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시스 S. 그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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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18대 대통령
율리시스 심슨 그랜트
Ulysses Simpson Grant


파일:Ulysses_S._Grant.jpg

출생
1822년 4월 27일
미국 오하이오 주 포인트플레센트
사망
1885년 7월 23일 (향년 63세)
미국 뉴욕 주 윌턴
재임기간
제18대 대통령
1869년 3월 4일 ~ 1877년 3월 4일
서명
파일:율리시스 그랜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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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제시 루트 그랜트
어머니 해나 심슨 그랜트
배우자
줄리아 그랜트
자녀
프레더릭 그랜트
율리시스 그랜트 주니어
넬리 그랜트
제시 루트 그랜트 2세
학력
미국육군사관학교 (졸업)
종교
개신교 (감리교회)
신체
175cm, 108kg
소속 정당

군사 경력
임관
미국육군사관학교 (1843년 임관)
복무
미합중국 육군
1839년 ~ 1854년
1861년 ~ 1869년
최종 계급
대원수[1] (미합중국 육군)
주요 참전
미국-멕시코 전쟁
남북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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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생애
2.1. 유년기
2.2. 군인과 민간인 시절
2.2.1. 우직한 전략가 그랜트 - 남북전쟁 시기 그랜트의 행보
2.3. 대통령 시절
2.4. 대통령 퇴임 후
2.5. 파산과 회고록
3. 기타
4. 매체에서



1. 개요[편집]


Although a soldier by profession, I have never felt any sort of fondness for war. And I have never advocated it, except as a means of peace.

나는 군인이 직업이었지만, 전쟁에 어떠한 호감도 가진 적이 없다. 그리고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닌 전쟁을 옹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1]

미국의 제18대 대통령.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총사령관으로서 북군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때문에 남군의 총사령관이었던 로버트 E. 리와도 자주 비교된다. 대통령 시절에는 장군 시절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미국을 분열의 위기에서 구하고, 재건의 기반을 닦은 점을 인정받아 지금도 미국 50달러 지폐 모델로 기념되고 있다. 생전 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였으나, 사후 137년이 지난 2022년에 대원수(General of the Armies)로 추서되었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오하이오에서 가죽 가공업자인 제시 그랜트와 농장주 집안 출신인 한나 심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말수가 적고 혼자 노는 걸 좋아할 정도로 내성적이었고, 을 잘 다루었다고 한다. 본명은 침례회에서 받은 세례명을 붙인 하이럼 율리시스 그랜트(Hiram Ulysses Grant)다. 허나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고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는데, 사관학교 입학을 위해 추천서를 받은 지역 연방 상원의원이 추천서에 이름을 율리시스 심슨으로 잘못 기재한 것이다. 하지만 한 번 기재된 이름을 고치려면 굉장히 번거로웠기 때문에, 그랜트는 할 수 없이 잘못 적힌 이름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랜트는 근본적으로 전쟁이나 군대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관학교를 자퇴할 생각까지 했지만 나중에는 적응했던 모양이다. 본인도 나중에 자서전에서 "싫은 것도 많았지만, 좋은 것은 더 많았다"라고 회고했다. 싫어했던 것은 행진과 같은 군사활동, 좋아했던 것은 독서. 책도 군사관련 서적보다는 문학작품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다만 승마술만은 대단히 뛰어나서, 그가 말을 타고 세운 점프 기록은 이후 25년간 깨지지 않았다고. 의외로 친구도 그럭저럭 사귀었는데, 1명은 나중에 그의 처남이 되었고, 다른 1명은 나중에 적장으로 만나게 되는데 그의 이름은 제임스 롱스트리트.[2] 입학한 후 4년 후인 1843년에 평범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하게 된다.


2.2. 군인과 민간인 시절[편집]


