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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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조 추존 황제
효회황제 | 孝懷皇帝


촉한 제2대 황제
유선 | 劉禪


출생
207년
후한 형주 신야
(現 허난성 난양시 신예현)
즉위
223년 6월 10일
촉한 성도
(現 쓰촨성 청두시)
사망
271년 (향년 64세)
서진 하남군 낙양
(現 허난성 뤄양시)
능묘
북망산(北邙山)
재위기간
촉한의 황태자
221년 5월 15일 ~ 223년 6월 10일
촉한의 황제
223년 6월 10일[1] ~ 263년 11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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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유(劉)

선(禪)
부모
부황 소열황제
모후 소열황후
형제자매
3남 중 장남
배우자
경애황후, 황후 장씨
자녀
7남 3녀(5남 유심)
아명
아두(阿斗)

공사(公嗣)
작호
안락공(安樂公)
시호
서진: 사공(思公)
전조: 효회황제(孝懷皇帝)[1]
제호
후주(後主)
연호
건흥(建興, 223년 ~ 238년)
연희(延熙, 238년 ~ 258년)
경요(景耀, 258년 ~ 263년)
염흥(炎興, 263년)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황제 즉위와 재상 정치
2.3. 친정 실시와 황호의 대두
2.5. 낙불사촉 일화
3. 후일담
5. 가족 관계
6. 기타
7. 미디어 믹스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후주는 현명한 승상에게 정치를 맡겼을 때는 도리를 따르는 군주였지만, 환관에게 미혹되었을 때는 어리석은 군주였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흰색 실은 일정한 색깔이 없고 물들여질 뿐이다." 라고 했는데, 정말 그렇구나!

《촉서 후주전》


삼국시대 촉한 제2대 군주, 마지막 황제(재위 223년 ~ 263년)이다. 촉한정통론을 인정하면 470년을 이어온 한(漢)의 31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로서 그는 선주인 유비를 계승했으므로 후주(後主)라는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3]

소열제 유비의 장남이자 소열황후 감씨의 소생이며, 아명은 아두(阿斗)였다. 이는 태몽이 북두칠성과 관련된 꿈이었기 때문이다.[4] 현대 중국어에서 阿斗는 어리석고 아둔한 사람을 지칭하는 비유적인 단어로 그 의미가 굳어졌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5] 암군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현대의 평가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참고로 유봉의 이름인 봉(封)은 소열제의 친자 유선의 선(禪)과 더불어 봉선(封禪)[6]이 되는데 여기서 두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지은 소열제의 야심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유봉은 양자 출신이므로 애초에 봉은 소열제가 지어준 이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에는, 마침 양자의 이름이 봉이라, 거기에 맞춰서 친아들 이름을 선으로 지었다고 주장한다. 정사에서는 유봉이 먼저 양자로 들어온 뒤 유선이 출생하였으나, 연의에서는 순서가 바뀐 것도 미묘한 일이라며 소열제가 개인적인 야심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어줬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연의에서 순서를 바꾸었다는 음모론도 있다. 물론 소열제가 정말 봉선에서 이름을 지었다는 근거는 없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207년 신야태수 유비가 형주목 유표에게 의지하여 형주의 신야에 있을 때 첩 감부인으로부터 태어났다. 삼국지연의 초반부에서 아명인 '아두'로 등장한다. 태어날 때 푸른 무지개 기운이 주변에 어리는 신비한 이미지를 갖는다.

208년 승상 조조가 형주를 공격했을 때, 장판파에서 조조군에 의하여 죽을 뻔 했으나 조운의 활약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는 정사에도 기록된 이야기다.[7]

위략에서 그는 어린 시절에 위나라에 잡혀가서 노예로 팔려갔다가, 유비가 한중왕이 된 뒤에야 겨우 신분을 회복하고 태자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다른 기록과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보통 와전된 이야기로 추측된다.

손부인이 동오로 돌아갈 때, 어린 아두를 데리고 돌아가려다가 조운이 손부인으로부터 유선을 탈환한 사건도 있다.

유비가 한중왕이 되자 유선은 세자로 책봉되었고 221년에 소열제가 즉위하자 태자로 책봉되었다. 이릉대전에서는 소열제가 성도에 부재하여 태자 유선이 대신하여 성도를 지키게 되었다. 소열제가 이릉에서 패배하자 익주에서 황원 등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태자 유선은 소열제와 승상 제갈량의 동시부재 상태에서도 양홍의 진언을 받아 황원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자신의 친위병을 파견하였으며, 장군 진홀과 정작에게 황원을 토벌하게 하는 위기 관리 능력을 보여줬다. 말년에 강유를 신임해 답중 할거를 막지 못한 중대한 실수를 저질러서 그렇지 실상 사람을 믿고 일을 맡기는 군주로서의 가장 중요한 능력을 보여준 셈. 이외 유비 사후 벌어진 남중 반란은 제갈량 등이 진압하게 된다.


2.2. 황제 즉위와 재상 정치[편집]


223년 5월, 유선이 성도(成都)에서 제위를 이었는데 이때 나이 17세였다. 황후를 황태후로 올렸다.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이 해가 위나라 황초 4년(223년), 촉한의 연호로는 건흥(建興) 원년이다.[8]

같은 해에 황후 장씨(張氏)[9]를 세웠고, 상서랑 등지를 오(吳)에 보내 우호를 굳게 하자 오왕 손권이 촉과 화친하여 사자를 보내 방문하니, 서로 통하여 우호를 맺게 되었다. 224년 봄에는 농사에 힘쓰며 곡식을 기르고, 관문을 닫고 백성들을 쉬게 했다.

225년 3월에 제갈량이 남쪽으로 4군(四郡, 장가, 월수, 익주, 영창)을 정벌하여 모두 평정하자 익주군(益州郡)을 건녕군(建寧郡)으로 바꾸고, 건녕군, 영창군(永昌郡)을 갈라 운남군(雲南郡)을 설치했다. (익주, 영창→ 건녕, 운남, 영창) 또한 건녕군, 장가군을 갈라 흥고군(興古郡)을 설치했다.

227년 봄에 제갈량이 출병해 한중에 주둔해 면수 북쪽 양평(陽平) 석마(石馬)에 영채를 세웠는데, 제갈량집에 기재된 유선의 3월 하조(下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짐이 듣건대 천지(天地)의 도(道)는 인(仁)에 복(福)을 내리고 간사함에 화(禍)를 내리니, 선을 쌓은 자는 창성하고 악을 쌓은 자는 망하는 것이 고금의 불변의 법칙이다. 이 때문에 탕왕, 무왕은 덕을 닦아 왕이 되고, 걸왕, 주왕은 극도로 포악하여 망했도다.

