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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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철
柳永哲


파일:유영철2.jpg

출생
1970년 4월 18일 (54세)
전라북도 고창군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범죄유형
연쇄살인, 사체 훼손(식인), 방화[1], 성폭행[2], 주거침입 절도[3], 공무원자격사칭[4], 공문서 위조, 동물학대[5]
범행기간
1988년 8월 23일[6] ~ 2004년 7월 15일
인명피해
20명 살해
체격
169cm, O형[7]
가족
3남 1녀 중 3남, 슬하 1남
최종 형량
사형(형집행 무기한대기)
수감처
대구교도소

1. 개요
2. 생애
3. 범죄
3.1. 범행 일지
3.2. 체포
3.3. 사이코패스 여부
4. 근황
5. 여담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범죄자.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20여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8] 연쇄살인 이전에도 절도, 강간, 폭력 등 수많은 범죄를 저질러 검거 당시 전과 14범이었다.

유영철의 엽기적인 범죄 행각으로 인해 사이코패스의 개념이 대중에게 알려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영철이 체포되기 30여년 전, 김대두의 경우 범죄자의 정신적인 측면을 연구함으로써 이후의 사건들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단 지적이 일부 있었지만 사형이 집행됨으로써 이뤄지지 못했다.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3차례 (304회, 499회, 1038회) 유영철에 대해 다룬 바 있다.


2019년 10월 27일, <그것이 알고싶다> 1188회에서 최근 유영철의 얼굴이 공개되었다. "나 사이코인 것 몰라?", "(교도관에게)너 하나 죽여도 난 어차피 (이미) 사형이야." 같은 말을 하며 물을 끓여 오라고 하거나 교도관을 폭행하고 교도관 앞에서 자해하는 등 교도소에서도 교도관들을 상대로 가학적인 행위를 일삼고 있다고 한다.


2. 생애[편집]


파일:유영철 중학교 졸업 사진.jpg
중학교 졸업사진

1970년 4월 18일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9] 형제로는 2명과 여동생이 있는데, 여동생은 유영철 본인과는 이란성 쌍둥이라고 한다. 함께 태어난 여동생은 1년 후 출생신고되었다. 아버지는 본처를 버리고 세컨드를 둔 상태였는데, 유영철의 어머니는 생활고에 갓 태어난 유영철을 죽일 생각까지 했다.

유영철의 가정은 찢어지게 가난했으며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한 아버지폭력외도가 심했다고 한다. 유영철은 5세가 되던 해부터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계모 슬하에서 형제들과 자랐다. 유영철의 아버지와 계모는 밤만 되면 유영철에게 폭력을 행사했다.[10] 그 뒤 거주지를 옮겨 어머니와 같이 살게 돼 초등학교에 다시 입학하게 된다. 결국 초등학교를 2번 입학한 셈이 되며, 만 7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일대에서 보냈다. 중학교 1학년 무렵, 유영철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유영철과 형제들은 생모와 합쳤다. 유영철의 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로 살림을 꾸렸다. 유영철은 계모 밑에 살던 시절보다 행색이 훨씬 나아 보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유영철은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생활기록부에는 말이 없고 '애어른' 같았다는 말이 남겨져 있다. 그림과 운동에 소질을 보이던 아이였으나, 나중에 펼쳐질 삶을 예고하듯 유난히 개구리를 잡아 목을 비틀고 해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동물에 관심이 많던 유영철은 친구들한테 의사가 되겠다고 자랑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친엄마와 가정을 꾸려 전보다 밝아진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싸움을 잘 하던 유영철은 주변 고등학교의 폭력조직과 싸움을 벌이고, 선도부 반장을 맡아 담배를 피우는 학생을 보면 선배라도 무릎을 꿇게 했다. 교사 대신 교사한테 혼나고 있던 학생을 폭행하는 등, 유영철의 폭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세운상가에서 불법 LP판을 훔치고 나서는 친구들한테는 '어차피 불법이니 절도가 아니다'는 말을 남겼다.

그 뒤 화가를 꿈꾸던 유영철은 예술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하자 좌절하였고[11] 그 뒤로는 국제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지만 2학년 때인 1988년 8월 23일 절도로 구속되어 소년원에 들어간 뒤 결국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1991년, 수차례 절도죄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잡범이 된 유영철은 1993년 황씨라는 여자와 결혼했으나, 결혼 몇달 만에 또 절도죄로 교도소에 들어갔다.

출소한 유영철은 1994년 10월 아들(현재 29세)을 득남한 이후 아침에는 웨딩숍 사진관에서 일하고 밤에는 불법퇴폐 업주들을 상대로 경찰관사칭하면서 금품갈취를 하였다. 1994년 11월 그의 둘째 형이 한강에서 투신자살을 하였다고 기자에게 이야기한 바 있다.[12] 그러다가 1998년 공무원 사칭, 2000년 미성년자 강간 등으로 교도소에서 장기간 복역하게 되면서 2000년 12월 이혼을 당하게 된다.

유영철의 인생


2000년 미성년자 성폭행으로 구속되어 현장검증을 하던 모습

사회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 유영철은 아내와 아들을 살해하려다 마음을 바꿔 무차별 연쇄살인을 하기로 마음먹고, 복역 도중 정두영에 대해 자세히 다룬 월간조선 연재기사를 보고 범행수법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3. 범죄[편집]



3.1. 범행 일지[편집]


2003년 9월 11일 전주교도소를 출소한 유영철은 13일 후 서울특별시 강남구 신사동에서 숙명여자대학교 이모 교수와 부인을 살해했다.[13]

이 사건 이후 2004년 7월까지 서울 각지에서 주로 부유층 노인 또는 출장 마사지사 여성 등 총 16건의 범행으로 20명을 살해한 혐의를 받았다. 살인 수법도 매우 악질적으로 진화해, 피해자를 굉장히 잔혹한 방식으로 살해하였다.

살인 행각에 빠지기 이전에는 각종 절도나 금품 갈취를 했었는데, 그 중 한 사건은 위조한 경찰수첩으로 경찰을 사칭해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업종(위에 말한 출장 마사지라든가)의 사람들로부터 금전을 뜯기도 했다. 살인을 시작한 후 단순 절도로 경찰에 체포된 적이 있었는데, 주머니에 가지고 있던 위조 경찰수첩이 들통나면 조사가 철저해져 연쇄살인범이라는 게 들통나 사형당할 거라 생각, 경찰서 2층에서 뛰어내려 도주를 시도하는 등 별 기행을 했다고.

살인을 본격적으로 저지르기 전에 이러한 각종 절도 전과로 구속된 적이 있었는데, 본인은 한 목사와의 인연으로 십자가를 지니고 있는 등 종교에 귀의하려 했으나 결국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러자 선처를 바랐는데 그게 안 되니, '신도 있는 놈의 편'이라고 생각해 반종교적으로 돌변했다.[14][15] 이는 연쇄살인의 전반부인 일련의 부유층 살해사건에서 상당수의 피해자 거주지가 교회 인근에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그의 범행 일지. 참고자료
  • 2003년 9월 24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이모 씨(72세)와 부인 이모 씨(67세)를 둔기로 살해. 살인 후 유영철은 지문이나 발자국이 묻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을 치밀하게 닦은 다음, 현관문 잠금 장치를 한 뒤 대문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잭나이프를 두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시 담을 넘어 들어간 뒤 잠긴 현관문을 발로 차서 문고리를 부수고 잭나이프를 찾아 나왔다.

