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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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尹致昊 | Tchi Ho Yun[1]


파일:1510_500.jpg

이름
윤치호 (尹致昊, Tchi Ho Yun)[2]
이토 치코 (((とう((こう)
출생
1865년 1월 23일
(음력 1864년 12월 26일)
충청도 천안군 모산면 새말
(現 충청남도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신촌(新村, 새말))
사망
1945년 12월 6일 오후 4시경 (향년 80세)
경기도 개성부 고려정[3] (現 개성시 고려동)
뇌일혈중풍, 노환으로 인한 사망
직업
교육자, 정치가 등
주요 경력
독립협회 회장
독립신문 제2대 사장
한성부 판윤
외무부 협판
학무부 협판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펼치기 ・ 접기 】
본관
해평 윤씨(海平)

성흠(聖欽 또는 成欽)

좌옹(佐翁)
종교
유교 (성리학) → 기독교 (개신교, 장로회)
학력
중서서원[1]
밴더빌트 칼리지
에모리 대학교 신학과
소속

작위
조선귀족 남작[박탈]
가족관계
아버지 윤웅렬
어머니 전주 이씨
3처 2첩
슬하 6남 9녀
저서
윤치호 일기》(尹致昊 日記)
《좌옹 윤치호 서한집》(佐翁尹致昊書翰集)



파일:external/photohs.co.kr/PIC195.jpg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교회 소재 초상화

1. 개요
2. 소개
4. 가계
5. 저서
8. 애국가 작사자 논란
8.1. 부정론
8.2. 긍정론
9. 기타
10. 미디어
11.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나는 어느 당파에도 속할 수 없습니다. 문제의 양면을 너무 많이 보니까요.

–1884~1905년, 유길준과 교류하며 나눈 대화.[4]

대한제국일제강점기의 친일 성향 교육자, 정치가, 번역가, 개신교 운동가, 계몽 운동가, 언론인.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신민회, 청년 학우회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자(字)는 성흠(聖欽), 호는 좌옹(佐翁), 본관은 해평(海平).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 신자이자 초기 개신교의 세례교인이다.


2. 소개[편집]


개화파독립신문사의 창립 인사 중 중 한명이자 제2대 사장이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통해 계몽 운동, 민권 운동, 의회 설립 운동을 벌였으나, 황제에게 불충하는 역적 취급을 받고 민중들의 배척을 받게 된다. 그에 따라 민중을 경멸하였고 노선을 변경하여 실력 양성론에 매진하다가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청구구락부 사건, 일본의 미행과 내사 등을 계기로 결국은 친일로 전향하였고 이것이 죽음에도 영향을 줬다.

서재필, 안창호, 유길준 등의 계몽론자와 맥을 같이하였으나 한국의 무질서와 감성주의, 사농공상, 문존무비 사상에 염증을 느껴 서서히 계몽 운동을 포기하게 된다. 비슷한 시대의 흑화한 계몽론자였던 박중양, 이규완과도 다소 달랐다. 그와 성향이 비슷한 인물로 박중양이 지목되지만 박중양은 조선인의 가능성 자체를 철저하게 부정했다. 윤치호는 교육 사업, 자선 사업, 언론 계몽 활동 등으로 민도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규완은 참정권과 자치권을 요구하고 참정권과 자치권을 얻으려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윤치호는 이규완의 실력 양성론과는 유사했지만 조선인 스스로 참정권과 자치권을 행사할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윤치호의 삶은 양면성을 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외무협판 등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고 193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는 중추원 참의 자리를 회피하거나 사양하는 등 일제에 비협조적인 자세로 일관했다. 한국의 구습을 혐오하고 자기식 합리주의를 유지하면서 비이성적인 일반 백성들을 비웃었지만 동시에 안타깝게 여기고 동정하여 계몽운동에 힘썼다. 비도덕적이고 부패한 한국의 식자층을 혐오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친분을 쌓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고 관련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내용과 존재를 누설하지도 않았지만 협조하지도 않았다. 미국의 강력한 힘과 일제 식민 통치의 악랄함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청년 시절 당한 인종차별백인 혐오에 눈이 멀어 합리적인 판단을 상실하고 일제에게 협조하였다. 민중과 국본을 수탈한 일제의 통치를 꺼리면서도 말년엔 일제의 위협에 어느 정도 굴복하였고, 서구의 합리주의를 찬양하면서도 서구를 적대시했다. 독립운동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면서도 독립운동가들과 행보를 같이했고, 사후에는 이러한 이중적 행적을 근거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올랐다.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살려 번역가로도 활동했는데 '찬송가의 한국어 번역본'[5]과 1908년 '걸리버 여행기', 아이소포스의 '이솝 우화'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한국인들에게 소개하였다.


