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춘추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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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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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속기간
기원전 11세기 ~ 기원전 209년
위치
중국 허난
수도
매(沬)[2] → 조(曹) → 초구(楚丘) → 제구(帝丘)
국성
(姬)[3]
국가원수
백작 → 후작 → 군
언어
상고 중국어
문자
금문전서 (대전체)
종교
중국 토속 종교[4]
종족
화하족
성립 이전
주나라
멸망 이후
진나라, 초나라
현재 국가
중국

1. 소개
2. 역사
3. 역대 군주



1. 소개[편집]


[5]

중국 주나라(서주) 때 건국된 국가이다.


2. 역사[편집]



2.1. 서주[편집]


상나라 멸망시 태공망 여상(제나라의 시조), 소공 석(연나라의 시조) 등은 아예 상을 없애려고 했으나 무왕의 아우 주공 단(노나라의 시조)의 제안에 따라 주왕의 아들 무경을 상에 봉한다. 이와 아울러 그 주변에 나라, 채나라, 곽나라를 세우고 각각 무왕의 아우들이었던 관숙 선, 채숙 도, 곽숙 처를 봉했다.

이들의 목적은 무경을 감시하는 것이었기에 삼감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무왕 사후 섭정을 맡은 주공 단의 찬탈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삼감의 난'을 일으켰으나 주공 단은 이들을 3년 만에 진압하여 주모자였던 무경과 관숙 선을 죽이고 채숙 도는 유배, 곽숙 처는 삭탈 관직에 처했다. 이 때 상나라 수도 일대의 이름을 은에서 위로 바꾸고 강숙 봉(문왕의 여덟 번째 아들이자 무왕의 동생)을 봉했다. 수도는 조가였다가 초구, 마지막에는 복양으로 옮겼다. 국성은 희씨이다. 상나라 제사는 주왕의 큰형이었던 미자 계(啓)[6]를 세워 송나라(宋)에 봉했다.

처음 강숙이 봉토를 받았을 때 그 작위는 백작이었지만 경후 때 주 이왕에게 뇌물을 바쳐 후작으로 올랐고 기원전 771년 견융이 서주의 수도 호경을 침공했을 때 무공이 (晉), (秦)과 함께 견융을 몰아낸 공으로 공의 시호를 썼다. 이때 무공은 주 왕실의 사도를 겸함으로써 위나라는 전성기를 맞았다.


2.2. 춘추시대[편집]


이때만 해도 정나라(鄭), 송나라(宋)와 함께 큰 세력이었지만 후에 제나라(齊), 진나라(晉), 송나라(宋), 노나라(魯) 등의 압박으로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기에 공자들 간의 자리 다툼으로 쇠퇴했는데[7] 장공이 죽은 후 장공의 서자 주우가 자신의 이복 동생 환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충신 석작 등의 수습[8]으로 환공의 또 다른 이복 동생 선공을 세워서 내분은 진정되었다.

하지만 선공은 색골이라서 자신의 계모였던 위 장공의 첩 이강을 범하고 아들 급자(急子)를 낳았다.[9] 또 급자에게 시집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제나라 희공의 딸 선강스틸하고 수(壽)와 삭(朔)이라는 아들을 낳고 선강을 총애하자 선강과 삭은 급자를 모함했다. 선공도 수를 태자로 삼기 위해 원래 태자였던 급자를 죽이려고 했다. 선공은 급자를 다른 나라의 사신으로 보냈는데 미리 도적들을 매수해 사신이라는 표시를 보면 죽이라고 미리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수가 급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신의 상징인 백모(白毛)[10]를 가지고 먼저 떠났고 수는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를 알고 통곡한 급자는 스스로 자신이 목표라는 것을 도적들에게 밝혔고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에 충격받은 선공은 화병이 들어 숨을 거두었고 수의 동복 동생인 삭이 뒤를 이어 혜공이 되었다.

혜공은 사악해서 평소 급자와 수를 모함했기에 백성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11] 이에 급자의 동생 검모는 우공자 직 등의 협조를 얻어 반란을 일으켜 혜공을 몰아내고 스스로 군주가 되었다. 하지만 혜공의 외숙부뻘이었던 제나라 양공은 그를 지원해 검모를 몰아내고 혜공을 복위시켰다. 혜공은 돌아와 우공자 직 등은 죽였지만 정작 검모는 주나라로 추방시키는 걸로 끝냈는데 그가 주왕의 부마였기 때문이었다.