  • 2003년 10월 9일, 종로구 구기동에서 주차 관리원 고모 씨(61세)의 집에 침입해 고 씨의 아내(60세), 어머니 강모 씨(85세)와 고 씨의 아들(35세, 지체장애)을 둔기로 34회를 강타해 살해했다. 특히나 고 씨의 아들이 2층에서 내려오자, 그의 목에 잭나이프를 들이대고 2층 복도로 끌고 올라와 해머로 머리를 내리쳐 쓰러뜨린 후 두개골이 부서져 뇌가 빠져 나올 정도로 머리를 수 차례 내리치는 잔인성을 보였다.

  • 2003년 10월 16일 강남구 삼성동 2층 단독주택에 침입해 최모 씨(70세)의 부인 유모 씨(69세)를 둔기로 살해. 부부의 아들이 집에 들어왔을 때 유 씨가 자신의 단독주택 화장실 바닥에서 피를 잔뜩 흘린 채 의식을 잃어가며 신음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였다.[16] 현장감식 결과, 같은 발자국이 안방과 거실, 화장실에서도 발견되었고, 구기동 사건 족적과 비교해보니, 일치했다. 이 때부터 언론은 연쇄살인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기 시작했고, "경찰이 범인의 윤곽조차 잡지 못한 채 엉뚱하게 피해자 가족과 주변 인물들을 수사 대상으로 삼아 괴롭힌다"고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했다.[17] 경찰은 피해자가 노인이라는 점, 묵직한 둔기, 잔인한 범행수법 등을 통해 동일범 소행이라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신사동 사건의 경우, 피해자들의 머리에 난 상처 깊이가 4~5㎝ 쯤이고 폭이 넓다는 점, 피해자 중 1명인 이모 씨(67세)의 목에는 깊이 2.5㎝의 자상도 있는 것과는 달리, 삼성동 사건 피해자의 상처는 길이 3㎝ 안팎의 1자형이고, 다소 가볍고 긴 형태의 둔기에 맞은 것으로 보고, 살인도구가 다르다는 점을 들어 동일범이 아니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 2003년 11월 18일 종로구 혜화동의 2층 단독주택에 침입해 집주인 김모 씨(87세, 남)와 파출부 배모 씨(53세, 여)를 둔기로 살해. 증거 인멸을 위해 금고에 불을 지름. 현장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증손자가 이불에 둘러싸여 질식 직전까지 갔으나,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피해자 집주변을 수색하던 경찰은 인근 건물 입구에 CCTV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녹화된 테이프를 제출받아 분석했고, 자신의 상의에 피가 튀어 이를 감추기 위해 피해자 집 옷장에 걸려 있던 점퍼를 입은 채 걸어 내려가는 범인의 뒷모습이 찍힌 화면을 찾아낼 수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영상분석실에서 분석한 결과, 범인의 키가 168cm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경찰은 CCTV 화면에 찍힌 뒷모습과 168cm의 키, 20~30대 후반의 남자, 그리고 족적 검색을 바탕으로 금강제화 버팔로 캐주얼화를 신고 다니는 사람을 찾는다는 수배 전단을 전국에 배포했다.

  • 2004년 4월 14일 서울 중구 황학동의 도깨비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던 안모 씨(44세, 남)를 안 씨의 베스타 승합차로 유인해 살해. 유영철은 2004년 4월 13일 밤, 동대문구 황학동 삼영빌딩 1층 백성프라자약국 앞에서 비아그라와 음란 CD를 판매하는 피해자의 동태를 살피다가 영업을 끝내고 남은 물건들을 들고 자신의 베스타 승합차 쪽으로 가는 피해자에게 다가갔다. 위조한 서울지방경찰청장 명의의 경찰관 신분증을 제시하면서 “음비법위반, 약사법위반으로 적발하겠다.”라고 하면서 피해자의 두 손목에 수갑을 채워 승합차 조수석에 태웠다. 승합차를 운전해 가던 중 피해자가 유영철의 신분을 의심하는 태도를 보이자, 피해자를 살려 두었다가는 그간의 살인행각과 경찰관 사칭 행각이 드러날 것을 염려하여 피해자를 살해하기로 결정하였다.

유영철은 수갑을 채워 피해자를 저항하기 어렵게 만든 다음, 코팅 장갑을 낀 손으로 잭나이프를 들고 피해자의 얼굴과 머리, 목 등을 마구 찔렀다. 피해자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여, 피해자를 뒷좌석 밑에 가로방향으로 눕혀 놓고 옷가지로 덮으려고 하였으나, 죽은 줄로만 알았던 피해자가 피고인을 향해 발길질을 하며 저항하자, 다시 잭나이프로 피해자의 허벅지 등을 찌르고 가방에서 꺼내든 해머로 피해자의 머리를 수 회 내려쳐, 피해자는 두부손상으로 사망하였다.

잭나이프로 피해자를 찌르는 과정에서 실수로 베인 오른쪽 손등 상처의 피가 승합차 안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피를 없애버리기 위해 인적이 드문 곳에서 승합차에 불을 지르기로 마음먹었고, 사체에 옷가지와 신문지를 덮어놓고 승합차를 운전하여 다시 자신의 오피스텔에 도착하여 몸에 묻은 피해자의 혈흔 등을 닦고 옷을 갈아입은 후, 승합차를 운전하였다. 다음날 새벽 1시에 인천 중구 북성동 소재 삼호석유 주차장에 도착하여 연쇄폭발을 유발하기 위해 2대씩 주차된 유조차량 사이에 위 승합차를 주차시켜 놓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수갑에 묶인 피해자가 살해당하기 직전 피고인에게 저항하기 위해 심한 몸부림을 치는 과정에서 피해자의 두 손목에 선명하게 난 수갑자국을 없애버리는 한편, 피해자의 신원도 확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잭나이프로 두 손목을 절단하여 이를 비닐봉지에 담았다. 그리고 승합차 안에 있던 신문지와 옷가지를 사체 위에 올려놓고 승합차 안에 있던 라이터로 불을 붙여 그 불길이 피해자의 사체 및 승합차에 옮겨 붙게 하였다. 이어, 위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두 손목을 그 곳으로부터 약 300m 떨어진 월미도 횟집상가 앞 방파제 바위틈에 버렸다.

피해자의 시신은 월미도에서 기름탱크에 담겨 불태워졌고, 뒤늦게 유족들이 겨우 몇 점을 수거하여 장례를 치렀다. 그는 평소 노점상 단속 때문에 경찰서를 자주 들락거렸기 때문에 유영철의 경찰 신분증이 가짜라는 걸 단번에 알아보았고, 그 점이 유영철을 자극해 살해당하고 말았다.# 피해자는 4형제 중 장남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사건 이후 가정이 풍비박산이 났다고 한다. 그의 피살 7개월 후에 둘째 남동생이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 둘째 남동생은 동거 중인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녀 역시 애인의 자살 이후 얼마 안 가 뒤따라 자살했다고 한다. 다시 8개월 후 막내 남동생도 자살로 생을 마쳤다. 마지막 생존자인 셋째 남동생도 자살을 시도했으나, 구사일생하여 현재는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으며 겨우 살아가고 있다.

안타깝게도, 연쇄살인 피해자 유가족이라는 게 알려지자 알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멀리하고 떠나가면서 사회적 고립까지 얻었다고 한다. 피해자의 아내는 현장검증 현장에서 너무나 태연한 유영철의 모습에 울부짖다가 실신하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자식들과 함께 아예 잠적해버렸고, 연락이 아예 끊겨 서로 안부는 물론 생사조차 모른다고.