3. 생애[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윤치호/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가계[편집]


3처 2첩[6]을 두었으며 자녀가 많아서 6남 9녀를 뒀다. 자녀들에게는 저마다 영어식 별칭을 함께 지어주었다.[7] 이걸 보면 가계도가 굉장히 복잡하게 나온다.


  • 차남 봉선(1897 ~ 1897) : 일찍이 요절했다.

  • 3남 광선(1898 ~ 1950?) : 영어식 이름은 리드 캔들러(Reid Candler). 독립운동가 남궁억의 딸 남궁자경과 결혼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낙농업과 체육계에서 일했고 광복 이후에는 미군정에서 통역일을 하다가 피랍되어서 북한에서 지내다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딸인 윤자희와 결혼한 사위 김명호가 개성시 인민 위원장을 역임했으므로 북한에서도 상당한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4남 장선(1920 ~ 2005) : 영어식 이름은 워싱턴 모트(Washington Mott). 외교부에서 일했으며 윤치호 기념 사업회를 총괄했다.

  • 5남 기선(1921 ~ 2013) : 영어식 이름은 램부스(Lambuth). 음악 쪽에서 일해서 연세대학교서울대학교에서 음대 교수를 지내기도 했으며 이후 미국에서 음악 활동을 하다가 미국에서 죽었다.

  • 6남 정선(1928 ~ 2008) : 영어식 이름은 조셉(Joseph). 역시 미국에서 거주했다.


5. 저서[편집]


  • 《우스운 소리》[8]
  • 《영어문법첩경》(英語文法捷徑): 영어 문법 사전[9]
  • 《좌옹 윤치호 서한집》(佐翁尹致昊書翰集)
  • 《유학자취》(幼學字聚)


5.1. 윤치호 일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윤치호 일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尹致昊日記》. 1883년부터 1943년까지 일기를 썼다. 이 중 1905년 1월 1일부터 1912년까지의 일기는 105인 사건으로 조선 총독부에 압수된 뒤 실전되었다. 윤치호는 처음에는 일기를 한문으로 쓰다가 영어를 배운 직후에는 영어 실력을 기르기 위해 자신의 일기를 영어로 썼다. 영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유창한 영어 일기를 썼다고 한다. 이후에는 한국어로 영어를 번역해 봤자 비슷한 단어가 없다는 이유로 계속 영어로 일기를 썼다.[10] 그의 일기에서 윤치호는 민족 계몽을 위해 필요에 따라 찬송가나 이야기 등을 조선어로 번역하면서도, 영어의 훌륭한 표현을 잘못된 조선어(bad Corean)로 옮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매우 불만스러워하는 기록을 여러 차례 남겼다. 특히 노래를 번역하면서 그랬는데, 윤치호는 본인이 그렇게 시적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중간중간 수감 생활이라든지 국내외에서 터진 대형 사건들로 인해 글을 쓸 정황이 아니었던지 등의 이유로 일기가 끊긴 적이 있지만 윤차호는 무려 60년의 세월 동안 죽기 직전까지의 꾸준히 일기를 작성했다. 그의 일기는 한국 근대사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자료이다. 인간 됨됨이가 어찌되었던 간에 <윤치호 일기>는 매우 꼼꼼하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의 일기가 죄다 영어 아니면 한자라는 것. 거기다가 영어로 저술한 부분은 필기체로 날려썼기 때문에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그의 일기를 정확하게 읽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러한 번역상의 난해함, 분량 덕분에 윤치호 일기는 아직도 국내에 완역이 되지 않았다.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는 미국 유학 시절(1892년)까지의 일기가 번역 및 출판되어 있다. 여기에는 당시의 사회 경제적 상황, 시사 이슈, 정치적 사건에 대한 윤치호 본인의 정보 수집 및 의견이 담겨 있어 시대사 연구에 유용하게 쓰인다. 미국 유학시에 쓴 일기는 19세기 말 서양에 건너간 한국인을 연구하는 관점에서 읽어도 재미있으며 문학 사상사에서 일제강점기 시기 일기 중 중요 대목을 발췌 번역한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라는 이 나와 있다.


