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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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 제3대 국왕인 태종의 왕비로 4대 국왕 세종의 어머니이다.
본관은 여흥으로 개성 출생이다. 우정승을 지낸 여흥부원군 민제(閔霽)와 삼한국대부인 송씨의 딸이며, 이성계와 신의왕후의 다섯째 며느리다.
남편을 보위에 올리려 목숨을 걸었던 동지였으며 그녀가 했던 노력은 내조의 범위를 넘는 것이었다. 어린시절 결혼한 남편 태종과의 사이에서 4남 4녀[1] 를 낳고 안살림까지 챙겼던 엄청난 에너지를 가진 여장부였다. 그러나 성공의 기쁨도 잠시, 외척들을 경계했던 남편의 손에 친정이 박살나는 비운의 여인이기도 하며 남편을 죽기전까지 애증했던 인물이다.
1420년 남편보다 일찍 세상을 떠 헌릉에 묻혔다. 그로부터 2년 후 남편과 합장되었다.
2. 생애[편집]
1365년(공민왕 14년),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고려 최고 명문가 여흥 민씨 가문의 수장이였던 민제의 2녀로 태어났다.[2] 변계량의 헌릉지(獻陵誌)에 따르면 민씨는 맑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지혜롭다.라는 그녀에 대한 극진한 찬사가 있을 정도였다.
아버지 민제는 성균관에서 사성을 지내며 제자들을 양성했는데, 그 중 민씨보다 두 살 연하였던 훗날의 태종 이방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방원은 15세였던 1382년(우왕 8년)에 진사시를 통과해 성균관에 거의 수재급으로 입학했고, 민제는 그를 사윗감으로 눈여겨 봤다. 물론 가문의 급을 비교하자면 이방원은 일개 변방(동북면) 무사 집안의 아들로 권문세족의 영애였던 민씨와 혼인하기엔 다소 뒤떨어졌지만, 그 당시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던 아버지 이성계를 배출한 신흥 무인 가문으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1382년(우왕 8년), 민씨는 18세의 나이로 16세의 이방원과 혼례를 올리게 된다. 민씨의 친정에서 신혼생활을 보내며 처가살이를 시작하게 된 이방원은 아름답고 지적이며 성숙한 민씨를 매우 사랑했으며, 민씨 역시 남편이 나이가 어리고 가문의 급이 낮다는 이유로 무시하지 않았고 존중했기 때문에 부부금슬이 정말 좋았다고 한다. 혼인 이듬해인 1383년(우왕 9년)에는 이방원이 드디어 과거에 급제했고 두 사람 사이의 첫 아이였던 정순공주까지 태어난다. 이렇듯 장인어른과 아내(원경왕후)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은 이방원은 훗날 “내가 어렸을 때, 민씨에게 자라서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았다”라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아마도 이방원과 친정에서 함께 보낸 10여년이 민씨의 결혼생활에서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1392년(태조 즉위년)에 시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남편인 이방원이 정안군으로 봉해지자 정녕옹주(靖寧翁主)에 봉해졌다.[3] 뒤이어 남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등이 남편의 심복이 되어 활약하고 정도전 등이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원경왕후는 오히려 집 으슥한 곳에 무기를 숨겨놓아 후일을 도모했다고 한다. 이렇듯 성격이 담대해서 1차 왕자의 난이 발발할 때는 이방원과 왕자들이 궁에 무방비 상태로 들어가자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자신이 배가 아프다는 핑계[4] 를 대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그 일을 빌미로 이방원은 반정을 일으켰다. 한편으로는 2차 왕자의 난 때도 자신의 사가의 말이 홀로 집으로 오자[5] 남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알고 걱정되어 창을 가지고서 말을 타고 가려다가 시녀들이 말린 일도 있었다.정종 2년 1월 28일
