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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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서울대학교 총장
유기천
劉基天 | Yoo Kicheon


파일:유기천.jpg

출생
1915년 7월 5일
평안남도 평안부 (현 평양시)
사망
1998년 6월 26일 (향년 82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본관
강릉

월송(月松)
학력
숭실학교 (졸업)
히메지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법학 / 학사)
예일 대학교 로스쿨 (법학 / 박사)
경력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장 서리 겸 교학국장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 교환교수
서울대학교 교무처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장 겸 사법대학원장
제9대 서울대학교 총장
플로리다주 푸에르토리코 국민대학 객원교수
샌디에이고 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배우자
헬렌 실빙
가족 관계
아버지 유계준
어머니 윤덕준
형 유기원, 유기형, 유기선
동생 유기진, 유기묵, 유기옥, 유기숙
종교
개신교
1. 개요
2. 생애
2.1. 초년시절
2.2. 서울법대 교수시절
2.3. 미국 망명 시절
3. 학문적 업적
4. 여담
5. 가족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형법학자. 제9대 서울대 총장 역임.


2. 생애[편집]



2.1. 초년시절[편집]


1915년 7월 5일 평양에서 독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6남2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유계준은 진남포와 중국 산동-평양간의 무역을 했고 10여 척의 선박과 수십 명의 직원을 거느린 무역업자였다. 또한 조만식, 오윤선과 더불어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로서 평양의 저명인사였으며,[1] 주기철 목사와 함께 일본 식민주의의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에 대해 끝까지 반대한 사람이었다.

형제들은 대부분 의학을 전공했지만, 혼자 법학을 공부하여 법학자가 되었다. 유기천은 1933년 3월 평양의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내지로 유학해 1936년 4월 히메지고등학교(現 고베대학)에 입학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관보를 통해 구제고교를 찾아보니, 히메지고등학교만 입학시험에서 국어(일본어)작문 과목을 부과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 응시했다고 한다. 식민지 조선의 숭실학교에서 공부한 일본어로는 입시를 치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3년 간의 대학예과 과정을 마치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유기천은 1939년 4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학부에서 그는 "오로지 형법만이 인간의 근본문제를 다루는 학문다운 학문으로 느껴졌다."고 회고할 정도로 형법에 천착해 오노 세이이치로(小野清一郎) 교수의 가르침을 받았다. 1943년 9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을 졸업하면서 은사인 단도 시게미츠(團藤重光) 교수의 소개로 그의 장인인 도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 민법학강좌 교수 가츠모토 마사아키라(勝本正晃)의 조수가 되어 센다이시에서 생활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이후 센다이시에서 조선인연맹 일을 맡아보며 동포의 재판에 변호인으로 종사하던 중, 미군 차량에 교통사고를 당해 도호쿠제국대학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이후 요양하다가 부관연락선을 타고 1946년 2월 약 10년에 걸친 일본 생활을 마무리하고 조선으로 귀환했다.


2.2. 서울법대 교수시절[편집]


귀국 직후인 1946년 4월부터 대학 선배인 고병국 교장의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수가 된 유기천은 1946년 10월 국대안에 의거한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자 경성법전이 개편된 서울법대(초대 학장 고병국)의 조교수로 부임했다. 당시 국내 법학계는 고병국 교장을 중심으로 경성법전에 집결한 동경제대파(東大派, 고병국파)와, 현민 유진오를 핵으로 하는 경성제대파(城大派, 유진오파)로 갈려있었는데 경성법전과의 통합을 반대한 경성제대 출신의 성대파는 국대안 파동 당시 일괄 사표를 제출하고 총사퇴하여 고병국 학장 체제의 법과대학도 위기를 겪었다. 경성제대 재학생들 역시 경성법전의 후신인 법과대학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로 옮겼다. 이런 와중에 유기천은 회고록에서 당시 자신의 교수직이 위태롭게 됐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후술할 1965년 황산덕 교수 파면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서울대학교는 출범하여 1947년 차차 안정을 찾아갔으며, 유기천은 법과대학에서 형법을 가르치면서 민법을 담당한 김증한과 함께 명강의 교수라고 평가받았고, 최태영 학장 후임자인 진승록 학장이 사임하자 학장서리로서 6.25 당시 전시연합대학 체제하에서 서울법대의 기초를 놓으며 부산에서 법학교육을 계속하였다. 당시 부친을 비롯한 일가친척과 동료 제자들이 무수히 죽어나가는 아픔을 겪었기 때문인지, 서울대 부산 가교사 교문에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이라는 라틴어 철제 아치를 세웠다.