5.2. 번역서[편집]


윤치호는 1908년 번역서로 처음 이솝 우화의 첫 한글 번역판과 걸리버 여행기를 한글로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했다. 찬송가를 한글로 번역하여 찬미가라는 이름으로 소개하였다.
  • 《찬미가》(讚美歌)
  • 《의회통화규칙》 (라버츠 저)
  • 이색우언(伊索寓言)》(한글 번역본) (1908년)
  • 껄늬버유람긔(葛利寶遊覽記)》(한글 번역본) (1908년)[11]


6. 어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윤치호/어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사상적 측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윤치호/사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8. 애국가 작사자 논란[편집]


윤치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오랜 논쟁 중 하나가 바로 애국가의 작사자 논란이다. 이전부터 작자 미상으로 분류되던 애국가의 작사자가 윤치호가 아니냐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고는 했다. 안창호와 함께 애국가의 작사자로 추정되는 인물 중 1명이다. 윤치호 작사설에는 여러 문헌적 근거가 있지만 본인의 친일 행적에 발목이 잡힌다. 반대로 안창호가 작사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안창호 스스로가 애국가 보급에 힘썼다는 점은 있으나 확실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증거가 없고 안창호 설은 후대에나 나왔다는 문제가 있다.

애국가 작사되었다고 추정되는 당시 안창호가 윤치호 이름을 내세워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안창호와 윤치호가 애국가 가사에 대한 의견이 갈려 토론하는 것을 봤다는 증언, 대성학교의 원장과 실무자 관계였다는 점, 변절이후에도 안창호에 대한 우정과 협력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는 점을 들어 공동작사이나 당시 상황 때문에 윤치호의 이름으로 공개했으며 이후 서로가 처한 상황 때문에 원작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히지 않고 침묵하게 되었다는 공동작사설도 있다.[12]



8.1. 부정론[편집]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가 맞다는 주장의 대표적인 증거로 미국 에모리 대학에서 보유한 윤치호 친필 애국가 가사와 1908년 발행한 찬미가라는 책이 제시된다. 친필 애국가 가사에는 1907년 작사했다고 나오며 본인이 쓴 것은 확실하지만 문제는 작성 연도가 1945년 9월이라는 점이다. 이 시점은 윤치호가 친일파로 극딜을 당하던 시점이라 신뢰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찬미가는 직접 책을 쓴 것이 아니라 역술한 것으로 명기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 윤치호 작사자 설을 지지하는 측은 역술도 폭넓게 저작자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주장하나 다른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에도 본인의 순수한 창작이 아닌 것을 역술로 표기했다고 반박하고 있다. 찬미가에 수록된 노래 가사들은 대부분 의역한 미국 찬송가들이 수록되어 있는만큼 애국가 작사자라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만약 윤치호가 애국가 작사자라면 방대한 <윤치호 일기> 속에 애국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도 상당히 수상한 대목이다. 윤치호 자신이 친필로 적은 시점으로 주장한 1907년은 물론이고 어느 시점에서도 애국가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3.1 운동에 대해서 윤치호는 철없는 것들이 독립운동한다고 난리친다고만 적었을뿐 정작 당시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른 것에는 전혀 언급도 없다. 과연 자기가 작사한 노래라면 아무 감흥이 없을 수가 있을까? 하다 못해 "내가 왜 저런 노래 가사를 써서 무지몽매한 민중을 선동당하게 만들었나?"라는 식으로 태클이라도 넣어야 정상적일 것인데 말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 찬성 측은 일제의 감시 때문에 말도 못 꺼낸 것이라 반박할 수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제가 자기네들에게 협조하던 윤치호의 일기까지 검열할 정도는 아니었다.[13]