혜공이 죽자 그의 아들 적이 즉위하니 그가 의공이다. 의공은 덕후질을 하다가 나라를 망치고 본인도 적족의 침공을 받아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의공의 신하 굉연(宏演)이 시신이나마 수습했으나, 칼로 엄청 썰려서 (肝) 외에는 고깃 덩어리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굉연은 그 간을 향해 절을 한 뒤, 주공의 시신을 장사지낼 관과 기구가 없으나, 자신의 몸으로 관을 대신하겠다고 말하고 스스로 칼을 들어 배를 가른 다음 자신의 배 안에 간을 넣고 목숨을 끊었다. 이를 두고 부복납간(剖腹納肝)이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나라가 멸망할 뻔 하였으나, 제나라 환공의 도움으로 간신히 회복했고 수도를 폐허가 된 조가에서 초구로 옮겼다. 의공의 아들 개방은 제나라로 망명해서 나중에 제나라 간신이 되어 역아, 수조와 함께 환공을 악의 길로 빠뜨리고 뒤를 이은 효공이 죽자 그의 아들을 죽이고 소공을 즉위시키는 등 제나라를 말아먹기도 했다.

위나라 입장을 보면 문제는 개방이 이런 길을 걸었기 때문에 혜공의 후대가 남아 있지도 않았고 백성들은 정통성이 없었던 혜공과 정신나간 의공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그래서 비운의 태자였던 급자의 후손을 찾았지만 급자의 아들은 이미 죽었고 수의 아들은 없었기에 할 수 없이 검모의 동생 소백 석의 장남 신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대공이었다.[12] 하지만 대공은 몸이 약해 곧 죽었고 그의 아우 훼를 세우니 그가 문공이다. 문공은 우수한 임금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기에 진력했고 이렇게 위나라의 혼란은 종식되었다.

교통의 요지라는 이점 때문에 문화는 흥성하였지만 문공이 진(晉)나라 떠돌이 공자 중이를 푸대접했다가 중이가 진나라 문공으로 군주가 되자 위기를 맞기도 하는 등 계속 몰락했고 강국인 제(齊), 위(魏) 사이에 끼어서 명맥을 유지했다.

그 후에도 위나라 출공과 장공(이름은 괴외) 부자(장공이 출공의 아버지)간의 골육상쟁이 일어났다. 이것은 괴외가 세자 시절 어머니 남자(南子)(...)[13]가 음탕한 불륜을 저지르는 것을 목격하자 죽이려고 하다가 뽀록나서 외국으로 망명하면서 시작되었다. 괴외의 아버지 영공이 죽자 괴외의 아들 출공이 임금이 되었으나, 괴외가 다시 돌아와서 출공을 몰아내고 장공이 되었다. 그러나 장공이 쫓겨나고 제나라와 진나라의 입김을 받아 공자 반사와 공자 기라는 위나라 공족들이 차례로 임금이 됐다 쫓겨나는 혼란이 반복되었다. 겨우 위나라 내부의 움직임으로 출공이 복위하여 안정되나 싶더니 출공이 자기를 불러다 임금으로 삼은 신하를 쫓아냈다가 역관광을 당하는 해프닝까지 빚어졌다.


2.3. 전국시대[편집]


전국시대에 이르러 위(衛)나라는 위(魏)나라의 종속국 신세로 전락했다. 위혜왕이 칭왕한 뒤에는 아예 성후를 폐위하여 그의 신하였던 자남 경(子南勁)이라는 영공의 방계 후손[14]을 후작으로 책봉했는데 그가 평후이다. 이에 성후 이후부터는 더이상 선대의 군주를 공(公)으로 높이지 않게 되었다.

기원전 330년에 위(魏)나라는 위(衛)나라를 아예 합병해버렸다. 당시 평후의 아들이 후작을 잇고 있었는데 그에게 복양(濮陽) 일대만을 식읍으로 남겨주었고, 이에 위(衛)나라 종실의 명맥은 일개 식읍의 주인인 '위군(衛君)'으로 이어지게 되었다.[15] 이후 전국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위(魏)나라가 진(秦)나라에 합병되어 버렸고, 진나라는 복양에 동군(東郡)의 치소와 현(縣)을 설치하면서 기존에 있던 위군의 식읍을 야왕(野王)으로 옮겨두었다.

