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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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암 불낙스 선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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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소속 선수
종목
이름
역할
등번호
농구
허재
감독
-
농구
현주엽
해설/코치
-
쇼트트랙
김기훈
선수
7
체조
여홍철
선수
15
유도/격투기
윤동식
선수
11
배구
방신봉
선수
5
축구
안정환
선수
19
테니스
이형택
선수
36
야구
홍성흔
선수
22
야구
김병현
선수
18
축구
이동국
주장/선수
20
격투기
김동현
선수
9
핸드볼
윤경신
선수
77
연예
김용만
선수
10
연예
김성주
중계/선수
6





파일:두산 윤경신 감독.jpg

두산 핸드볼단 감독
윤경신
尹京信 | Yoon Kyung-shin

출생
1973년 7월 7일 (50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숭덕초등학교 (졸업)
광운중학교 (졸업)
고려고등학교 (졸업 / 25회)
경희대학교 체육대학 (체육학 / 학사)
신체
203cm, 120kg
직업
핸드볼 선수 (라이트백 / 은퇴)
핸드볼 감독
소속
선수
VfL 굼머스바흐 (1996~2006)
HSV 함부르크 (2006~2008)
두산 (2008~2011)
감독
대한민국 핸드볼 국가대표팀 (2015~2016)
두산 (2013~ )

1. 개요
2. 선수 경력
3. 은퇴 이후
4. 평가
5. 수상 기록
6.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핸드볼 선수 출신 감독.

핸드볼-분데스리가 역대 최다 득점 및 최다 득점왕 기록 보유자다. 국제 대회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 국제핸드볼연맹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한 적도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1996년 독일의 핸드볼 1부 리그인 핸드볼-분데스리가에 진출했다. 2001-02 시즌까지 5번의 득점왕을 차지하며 역대 최고의 골 스코어러 모습을 보여줬지만 그의 팀 VfL 굼머스바흐는 매번 중하위권에만 머물렀다. 그런데 그 다음 시즌부터 중상위권으로 순위가 오르더니 2005-06 시즌에는 3위를 기록했다. 그런데 이 때 윤경신은 득점 10위에 그치며 다소 폼이 떨어졌고 시즌이 끝난 뒤 HSV 함부르크로 이적했다. 그러나 다음 시즌에는 새 팀 소속으로 완전히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비록 분데스리가 우승은 득실차로 아깝게 놓쳤지만[1] 유럽의 컵 대회 챔피언들이 참가하는 EHF 컵위너스컵에서 우승했고, 윤경신은 두 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한다. 2007-08 시즌이 끝나고 2008년 7월에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2011년 6월까지 실업 팀인 두산 핸드볼선수단에서 활동했다. 2008년 두산 베어스 야구단 시구를 맡기도 했다.

독일에서 활약하는 동안 분데스리가 통산 최다 득점(2905골),[2] 분데스리가 최다 득점왕(7회)을 기록하며 독일 핸드볼 역사상 가장 뛰어난 골 스코어러로 자리매김했다. 그뿐 아니라 약체 팀인 대한민국 대표 소속으로 올림픽 단일 대회 최다 득점(2004년 58골), 세계선수권 3연속 득점왕(1993, 1995, 1997)이라는 기록을 남겼으며, 세계선수권 올스타 팀에도 두 차례(1995, 2001) 선정되었다. 또한 2001년에는 국제핸드볼연맹 IHF에서 선정하는 올해의 선수상수상했다. 참고로 한국은 IHF 올해의 선수상 수상자를 4명 배출했는데, 남자는 1989년 강재원, 2001년 윤경신, 여자는 1989년에 김현미, 1996년 임오경이 받았다.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한 덕택에 현지인도 따기 어렵다는 독일 운전면허를 취득했고 굼머스바흐 5년차에는 주장까지 맡게 된다. 함부르크 SV를 떠나 대한민국으로 복귀할 때는 함부르크 팬들이 윤경신을 꼭 잡아야 한다고 집회를 열었으며 상당한 아쉬움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3. 은퇴 이후[편집]


2011년 6월 두산과 계약이 만료된 후 계약 조건에 이견을 보여 재계약하지 않았고 2012 런던 올림픽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완전히 은퇴할 때까지 올림픽 국가대표팀의 플레잉 코치로 일했다. 2012 런던 올림픽에 핸드볼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해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단의 태극기를 들고 입장하는 기수를 맡기도 했다. 아마도 세계적으로 명성이 가장 높은 한국의 운동선수인데다 국제 대회 출전 경력도 길어서 기수를 맡은 것으로 보인다.