찬성 측에서는 미주 지역에서 애국가에 대해 '윤치호가 작사하고 안창호가 크게 개선했으며 안익태가 곡을 붙였다'라는 자료를 제시하고 1950년대 한국 정부에서 발간한 자료에서 윤치호를 작사자로 명기하고 있는 자료를 제시하기도 하나 이것 역시 의문의 대상이 된다. 애국가의 정확한 작사자를 알지 못해서 가장 인지하기 쉬운 윤치호를 작사자로 생각했을 수도 있으며 정부가 윤치호 작사로 명기한 자료가 있기는 하나 수십 년 동안 작자 미상으로 정부가 공식 입장을 정한걸 생각해보면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만만치않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윤치호 작사설이 나오게 된 배경은 '윤치호가 안창호와 함께 애국가 보급 운동에 참여했던게 와전된게 아니냐'는 추정을 하고 있다. 윤치호가 말한 1907년이라는 시점은 윤치호가 안창호와 함께 교육 활동을 하던 시점인데 안창호는 학교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교육을 장려하고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윤치호가 1908년 발간된 찬미가에 애국가를 수록한 것도 해명이 될 수 있다.


8.2. 긍정론[편집]


1908년 발간된 찬미가(찬송가)[14]와 윤치호의 친필 애국가 뿐만 아니라 여러 증거가 있다. 일정 시기 소위 무궁화 곡[15]이 수록된 창가집에서 윤치호 작사로 되어 있으며 조선총독부에 제출된 보고서에도 윤치호 작사로 되어 있다.# 미국에서 발견된 무궁화 노래집을 보면 무궁화 곡의 작사자는 윤치호로 되어 있다.[16]

애국가 창작 열풍도 대한제국 시기 독립신문을 시작으로 있었고 이 결과물로 1902년 나온 것이 대한제국 애국가이다. 실제로 널리 퍼진 것은 대한제국 애국가 이전 창작된 곡들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애국가는 그렇게 불린 곡 중에서 특히 유명했던 곡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런데 역시 유명했던 1880년대 배재학당 버전 무궁화가 등은 황제황실을 찬양하는 부분이 들어가 있었는데 공화주의를 천명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게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정식으로 선택된다.

만약 정말로 윤치호가 쓴 것이라면 작곡을 한 안익태 역시 명백히 친일파로 분류된 인물이기 때문에 애국가라는 노래 자체가 친일파들이 합작으로 만든 노래가 되버리는 상황이니 논란이 있을 수 있어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작사자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로서는 긁어 부스럼 날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광복 후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애국가 작사 조사 위원회'를 발족하여 사실상 윤치호라는걸 확인했으나 "작자 미상"이라 결론짓고 급히 조사를 마친바 있다. 당시 신문을 보면 정부에서는 친일파인 윤치호 작사로 결론 짓느니 차라리 미상으로 놔두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작사자로 안창호, 최병헌 등은 자세한 언급조차 없었다.

1896년 배재학당 학생들이 최초로 가창한 이후 120여 년[17],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비준을 받은 1940년으로부터 기나긴 세월 동안 친일파들의 창작물을 독립국의 국가로 사용했다는 것부터가 한국 국민들로서는 치욕일 수 밖에 없으며 국가 브랜드 이미지에도 치명적이다. 한국 정부가 인증한 시기만 따져도 사용 기한이 100년을 향해 달려가는 안익태ㆍ윤치호 애국가를 바꾸는 사안도 전혀 간단치 않은 문제인데 윤치호는 정부가 공인하고 낙인을 찍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윤치호의 작사를 정부가 인정해버리면 필연적으로 애국가 교체 논란이 불거질 수 밖에 없다. 새로운 가사의 공모 비용과 보급, 국민들을 향한 재교육, 새 작사가의 사상 검증 건도 만만치 않으며 접수받은 신버전 애국가 중 특정 하나를 국민들로부터 동의를 얻는 것도 너무나 고단한 일이다.[18]

이는 위에서 언급된 것처럼 이미 광복한 직후 1950년대부터 나오던 논란인데 당시에도 있었던 논란을 반 세기가 넘게 지난 오늘날까지도 아직도 덮으려고만 하는 것은 이러한 속사정이 있던 것이다.[19] 그래서 정부, 학계의 주류 사학자들, 근현대 역사 관련 시민단체들도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지 않고 애국가의 작사자를 '미상'으로 남겨둔 채 조용히 넘어가려는 것이다.