그랜트의 인생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부분은, 자신은 전쟁을 혐오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한 곳은 전쟁터였고 평상시에는 그 재능을 보일 기회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이 발발하자, 그랜트는 이 전쟁이 '부도덕한 전쟁'이라 비판했지만, 재커리 테일러가 지휘하는 원정부대에 선발되었고, 여기서 대단한 지휘능력과 용기를 보여주며 대위로 승진했다. 사관학교 시절 동료들을 놀라게 한 승마술은 여기서도 위력을 발휘하여, 서부영화에나 나올 법한 말옆에 매달려 몸을 숨기는 기술을 실전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경리장교 역할로 돌아온 그랜트는 늦은 진급과 낮은 급여 때문에 우울증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린다. 그랜트는 "아내가 농장주의 딸이고 나도 가공업주의 아들로 경제 사정이 크게 나쁘지 않았음에도, 서부 오지에 파견되어 가족도 못보고 20~30달러의 빠듯한 월급으로 살림을 이어나가는 것이 절망스러웠다"고 말년에 회고하였다. 특히 그랜트가 근무한 서부는 당시엔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오지라서 돈이 있어도 구할 물건이 없는 수준이라, 개발된 도시에서 살던 그랜트가 불만스러울 법도 했다. 게다가 이땐 미국 정부도 서부가 사람들이 기피하는 지역임을 알아서, 사실을 왜곡하여 "서부에 가면 잘 살 수 있다"는 식으로 홍보하였다. 이걸 믿고 온 민간인들과 군인들은 말 그대로 된통 낚인 셈. 그래도 이 외중에 파나마[3]에서 대규모로 말라리아가 번지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효과적으로 수습하면서 나름 명성을 얻기도 했다.

허나 경리장교로서의 그랜트는 서부의 열악한 환경에 시달리는 와중에 가족과 떨어져 복무해야 하게 되자 우울증과 술 중독이 더 심해진다. 대낮에도 술에 취해서 금화 개수조차 제대로 셀 수 없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고, 결국 그랜트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벌받을 것인지 퇴역할 것인지의 갈림길 앞에 선다. 더 이상 군인으로 생활하기 힘들었던 그랜트는 32세에 퇴역을 선택한다. 당시 미국은 상비군의 규모가 작고 처우가 열악해서 유능함의 여부와 상관없이 다수의 장교가 초급장교 근무만 마치고 퇴역하였고, 그랜트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4]

그러나 그랜트의 선택은 미국 북부에나 그랜트 본인에게나 행운이었다. 만약 그랜트가 서부에 계속 남았다면 군인으로서 그랜트의 업적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1860년대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직전까지 퇴역을 신청하지 않은 서부의 연방군 장교 상당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에서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능하다고 정평이 난 장교들은 처우가 좋은 동부로 차출되었지만 당시 그랜트의 경력을 감안하면 동부로 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전쟁 내내 서부에서 술만 마시며 금화를 셌을 확률이 높은 운명이었다. 하여튼 그렇게 예비역이 된 그랜트는 몇 년 동안 다양한 직업에 도전하지만 결국엔 모두 실패로 끝난다. 그래도 그는 가족들에겐 헌신적인 가장이라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자신의 주머니 시계를 팔기도 했다.

이때 그랜트는 장인에게 노예와 땅을 받아 노예노동 농장을 경영할 뻔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1858년 가을, 말라리아에 걸려 농사를 포기할 상태가 되자 장인이 노예를 보내준 것. 하지만 강경한 노예폐지론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노예주의자도 아니었던 그랜트는 차마 노예에게 일을 시킬 수 없었고, 결국 받은 노예를 다음해 봄에 풀어주고 말았다. 참고로 그랜트의 아내인 줄리아는 켄터키 출신으로, 아버지가 노예주였다. 반면 그랜트의 아버지는 강경한 노예폐지론자여서 결혼할 때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다만 켄터키의 노예주들은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성향이 큰 편이라, 처가 사람들도 이후 남북전쟁에선 북부에 합류하여 연방군이 된다. 그랜트의 고향인 일리노이는 기본적으로는 자유주지만 노예노동 자체는 주 남부에서 일부 진행되고 있었고, 주민으로서 노예주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편 지역 기술관료직에 응모해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장인 일가가 노예노동에 우호적인 민주당 지지자라는 것이 걸림돌이 되어 거부된다. 결국 농사마저도 흉년과 질병으로 실패하고, 농장을 개간하면서 벤 나무를 장작으로 팔거나, 처가 쪽 친척의 부동산 사업을 도와주는 등의 부업으로 연명하게 된다.

