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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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문화재청장
유홍준
兪弘濬 | Yoo Hongjun

출생
1949년 1월 18일 (75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성동
거주지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 수졸당[1]
본관
기계 유씨[2]
등단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현직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재임기간
제3대 문화재청장 (참여정부)
2004년 9월 3일 ~ 2008년 2월 22일
종교
불교무종교[3]
학력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 / 학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 / 석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 / 박사)
가족
아버지(1923년생), 어머니(1927년생)
배우자
최영희[4]
자녀
2남
신체
182cm
병역
대한민국 육군 상병 만기 전역
소속 정당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5]
경력
중앙일보 계간미술 기자
한국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
영남대학교 조형대학 교수
영남대학교 박물관장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제3대 문화재청장 (참여정부)
이응노 생가기념관 운영위원장
한국기원 이사
광화문대통령시대 자문위원

1. 개요
2. 생애
3. 행적
4. 박물관 입장료 부과 주장
4.1. 반론
5. 비판
5.1. 권위주의적 행실
5.2. 조선총독부 청사 관련
5.3. 각종 구설수
5.3.1. 효종 왕릉 버너 취사 사건
5.3.2. 낙산사 화재 관련
5.3.3. 수자기 관련
5.3.4. 현충사 발언
5.3.5. 벌목 지시
5.3.6. 고려청자를 여대생의 엉덩이에 비유
5.4. 지식 결여
6. 기타



1. 개요[편집]


대한민국미술평론가교수. 제3대 문화재청장을 역임했다.


2. 생애[편집]


1949년 서울특별시에서 6남매 중 장남이자 둘째로 출생. 중동고등학교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미학과를 졸업했고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했으며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에서 예술철학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때 3선 개헌 반대 시위 도중 민청학련 사건으로 붙잡혀 옥살이를 한 전적이 있다.

영남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이후 상경하여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좌교수를 하고 있다. 1980년대 영남대학교 재직 시절에 수업 중에 자주 박정희 비판을 했다고[6]. 자신은 이것을 "전두환 대통령 비판을 하지 못하니 대신 박 대통령을 디스한 것"이라고 한다.[7][8]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등단했고 '젊은이들을 위한 한국 미술사' 강의를 하다가 '한국문화유산답사회'를 만들어 함께 문화유산 답사를 다녔고 그를 바탕으로 <남의 문화유산답사기>[9] 말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펴내게 된다.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문화재청장의 직책을 맡았으나,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인해 사퇴했다. 이후 은퇴하여 2014년부터 명지대학교 석좌교수를 하고 있다.

2017년 대선에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문재인의 서울역사문화벨트조성공약 기획위원회, 광화문대통령공약 기획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후 문재인이 제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됨에 따라 그의 공약인 광화문대통령시대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2019년 1월 4일에는 사실상 광화문 청사 이전이 어렵다고 발표하였다.

음성휴게소지리산휴게소를 싫어한다.


3. 행적[편집]


한국미술을 강의하기 전에는 민중미술 쪽에서 활동했다. 민중미술에 대해 평론 쓰고 작가들 활동을 도와줬다는 듯하다. 여전히 민중미술계열 화가들 전시에 서문을 써주는 등 친하게 지내고 있다. 80년대에 기존 추상화 경향의 화가들을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다고 까면서 등장한 것이 민중미술이라,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이나 기타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60~70년대 추상화가들에 대해 쓴 글은 별로 없다. 다만 서구의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를 인용하긴 했으며,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등 60년대 이전 구상화가들에 대해서는 글을 많이 썼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90년대 많은 대학에서 교양 강의 교재로 사용되었고,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와 함께 필독 도서가 되다시피 했다. 유홍준이 문화재청장이 된 배경에는 그렇게 알려진 대중적 인기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전에 미술사 연구자들은 주로 개인 연구에 중심을 두고 대중을 대상으로 한 책을 쓰지 않았는데, 유홍준 이후로 관련 책이 많이 출간되었다. 여러모로 인문학 붐을 일으키는데 일조한 인물이다. 자기계발서처럼 가벼워지긴 했지만 이후 2014년에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도 썼다. 일본에 남아있는 유물들을 설명하면서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관계에 대해 서술하였다. 일본 국보 1호인 광륭사 목조반가사유상 등, 일본 문화를 무턱대고 떠받드는 일빠들을 대꿀멍시키기 좋은 내용들로 채워졌다.

그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을 쓰게 된 계기는, 앞서 2012년 제18대 대통령선거에서 본인이 지지하던 문재인 후보가 낙선하자 뉴스나 미디어를 가까이 하기 싫어졌고,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일본 관련 책들을 탐독하다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일본편을 써야겠다" 라고 마음 먹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출판하는 창비 출판사에서 만들었던 팟캐스트 라디오책다방 시즌1 에서 유홍준이 직접 출연해서 한 말이다. 2018년에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산사순례 편도 출간하였다.

저서 중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만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명작순례", "유홍준의 국보순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등 다른 책도 많이 썼다. "명작순례"에는 신사임당, 정선, 김홍도, 장승업 등 잘 알려진 화가들을 포함해 조선시대부터 광복까지 주요 한국화가들을 항목별로 정리했다. "유홍준의 국보순례"는 한국에 있는 국보뿐 아니라 해외에 나가있는 국보급 유물도 정리한 책이다.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는 한국미술사 입문서이다. 한국미술사를 주요 유물 위주로 정리해 한국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했다. 특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고려불화나 조선시대 초상화에 대한 정보도 포함된 것이 특징.