선수 겸 플레잉 코치로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예선에서 대한민국은 전패를 당해 아쉬움 속에 은퇴하게 되었다. 올림픽 이후 2012년 9월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2013년부터 두산 핸드볼 팀의 감독을 맡고 있다. 그리고 2015년 2월 6일 핸드볼 국가대표팀 감독에 공식적으로 선임되어 두산 핸드볼 팀 감독직과 겸임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남자 핸드볼이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출전권 획득에 실패하고 아시아선수권에서 6위에 그치자, 2016년 2월에 국가대표팀 감독에서 사임했다. 그럼에도 "나라가 부르면 가야 한다. 대한민국 핸드볼에 힘이 될 수 있다면 국제위원 등 행정 분야를 맡겨도 피하지 않겠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국대 감독을 맡을 때 대표팀 선수들이 체육관에 도착하면 국민의례부터 하도록 했다고 한다.

2021년 4월 25일 뭉쳐야 쏜다 - 전설들의 농구대잔치에 용병으로 출연했으며, 5월 2일 분에서 정식 멤버로 합류했다. 현재 최장신 멤버 답게[3] 상당한 경기력을 자랑하며 활약하고 있다.[4] 핸드볼계의 레전드답게 은퇴 후 몸무게 20kg 이상 늘어난 상태에서도 코트 전체를 읽는 눈이 뛰어나고, 타고난 압도적 신체조건의 유리함도 리바운드나 골밑 몸싸움에서 잘 살리는데다가, 특이하게도 핸드볼과 무관한 부분인 농구 슛 정확도[5]와 골 결정력마저도[6] 뛰어나다. 고질적 무릎부상 문제로 지구력과 속도가 약하지만, 다른 부분들이 아마추어 농구계의 평균을 아득히 넘어가므로 가히 아마농구계의 서장훈급. 사실 축구 이벤트 때도 김동현보다 뛰어난 골키퍼 능력을 보여줬다. 30년전 고등학생일때 이미 태릉에서 농구나 배구 감독, 코치들이 종목 전향[7]을 설득하러 찾아왔었다는 이야기가 진짜였음을 보여주는 엄청난 운동신경이다.


4. 평가[편집]


윤경신을 한국 역사상 최고의 핸드볼 선수로 평가하는 시각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세계 무대로 옮기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국 언론이나 그가 출연한 방송에서 그를 "핸드볼계의 리오넬 메시, 마이클 조던"이라 표현한 소개 문구가 알려지며 그를 세계 핸드볼계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득점 기록만을 본다면 역대 최고의 골 스코어러로 볼 여지는 있겠지만 핸드볼도 다양한 선수 포지션과 대회가 있으며 전체적인 여론이 GOAT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당대 수위급 핸드볼 선수 중 한 명이자 역대 최고의 한국인 핸드볼 선수인 건 사실이다.

2010년, 실제로 국제 핸드볼 연맹 IHF에서 만 명이 넘는 팬들을 대상으로 역대 최고의 선수에 대해 설문을 했지만 윤경신은 거론되지 않았다. 또한 여러 외신들을 찾아보면 대부분 윤경신의 이름은 없다. 다만 윤경신이 활약했던 독일 내의 언론 중에 10여 명의 선수 중 한 명으로 언급하는 경우가 있다.

윤경신이 기록에 비해 저평가 받는 모습은 그의 수상 경력에서도 드러나는데 중하위권 팀 소속으로 여러 차례 리그 최다 득점을 기록했는데도 독일 올해의 선수에 단 한 차례도 뽑히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국제 대회에서도 여러 번 득점왕을 기록했음에도 MVP에 선정되지 못했다.[8] 세계 올해의 선수를 한 차례 수상하긴 했지만 이를 2회 이상 수상한 선수들이 있고 우리나라 내에서도 또 다른 수상자가 있다.

축구에서 비슷한 위상의 선수를 찾자면 게르트 뮐러라고 볼 수 있다. 뮐러 또한 분데스리가 득점왕 7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4회, 월드컵 득점왕 1회 등 많은 득점 타이틀을 갖고 있었고 연간 최고의 선수에게 주는 발롱도르도 한 차례 수상했으나 기록에 비해서 저평가 받는 모습이 윤경신과 상당히 일치한다.[9]

이러한 평가를 받는 원인 중 가장 큰 걸림돌은 윤경신이 속한 클럽과 국가대표팀의 성과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유럽 핸드볼 최고의 클럽을 가리는 EHF 챔피언스 리그를 한 번도 우승하지 못 했고, 분데스리가에서도 우승을 경험하지 못 했다. 국가대표로서는 아시안 게임에서 5개의 금메달을 획득했지만, 세계선수권과 올림픽에서 순위권에 들어본 적도 없다. 팀 성적이 좋지 않으면 소속 선수들이 낮은 평가를 받는 모습은 핸드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단체 구기 종목에서 흔히 볼 수 있다.[10]