  • 2004년 3월부터 7월까지 마포구 신수동 오피스텔에서 1명, 마포구 노고산동의 한 오피스텔[18][19]에서 전화방 도우미와 마사지 도우미 등 여성들을 불러들여 총 11명을 살해하고 시체를 토막내었다. 그는 토막낸 시신을 10개의 검정 비닐로 분리해 싸고 4개의 큰 검정비닐에 나눠 담은 뒤 택시를 이용해 운반하여 1구는 마포구 대흥동 서강대학교 도서관 뒷산 등산로 나무 밑에, 10구는 서대문구 봉원동 봉원사 주변 한방병원 신축공사장 주변에 암매장하였다.

유영철은 전화로 여성들을 불러 길거리나 여관에서 만난 뒤, 컴퓨터 스캐너 장비와 컬 러프린터기를 이용하여 서울지방경찰청장 명의의 위조 경찰관 신분증과 남대문시장에서 구입한 수갑을 보여주어 경찰관을 사칭하여 함께 자신의 오피스텔에 들어갔다. 집에 들어간 유영철은 여성들에게 샤워를 하게 한 후 욕실로 들어가서 해머로 머리를 가격하여 기절시킨 후, 거버 사의 나이프로 목을 자른 후 욕실에서 시신을 15~18개로 토막을 냈다. 특히 유영철은 "자른 머리의 머리카락을 고무줄로 묶어 벽면에 달린 휴지걸이에 매달아 놓아 피를 다 빼냈다"고 진술해 충격을 주었다. 시신을 토막낼 때 소리가 날까봐 물을 틀어서 물소리가 나게 했다. 또한 반젤리스라는 노래[20]를 틀어놓고 사체를 잘랐다.[21] 처음에는 쇠톱을 이용하였고 시간도 많이 걸렸으나, 차츰 능숙해져 칼만 가지고도 토막을 내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또한 혹시라도 DNA 검사로 자신의 신원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11명의 피해 여성들 중 단 한 명과 성관계를 맺었을 뿐, 나머지는 즉시 살해하였으며,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관계를 맺은 피해여성의 손가락 지문을 모두 칼로 벗겨내어 화장실 변기에 버리는 치밀함을 보였다. 토막 낸 시신을 검정비닐로 싸는 과정에서 자신의 지문이 남을까봐 시신을 땅에 묻은 뒤에 비닐봉지를 모두 회수하였다. 유영철은 일반적인 연쇄살인범들이 보이는 피해자의 공포나 경악스러운 감정을 보고 싶어하거나 피해자가 자신에게 동정과 자비를 갈구하는 행동을 즐기지 않고 순식간에 피해자들을 즉사시켰다.

하지만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사체에 대한 모욕이나 절단 등의 엽기적인 행동을 했는데, 시체의 뇌수를 믹서에 갈아 먹는 등의 식인 행위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간과 자궁, 음부 등을 잘라내는 등의 시체훼손을 저질렀다. 유영철은 피해자를 죽인 순간을 회상하기 위해 자신만이 알고 있는 장소에 사체를 토막내어 암매장하였고 피해자가 차고 있던 팔찌를 전리품으로 가지기도 했는데, 프로파일러들은 이러한 유영철의 행동을 "연쇄살인범들이 보이는 전형적인 회상기"라고 분석했다. 모든 살인과 살인 간 일정한 냉각기간을 가진 뒤 침체기가 끝나면 살인을 반복하였는데, 특히 직업여성 계획 살인에서는 냉각기간의 간격이 매우 빨라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범행 수법이 점차 숙달되어 가고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3월 16일 전화방 도우미 23세 여성을 두 손으로 목 졸라 살해. 시신은 서강대학교 뒷산에 암매장하였다.

  • 4~5월 전화방 도우미 성명불상(20~30대) 여성 살해. 이 사건부터 살해하는 데 둔기를 썼고, 암매장 장소도 서강대학교 뒷산에서 봉원사 근처 산으로 바꾸었다.

  • 5월 PC방에서 조건만남 쪽지를 보내고 있던 25세 여성을 보고, 위조 경찰증을 들이밀어 윤락 행위를 단속한다며 경찰 행세를 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다음 살해.

  • 6월 2일 전화방 도우미 35세 여성 살해.

  • 6월 전화방 도우미 성명불상(20대 후반) 여성 살해.

  • 6월 9일 출장 마사지사 26세 여성 살해.

  • 6월 18일 전화방 도우미 27세 여성 살해. 사실 유영철은 같은 업소의 다른 여성을 불렀는데, 피해자가 대신 유영철을 찾아오는 바람에 살해당하고 만다.

  • 6월 25일 출장 마사지사 28세 여성 살해.

  • 7월 2일 출장 마사지사 26세 여성 살해. 피해자의 이름이 유영철과 사귀고 동거하다 헤어진 여성과 같다는 이유로 살해하고 나서도 시신을 마구 훼손했다.

  • 7월 9일 출장 마사지사 24세 여성 살해.

  • 7월 13일 출장 마사지사 27세 여성 살해.

  • 2004년 5월 종로구 5층 건물주 주인 살해 일단 공식적으로 밝혀진 건 아니지만 정황상 유영철의 소행이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실제로 초기 자백이나 해당 범죄 이후의 정황과 맞물리는 상황도 꽤 있었지만, 진술이 번복되고 당시 담당하던 경찰이 서둘러 수사를 종결했기 때문에 이를 정확히 재수사하지 않는 한 어디까지나 심증이므로 취소선 처리. 아니면 아래 이문동처럼 일종의 공권력 이용 목적 또는 사형 선고가 내려질 때까지[22] 시간을 벌기 위한 거짓 자백일 수도 있다. 자세한 것은 《그것이 알고싶다1038회 참조.

파일:유영철그림.jpg
유영철이 직접 그린 토막살인 과정. 유영철은 피해 여성 11명을 죽인 뒤 시체를 18조각으로 나누어 유기했다.


3.2. 체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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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18일 이송 당시 포토라인 앞에 선 그의 모습[23]

파일:external/dimg.donga.com/200409100500042_3.jpg
2004년 9월 6일 첫 공판 때 모습[24]

유영철은 2004년 7월 15일 "특정 번호로 불러낸 마사지사들이 자꾸 실종된다"는 출장 마사지 업주의 신고로 체포되었는데, 당시 경찰은 유영철을 '마사지사들을 납치해서 지방으로 팔아치운다는 납치범' 정도로 생각했고, 조사를 하면서 "전화로 불러낸 마사지사를 어떻게 했느냐?"라고 질문하였다. 이때 유영철은 "서남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바로 나"라고 진술했으나, 구체적인 정황을 모르는 척 연기하며 경찰을 혼란스럽게 만들다가 "시체를 숨긴 장소를 알려주겠다"고 말하고는 경찰서를 나서다 도망쳤다. 그러나 11시간 만에 영등포역에서 붙잡힌다.

조사 내내 묵비권을 행사했으나, 김용화 수사부장(경무관)[25]이 와서 직접 조사하자 4건의 살인을 자백한다. 현장 검증에서 26명을 살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내장이 모자라는 시체가 몇 구 있어 추궁했더니 식인도 했다고 자백했다.[26] 하지만 26명을 살해했다는 주장은 추후에 유영철 본인이 이를 부인하고 정황도 맞지 않아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수사 담당자가 밝히기도 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살해된 희생자는 20명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8월 13일 구속 기소되어 이문동 살인 사건[27]을 제외한 20명에 대한 살인죄의 유죄가 인정되어 2005년 6월 9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18년이 지난 현재도 복역 중이다.