이후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개인사를 솔직히 털어놓으며 한국 문화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고 문화재청장 재직 시절의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이외에 1박 2일 2011년 10월 16일, 10월 23일, 2012년 2월 5일 방송에도 출연했다. 황석영, 김용옥과 더불어 대한민국 3대 달변가라고 한다. 실제로 한번 말을 시작하면 끝이 없으나, 오히려 자신은 "황석영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고 스스로 말하고 다닌다.

2022년 11월에는, 문재인 정부 당시 광화문 집무실 이전을 추진했던 배경이 풍수지리였다고 주장했다. 청와대 자체는 괜찮은데 청와대 내 대통령 관저가 터가 안좋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당시 김정숙 여사가 무척 관저를 옮기고 싶어 했다고도 밝혔다. 윤석열 정부의 용산 집무실 이전에 대해서는 '임자가 싫다는데 어찌 할 수 없다. 집무실을 옮겨서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것 자체는 좋다'라고 하면서도 마스터플랜을 잘 세울 것을 주문했다. #

4. 박물관 입장료 부과 주장[편집]


2012년 11월 5일 방송된 MBC '놀러와'에서 유홍준은 "최근 돈을 내고 좋은 전시를 본다는 개념이 아예 없어져버렸다. 이제 우리 문화의 가치를 높여야 할 때다. 우리나라 경제 수준을 고려한다면 무료로 박물관을 관람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소신을 밝혔다.# 유홍준 교수는 중앙박물관 관람비를 더 받아야 한다면서 왜 문화재 보는 값어치를 스스로 평가절하하냐고 비난한 바 있다. 그가 들려준 일화로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온 적이 있는데 당시 2천 원이란 관람비를 2천 엔으로 듣고[10] 한국 돈으로 10배가 넘는 돈을 내고 들어왔다고 한다. 그들은 당연히 자국 중심문화재를 보여주고 보관하니 이 정도는 당연했다며 비싸다는 말도 안 했다고.[11]

유홍준이 이런 발언을 한 것은 턱없이 부족한 문화 관련 예산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의 주요 문화재들은 사실상 방치나 다름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CCTV가 없어서 문화재 절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 불과 몇 년 전의 현실이었다.# 이외에도 해외에 밀반출된 문화재들을 환수하는데도 최소 수백억 이상의 돈이 드는데 문화재청의 2012년 지출재정(예산 및 기금 지출규모)은 5,577억 원에 불과했다. 이는 정부 재정지출규모의 0.17% 수준이다. 대영박물관 등 해외 일부 박물관이 무료로 운영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박물관들은 기부금을 받는다. 특유의 위상 덕분에 기부금만으로도 운영이 돼서 무료로 개방하는 거다. 문화재청장 재직시절 숭례문이 불에 타고, 그로 인해 엄청난 지탄을 받았으니 이에 더 민감하게 뭐라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저 방송에서 한 '박물관 무료입장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음'이란 발언은 사실과 다르다는 점. 당장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나라의 국립 박물관보다 큰 워싱턴 DC스미소니언 박물관이나, 영국의 대영박물관은 입장료가 무료다. 영국의 경우 대영박물관뿐 아니라 스코틀랜드 국립박물관 등 대부분의 공공박물관은 무료다. 중국 역시 각 성마다 있는 주요 박물관은 모두 무료다. 또 해외에는 액수가 정해지지 않은 '기부금'만 내면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는 박물관도 많다. 반론을 보면 마치 대영박물관이나 스미소니언 박물관이 막대한 예산과 기부금으로 꿀을 빨면서 문화재도 보존하고 관람료도 무료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들 박물관도 정부의 예산삭감에 전시를 축소하거나 문화재 보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물론 한국보다 상황이 나은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이들이 예산이 풍족해서 관람료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청장으로서 저런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고, 논지를 강화하기 위한 선의의 과장에 가깝다.

또한 과연 관람료를 받는다고 해서 박물관 재정이 탄탄해질지는 확답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관람객들의 관람료에 대한 거부감과 박물관 또한 정부의 부처 중 하나로서 예산 경쟁의 측면에서 생각해 볼 문제가 많다. 우선 유홍준 말처럼 관람료를 1~3만 원 정도로 올리면 과연 지금처럼 중앙박물관이나 민속박물관 등의 박물관에 많은 관람객이 모일지 알 수 없다. 관람료 인상에 따른 관람객들의 거부감이 크다면 관람객 수가 감소해서 예산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고 일반 대중들에게 문화재를 공개함으로써 공익에 이바지한다는 박물관 본연의 취지가 훼손될 수도 있다. 중산층 미만 저소득층 이상의 애매한 서민 입장에서 관람료가 2만 원 정도로 껑충 뛴다면 문화생활은 엄두도 못낼 수도 있다. 또한 만약에 박물관이 관람료를 받기 시작한다면 다른 부처에서 박물관은 관람료도 받는데 이제 예산 좀 그만 타가도 되지 않겠느냐, 혹은 예산 삭감을 해도 할 말 없는 거 아니냐 고 나오면 오히려 예산확보에 어려움을 가져다 줄 수도 있다. 제한된 문화 관련 예산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은 박물관뿐만 아니고 예술영화, 출판, 공연, 순수 예술 등 각 예술 분야들도 각각의 정당성을 가지고 예산을 노리는 것은 마찬가지 처지이다. 관람료 인상에 따른 관람객 감소에 다른 부처의 견제로 예산이 삭감 된다면 오히려 박물관 예산이 축소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물론 앞서 말한 이들 박물관은 기부금이 많고 재정이 탄탄하니까 입장료를 무료로 받아도 되는 것이다. 대영박물관 입구에는 기부금을 받는 통이 따로 있다. 그런 소액기부자들도 나름 많을 뿐 아니라 거액 기부자들도 많기 때문에 운영이 되는 것인데, 애초에 기부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한국 상황에 이를 대입해서 입장료 무료로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건 헛소리에 불과하다.[12] 앞서 문화재청 관련 내용에도 적혀있지만 한국 정부의 문화 관련 예산은 매우 적다.[13]