아주버님인 정종의 즉위 이후 세자[6] 가 된 남편 이방원과 함께 세자빈이 되었고 결국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여, 마침내 왕비가 되면서 부귀영화를 누릴 줄 알았지만 여기서부터 인생이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왕이 된 남편 태종은 공신들을 매우 경계하였는데 특히 정계와 군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민무구와 민무질[7] 을 심하게 경계했다. 더군다나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는 세자였던 양녕대군과도[8] 친했기에 세자가 왕위에 오르면 외척이 되어 권세를 휘두를 것이라 생각한 태종은 이들을 가차없이 유배보내고 사약까지 내렸다. 뒤이어 그들의 아랫동생들인 민무휼, 민무회 형제도 역시 세자의 외숙[9] 으로 정사를 농단할 것이라는 이유로 유배를 가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태종 손에 죽지는 않았지만 부모(민제 부부)의 운명도 불행하기 그지없어서 아버지 민제는 자식들이 귀양을 가고 집안이 쇠락해가는 와중에 병으로 사망했고 어머니 송씨는 아예 아들 넷이 모두 사위 손에 결단나고 딸 원경왕후까지 죽는 걸 본 것도 모자라 밉살스럽고도 무서웠을 사위 태종 이방원보다도 오래 살아서 1424년(세종 6년)에 세상을 떠났다.[10][11][12][13]"부부(夫婦)는 사람의 대륜(大倫)인데, 지금 정비(靜妃)가 민무구(閔無咎) 등의 일 때문에 속으로 불평을 품고 여러 번 불손한 말을 하였다. 지난날에 내가 창병(瘡病)이 몹시 크게 났을 때에 민무구(閔無咎) 등이 가만히 여시(女侍)와 결탁하여 병세를 엿보고, 드디어 이무(李茂)와 더불어 불궤(不軌)를 음모(陰謀)하였으니, 이것이 실로 민씨의 죄였다. 정비(靜妃)가 이것을 돌아보지 않고 사사로운 분한(忿恨)을 품으니, 내가 폐출(廢黜)하여서 후세를 경계하고자 하나, 조강지처(粗糠之妻)임을 생각하여 차마 갑자기 버리지 못하겠다."
<태종실록> 태종 11년(1411) 9월 4일, 민무구, 민무질 사사 후 여러 차례 부부싸움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기록
성균 악정(成均樂正) 권홍(權弘)의 딸을 별궁(別宮)으로 맞아들이었다. 처음에 대부인(大夫人) 송씨(宋氏)가 정비(靜妃)에게 말하기를,
"궁빈(宮嬪)이 너무 많아서 그것이 점점 두렵다."
하였는데, 정비(靜妃)의 투기는 더욱 더 심해만 갔다. 임금이 권씨(權氏)가 현행(賢行)이 있다 하여 예(禮)를 갖추어 맞아들이려고 하니, 임금의 옷을 붙잡고 말하기를,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더불어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禍亂)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니까?"
하며,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음식도 들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가례색(嘉禮色)을 파하도록 명하고, 환관(宦官)과 시녀(侍女) 각각 몇 사람만으로 권씨를 별궁(別宮)에 맞아들였다. 정비(靜妃)는 마음에 병을 얻었고, 임금은 수일 동안 정사를 듣지 아니하였다.
-- <태종실록> 태종 2년(1402) 3월 7일 성균 악정 권홍의 딸을 별궁으로 맞아들이다
태종과 원경왕후는 여자 문제로 다투지 않는 날이 없었는데, 태종은 외척에 강한 경계심을 갖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놀이와 여자를 좋아하여 원경왕후의 투기에 질색하며 다투는 날이 많았고 원경왕후는 태종의 여색을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자식을 낳는 것은 왕의 중요한 의무인 데다 수명이 짧고 영아 사망률도 높은 시기였기에 왕실의 일원이라면 많은 자식을 낳을 필요가 있었다. 원경왕후와 다툼이 심해지자 태종은 원경왕후를 모시던 상궁들과 나인들을 모두 궁 밖으로 내치고 원경왕후를 중궁전에 유폐하였다. 더 나아가 원경왕후를 폐비할 생각까지 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와 상왕인 정종의 충고를 듣고 취소하였다. 사실 태종도 진심으로 원경왕후를 폐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비를 새로 들이면 다시 외척이 생겨나고 재차 숙청해야 한다. 이미 자신이 숙청한 원경왕후의 가문도 결과적으로는 무고한 사람을 숙청한 일이 되는데다 새로운 왕비가 자식을 낳으면 세자를 비롯한 폐비의 자식들은 입지가 추락하고 조정이 분열될 가능성이 올라간다. 태종이 간택 절차를 거쳐서 정식으로 후궁인 숙의를 뽑으려고 하는데도 원경왕후는 식음을 전폐하고 앉아서 오열할 정도로 투기가 강하였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갈등에 조정이 어수선해지자 태종의 행보에 일절 관여하지 않던 상왕이자 형인 정종까지 나서서 "나는 적자를 못 낳은 처와도 소싯적의 정으로 사는데 주상은 아들도 많이 낳은 중전에게 대체 왜 그러는 게요?"라고 질타하였다. 결국 태종은 형의 충고에 따라 거창한 가례색을 행하지 않고 조용하게 후궁을 들이는 정도로 마무리하였다. 동생에게 양위한 이후 정사에 간섭하지 않은 정종이지만 왕과 왕비의 갈등은 왕실의 큰어른으로서 방관할 수 없던 것이다. 형의 충고를 듣고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갈등을 일시적으로 봉합한다.