9. 기타[편집]


  • 윤치호는 이완용을 혐오하였는데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까진 함께 하던 이완용은 다른 을사오적과 함께 한일 합방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윤치호완 달리 이완용은 민권운동에도 관심이 없었다.[20]

  • 윤치호는 유길준, 서재필, 안창호, 이상재, 이승만 등과 자주 어울렸다. 그러나 유길준과 이상재는 일찍 사망했고 필립 제이슨, 안창호, 이승만은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려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에 혼자 남게 되었다. 특히나 안창호와 각별했다고 추정되는데 <윤치호일기>에 안창호가 여러 번 지역 감정을 드러낸 기록 등 사사로운 담화의 기록이 많이 남겨져 있고, 1930년대 안창호가 중국서 체포되어 강제 송환 및 감옥에 수용되자 안창호 구명 운동에 힘쓰며 끈질긴 노력 끝에 병보석을 할 수 있었다. 이런 행동에 대해서 김활란 등 친일파들은 윤치호를 비난했지만 윤치호는 보석 이후에도 안창호의 완치를 위해 병원비를 지원하였고, 투병 끝에 안창호가 사망하자 그의 가족들이 미국에 있어 장례를 치룰 사람이 없자 본인이 돈을 들여 안창호의 장례를 치루어주고 수 일간 통곡하는 등 오랜 친구로서의 모습을 보인다.

  • 을미사변 당시 그는 유길준의 초대를 받아 파티장에 가서 만찬을 했다. 그러나 유길준은 당연히 나타나지 않았다. 뒤에 윤치호는 명성 황후 암살의 배후에 조선인 협력자가 있음을 폭로하면서, 명성황후 암살의 조선인 협력자 중 거물급 인사로 자신의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유길준을 지목했다. 윤치호는 명성 황후가 암살당하던 날 유길준이 자신을 초대했던건 명성 황후를 암살하는데 방해가 될까봐 움직이지 못하도록 일부러 자신을 만찬에 초대했다고 주장하였다.

  • 고종 독살설도 처음에는 불신하였으나 먼 친척이기도 한 윤덕영의 양심없는 행동들[21]을 보면서 고종 독살설에 윤덕영의 가담 여부를 다소 모호하게 기록하면서, 일기에는 능히 '그러고도 남을 놈'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 윤치호는 나혜석박인덕의 이혼을 공개적으로 변호할만큼 초기에는 여성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기성 권위주의에 반발하는 딸과 주변 여성들의 행실을 보고 여자에게 교육이 필요한가 하며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기도 했다. 이복 동생 윤치창이 미국으로 가는 것도 손원일 전 국방 장관 여동생이자 제수인 손진실이 꼬신 것으로 파악했다.

  • 파일:yoon_tree.jpg
윤치호의 가문은 당대 대다수의 권문세가들이 그러하듯 다수의 친일파를 배출했다. 해평 윤씨 문서 참고.

  • 해방 이후 줄곧 친일파 내지는 소극적 협력자로 취급되다가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와 2009년 대한민국 친일 진상 규명위에서 그를 '전시 체제기(일제 강점기 3기) 때 적극 협락한 친일파' 분류로 선정했다. 이유야 어떻든 윤치호는 조선총독부 중추원직을 지냈다는 점과 제국 의회 칙선 의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법원에서도 조선총독부발 중추원 참의직에 있다는 것 그 자체를 '친일 행위'로 인정하고 있다.# 다만 이를 "윤치호는 인간말종의 일제 앞잡이였다!"로 보면 곤란한데, 이에 대해선 친일반민족행위자 문서의 논란 문단 참고. 물론 윤치호를 높게 평가하는 이들도 친일파였던것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한편 김승학이 펴낸 「친일파 군상」에선 윤치호는 역시 매국노까진 아니지만 '친일과 전쟁 협력이 옳지 못하고 잘못되었다는 것임을 알고도 이를 묵인하고 방조한 자', 즉 소극적 친일파로 분류되어 있다.#

  • 윤치호의 텍스트가 궁금하다면 매일신문, 경성일보의 라이브러리에서 윤치호가 기고한 글들과 담화문, 관련 기사글 수백여건을 열람할 수 있다. 특히 1943년을 전후로 해서 윤치호와 연관된 것이 많다. 이외에도 2010년대 중반 전후부터 윤치호에 관련된 다양한 학술서나 서적이 국내 출판 시장에 출간되고 있다.