그런데 유홍준의 저서를 직접 읽어보면 국립박물관 입장시 입장료를 받자는 주장이 단순히 문화재 관련 예산 확보 차원의 주장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런 부수적 이유도 있겠지만 말 그대로 문화재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심을 갖자는 차원의 주장이기도 하다. 실제로 경제학적으로 따져보아도 아무런 가격이 없는 상태(공공재의 비극)와 1~2,000원이라도 가격이 있는 상태는 수요곡선의 가격탄력성이 유의미해진다는 차원에서 상당히 다른 상황이다.


4.1. 반론[편집]


위에서 사례로 제시한 영국대영박물관은 다른 국가로부터 약탈한 문화재가 많아 국제적 비판 때문에 무료 입장을 진행함을 본인의 저서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밝힌 바 있다.[재반론]
또한 취약 계층이나 각종 현장 체험 학습 등을 위해 일주일 중 하루를 무료 입장이 가능하게끔 하는 방안도 제시하였다.


5. 비판[편집]



5.1. 권위주의적 행실[편집]


오동명 전 중앙일보 기자의 기록을 보면 행실이 매우 나쁘다.[14] 운동권 출신이지만 권위주의적 언행을 일삼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지인인 유력자에게 일러바쳐 그 사람이 자신을 가만 안 두겠다는 말을 듣게 하기도 했다.

다음은 오동명 기자가 <지식인 지도가 바뀐다>는 기사에 쓸 사진을 찍기 위해 유홍준을 비롯한 서울대 미학과 출신 9∼10명이 함께 모여 있는 대학로에 있는 한 기획사무실에 갔을 때의 에피소드다.

약속 시간보다 40분이 더 지나서야 유홍준 씨가 마지막으로 도착했고, 나는 그 분들께 좌석에 앉아 있는 모습보다는 문 밖 계단에서 촬영을 하면 여러분들의 모습을 한 장에 다 담을 수가 있으니 협조바란다고 정중히 부탁했다.

그때 유홍준 씨가 말했다. ‘여기에는 연출의 대가(연극 연출자를 말함)가 있으니 그 대가의 연출대로 사진을 찍도록 하자.’

나는 찍사라는 의미임을 모르지 않았으므로 조금 기분이 상했다. 그러나 참고, 연극 연출과 신문 사진 연출은 많이 다르니 제 부탁 좀 들어달라고 했다. 두어 번을 정중하게.

그러자 그 중 한 분이, ‘사진사 말 듣지’ 했고, 유홍준 씨는 또 ‘사진사가 아니야, 사진기자셔어!’ 하며 존칭어를 빙자해서 완전히 비아냥거리는 투로 얘기를 했다. 소위 우리 나라 문화 지식인의 한 중심에 서 있는 분이, 다른 사람도 아닌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이력을 자랑으로 삼고 다니는 사람이.

그러나, 나는 또 참고 문 밖에 나와 기다렸다. 몇 번을 다시 부탁했다.

두 분이 먼저 나와 보슬비가 약간 내리고 있는 계단에 서 계셨는데, 다른 분들은 내 부탁에 응하지 않고 여전히 자리에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문득 이들이 소위 우리나라를 이끌고 있는 ‘지식인 집단’인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지식인 기사에 나가는 사진입니다. 지금 여러 지식인들의 모습을 보니 예비군 훈련장이 연상되어지네요. 먼저 질서를 지키는 사람은 늘 손해를 보는……, 저기 두 분은 미리 나오셔서 비를 맞고 계시니 좀 서둘러주시지요’라고 빗대어 말했다.

그러자 비로소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끼어 내 옆으로 나오고 있던 유홍준 씨가 그 키 큰 얼굴로 작은 키의 내 몸집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마치 ‘조그만 놈이 까불어. 내가 너희 중앙일보의 높은 사람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데[15]

니가 어디서 함부로!’ 이런 눈빛이었다면 내 선입관일까.

대충 자리를 잡고 선 것을 확인하고 앞에 계신 분들처럼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해주시면 감사하겠다며 주문을 하자, 또 유홍준 씨가, ‘이 사람아, 이렇게 세워놓고 어떻게 자연스러울 수가 있나!’ 했다.

'조그만 놈이 까불어. 내가 너희 중앙일보의 높은 사람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데 니가 어디서 함부로!’' 부분은 기자가 기분이 상해 집어넣는 내용이라고 읽힐 수 있으나, 뒤의 내용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말썽을 피우고 다니나?” 국장실로 들어서자마자 편집국장은 나를 나무라듯 물었다.