갈 곳이 없어진 그랜트는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죽제품 공장에서 경리로 일하게 되지만 이것도 잘하진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이런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한 아들 그랜트를 차마 내칠 수 없어서, 경리 일은 계속하게 된다. 이는 원래 그랜트가 일반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가 막대한 대학등록금을 감당하기 힘들어[5] 등록금이 무료인 사관학교로 갈 것을 권유하여 사관학교에 간 것이었는데, 문제는 그랜트가 내성적인 성격이다 보니 동료간 유대감도 적어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장교로 임관해서도 군대에 적응하기 힘들어했고,[6] 아버지는 아들이 군대에서 힘들어 하는게 자신의 책임이 크다고 느낀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아들을 내칠 경우, 아들이 노예농장을 하는 처가로 돌아갈 것도 우려한 것 같다.[7] 허나 이때도 그랜트는 딱히 돋보이는 인물은 아니었는데, 같은 동네의 아마추어 정치평론가인 친구와 토론을 할 수준으로 머리가 좋은 걸 제외하면 '유능한 구석이 별로 없는, 사업 말아먹은 볼품없는 주정뱅이 중년 아저씨'가 이 시절 그랜트였다. 그래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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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 중의 그랜트

허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그랜트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다. 미국판 한신? 그랜트는 일리노이 의용군에 지원했는데, 사실 그랜트는 본인이 군인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기도 했고 반전주의 경향 역시 강했으며, 국가가 위기에 처하지 않는 한 전쟁은 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평생 고수했다. 그래서인지 자서전에서는 남북전쟁 이전에 일어났던 미국-멕시코 전쟁을 "강한 국가가 약한 국가를 상대로 벌인 가장 부조리한 전쟁"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8] 그런 그가 남북전쟁에 자진해서 참전한 것은 연방이 무너지는 것을 국가적 위기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여튼 그랜트는 군사 경력이 인정되어, 일리노이 의용군 대령으로 임관된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연방군 준장으로 진급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랜트의 군사적 능력은 빛이 나 서부전역의 남부측 요새인 포트 헨리, 포트 도널슨을 함락시키며 전장을 테네시로 밀어붙였고, 빅스버그 포위전에서는 남군의 빅스버그 지원 시도를 적절히 차단하며 천혜의 요충지 빅스버그를 포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빅스버그 함락 이후에는 치카모가 전투의 패배로 위기에 빠진 테네시의 연방군을 채터누가에서 구원하는 데 성공했고, 1864년에는 마침내 미 육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9]

이후 서부전선을 자신의 오른팔 윌리엄 테쿰세 셔먼에게 맡기고[10] 자신은 동부전선 주력인 포토맥군에 종군하며 군을 직접 통제, 남군의 대표적인 명장인 로버트 E. 리와 격돌하여 그의 항복을 받아내서 전쟁을 종결시켰다. 전쟁 중 인명피해는 공격하는 입장인 북군이 더 많아서 의회에서는 그랜트 교체를 요구하기도 했으나,[11]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랜트를 전폭 지지하여 계속 활약할 수 있었다.[12] 여담으로 남북전쟁 중 그랜트는 Unconditional Surrender(무조건 항복)이라는 구호로 다시 한번 유명세를 탔는데, 이는 포트 도널슨 전투에서 그랜트가 남군의 무조건적인 항복 말고는 어떤 협상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U'lysses 'S'impson이라는 이름을 이용한 별명이기도 하다.

2.2.1. 우직한 전략가 그랜트 - 남북전쟁 시기 그랜트의 행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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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날리던 리즈시절. 1864년 콜드 하버에서 찍은 사진이다.

앞서 언급했듯 그랜트는 성향상 군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었고 기본적으로 전쟁이나 군대 자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얄궂게도 개인적인 성향과는 정반대로 군인으로서는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다. 특히 전략적인 면에서 빛을 발했는데, 인내심과 뚝심이 매우 강하고 끈질겨서, 남군의 로버트 E. 리 장군에게 참패해도 겁을 먹거나 패닉에 빠져 후퇴하지 않고 끈덕지게 물고 늘어지며 버티고 또 버텼다.

적의 의도를 예측하기보다는 자신의 의도를 수행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유형의 장군이었다고 평가된다. 이는 매클레런이나 할렉, 뷰얼, 로즈크랜스 등 신중하고 소극적인 고위 지휘관들이 넘쳐나던 북군에서 적극적인 장군을 원하던 링컨의 신뢰를 얻고 고속으로 승진하는 이유가 되었다. 포트 헨리와 도넬슨의 승리는 그랜트가 적극적으로 남군 전선의 약점을 찾아 공세에 나선 덕분이었다. 첫 번째 빅스버그 공략이나 샤일로 전투 첫날 등 실패하기도 했지만, 위축되지 않고 두 번째 빅스버그 공략과 샤일로 전투 둘째날에 곧바로 이를 만회했다. 이러한 면모는 북군 총사령관으로 승격되어 동부전선에서 리를 상대할 때도 그대로 이어졌다.

