에 이르는 지역이 모두 다스려졌다. 고원과 저지대의 일이 잘 되자 도야택(都野澤)까지 이득을 보게 되었다. 삼위(三危)가 정돈되니 삼묘(三苗)도 크게 질서가 잡혔다. 토질은 누런색에 부드럽다. 전답은 1등급이고 세금 등급은 6등급이다. 공물은 좋은 옥과 여러 가지 돌들이다. 공물은 적석산(積石山)에서 배에 실어서 용문(龍門) 아래의 서하(西河)를 거쳐 위수에서 만난다. 곤륜(昆侖), 석지(析支), 거수(渠搜)에서 바친 융단도 있다. 서융(西戎)도 질서가 잡혔다.



3.4. 구산(九山)과 구천(九川)의 개통[편집]


또한 우는 구산과 구천까지도 개통하였다. 이 역시도 《사기》에 자세히 나와있다. 내용은 이렇다.

아홉 개 산맥을 개통했다. 견산(汧山)과 기산은 황하를 넘어 형산(荊山)까지 이어진다. 호구산(壺口山)과 뇌수산(雷首山)은 태악산(太嶽山)까지 이어진다. 지주산(砥柱山)과 석성산(析城山)은 왕옥산(王屋山)까지 이어진다. 태행산(太行山)과 상산(常山)은 갈석산(碣石山)에 이르러 바다로 뻗어간다. 서경산(西傾山), 주어산(朱圉山), 조서산(鳥鼠山)은 화산까지 이어진다. 웅이산(熊耳山), 외방산(外方山), 동백산(桐柏山)은 부미산(負尾山)까지 이어진다. 파총산(嶓冢山)에 길을 내서 형산(荊山)까지 이르게 했다. 내방산(內方山)은 대별산(大別山)까지 이르고, 문산(汶山)의 남쪽은 형산(衡山)까지 이르는데, 구강(九江)을 지나서 부천원(敷淺原)에 이른다.

아홉 개의 하천을 통하게 했다. 약수(弱水)는 합려(合黎)에 이르고, 그 갈래는 유사(流沙)로 흘러든다. 흑수(黑水)의 물길은 삼위(三危)에 이르고 남해로 흘러든다. 황하의 물길은 적석산을 지나 용문까지 이르고, 남으로 화산의 북쪽으로 흐르다 동으로 지주산으로 흘러서, 다시 동쪽 맹진(孟津)으로 흐른다. 다시 동으로 낙수를 지나 대비산(大邳山)에 이르고, 다시 북으로 강수(降水)를 지나서 대륙택(大陸澤)에 이른다. 여기서 북으로 아홉 갈래로 나누어진 다음 다시 합류하여 역하(逆河)가 되어 바다로 흘러든다. 파총산에서 시작되는 양수(瀁水)는 물길을 따라서 동으로 흘러 한수가 되고, 다시 동으로 흘러서 창랑수(滄浪水)가 된 다음 삼서수(三澨水)를 지나 대별산으로 들어가 남쪽의 장강으로 흐르고, 다시 동으로 모여 팽려택(彭蠡澤)이 된다. 여기서 동으로 흘러서 북강(北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민산(岷山)에서 발원한 장강은 동으로 타수(沱水)로 갈라지고, 다시 동으로 예수(醴水)에 이르러 구강(九江)을 지나 동릉(東陵)에 이른다.

여기서 북으로 비스듬히 흐르다 팽려택에서 만나 동쪽으로 흘러 중강(中江)이 되어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연수(沇水)의 물길은 동으로 흘러 제수(濟水)가 되어 황하로 들어가는데, 제수가 흘러넘쳐 형택(滎澤)을 이룬다. 동으로 도구(陶丘)의 북쪽을 지나고, 다시 동으로 흘러 하택(荷澤)에 이른다. 다시 동북으로 흘러서 문수(汶水)와 합류한 다음 다시 동쪽을 향해 북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회하(淮河)는 동백산(桐柏山)에서 시작되어 동으로 흘러서 사수(泗水), 기수(沂水)와 합류해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 위수(渭水)는 조서동혈산(鳥鼠同穴山)에서 내려와 동으로 흘러서 풍수(澧水)와 합류해 다시 동북쪽 경수(涇水)에 이르고, 동으로 칠수(漆水)와 저수(沮水)를 지나서 황하로 흘러든다. 낙수는 웅이산에서 시작되어 동북으로 흘러서 간수(澗水), 전수(瀍水)와 합류하고, 다시 동으로 흘러서 이수(伊水)와 합류해 동북 흐르다 황하로 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구주는 하나가 되고, 사방 모두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구산이 개통되자 다닐 수 있게 되었고, 구천이 통하고, 구택에는 제방을 쌓았다. 사해가 하나로 모이고, 모든 땅이 잘 다스려졌다. 땅은 알맞게 등급을 매겨 신중하게 세금을 매겼는데 모두 세 등급에 따라 거두었다. 중국에 땅과 성을 내리면서 “기꺼이 덕을 받들고 짐의 통치가 어긋나지 않게 행하라”고 하였다.