지난날 한조(漢祚)가 중도에 쇠잔해져 흉특(凶慝)한 자들을 그물에서 빠져나오게 하니 동탁이 난을 일으켜 경기(京畿)를 어지럽히고, 조조는 화란을 불러일으켜 천자의 권위를 훔쳐 틀어쥐고 해내(海內)를 잔박(殘剝)하며 무군지심(無君之心)을 품었다. 그 아들 조비는 고아가 된 더벅머리 아이로 감히 뒤이어 난을 일으키고 제위를 도적질해 제왕의 성씨를 바꾸고 문물제도를 고쳐 대대로 그 흉악함을 드러내었다. 이때 제왕의 법도가 온통 어두웠고 천하에 주인이 없으니 우리 천명이 아래로 떨어졌다.

소열황제(昭烈皇帝, 유비)께서는 영명하고 식견이 원대한 덕을 갖추시어 문무(文武)를 빛내고, 건곤(乾坤)의 운행원리에 응하시어 출신(出身)해 난을 평정하고 사방을 경영하시니, 사람과 귀신이 함께 꾀하고 백성들이 현능한 이를 추천하고 만백성들이 즐거이 추대했다.

부참(符讖)을 받들고 순응해 제위를 세워 연호를 고치고, 하늘의 질서를 크게 받들어 피폐해지고 쇠미해진 것을 돕고 일으켜 선조의 대업을 회복하고, 조정의 기강을 이어받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했다. 그러나 만국(萬國)이 평정되기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나셨도다.

짐은 어린 나이에 대업의 터전, 왕업을 이어 태보, 태부의 가르침을 미처 익히기 전에 조종(祖宗)의 중임을 맡게 되었다. 천하가 가로막히고 사직이 제대로 세워지지 못했으니 그 까닭을 길이 헤아리고 바로잡아 선대로부터의 사업을 빛내려 하나 아직 이룬 바가 없어 짐은 심히 두렵도다. 이 때문에 이른 아침에 일어나고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며 감히 자신의 안일을 바라지 않고, 매양 근검절약하여 나라에 도움을 주고 농사를 권하여 백성들의 재물이 늘어나도록 하고, 유능한 인재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고 사사로움을 끊고 마음을 기울여 장사(將士)들을 길렀다. 이에 검을 휘두르며 멀리 달려가 흉역(凶逆)을 토벌하려 했으나 붉은 기를 들어올리기도 전에 조비가 죽고 말았으니 이는 이른바 땔나무에 불을 지피기도 전에 스스로 타 버린 것이다. 그러나 잔당, 남아 있는 추악한 이가 또 천화(天禍)를 계속하여 하수, 낙수에서 제멋대로 날뛰며 무력을 믿고 그치지 않는다.

제갈승상은 포부가 크고 굳세며 충성스럽고 장렬하여 자신의 몸을 잊고 나라를 걱정하니, 선제(先帝)께서 그에게 천하의 일을 맡겨 짐을 위해 힘쓰도록 하셨다. 이제 그에게 백모와 황월(군권을 상징)의 중임을 주고 임의로 명령하는 권한을 맡겨, 보기(步騎) 20만 군사를 통령하고 병거를 감독해 천벌(天罰)을 행하게 하니, 우환을 제거하고 난을 평정해 옛 도읍을 회복하는 일이 이번 거행에 달려있도다. 옛날 항우는 강대한 군사를 거느리고 주(州)를 타넘어 땅을 차지해 크게 힘썼으나, 끝내 해하(垓下)에서 패하고 동성(東城)에서 죽어 종족들을 불태우고 천년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는 모두 그가 의롭지 못하고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아랫사람에게 사납게 굴었기 때문이다.

지금 적(賊, 조위)이 그 죄악을 본받아 하늘과 사람이 원망하니, 천시를 따라 의당 신속히 움직인다면 염정(炎精, 불의 정기. 오행설에 따르면 한나라는 불火) 조종(祖宗) 위령(威靈)의 도움에 힘입어 향하는 곳마다 반드시 이길 것이다. 오왕 손권은 함께 재난과 환난을 근심하니 은밀한 군사로 공모하여 그 후방을 기각(掎角, 적을 협공함)하고, 양주(涼州) 여러 나라의 왕들은 각각 월지(月支), 강거(康居)의 호후(胡侯, 호인 제후)인 지부(支富), 강식(康植) 등 20여 명을 보내 절도(節度, 지휘통제)를 받게 할 것이니, 우리 대군은 북쪽으로 출병하여 병마를 거느리고 창검을 휘두르며 선봉이 되려 한다. 천명(天命)이 이미 이른데다 인사(人事) 또한 마련되었으니 군대를 엄정히 해 기세를 아우른다면 필시 대적할 자가 없을 것이다.

무릇 왕자(王者)의 군대가 정벌함에는 싸움이 없고, 존귀하고 의로운 군사에는 감히 항거할 자가 없으니, 이 때문에 명조(鳴條) 싸움에서 은 탕왕의 군사는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았고, 목야(牧野) 싸움에서는 상(商, 은나라)의 군사들이 창을 거꾸로 든 것이다. 지금 대장기가 향하여 지나는 곳마다 또한 무력을 남용하지 않으려 한다. 사악함을 버리고 정의를 뒤쫓아 단사호장(簞食壺漿)으로 천자의 군대를 영접하는 자에게는, 나라의 상규에 따라 각각 등급과 한도를 두어 크고 작은 봉총(封寵)을 내릴 것이다.

위나라의 종족(宗族), 지엽(支葉), 중외(中外)도 능히 이해득실을 살피고 역순(逆順)의 도리를 헤아려 항복하는 자는 모두 사면할 것이다. 옛날 보과(輔果)는 지씨(智氏)와 관계를 끊어 온 종친이 복을 입었으며, 미자(微子)는 은나라를 떠나고 항백(項伯)은 한나라로 돌아와 모두 제후의 봉토를 받는 경사를 누렸으니, 이들은 전대의 뚜렷한 증험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미혹되어 정의로 되돌아오지 않고 장차 난을 일으킨 자를 도우며 왕명(王命)을 본받지 않는다면 처자식까지 주륙하여 사면하지 않을 것이다. 은혜와 위엄을 널리 베풀어 그 원수(元帥, 으뜸 장수)를 용서하고 피폐해진 백성을 위로하노라. 그 외 조서(詔書)와 율령(律令)은 승상이 천하에 노포(露布)하여 짐의 뜻에 부합하도록 할 것이다.