계모와 이복형제들에 의해 왕위 계승 논의에 밀려나 그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며 지독한 아들 바보였던 태종이 후계 구도를 꼬아 정통성을 훼손해 자식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폐비라는 선택을 할리가 있겠냐며 중전에 대한 일종의 강짜로 보는 시선도 존재한다.[14] 이복형들을 제치고 세자가 된 이방석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왕의 자식이라는 점은 왕의 혈통이라는 것이므로 당연한 것이고 사실상 제일 중요한 정통성이 후궁이 아닌 왕후의 자식이라는 점이다.[15] 둘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단 것 역시 반론의 여지가 있는게 원경왕후는 나이 40세를 넘긴 이후로도 태종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3명이나 더 낳았다는 점이다. 정선공주(1404년생), 아들 성녕대군(1405년생), 요절한 공주(1412년생)[16] 가 그 주인공들.
나아가 살펴봐야 할 부분은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는 이후의 조선 왕과 왕비들처럼 일방적인 간택을 통해 만들어진 인연이 아니라, 애초에 서로 동등한 관계[17] 라는 점이다. 원경왕후의 집안인 여흥 민씨는 고려 후기 급부상한 권문세족중에서도 손꼽히는 가문으로 재상지종으로 분류된 15가문 중 하나였다.
공민왕대에야 고려에 귀부한 전주 이씨보다 훨씬 고려의 권력 중심에 가까웠고, 이성계가 넷째, 다섯째를 여흥 민씨 집안 여식과 혼인 시킨것도 혼맥을 정계 안착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이성계의 사돈이자 이방원의 처가로서 가문의 운명을 모조리 걸고 막대한 지원 사격을 퍼부었고 원경왕후 민씨 개인적으로도 어지간한 공신들에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남편 이방원의 권력 획득에 큰 공훈을 세운 여걸이다. 원경왕후가 대신들 앞에서 태종 이방원에게 대드는 등의 행태도 이런 강력한 근거들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처남 4명을 모조리 도륙하는 등 인간적으로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처가를 박살내고 원경왕후를 찍어 누른 태종의 극단적인 행보도 원경왕후의 이러한 막강한 힘이 고착화된 권력으로 뿌리내려 왕권을 깎아 먹는 것을 예견한 행동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극약 처방이 아니면 도저히 건드리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가 원경왕후 민씨였기 때문이다.