진나라가 군현제를 실시하고 있던 것에 비춰, 진나라가 기존에 있던 귀족들의 영지를 몰수하고 군현을 설치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진나라는 귀족들의 영지에 해당되는 '읍(邑)'의 상위 단계로 현(縣)을 설치하고 현령(현장)을 왕의 대리인 신분으로 행정권과 사법권을 행사하게 하여, 기존 귀족들의 통치권한을 제한해둔 것에 가까웠다. 오히려 진나라는 공적을 세운 신하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식읍을 수여하여 그 공적을 표창하는 제도를 채택하고 있었다. 기존 6국에 있던 식읍들도 함부로 몰수하여 직할령으로 만들지는 않았는데,[16] 6국의 직계 왕족들은 대체로 죽음을 면치 못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에 위군(衛君)은 이미 일개 식읍의 주인으로 격이 낮아져 있었기에 오히려 기존의 권리를 계속 보장받게 된 운명의 반전이 일어났다. 인생사 새옹지마 이를 두고 진나라가 위(衛)나라를 특별히 취급하여 명맥을 잇게 했다느니, 시황제가 실제로는 전국을 통일한 것이 아니었다는(...) 등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데, 진나라의 군현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발생한 오해로 보인다.


2.4. 초한쟁패기[편집]


시황제 때까지 위군(衛君)의 명맥은 이어졌으나, 호해 때인 기원전 209년에 마지막 위군 각의 식읍을 몰수하여 위군이란 직함마저 사라졌다.사필귀정?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난 때가 기원전 209년 7월인데, 위군 각이 폐위된 때는 기원전 209년 9월이다. 참고로, 같은 달에 항량과 유방이 처음 일어났다. 이 시점에서 다시 일어난 나라(그 나라의 임금을 칭한 자가 있는 나라, 장초 제외)는 조, 제, 연, 위(魏), 그리고 사실상 초(항량)까지 있으니 6국이 사실상 부활한 상태로 진나라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마도 주나라의 후손이니 6국 반란과 더불어 정통성을 내세우는 자가 이용할지도 몰라 없앤 듯하다.[17] 이 시기에 당장 초의제, 조헐처럼 단지 정통성 때문에 옹립된 케이스가 있기도 하다.

위만은 이 나라와는 무관하다.


2.5. 뒷이야기[편집]


한무제 때에 이르러 종래 한나라의 통치철학인 황로학(黃老學)[18]을 대체하고자 유학을 도입해보는 시험이 진행되었는데, 이에 주나라 왕실의 후예를 예우하자는 유학자들의 청원에 따라, 기원전 114년에 희가(姬嘉)라는 인물을 주나라 왕실의 후예로 공인하여 식읍을 수여하고 관내후 격으로 예우했다. 희가가 받은 작위는 주자남군(周子南君)이었고, 그 지위를 대를 이어 세습했다. 이후 유학에 심취해있던 원제가 즉위하자 유학자들은 주자남군의 지위를 격상해야한다는 여론을 펼쳤고, 결국 기원전 44년에는 주승휴후(周承休侯)로 개봉(改封)되어 제후왕의 바로 아래 서열로 높였다. 유학자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주나라가 하나라은나라의 후예를 책봉하고 빈객으로 예우한 예에 따를 것을 요구했는데, 이를 이왕삼각론이라고 한다. 전한 말기에 이르러서는 유학이 한나라의 통치철학의 지위를 확고히 한 상황이었기에, 결국 기원전 8년에는 후에서 공으로 격상되어 천자의 빈객으로서 제후왕보다 높은 예우를 받게 되었다.[19] 왕망이 정권을 장악한 기원후 4년에는 정공(鄭公)으로, 신나라가 세워지자 장모공(章牟公)으로 전봉(轉封)되었다가, 신나라가 멸망하자 도로 주승휴공으로 복구되었다. 후한 때인 37년에 공(衛公)으로 전봉되었고, 왕조들이 교체되는 와중에도 위공에 대한 예우는 영가의 난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한서의 주석가인 신찬(臣瓚)은 '작호에 자남이 들어가니 희가는 위나라의 공자 자남미모(子南彌牟)의 후손이 아닐까'라고 추정했다. 나중에 (자남씨가 국성인) 위나라를 봉호로 쓴 걸 보면 자남씨라는 추정은 설득력이 있다. 다만 희가는 얼자(孼子) 출신이라는 점 외에는 대략적인 가계조차 사서에 언급되지 않고 있어, 단정하긴 무리라고 보는 의견이 대세이다.