228년과 229년에도 제갈량이 출병했고 229년에는 오나라의 대제가 칭제하면서 맹약하기로 하면서 오와 함께 천하를 나누기로 했으며, 230년에는 노왕(魯王) 유영(劉永)을 옮겨 감릉왕(甘陵王), 양왕(梁王) 유리(劉理)는 안평왕(安平王)으로 삼았는데, 노(魯)와 양(梁)이 모두 오나라의 분계(分界)에 있었기 때문이다.[10]

제갈량이 여러 차례 출병했다가 도중인 234년에 사망해 군사들이 성도로 돌아오자 대사령을 내렸고, 좌장군 오일을 거기장군 가절 독한중(督漢中)으로 삼았다. 승상 유부장사 장완(蔣琬)을 상서령으로 삼고 국사(國事)를 총통하게 했다. 유선은 상복을 입고 3일간 애도하였다. (화양국지)

이후 장완, 비의, 동윤 등의 능신에게 국정을 맡겼으나, 후궁을 늘리려 하거나 놀이와 향락에 빠졌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동윤초주가 이에 대해서 간언하였다.

235년 봄 정월에는 양의가 역모에 가까운 발언을 하자 중군사(中軍師) 양의를 한가군(漢嘉郡)으로 폐사(廢徙)했고, 여름 4월, 장완의 지위를 대장군으로 올렸다. 236년 여름 4월, 유선이 전(湔)에 이르러 전망하기 좋은 언덕에 올라 문수(汶水)의 물흐름을 보고 열흘 뒤에 성도로 돌아왔고, 무도(武都) 저왕(氐王) 부건(苻健)과 저민(氐民) 4백여 호를 광도(廣都, 촉군 광도현)로 옮겼다.

237년 여름 6월, 황후 장씨(張氏)가 훙(薨, 제후급의 죽음)하자 238년 봄 정월, 황후 장씨(張氏)를 세웠다.[11] 대사령을 내리면서 연호(건흥 → 연희)를 고쳤으며, 아들 유선(劉璿)을 태자로 세우고, 아들 유요(劉瑤)를 안정왕(安定王)으로 삼았다. 239년 봄 3월에는 장완을 대사마로 승진시켰고 243년 11월에 대사령을 내렸으며, 상서령 비의를 대장군으로 삼았다.


2.3. 친정 실시와 황호의 대두[편집]


246년 가을에 대사령을 내렸고 겨울 11월에 장완이 죽었고 위략에 따르면 장완이 죽자 유선이 스스로 국사(國事)를 관장했으며, 252년에 아들 유종(劉琮)을 세워 서하왕(西河王)으로 삼았다.

253년 봄 정월, 대장군 비의가 위나라에서 항복한 곽순(郭循)에 의해 한수(漢壽)에서 살해되고 성품은 바르지 못했지만 능력은 있었던 진지마저 258년에 사망하자 유선은 친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선은 대사령을 남발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며 또한 환관 황호를 총애하여 국가의 기강을 문란케하였다. 친동생인 유영이 황호를 비판하자, 유선은 유영을 멀리하였다.[12] 249년에 하후패가 촉한에 망명해오자, 유선은 하후패와 회견하여 그를 칭송하였고 전한 고제의 건국 공신이었던 하후영을 들어 유씨와 하후씨의 인연을 강조하였다. 유선은 하후패를 극진하게 대해 작위를 높히고 높은 벼슬과 은상을 하사하였다.

254년에 대사령을 내렸고 256년에는 아들 유찬(劉瓚)을 세워 신평왕(新平王)으로 삼으면서 대사령을 내렸으며, 257년에도 대사령을 내렸다. 258년에 사관(史官)이 경성(景星, 도가 있는 나라에서 보인다고 하는 상서로운 별)이 보였다고 말하자 이에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연희 → 경요) 환관 황호(黃皓)가 처음으로 정사를 오로지했다.

250년부터 꾸준히 북벌을 도모하던 강유는 이 무렵에는 대규모 북벌을 도모하여 적도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단곡에서의 패배가 단초가 되어 북벌을 반대하는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샀다. 이에 258년에 염우가 황호와 결탁하였으며, 황호는 강유와 염우를 교체하려고 획책하였다고 한다. 이를 황호 단독 행동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 조정에선 황호와 대립하던 제갈첨, 동궐마저 강유가 공적이 없고 국내가 북벌로 인하여 소진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그를 소환하여 군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군부에선 요화가 '지모가 적보다 뛰어나지 않고 역량도 적으면서 용병이 끊이질 않는다'며 비난했고 장익은 아예 면전에서 출병을 반대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여야 할 것 없이 강유의 군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한 가운데, 번건(樊建)과 더불어 염우(閻宇)로써 강유를 대체할 것을 모의하였으나(학경 속후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선은 끝내 강유의 직책을 유지토록 지시하였는다. 이는 당시에 강유를 대체할 만한 경험과 재능을 가진 사령관급 무장이 없어서이기도 했고, 더불어 유선이 관료들 사이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강유는 촉한 조정이 자신을 해임시킬 것이라는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고, 262년에 다시 한 번 원정을 실패하게 되자 경질될 것을 두려워해 답중에서 할거하게 된다.

259년 여름 6월에는 아들 유심을 북지왕(北地王), 유순(劉恂)을 신흥왕(新興王), 유건(劉虔)을 상당왕(上黨王)으로 삼았으며, 260년 가을 9월에는 공신인 장군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의 시호를 추증했다. 261년 봄 3월, 공신인 장군 조운의 시호를 추증했고, 겨울 10월에 대사령을 내렸다.


2.4. 촉한의 멸망[편집]


262년에도 강유가 북벌을 시도했다가 등애에게 격파되어 답중에 주둔했는데, 263년에 위나라 군대가 촉한으로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고 강유는 "장익과 요화를 보내어 양안 관구와 음평 교두를 나뉘어 지키게 하여 미연에 방비해야 합니다."라는 표문을 보내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유선은 이미 강유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 이후였고, 점괘[13]를 핑계로 강유의 요청을 무시한다. 대사령을 내렸다. 연호를 염흥(炎興)으로 고쳤다. 결국 강유의 우려대로 등애가 음평 방면으로 우회하여 촉한 내지로 직접 공격해왔다. 이 때 유선은 강유관으로 적이 올 수 있다는 판단으로 제갈첨을 파견했으나,제갈첨이 주저하는 사이 등애는 강유관의 마막을 격파하고 험지를 벗어나 평야 지대로 진출했다. 이후 제갈첨군은 요충지를 상실한 채로 등애와 맞붙어야 했고, 면죽에서 제갈첨, 황숭 등이 전사하며 성도는 등애에게 직접적으로 노출된다.[14]

한편 촉한의 조정에서는 등애가 이미 평지로 들어왔다는 소식[15]을 듣고 유선이 신하들을 모아 상의했지만, 누구도 좋은 계책을 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촉은 본래 오와 동맹국이었으므로 오나라로 도주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어떤 사람은 남중(南中, 익주(益州)의 남부 지역)의 일곱 군이 험준하고 두절되어 있어 스스로 방어하기 쉬우므로 남쪽으로 도망 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6]

이때 초주는 직책이 광록훈 아래 자문에만 응하는 광록대부였는데 조정에서 오로지 혼자 항복론을 주장했다. 남쪽으로 가봐야 반란뿐이고 오나라에 의지해봐야 나중에 오나라가 망하면 두 번 항복하는 꼴이 된다며 그냥 요약하면 '걍 깔끔하게 여기서 항복합시다'라고 주장한 것인데 위나라는 항복을 받지 않을 거라는 비난도 초주가 다시 동오가 항복하지 않았으니 촉을 대우해 줄 것이라고 반박해 초주의 이치를 당해낼 자가 없었다.