여기서 검찰의 실수를 확인할 수 있다. 유영철이야 어차피 이문동 살인사건이 유죄가 되건 말건 똑같은 사형이지만 희생자 유가족들의 처지가 문제인데, 만약 여기서 이문동 살인사건을 유죄로 판결하면 희생자 가족들은 영영 진범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찰은 구체적인 증거도 없으면서 상고심까지 끌고 갔고 결국 확정판결 이후인 2006년에야 연쇄살인범 정남규가 이 사건을 저지른 것을 자백하고 조사 결과 사실로 확인됨으로써 뒤늦게 진범이 밝혀졌다. 표창원의 <한국의 연쇄살인>(2005)에서도 경찰 수사방향을 따라 이문동 살인사건을 유영철에 묶어 다뤘지만, 당시 여기서도 "범죄의 대상과 방식에 명확한 차이가 있다"고 밝히면서 의혹을 나타내며 서술해놨다. 물론 이 때는 정남규가 잡히지 않았을 때.

유영철에 대한 사형은 18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집행되지 않아, 사형 미결수로 분류되어 있다. 2007년 1월경 법무부에서 유영철에 대한 사형을 추진하다가 당시 청와대의 반대에 막혀 무산된 바 있다.# 이 때문에 사형제에 관한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해당항목 참조.[28]

그가 살해한 희생자들은 대부분 금전에 상관없이 그저 그가 죽이기 쉬운 사람들이었다. 유영철은 경찰 조사 중 윤락녀처럼 보이는 여성을 주로 노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닌 사람도 있었고, 오히려 여성의 옷차림이 강간 및 살인에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매우 잘못된 통념을 불러오게 되었다. 유영철이 고른 여자 중에 윤락녀가 있는 합리적인 이유는 자신의 집으로 유인하기 쉬운 데다 섣불리 경찰에 신고를 못할 가능성 때문에 선택했던 것일 뿐, 윤락녀처럼 보이는 여성을 노렸다는 건 한때 종교를 믿으면서 색욕을 죄악시한 관념에 기초한 변명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초기에 저지르는 범죄와 후기에 저지르는 범죄가 어느 정도 차이점을 보인다. 초기에는 타인의 가택에 불법 침입하여 둔기를 휘둘러 살해하는 방식을 사용한 반면에, 후기에는 주로 출장 마사지사를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곳에 불러들여 살해 후 시체를 훼손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는 주택가 CCTV에 자신의 뒷모습이 완벽히 잡혀서 신고 있던 신발 종류부터 해서 머리에 쓴 모자까지 완벽히 나열된 채로 수배되자 두려움으로 인해 범행에 소극적이 된 것이다. 또 이후 은둔 생활을 하다 돈이 궁해진 데다 이혼 통보를 한 아내에 대한 원한으로 성매매 여성들을 불러 금전을 빼앗은 뒤 여성이 업주에게 스스로 '좋은 사람을 만났다. 그만둔다'며 거짓 전화를 강요하는 식으로 가짜 알리바이까지 만들어 놓고는 손망치로 살해한 것이다.

당시 유영철이 체포된 뒤 경찰에서는 프로파일링의 승리라고 자화자찬을 벌였으나, 실제로 유영철을 붙잡은 건 보도방 업주들이었다. # 특정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간 여인들이 잇달아 돌아오지 않자, 몇몇 보도방 업주들이[29] 회담을 했고 전화번호를 요주의로 분류하고 그 결과 유영철을 유인해 붙잡았다. 유영철이 체포됐을 때 마스크를 쓴 것도 보도방 업주들한테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해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유영철은 꼬리가 밟힐 것을 우려해 한 번 이용했던 업소 전화번호는 다시 이용하지 않았지만, 그 각기 다른 전화번호들이 최종적으론 한 업소로 수렴된다는 걸 몰랐다는 것이다.

그때 경찰은 업주들의 요청에 따라 한 명을 딸려 보냈는데, 그 때문에 자신들(경찰)이 체포했다고 광고하면서 자화자찬하고 관계자들을 승진시켰다가 사실이 밝혀지자 중징계를 받았다. 그리고 보도방 업주들은 반년 후 모조리 다 구속되고 처벌된다. 이것이 영화 추격자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3.3. 사이코패스 여부[편집]


사이코패스 판정 검사인 PCL-R 검사에서 30점[30] 이상의 점수를 받았다.[31] 다만 이 검사는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무슨 만능 검사가 아니다. 또 사이코패스와 쾌락 살인자는 구별될 것도 일치될 것도 없다. 그저 겹칠 가능성이 낮지 않게 존재하는 서로 다른 개념일 뿐이다. 혼동하지 말자. 주된 동기에 따라 분류하면 증오범죄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유영철의 경우 본질적으로는 증오범죄가 아니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사회에 대한 분노나 증오도 없지는 않았지만 근본적으로는 (미국의 연쇄살인마 게리 리지웨이[32]처럼) 사명감이나 증오범죄의 표피를 쓴 쾌락살인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는 주장.


4. 근황[편집]


파일:유영철재판.jpg
유영철은 법정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 재판에 나와 '재판에 나오기 싫다'고 주장하던 유영철한테 보다 못한 판사가 '출석 여부는 피고인이 결정할 수 없다'고 말하자 분노한 유영철이 '생각하고 말고가 안 나온다고요'라는 말과 함께 피고인석을 뛰어넘어 판사한테 돌진하다 법정경위와 교도관 20명이 유영철을 법정 밖으로 끌고 나갔다. 법정에는 유영철이 사용했던 망치까지 진열돼 있었기에 아찔한 상황이었는데, 속기사와 방청객까지 대피하는 일이 벌어졌다. #

유영철이 감옥에 들어간 이래 교도관과 동료 수감자들을 상대로 행패를 부려온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교도관의 목을 졸라서 독방에 수감된 적도 있으며 교도관을 통해 야설을 밀반입한 것은 이미 유명한 사건. 그외에도 꾸준히 교화 불능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며 살고 있다고 한다. 어차피 지금 판결받은 형벌보다 더 무거운 것이 없기 때문에 잃을 게 없다는 심보로 나가는 것이다.