“기자 생활 1, 2년 한 것도 아니고 눈치 빠르게 행동해야지, 그렇게 시끄럽게 일을 처리해서야 능력있는 기자라고 할 수 있나?

여기 저기서 전화 왔었다는 얘기 못 들었나? 내게 유홍준 씨가 직접 전화했고, 문화담당 국장도 전화를 받았다고 하고, 또 홍나희 이사장(삼성미술재단 이사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부인이며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의 누님) 바로 밑에서 호암미술관장을 지내고 지금은 이화여대 미술관장을 지낸다는 사람은 홍나희 여사를 아주 잘 아는데 귀하를 가만 안 놔두겠다고 벼르더군.

다음날 동아일보 사진기자는 상냥하게 말을 잘 듣더라고 하더군. 귀하가 걱정돼서 하는 얘기야!”

“저도 유홍준 씨가 저를 위아래로 훑어볼 때 그걸 직감으로 느꼈었습니다. 유홍준 씨가 다른 기자들에게 한 행태를 전부터 알고 있던 터라, ‘내게는 그렇게 안될 것이다’라는 선입관이 조금 작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굽히려 하지 않는 나에게 국장은 결국,

"일을 시끄럽게 처리하지 말도록 해!"

"죄송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편집국장 실을 빠져 나왔다.


편집국장실에 불려갔다 온 후, 문화부와 사진부 기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문화부의 한 차장 선배는, “오동명 씨, 큰일 한 번 치렀다며?”

“큰일은요.”

나는 머쓱해 하면서 말을 이었다.

“유홍준 씨라면 민주화 운동도 해서 1년인가 얼만가 감옥생활도 했다고 들었는데, 그런 사람이 내가 잘못을 했다면 후배뻘 되는 내게 그 자리에서 나무라든가 해야지 윗사람을 동원해서 가만 안 놔두겠다고 했다니 이게 어찌 민주화 운동을 한 사람의 행실일 수 있다고 봅니까? 그 알량한 을 믿고…….”

“오동명 씨가 정확히 봤소. 바로 그거야. 모두 가식이라는 거지.”

위에 나온 '다른 기자들에게 한 행태' 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체육부(레저팀)의 한 후배와 얘기중 유홍준 씨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대한 또 다른 사건을 들을 수가 있었다. 나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로구나 싶었다.

이야기인즉슨,전화가 걸려왔단다, 회사로.

‘나 유홍준입니다.’

다짜고짜로 전화로 이름만을 대니 당연히 기자는 예상 못한 경우 누군지 알 수 없질 않은가. 그리고 전화 통화시 상대방이 알 수 있게 자기를 소개하는 게 예의 아닌가.

‘예? 누구시죠?’

그러니 기자도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더욱이 한참 바쁠 때였단다. 그런데,

‘날 몰라요?’

이 말만 하고는 전화를 뚝 끊더란다.

그러나 이걸로 끝내지 않고 이후, 이 기자와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당시(1997년) 편집국장은, 신문사 기자가 자기(유홍준)를 모르고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는 항의 전화를 직접 받았다고 했다.

‘자네가 유홍준 씨를 무시했다는데, 그런가?’

"다짜고짜로 유홍준이라고 하니 전들 문화답사기의 그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었겠어요? 대통령이 내게 이름 석 자만 대고 전화를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물며….생각해 볼 겨를도 주지 않고 자기를 모르냐고 하며 전화를 끊어버리니, 이게 어찌 전화나 제대로 걸 줄 아는 사람인가 했어요. 계속 통화했더라면 문화기를 쓸 게 아니라 전화 거는 법부터 배워야겠다고 그 유씨에게 충고해 주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이 말을 듣고, 당시 편집국장 왈,

"아무 일도 아닌 일을 가지고…싱거운 사람이구만. 그런 것 가지고 전화는…"

하며 더 따져 묻지 않았다 한다, 그 편집국장은.

"이런 수준의 사람이 다른 분야도 아닌 우리나라 문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고 돌아다닌다고 하니, 더구나 인기도 많다고 하니 참으로 한심스럽기가 그지없다."


문화평론가 유홍준씨 때문에 내가 당한 이야기--내가 만일 편집국장이라면

이에 대해서 유홍준이 중앙일보 소속 잡지 계간미술 기자 출신이라 자신의 후배에게 똥군기를 부린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위 글을 읽어 보면 그 정도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강준만은 인물과 사상 2000년 6월호에 기고한 '유홍준과 오동명 - 엉터리와 진짜'라는 글에서 오동열의 글을 인용하면서 유홍준의 "'문화권력'으로서의 '권력과시'와 '권위주의'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썼다.# 후술할 성낙주와의 논쟁에서도 논쟁을 거부하고 비판 여론을 자신을 질투하는 자들의 음해 정도로 치부한 것도 강준만이 비판한 바가 있다. 여기에 유홍준 추종자들이 사실관계가 좀 틀리면 어떻냐, 아름다우면 그만 아니냐 운운하는 괴이한 옹호까지 해댔는데 이에 대해서 강준만은 "그야말로 큰일날 소리다. 아름다움만 느끼면 구체적 사실에 왜곡이 뒤따라도 좋다는 말인가?"라고 비판했다.