  • 오늘날 학계에서는 새로운 시각으로 윤치호를 해석하는 시각도 나타난다. 다만 윤치호가 자유주의자[22]라거나 그의 친일 행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고, 본인들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친일행위를 했던 다른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친일 동기와는 달리 윤치호는 본인의 소신껏 친일을 했으며[23] 독립운동과 제국주의 열강들에 대해 다각적인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에 탐구할 가치가 있는 흥미로운 주제로 여겨진다. 2001년 연세대학교에선 "그의 일기조차 제대로 읽고 검토되지 못한 현 상황에서 본서는 한국 근대사 연구를 진작시키고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위해 기획되었다."며 좌옹 윤치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600여쪽에 달하는 <국역 윤치호 일기>를 펴냈으며, 같은 해 역사비평사에서 펴낸 <윤치호 일기: 한 지식인의 내면세계를 통해 본 식민지 시기>는 학계의 변화 기류를 잘 보여주는 서적이다. 이후 꾸준히 여러 대학과 전국 동아시아 역사 관련 연구소에서 윤치호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들어, 한국학중앙연구원 노상균 박사(現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속)는 2018년도 『한국학』 저널에 투고한 <방관과 친일 사이: 윤치호의 3·1 운동 인식과 대응>에서 "그간 연구에서 윤치호의 3·1 운동 반응 가운데 주로 ‘거부’의 측면만을 주목하고 ‘연민', ‘전유’ 등 윤치호의 다른 반응들은 간과함으로써 그의 인식 및 행동의 전모와 복합적인 성격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며 3·1 운동을 중심으로 윤치호의 인식틀, '독립'과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 기독교 신앙이 끼친 영향 세가지 측면에서 윤치호에 대해 포괄적으로 접근하였다. 이렇듯 학계에선 윤치호를 그렇게 변하게 만들었던 시대적 상황에 대한 객관적 이해와 윤치호 개인에 대한 고찰의 필요성이 어느정도 공감되고 있다. [24]

  • 대중적으로는 자국혐오 성향의 사람들에게 옹호받는 인물이다. 원래부터 민중 혐오와 엘리티시즘으로 무장한 발언들을 내뱉고 다닌 사람인지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변호되고 합리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국까가 2010년대 중반 이후 확산되면서 윤치호의 인종 혐오 어록들도 끊임없이 소환되어 한국인을 폄하하는데 활용되고 있다.

  • 박노자는 윤치호에 대해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을 역사인물'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처럼 국내외를 막론하고 굵직한 역사 인물들과 조우했던 윤치호의 이력이 상당히 특이하고 흥미로운 데다, 급변하던 근대 사회 속 경계인으로서 윤치호의 삶이 여러 인간적인 갈등과 한계를 보여주어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줄 것이기 때문이라고. 다만 윤치호에 대한 대중의 전반적인 인식이 그렇게 좋지 않다는 점, 윤치호를 포함한 여러 역사 인물들의 후손들이 아직 살아있어 영화 제작 내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일인 듯하다. 당장 그의 아들이나 친척들이 윤영선, 윤보선. 윤치영, 윤일선 등 쟁쟁한 사회 원로들이다 보니 윤치호의 일기에 나온 그대로 가감없이 묘사하기에는 여러 사회적 어려움이 있는 상황이다.


10. 미디어[편집]


  • 일본의 대문호 마츠모토 세이초(松本 清張)의 소설「북의 시인, 임화(北の詩人)」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해방 후 윤치호의 친일 행위에 격분한 어떤 조직에서 암살했는데 가문에서 그걸 숨기고 있다고 적고 있다. 이 작품 자체가 임화의 미군정 스파이설을 주장해서 논란이 된 작품이다.