3. 역대 군주[편집]


위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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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衛)나라의 역대 군주는 다음과 같다. 폐위된 군주는 시호가 없이 이름만 있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군주도 있다.

  • 1. 강숙(康叔) 봉(封) 기원전 1040년? - ? : 주문왕의 9남이자 무왕(주)의 동복 동생으로 옛 상나라 지역에 봉했다.
  • 2. 강백(康伯) 모(牟)
  • 3. 고백(考伯)
  • 4. 사백(嗣伯)
  • 5. 첩백(疌伯) 또는 지백(摯伯)
  • 6. 정백(靖伯)
  • 7. 정백(貞伯) 또는 기백(箕伯) ? - 기원전 867년
  • 8. 경후(頃侯) 기원전 866년 - 기원전 855년 - 건국 때부터 백작이었지만 주 이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후작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당나라 사마정은 《사기색은》에서 《강고》에 강숙을 “맹후”라 부른 구절을 들어 원래 강숙은 후작이었고 또 제후의 맏이로서 '방백'이었기 때문에 이후 강숙의 후예들이 '백'을 칭한 것은 '방백'의 의미며 사기에 경후 때에 뇌물을 바쳐 후작이 되었다는 것은 이때에 방백의 권위를 잃어 보통의 제후와 같은 칭호를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 9. 희후(釐侯) 기원전 854년 - 기원전 813년
  • 10. 공백(共伯) 여(餘) 기원전 813년
  • 11. 무공(武公) 화(和) 기원전 812년 - 기원전 758년
  • 12. 장공(莊公) 양(揚) 기원전 757년 - 기원전 735년
  • 13. 환공(桓公) 완(完) 기원전 734년 - 기원전 719년
  • 14. 주우(州吁)(폐위) 기원전 719년
  • 15. 선공(宣公) 진(晉) 기원전 718년 - 기원전 700년
  • 16. 혜공(惠公) 삭(朔) 기원전 699년 - 기원전 696년 또는 기원전 699년 - 기원전 697년
  • 17. 검모(黔牟)(폐위) 기원전 696년 - 기원전 688년 또는 기원전 696년 - 기원전 687년
  • 18. 혜공(복위) 기원전 688년 - 기원전 669년 또는 기원전 686년 - 기원전 669년
  • 19. 의공(懿公) 적(赤) 기원전 668년 - 기원전 660년 : 학덕후로 나라를 말아먹었다. 침략한 적인들에게 살해되었으며, 부복납간이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
  • 20. 대공(戴公) 신(申) 기원전 660년
  • 21. 문공(文公) 훼(燬) 기원전 659년 - 기원전 635년
  • 22. 성공(成公) 정(鄭) 기원전 634년 - 기원전 600년
  • 23. (瑕)(폐위) 기원전 631년 ~ 기원전 630년
  • 24 성공(복위) 기원전 630년 ~ 기원전 600년
  • 25. 목공(穆公) 속(速) 기원전 600년 - 기원전 589년
  • 26. 정공(定公) 장(臧) 기원전 588년 - 기원전 577년
  • 27. 헌공(獻公) 간(衎) 기원전 576년 - 기원전 559년 : 주색 잡기와 사냥만 밝히다가 반란이 일어나 폐위되었다. 사실 죽일 수도 있었으나, 호위 무사 공손정이 당시 최고의 활잡이인데다가 추격하는 장수 유공차가 그의 제자라서 화살촉을 빼고 빈 화살만 쏘면서 놔주는 바람에 망명에 성공하였다.
  • 28. 상공(殤公) 추(秋) 기원전 558년 - 기원전 547년 : 헌공 축출 후 귀족들이 내세운 바지사장 임금으로 위 헌공 복위 때 폐위되고 처형되었다. 하지만 그가 불쌍했는지 그래도 시호는 줬다. 단지 그 시호가 일찍 죽을 상 자여서 그렇지(...)
  • 29. 헌공(복위) 기원전 546년 - 기원전 544년
  • 30. 양공(襄公) 악(惡) 기원전 543년 - 기원전 535년
  • 31. 영공(靈公) 원(元) 기원전 534년 - 기원전 493년 : 보통 영이라는 시호는 사형을 당하거나 폐위된 군주에게 주로 주어지나, 평범한 폭군이 영을 시호로 받는 일도 있었는데, 이 사람이 그런 예이다.