핸드볼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포지션이 팀의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는 센터백인 점도 한 몫을 한다.[11] 윤경신의 포지션은 라이트백인데, 레프트백/라이트백도 후방에서 상대 선수들의 마킹을 이겨낼 수 있는 우수한 피지컬과 장거리 슛이 가능한 파워가 요구되기 때문에 그만큼 어려운 포지션인 것은 맞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경험과 전술 이해도를 바탕으로 팀원들을 지휘하는 센터백에게는 평가가 밀리는 분위기다. 핸드볼의 센터백은 농구로 비유하면 포인트 가드라 볼 수 있다. 또한 축구의 골키퍼가 저평가를 받는 반면, 핸드볼에서는 골키퍼도 어려운 포지션이라 평가 받고 그만큼 가치를 인정받는다. 핸드볼은 세계 올해의 선수로 골키퍼를 선정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나온다. 다른 종목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결국 선수가 맡은 롤에 대해서도 평가가 들어가며, 득점 기록만 가지고 선수들을 비교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또 다른 원인은 핸드볼의 대회 구조에도 있다. 한 나라에 한정된 리그에서의 활약만으로 역대급 평가를 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가장 먼저 클럽 핸드볼은 국제 대회보다 화제성이 떨어진다. 클럽 팀에서 우승을 많이한 선수도 국제 대회, 특히 올림픽 금메달이 없으면 GOAT로 거론되지 않는다. 거기다 클럽 핸드볼 내에서도 각국의 리그 상위 팀들이 참가하는 챔피언스 리그가 존재하며 축구와 비슷한 환경이다. 리그 하위권 팀 소속이었던 윤경신은 챔피언스 리그에서 활약하지 못했다. 독일의 핸드볼 리그가 스페인 리그와 함께 압도적인 수준을 가진 것은 맞으나, 세간의 관심이 하나의 프로 리그에 집중되어 있는 농구, 야구와는 다르다는 뜻. 이 때문에 윤경신이 리그에서 역대급 기록을 세웠음에도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 언론이라도 거론된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 기사에서도 같이 거론 되는 선수들 중에 리그 우승 한 번 못 해본 선수는 윤경신이 유일하다.[12]


5. 수상 기록[편집]


아시안 게임
금메달
1990 베이징
단체전
금메달
1994 히로시마
단체전
금메달
1998 방콕
단체전
금메달
2002 부산
단체전
금메달
2010 광저우
단체전
아시아 선수권
금메달
1993 마나마
단체전
금메달
2000 구마모토
단체전
금메달
2010 베이루트
단체전
금메달
2012 지다
단체전
은메달
1995 쿠웨이트
단체전


6. 여담[편집]