지금까지 동부전선에서 남군의 승리 패턴은 북군이 남군을 두려워해서 위축되어 있으면[13] 리나 잭슨 등이 이끄는 남군이 화려한 기동으로 북군을 몰아붙이거나 후방 기지를 공격해서 큰 피해를 입히고, 이에 북군의 장군들이 재편성을 이유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특히 전쟁 초기 북군의 핵심전력인 포토맥군 사령관 조지 B. 맥클레런의 직무유기가 심각해서, 역사가들이 이 사람이 명령대로 제때 공격했으면 남북전쟁은 1년도 안돼서 끝낼 기회가 몇번이나 있었다고 할 정도로 북군 사령부(특히 주 전력인 포토맥군)의 전투회피 성향이 심각해서 전쟁이 4년 가까이 늘어졌다. 심지어 그 문제의 맥클레런을 경질한 다음에도, 몇번의 후임을 거친 신임 포토맥군 사령관이자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리 장군에게 이긴 조지 미드 장군조차 리 장군에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몰라 예비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격하지 않았고, 덕분에 리는 만신창이가 된 북버지니아군을 간신히 구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랜트는 동부전선에서 포토맥군이 고구마 100개 먹고 행군하는 듯한 답답함 속에서 위축되지 않고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서부전역에서 단호한 공격을 계속했으며, 그러다 참패를 당하는 경우에도 후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휘하의 한 사단장이 스팟실베이니아 전투에서 리의 후방 급습에 자신의 사단이 와해되자 그랜트 앞에서 이성을 잃고 후퇴를 종용하고 모든 참모들이 당황해서 허둥지둥 하고 있는 와중에도, 정작 그랜트는 시가 1대 물고 나무조각을 깎으며 무덤덤하게 버티라고 명령했을 정도로 뚝심이 좋았다. 그때 전장 근처에서는 산불이 났는데, 하필 그 불길 속에 수많은 부상병들이 갇혀 있었다. 당연히 태반이 타 죽었고, 그들의 비명은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허나 그랜트가 다음날 내린 명령은 "공격을 계속하라."였다. 다만 마음 여린 그랜트답게, 후방이 무너져도 의연하던 그가 병사들의 비명 소리를 듣고는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런 대담한 뚝심에도 불구하고 피를 보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이상한 기벽이 있었고, 심지어 고기는 육즙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바싹 구워 먹었다. 그래서 그의 스테이크는 언제나 겉이 시커멓게 타 있었다고 한다. 사실 남북전쟁 참전 장군들 중에서 기벽 하나 없는 인간도 극히 드물지만, 이렇게 군 생활에 안 어울릴 것 같은 기벽을 가진 사람은 그랜트 하나 정도다. 또 1864년, 버지니아 출신의 한 병사가 진중에서 자기 말의 머리를 피나게 때리는 걸 보고 이성을 잃고 그 병사의 머리채를 잡아채 목을 졸랐고 그를 6시간 동안 말뚝에 묶어 놓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 당시 군마는 매우 소중한 자원으로, 일개 사병이 고의적으로 다치게 했다면 군법회의에 처해질 수도 있었다. 일부러 다치게 한 말의 부상이 심각해서 전투불능 상태까지 된다면, 당시 군법 하에서 그 병사는 최대 교수형 판결까지 받을 수 있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링컨에도 말에게 고의적인 부상을 입혀서 교수형을 당하게 된 병사를 링컨이 사면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래서 엄벌에 처해지는 건 당연하지만, 그랜트가 한 짓은 감정적인 사적제재이지 적법하게 병사를 대하는 방식이 아니다. 사실 그랜트는 젊은 시절부터 승마를 즐겼는데, 이런 사람들은 말에 남달리 애착을 갖는 경우가 많아서 원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어쨌든 그랜트의 북군은 남군의 리 장군을 상대로 한 전역에서 절대적인 숫자로 보면 종종 1.2~1.5배에 달하는 피해를 더 입었다. 허나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그랜트가 공격하는 입장이었고, 리가 수비하는 입장이라 리가 더 유리했는데도 불구하고 퍼센티지로 봤을 땐 리가 더 많은 병력을 잃었다는 점이다. 이는 리가 수비하는 입장이었는데도 카운터 한방으로 북군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무리하게 공격적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랜트의 북군은 더 큰 피해를 입었어도 북부의 우수한 보급 역량을 바탕으로 빠르게 그 피해를 회복한 반면, 남군은 북군보다 피해는 적었지만 충분한 보충을 받지 못해 갈수록 전력 규모의 격차가 커졌다.