  • 32. 출공(出公) 첩(輒) 기원전 492년 - 기원전 480년
  • 33. 장공(莊公) 괴외(蒯聵 기원전 480년 - 기원전 478년
  • 34. 반사(斑師)(폐위) 기원전 478년
  • 35. (起)(폐위) 기원전 477년
  • 36. 출공(복위) 기원전 476년 - 기원전 470년 또는 기원전 476년 - 기원전 456년
  • 37. 도공(悼公) 검(黔) 기원전 469년 - 기원전 465년 또는 기원전 455년 - 기원전 451년
  • 38. 경공(敬公) 불(弗) 기원전 464년 - 기원전 432년 또는 기원전 450년 - 기원전 432년
  • 39. 소공(昭公) 또는 소공(橈公) 규(糾)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26년
  • 40. 회공(懷公) 미(亹) 기원전 425년 - 기원전 415년
  • 41. 신공(愼公) 퇴(頹) 기원전 414년 - 기원전 383년 또는 기원전 414년 - 기원전 373년
  • 42. 성공(聲公) 또는 성공(聖公) 훈(訓) 기원전 382년 - 기원전 372년 또는 기원전 372년 - 기원전 362년
  • 43. 성후(成侯) 속(速) 기원전 371년 - 기원전 343년 또는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3년 : 국력이 미약해져 공이라 칭한 것을 후라고 칭한다. 최후의 위씨(衛氏) 군주.
  • 44. 평후(平侯) 경(勁) 기원전 342년 - 기원전 335년 또는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25년: 최초의 자남씨(子南氏) 군주.
  • 45. 사군(嗣君) 또는 효양후(孝襄侯) 기원전 334년 - 기원전 293년 또는 기원전 324년 - 기원전 283년 : 국력이 바닥을 기다 못해 지하까지 뚫어 아예 군으로 깎아 내린다.
  • 46. 회군(懷君) 기원전 292년 - 기원전 254년 또는 기원전 282년 - 기원전 253년
  • 47. 원군(元君) 기원전 254년 - 기원전 241년 또는 기원전 253년 - 기원전 230년
  • 48. (角)(폐위) 기원전 240년 - 기원전 209년 또는 기원전 229년 - 기원전 209년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ɢʷat-s/. 현대 발음은 Wèi.[2] 조가(朝歌)와 같은 지명.[3] 춘추전국시대에는 성과 씨를 구별했는데 위나라 희성은 위씨(衞氏)였다가 자남씨(子南氏)로 바뀐다.[4] 단, 춘추전국시대 사람들은 세속적인 편이었다.[5] 간체: 卫. 참고로 현대 한국어와 현대 표준중국어(관화)로는 위(衛)와 위(魏)의 발음이 구분되지 않지만, 광동어(Wai6와 Ngai6), 일본어(えい/Ei와 ぎ/Gi), 베트남어(Vệ와 Ngụy)로는 구분된다. 그 외 표기로 衞. 한자에는 이체자(異體字)가 굉장히 많다. 문헌을 뒤져보면 이것 말고도 다른 이체자들이 많이 존재한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구자체를 쓰던 시절에 衞가 국가 표준이었다. Wey라고도 쓰는데 현대 표준 중국어에서 성조까지 똑같아 한어 병음으로는 도무지 구분할 방법이 없는 위(魏)와 위(衛)를 구분하기 위해, 종종 위(魏)를 Wei로 쓰고, 위(衛)를 Wey로 적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한어 병음으로 제대로 적을 때는 둘 다 Wèi라고 적는 게 맞지만 영어 등에서 한자 병기 없이 표기할 때는 예외를 적용하는 것이다. 참고로 Wey는 국어라마자라는 표준중국어(관화)의 로마자 표기법으로 한어 병음 Wèi에 대응되는 철자이다. 아마 위(魏)는 중국사에서 자주 나타나 자주 표기되므로 표준적인 Wei로 쓰고, 위(衛)는 춘추 시대에만 끗발 날렸고 전국 시대에는 소국이었으며 이후에는 아예 왕조명으로 쓰이지 않아 표기할 일이 상대적으로 적으므로 듣보잡 일반적으로 안 쓰는 표기인 Wey로 쓰게 된 듯하다. 다만 춘추 전국 시대 이후 시대의 왕조에서 왕족이나 기타 공신들에게 명목상 분봉하는 영지 이름이 위(衛)나라일 경우에는 Wey로 안 적고 Wei로 적는 경우가 많다.