당시 촉한 조정에는 유심과 같은 극소수의 사례를 제외하면 진지하게 항전하려는 이가 없었다. 그나마 위나라에 항복하자는 이가 없었던 것은 그 동안 했던 짓[17] 때문에라도 항복해도 살려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남중이나 오나라[18]로 피신하자는 의견이 조정에 지배적이었던 것. 상황이 이렇다 돌아가다 보니 촉한의 대신들이 조정에서 남쪽으로 피신할 것을 주장한 건 일리가 있었다. 이때 유선이 항복하자는 초주의 말을 듣고 남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결정짓지 못하며 주저했으나 조정의 어떤 이들은 '폐하께서 위나라 군대가 깊숙이 침입하도록 하기 위해 남쪽으로 갈 계획을 갖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후 초주도 주로 남중으로 피난가려는 걸 반박한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촉한 조정의 의론은 남중으로 가려는 것으로 흐르고 있었던 듯하다. 또 이 기록은 초주의 말을 듣고 주저하고 있다고 해도 유선 역시 처음엔 남쪽으로 들어갈 결정을 지을 생각이 있었다는 말도 된다.

이에 초주는 상소를 올려서 남중으로 가면 이민족을 소모시켜 심하면 반란의 위험이 있다는 주장에 덧붙여 여기에 일찍 항복하면 작위와 토지를 얻을 수 있고 만약 남쪽으로 가서 대세가 다하면 큰 화를 입을 것이며 성인은 운명을 알고 자기 견해를 고집하지 않는다고 유선를 제촉했다. 결국 유선은 등애에게 항복하기로 결정하였고, 유선의 다섯째 아들 북지왕 유심이 이에 반발해 끝까지 항전을 주장하다 자살하였지만 항복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유선은 '장강, 한수로 한정되고 나뉘어서 깊고 멀리 떨어지고, 촉 땅에 의지해 한쪽 구석에 두절되니, 천운을 범하며 점점 여러 해를 지나 마침내 수도와 만리나 떨어지게 되었다. 부덕(否德)하고 암약(暗弱)한 나는 선대의 유업을 탐하여 여러 해 동안 그럭저럭 처신하며 큰 가르침[19]을 따르지 않았다며 왕의 군대가 가는 곳마다 신무하니 어찌 순종하지 않겠느냐면서 즉시 장수들에게 명해 를 내던지고 갑옷을 벗도록 하고, 관부에 저장된 물건은 조금도 훼손하지 않도록 하였다. 백성들은 들에 퍼져있고 여분의 식량과 남은 곡식이 밭이랑에 쌓여 있으니 훗날 은혜를 입어 백성의 목숨이 보전되길 기다리며 하명을 청하며 성심을 고하고 충성과 정성을 공경히 바치니, 존망과 임금의 하사가 모두 그대에게 달려있어 수레에 실어놓은 관를 가까이 두고 더 이상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라고 등애에게 항복편지를 보냈다.[20]

장소, 등량은 낙현(雒縣)에서 등애와 만났다. 등애는 서신을 받아보고 크게 기뻐하며 이내 답장을 썼다. 유선은 또한 태상 장준, 익주별가 여초(汝超)를 보내 절도(節度)를 받게 하고, 태복 장현을 보내 강유에게 (항복) 칙명을 전했다. 등애는 장소, 등량을 먼저 돌려보냈다.

또한 상서랑 이호(李虎)를 보내 사민부(士民簿)를 전하니, 영호(領戶,거느린 민호) 28만, 남녀구(男女口) 94만, 대갑장사(帶甲將士,무장병) 10만 2천, 관원 4만 명, 쌀 40여만 곡(斛), 금은 각 2천 근(斤), 금기채견(錦綺綵絹) 각 20만 필이었으며 나머지 물건들은 이에 상응했다. 그리곤 등애가 (성도) 성 북쪽에 도착하자 스스로 몸을 묶고 관을 등에 맨 모습으로 위군 등애의 진영을 찾아가 항복하였다.

등애는 결박된 것을 풀고 관을 불태우고 유선을 청하여 맞아들여 서로 만났다. 황제의 권한을 편의로 행사하여 유선을 표기장군으로 삼았다. 수비군들은 모두 유선의 칙서를 받은 연후에 항복했다. 등애는 유선을 옛 궁에 머물게 하고 스스로 그곳으로 가서 만났고, 물자는 엄정히 해두고 쓰지 않았다. 진제공찬(晉諸公贊)에 따르면 유선은 노새가 끄는 수레(騾車)를 타고 등애에게 나아가니 망국(亡國)의 예를 갖추지 않았다.

264년, 위군의 내분을 틈타 강유는 유선에게 촉한 재흥의 밀서를 전달했다. 하지만 강유의 반란은 실패하고 강유와 많은 신하들, 그리고 태자 유선을 잃었다. 유선는 살아남은 가족들과 함께 낙양으로 이송되었고, 그를 따르는 신하는 극정 등 몇몇에 불과하였다. 유선의 후궁 이소의가 자결했다.

서진에서 받은 시호는 사공(思公)이지만 기록에 따라서 혜공(惠公)으로 되어있다. 이후 전조의 유연에 의해 다시 효회황제의 시호를 받는다. 오의 말제 등과 함께 낙양 북망산에 묻혔다.