3.5. 강역[편집]


우는 이뿐만이 아니라 강역도 개통하였다. 이 역시 《사기》에 나와있고 내용은 이렇다.

천자의 나라 밖 500리를 전복(甸服)이라 부르게 했다. 100리 이내는 세금으로 볏단을, 200리 이내는 곡식의 이삭을, 300리 이내는 곡식의 낟알을, 400리 이내는 빻지 않은 쌀을, 500리 이내는 빻은 쌀을 바치게 했다. 전복 밖 500리는 후복(侯服)이라 했다. 전복에서 100리 이내는 경대부의 채읍(采邑)이고, 200리 이내는 천자를 받드는 소국이며, 300리 이내는 제후국이다. 후복 밖 500리는 수복(綏服)이다. 후복 300리 이내는 정황을 살펴 문으로 교화하고, 200리 이내는 무를 떨쳐 지켰다. 수복 밖 500리는 요복(要服)이다. 300리 이내는 이족(夷族)의 거주지이고, 200리 이내는 범법자들이 산다. 요복 밖 500리는 황복(荒服)이다. 300리 이내는 만족(蠻族)이 거주하고, 200리 이내는 죄인을 추방하는 곳이다.

동으로는 바다에, 서로는 사막에까지 이르고, 북과 남에도 덕을 입으니 교화가 사방에 이르렀다. 이에 순 임금은 우에게 검은 옥을 내려서 천하에 성공을 알리니 천하는 크게 잘 다스려졌다.



3.6. 순과 고요[편집]


고요는 사법관이 되어 인민을 다스렸다. 어느날 군주 제순은 조회(朝會)를 열었고, 조회에는 고요와 우 그리고 백이가 참여했다. 고요는 조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실로 덕정을 펼치면 일을 밝게 결정하고 군신이 화합할 것입니다” 고요는 자신의 생각을 펼친 것이었다. 그러자 우가 물었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을 것 같소?” 우가 묻자 고요가 대답했다. “삼가 자신의 몸을 수양하고 멀리 생각하며, 구족을 돈독히 하고 유능한 사람의 보좌를 받고,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이르게 하되 모두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군요 라고 대답하며 고요에게 절을 하였다.

고요는 “사람을 알고 인민을 편안하게 하면 됩니다” 라고 말했고 그러자 우가 고요에게 대답하였다.

“모든 일을 그렇게 하기란 요 임금도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을 알려면 지혜로워야 하고, 지혜가 있어야 사람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인민을 편안하게 해야 은혜롭다 할 수 있고, 그러면 백성들이 그 덕을 마음으로 따릅니다. 지혜롭고 은혜롭다면 환두(驩兜)를 근심할 필요가 없으며, 유묘(有苗)를 내쫓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 교묘한 말과 웃는 얼굴로 아부하는 자들을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

고요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저 행동에는 아홉 가지 덕, 즉 구덕이 필요하며, 말을 할 때도 덕이 필요합니다” 고요는 이렇게 말하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일을 살피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너그러우면서도 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주관이 있고, 사람과 잘 지내면서도 무게가 있고, 재능이 있으면서도 신중하고, 따르면서도 견고하고, 정직하면서도 온화하고, 간결하면서도 구차하지 않고, 굳세면서도 착실하고, 강하면서도 도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 구덕을 꾸준히 실천하면 아주 좋습니다. 이것들 중에서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세 가지 덕행을 실천하면 경대부는 자기 집안을 지킬 수 있습니다. 여섯 가지를 실천하면 나라를 관리하는 훌륭한 제후가 될 수 있습니다. 아홉 가지 모두를 신천하면 훌륭한 인재를 관직에 쓸 수 있고, 백관은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간사하고 음흉한 일을 꾀하는 자들은 나서지 못하게 됩니다. 자격이 없는 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이를 천하대사를 어지럽힌다고 합니다. 하늘이 죄를 지은 자를 벌할 때면 그 죄에 맞게 오형을 내립니다. 제가 올린 이 말씀이 정말 시행될 수 있겠습니까?”

우는 “그대의 말은 실행되어 공적을 이룰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고요를 칭찬했다. 그러자 고요는 말했다. “제가 지혜롭지 못하지만 오로지 어찌하면 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뿐입니다” 그러자 제순이 우에게 말했다. “우, 자네도 의견을 내보시오” 그러자 우는 대답했다.