  • 동생 윤경민도 핸드볼 선수로 활동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4번의 올림픽에 형제가 둘 다 출전했다. 단, 2012년 대회는 윤경신은 플레잉코치로 출전했다.
  • 현역 시절 등번호인 77번은 자신의 생일인 7월 7일에서 따왔다고 한다.
  • 유재석이 '천하제일 외인구단'을 진행하던 시절, 윤경신과 6:1로 매치를 가진 적이 있다. 결과는 처참한 패배. 심지어 골대 앞에서 반대편 골대로 골 넣기를 시전해 외인구단팀을 벙찌게 만들기도 했다. 다만 보기와는 다르게 핸드볼에서는 흔한 일이긴 하다. 비단 윤경신이 아니라도 한 팀이 수적열세 상황(서스펜스)이라면 골키퍼를 빼서 공격인원 숫자를 6인으로 채워 맞추는데 이때 만약 상대편 골키퍼가 잡아서 막아내면 기습적으로 슈팅을 던진다. 핸드볼 종목 자체가 골대가 경기장의 크기에 비해 큰 편이다보니 이런 상황이 자주 나온다.
  • 모 영화감독이 방황하던 중학생 시절, 골목에서 친구들과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선배인 윤경신에게 걸려서 귀뺨을 얻어맞은 적이 있다고 한다. 감독의 회술로는 정신을 잃을 뻔한 충격이었다고 언급했다.
  • 아시안 게임 5회 금메달로 5차례나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병역 문제를 해결해 준 점 때문에 스포츠 팬들 사이에선 합법적 병역 브로커라고 불리기도 했다.
  • 대학 시절 대학 농구 동아리 소속으로 경희대학교 농구부와의 농구 시합에서 시합을 승리로 이끌 정도의 뛰어난 기량을 선보인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경희대학교 농구감독이던 최부영 감독이 "왜 저 친구가 핸드볼을 하고 있냐"고 땅을 치며 아쉬워했다는 일화가 있다.
  • 뭉쳐야 찬다 66화에 용병으로 출연했으며 용병을 포함한 역대 출연진 중 최장신이다. 이후 개편된 후속작 뭉쳐야 쏜다 12화에 용병으로 출연이 예고되었다. 그리고 베이스 라인에서 반대편 림으로 바로 던지는 슛을 성공시키며 엄청난 피지컬을 자랑했다.[13]
  • 뭉쳐야 쏜다 12화에 용병으로 출연하여 팀이 득점한 34점 중 22점을 득점하고, 두 자릿수 리바운드를 잡아 더블 더블을 기록하는 괴물 같은 활약을 했다. 상대팀은 윤경신 한 명을 막기 위해 2~4명씩 달려드는 것이 예사였다. 그야말로 동네 농구계의 샤킬 오닐[14]이었다. 당황한 상대 교사팀은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15] 팀 전체의 기량 차이로 상암불낙스가 석패했다. 경기 초반 트레블링 바이얼레이션[16]에 자주 걸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경기가 중단된 틈을 타 윤경신이 심판에게 트레블링을 문의하는 모습이 지나갔는데 그 이후 트레블링에 걸리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뭉쳐야 쏜다 13화부터 고정으로 들어갔으며 등번호는 77번이다. 프로그램이 종료된 시점에서 윤경신은 용병으로 출연한 선수 중 유일하게 정식으로 합류한 선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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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적은 우승 팀과 동일했다. 득실차에서 밀려 준우승으로 마무리했다.[2] 통산 득점 2위 선수는 2875골을 득점한 덴마크의 라스 크리스티안센(Lars Christiansen)이다. 이 선수의 경우 윤경신과는 달리 비교적 단신에 가까운 182cm이었다. 그래서 몇몇 이들은 라스를 인간승리의 표상으로 치켜세우기도 한다.[3] 그가 합류하기 전까지는 前 배구선수 방신봉이 최장신이었다.[4] 사실 203cm이면 현재 KBL에서도 거의 최장신급 사이즈이며, 동호회 농구에서는 거의 하승진급 규격외 사이즈라고 볼 수 있다.[5] 자유투도 아마농구 기준 평균 이상일 정도로 좋다.[6] 급박한 상황에서 골 밑에서 슛까지의 과정이 탁월하다.[7] 당시 프로리그가 있기 전이었지만 국내 실업리그 구조상 국내에서 같은 위치일때 농구나 배구선수가 핸드볼선수보다는 경제적으로는 유리했던 게 사실이다. 연봉 및 스폰서부터 여러가지가 달랐다.[8] 1995년, 2001년 세계선수권에서 올스타 팀에 선정된 적은 있다.[9] 차이점이라면 뮐러는 개인 기록 뿐만 아니라 팀 성적도 최고 수준이었다. 뮐러가 저평가 받는 원인으로는 화려하지 못한 플레이 스타일과 자신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은 동료 프란츠 베켄바워의 존재가 있었다.[10] 농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윌트 체임벌린은 7번의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개인 기량으로는 동시대의 선수들을 압도했다. 하지만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라이벌인 빌 러셀이 무려 11번의 NBA 챔피언을 차지하는 동안 단 2번 밖에 우승하지 못했다. 그래도 체임벌린은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뽑을 때 보통 5위 안에 든다.[11] 핸드볼 GOAT로 거론되는 이바노 발리치와 니콜라 카라바티치, 20세기 최고의 선수인 탈란트 두이셰바예프도 모두 센터백이다.[12] 여기서 말하는 리그는 독일, 스페인 등 유럽 개별 국가의 프로 핸드볼 리그다. 윤경신도 한국 리그에서는 우승한 적이 있다.[13] 참고로 이 장면이 나오기 전인 4월 22일에 NBA에서 조엘 엠비드가 시간이 부족하자 리바운드를 잡은 직후에 바로 윤경신처럼 원핸드로 슛을 던져 버저비터를 노렸고 이는 아깝게 림 안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득점에 실패했다. NBA에서 이름 날리는 선수조차 쉽게 할 수 없는 플레이인 만큼 절대 넣기 쉬운 상황이 아닌데 이것을 단 한 번에 넣은 윤경신의 피지컬이 얼마나 사기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더군다나 이 테스트의 성공 조건도 골을 넣는게 아닌 림이나 백보드를 맞추는 것이었다.[14] 시합 내내 자막에서 슬램덩크 채치수를 빙자한 윤치수라고 표현했는데, 실제로 슬램덩크의 채치수는 197cm인데 반해 윤경신이 203cm라 더 크다.[15] 피지컬 테스트에서 그 매직히포 현주엽마저 몸싸움으로 가볍게 밀어내는 압도적인 피지컬을 일반인으로 구성된 아마추어 팀 사람들이 막을 방법은 전혀 없다고 보면 된다. 힘만 센 것이 아니라 신장도 203cm로 프로농구 선수 센터급, NBA 기준으로도 파워 포워드급의 신장인지라 로우포스트에서 공을 잡으면 속수무책이었다.[16] 과거에는 워킹 바이얼레이션이라고 불렀으며 핸드볼에도 비슷한 반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