2.5. 낙불사촉 일화[편집]


촉한이 망한 이후 촉한의 유신들과 유선을 모아놓고 사마소가 베푼 잔치에서 사마소가 그를 위해 옛 촉의 가무를 짓게 했다. 주변의 촉한 유신들이 모두 슬퍼했으나 유선은 기뻐하고 웃으며 태연자약했다. 심지어 사마소조차 어이가 없었는지 "저렇게 사람이 무정하니 (촉이) 망했을 것이다, 제갈량이 살아 있었더라도 힘들었을 텐데 하물며 강유는 가능했겠는가?" 라고 가충에게 털어놨을 정도. 다른 날에도 태도가 똑같아서 사마소가 그런 그에게 '옛날 촉의 생활이 그립지 않소이까?'라고 물어보자 그는 웃으며 '이렇게 즐겁게 해주시니 조금도 촉이 생각나지 않습니다.(樂不思蜀)'라고 대답했다 한다.

이에 극정이 보다 못해 유선을 만나길 청해 귀띔하기를 "사마소가 또 한 번 묻는다면 '조상들 묘가 멀리 촉에 있어 마음이 서쪽을 향했고 비감하니 하루라도 생각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시고 눈을 감으십시오."라고 말했다. 사마소가 이를 엿들었는지 (망국의 군주니 어느정도 감시를 붙여뒀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사마소가 극정에게 지시해서 말한 것이었는지 알수 없지만 어쨋든 다시 '촉이 생각나지 않소?'라고 묻자 극정의 말처럼 대답하려했다. 그러나 유선은 현 상황이 그다지 슬프지 않고 눈물을 짜내려고 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아 그 모습을 본 사마소가 "극정이 그리 울라고 시키던가요?"라고 말하자 유선은 놀라서 쳐다보며 "그 말씀대로네요."라고 대답했다 한다. 이윽고 좌중은 웃음 큰 잔치. 그에 유선은 자기도 좌중을 따라 같이 웃었다고 한다. 그 이후 사마소는 유선을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선의 행동이 하도 한심하여 어떤 이들은 이야기의 진실성을 의심하는데, 이 이야기는 습착치가 지은 역사책 한진춘추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배송지정사 삼국지에서 후주전의 주해로 인용해 전해졌다.[21] 그럴만도 한게, 굳이 두 번이나 같은 질문을 던진 사마소도 수상하고, 그걸 극정이 예상하고 답안지를 줬다는 사실도 너무 우연적이다. 위에서처럼 극정이 사실 사마소의 지시로 짜고친 고스톱이었다고 추측해볼 수도 있지만 극정은 처자식을 성도에 버리고 유선을 따라올 정도의 충신이다. 이렇게 보여준 충성심들이 사실 모두 연기였다고 생각하기에도 석연치 않다. 게다가 유선은 항복한 후 평소 극정의 조언을 들으며서 진작에 극정을 발탁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하니 마냥 생각없는 인간이라고 보기도 뭣하다.[22] 사실 중국 역사에는 유선보다 더 한심한 황제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사마소의 손자인 서진 혜제가 그렇다.

이 에피소드를 한쪽은 유선이 아무 생각 없는 최악의 얼간이라고 해석하고 한쪽은 아버지 소열제가 위나라 무제와의 술자리에서 번개를 두려워한 에피소드와 비교하여 처세를 위한 현명한 대답이라는 사람도 있다. 이유는 사마소가 유선에게 재기의 의지가 있는지를 떠보고 만일 그럴 생각을 갖고 있다면 제거하려고 시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 사마소가 황제도 대낮에 시해한 잔인한 인물이었기에 여기서 유선이 재기의 의지를 보였으면 진짜로 죽였을 수도 있다.[23]

처세술이라고 긍정하는 측에선 사마소가 유선에게 재기의 의지가 있는지를 떠보고 만일 그럴 생각을 갖고 있다면 제거하려고 시도한 것일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멸망한 나라의 군주가 살해당하는 경우가 많은건 그가 자신의 나라를 찾기 위해 겉으로는 충성을 해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서 망국이라 할지라도 그 군주라던가 관련된 인물이라면 그 망국 출신 인사들에게 하나의 구심점이 될 수도 있다.[24] 그렇기에 유선의 이런 태도는 '난 다른 뜻이 없으니 굳이 사마소 네가 경계할 이유가 없는 행동만 하겠다'라는 것을 보이기 위한 일종의 처세술로 보기도 한다. 이때 다들 어이없어한 것은 촉한의 구신들마저 지적할 정도로 촉에서의 태도와 끌려온 후의 태도가 달랐기 때문으로도 볼 수도 있다.[25] 실제로 강유 등이 촉한 부흥을 시도한 바 있고 설사 유선이 뭔가를 할 수 없다고 해도 시기 변화나 상황 변화가 이뤄지는데도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고 혹은 반란군들에게 추대될 수도 있었으므로 의심이 가면 가차없이 제거할 생각으로 떠본 것일 수 있다. 어쨌든 유선은 군주였고 서진에서 일하고 있는 촉한의 구신들도 많았다. 당장 사마소의 손자 사마치가 이런 의심을 사서 죽었다. 사마치 입장에서는 딱히 뭔가를 시도한 것도 아니었는데, 옛 신하들이 수모를 못 참고 울었다가 덤으로 독살당했다.

처세술일 뿐이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똑똑한 사람이 처세술 차원에서 바보로 위장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촉한의 황제이던 시절에 신하들 앞에서 같은 처세술을 보여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촉한에서 온 사람들이나 이들과 교류한 많은 사람들이 유선의 실제 모습을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지금까지 남은 몇몇 에피소드만으로 유선을 평가하게 되지만, 당대의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많은 정보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대의 사람들이 바보라고 판단했다면 단순히 에피소드의 재해석만으로 그러한 평가를 뒤집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실 저 위의 에피소드가 사실이라면, 처음 바보 행세는 처세술로 쳐도 극정이 슬퍼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말 한 후의 행동은 신들린 연기력을 타고 나지 않은 이상, 유선이 바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을 에피소드다.