1418년(태종 18년)에 세자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명망 있고 왕의 재목이 있는 셋째아들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자, 원경왕후는 매우 슬퍼하였다. 폐세자가 된 맏아들이 어떤 형태로든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원경왕후는 장자 상속제를 들어 양녕대군의 아들인 원손을 후계로 책봉하라 하였으나 조정의 반대가 극심하였고 양녕대군을 멀리 내치려 하자 원경왕후는 눈물을 흘리며 가까운 곳에 보내라 하여서 결국은 경기도 광주목로 보내졌다. 두달 후 세자 충녕대군이 주상으로 즉위했으나 맏아들의 운명에 대한 걱정으로 원경왕후는 눈물로 세종의 즉위를 맞이했다. 그리고 주상이 된 셋째 아들에게 폐세자가 된 큰 형의 목숨만은 제발 부지시켜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사실 원경왕후는 남편 태종만큼 맏아들 양녕대군[18] 을 매우 사랑했던 어머니였다. 원경왕후에게 있어 양녕대군은 18살에 결혼해서 10여 년간 낳은 6명의 자식들(3남 3녀) 중 아들만 셋 다 죽는 고통을 겪다가 30살 때 낳고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아들이었고, 또한 조선의 왕족이 되기 전인 고려 시절 때 낳았던만큼 왕비가 아닌 어머니로서 그야말로 목숨을 내어줘도 아깝지 않은 세상 전부와 같은 아들이었다. 양녕대군 이후 3년 내로 낳은 아들들인 효령대군과 충녕대군 역시 예뻐하며 길렀다고는 하지만, 왕-왕비-왕자 관계를 떠나서 낳은 순간부터 태종-원경왕후 부부의 모든 것이었던 양녕대군을 향한 개인적 애정과는 같을 수 없었다.[19]
새로운 세자 이도가 즉위하여 주상(세종)이 되자 물러나 왕대비가 되었다.[20] 2년 후인 1420년(세종 2년), 수강궁(창경궁)에서 56세에 학질(瘧疾)[21] 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당시 상왕 태종은 절차를 간소화하자며 주상인 세종에게 상복을 12일만 입으라고 권유했는데[22] 세종은 다른건 상왕 뜻을 따라도 이건 그렇게 못하겠다며 후덕대비(원경왕후)를 헌릉(獻陵)에 안장할 때까지 쭉 상복을 입었다. 이후 대비의 능이 외로워 보인다는 이유로 근처에 능을 수호할 사찰을 지으려고 했는데 나중에 같이 묻힐 사람이 불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인물이라는걸 생각하면,[23] 그리고 그걸 모를리 없는 세종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어머니에게 가혹했던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반발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나마 사찰을 짓는 건 아버지 태종이 격렬하게 반대해서 없던 일이 됐다. 2년 후인 1422년(세종 4년), 남편인 태종도 죽어서[24]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의 헌릉에 함께 '쌍릉'으로 나란히 묻혀 있다. 글자 그대로 애증의 관계였을 부부였지만 결국 죽어서는 아들에 의해 함께 묻혔다. 특히 조선왕릉 중 쌍릉 형태의 봉분 중에서 병풍석과 난간석이 붙어 있는 능은 헌릉이 유일한데, 이것은 세종이 두 부부가 저승에서는 화해하여 화목하게 지내시기를 바란 지극한 효심이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며느리인 소헌왕후 심씨의 아버지 심온 또한 태종의 외척 숙청 리스트에 올라 며느리의 친정마저 박살나면서, 자신이 겪었던 비극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심지어 남편이 이복동생과의 사이에서 왕위 쟁탈전을 벌인 것처럼 둘째 손자인 세조에 의해 골육상쟁의 피바람이 훨씬 최악의 상태로 재현되었다.
3. 가계[편집]
- 친정
- 배우자 / 자녀
- 남편: 태종대왕(太宗大王) 이방원(李芳遠)
- 1녀: 정순공주(貞順公主)
- 사위: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
- 외손녀: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
- 사위: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
- 2녀: 경정공주(慶貞公主)
- 사위: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
- 외손자: 조무영(趙武英)
- 사위: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
- 3녀: 경안공주(慶安公主)
- 사위: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규(權跬)
- 외손자: 군부사(軍府事) 권담(權聃)
- 외손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권총(權聰)
- 사위: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규(權跬)
- 1남: 폐세자 양녕대군(廢世子 讓寧大君) 이제(李禔)
- 2남: 효령대군 이호/이보(李祜/李補)
- 며느리: 예성부부인 정씨(蘂城府夫人 鄭氏)
- 손자: 의성군(宜城君) 이채(李寀)
- 손자: 서원군(瑞原君) 이친(李櫬)
- 손자: 보성군(寶城君) 이갑(李韐)
- 손자: 낙안군(樂安君) 이밀(李樒)
- 손자: 영천군(永川君) 이정(李靜)
- 손녀: 비인현주(庇仁縣主)
- 며느리: 예성부부인 정씨(蘂城府夫人 鄭氏)
- 3남: 세종대왕(世宗大王) 이도(李裪)
- 4녀: 정선공주(貞善公主)[25]
- 사위: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
- 외손자: 군수(郡守) 남빈(南份)
- 외증손자: 충무공 남이 장군(忠武公 南怡 將軍)
- 외손자: 군수(郡守) 남빈(南份)
- 사위: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
- 4남: 성녕대군(誠寧大君) 이종(李褈)
- 며느리: 삼한국대부인 성씨(三韓國大府人 成氏)
- 양손자: 원천군(原川君) 이의(李宜)
- 며느리: 삼한국대부인 성씨(三韓國大府人 成氏)
- 1녀: 정순공주(貞順公主)
- 남편: 태종대왕(太宗大王) 이방원(李芳遠)
4. 평가[편집]
원경왕후는 조선 왕비 중 가장 긍정적인 영향을 준 여장부이자 당대의 여걸로 평가받는다. 그 이유는 남편 이방원을 왕위에 오르게 했던 킹메이커였고, 무엇보다 세종대왕의 어머니란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성격 또한 당대의 대 여걸(大女傑)답게 굉장히 호쾌하고 괄괄했다.