3.7. 우의 고견[편집]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라며 제순에게 절을 하였다. 그리고 말했다. “저는 매일 부지런히 일할 것만 생각합니다” 그때 고요가 물었다. “부지런히 일할 것만 생각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라고 물으며 우를 난처하게 하였는데 여기서 우는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홍수가 하늘까지 넘쳐 산을 감싸고 언덕을 집어삼켜 백성들은 인민들이 모두 물 걱정을 하며 살았습니다. 저는 흙길은 수레를 타고, 물길은 배를, 진흙길은 썰매를, 산길은 바닥에 징을 박은 신발을 신고 다녔습니다. 산에 올라가서는 나무를 베어 표지로 삼았습니다. 익(益)과 함께 백성들에게 볍씨와 새나 짐승의 신선한 주었으며, 아홉 개 하천을 뚫어 바다로 흐르게 하고, 밭 사이의 도랑을 준설해 강으로 흐르게 했습니다. 직(稷)과는 백성들에게 모자란 식량을 주었는데 남는 곳의 식량을 모자란 곳으로 조절해 메워주거나 백성들을 좀 더 편한 곳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그러자 고요가 만족스러워 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덕입니다!” 이후 우가 말했다.


3.8. 그대들은 모두 짐의 다리와 팔, 귀와 눈이 되시오[편집]


“임금이시여! 신중하고 편안하게 자리를 지키십시오. 덕있는 신하를 기용하여 돕게 하면 천하가 따를 것입니다. 밝은 마음으로 하늘의 명을 기다리시면 하늘이 다시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때 제순이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 짐의 다리와 팔, 귀와 눈이 되시오. 내가 백성들을 지킬 것이니 그대들은 나를 도우시오. 내가 옛 사람들이 어떤 빛깔과 무늬의 복장을 입었는지 살필 것이오. 해와 달과 별의 문양을 한 여러 빛깔의 복장을 만들 것이니 그대들이 내게 알려주시오. 내가 육률(六律), 오성(五聲), 팔음(八音)을 듣고 내 정치의 잘잘못을 살피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테니 그대들은 잘 들으시오. 내게 잘못이 있으면 바로잡도록 그대들이 도와주시오. 그대들은 내가 보는 앞에서는 아부하다가 물러나서 나를 비방하지 마시오. 사방에서 일을 돕는 신하들을 존중하시오. 모함과 아첨으로 총애를 얻은 신하들은 군주의 덕이 진심으로 베풀어지면 깨끗이 사라질 것이오”

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 그렇습니다. 임금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고 착한 자와 나쁜 자를 함께 기용하시면 공적을 이루지 못하실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순이 말했다.


3.9. 단주처럼 오만해서는 안 된다[편집]


“단주처럼 오만해서는 안 되오. 방탕하게 놀기를 좋아해서 물도 없는데 배를 띄우고, 떼를 지어 집 안에서 음탕함을 일삼으니 그가 계승하지 못하는 것이오.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소”

단주는 제순 유우씨와 함께 중국 최고의 명군으로 꼽히는 제요 도당씨의 아들이다. 단주는 비록 제요의 아들이었지만 부왕과 같은 덕과 재능이 없었고, 방탕하게 놀기를 좋아했다. 결국 제요는 단주가 제위에 오를 수 없다고 생각했고 단주 대신 제위에 오를 사람을 찾아다닐 정도로 무능력한 자였다.

이로 인해 제요는 고민 끝에 지역을 돌며 현자를 찾다가 제순 유우씨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훌륭한 성품에 감탄하여 그를 왕으로 세운다.

물론 제요의 친아들 단주는 이에 불복하여 제순에게 덤벼들었지만 실패하고 처형당했다.


3.10. 우가 말하다[편집]


