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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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렬
劉升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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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91년 3월 9일
충청도 공주목
(現 충청남도 공주시)
사망
1958년 5월 18일 (향년 67세)
서울특별시
본관
강릉 유씨
배우자
경주 정씨
자녀
3남 1녀(차남 유재흥)
학력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수료)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 (졸업)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 26기)
임관
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육군사관학교 (특임 8기)
복무
일본 제국 육군
1914년 ~ 1945년
대한민국 육군
1948년 ~ 1956년
최종 계급
대좌 (일본제국 육군)
소장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호국군 제102보병여단장
제2보병사단장
제1보병사단장
제3보병사단장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부산지구 계엄사령관
대한민국 육군민사감
병과
보병
참전
만주사변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
6.25 전쟁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일본 제국 육군 대좌, 대한민국 육군 소장을 지낸 군인으로 국방부 장관을 지낸 유재흥의 부친이자 일본육군사관학교 선배이다.

광복 당시 중장 계급으로 있었던 홍사익, 영친왕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동기생인 이응준, 안병범(安秉範)[1] 김석원과 함께 현역 조선인 일본군중 최고 계급인 대좌로 복무 중이었기에, 일본육군 대위였던 아들 유재흥과 함께 친일반민족행위자 리스트에 등재되었다.

2. 생애[편집]


1891년 3월 9일 조선 충청도 공주목에서 유병각(劉秉珏)의 4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8년 대한제국군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으나 1909년 7월 대한제국 군대 해산과 함께 폐교된 육군무관학교의 생도들을 일본에 위탁 교육 보내기로 함에 따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유승렬은 1909년 9월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0년 9월 본과로 진학하여 1912년 5월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고, 사관후보생으로서 6개월간 병사로 복무하였다. 1912년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1914년 5월 제26기로 졸업한 후, 동기 신태영과 함께 나고야시 소재 제3사단 보병제6연대에 견습사관으로 배속되었고 12월 육군 소위가 되었다. 1915년 11월 다이쇼 천황 즉위 기념 대례장을 받았다. 대위로 진급한 후 1926년 조선군(일본제국) 제19사단 제76연대로 전속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함경북도 경원, 나남 등지에서 근무했다.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이 최고 요직 중 하나인 육군성 군무국 군사과장을 지내다가 좌천되어 보병제6연대장(1913-1916)으로 있을 당시에 유승렬은 그 휘하의 장교로 있었다. 이후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우가키 대장이 초도 지방순시 중 공주의 충남도청에 들렀을 때, 충청남도지사에게 "내가 나고야의 제6연대장으로 있을 때 데리고 있던 부하 중 이곳 公州 출신의 유승렬이란 장교가 있었는데-"라고 말해 도지사가 유승렬의 부친인 유병각을 우가키 총독에게 소개시키게 되었고, 우가키 총독은 유병각에게 "곤란한 일이 있을 때는 나를 찾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갔다고 한다. 이후 노쇠한 유병각은 총독부를 찾아가 자신의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들 유승렬이 계속 최전방 함경도 부대에 근무하고 있어서 얼굴도 보기 힘들다고 얘기했고, 그러자 우가키 총독은 각 연대에 조선인 장교는 1명씩만 배치한다는 인사 원칙을 깨고, 이응준이 근무하고 있던 용산 주둔 보병79연대로 유승렬을 전보시켜주었다고 한다.

1931년 7월 만보산 사건과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인심이 흉흉한 만주의 조선인 보호 임무를 맡아 관동군에 파견되어 2년간 길림경비사령부에서 근무했다. 아들 유재흥의 회고록에 따르면 어려서부터 한학 교육을 받았고, 육군무관학교 입학 전 중국어를 배워[2] 능통했던 관계로 만주에 파견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1932년 8월 소좌로 진급했다.