2019년 그것이 알고싶다김복준 위원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된 근황을 보면 더 가관인데[33] 유영철이 걸핏하면 꾀병을 부려서 혈세를 낭비하게 하며 사실상 교도소에서 교도관들 머리 꼭대기 위에 군림하며 희희낙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술된 야설 밀반입 사건에 대해서도 김복준 위원은 해당 교도관이 돈이나 뇌물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유영철에게 하도 시달린 나머지 타협의 의도로 이거라도 먹고 떨어져서 조용히 있으라' 는 뜻에서 준 것일 것' 이라고 해석하였다. 그 정도로 유영철은 현재 형 집행법을 모조리 어기며 반성 따윈 없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34]

유영철은 닭고기를 먹을 때 몸통이나 날개를 먹는 특혜 같은 것을 누렸으며 "야! 나 누군지 몰라? 나야 나, 사이코야. 문 열어. 너 하나 죽여도 나는 어차피 사형이야." 라고 말하며 한밤중에 난동을 부리거나 "아 뜨거운 물 좀 줘봐. 커피 한 잔 마시게." 라고 하면 교도관이 뜨거운 물을 끓이고, 유영철의 감방이 무섭다는 이유로 교도관이 못 들어갈 정도로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 교도소 관계자는 직원이 들어오면 물거나 침을 뱉으려고 하고 수형자라는 법적 지위와 신분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 위에 산다." 라고 한탄했다. 또 다른 수감 동기의 증언에 따르면, 유영철은 교도관의 팔까지 부러뜨린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알고싶다에 출연한 표창원, 박지선, 이수정 등 출연한 범죄 심리 분석가들 역시 이에 한탄하였으며, 표창원 범죄심리 전문가는 “여전히 유영철은 어떤 반성이나 후회, 참회나 이런 것들을 전혀 느끼고 있지 않다”고 단언했고 그를 통제하기 위해선 교도관들에게 보다 넓은 재량권을 줄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2011년에는 교도관들의 목을 조르면서 "나 싸이코인 거 모르냐!"라고 소리치며 난동을 부렸다가 제압당해 독방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지금도 구치소에 적응을 못해 교도관들의 가발을 벗겨 망신을 주거나 화단을 손괴하는 등 일탈 행위를 자꾸 저지른다고 한다.[35]

위에 알려진 이야기들은 대부분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복역 초기 시절 이야기고 대구교도소로 이송 간 뒤에는 서울에서 하듯이 행동하다 절차대로 조사 수용되어 포승으로 대표되는 보호장비 착용을 오랫동안 당해 수용태도가 상당히 우수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36] 대구권에서 근무하는 교정직들은 대부분이 청송교도소에 장기간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당연히 이들은 흉악범들을 다루는데는 아주 도가 튼 사람들이다. 교정직군들은 대부분 자신의 연고지에서 근무하는 경우가 많고 청송이 대구,경북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37] 이런 탓에 대구교도소는 규율이 상당히 엄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연히 유영철한테는 견디기 어려운 환경이며 현재는 서울 기관으로 재이송을 매우 희망한다는 소문이 있다. 2021년 방영된 KBS2의 교양 프로그램 표리부동 10회에도 유영철이 표창원에게 "여죄를 알려줄테니 서울구치소로 이송시켜 달라"는 제안을 했다는 언급이 있다고 하니, 대구에 수감된 것이 어지간히 답답한 모양이다. 물론 유영철의 죄질을 생각하면 자업자득이겠지만.


5. 여담[편집]


  • 유영철은 교도소에 들어가서도 얌전히 있지 않았다. 우선 감방에 들어와서 동료 수감자들을 훑어보더니 "이 중에서 조폭 한 명과 경제사범[38] 한 명을 반드시 죽이고 사형당하겠다(데리고 가겠다)"고 선포해서 교도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러나 정작 조폭들은 이 말을 전해듣고는 코웃음을 치며, “감히 누구를 건드리겠다는 것이냐. 유영철을 한 번 혼내주겠다”고 벼르고 있다고 한다.[39] 이에 교도소 측은 유영철에게 4~5명의 교도관을 상시 붙여놨으며, 조폭과 유영철에 대한 상호접근을 막았다.

  • 과거 2004년, 기자에게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은 이미 죽었거나 교도소에 수감 중일 것"이라고 의견을 냈다. 이유는 "연쇄살인범은 그런 식의 제재가 없으면 결코 살인을 멈추지 못한다"는 것. # 그리고 그 말대로 미궁 속에 빠진 진범 이춘재가 다른 범죄 1건으로 무기징역[40]을 살고 있음이 드러남과 동시에, 사건명도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으로 바뀌었다.

  • 후일 2008년 영화 《추격자》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으며, 극중에서 ‘지영민’으로 나온다.

  • 유영철의 판결문 전문이다. 보면 알겠지만, 다른 범죄자에 비해 판결문이 엄청나게 길다. 사람을 한두 명도 아니고 밝혀진 것만 20명이나 살해했으며, 살인 행각 과정에서 잡다한 다른 범죄들 역시 많이 저질렀기 때문이다.[41]

  • 유영철의 PCL-R[42]이 만점에 근접한 만큼, 해외에서도 유명한 살인마로 알려져 있다. 이는 사진잡지 <라이프>에서 세계 30대 살인마에도 올랐으며, 연쇄살인자에 대한 정보를 찾아 보면 어지간한 곳에서는 다 그의 이름을 거론한다. 심지어 유영철이 한국에서 1997년 이래 8년만에 사형을 선고받은 경우라는 잘못된 정보도 나오고 있는데, 그의 악명이 얼마나 높은가를 말해주는 사례이다.

  • 위에서 언급했듯, PCL-R이 만점에 근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영철은 스스로 '사이코패스 관련 서적으로 공부를 정말 많이 해보니, 난 사이코패스가 아닌, 소시오패스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비전문가인 그의 일방적이고 오만한 주장일 뿐, 전혀 신빙성이 없는 허위사실이다.

  • 프로파일러 권일용이 프로파일러로서 처음 투입된 사건이 그의 살인사건이다. 권일용의 말로는 유영철이 말이 너무 많아, 그의 말을 중간에 끊지 않으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갈 수 없었다고. 하지만 유영철은 권일용 등의 프로파일러는 만나본 적도 없다고 주장하는데, 권일용은 이를 두고 '거짓말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혼동을 주려 하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적인 행동'이라고 분석했다.

  • 또한, 프로파일러 권일용은 그를 두고 '경계선 성격장애' 기질이 있다고 분석하였다. 물론, 의학적 진단은 전문의가 할 수 있으니, 본인이 진단 내린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덧붙였다. 권일용이 그를 경계선 성격장애 기질이 있다고 한 이유 첫 번째로는 비정상적으로 고독함을 느낀다는 점이다. 유영철은 실제로 '내가 죽인 시체 옆에 있고 싶을 정도로 외롭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 이유로는 감정이 비정상적으로 순식간에 변동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유영철은 아침에 기분 좋게 집을 나서자마자 본인 앞을 위험하게 지나간 오토바이 때문에 갑자기 살인 충동을 느낄 정도의 분노를 느꼈다고.

  • 조용히 있어도 모자랄 판에 구치소 내에서 난동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독방으로 직행, 언론에서는 '콩밥도 아깝다, 닥치고 사형시켜라' 등의 목소리가 빗발치고 있으며 현재도 사형집행 이야기가 나오면 강호순, 정두영, 박한상 등과 더불어서 1순위로 거론되고 있다.