제순이 이렇게 말하자 우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도산씨(塗山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나흘 만에 집을 떠나 계(啓)가 태어난 것도 못 보고 또 돌봐주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랬기에 치수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오복(五服)을 두어 사방 5,000리에 이르는 땅을 관할하고, 12주에 장관 사(師)을 두었습니다. 그 너머로는 사해에 이르렀고, 다섯 제후국의 우두머리 오장(五長)을 세워 각자의 백성을 이끌며 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오직 삼묘가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을 뿐입니다. 임금께서는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제순은 “나의 덕정을 그대가 알렸으니 그 공은 그대의 힘으로 얻은 것이오”라고 말했다. 고요는 이에 우의 덕에 공경을 표하고 인민들에게 모두 우를 본받도록 했다.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벌이 따랐다. 제순의 덕이 크게 빛났다. 이때 기(夔)가 음악을 연주하자 조상의 혼령이 강림하고 제후는 예를 갖추어 양보했으며, 새와 짐승들도 춤을 추었다. 소운(簫韻)이란 음악의 9장 연주가 끝나자 봉황이 날고 온갖 짐승이 춤을 추었으며 백관은 믿음으로 서로 화합하였다. 이에 순제는 노래 가사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 “하늘의 명을 삼가 받들어 오로지 때에 순응하고 삼가 신중하게 행동할지니.” 이어 다시 노래했다. “대신들이 기꺼이 충정을 다하니 원수(천자)는 공업을 크게 떨치고 모든 일이 흥하리라!” 고요는 손을 맞잡고 머리를 조아리며 큰 소리로 “유념하소서! 앞장서서 나라 일을 크게 일으키시되 삼가 법도를 지키고 공경하소서”라고 말한 다음, 가사의 뜻을 바꾸어 “원수가 영명하니 신하들도 현명하구나. 모든 일이 평안하리니”라고 노래했다. 또 이어서 “원수가 자잘해서 큰 뜻이 없으면 신하들도 게을러져 모든 일을 그르치리니”라고 했다. 순제가 절을 하며 “그렇소! 모두 공경합시다”라 했다. 이리하여 천하는 모두 우가 밝힌 법도와 음악을 받들었고, (우는) 산과 하천의 신을 받드는 일을 주재했다.


3.11. 순, 우에게 제위를 넘기다[편집]


제순은 대규모 치수 공사를 성공한 우의 능력과 조회 때의 말을 듣고 결국 우에게 제위를 넘길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이후 우를 천거해 그를 후계자로 삼았다. 17년이 지나고 제순은 세상을 떠났다. 제순이 제위에 오른 지 39년 만이었다. 우는 제순의 3년상을 마치고 제순의 아들 상균에게 제위를 양보한 후 양성(陽城)으로 몸을 피했다. 상균이 제순의 제위를 잇자 여러 제후들이 상균을 버리고 우에게 갔다. 그제야 우는 천자 자리에 올라 남면하고 천하에 임했다. 나라 이름을 하후(夏后)라 하고, 성을 사씨(姒氏)라 했다.


3.12. 고요의 죽음[편집]


제위에 오른 우는 옛날 제순이 연 조회에서 말을 섞은 고요에게 정권을 맡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요는 얼마 안되 결국 사망하였다. 우는 고요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후손을 영(英)과 육(六) 또는 허(許)에 봉했다. 그 후 익을 천거해 정사를 맡겼다. 이후 우는 회계를 순찰하게 된다.


3.13. 우, 회계에서 세상을 떠나다[편집]


우는 회계를 순찰하다 결국 9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사기》의 기록은 이러하다.

10년 뒤 제우는 동쪽을 순수하다가 회계(會稽)에서 세상을 떠났다. 천하는 익에게 주어졌다. 3년상이 끝나자 익은 제우의 아들 계(啓)에게 양보하고 기산(箕山) 남쪽으로 도망쳐 숨었다. 제우의 아들 계는 현명하여 천하의 마음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제우가 세상을 떠나면서 익에게 주었지만 익은 제우를 보좌한 날이 얼마 되지 않아 천하가 미흡하게 여겼다. 그래서 제후가 모두 익을 떠나 계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우리의 군주 제우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계가 마침내 천자 자리에 오르니 이가 하후 제계이다.



4. 행적[편집]


장강의 《삼황오제》에 보면 우가 정치력이 뛰어났다고 쓰인 구절이 있다. 내용은 이렇다.

우는 정치력이 매우 뛰어났으며 영민했고 스스로를 자랑하지도 않아 겸손함도 갖추고 있었다. 우의 능력을 유심히 본 순은 우를 천거하게 된다.