1934년 조선군으로 복귀하며 평양의 보병77연대에 전속되었다. 77연대에서는 신의주중학교, 신의주동중학교, 신의주상업학교, 의주농업학교, 정주 오산중학교 등 중등학교 배속장교로 근무했다. 대전 말기에 육군 대좌로 진급하여 평양의 보병77연대 유수부대장을 맡았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제20사단이 남방총군 예하 제18군(군사령관 아다치 하타조 중장)에 배속되어 파푸아뉴기니 전선으로 출정했을 때 20사단 위생연대장으로 부상병 후송을 지휘했으며 이 때 본인도 병에 걸려 우량강 병원으로 후송되어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일본 패전 직전인 1945년 8월 6일 아내 경주정씨가 병사했으며, 유승렬은 늦가을에 조선으로 귀향하여 인천에 살던 동생(유항렬) 집에서 반 년 가량 요양 후 서울로 올라왔다.

1년 후배인 김석원 등과 함께 1948년 12월 25일부로 군 경력자 특별 임용되어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임관한 뒤, 지역 연고(충청도)를 감안하여 대전호국군 제102여단장으로 보임되었다. 1949년 5월 12일 각 여단이 사단으로 승격하고, 5월 19일 최초의 사단장 인사 명령[3] 당시에 충청도를 위수 지역으로 하는 제2보병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명태 사건으로 채병덕 총참모장과 김석원 1사단장이 1949년 10월 1일부로 보직 해임 및 예편되고, 유승렬은 김석원의 후임으로서 제1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으며, 동기 신태영채병덕의 후임으로 육군총참모장에 보임되었다. 유승렬 사단장은 기존에 과도하게 공격적으로 배치되어있던 1사단을 북한군의 전면 남침에 대비해 예비대를 확보한 방어적 형태로 수정하였고, 1950년 4월까지 1사단장을 지내며 전면전시 발생시 임진강선으로 후퇴하여 자연 지물을 방패막으로 삼아 지연전을 펼친다는 파주-문산 축선의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훈련시켰다.[4]

6.25 전쟁을 앞둔 1950년 4~6월에 단행된 전방 지휘관 세대 교체[5] 인사의 첫 번째 주자로 1950년 4월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30세의 백선엽에게 1사단장을 넘겨주고 후방의 제3보병사단장으로 전임하였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3사단 역시 서울 방어에 축차 투입되면서 병력이 녹아버렸고, 이후 이준식을 거쳐 김석원에게 지휘권이 넘어갔다.

유승렬은 1950년 8월 1일 경남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동월 14일 경남계엄사가 부산계엄사와 마산계엄사(사령관 이응준)로 분할될 때 부산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유임되었으며, 8월 28일 김종원에게 이임하였다. 1951년 3월 준장, 1953년 5월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육군본부에서 학도사열관을 지냈다. 1955년 육군본부 민사감을 최종 보직으로 1956년 6월 14일 신태영(중장), 김석원(임시소장) 등과 함께 예편했다. 1958년 5월 18일 서울 신당동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부인 경주 정씨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으며, 차남이 유재흥 전 국방부 장관이다.

3. 여담[편집]


그와 동기로 제4대 국방부장관 신태영, 체신부장관 이응준이 있다.

대한민국 육군 복무 시절 먼저 임관하여 계급이 더 높았던 아들 유재흥을 만날 때면 꼬박꼬박 경례를 붙여서 주위의 이야기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유재흥의 회고록에 따르면 다행히(?) 아들에게 말은 편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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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異名 안종인. 일본육사 26기로 졸업 후 일본 육군에서 복무하며 영친왕시종무관을 지낸 바 있다. 이응준, 유승렬, 김석원 등과 함께 일본 육군 대좌로 해방을 맞았으며, 1948년말 육사 특임8기로 일주일간 교육받고 대한민국 육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호국군 제103여단(부산) 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수도방위대 고문 등을 지내다 6.25 전쟁 당시 서울이 함락당하자 인왕산에서 자결하였다. 사후 준장으로 추서되었고, 1955년 현충원안병범장군순의비가 세워졌다.[2] 한성외국어학교(한성한어학교?)[3] 수도사단 이응준(수도여단장), 1사단 김석원(1여단장), 제2보병사단 유승렬(호국군 102여단장), 제3보병사단 최덕신(3여단장), 제5보병사단 송호성(호국군총사령관), 제6보병사단 유재흥(육군사관학교 부교장) 등.[4] 백선엽은 유승렬이 짜놓은 방어 계획을 바탕으로 시행하게 된다.[5] 이응준, 김석원일본육군사관학교 26~27기 출신들은 당시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