더구나 전력이 앞서고 회복도 빠른 북군이 단호하게 공세를 펴는 이상, 리나 잭슨이 북군을 농락했던 화려한 기동도 불가능해졌다. 각개전투에서는 다소 우위에 설 수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판세는 북군에 기울어만 갔고 남군은 전장에서의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한 채 방어전을 수행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전체적인 전력이나 보급에서 배 이상 우월한 북군을 상대로 싸우는 남군에게는 끈질기게 달라붙어 닥공을 외치는 그랜트가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대였던 셈. 그랜트 이전에는 남군이 북군을 전장에서 몰아붙이고 북군의 후방으로 기동할 수 있었지만, 그랜트가 사령관이 되면서 반대로 북군이 전장에서 남군에 대해 지속적인 공세를 취하며 전선에 묶인 남군의 후방을 위협하게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ackson_Valley_Campaign_Part2.png
그랜트 이전, 스톤월 잭슨의 계곡 전역. 파란색이 북군, 빨간색이 남군이다. 이 전역에서 잭슨의 남군은 북군 사이를 휘젓고 돌아다니면서 큰 피해를 입힌 후 무사히 빠져나왔다. 북군이 기민하게 움직였으면 잭슨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 섬멸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겠지만, 북군은 가만히 있다가 잭슨에게 각개격파당하거나 느릿느릿 잭슨의 뒤만 쫓아다니기만 했을 뿐 변변한 전과를 거두지 못했다.

파일:external/www.thomaslegion.net/overland-campaign-map.jpg
그랜트의 윌더니스 전역(오버랜드 전역이라고도 한다). 마찬가지로 파란색이 북군, 빨간색이 남군이다. 리치먼드를 향해 남군의 측면을 노리며 맹렬히 진군하는 그랜트의 북군과 이를 필사적으로 뒤쫓으며 저지하는 남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셰리든은 기병대를 이끌고 리치먼드를 강습하며 남군의 보급창을 파괴하는 등의 피해를 입혔고, 소수의 병력으로 이를 저지하던 스튜어트는 옐로 터번 전투에서 전사하는 등 남군은 끊임없이 수세에 몰렸다. 결국 이 전역은 피터스버그에서 남군이 북군을 방어하며 고착화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고, 이후 리의 북버지니아군은 북군의 공세 속에 이곳에서 완전히 발이 묶였다.

그랜트가 처음부터 리와의 소모전만을 준비한 것은 아니고, 북군의 우월한 동원력을 활용하여 링컨의 대전략대로 남부의 여러 곳을 동시에 공격하고 서로를 지원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계획을 실행했다. 셔먼의 애틀랜타 전역에 더해 리치먼드와 피터스버그를 남동쪽으로부터 공략하는 버뮤다 헌드레드 전역, 남군의 보급기지이자 북침 통로였던 셰넌도어 계곡 지역에 대한 압박, 미시시피 강 서쪽을 공격하는 레드 리버 전역 등 북군의 여러 공세가 그랜트가 리를 상대하는 동시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는 셔먼을 제외하면 대부분 각 작전의 지휘를 맡은 정치군인들의 무능함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그랜트 본인 또한 리와 직접 맞붙기 전까지는 나폴레옹식 결전에서 승리하여 전쟁 자체를 승리로 이끈다는 계획을 포기하지는 않았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리의 군대를 궤멸시킬 수 없음이 명백해진 이후에도 그랜트는 리에게 싸움을 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결국 리를 피터스버그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전략에 비해 전술적 측면은 상대가 남군의 잭슨 장군과 더불어 남북전쟁 최강의 전술가이며 야전 축성의 달인인 리 장군이어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지만, 참신하고 세련된 우회 기동으로 빅스버그를 함락시키는 등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전술 능력도 출중한 편이었다.