  • 우, 치수 공사를 완수하다.
    • 사마천의 《사기》의 <하본기> - 우는 곧 익, 후직과 함께 임금의 명을 받들어서 제후와 백관들에게 사람들을 동원해 공사를 시작하게 했다. 산으로 가서 나무를 세워 높은 산과 큰물들을 측정하는 표시로 삼았다. 우는 선친 곤이 공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이 마음 아파 노신초사(勞身焦思)하면서 13년을 밖에서 지냈는데 집 대문 앞을 지나면서도 감히 들어가지 못했다. 입고 먹는 것을 간소하게 해서 귀신에게 정성를 다했으며, 누추한 궁실에 살면서 절약한 비용을 도랑을 파는 일에 들였다. 육지를 다닐 때는 수레를 탔고, 물로 갈 때는 배를 탔다. 진흙탕은 썰매를 탔고, 산길은 바닥에 징을 박은 신발을 신었다. 왼손에는 수준기와 먹줄을 들었고 오른손에는 그림쇠와 직각자를 들고 다녔다. 사계절을 측량하고 아홉 개의 주(구주九州)를 개척하고, 아홉 개의 큰 길(구도九道)를 뚫었다. 아홉 개의 큰 연못(구택九澤)을 조성하고, 아홉 개의 큰 산(구산九山)에 길을 냈다. 익에게는 백성들에게 볍씨를 주어 낮고 습한 땅에 심도록 명했다. 후직에게는 백성들이 얻기 어려운 먹거리를 나눠주라고 명했다. 먹을 것이 적은 곳은 남는 곳의 것을 조정하여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제후들의 균형을 맞추었다. 우는 또 디니면서 그 땅에 맞는 것을 공물로 삼되 산과 하천의 편리함에 따랐다.
    • 정룡(丁龍)[3]의 《하기》 - 순은 우에게 치수공사를 명령한다. 우는 치수공사를 완수하고 순에게 보고하였다.
    • 장강(張康)[4]의 《삼황오제》 - 치수를 맡은 우는 부친이 썼던 종전 방식을 완전히 바꾼다. 우는 출중한 보좌관들을 데리고 직접 여기저기 온 나라를 다니며 지형을 익히고, 수위를 측정하고, 물길을 살폈다. 우는 일반 백성들과 함께 강 바닥을 파냈다. 물길을 열어 물이 바다로 흘러 나가도록 한 것이다. 또 수로 체계를 만들어 밭에 물을 댈 수 있도록 했다. 우는 이 일을 13년간 꾸준히 해나갔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우가 흙탕물에서 계속 일하다 보니 다리 털이 모두 빠져버렸다고 한다. 또 뜨거운 햇살 아래서 장시간 일해 피부는 짙은 갈색이 되었고, 강바닥 파내는 일을 너무 오래하다 보니 굳은 살로 인해 손 모양이 일그러져 버렸다. 하지만 13년간 쉼없이 계속된 노력에 2대에 걸쳐 계속된 물난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우는 결혼한 지 4일 만에 임무를 맡아 집을 나섰다고 한다. 온 나라를 다니는 동안 세 번이나 집 가까이 갔지만 집에 들르지 않았다. 가족을 만나는 일로 작업이 지연될까 걱정했던 것이다. 갓 태어난 아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을 때조차 말이다. 사람들은 우의 헌신을 높이 존경했고 그에게 위대한 우, 대우[大禹]라는 호칭을 붙였다. 순 임금 또한 우의 헌신에 깊이 감명했고 우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 증선지(曾先之)[5]의 《십팔사략》 - 하후씨 우는 사성으로 곤의 자식이다. 곤이 홍수를 다스렸으나 (실패했기에) 순임금은 우를 천거하여 곤을 대신하도록 했다. 몸을 수고롭게 하고 생각을 하얗게 불태워 공직생활을 한 13년 동안 집 앞을 지날 때도 들어갈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땅에선 수레를 타고 다녔고 물에선 배를 타고 다녔으며, 진흙에선 썰매를 타고 다녔고, 산에선 연을 타고 다녀 전국을 개척했고 길을 통하게 했으며 연못엔 방죽을 막았고 모든 산은 측량했다. 그런 치적을 순에게 고하니, 순임금은 우를 아끼며, 모든 신하들로 천자의 일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 순, 고요, 우의 조회
    • 사마천의 《사기》 - 고요는 사법관이 되어 인민을 다스렸다. 제순이 조회를 열자 우, 백이, 고요가 제순 앞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고요가 “진실로 덕정을 펼치면 일을 밝게 결정하고 군신이 화합할 것입니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우는 “그렇다면 어찌 하면 되겠소”라고 물었다. 고요는 “예, 삼가 자신의 몸을 수양하고 멀리 생각하며, 구족을 돈독히 하고 유능한 사람의 보좌를 받고, 가까운 곳에서 먼 곳까지 이르게 하되 모두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라 했다. 우는 좋은 말에 “그렇군요”라며 절을 했다. 고요는 “예! 사람을 알고 인민을 편안하게 하면 됩니다”라 했다. 우는 “아 예! 모든 일을 그렇게 하기란 요 임금도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을 알려면 지혜로워야 하고, 지혜가 있어야 사람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인민을 편안하게 해야 은혜롭다 할 수 있고, 그러면 백성들이 그 덕을 마음으로 따릅니다. 지혜롭고 은혜롭다면 환두(驩兜)를 근심할 필요가 없으며, 유묘(有苗)를 내쫓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 교묘한 말과 웃는 얼굴로 아부하는 자들을 어찌 두려워하겠습니까”라고 했다. 고요는 “물론입니다. 예! 대저 행동에는 아홉 가지 덕, 즉 구덕이 필요하며, 말을 할 때도 덕이 필요합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일을 살피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너그러우면서도 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주관이 있고, 사람과 잘 지내면서도 무게가 있고, 재능이 있으면서도 신중하고, 따르면서도 견고하고, 정직하면서도 온화하고, 간결하면서도 구차하지 않고, 굳세면서도 착실하고, 강하면서도 도의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 구덕을 꾸준히 실천하면 아주 좋습니다. 이것들 중에서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세 가지 덕행을 실천하면 경대부는 자기 집안을 지킬 수 있습니다. 