  • 한국의 태사령의 대체역사 소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이역만리 본국에 있는 성상의 뜻을 헤아리며 한영관계를 이끌어가는 야심만만한 주영공사로 활약한다. 대한제국이 국민개병을 이뤄냈고 자주독립을 성취하였으며 청나라로부터 남만주를 확보해 러·일·미·영·프·독 등 열강들의 무리에 속해있는 만큼 회의주의 따윈 온데간데 없이 자신감 넘치고 열정적인 모습이다. 같은 미국 유학파이자 급진적인 젊은 외교관 후배 이승만과는 죽이 잘맞는듯. 원 역사대로 백인들에게 차별당한 것은 똑같아 아시아인들을 멸시하는 제국주의 열강 소속의 백인들에게 감정을 품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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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중추원 의장
大韓帝國中樞院議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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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2] 1872년생 이완용(李完鎔)으로 1858년생 이완용(李完用)과 동명이인임. [3] 1927년 파산자로 선고되어 조선귀족령 제8조 1항에 따라 1928년 2월 29일부로 자작의 예우가 정지되었지만 자식이었던 조중수에게 자작 작위가 승작됨.[4]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협조해 습작 불능 처리됨.[5] 재산 분쟁으로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오등작일제강점기 조선귀족에 공작은 없었으며, 그에 준하는 작위와 관련한 정보는 왕공족 문서 참고.※ 취소선 표시는 작위를 박탈당한 인물을 뜻함.
작위 박탈 사유 [ 펼치기 · 접기 ]
  • 윤치호 : 1913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에 따라 작위 박탈
  • 김사준 : 1915년,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에 연루되어 작위 박탈. 신한혁명당의 간부 중 하나인 성낙형이 고종을 망명시키고자 했는데, 김사준이 이를 수락하고 실행에 옮기려다 일제에 발각되어 김사준을 비롯한 고종 망명 사건 관련자들 다수가 검거
  • 김윤식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이용직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민영린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김병익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민태곤 : 1941년 12월, 도쿄에서 조선민족독립운동 사건으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고종의 경복궁 탈출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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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을미사변 · 삼국간섭 · 을미개혁
전개
1차 시도 (춘생문 사건) · 2차 시도 (아관파천)
관련 인물
정동파
이범진 · 이완용 · 이재순 · 이윤용 · 안경수 · 윤웅렬 · 윤치호 · 이하영 · 민상호 · 김홍륙 · 임최수 · 이도철 · 남만리 · 이규홍
친일 내각
김홍집 · 유길준 · 어윤중 · 김윤식 · 조희연 · 장석주 · 정병하 · 서광범 · 김종한
기타 인물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 이진호
관련 장소
아라사 공사관 (서울 구 러시아 공사관) · 미국 공사관 (서울 구 미국 공사관) · 경복궁
기타
한러관계 · 조선 · 대한제국 · 러시아 제국 · 미국 · 일본 제국 · 독립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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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취소선 쳐진 인물은 독립협회에서 제명된 인물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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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정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Yun Chiho[2] 본인이 일기장이나 외국인에게 보내는 서한 등에 이렇게 표기했다.[3] 대한민국의 이북5도 행정구역은 이 행정구역에서 부(행정구역)시(행정구역)/대한민국로, 정(町)동(행정구역)으로 변경한 경기도 개성시 고려동이다.