거기다가 사마소가 유선을 죽일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유선을 살해한다면 훗날 오 침공 시, 손호는 어차피 항복해봤자 죽을 거 최후까지 저항할 것인데, 단지 일말의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상당한 군사적 희생을 감수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유선을 살해한다면 또 그건 그것대로 저항의 구심점이 될 수 있다. 만약 사마소가 이렇게 생각했다면 오히려 유선을 살해하기는커녕 보약이라도 보내야 할 판이고, 때문에 단지 유선이 살아남았다고 해서 유선의 처세술이 확실히 있었다는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냥 처세술이 아니더라도 막장이고 처세술이면 더 오히려 까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백 번 양보해 처세술이 사실이었다 한들, 항복을 한 건 백성들을 위해서라고 쳐도 왜 아들인 유심처럼 항복 직후에 자결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즉 왜 그런 모욕까지 듣고도 유심처럼 자결하지 않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구차하게 계속 살아 있었냐는 견해. 실제로 유선의 태도에 어이없어한 건 촉의 구신이나 인사들만이 아니라, 위(사실상 서진)의 인사들조차도 그랬다. 물론 망국의 군주라고 해서 꼭 목숨을 내던지는 것만이 책임지는 자세인 건 아니고 촉이 망한 게 유선의 탓만도 아니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유선이 하는 꼴이 너무 심해서, 옛 군주라고 모시기를 원했던 극정 등 신하들조차 나라를 잃은 군주면 좀 슬퍼하는 척이라도 하라고 대놓고 까고, 적국의 수장인 사마소조차 망국의 군주면 나라가 망한 것에 대해 능력이 안 돼서 항복한 건 이해가 가지만 최소한 죄책감 정도는 가지라고 비난할 정도였다. 항복론을 주장한 초주에 대한 평가긴 하지만 홍대용은 담헌서에서 '임금이 사직(社稷)을 위해 죽는 것은 천지의 대의(大義)가 아니겠는가?'라고 간접적으로 당시 유선의 행동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사실 이게 처세술이건 처세술이 아니건 달라지는 것도 없는 게, 유선이 이렇게 처신해서 재기를 노리거나 한 것도 아니고, 아무튼 유선은 딱히 재기를 노릴 인물이 아니었고, 사마소는 그걸 캐치하고 놀게 냅뒀다는 큰 맥락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나라는 망했고 에라 모르겠다 나는 인제 손 떼겠소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 주면 대충 만족하겠소'가 유선의 스탠스인 건 이후 행보로 볼때 명백하다. 따라서 유선이 이걸 적극적으로 어필했는지, 그냥 모르고 한 거였는지, 심지어 유선이 촉의 멸망을 슬퍼하긴 했는지 등의 여부는 크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의도가 있었다면 순수함 100%의 백치가 아니라 소시민적인 감성을 가진 평범한 사람으로 유선의 능지에 대한 평가가 조금 올라갈 뿐이고, 백치나 소시민이나 사마소가 보기에 안전한 수준이었던 건 마찬가지니까. 유선이 아예 바보는 아니었다는 여러 정황증거를 보면 소시민 설 쪽에 무게가 실리는 편이고, 즉 낙불사촉 드립은 본인의 안위와 부귀영화만을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이 행동으로 인해 망국 촉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역사가들이 이를 부끄러운 행위라고 기록했는데, 이렇게 될 것을 알고도 자기 잘 먹고 잘 살겠다고 이 길을 선택했다면 이기적인 졸장부이다.

어쨌건, 위진남북조 시대의 군주, 그것도 망국의 군주 치고는 그 일생이 놀라울 정도로 안락했기에 정말 보신의 처세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 적어도 황실과 자신의 권위를 살리는 능력은 있지 않았느냐는 평가도 있다. 이에 대해선 제갈첨 문서의 각주에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해도 좋을 듯하다. 어쨌건 이게 처세술이건 아니건 사마소는 촉정을 시작할 때부터 유선을 우매하다 평가했고 이런 꼴까지 봤으니 유선을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에 놔둔 것 같다. 의도했든 아니든 유선은 이 사건으로 자신의 안위만 지켜진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할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어필했고, 사마소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3. 후일담[편집]


이후 유선의 후손들은 안락공의 작위를 이어 적당히 살다가, 오호십육국시대흉노유요왕미가 하북 지방을 유린할 때 몰살당하거나 흩어져 버렸다. 이때 헌제의 후손도 대부분 몰살당했다. 또 채모의 후손도 유연의 부하 왕여 일행에게 모두 몰살당했다.

다만 친족 중 한 명인 유현이 촉 땅으로 도망쳐서 당시 촉 땅을 지배하고 있던 저족의 성한으로 망명했다. 유현은 유선의 동생이었던 유영의 손자다. 그는 거기서 촉 지방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환대를 받았고 동진의 역사가 손성과 만났다고 한다. 현재 소열제의 후손은 모두 유현의 후손이라고 한다.

제갈량의 후손들이 모계쪽으로는 유선의 후손에 속하는데 이유는 제갈량의 후손들 전부 제갈량의 외동아들인 제갈첨과 유선의 딸사이에서 테어난 아들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4. 평가[편집]



5. 가족 관계[편집]



6. 기타[편집]


유선빠와는 별 상관없지만 유선도 모에선의 수혜를 피할 수는 없어서 (주로 여성향 쪽에서) '너무 위대한 아버지 때문에 비뚤어져버린 시니컬 미청년'이라든가 '천연 미소년'으로 미화되기도 한다. 때론 천하의 주인이 누가 되던, 백성들의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을 그만두는게 최선으로 생각하기에 본인이 일부러 바보짓을 한다는 속뜻을 지닌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부분을 실제로 실현시킨 내용으로 나온 게 진삼국무쌍 시리즈유선.

장비의 딸들을 연이어 황후로 맞이했다. 유선의 첫 번째 부인이 장비의 딸 중 언니인 경애황후, 두 번째 부인이 동생인 장황후다. 경애황후가 죽자 이듬해 동생을 황후로 맞이하였다. 경애황후가 죽은 해와 장황후가 귀인으로 입궁한 연도는 건흥 15년(237년)으로 같으며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불확실하다.

상당히 오래 재위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대부분 재상들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의례적인 일만 맡았기 때문에 유선의 재위 기간에 대해서는 후반부의 병크를 제외하면 별다른 설명 없이 넘어가는 경우가 매우 많다.

사마소와의 연회는 이문열이 본인의 소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 옹호하기도 했다. 유선을 옹호하다가 너무 극심해진 것인지 김운회 교수 등 유선빠(!)가 간혹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람은 혼돈의 시대에서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아간 진정한 행운아였다. 본인이 기억할 수 있는 한도에서는 고생을 해보지 않았으며, 생명의 위협도 어렸을때 빼면 없었다. 수없이 많은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서로 치고박고 싸우며 대치하는 100년 안되는 삼국지의 시간 동안 이처럼 고생 안해보고 평생동안 잘 먹고 잘 살며, 적어도 허울만이라도 좋은 대접을 받은 사람은 삼국지 시대를 통틀어서 얼마 없다.

놀라운 것은 조선 정조도 사마소와의 연회 부분에 대해 평가를 내리면서 유선에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유선이 정말로 사마소를 속이기 위해 연기한 것인지 아닌지는 이미 몇 백년 전부터 꽤나 평가가 분분한 부분이었던거 같다.

