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선 피습 사건

덤프버전 :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
2. 사건
3. 수사 및 선고
4. 영향



1. 개요[편집]


1946년 2월 21일 저녁 당시 서울특별자유시 중구 명치정[1]에서 만주국의 관료였던 윤명선 등이 홍성우, 김필순, 김필수, 유정석, 김지양 등 조직폭력배들에 의해 강도살해당한 사건. 윤명선의 살해는 해방 후 혼란스러웠던 사회를 반영한 사건이었으며 치안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2. 사건[편집]


윤명선은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로서 조선총독부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하였고 이후 만주국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건국공로장, 건국대전기념장을 수여받으며 관료로서 승승장구하게 되었으며 해방 직전에는 젠다오 성 차장까지 역임하였다. 일제가 패망한 후 그는 귀국 후 경성에서 머물게되었다.

1946년 2월 21일 윤명선은 친구인 안익조와 함께 술을 마신 후 서울시 중구 명치정 조선취인소 부근에 도착하였다. 당시 거리 부근을 거닐고 있던 조직폭력배들인 홍성우, 김필순, 유정석, 김지양 등은 이들을 발견한 후 강도를 행하게 되었다. 폭력배들은 먼저 안익조를 폭행한 후 그의 시계를 강탈하였다. 이에 안익조는 시계를 강탈한 자들을 추격하였다. 그 사이에 강도들은 윤명선을 폭행하였다. 윤명선은 이후 중구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뇌진탕으로 인해 사망하고 말았다.[2]


3. 수사 및 선고[편집]


사건이 일어난 후 서울 제6관구 경찰서는 범행이 일어난 중구 명치정과 황금정 일대를 수색하였다. 경찰은 수사 끝에 범인을 밝혀내어 범인들의 아지트와 이들이 있던 카페와 술집 등을 급습하여 모두 검거하였다. 당시 이들의 취조는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이 직접 맡을 정도로 많은 주목을 받은 사건이었다.

이들 조직폭력배들에게는 모두 별명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홍성우의 별명은 "꺽쇠", 김필순의 별명은 "떼부", 유정석의 별명은 "청수", 김지양의 별명은 "땅딸보"였다. 경찰은 수사를 통해 이들이 이전에도 강도행각을 수차례 일삼았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후 이들은 대규모로 범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고 대상을 찾기 위해 거리를 거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된 것이 바로 윤명선이었던 것이다. 법원은 최종 공판에서 홍성우에게 징역 20년, 김필수에게 징역 5년, 김지양에게 징역 8년, 유정석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였다.[3]


4. 영향[편집]


광복 후 한반도는 일제 치하에서 눌렸던 각종 불만들이 미군정 하에서 폭발하며 혼란이 일어났으며 민심 또한 안 좋은 상황이었다. 신탁통치는 이러한 민심을 폭발시켰으며 대규모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한국민주당의 대표 인사였던 송진우마저도 신탁통치에 대해 호의적 발언을 했다 암살되었다. 미군정이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윤명선 피습 사건이 일어났으니 민심은 흉흉해졌으며 치안에 대한 염려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미군정과 수도경찰청은 경계와 검문을 더욱 강화하게 되었고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2 10:57:42에 나무위키 윤명선 피습 사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현재의 명동[2] "윤명선씨 살해 악당 타진", 자유신문 1946년 2월 24일자 제2면[3] "윤명선씨 살해범 언도", 자유신문 1946년 4월 10일자 0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