자칫 친정까지 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에서 기꺼이 모든 걸 걸고 남편 이방원을 지원해 결국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본인 남편에 의해 수족이 잘리고, 집안이 몰락하는 드라마틱한 인생사로 명성황후, 인현왕후와 함께 가장 유명한 조선의 왕비라 할 수 있다.[26]
원경왕후 친정 집안인 여흥 민씨는 고려 중기부터 대대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이었고 자신의 아버지인 민제는 기록에 따르면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였기 때문에 원경왕후 본인도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원경왕후는 기록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아름다웠으며 총명했고, 지혜롭기도 하였다"고 한다. 원경왕후가 정말 똑똑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아들 세종대왕이 어머니의 영향 때문에 더 총명했을 가능성이 높다.[27]
세종대왕의 어머니이지만 정작 원경왕후는 태종 이방원의 왕비로만 기억될 뿐 세종의 어머니로는 잘 기억되지 않는다. 태종의 아내다운 괄괄한 성격에 남편을 옥좌에 올리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가 바로 본인 남편에 의해 형제들을 모두 잃고 가문이 몰락하는 장면이 워낙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28] 자세한 가족관계는 태종(조선)/가족관계 참고. 현종비 명성왕후 김씨와 함께 역대 조선 왕비 중에서도 손꼽히는 괄괄한 여장부로 꼽을 수 있다. 흔히 여장부로 평가받는 문정왕후 윤씨나 정순왕후 김씨는 적어도 개인적인 성품은 차분하고 신중한 편이었다.또한 상당한 외모를 가졌던 왕비였던것으로 추정된다.
태종이 왕이 되자마자 일차적으로 원경왕후의 가족을 개박살냈기에 이들 부부의 사이가 마냥 좋았다고 볼 순 없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조선 왕실에서 왕과의 사이에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왕비이기도 하다. 정안군 시절 요절한 세 명의 아들과 1412년에 태어나서 요절한 자식까지 포함하면 총 12명의 자식을 두었다.
마지막 아이가 태어난 해는 1412년(태종 12년). 동생 민무구와 민무질이 죽은 지 2년여 뒤인 47세에 낳았다.[29] 지지고 볶고 물고 뜯고 하는 와중에도 금슬이 유지되었다. 불같은 성격의 태종도 아들인 양녕대군과 성녕대군을 끔찍이 아껴서 이들 문제에 대해서는 아내 원경왕후와 의견이 일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볼 때 마냥 으르렁거리기만 한 것 같지는 않다. 사실 이 부부가 처음부터 하루가 멀다하고 부부싸움 해대던 사이가 아닌데 상기됐지만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첫눈에 반하였고, 2차 왕자의 난까지도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등 금술좋은 천생연분의 모습이 더 강했다.
즉, 이들 부부의 관계는 전형적인 애증이다.[30] 사적으로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왕족이라는 신분, 그리고 왕권을 확립해야 하는 건국 초반기라는 시대적 배경 때문에 공적으로는 권력위계상 충돌할 수밖에 없는 사이였던 것.
딸 정선공주를 토대로 하여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 모계 혈연이 된다.
정선공주 - 외손녀 남씨 - 외증손 평산신씨 자승 - 평산신씨 숙권 - 평산신씨 명화 - 신사임당 - 율곡 이이 - 서손 덕수이씨 경림, 덕수이씨 경정
5. 대중매체에서[편집]
다른 사람도 아닌 태종의 정비이자 세종의 어머니이며, 인물의 성격과 생애 자체도 무척 흥미진진했기에 사극에서는 자주 나오는 인물이며, 나오더라도 주연진 중 하나가 되는 경우가 많다.