후주(後主)가 촉(蜀)을 생각한다고 대답한 것은 천고의 비웃음거리가 될 만하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을 자세히 음미하면 혹 자신을 보전하려는 계책에서 일부러 이러한 말을 하여 속마음을 감추려고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대저 그 사람은 참으로 말할 것이 없고 평소 그의 사적(事蹟)을 살펴보더라도 진 혜제(晉惠帝)에 비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비록 극정(郤正)이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찌 촉을 그리워하는 한 생각이 없겠는가. 이는 참으로 말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단지 저들의 의심만 야기시킬 뿐이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극정이 말한 것에 대해서도 가부를 살피지 못했어야 하는데, 오히려 어떻게 극정을 너무 늦게 알았다고 한스러워할 수가 있겠는가.


유학 이지연(李志淵)이 대답하였다.

후주는 제 환공(齊桓公)과 같은 자품을 지녔음은 물론 그보다 더 뛰어난 점이 있습니다. 온 나라를 들어 공명(孔明)에게 맡긴 것은 제 환공이 관중(管仲)에게 위임한 것에 부끄러울 것이 없고, 장완(蔣琬), 비위(費褘), 동윤(董允) 등 제현(諸賢)을 들어 쓰는 것을 잊지 않은 것은 제 환공이 역아(易牙)를 써서 국난을 야기한 것보다 한 단계 높으니, 참으로 용렬하고 아둔한 자가 이와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촉을 생각한다고 대답한 것은 그가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님을 참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이 전연 없다는 것을 보여 저들로 하여금 의심하지 않도록 하고 다시 자신의 진심을 토로하는 듯이 ‘삼가 분부대로 하겠다’고 하여 매우 어리석은 행동으로 자신의 진심을 숨겼으니, 이것은 자못 선주(先主)가 젓가락을 떨어뜨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출처


원본은 홍재전서 위 원제편이다.

제환공의 경우 자신의 아들은 신의있는 인물에게 부탁했기 때문에 나라를 보존하고 아들에게 공위를 물려줄 수 있었지만, 관중이 자신의 후임자를 지정하지 않은 상태로 죽었고 이후 관중이 쓰지 말라고 한 신하들을 중용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반면 유선은 비록 나라는 망하고 아들들이 자살하거나 살해당하는 불상사를 맞이했지만 현명한 재상이 살아있을 적에는 그에게 국사를 일임하고 그가 정해준 후임을 중용했으며 나라가 망한 뒤에도 처신을 잘 함으로써 망국의 군주치고는 평안한 삶을 살다 갈 수 있었다. 물론 누가 더 낫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참으로 대조되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속담 중에서 '일으켜 세우지 못할 아두'라는 말이 있다. 다 된 밥상에 숟가락도 얹지 못하는 구제불능자를 빗대는 것으로, 유선에 대한 후대 사람들의 시선이 잘 나타난 속담. 그 때문인지 제갈량을 모신 무후사에 유선의 목상을 가져다 놓은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보이는 족족 부숴 버려서 결국엔 치워버렸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쩍새의 수많은 이름[26]들 가운데 하나인 귀촉도(歸蜀途)는 유선의 이야기가 아니다. 놀고 먹다가 신하에게 배신당해 죽은 촉의 망제 두우라는 황제를 다룬 이야기다. 촉하면 촉한의 이미지가 커서 유선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촉은 삼성퇴 유적으로 유명한, 엄연히 고대에 존재하던 국가 이름이다.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촉왕본기'는 유선은 태어나지도 않은 전한 시대의 책이다.

고우영 화백은 만화 삼국지에서 조운이 유선을 구해올 때 소열제가 신하를 잃느니 아들이 죽는게 낫다며 아기인 유선을 내던질때 그 충격으로 바보가 되어버렸다는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

도홍경(452년 ~ 536년)의 책 '고금도검록'에 따르면 유선은 대단한 명검을 만들어 소유했다고 한다. 물론 후세까지 전해지지는 않았다.

후주 유선은, 연희 2년, 한 자루의 큰 검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1장 2척이었다. 칼날이 산을 진정시켰고, 왕왕 사람이 볼 때 빛을 뿜었는데, 후세 사람이 이를 구하려 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다.


유비가 불혹을 훌쩍 넘긴 나이에 태어난 아들이라서 조조의 아들들이나 손견의 아들들과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이다. 특히 손견의 장남 손책과도 30살 차이가 넘어서 아버지와 아들뻘이며[27] 손권에게도 아들뻘이다.[28] 조조의 아들 조비와는 딱 20살 차이인데다가 손자 조예보다도 2살 연하다. 조창이나 조식과도 당연히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편이다.


7. 미디어 믹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유선(삼국지)/기타 창작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둘러보기[편집]