5.2. 조선총독부 청사 관련[편집]


1995년 구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를 전후할 때 그는 이와 관련된 사안에 대해 침묵을 지켜 비판을 받은 바 있었다. 그가 침묵을 지킨 게 당시 철거론자였던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장과의 학연을 무시 못했더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에 그는 월간 말 1997년 9월호에서 아래와 같이 항변했다.

이전 반대운동에 왜 동참하지 않았느냐고 하는데 고고학계는 그걸 했지만 미술사학계는 동참 안 했어요. 난 미술사학계고, 또 박물관 건물의 이전은 새로 지어서 옮기는 게 낫죠. 그런데 당시 그것은 정직한 주장이 아니었어요. 그 주장은 총독부 건물을 허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진짜 헐 것 같으니까 궁여지책으로 내건 주장이었고요. (중략) 총독부 건물은 헐어야 해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헐고 있는데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요. 그건 박물관 건물을 헌 게 아니예요. 총독부 건물을 헌 거지.

- 월간 말 1997년 9월호 p22~29. <권두인터뷰 : 유홍준(유홍준-안철홍 기자 대담)>


이에 소설가이자 재야사학자 성낙주 씨는 유홍준 교수의 항변에 대해 "도대체 문화유산을 지키는 데서 소속이 뭔 상관인가. 고고학계와 미술사학계를 편가름하는 것부터 가소롭거니와, 뭔 미술사학계가 자신의 과오를 지켜주는 방패라도 된다는 말인가"는 요지로 다음 달에 같은 잡지에서 아래와 같이 반박했다. 또, 같은 시기 <인물과 사상> 2권에서도 비슷한 의견을 냈다.

게다가, '정직한 주장'이 아니라니, 박물관 관계자며 대학교수 등 5천여 명의 지식인들이 오직 구총독부 건물을 보존하기 위한 위장 논리로 문화재 보호를 들고 나왔단 말인가. 또한 총독부 건물을 헌 것이라면, 그 안에 있는 십수만 점의 유물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논리인가. 지금 유홍준의 시계는 몇 시인가. 구시대의 유물인 권위주의 시계를 차고 이 혼돈에 찬 세기말의 시계를 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설사 미술사학계가 몽땅 침묵했다 치더라도, 언필칭(言必稱) 문화유산을 목숨처럼 사랑한다는 유홍준은 혼자라도 나섰어야 옳았다. 정작 싸워야 할 때 모르쇠로 있었으면 반성하고 자숙하는 것이 도리이거늘,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에 급급해 그분들을 매도할 수 없는 일 아닌가.

- 월간 말 1997년 10월호 p244~247. <'문화권력' 유홍준의 권위주의(성낙주 글)>


참고로 성낙주는 당시 창동중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전교조 활동으로 인해 탄압을 받은 재야 운동가 출신이기도 했다. 그는 인물과 사상 2권에 글을 기고, 유홍준의 업적에 대해서 칭찬하면서도 그가 학연주의에 근거하여 편파적인 인물 평가 기준을 제시했다는 비판을 한 바가 있는데, 유홍준은 성낙주의 비판에 대해서 자신을 질투해서 하는 궤변이라고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처음에 유홍준을 존경하는 마음에 성낙주의 글을 게재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를 표명했던 강준만이 깜짝 놀라서 성낙주를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16]

5.3. 각종 구설수[편집]



5.3.1. 효종 왕릉 버너 취사 사건[편집]


2007년 봄, 효종왕릉에서 국회의원들과 함께 버너 취사를 해 물의를 일으켰다. 행사의 진행 주체는 유 청장 본인이 아니었지만 비판 여론에 대해 "제사를 지냈으면 그 자리에서 잿밥을 먹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는 발언을 해 구설수에 올랐다. 물론 재실이 본래 제사를 준비하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취사 금지된 문화유적으로서의 재실에서 화기를 다루는 것은 다른 문제일 수 있다. 이는 이명박 정부 이후 영부인 김윤옥이 벌인 '박물관 만찬'이 물의를 빚으면서 재조명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이명박 정부 기간 동안 재임하면서 취사가 금지된 창경궁경복궁을 국빈 및 일반 단체의 식사와 행사 장소로 대여하는 것을 공식화하기도 했다. 사실 2005년께에도 고궁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창경궁 만찬 시 취사 허가 문제와 함께 밝은 광원 등의 화재 위험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고 화재 대비가 미흡했다는 이유, 주류 반입 문제 등으로 비판받은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유홍준 교수는 무릎팍도사 출연을 통해 "고궁에서 대접하는 것은 국빈대우"라며 국익에 이익이라는 주장을 폈다.[17] 자신의 관점에서 목조건물 같은 문화재는 출입통제 등으로 보존하기보단 사람이 계속 쓰면서 사람의 온기가 닿아야 보존에도 낫다고 인식하고 있는 듯.[18][19]


5.3.2. 낙산사 화재 관련[편집]


2005년 낙산사 화재 때의 언행도 논란이 되었다.