  • 슬하에 아들이 하나 있다. 1994년 10월 26일생으로, 현재 29세. 사이코패스는 가족에게도 매우 폭력적일 거라는 통념과 다르게, 아들을 지극하게 아꼈다고.[43] 전처 황아무개 씨는 레이디경향과 인터뷰를 할 때, "유영철의 아내로 지낸 생활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고 말했지만, 의외로 단 한 번도 유영철이 자신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인터뷰 내용을 보면, 유영철에게 엄청난 적개심을 품은 상태였는데도, 폭력을 당하지 않았다고 단호하게 답변한다. #1 #2 비록 인터뷰에 응했다고는 하지만 전처는 "이미 몇 년 전 이혼했고 할 말이 없으니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는 입장을 일관적으로 취하고 있다. 가정폭력이 실제로 있었는지와는 별개로 아들을 나름대로 아끼는 마음은 있었음을 기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문동 여성 살인사건에 대해 경찰이 "아들의 대학교 진학까지 뒷바라지를 해주겠다"고 회유하자 거짓 진술을 했고, 감옥 내에서 기자와 나눈 편지에서 아들 자랑을 늘어놓기도 했다. 그러한 영향인지 연쇄살인 피해자 중에 10대는 없었다. 연쇄살인 진행 중 맞닥뜨린 어린 남아를 직접 공격하진 않았던 이유를 아들과의 연관성에서 찾기도 한다. 이후 아들은 평범하게 성인으로 자라 여느 사람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도 하며, 일반적인 사회인으로 살고 있으며, 놀랍게도 자기 아버지가 '그 유영철'이라는 건 전혀 모른다고 한다. 전처 황 씨가 아들이 모르게 하려고 실로 처절한 노력을 했다고. 황 씨는 아들이 자립한 후인 2013년경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서 전남편에게 살해된 피해자들의 명복을 빌며 살고 있다.기사

  • 자신의 범행 소식을 전하는 인터넷 뉴스의 댓글에 답글을 작성한 적이 있다. 내용은 '아닐걸?ㅎㅎ'.

  • 공지영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는 원래 이 인간을 모티브로 한 등장인물이 나올 계획이었지만, 세간의 비판을 인식하여 그만 두었다고 작가 본인의 언급이 있었다. 대신 '여러 해만에 사형집행 재개 여론을 들끓게 만든 희대의 살인마'라고 에필로그에 살짝 언급만 된다. 공지영 본인은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유영철을 보면서 '저런 인간은 죽여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느꼈다고. 다만 공지영은 유영철을 보고서 ‘손이 참 곱다.’며 예술적인 감각이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 각종 괴담에 등장하기도 했다. 유영철에 관련된 괴담 문서 참조. 여기에 나온 괴담은 전부 거짓이다. 칼을 전혀 쓰지 않았다는 말도 사실은 아니다. 유영철이 칼을 흉기로 사용한 적이 있긴 있다. 황학동구기동에서 남자를 상대로 살인을 했을 때는 얼굴 부위를 칼로 20차례 찌르고나서 해머로 마무리 했다. 이렇듯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게는 열등감과 두려움을 나타내는 성향을 보이기도 하였다.[44] 하지만 대부분은 전부 자신의 손에 알맞게 제작한 손망치로, 속칭 '오함마'의 손잡이를 개조한 것을 써서 피해자를 살해하였다. 판결문에도 나오지만 칼로 죽이면 사람이 느리게 죽는다고 쓰지 않았다.[45] 애초에 살인범 중에서 칼을 순수하게 살인의 목적으로 쓰는 경우는 살인 경험이 전무한 사람이 우발적으로 칼을 쓰거나 전문적으로 칼을 잘 다루는 사람이 계획적으로 사용하는 두 경우밖에 없다. 통념과는 달리, 칼은 사람을 단번에 죽이는데 좋은 흉기가 아니다. 대개 칼로 살해된 사람의 경우 손, 팔 등에 방어흔이 많이보이는 것이 그 증거. 출혈이 생기긴 하나, 즉사는 어렵고, 죽기 직전까지 계속 저항한다는 뜻이다.[46] 또한 유영철은 아파트에서 살인을 한 적이 없다.

  • 만화가 유영태는 이름이 비슷해서 ⌜홈런더비⌟에서 유영철로 불린 적이 있다.

  • 2004년 7월 26일, 유영철을 이송하던 기동수사대 1계 2반 소속 이용길 형사가 유영철에게 달려들던 피해자 유가족[47]을 발로 걷어차 유가족이 계단에서 굴러 넘어진 사건이 있었다.# 논란이 된 이용길 형사는 "유족인 줄 몰랐으며 달려든 유족이 들고 있던 우산을 순간적으로 흉기로 보았다"고 해명했고, 이 형사 본인이 피해자 남편에게 찾아가 사과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유가족이 달려든 것은 방송사가 사주한 것"이라고 주장해서 공분을 사기도 했다.# 이후, 전출 징계로 마무리되었고 당시 발길질한 이용길은 진급에 아무 문제없이 잘 올라가, 2022년에는 서울지방경찰청에서 경감으로 재직하고 있다.
    • 표창원은 <한국의 연쇄살인>에서 이 사건을 다루며, 범죄 피해자 보호와 지원 측면에서 큰 문제를 드러낸 경우라고 서술했다. 다만 해당 경찰에 대해서는 실드를 좀 쳐주기도 했다.
언론에서는 경찰이 살인마 유영철을 보호하기 위해 비탄에 잠겨 이성을 잃은 연약한 피해자 유가족을 발로 차는 과잉 행동을 했다고 강하게 비난했고, 여론 역시 분개했다. 하지만 피해자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경찰관이나 사회복지사가 전혀 없는[48] 우리 제도가 문제의 원인이지, 해당 경찰관 역시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

'공공의 적'으로 언제든 공격을 당할 수 있는 유영철을 무사히 호송해서 검찰에 인계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경찰관은 운집한 군중의 적대적 분위기 속에서 초긴장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순식간에 벌어진 돌발 사태 앞에서 생각하고 판단할 여유도 없이 직업적 특성에 따른 반사적 행동이 나왔던 것이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경찰청장이 공개석상에서 고개 숙여 사죄했고, 해당 경찰관은 비난의 화살과 징계의 화를 당했다. 출처

  • 유영철에 의해 가정파괴가 된 유가족들은 아직도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참고]

  • 월간조선의 이은영 기자가 유영철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일부가 이은영 기자의 기사로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 공개된 편지를 보면 유영철은 글씨를 굉장히 잘 쓰고, 간단한 주소와 이름 등은 한자까지 섞어서 쓰며, 그림 실력도 수준급이다. 행간•자간 등도 매우 일정한 점이 눈에 띄기도. 이 편지들은 훗날 <살인중독>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당연히 유영철의 행각이 행각인지라 19세 미만 구독불가 서적이다. 참고로 이 편지들을 읽은 이은영 기자와 경기대학교 이수정 교수 등은 몸서리가 쳐지고 편지들을 몇 번이나 내 던져버렸다고. 《그것이 알고싶다》 1038회에서 이 책이 잠깐 언급되었다 한다. 살인 중독자의 처절한 告白 - 연쇄살인犯 유영철이 보내온 50여 통의 편지[49]

  • 2014년 11월에는 교도관에게 뒷돈을 주고 일본 만화나 성인 화보집, 야설을 밀반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 일로 감시가 엄격한 대구교도소로 이감된 후에는 그나마 좀 나아졌다고.

  • 경찰 신분증을 위조하기도 했다.[50] 이게 유영철의 연쇄살인 전후 주 범죄 수법이었다. 잔인하게 살해된 황학동 노점상 희생자 또한, 유영철이 가짜 경찰이라는 걸 눈치챘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생계유지를 위하여 경찰을 위장해 사기 행각을 저지르고 다녀, 검거 이후 공문서 위조 및 공무원 자격 사칭 죄목 또한 판결문에 기록되어 있다. 직접 제작한 위조 경찰 신분증은 영화 《공공의 적》을 즐겨보고, 작중 나온 경찰 신분증을 보고 제작에 써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그러한 위조를 막기 위해 실제와는 다른 소품을 썼는데, 그것이 위의 황학동 노점상 희생자에게 가짜 신분증이 들통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영화 《올드보이》를 보고, 오랫동안 밀실에 갇혀있다가 풀려나온 오대수에게 동병상련을 느꼈다고 한다.