그의 전략적 안목을 확인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위의 지도에 나와있는 제임스 강이다. 북군의 이동경로를 보면 강을 건넌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당시 북군의 이동경로에 다리는 없다. 그랜트는 이 강에서 약 2,000피트(610m) 길이의 도하작전을 실시한다. 리의 남군과 대치중임에도 7시간 만에 도하 작전을 성공하여 11만이 넘는 북군은 남부의 요충지인 피터스버그를 포위한다. 리 입장에서는 완전히 허를 찔린 작전이다. 바로 직전 콜드 하버의 전투장소를 보면 바로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 직전임에도 그랜트는 우회 기동을 실시한다. 그랜트는 콜드 하버에서 대치만 하고 있어도 셔먼 장군이 남부의 인적 물적 보급로 역할을 하던 조지아 주를 착실히 조지고 있었고 당시 두 장군은 전보를 통해 그 상황을 실시간으로 주고받고 있었다.[14] 하지만 북부의 여론은 그랜트와 링컨의 편이 아니었다.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남부와 교섭을 통해 노예제도를 인정해주고 평화를 선택하자는 여론과 더불어 그랜트 개인에게도 도살자라는 별명이 생겨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랜트는 좀 더 빨리 전쟁을 끝내야 하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남부 주요 철도 5개가 통과하는 요충지이며 당연히 리치먼드로 들어오는 남부의 주요 보급로인 피터스버그 공략을 위해 도하작전을 실시한다. 이 도하작전은 현대식 도하 작전과 별 다를 거 없는 수준의 공병 수준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피터스버그 공략 작전은 조기에 결판을 내는 데 실패하여 북군은 1년 가까이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피터스버그 전역 초기 그랜트는 리의 허를 찌르는 데 성공하여 북군은 큰 수적 우세를 가졌다. 하지만 벤저민 버틀러 등 북군 지휘관들의 무능함과 남군 지휘관 P.G.T. 보우리가드의 필사적이고 대담한 방어로 북군은 유리한 상황에서도 피터스버그 점령에 실패하고 피터스버그-리치먼드 일대에서 참호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북군이 피터스버그 점령에 성공했다면 남북전쟁은 1864년 내로 북군의 승리로 끝나는 것도 가능했다.

이어진 피터스버그 포위전에서 리는 다시 그랜트에게 심각한 피해를 강요했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구덩이 전투(Battle of the Crater)이다. 피터스버그 방어요새 지하에 화약을 설치하고 날려버리고 그곳을 돌파하는 작전을 감행하지만 작전의 지휘자였던 제임스 레들리는 최악의 지휘관중 하나였다. 작전 계획은 폭약으로 방어선이 붕괴되면 그 가장자리 양쪽으로 돌파하는 것이었지만, 제임스 레들리는 폭발로 만들어진 거대한 구덩이 한복판으로 부대를 돌격시키고 완전히 노출된 공격 부대는 남군의 집중 사격으로 큰 타격을 입는다. 결국 이 작전은 대실패로 끝나고 만다.[15]

직접적인 공략이 실패하자 그랜트는 북군의 수적 우세와 우월한 자원을 활용하여 리의 측면을 계속 위협하였고, 리의 방어선은 사상자 누적과 거듭된 탈영으로 줄어든 남군이 더 이상 버티기 힘들 정도로 늘어져 버렸다. 비슷한 시기 셔먼 장군이 이른바 '바다로의 행진'과 캐롤라이나 진군을 성공시키며 남군의 본진을 털어버렸고, 셰넌도어 계곡을 초토화한 셰리든의 군세가 그랜트를 지원하기 위해 남하하고 있었다. 이에 리가 이끄는 남군은 결국 리치먼드를 버리고 후퇴를 강요받았다. 여기서 그랜트는 리치먼드 점령보다 후퇴하는 리의 패잔병들을 추격한다.[16] 리치먼드 점령과 항복으로 형식상 전쟁이 종식된다 하더라도 리를 중심으로 남부 패잔병들이 여전히 그들의 지지기반인 남부주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에 들어가면 그건 북부에 있어서 최악의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랜트는 퇴각하는 최후의 리 부대를 추격하고 결국 리의 항복을 받아낸다.[17][18] 그리고 남북전쟁의 끝을 맺는다.

