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히 츠빙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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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유년 시절
2.3. 취리히 시절
2.3.1. 사순절 소시지 사건 (1522년)
2.3.2. 대립
2.4. 죽음
3. 사상


1. 개요[편집]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년 1월 1일 ~ 1531년 10월 11일)는 스위스 종교개혁 운동가다. 훌드리히 츠빙글리(Huldrych Zwingli)로도 알려져 있다.[1]

마르틴 루터와 동시기에 활동했으며, 생전에 루터에 맞먹는 명성을 누렸지만 업적을 제대로 쌓기 전에 죽었다. 이 때문에 후대의 영향력은 별로 남아있지 않은 편이다. 게다가 스위스에서 거물 종교 개혁가 장 칼뱅이 대두되니 역사적 입지가 비교적 좁아졌다. 그래도 나름대로 종교 개혁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며 선배 종교개혁가로 존중되고 있다.


2. 생애[편집]



2.1. 유년 시절[편집]


1484년 1월 1일 스위스 토겐부르크(Toggenburg) 지방 빌트하우스(Wildhaus)에서 태어났다. 츠빙글리 부친은 마을 행정관이었고 8남 2녀 중 3째였다. 1500년 빈 대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502년 바젤 대학교에 입학해 문학을 공부하면서 인문주의적 교양을 쌓았고, 인문학자 토마스 비텐바흐(Thomas Wyttenbach, 1472–1526)를 따랐다.


2.2. 가톨릭 사제 시절[편집]


1506년 츠빙글리는 22세에 가톨릭 사제서품을 받았다. 글라루스를 담당하는 성직자로 부임했지만, 글라루스의 스위스인들이 카를 5세의 용병으로 종군하자 이를 뒤따라 2차례에 걸쳐 이탈리아반도로 종군했고 이 결과 많은 가장이 죽거나 다치거나 타락하고 가정이 파괴되는 현실을 목격하자, 츠빙글리는 용병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신념을 굳히게 된다. 종군의 대가로 종신연금을 탈 자격이 있지만 이마저도 포기했다.

그후 글라루스에 프랑스군이 징병 활동을 해오자 이에 항의하여 글라루스를 떠났다. 1518년 취리히의 도시 참사회[2]에 초빙돼 취리히 주교좌성당 주임신부가 됐다.


2.3. 취리히 시절[편집]


1516년부터 츠빙글리는 지속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면벌부 판매를 비판했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성경에 모든 종교 활동의 근본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는 모든 교회 제도를 철폐해야 한다고했다. 다만 츠빙글리는 1518년 교황청 성직자가 됐고, 1520년까지 가톨릭 교회 사제직을 지켰다. 따라서 츠빙글리를 루터보다 먼저 종교개혁을 시작했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2.3.1. 사순절 소시지 사건 (1522년)[편집]


1519~1520년 취리히에서 흑사병이 퍼졌고 츠빙글리도 죽을 뻔 했다. 츠빙글리는 이를 하나님의 계시라 여겨 교황청 성직록을 거부했으며 1522년 이르러서 완전히 대립 구도로 들어서는데, 다소 사소해 보이는 사건이 그 발단이었다. 바로 육식이 금지되는 사순시기에, 취리히 출판업자 프로샤우어 등이 소시지를 먹은 것이다. 이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던 가톨릭에 대해 츠빙글리는 반발했다. "사순절 육식 금기는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 하나님이 준 음식은 무엇이든 먹을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3]

이 사건이 도화선이 돼 취리히가톨릭 교회 지지파와 츠빙글리 지지파로 나누어져 분쟁이 벌어졌다. 1523년 1월 29일 열린 토론회에서 츠빙클리는 67개 신조(67 Articled)를 내세우며, 성경보다 인간의 전통을 강조하는 로마 교황청 때문에 교회의 부정부패가 발생했다고 지적하였다.

결국, 몇년에 걸친 분쟁 끝에 결국 츠빙글리의 의견이 승리했다. 모든 교회의 성직 위계 제도[4]가 부정되고, 도시 교회의 성화성상이 파괴되며 수도원이 폐쇄됐다.[5] 사제 독신제도 역시 불필요하다고 보아 철폐됐다. 츠빙글리는 안나 라인하르트라는 과부와 동거 중이었다.[6]

얼마동안은 미사가톨릭 예식대로 유지됐으나, 츠빙글리는 1525년 4월 13일 성목요일 미사를 없애고 스스로 고안한 "주님의 만찬" 의식을 처음으로 시작했다. 종교음악까지 폐지한 것을 제외하면 이것이 현대 개신교 예배 방식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기도 하다.


2.3.2. 대립[편집]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달성된 개혁을 다른 스위스 도시에도 파급하려 했다. 하지만 더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재세례파, 신학적 측면에서 대립하게 된 루터교회와 대립하게 되었으며, 정치적으로도 스위스의 여러 자치주는 가톨릭 지지파와 개신교 지지파로 나뉘어서 대립을 시작했다.

당초에는 토론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며, 바젤과 베른이 개신교 개혁에 가담했다.(1529년 이 때문에 에라스뮈스가 바젤에서 떠났다.) 1528년 베른의 토론회에서 개신교 대표들이 모여 논의를 하였고, 츠빙글리는 루터파와는 갈등이 깊어졌지만 지지 자치주를 모아 동맹을 결성할 수 있었다. 가톨릭 지지 자치주들도 이에 반하여 연합을 결성했다.