여섯 가지를 실천하면 나라를 관리하는 훌륭한 제후가 될 수 있습니다. 아홉 가지 모두를 신천하면 훌륭한 인재를 관직에 쓸 수 있고, 백관은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간사하고 음흉한 일을 꾀하는 자들은 나서지 못하게 됩니다. 자격이 없는 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이를 천하대사를 어지럽힌다고 합니다. 하늘이 죄를 지은 자를 벌할 때면 그 죄에 맞게 오형을 내립니다. 제가 올린 이 말씀이 정말 시행될 수 있겠습니까?” 우는 “그대의 말은 실행되어 공적을 이룰 것입니다”라고 했다. 고요는 “제가 지혜롭지 못하지만 오로지 어찌하면 나라를 다스리는데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뿐입니다”라고 했다. 제순은 우를 가리키며 “그대도 고견을 말해보시오”라 했다. 우는 절을 하며 “아 예!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저는 매일 부지런히 일할 것만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고요가 “부지런히 일할 것만 생각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라는 말로 우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우는 “홍수가 하늘까지 넘쳐 산을 감싸고 언덕을 집어삼켜 백성들은 인민들이 모두 물 걱정을 하며 살았습니다. 저는 흙길은 수레를 타고, 물길은 배를, 진흙길은 썰매를, 산길은 바닥에 징을 박은 신발을 신고 다녔습니다. 산에 올라가서는 나무를 베어 표지로 삼았습니다. 익(益)과 함께 백성들에게 볍씨와 새나 짐승의 신선한 주었으며, 아홉 개 하천을 뚫어 바다로 흐르게 하고, 밭 사이의 도랑을 준설해 강으로 흐르게 했습니다. 직(稷)과는 백성들에게 모자란 식량을 주었는데 남는 곳의 식량을 모자란 곳으로 조절해 메워주거나 백성들을 좀 더 편한 곳으로 옮기게 했습니다”라 했다. 고요는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덕입니다”라고 하였다. 우가 “오, 임금이시여! 신중하고 편안하게 자리를 지키십시오. 덕있는 신하를 기용하여 돕게 하면 천하가 따를 것입니다. 밝은 마음으로 하늘의 명을 기다리시면 하늘이 다시 상을 내리실 것입니다”라 했다. 제우는 “오, 대신들이여! 대신들이여! 그대들은 모두 짐의 다리와 팔, 귀와 눈이 되시오. 내가 백성들을 지킬 것이니 그대들은 나를 도우시오. 내가 옛 사람들이 어떤 빛깔과 무늬의 복장을 입었는지 살필 것이오. 해와 달과 별의 문양을 한 여러 빛깔의 복장을 만들 것이니 그대들이 내게 알려주시오. 내가 육률(六律), 오성(五聲), 팔음(八音)을 듣고 내 정치의 잘잘못을 살피고,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테니 그대들은 잘 들으시오. 내게 잘못이 있으면 바로잡도록 그대들이 도와주시오. 그대들은 내가 보는 앞에서는 아부하다가 물러나서 나를 비방하지 마시오. 사방에서 일을 돕는 신하들을 존중하시오. 모함과 아첨으로 총애를 얻은 신하들은 군주의 덕이 진심으로 베풀어지면 깨끗이 사라질 것이오”라고 했다. 우는 “그렇습니다. 임금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고 착한 자와 나쁜 자를 함께 기용하시면 공적을 이루지 못하실 것입니다”라고 했다. 제순은 “단주처럼 오만해서는 안 되오. 방탕하게 놀기를 좋아해서 물도 없는데 배를 띄우고, 떼를 지어 집 안에서 음탕함을 일삼으니 그가 계승하지 못하는 것이오.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소”라 했다. 우는 “저는 도산씨(塗山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나흘 만에 집을 떠나 계(啓)가 태어난 것도 못 보고 또 돌봐주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랬기에 치수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오복(五服)을 두어 사방 5,000리에 이르는 땅을 관할하고, 12주에 장관 사(師)을 두었습니다. 그 너머로는 사해에 이르렀고, 다섯 제후국의 우두머리 오장(五長)을 세워 각자의 백성을 이끌며 공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오직 삼묘가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을 뿐입니다. 임금께서는 유념하시기 바랍니다”라 했다. 제순은 “나의 덕정을 그대가 알렸으니 그 공은 그대의 힘으로 얻은 것이오”라고 했다. 고요는 이에 우의 덕에 공경을 표하고 인민들에게 모두 우를 본받도록 했다.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벌이 따랐다. 순의 덕이 크게 빛났다. 이때 기(夔)가 음악을 연주하자 조상의 혼령이 강림하고 제후는 예를 갖추어 양보했으며, 새와 짐승들도 춤을 추었다. 소운(簫韻)이란 음악의 9장 연주가 끝나자 봉황이 날고 온갖 짐승이 춤을 추었으며 백관은 믿음으로 서로 화합하였다. 이에 순제는 노래 가사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 “하늘의 명을 삼가 받들어 오로지 때에 순응하고 삼가 신중하게 행동할지니.” 이어 다시 노래했다. “대신들이 기꺼이 충정을 다하니 원수(천자)는 공업을 크게 떨치고 모든 일이 흥하리라!” 고요는 손을 맞잡고 머리를 조아리며 큰 소리로 “유념하소서! 앞장서서 나라 일을 크게 일으키시되 삼가 법도를 지키고 공경하소서”라고 말한 다음, 가사의 뜻을 바꾸어 “원수가 영명하니 신하들도 현명하구나. 모든 일이 평안하리니”라고 노래했다. 또 이어서 “원수가 자잘해서 큰 뜻이 없으면 신하들도 게을러져 모든 일을 그르치리니”라고 했다. 순제이 절을 하며 “그렇소! 모두 공경합시다”라 했다. 이리하여 천하는 모두 우가 밝힌 법도와 음악을 받들었고, (우는) 산과 하천의 신을 받드는 일을 주재했다.
    • 정룡의 《하기》 - 순은 고요와 우를 조회에 참여하게 했다. 순은 그들의 처세술을 보고 감탄하며 칭찬했다.
    • 장강의 《삼황오제》 - 순은 고요, 우, 백이를 조회에 초대 하였다. 이들은 조회의 자리에서 처세술을 펼치며 활약했고 우의 처세술에 감탄한 순은 제위를 양도할 것을 다짐하게 된다.