- 1996년 KBS의 용의 눈물에서는 최명길이 연기하였다. 포스있고 강단있는 여인으로 나오며 초반에는 이방원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모사풍의 이미지로 나온다.[33] 왕비가 된 이후에는 태종에게 대들다가 뒤이은 결과가 신통치 않은 어찌보면 불쌍한 여인으로 나온다. 상왕이 된 태종이 사돈댁(소헌왕후의 친정) 박살내는 것을 보며 "또 못할 짓 한다"고 하면서도 "저렇게까지 해서라도 왕권을 지키려는 태종이 딱해 보인다"고 한다. 사망씬에서는 묘하게도 대비후의 임종을 태종이 혼자 지키며 태종과 대비가 화해하면서 대비가 사망한다. 〈용의 눈물〉 촬영 후반부에 최명길은 만삭이었으며[34] 태종 앞에서 상을 엎고 바닥을 기는 연기들을 했는데 나중에 유동근이 회고하기를 엄청 무서웠다고 한다.[35] 용의 눈물에서는 이성계의 며느리이자 이방원의 부인이라는 점에 중점을 두었는데 문서 참고.
-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도 배우 최명길[36] 이 연기했다. 그러나 용의 눈물과 달리 이 작품에서는 아들 세종이 주인공이니만큼 원경왕후는 비중이 좀 낮아지고 대신 세종대왕의 어머니라는 점을 더 부각시켰다. 남편 태종에 의해 친정이 박살나게 생기자 스스로 궐을 떠나려다 태종이 막고 아우들은 죽지 않으며 세자의 저위가 흔들리다는 말에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며느리 소헌왕후의 친정이 남편에 손에 박살나자 차라리 폐위시키는 게 낫다고 하지만 새 왕비를 들이며 또 피를 보겠지라며 말한다.
- 2013년에 개봉한 영화 《관상》에서는 작중 시점에서 이미 고인이 된지 오래라 둘째 손자인 수양대군이 주인공인 김내경에게 "내 어릴적 조모에게 귀가 잘생겼다는 말을 자주 듣곤 했는데, 자네가 보기에도 그러한가?"라고 묻는 것으로 언급만 된다.
-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배우 강세정[37] 이 연기했다. 이 드라마에서도 포스는 여전해서 '킬비'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작중 활약도 많은데, 이방원을 순금부로 끌고 가려는 정도전에게 직접 무릎을 꿇으며 그의 목숨을 구하고 여러 번 대화를 통해, 이방원을 각성시키는가 하면 무인정사가 일어나자 손수 조준을 찾아가 겁박하고 이지란을 찾아가 설득하는 등 내조의 여왕다운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이방원 부부가 왕과 왕비가 된 장면이 짧게 나오는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궁궐 주위를 둘러보는 원경왕후를 태종이 매의 눈으로 쳐다보는 묘한 장면이 나온다. 시청자들은 이 장면을 훗날 태종이 원경왕후의 친정을 숙청하는 걸 암시한다고 이해했다. 문서 참고.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공승연이 연기했다. 민다경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이방원의 여인 중에서는 분이에 밀리는 감도 있지만, 역사를 반영해서인지 후반부로 갈수록 비중이 높아진다.
-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익히 알려진 세종의 상상화를 닮은 용모로 그려졌다. 세종의 용모는 모계 유전이라는 설정인 듯.[38]
- 웹소설 연못에 핀 목화 - 송경별곡에서 잠깐 등장하고 언급이 간간히 나오는데, 실제 역사처럼 화통하고 괄괄한 성격을 자랑한다. 거사를 대비해 군사와 무기를 숨기고, 남편인 이방원과 매일 투닥투닥한다며 시숙인 방원의 형들이 증언했다.
- 카카오페이지 웹소설 〈신녕궁주전〉에서도 실제 역사와 같은 성격으로 나온다. 남편 태종의 왕자의 난을 직접 도왔다고 언급되었고, 남편의 아이를 가졌던 약방이라는 이름의 노비가 정식 후궁이 된 후에도 괴롭히며, 지밀나인 금영이 대전의 나인들과 내관들에게 거짓말을 해서 기어이 태종의 승은을 입자 불같이 화낸다. 그 와중에 태종이 자신의 새 지밀나인 신아지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소식에 아지를 태종에게 보낸다. 이후로도 아지와는 어느 정도 우호적인 관계이면서도 후궁들과는 미묘하게 대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