신성 로마 제국헤센 방백 필리프 1세카를 5세에 대항하기 위해 개신교 대동맹을 결성을 구상했으며, 츠빙글리 역시 끌어들이려 했다. 필리프 1세는 츠빙글리와 루터를 화해시키기 위하여 루터의 친구 필리프 멜란히톤까지 초청하여 자신의 영지인 마르부르크에서 1529년 10월 회담을 가지도록 주선했다. 하지만 성만찬에 관한 견해 차이 때문에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

루터교회와의 협력이 완전히 단절되었지만, 츠빙글리는 취리히와 베른만으로도 주도권을 잡아 스위스 전역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츠빙글리의 태도에 우려를 드러낸 베른은 취리히와 노선을 달리하게 된다.[7] 츠빙글리는 가톨릭 지방에 대해서 생필품을 차단하는 경제봉쇄를 단행했다.


2.4. 죽음[편집]


이에 우리 주, 슈비츠 주, 운터발덴 주[8], 루체른 주, 추크 주, 프리부르 주는 경제봉쇄에 고통받게 되자 분노하여 서로 연합해 군대를 모아 츠빙글리를 타도하는 전쟁을 준비했다. 츠빙글리는 선수를 치기로 결심하고 1531년 취리히의 병력을 이끌고 카펠로 진군했다. 하지만 가톨릭 측의 군대가 1531년 10월 11일 카펠을 급습했다.

가톨릭 군대는 7,000명에 달해 압도적이었고, 2,000명 밖에 안 되는 취리히 군대는 열세에다 분산되어 있었고 강행군으로 지쳐있었던 탓에 오후 4시 쯤 난전 끝에 패배하여 도주했다. 이때 취리히군은 약 500명 정도의 병력이 전사했고, 25명의 목사와 함께 군대를 이끌던 츠빙글리도 저항하다가 치명상을 입어 47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가톨릭 군대에 노획된 츠빙글리의 시체는 4조각 났고, '이단자'로서 화형에 처해져 파괴된다. 베른 주와 다른 칸톤에서 취리히를 지원하러 군대를 보냈지만 역시 패배하고, 취리히는 평화 조약을 받아들였다.

츠빙글리가 전사할 때 몸에 지니고 있었다는 투구와 2자루의 검이 취리히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3. 사상[편집]


일찍 죽고 츠빙글리의 운동이 사실상 칼뱅파에 흡수된 탓에, 츠빙글리의 사상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인데, 역시 같은 개신교 운동가이기는 하지만 마르틴 루터, 장 칼뱅과는 사상 면에서 차이가 적지 않았다.

츠빙글리는 마르틴 루터와는 '은총'과 '성찬'의 해석으로 갈리게 된다. 츠빙글리는 인간의 태도 역시 신의 선택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츠빙글리는 빵과 포도주를 단순한 '상징'으로 보았으며 기존 가톨릭성변화 교리(화체설)를 부정했다. 이것이 일명 기념설이며, 이 기념설이 루터와 결별하는 결정적인 차이가 되었다. 루터도 화체설 자체는 부정했지만, 츠빙글리와 달리 보이지 않게 몸과 피가 임재한다는 일명 '공재설'을 주장했다.

또한 종군 때의 경험으로 인해 용병제도와 숙박업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생각들은 장 칼뱅에게도 이어져서 스위스의 주요 산업이 손목시계 등의 정밀공업 위주로 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 츠빙글리와 장 칼뱅의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츠빙글리는 구체적인 대안도 없이 무조건 금지부터 하여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지만, 장 칼뱅은 반대는 하였어도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고 그 방안의 실현에 힘쓴 결과로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장 칼뱅의 무시무시했던 일화들을 생각해 보면 상당히 놀라운 일. 칼뱅교가 스위스를 넘어 전 유럽으로 세력을 키웠지만 츠빙글리는 목숨을 잃는 것은 물론 나중에 결국 칼뱅교에 흡수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것도 여기서 이유가 나오는 것이다. 그나마 츠빙글리는 당대의 종교 개혁에 대한 진심만큼은 인정받아서 선구자 정도의 대접은 받는다.

예배에서 전례음악도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하여 폐지하였다. 정확히는 파이프오르간 등의 악기와 형식화된 기도문을 금지한 것으로 찬송가 자체는 악기 없이 아카펠라로 불렀다고 한다.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 공경 역시 성경에 없다고 인정하지 않았다. 이 점은 루터, 칼뱅도 마찬가지.

[1] 이는 울리히(Ulrich)의 라틴어식 이름인 훌드리쿠스(Huldricus)에서 유래한다[2] 가톨릭에서 지역교회의 행정 자문을 하는 기구[3] 이는 현대에도 개신교의 기본 입장이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길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ㅡ개신교 성경 디모데전서 4:1~5, 가톨릭 성경 티모테오에게 보내는 첫번째 서간 4: 1~5[4] 주교>신부>부제. 교황추기경도 주교이다.[5] 다만 일부 장식적 요소는 그대로 남겨두는 사례도 있었다.[6] 그런데 당시 가톨릭은 말만 독신이지, 실제론 교황사생아들이 추기경을 맡거나 하는 판국이었다.[7] 특히 츠빙글리가 주장한 용병업 금지는, 당시 용병업이 주된 생계인 스위스인들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8] 현재의 옵발덴 준주와 니드발덴 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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