  • 유영철의 경우도 대다수의 흉악범들과 마찬가지로, 첫 범행은 절도였는데, 이것이 흉악범으로 이어졌다. 그의 생애 첫 범죄는 1988년[51] 10대 때 이웃집 누나의 방에 침입해서 기타와 현금 23만 원을 훔쳤다가 소년원에 다녀온 것이다.

  • 드라마 《모범택시》에서 장성철의 부모를 살인한 연쇄살인범(오철영)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 2022년에는 교정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안홍기 목사가 CBS기독교방송에 나와 자신과 유영철의 만남에 대해 말했다.#

  • 경찰서 포토라인에 섰을 때 진행한 피해자 비난 인터뷰가 보도되어 굉장한 공분을 샀다.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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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혜화동 사건 당시 손을 다쳐 피가 떨어지자 그 핏자국을 비롯한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현장에 방화를 저지른 적이 있으며, 전처에게 괴로운 말을 들었을 때 주변 쓰레기나 타이어에 불을 붙였다고 기자에게 털어놓은 바 있다.[2] 2000년 미성년자 강간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윤락 여성 상대로 성접대를 하다 살해했다.[3] 1988년에 이웃집에 들어가 기타를 훔쳐 보호 처분을 선고받은 적 있다.[4] 성매매 포주들에게 경찰이라고 속이고 돈을 뜯어내 생계를 이어갔다.[5] 살인을 하기 전 개를 여러차례 죽였다고 진술했다.[6] 첫 살인은 2003년 9월 24일[7] ◈ 유영철이 살해 직전 여성들의 혈액형을 확인한 이유는? 이 변호사는 유영철을 조사하면서 "정말 치밀하고, 잔인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수법이 너무 잔인해, 말로 옮기기도 어려울 정도라고 했다. 유영철은 심지어 인육을 먹었다고 스스로 진술했다. 이 변호사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다. '처음에는 를 먹었지만, 생각보다 질겨 그 다음부터는 을 먹었다고 했다. 간이 좋지 않아 그랬다고 했는데, 자신과 같은 혈액형인 O형 혈액형을 가진 여성들의 간을 골라 먹었다고 한다. 술에 절은 여성들의 간은 먹지 않았고, 사전에 대상을 선정하고, 혈액형을 물었다고 했다. 혈액형이 같아야만 부작용이 없는 것으로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사[8] 피해자가 이문동 사건 피해자 포함 21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20명이다. 이는 본래 정남규가 저지른 범행인 이문동 살인사건이 2004년 당시 유영철의 범행으로 인정되고 현장검증까지 했으나 유영철이 진술을 번복해 이 건은 무죄로 판결되었다.[9] 유영철 대법원 판결 전문.[10] 형제들 중 유일하게 계모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유영철은 체포 뒤 기자한테 보낸 편지에서 계모를 '첩'이라고 표현했다.[11] 적록색맹이다. 유영철과 편지를 주고받은 월간조선 이은영 기자가 그의 예술고 입학지를 찾아본 바 적록색맹으로 인해 불합격 되었다고 한다. [12] 월간일보 2004년 12월호 [13] 이때부터 정두영 등 일반적 강도 살인범과 전혀 다른 행태를 보였는데, 재물에는 손을 안 대고 사람만 죽였다는 점이다. 즉 살인 자체가 목적이었다는 이야기.[14] 법정에서 소지하고 있던 십자가 목걸이를 부쉈다. 그런데 이 논리가 일반인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데, 절도죄의 법정형은 6년 이하 징역이다. 아무리 대한민국 법이 솜방망이라도 상습절도범이 징역 10개월이면 많이 선처받은 셈.[15] 사실 대부분 범죄자의 사고방식이 이렇다. 교도소에 들어온 사람들 절대다수가 자기가 저지른 죄에 비해 자기가 받은 형량이 가혹하다며 억울해하고, 자신을 이렇게 감옥에 들어오게 한 사람들을 되려 원망하는 억하심정을 내비친다는 증언들이 찾아보면 꽤 많다. 애초에 "잘못했으면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자신에게도 공평하게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자제심이 많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사람이었다면 그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16] (조선일보, 2003년 10월 17일)[17] 중앙일보, 조선일보 2003년 10월 17일자[18] 사건 당시 그 지역에서는 해당 장소가 악명 높아졌었는데, 현재 신촌역 7, 8번 출구나 서강대역 기준 2번 출구 쪽에서 이동하면 나오는 부근 지역이었다. 상가나 오피스텔 등 작은 건물들이 골목 따라 쭉 섞여 있던 지역(사실상 시장 비스름한 곳)에 있던 곳 중에서도 끝 쪽 구석 깊은 곳에 있던 곳이다. 2010년대 들어, 계속 그 지역 근처 대부분 건물들이 싹 밀리고 재개발되면서 현재는 사라졌고, 새 길이 생기며 그에 맞게 새 건물들이 건축되어 정확한 건물터조차 찾을 수 없다. 기존에는 신촌역 외에 가까운 역이 없어서 '신촌 쪽이다'라고만 소문이 났었는데, 거리가 먼 건 아니지만, 사건이 일어나던 당시는 신촌역에서 거기로 가는 길이 오래된 건물들로 어느 정도 막혀 있던 곳이라 돌아서 가야 하거나, 직선거리에 가깝게 걸으려면 좁은 골목을 꽤 지나가야 했기에 가까운 느낌이 들 만한 곳은 아니었다. 현재는 건물들을 많이 헐어버리고 길이 생길 만큼 다 뚫어버렸다.[19] 당시 유영철이 거주하던 같은 오피스텔에 살던 어떤 사람은, 밤에 왠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고 한다. 그리고 건물 주인이 '이번 달은 유난히 수도요금이 많이 부과되었다'고 의심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는 시신을 토막내는 소리였고, 수도요금이 많이 나온 이유는 시신을 토막낼 때 물을 많이 소비했기 때문인데, 당시만 해도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나중에 유영철이 체포되었을 때 TV에서 자신이 거주하던 오피스텔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모터 소리와 과다한 수도 요금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20] 제목을 모르는 사람들도 멜로디만 들으면 많이 들어본 노래일 것이다. 영화 <1492 콜럼버스>의 OST이며, 주로 항해하는 장면 등이 나올 때 BGM으로 많이 사용된다. 굉장히 멋있고 웅장한 노래인데 이런 노래를 틀고 사체훼손을 했다는 점에서 유영철이 자신의 범행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얼마나 영웅시하는지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21] (조선일보, 2004년 9월 20일)[22] 일단 여죄를 자백하면 그 여죄를 또 수사하느라 시간을 벌 수 있으니[23] 마스크를 쓰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 사건을 취재했던 주진우 기자에 따르면, 검거 과정에서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마스크를 씌웠다고 했다. 실제로 검거 과정에서 워낙 많이 맞아서, 정황을 모르는 사람이 맨얼굴을 봤다간 고문 수사로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가린 것이다. 사진을 보면 눈 한쪽이 심각하게 충혈되어 있는 것도 그 이유이다.[24] 왼쪽의 수염을 기르고 검정색 옷을 입은 남자가 유영철이다.