5. 논란[편집]


우의 계통은 옛날부터 많은 중국 학자들의 논쟁거리였다. 《사기》에서는 우의 계통이 전욱 고양씨의 아들 곤의 아들이라고 서술되어 있는 반면 《한서》에서는 우가 전욱의 5대 후손 곤의 아들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그러던 중 《신주사기》[6] 에서는 전욱의 아버지 창의가 동이족의 소호와 함께 아버지가 같다는 점을 들어 우 또한 동이족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사기》 <하본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하우(夏禹)는 이름을 문명(文命)이라 했다.” 《신주사기》는 이것을 하나라 시조 우라고 번역했고, 우의 '우'자에는 임금이라는 뜻뿐만이 아니라 벌레 뜻도 있다는 주장을 내세웠고, 이는 우가 이족(夷族)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며 창의가 소호와 형제인 것을 들었다. 여러 중국의 사서들은 내용이 다르다. 《사기》, 《제왕세기》, 《세본》에서는 우가 전욱의 손자이자 곤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율력지》, 《사기색은》, 《한서》에서는 전욱의 5대 후손 곤의 아들이라고 되어있다. 각 사료들을 살펴보면

《대대례》

“고양씨의 손자인 곤의 아들이 문명이다.”

양웅揚雄의 《촉왕본기蜀王本紀》

“우禹는 본래 문산군文山郡 광유현廣柔縣 사람이며 석뉴石紐를 낳았다.”

《괄지지》

“(석뉴산은) 무주茂州 문천현汶川縣 뉴산紐山현 서쪽 73리에 있다.”

《화양국지》

“지금의 이인夷人이 함께 그 땅을 경영하는데 사방 100리에> 는 감히 거주하거나 가축을 기르지 못 했으며, 지금도 오히려 감히 육축六畜을 놓아기르지 않는다.”라고 했다.

황보밀

“곤은 제전욱의 아들로서 자字는 희熙이다.”

《연산역連山易》

“곤을 숭崇에 봉했다.”

《국어》

“숭백곤崇伯鯀(숭의 제후가 곤)이다.”

《계본》

“곤鯀이 전욱의 아들이 되었다.”

《한서》 <율력지>

“전욱의 5대에 곤鯀이 태어났다.”

이렇게 모두 다른 기록을 설명하고 있으니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알기 어렵다. 우뿐만 아니라 삼황오제 관련 족보는 기록마다 제각각이다.