1952년에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에 교환교수로 갔다. 1953년에 귀국했다가 1954년에 다시 하버드 로스쿨로 가서 미모의 법학자 헬렌 실빙(Helen Silving)을 만나 결혼하였다.[2] 그때 나이가 39세였다.

1954년부터 1958년까지 미국에 머물면서 예일 대학교에서 '한국문화와 형사책임'(Korean Culture and Criminal Responsibility)이란 논문으로 한국인 최초로 법학박사(SJD)학위를 받았다. 당시 함께 공부하던 정대위 박사(후일 건국대학교 총장)와 교분이 깊어 인류학을 비롯하여 인문사회과학과 융합하는 법학을 만들어보려 하였다.[3]

1960년 한국형법을 영어로 번역하여 책으로 출간하였다. 이어서 1968년에 독일어로도 번역 출간하였다.[4] 또한 '국제비교법사전'(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Comparative Law)에도 한국법에 관한 장문의 소개논문을 실어 안내자 역할을 하였다.

1958년에 귀국한 후 1959년 서울대 교무처장을 역임했다. 1959년 하와이에서 10년마다 열리는 '동서철학자 대회'(East-West Philosophers Conference)에 초청받아 한국을 대표하여 발표하였다. 1961년에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장, 이듬해에는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을 설립하고 사법대학원장에 취임하였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제9대 서울대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학생들에게 한·일관계의 정상화 필요성을 역설해 '어용 총장'이란 비판을 받았다. 반면 박정희에게서는 “왜 데모를 못잡느냐, 총장이 못하면 군대를 동원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대해 “대통령이면 대통령이지 대학을 총장보다 어찌 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 외치고 일어서서 나와버렸다. 결국 1년 3개월만에 서울대 총장직에서 짤리고물러나고 말았다.

서울법대 교수 시절 동료 교수인 황산덕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5] 이들의 관계는 해방 후 서울대에서 벌어지던 동대파(東大派)와 성대파(城大派) 파벌 다툼이 파열음으로 나타난 부분이다. 동대파의 좌장인 고병국 교수가 후배인 유기천을 한국인 최초의 법학박사로 만들기 위해 성대파인 황산덕이 제출한 박사논문의 심사를 이유없이 미루었고(출처). 이 갈등은 결국 1965년 유기천 서울대 총장이 황산덕 교수를 파면하는 데 이르게 된다(참조). 1963~1965년 국제법학계에서 이한기의 선공으로 시작된 박재섭과의 치열한 논쟁 역시 동일한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다.

1971년 초에 학회,강연등을 위해 대만,필리핀을 갔다가, 대만에서 이상한 말을 들었다고 한다. 자신이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다른 학자들이 "너희 나라 친위쿠테타 한다던데?"라고 물었던 것. 놀라서 반문하니 한국에서 대만의 정치체재인 총통제,비상계엄등에 대한 관련 자료들을 전부 수집해갔다는 것. 강의실에서 박대통령이 대만식 총통제 비슷한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있다는 발언을 하였다. 오오, 그대는 용자!![6] 그날 저녁 중앙정보부 요원이 그를 체포하러 사택으로 오기 직전에 제자 검사의 귀띔으로 뒷문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2개월 10일 동안 이곳저곳 숨어다녔다. 그러다가 미국 하버드 대학교의 라이샤워(E. Reischauer) 교수가 유교수를 미국으로 보내라고 김종필 총리에게 편지를 써준 덕분에 겨우 미국으로 망명하였다.[7]

2.3. 미국 망명 시절[편집]


1971년 미국으로 망명한 후 26년 간을 미국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플로리다주 푸에르토리코 국민대학에서 객원교수로서 부인과 함께 비교형법을 강의하였다. 그러다가 캘리포니아샌디에이고로 옮겨, 샌디에이고 대학교 법학대학 교수를 지냈다. 샌디에이고에 있을 동안, 자택에 무궁화 33그루를 심고 아침저녁 조국의 통일을 위해 기도하였다.

1979년 박정희가 시해되고,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이 찾아오자, 국민적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여 서울법대 강단에 다시 섰다. 그러나 5.18 민주화운동 이후 신군부 세력의 집권이 확실해지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1984년 정년 후에는 독서와 집필로 시간을 보냈다. 한국민족은 ‘사라진 이스라엘 10지파’의 하나라는 신념을 가졌고, 이것을 학문적으로 증명하는 데에 여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하였다.[8]

한국과 이스라엘의 유대를 연구하는 학자를 지원하기 위하여 류-실빙재단(Ryu-Silving)을 설립하였다. 광나루에 RS빌딩[9]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유기천기념재단의 모체가 되었다.