그랜트가 정식 사령관인 미드를 직접 제어했던 포토맥군은 일견 무모해 보일 정도로 리 장군의 남군에게 계속 싸움을 걸었고 종종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북군의 최고 강점인 우월한 보급 역량을 잘 살리면서 남군의 장점인 우수한 장교단을 봉쇄하고 약점인 빈약한 보급을 압박한 것이 효과적인 수단임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북버지니아군 주력이 붙들려서 소모되어 가는 동안 서부에서 윌리엄 테쿰세 셔먼테네시군이 남부 중심부를 휩쓸어버렸다. 서부 전역의 남군 사령관 조셉 존스턴은 증원을 요청했지만, 남부에는 더 이상 그럴 자원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 일을 가리켜 링컨은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그랜트가 리라는 곰에게 손을 물려 있는 동안, 셔먼은 그 곰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버렸군." 물론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랜트가 리가 돌아볼 수 없게 집요하게 붙잡고 있는 동안 셔먼이 후면에서 그 가죽을 벗긴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2.3. 대통령 시절[편집]


전쟁 영웅으로서의 인기를 등에 업고 1869년 제18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다. 참고로 그랜트는 1901년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취임과 1961년 존 F. 케네디의 당선으로 기록이 깨질 때까지 역대 최연소 대통령(취임 당시 만 46세)이었다.[19] 당선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일단 전쟁 영웅, 그것도 연방 붕괴를 막은 영웅[20]이라는 까닭 하나만으로도 당선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은 분명했고, 그렇게 그랜트는 백악관에 입성했다. 이때 그의 이름을 이니셜화한 U.S. 그랜트가 미국(U.S.)의 이니셜과 맞아떨어진 덕분에 이걸 이용한 광고 전략을 펼쳤다고 한다.

여담으로 1868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공화당의 압도적인 승리까진 아니었던게, 민주당 후보로 나온 뉴욕 주지사 호레이쇼 시모어와 그랜트의 표 차이는 52.4% vs 47.6%로 생각만큼 크진 않았다. 물론 현대 선거에서 5% 정도 차이면 게임 오버 수준이긴 하고 선거인단이야 그랜트가 압승했지만 남북전쟁 직후 반역자 정당으로 찍힌 민주당 분위기를 생각하면[21] 민주당도 상당히 선전한 것. 특히 북부의 중심지 뉴욕 주가 홈스테이트의 이점을 안은 시모어한테 넘어간 것은 공화당엔 뼈아픈 대목이었다. 민주당 지도부도 시모어가 이 정도로 선전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사실 당시 미국의 분위기는 호레이쇼 시모어 본인도 처음 대선 출마 요구에 "나보고 죽으러 가라는거냐?" 라고 반발했을 정도였다(…). 실제 당시 미국 대선에는 나서려는 민주당 후보가 하나도 없어서 민주당 지도부가 20여명에 달하는 후보군을 직접 만나 출마를 설득해야 하는 지경이었다. 시모어도 처음에는 토머스 A. 헨드릭스 상원의원이나 새먼 P. 체이스 대법관[22]을 추천하면서 한사코 출마를 거절했다. 그러나 도저히 후보를 못 찾은 민주당은 시모어를 대통령 후보로 내정했다고 언론에 발표했고, 대선 후보 강제 추대 소식을 신문을 통해 본 시모어가 한 말이 "나보고 죽으라는 거냐?"였던 것이다. 시모어는 무려 9번이나 출마를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민주당 지도부는 10번째에 "강제추대" 카드를 꺼내든 것. 그래도 대선 후보로 공식 추대되고 나서 시모어는 반 민주당 여론을 가라앉히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무진장 애를 썼다. 물론 이것도 당시 시모어가 북부 뉴욕 주지사로 남부 민주당 출신 인사는 아니었기에 그나마 가능했던 것이다.[23]

하여튼 그랜트는 대통령이 되었다. 허나 대통령 시절의 그랜트도 다사다난한 일들을 자주 겪었는데, 일명 재건 시대를 이끈 통치력이나 외교술은 기본은 했고 본인도 청렴했으나, 인사에서 말썽이 터져나오는 게 문제였다. 사실 그랜트 본인은 정치 싸움을 해야 하는 대통령 자리 역시 군인처럼 본인에겐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고 생각했고,[24] 정계에 인맥도 거의 없어서 자의반 타의반 친척 등 주변 사람들을 측근으로 대거 기용했는데, 문제는 사람됨이 순진하여 측근들을 지나치게 믿은 통에 이들 중 상당수가 부패 스캔들로 그랜트의 뒤통수를 갈겼다는 거다. 예외라곤 청탁 자체를 천성적으로 싫어한 어머니뿐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정치 스캔들이 끊이지 않으면서 영웅의 이미지는 순식간에 추락했지만, 그럼에도 지지자들이 떠나진 않아 1872년 선거에서는 오히려 1868년 선거 때보다도 더 많은 득표율을 얻어 승리했다. 이에 대해서는 그랜트 개인의 인기도 인기지만 당시 그가 공화당 급진파를 대변한 인물이었기에 지지자들이 받쳐준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25] 당시 미국인들이 남북전쟁의 원흉이라고 깔보던 민주당 및 그 지지기반인 남부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몰표를 받았다는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그랜트는 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 이후 오랜만에 재선에 성공하고 임기를 마친 인물이 되었다.[26]