6. 가족 관계[편집]




7. 우의 무덤[편집]


파일:407F5C5B-58CE-4BEA-A92D-AD5E80EB25B2.jpg
중국 화둥 저장성 사오싱에는 우의 무덤인 대우릉(大禹陵)이 존재한다. 후대에 우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대우릉이 있는 장소는 우가 사망한 회계이다. 우의 무덤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우의 시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지역에도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장소가 있다.


8. 기타 창작물[편집]



8.1. 고우영의 십팔사략[편집]


작중 행적은 옛날 큰 홍수가 들이 닥쳐 기아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고 짐승들의 먹이가 되고는 하였다. 이런 백성들을 보고 가엾게 여긴 신 곤은 천제의 보물인 식양을 훔쳐 홍수를 막으려고 했으나 이를 안 천제는 축융을 보내 곤을 죽이라고 명령 하였고 곤은 우산의 들에서 축융에게 처형 당했다. 곤이 죽자 다시 홍수가 범람하여 백성들은 고통 받았고 이 와중에 곤의 시체는 3년 동안 썩지 않았다.

이후 죽은 곤의 시체에서 우가 태어났고 우는 천제에게 직접 찾아가 식양을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우가 간곡히 부탁하자 천제는 우에게 식양을 사용할 것을 허용하게 된다. 우는 아버지 곤 처럼 쌓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제방을 쌓아 물길을 틀게 하였다. 한편 천제의 명령을 받은 응룡이 큰 물기를 트면 다른 용들은 작은 물줄기를 탔다.

특히 우는 혼자서 돌을 나르며 노력을 했다. 이런 우에게 감동을 받은 신들은 우를 도왔고 치수 사업으로 바쁜 나날을 보낸 우는 서른이 넘도록 장가를 가지 못했다. 그러던 중 도산에서 여교라는 여인을 만나 복잡한 절차 없이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우는 치수사업을 위해 4일 만에 집에서 떠났다. 이후 이 둘은 한원산에 올랐다. 우는 능력을 발휘에 곰이 되었는데 여교는 너무 놀라 돌이 되어 버렸다. 우가 내 아들을 돌려 달라 외치자 돌이 두동강 나며 계가 태어났다.

순에게는 아들 상균이 있었으나 능력이 있고 덕이 있는 우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우가 임금이 된 이후 국호를 하라고 고치고 나라를 세웠으나 이후 남방을 순찰하던 중 회계에서 병이나 죽고 말았다.


8.2. 만화로 보는 중국 신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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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의 죽은 우산은 햇빛이 닿지 않을 정도로 먼 북극 북쪽에 있는 곳이 였다. 우산 남쪽에 있는 안문은 인간세계와 저승을 연결하여 죽은 영혼이 잠시 머무는 곳이기도 하다. 이때 모든 영혼은 다시 태어나거나 지옥으로 빠지는데 곤은 축융의 허락을 받고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만든다.

죽은 곤의 시체는 축융의 도움으로 3년 동안 썩지 않고 영혼도 떠나지 않았다. 곤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배 속에서 아이를 키웠고 곤의 아들은 아버지를 뛰어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한 남자가 시체가 썩지 않고 아이가 있다고 보고 하였고 배를 갈라보라 명령을 받는다.

한 남자는 오도를 들고 곤의 배를 갈랐고 배를 가르는 순간 규룡이 튀어나왔고 하늘로 올라갔다. 또한 곤도 황룡으로 변했다. 황룡으로 변한 곤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해주고 홍수를 막아주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곤이 변신한 황룡은 우산 깊은 연못으로 들어가 홍수를 다스리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우는 규룡에서 인간으로 변신했고 허락을 받기위해 하늘로 올라갔다. 상제는 우를 환영하며 우가 홍수를 막겠다고 부탁하자 흔쾌히 허락했다. 우는 상제에게 식양을 받았고 상제는 동률, 오목유, 경진, 우여 총 4명의 장수를 소개하며 같이 내려 보냈다. 또한 옛날에 치우와 싸우다가 모든 능력을 잃은 응룡도 돕겠다고 나섰다. 우는 그리고 홍수를 막으러 지상으로 내려갔다또한 수 많은 용들도 뒤를 따랐다.

그리고 지상에서는 익이라는 소년이 우를 따랐고 우는 수년간 홍수를 관찰하며 노력했고 중간에 집도 들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관찰했고 이후 식양을 사용해 홍수를 막는다.


9. 둘러보기[편집]



하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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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게 사실이라면 무려 97~98세에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이 역시 허구일 가능성이 높지만 기록을 보면 적어도 죽었을 때 나이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하나라가 기원전 1600년에 멸망했다고 볼 경우 죽서기년에 따른 재위기간은 기원전 2090년 ~ 기원전 2045년이다.[2] 노심초사가 아니다![3] 후한의 역사가[4] 후한의 역사가[5] 원나라 초 사람[6] 이덕일의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낸 사기 번역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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