[4] Kenneth M. Wells, New God, New Nation : Protestants and Self-Reconstruction Nationalism in Korea, 1896-1937,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0, p. 69[5] 찬송가의 처음 번역된 이름은 찬미가였다.[6] 본처인 전주 강씨, 청나라 출신인 마애방, 백매려. 2명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아들의 출생 순서를 고려할 때 재혼은 없다.[7] 윤치호 본인의 은사나 주변 지인들의 이름에서 따서 짓는 경우가 많았다.[8] 원 명칭은 우순 소리이다. 이솝 우화의 내용 중 일부를 실었다.[9] 윤치호가 손수 번역한 문법용어들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주어/술어’를 ‘주장사/설명사’로, ‘타동사/자동사’를 ‘월과동사/불월과동사’로, ‘조동사/본동사’를 ‘보조동사/원동사’로, ‘1/2/3인칭’을 ‘아인/미인/피인’으로, ‘가정법’을 ‘만약법’, ‘accent’를 ‘고성점’, ‘apostrophe’를 ‘소유점’으로 부르고 있다. 문장의 형식으로는 1~3형식까지만 인정하며, 4형식과 5형식은 인정하지 않고 1~3형식의 응용형으로만 본다. 문장의 통사론적 구조를 시각화해서 보여주기 위해, Tree Diagram이 나오기 전 영미권 언어학계에서 자주 쓰였던 Reed-Kellogg 다이어그램을 일부 개량한 형태로 곁들여서 설명한다는 점도 눈에 띈다. 책의 예문에는 윤치호의 성향상 기독교적 예문들이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일부 반일적으로 보이는 예문들도 들어가 있는데, "I am a Korean and you are a Japanese.", "Korea, and not the Koreans, is what they want." 등이 그 예시다. 이 책은 교과서로 인가받지는 못했으나 민간에서 널리 읽혔다고 한다.[10] 윤치호는 영어 사전까지 만들지는 않았으나 영어 단어를 소개하고 문법을 기술한 준 영어 사전급인 《영어문법첩경》을 1911년 저술한 적이 있다. 이 책을 통해 그는 미국에 처음으로 한국의 민담들을 전래하기도 했다고 한다.[11] 단, 최남선이 최초 번역자라는 설도 있다.[12] 독립운동 당시에도 원작자가 누구인지 논란이 있었으나 서로 누가 원작사자인지 침묵했다.[13] 그러나, 자기 집안 치부에서는 침묵 그 자체이었던 수준이다보니, 찾지 못 하는 것이 당연한 것도 고려해야 한다.[14] 총 15곡이 수록됐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다수가 번역곡들이였으나 애국가와 가사가 거의 동일한 무궁화 곡 및 애국가 계열 3곡만 고유명사가 사용된 번역곡이 아니였다.[15] 가사가 현 애국가와 거의 같다[16] 무궁화 노래집에는 안창호의 '한반도가' 등이 같이 수록되어 있다.[17] 심지어 이 때는 안익태의 작곡 대신 올드 랭 사인의 곡조와 윤치호의 가사만 있던 시절이었다.[18] 주소지를 바꾸는 도로명주소 하나만으로도 2014년 시행 후 6년이 지난 2020년까지도 진통을 앓고 있는 것이 현 대한민국이다. 하물며 국가의 작사가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의 공표와 교체는 후폭풍이 어느 정도나 될지 가늠조차 힘들다.[19] 한편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라는 논란에 3.1 운동이 태극기, 선언서, 애국가로 시작했으니 작사자는 문제될 것 없다고 발언했다.[20] 이완용이 만민공동회에 참여한 것은 어디까지나 초기이고 이 만민공동회 역시 관민 공동회에 관원의 자격으로 참가한 것이다. 애초에 독립협회도 정부의 영향이 강하던 시기, 고종과 대립하던 시기 등을 쪼개서 봐야하며 그 배경 역시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21] 순종황제의 아내인 순정효황후 윤씨는 한일 합방 도장을 찍지 못하게 하려고 옥새를 치마에 숨겼는데, 이걸 삼촌인 윤덕영이 강제로 빼앗아 갔다. 그 뒤로 윤덕영은 시종원경과 귀족원 의원을 지내고 자작 작위를 받았다.[22] 일각에서는 윤치호를 반공주의 자유주의자로 보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윤치호는 무엇보다 전체주의 국가에 충성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자로 절대 볼 수 없으며, 그의 동양주의 사고관은 다이쇼 로망이나 아시아주의에서 근거한 것이 아닌 철저한 인종론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생전 민중 혐오와 우생학에 가까운 인종 혐오 발언과 서술을 쏟아냈으며, 이러한 것은 결국 합리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당시의 편협한 사고관에 갇힌 근대 시기 인텔리의 한계를 보여준다.[23] 이 부분은 박중양의 친일적 사고관과 비슷하다.[24] 이밖에도 윤치호가 직접 참여하거나 개인의 소회를 저술한 영역은 스포츠, 양의학, 유학, 장례문화 등 워낙에 방대하기 때문에 사학자들이 아닌 문학, 사회학, 기독교계, 예체능계 등지에서도 주목하고 있다. 다만 열거한 분야들에 전문성이 있던 것은 아니고 단지 한때는 민권운동을 하였던 그였기 떄문에 인텔리 계층의 근대 개념 인식에 대해 탐구하는 방향으로 연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