[6] 사기에서는 '개(開)'라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한경제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라 우왕의 아들 계, 노나라 민공 노민공도 이름을 '개'라고 기록했으며 전국시대 직전 위(魏), 조나라, 한나라 삼국이 지백을 무찌를 때 공을 세운 장맹담(張孟談)은 장맹동(同)으로 기록했는데 이것은 저자 사마천의 아버지 이름이 사마담(司馬談)이었기 때문이었다.[7] 사실 무공도 자신의 형 공백을 죽이고 즉위했다.[8] 석작은 주우를 죽이고, 주우가 군주가 되는 데 공을 세운 아들 석후도 죽였는데, 이것은 '대의(나라)를 위해 친족도 죽인다'라는 뜻의 '대의멸친(大義滅親)'의 유래가 되었다.[9] 참고로 얼마나 급하게 낳았는지 이름이 급하게 낳은 아들이라는 뜻이다.[10] 얼룩소의 꼬리털로 만든다.[11] 위 선공의 재위 기간 19년을 고려해 보면 선공이 즉위한 후에 태어난 혜공은 즉위했을 때 미처 20세도 되지 못했다. 즉 10대에 이미 형들을 헐뜯고 다닌 것.[12] 소백은 제 양공의 주선 하에 계모였던 선강과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보았다.[13] 남자(男子)가 아니다! 남자는 송나라 공녀, 즉 거슬러올라가면 옛 상나라 왕실의 후예로 '자'는 성을 의미한다. 남은 시호이며 결국 자성이다.[14] 조상 공자 영은 영공의 서자로 문공의 7세손이다. 위에서 장공이 달아나 위나라에 세자가 없을 때 위 영공과 남자에게서 모두 영공의 뒤를 이으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받지 않고 출공을 세우도록 권하고 자신은 고사했다.[15] 본래 군(君)이란 읍(邑)의 주인을 지칭하는 말로, 여기에서 우리말 "임금"과 같은 뜻을 갖게 된 것이다. 춘추시대 이전까지는 이른바 오등작으로 일컬어지는 다른 칭호들을 보유한 경우에는 보통 그 칭호로 부르긴 했으나, 《논어》의 〈자로〉 3장에서 공자의 제자 자로가 스승에게 질문할 때 위군(衛君)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처럼, 당시 제후로 칭해지던 군주들을 가리켜 군으로 지칭하는 것이 딱히 격을 낮춰 부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전국시대 때는 사정이 달라지는데, 기존의 제후들이 왕을 자칭하고서는 스스로 '후(侯)'를 책봉하게 되면서, 군(君)은 정식으로 책봉되지 않은 식읍 소유자들을 한정해서 부르는 칭호로 격이 낮아졌다. 즉 위성후 때부터 공식적으로 '후'로 칭해진 것은, 위(衛)나라가 위(魏)나라 왕의 책봉을 받는 속국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군(君)으로 격하된 것은 아예 나라 자체를 뺏겼다는 의미인 것이다.[16] 때문에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자 기존 6국의 부활을 지지하는 유력자들이 나타나 진나라가 급속도로 붕괴되어 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17] 비슷한 사례로 신라 문무왕은 고구려, 백제, 당나라를 물리친 삼국통일 이후에도 고구려 왕족 안승의 작은 보덕국을 일부러 남겨두고 신라 왕족과의 국혼까지 치러주었지만, 아들 신문왕이 보기엔 이게 구시대의 잔재였는지 즉위 후 얼마 안 가 제거한다.[18] 법가를 통치철학으로 도입한 진나라가 결국 실패하자 진나라 말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도가의 일파인데, 사실 전국시대 이전의 정통 도가라기보다는 제자백가의 주요 논리들을 도가 이론을 중심고리로 짬뽕시켜 놓은 것에 가까웠다. 사실 황로학 이후로 한나라가 도입한 유학 역시 기존의 정통 유학을 직접 계승한 것이라기 보다는, 황로학의 중심 논리를 유가 이론으로 수정해놓고 충효사상을 강조하는 형태로 변질된 것에 가깝다.[19] 별도로 공자의 후손인 공길(孔吉)을 은소가후(殷紹嘉侯)로 책봉했는데 공자가 상나라 왕실의 후예였기 때문이었다. 이쪽은 후일 송공(宋公)으로 격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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