[25] 웬만해서는 일선 경찰서장보다 높은 계급이다. 형사 출신 김복준과 프로파일러 출신 김윤희가 방송하는 유튜브 채널에서는 "군으로 치면 원스타"라고 비유하며 "경찰 역사에 전무후무할 일"이라고 묘사했다.[26] 공식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며, 어차피 체포된 김에 악랄한 최악의 살인마로 기억되고 싶어서 허위주장을 했을 수도 있다는 프로파일러들의 분석이 있다.[27] 범인은 정남규였고, 2006년 4월 체포 당시 본인이 범인임을 자백하였다.[28] 한국김영삼 정부 말기인 1997년 12월 30일 23명 사형집행 이후 26년이 흐른 지금까지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있어, 2007년부터 사실상 사형 폐지 국가로 구분되어 있다. 2010년 기준 사형 폐지 혹은 사실상 폐지 국가는 총 133개국이며 사형 집행국은 중국, 베트남, 북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지 및 미국 일부 주, 일본 정도이다. (미국은 50개의 주가 존재하며 각 주마다 전부 다 법이 다르다.) 유럽연합은 사형제 폐지가 가입 조건이며, 한국은 EU와의 범죄인 인도조약 체결 과정에서 '인도자에겐 사형 집행을 포기한다'는 서약서를 제출했다고. 물론 유럽에서 넘어온 범죄자만 사형 집행을 않겠다는 이야기지만, 외교 조약은 호혜주의가 원칙이므로 이런 형평성 문제는 적다. 실제로 중국의 경우 최근까지 마약류 유통의 혐의로 자국에 수감된 한국인을 사형 선고 및 집행을 하고 있다. 사실 미국도 연방 주나 도시들마다 사형제가 있는 주와 도시가 있고, 없는 주와 도시들이 있다.[29] 업주 중에 경찰 정보원으로 쓰이던 조폭도 있었고 전직 경찰도 있었다. 그 전직 경찰이 현직 경찰에게 첩보를 준 것이다.[30] 40점 만점에 38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31] 25점부터 사이코패스로 판정된다.[32] 유영철과 주된 피해자(매춘 여성), 표면적 동기(사회 정화 등)가 꽤 유사한 연쇄 살인마이다. '그린 리버 살인사건'의 범인. 역시 사이코패스로, 미국 범죄학에선 '가장 보편적인 사이코패스'라 불리우며 지금도 중요하게 연구되고 있다. PCL-R 만점이 나오는게 당연할 정도다. 그리고 여담으로 둘 다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자신의 국가에서 최대 살인마의 기록을 지키고 있다.[33] 49분 06초부터 나온다.[34] 반면 강호순은 의외로 비교적 조용하게 수감 생활 중이라고 한다.[35] 만약에 미국이나 러시아 였다면 유영철이 더욱 불리해 질 수 있다. 특히 러시아에서 가장 악명높은 교도소에서 저러면 교도견들에게 물어 뜯기거나 교도관들에게 총으로 맞아 벌집이 될 수도 있고, 미국은 교도관들에게 극딜을 당하는건 기본이고 바로 가장 악명높은 깨끗한 지옥의 교도소에 보내진다. 참고로 유영철 같은 범죄자는 최고 USP 등급으로 들어가며, 한국에서도 그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면 청송으로 갔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가 사형집행 대기 신분이라 청송에 못 갈 뿐이다.[36] 교정시설에선 질서 유지를 위해 보호장비를 사용한다. 제대로 묶으면 3시간만 있어도 풀어달라고 빌 정도로 고통스럽다.[37] 대구 경북권이 연고지가 아닌경우 대부분 최소 근무년수만 채우고 고충처리를 통해 자신의 연고지로 전출을 신청한다. 청송에 있으면 진급도 잘되는 편이고 관사도 나오는데다가 2일 휴무도 잘 지켜지는 편이라 대구,경북권이 연고지인 경우 청송에 있는것이 마냥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한다. 이런 인력들이 어느 정도 진급을 마친후 전출을 신청하게 되면 당연히 자신들의 연고지중에서 가장 큰 도시인 대구쪽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다.[38] 정작 경제사범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39] 이는 조폭들이 코웃음 칠 만도 한 게, 교도소나 구치소에서 먹이사슬 최상위권에 포진한 이들이 바로 조폭들이다. 수직적 위계가 몸에 밴 조폭들 특성상 수감지에서도 쉽게 적응하며, 그 안에서도 무리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교도관들도 질서 유지를 위해, 조폭 수감자들이 방장 노릇을 하거나 다른 재소자를 독단적으로 통제하는 행위를 해도 정도가 가벼우면 어느 정도 선까지는 묵인해주기도 한다. 또한 이들은 출소 후에도 자기 뒷배를 보아줄 조직의 존재가 있다. 물론 유영철의 싸움 실력이 만만치 않다 하더라도 교도소의 깡패들이 힘을 합쳐 몰아붙이면 유영철 개인은 쉽게 제압될 것이다.[40] 1심 2심에서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감형되었다.[41] 서울중앙지방법원 2004.12.13 선고 2004고합972 2004고합973 2004고합1023 판결 【살인·현주 건조물 방화·사체손괴·공문서위조·위조공문서행사·공무원 자격 사칭·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야간·공동공갈)(일부 인정된 죄명 : 공갈사체유기·도주·일반자동차방화·사체은닉·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절도)】[42] 일반인에게는 '사이코패스 테스트'로 알려 있다.[43] 유영철은 "가장 무서웠던 순간은 잘린 머리가 수건걸이에서 떨어졌던 순간도, 머리 없는 몸뚱아리가 나에게 달려들었던 순간도 아니었다. 그 순간 걸려온 "'아빠의 감기가 아직 안 나았느냐'는 아들의 전화가 가장 무서웠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44] 사실 구기동에서 가족과 함께 살해당한 남성은 자폐성 장애인이었고 유영철이 지시를 하였지만 잘 따르지 않자 화가 나서 오버킬을 했다는 분석도 있다.[45] 어머니 집에서 키우던 개에게 실험을 해보았더니 한 번에 죽지 않았고, 노점상 살인 때에도 한 번에 죽지 않아 범행도구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46] 급소에 제대로 공격해서 대동맥을 끊어내거나 최중요 장기들에 큰 손상을 입히면 수 초 내로 절명하기는 한다. 특수부대 또한 이런 식으로 기습했기에 나이프를 근접전 무성무기로 활용 가능했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급소를 공격하지 않는 막공격으로는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뜻이고, 따라서 수련을 빡쎄게 한 칼잡이 정도는 되어야 이런 게 가능하다는 소리이므로, 유영철같은 일반인이 그런 기술을 보유하는 건 어렵다.[47] 이문동 살인사건의 유가족으로, 이 사건의 진범은 정남규였다. 이 당시에는 유영철이 진범이라고 보도되었던 시기였다.[48] 범죄피해자 보호법이 만들어진 것이 2011년이다. 유영철 사건은 2004년, 이 책이 나온 것은 2005년.[참고] 눈물로만 닦을 수 있는 핏자국, 피해자 17가족 세상과 인연 끊고, 3가족은 풍비박산[49] 편지에서 《살인의 추억》 영화를 보고 "그렇게 막나가는 범인이 아직까지 안 잡히는 것은 중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썼는데, 이게 예언처럼 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50] 미 육군 헌병 뱃지가 부착된 케이스에 휴대하고 다녔다. 프로파일러 권일용은 여기서 유영철의 '무식함'을 지적했다. 참고로 해당 흉장은 관련 규정이 없어 국내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51] 당시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등 악명높은 살인사건이 많았던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