대형 산불로 소실된 강원도 양양군 낙산사에 대해서 "50년밖에 안 된 절 건물은 별거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고 소문이 돌아 큰 물의를 일으켰다. 다만 문제가 된 발언은 "6·25 때 다시 홀랑 타버린 절이 낙산사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절은 20세기 후반기, 대수롭지 못한 안목으로 치장하고 복원해 놓은 별 볼 일 없는 절집일 뿐이다."라는 발언인데, 이는 1993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02쪽에 쓴 내용이다.# 과거 발언이 문제가 된 것이지, 사건이 터지고 저 발언을 한 것이 아니다.[20] 2005년 낙산사 화재 때는 "침통함을 금할 수 없다. 낙산사 복원에 30억 원을 투입하고, 소실된 동종은 실측자료를 토대로 6개월 안에 복원하겠다."라고 발언했다. 이후 녹아버린 보물 479호 동종을 복원하면서, 동종 내부의 '낙산사 동종 복원기'에 자기 이름을 음각해 넣었다는 것이 밝혀져 다시 물의를 빚었다.$ 이에 대해서 통상 기록을 남기는 과정이라는 것이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21][22][23]


5.3.3. 수자기 관련[편집]


신미양요 당시 미 해군이 노획해 간 수자기[24]가 반환되었을 때 몇몇 인사들과 함께 맨손으로 유물을 만지기도 했다. 맨손에 묻은 땀이나 기타 몸에서 배출되는 물질들이 직물의 색상을 변질시킬 가능성이 있어서, 면장갑을 끼는 게 원칙이다.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2007102200623_3.jpg

다만 다른 기사에서는 면장갑을 끼고 수자기를 살펴보는 장면이 나왔다.# 사진을 봐서는 다른 직물과 색깔이 다른 부분을 살펴본 듯하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어 왜 맨손으로 뒤집어 봤는지는 알 수 없으나 면장갑을 끼고 살펴보는 것이 맞음은 분명하다.

이 문서 상단의 경력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유홍준은 본래 고고학이나 문화유산 보존, 복원쪽으로 정식으로 훈련받은 사람이 아니며 그쪽 실무로 커온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문화재청장 재임 중에 생긴 버너 취사, 고궁 화재 위험 무시, 문화유산에 자기 이름 새기기 같은 것 논란은 그 분야에 관한 무지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 시절의 낭만에 심취해 벌인 것이라 여겨질 만한 데가 있다. 그리고 지금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문화재청에 관련된 부정적 뉴스, 구설수들과 인사권자 눈치를 보는 관행을 생각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대통령이 임명하는 청장의 약점을 실무진이 보완해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


5.3.4. 현충사 발언[편집]


"현충사이순신 장군 사당이라기보다 박정희 기념관 같은 곳"이라는 발언을 했다가, 부적절한 표현이었다며 사과한 적도 있다. #

이에 대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현충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지적은 이미 존재했다는 반론이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순신을 기리는 공간을 대대적으로 정비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고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현충사를 왜색풍으로 복원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순신에 대한 진심어린 이해나 존경보다 겉면에 치중했다는 것이다. # 그럼에도 의도가 어떠했든, 일제시대 이래 오랫동안 잊혀져 방치되어 왔던 현충사의 재정비, 성역화에 박정희 대통령이 공헌했다는 점 역시 부정될 수는 없다.

5.3.5. 벌목 지시[편집]


여기에 전북대 박물관 앞에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30년 수령의 히말라야시다 나무를 잘라내 버리라는 지시를 했다고 하여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었다. # 박물관 직원들이 "나무가 박물관 유물과 경관을 가리고 있으며 주변 석물(石物)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하자, 두재균 전북대 총장은 "그러면 옮겨라"라고 말했고, 이에 박물관 직원이 "나무 뿌리가 깊어 뽑으려면 석물까지 옮겨야 한다"고 답하자, 유 청장이 "박정희 정권 시절 대규모로 식재된 나무로 박물관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베어버리시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유홍준 청장이 과거 박정희가 건립한 영남대학교에 10년간 재직하고 그곳 박물관장으로 3년간 지냈던 사실도 알려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보수층에서는 "광화문 복원 당시 유홍준 청장이 박정희가 쓴 한글 간판을 일방적으로 없애버린 것도 의도가 있지 않냐"며 민감하게 반응했다.[25]


5.3.6. 고려청자를 여대생의 엉덩이에 비유[편집]


2007년 5월 25일, 태안에서 주꾸미 통발 작업을 하던 어민이 고려 청자대접 1점을 발견한다. 이후 6월 초, 관계부처에서 현장 탐사를 갔다가 30여점 이상의 청자를 무더기로 발견했고 7월에는 상태가 좋은 고려청자를 230점 가량 발견한다. 그리고 7월 24일, 유홍준 청장이 참석한 가운데 태안군청에서 그동안 발견한 도자기 540여점을 공개했다. 그리고 유홍준 청장은 여기서 문제의 발언을 했다.#

"12세기까지 만들어진 청자는 풋풋한 여대생의 엉덩이와 같다. 그 이후에 만들어진 청자는 70대 노파가 푹 주저앉은 모양으로 바뀐다."

이 발언으로 유홍준 청장은 여성계가 그 해 꼽은 '꼬매고 싶은 입'에 선정됐다.