만년에 저서 '세계혁명'(The World Revolution)을 출간하였고, 부인의 '회고록'(Helen Silving Memoirs)에 한 장을 빌려 자신의 삶을 적었다.

부인 실빙은 1993년, 유기천은 1998년에 타계하였다. 부부의 시신은 한국으로 옮겨져 포천시의 산정현교회[10] 묘지에 나란히 묻혔다.


3. 학문적 업적[편집]


그의 '형법학' 교과서 2권(총론, 각론)은 한국의 법학도들에게 형법의 바이블로 통했다. 특히 심리학을 형법학에서 중요시해야 한다는 태도와 방법론은 국내 형법이론의 구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유기천이 내세운 형법이론 중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을 들자면,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에 관해서 '반무의식 상태설'을 주장한 것이었다.

1960년대 황산덕에 의해 독일 형법학자 한스 벨첼(Hans Welzel)의 '목적적 행위론'(finale Handlungslehre)이 국내에 수입되어 한국 형법학계를 풍미하자, 이를 비판하였다. 인간의 심리적 구조를 잘 모르는 천박한 이론이라는 것.[11]

심리학만이 아니라 인류학, 언어학, 역사학 등 인문사회과학과 통하는 법학을 ‘과학적’ 방법이라고 강조하였다. 법학이 아무리 도그마틱한 이론이지만 이런 타학문과 대화할 수 있는 ‘과학’이 되어야한다는 것.

대학의 근본은 인문학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생각을 신문에 기고하였다.


4. 여담[편집]


  • 박정희에게 "학원에 군병력을 투입하지 말라"는 소신발언 뒤 신변 안전을 위해 권총을 소지하고 다녔다. 그래서 ‘쌍권총 총장’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 동숭동 서울대 캠퍼스를 확대하기 위해 낙산에 터널을 뚫자고 주장하였다. 이른바 ‘유기천 안’이었다. 그러나 이 안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청와대에서 부결되었다. 그리고 결국 서울대는 관악캠퍼스로 이전하였다. 이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한 글을 발표하였다.

  • 손해목 전 동국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박양빈 단국대학교 법과대학 명예교수, 이재상 전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주광일 변호사(전 서울고검 검사장, 전 국민고충처리위원회(국민권익위원회의 전신) 위원장)의 석사학위논문 지도교수이다.


5. 가족[편집]



위 가계도에서 보듯 형제자매가 모두 의사와 약사 일색의 엘리트 집안이었다. 유기천만 의약학 계열이 아닌 순수 문과생이었는데, 이 사람조차 대한민국 최고 국립대학의 총장을 했으니 형제자매가 모두 수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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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계준은 평양 숭인상업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였다.[2] 실빙은 '하버드-이스라엘 프로젝트', 즉 신생 이스라엘의 법적 기초를 연구하는 팀의 홍일점인 미모의 여성학자였다. 원래 폴란드 크라카우 출생의 정통유대인으로 비인 대학교에서 한스 켈젠(Hans Kelsen)의 제자 겸 조수로 총애를 받다가 하버드 로스쿨로 온 것이었다. 유기천보다 9세 연상(1906~1993)이었지만 종교적,연령적 난관을 극복한 사랑으로 결혼하여 평생의 학문적 반려자로 지냈다.[3] 실제로 두 사람은 귀국 후에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에서 '법과 문화'라는 과목을 공동 강의하였다.[4] 지금도 해외에서 한국형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 책들을 본다고 한다.[5] 이시윤, 민사소송법입문, 제2개정판, 139~141면.[6] 71년 그 유명한 장충단 유세의 김대중 후보가 만약 이번에 박정희가 또 당선되면 총통제를 실시해 종신 독재자가 될 것이라는 경고가 이 유기천 교수의 말을 들어서라고 한다.[7] 사실은 부인 실빙 교수가 라이샤워 교수에게 간청하여 라이샤워 교수가 김종필 총리에게 압력을 가한 것이다.[8]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인과 유대인은 닮은 점이 29가지나 된다.[9] 서울 광진구 아차산로 623에 있으며, 그리 크지 않은 작은 규모의 건물이다.[10] 북한 평양의 산정현교회 신도들이 해방 이후 월남하여 세운 교회이다.[11] 황산덕은 유기천보다 2세 연하이며, 공교롭게도 둘 다 평양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