유선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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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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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서(蜀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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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4월 24일.[2] 멸망 날짜는 음력 기준으로 양력으로 환산하면 263년 12월 18일~264년 1월 16일 사이이다.[3] 이는 정사 삼국지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저자 진수(陳壽)를 정통으로 썼기에, 촉한의 군주들에게는 제(帝)자를 붙이지 않았고, 대신 유비는 선주(先主) 그리고 유선은 후주(後主)라고 지칭했다. 참고로 손권의 경우는 오주(吳主).[4] 사식의 <황제들의 중국사>에서는 아승(阿升)이 진짜 아명이라고 한다. 두와 승자가 비슷하여 후대에 잘못 표기했다고 주장한다. <위략>에서 조예의 포고 기록에서 유승지라는 언급이 나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한다. [5] 예를 들어 你真是个扶不起的阿斗(넌 정말 아무리 도와줘도 안 되는 아두 같은 놈이다.)[6] 흙을 쌓아 올려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봉(封), 땅을 깨끗이 하고 산천에 지내는 제사를 선(禪)이라 하는데 중국의 역대 제왕이 정치상의 성공을 천지에 보고하기 위해서 태산에서 행한 국가적 제전이다. 이 봉과 선은 원래 별개의 유래를 가지는 제사였다가 양자를 합쳐 봉선이라는 이름으로 같이 지냈다.[7]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직후 유비가 '하마터면 훌륭한 장수를 죽일 뻔 하였구나'하며 유선을 바닥에 내던지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이때 머리를 다쳐서 유선이 나중에 장성한 후 조금 모자란 모습이 되었다는 개드립이 있지만 아두 -> 아둔 내던져진 장면은 연의의 창작이라서 정사와는 관련 없다. 그런데 연의 기준으로는 조운이 아두를 구했다고도 할 수 있지만, 반대로 아두 역시 조운을 구했다고 할 수 있다. 조운이 장합과 싸우다가 실수로 말이 구덩이에 빠지는데, 갑자기 구덩이에서 붉은 빛이 비추면서 조운의 말이 뛰쳐나왔다는 내용이 있다. 유선이 42년동안 천자가 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힘이 간섭해서 유선을 구하면서 겸사겸사 조운도 곁다리로 구출된 것.[8] 위략에 따르면 어리고 정치적 경험이 없었던 유선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제갈량에게 정무를 맡기고, 자신은 주로 황실의 제사 등 국가 의례 업무를 맡겠다고 했는데 이 기록은 애시당초 유선이 노예가 되어 팔려갔다는 위략의 이른바 '유선 벤허설'에 등장하는 얘기라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있다. 다만 배송지가 비판한 것은 유선 벤허설뿐이고 이 일화 자체는 비판하지 않았으니 사실이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 아무튼 제갈량 시절 유선이 의례와 필수적인 결재(決裁)만을 담당했다고도 볼 수 있는 일화다.[9] 훗날 경애황후라는 시호를 받는 장비의 딸.[10] 229년 오나라의 대제가 즉위하자 촉에서는 이를 승인하고 진진을 사신으로 보내고, 이때 촉, 오가 서로 천하를 나누기로 맹약하는데, 서주, 예주, 유주, 청주는 오(吳)가 차지하고, 병주, 양주(凉州), 기주, 연주는 촉이 차지하되 사례주는 함곡관을 기준으로 양분하기로 약속한다. (삼국지 오주전, 진진전) 유영, 유리의 기존 봉지인 노(魯)와 양(梁)은 예주 소속으로 이 맹약에 의하면 오나라의 영역이므로, 이 때문에 봉지를 감릉, 안평(기주 소속)으로 옮겼다는 뜻.[11] 이전 장황후의 여동생[12] 사실 유선이 멍청해서 무작정 황호를 총애하고 유영을 쳐낸 것이 아니고, 이 당시 황권을 강화시키려면 외척을 등용하거나 환관을 밀어주는 것 두 가지 밖에 없었다. 일반 관료들은 사대부 출신이고 집안의 후광을 업고 있으니 밀어줬다간 황제는 뒷방으로 밀려나는 결말이 기다릴 뿐이지만, 외척이나 환관은 황제가 권력투쟁에서 패배하면 함께 목이 날아가는 운명 공동체다. 게다가 황족은 잘못 키웠다간 뒷방으로 밀려나는 수준도 아니고 찬탈당한 뒤 소리소문 없이 처리당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제갈량이 집권하던 시기 유선은 바지사장이었고, 제갈량 사후에 권력을 되찾을 의도로 황호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것 뿐이다. 또 다른 예는 당고의 금이 있다.[13] 점괘는 주로 군주들이 자신에게 적당한 논리가 없으나 신하의 반박을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해야 할 때 핑계로 쓰였다.[14] 제갈첨의 관직이 어림군을 총괄하는 위장군이었고, 촉한군의 대부분은 강유가 통솔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성도에는 말그대로 최소한의 수비대만 남아있었을 것이다. 이 때 등애가 공격해온다면...[15]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정사 삼국지 초주전에서 등애가 음평(陰平)에 들어올 때부터 백성들이 동요한 것은 후대에 잘못 쓰여진 것으로 음평에서 '음(陰)'자를 빼서 등애군이 '평지(平)'에 들어오자 백성들이 동요한 것이라 적어야 한다.[16] 그러나 남중은 반란을 일으켰다 진압당한 지 30년이 조금 넘은데다 제갈량이 북벌을 위해 지속적으로 물자를 징발하는 등 촉한 조정에 반감이 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남중으로 피신하든 말든 등애 앞에 끌려오긴 마찬가지다. 원 역사대로 사지 멀쩡하게 등애 앞에 꿇어앉을 지, 머리만 등애 발밑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지 차이일 뿐...[17] 한중 공방전, 제갈량의 북벌, 강유[18] 말이 좋아서 피신이지 사실상 항복하자는 거다...[19] 유선이 쓴 항복문서에 따르면 황초(220~226) 연간에 조비가 선우보에 명해 조서를 전해 3가지 좋은 은덕을 배풀었고 대의가 분명했다 한다.[20] 이 편지를 집필한 사람이 바로 극정이다.[21] 그리고 이문열 평역 삼국지는 '이 일은 실제 역사에선 없었던 일이다.'라고 적었다.[22] 극정을 아쉬워했던 유선의 이 모습이 처세술과도 연관될 수 있다. 하지만 유선의 일상적인 모습이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는 건, 사마소가 유선의 주위를 장악했다는 뜻이다. 처세술의 달인이었다면 이미 주위가 장악당해 있는 상황에서 극정에 대해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불리하다. 또 평소에 만만찮거나 수상쩍은 모습을 보여주다 갑자기 바보 연기를 한다면 오히려 더 수상할 것이다.[23] 유선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인 최훈도 삼국전투기 낙불사촉 일화에 '촉이 그립지 않냐'라는 사마소의 표정과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유선의 표정을 음영을 넣어서 그렸다. 다른 의도가 존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셈이다.[24] 대표적인 게 초한쟁패기에서 항량항우와 함께 거병할 때에 범증의 제안에 따라 자기 자신을 지도자로 내세우지 않고, 시골에 숨어지내던 초나라 왕족의 후손인 웅심(초 회왕)을 전면에 내세운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실질적으로 가장 권력이 강한 사람은 항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구심점'으로 초나라 왕족의 후손을 내세웠기 때문에 과거 초나라의 사람들이나 인재들을 불러모을 수 있었다. 이는 삼국시대에도 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형주를 정복한 위 무제가 오 대제에게 항복을 권유할 때 노숙이 손권이 항복하지 않기를 권유했던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손권 자체가 특별히 모난 군주가 아니었기 때문에 항복을 해도 충분히 오나라의 신하들이나 잔존 세력들에게 있어서는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조조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25] 고도의 처세술이라면 이 에피소드에서 극정의 역할이 은근히 의미심장한데 극정은 유선이 낙양으로 끌려갈 때 '이런 신하를 진작에 못 알아봤다.'고 탄식한 신하였다. 이 점은 하술하겠지만 후일 조선 정조도 지적한 얘기다.[26] 소쩍새는 전설이나 설화의 소재가 된 덕분에 이명이 많기로 유명하다. 이조년의 다정가에 등장하는 자규(子規), 여인에 빠져서 나라를 잃은 황제에 관련된 망제혼(望帝魂) 혹은 두우(杜宇), 불여귀(不如歸)또는 두견새. 솥이 적다라고 가난과 관련된 소쩍새, 의붓 어머니와 관련하여 동생을 걱정하는 접동새가 죄다 한가지 새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이 소설 또는 시의 소재가 되었다.[27] 참고로 유선이 태어날 무렵에 손책은 이미 고인이 된지 오래였다.[28] 손권의 동생이 잠시 유비의 부인이기도 했으니 따지고 보면 외숙부라고 부를 수도 있다. 물론 자기를 납치한 여자를 계모로 여겼을지는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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