5.4. 지식 결여[편집]


추사 김정희를 다룬 [완당 평전]을 3부작으로 내놓았지만, 200군데 이상 오류가 있다는 지적을 받자, "나는 한문학자가 아니다. 출판 전에 각 분야 전문가들에게 감수를 받았지만, 그들의 얼굴에 먹칠할 수는 없어서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다"는 변명을 했다. 해당 도서를 절판한 걸로 보아, 자존심에 상당히 상처를 입은 것 같다.#
또 자신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일제 쇠말뚝 괴담을 쓰고 왕과 왕비의 침전에 용마루가 없는 이유가 왕이 곧 용이여서 또다른 용(용마루)이 왕을 누르지 않도록이라는 낭설을 작성했다.

2017년 JTBC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 강의 중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발언을 했다. 이는 오류인데, 현재 사학계에서는 훈민정음 창제는 세종대왕 단독, 혹은 세종과 그 직계 가족들이 이룬 업적으로 비정하고 있다. 다만 글자 자체는 세종이 창안하였어도 훈민정음에 대한 해설격인 해례본은 집현전 학자들이 집필한 것이 맞다.

또 해당 프로그램에서 사도세자가 의대증에 걸린 미치광이였으며, 이런 세자를 차기 임금으로 삼을 수 없기에 영조임오화변을 일으킨 거라 말했다. 이는 틀린 말은 아니나 사도세자가 아무 이유없이 미친것은 아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혹사에 가깝게 대한 것이 의대증의 원인이었다. 그리고 세손이 생긴 이후에는 세자보다 세손인 정조를 더 아꼈기에 세자를 제거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유 교수가 영조를 칭찬하는 논지의 말을 이어가는 중이었기에 일부러 영조의 흠을 가리고 반쪽의 진실만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6. 기타[편집]


  • 2003년 국립중앙박물관장 내정설이 떠돌자 학계에서는 거센 비판이 불었다.# 대중을 상대로 인기나 얻었지 유홍준의 학문적 업적이 다른 학자들에 비해 대단할 게 없다는 것. 유홍준은 미술사학자로 세간에 알려져 있지만 미술사학계에서는 유홍준의 저서를 읽거나 논문을 거의 참고하지 않는다. 당시 고고학계나 미술사학계 등에서는 유홍준이 아닌 다른 인물들을 거론했었지만, 결국 유홍준이 최종적으로 임명되었다. 보통 사람은 겉을 중시한다.

  • 2005년 문화재청장으로 재임 시 북한의 초청을 받아 정동영 당시 통일부장관과 함께 방북했을 때, 만찬장에서 북한 스파이 영화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 알려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26]

  • 숭례문 방화 사건 당시 출장 중이었다[27]는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숭례문 화재는 예측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들어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진 않다. 더군다나 본인 입장에서는 억울한 것이, 당시 숭례문은 문화재청이 아니라 서울시 관할이었기 때문이다.관련기사 다만 누군가는 책임져야 했기에 문화재청장 자리에서 사퇴했다. 차라리 평소 고궁을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니, 그렇게 개방하고 활용한 결과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 책임지고 사퇴해야 한다고 비판하는 쪽이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권에 밝힌 바에 따르면, 황지우 시인과는 친구 사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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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집으로 유명하다. 건축학자들에게는 상당히 잘 지은 건축으로 평가받으며, 월간 SPACE 선정 한국 현대건축 명작 19위에도 선정되기도 했다.[2] 시조 36세손 '濬'자 항렬[3] #[4] 5살 연하이며, 예능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부여편에서 유홍준과 같이 나왔다.#[5] 이미지가 전혀 그렇지 않지만 68학번 강경 운동권 출신이며, 김부겸, 손학규, 강창일 등 운동권 출신 정치인과 친한 사이이다.[6] 영남대학교가 어디에 있고, 초대 교주영남학원 이사장이 누구였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참 후덜덜하다.[7] 전두환 정권 때 어느 정도의 박정희 깎아 내리기는 허용되었다. 목적은 전임자 깎아 내리기를 통한 정권 안정 도모.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을 간접 디스하고 정의구현을 외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었다.[8] 그렇다 한들 당시 영남대학교가 사실상 누구의 것이었는지를 생각하면 상당히 흠좀무한 행보로 볼 수 있다.[9] 전유성유럽 배낭여행 때의 여행담을 쓴 책이다. 전유성 특유의 위트가 잘 살아있는데 남의... 와 나의... 이 두 책이 아주 무관한 건 아니다. 전유성과 유홍준은 서울청운초등학교 동창으로 서로 잘 아는 사이로, 대놓고 전유성이 유홍준의 책을 재미있게 패러디하며 자기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제목부터 대놓고 패러디고. 유홍준 자신도 패러디 센스에 감탄했다고 한다.[10] 한국과 일본의 화폐단위는 발음만 다르지 한자표기는는 똑같이 원(元)을 쓰고 잘못들으면 엔, 원으로 들릴만큼 비슷하기에 일어난 해프닝(...)[11] 일본의 주요 박물관 입장료는 2018년 기준 국립도쿄박물관이 일반 620엔, 국립교토박물관은 일반 1,500엔이다. 환율에 따라 달라지지만 외국 박물관 입장료가 설령 2천엔이라 해도 일본인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요금은 아니다.[12] 참고로 미국영국에서 스미소니언 박물관과 대영 박물관의 위상은 사실상 국립박물관과 같다. 사람들의 인식도 그렇고 말이다.[13] 한국미술의 국제적인 위상은 실상 매우 낮으며, 정부차원의 관심이 필요하다. 영국을 예로 자국의 미술역사가 짧고, 지명도가 낮음을 인지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동시대미술가를 양성하고 배출하고 있으며, 근현대, 중세 미술가도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발굴하고 있다. 미술가가 곧 대내외적인 자국문화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재반론] 그러나 대영박물관의 무료 입장은 문화재와 미술품의 공공성을 현실화 시키고자 하는 영국의 국공립미술 및 박물관의 전면적 무료화 정책을 따른 것이며 박물관의 소장품 역시 약탈 문화재로만 이루어져있지 않고 정당한 절차를 거친 문화재도 상당수이다. 이는 유홍준의 무지를 드러내는 혹은 자신의 주장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는 매우 잘못된 발언이다.[14] 이하의 내용은 오동명 전 중앙일보 기자의 저서, '당신 기자 맞아?'에 소개된 내용이다.[15] 유홍준은 중앙일보 소속 잡지 계간미술 기자 출신이다.[16] 강준만은 이후 인물과 사상 9권에서 당연히 유홍준이 논리적인 반박을 해올줄 알았는데 성만 내서 놀랐다고 술회했다.[17] 실제로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버킹엄 궁전이나 베르사유 궁전을 행사를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자국의 문화를 타국 정상들에게 소개하고 자랑하는 것은 이미 예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다만 우리나라 유적들은 이들과 달리 화재에 극히 취약한 목조건물이라는 특수성도 고려해야 한다.[18] 방송에서 그 사례로 든 것이 진주의 촉석루.[19] 문제는 촉석루가 조선시대 건물 그대로냐면 그건 또 아니다. 촉석루는 애초에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완전히 소실되었고, 1960년대 복원공사를 거친 1960년대산 새 건물이 되었다(...). 고로 '목조문화재 보존'을 이야기하는 예로는 잘못. 차라리 밀양 영남루 등을 예시로 드는 게 나았을 것이다. 이 쪽은 조선 당대 건축이 실제로 남아있으면서도 촉석루처럼 관람객이 들어가 앉는 누각 본연의 역할도 하고 있기 때문이다.[20] 유홍준의 생각이 틀렸다고 하기도 뭐한 것이, 고작 50년밖에 안 된 복원물의 문화재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건 이상한 것이 맞기 때문이다. 테세우스의 배의 역설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낙산사에서 유명한 건 돌담과 동종이다.[21] 실제로 과거에 복장한 유물을 다시 개봉한 뒤, 언제 개봉했다 다시 닫았다는 식으로 기록을 남기는 관습은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탑이나 불상에는 내부에, 건축물 등에는 대들보 등에 이런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도리어 기록을 남기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된다. 책임자 없이 발뺌하는 셈이 되기 때문. 또한 미래의 역사연구자들이, 언제 누가 이 유물을 손대고 고쳤는지 알 수 없게 된다.[22] 그러나 탑 · 불상 · 대들보는 반박의 적절한 사례로 아닌 것이, 이들의 경우 내부에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다가 부장물을 집어넣는 게 가능하나 동종은 그런 유형의 문화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탑의 사리공, 불상과 대들보의 빈 공간이야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원래 있었던 거니 그 안에다가 준공기 · 복원기 · 상량문 등의 기록물을 추가로 집어넣는 거야 별 문제가 안되겠지만, 낙산사 동종의 경우 그 자체에다가 자기 이름 석 자를 떡하니 남겨 놓았다는 게 문제. 이는 탑이나 불상 그 자체에다가 자기 이름을 새긴 것과 진배없다. 소정방? 광화문이나 숭례문 복원 때도 상량문을 대들보 내부의 빈 공간에다가 집어넣었을 뿐이지, 낙산사 동종처럼 벽이나 기둥에다가 복원 사실을 따로 음각하지 않았다. 현재 한창 진행 중인 미륵사지 석탑 보수도 작업 완료 후 그간의 과정이 담긴 기록물을 탑의 사리공 안에다가 집어넣으면 별 문제 안 되겠지만, 이를 탑 그 자체에다가 새겨 놓으면 당장 9시 뉴스에 나올 일이다.[23] 또한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니고 기록 남기는 거야 전산상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설사 물리적으로 뭔가 남겨야 한다고 쳐도 복원 사실이 기록된 푯돌 같은 걸 낙산사 주변에 조그맣게 세워 둬도 됐을 법한데, 아예 별개의 종을 새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옛 것 그대로 재현한 복원품에다가 이전의 동종에는 없던 자기 이름을 번듯하게 남긴 것은 이전에 그가 그토록 비판했던 권력자들의 자기 이름 남기기와 별다를 바가 뭐가 있겠는가.[24] 帥字旗. '수(帥)라는 글자(子)가 적힌 깃발(旗)'이므로 [수짜기\]로 읽는다. 사잇소리는 나지만 한자어이기 때문에 사이시옷을 적지 않는다.[25] 실제 유홍준 청장은 과거 민청학련 사건으로 곤혹을 겪은 적이 있었다.[26] 북한 영화 이름없는 영웅들 삽입곡을 불렀다. 그런데 정작 이 영화는 주체사상 예술 작법을 따르지 않고 소련식 리얼리즘 기법으로 촬영했다 하여 극작가가 숙청돼서 종적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김정일이 제시한) 주체예술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27] 당시 프랑스네덜란드 출장 중이었다. 루브르 박물관 한국어 음성 서비스 개통식 참석 때문에 프랑스에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