이 당시 민주당은 내부 분열로 후보조차 낼 수 없는 지경이었다.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을 상대할 후보를 두고 민주당 북부는 스티븐 A. 더글러스를 지명했고 이에 반발한 남부는 존 C. 브레킨리지를 대선후보로 추대하고 남부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분당을 감행했다. 남부민주당은 남북전쟁 패배 이후에도 존속했는데, 1870년 중간선거를 앞두고 북부민주당과 통합했다.[27] 문제는 노예제를 두고 빚었던 민주당 당내 내분이 1872년 대선을 앞두고 다시 폭발했다는 것이었다. 1868년 대선도 후보 못 내서 시모어를 강제추대시켜 겨우 출마시켰을 정도였는데, 1872년 대선에서는 남부+북부의 해묵은 갈등이 다시 터져버려서 2연속으로 대선 후보를 못 찾는 지경이었다. 덕분에 민주당은 공화당을 탈당해 자유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한 호러스 그릴리를 지지하는 웃픈 상황에 놓여있었다.

호러스 그릴리는 노예제의 폐지를 적극적으로 주창하고 (당시 기준으로) 개혁주의적인 논지를 전개해 북부인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던 명망높은 언론인이었고, 동시에 공화당 창립멤버이기도 했다. 허나 1864년 대선에서 링컨의 재선에 반대한 일이나 1867년에 남부연합의 대통령을 지냈던 제퍼슨 데이비스를 풀어주자는 주장으로 평판을 많이 갉아먹었는데,[28] 그랜트 행정부가 난맥상과 부정부패로 얼룩지자 이에 반발하여 따로 자유공화당을 창당했지만, 상기된 두 행보로 인해 민주당 끄나풀이라는 식의 중상모략을 당하게 되고 결국 처절하게 낙선하게 된 것. 애초에 남북전쟁 당시 남부연합으로 가담한 주의 백인들은 종전 후 전부 군정 통치를 받고 충성 서약을 안하면 참정권조차 주지 않았기에 저항 자체가 쉽지 않았다.[29] 그릴리는 선거가 끝나고 이미 당락이 결정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약 3주 후 선거인단 투표 직전 사망하고 한다. 그래서 그릴리가 얻은 66명의 선거인단 중 대다수는 토머스 A. 헨드릭스 민주당 상원의원한테 투표했다.

허나 재선 이후에도 주위 인물들이 하도 구설수에 오르다 보니 인사 한 번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특히 대법원장 지명 당시 일화가 나름 유명하다. 1873년에 대법원장이었던 새먼 포틀랜드 체이스(Salmon Portland Chase)가 사망하면서 대법원장 자리가 비었는데, 그랜트가 지명한 5명의 후보 모두가 청문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지명철회당하고 만다. 왜냐하면 그랜트가 지명 → 알고보니 그 후보는 문제가 많은 인물 → 상원들이 지명 찬성할 리가 없으므로 지명철회 이걸 5번이나 반복하는 막장 상황에 놓인 것(…).

결국 언론과 정계의 닦달 속에 그랜트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모리슨 레믹 웨이트(Morrison Remick Waite)라는 변호사를 지명한다. 그런데 웨이트가 지명을 받은 것도 알고 보면 웃긴 게, 5번이나 지명철회를 하고 멘붕해 있던 그랜트가 "아 맞다. 내가 기차로 오하이오를 건너가고 있었을 적에 나를 소개했던 그 변호사 이름이 누구였더라?"하고 질문, 체크해 보니까 모리슨 웨이트였던 것.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그랜트는 "음, 그 사람 맘에 들었다! 그 사람 지명하지!" 하고 웨이트를 지명했는데, 그는 당시 오하이오 주에 있는 2류 변호사 중 탑(?)이었던 그저 그런 변호사였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이 지명은 통과되었고, 당시 대중들은 '아 드디어 끝났네' 하고 안도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출처.

그래도 다행히 웨이트는 남북전쟁을 막 끝낸 시점에서 연방 정부와 주 정부의 균형을 추구하는 등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맡아 대법원장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랜트도 모리슨을 아꼈는지 1876년 대통령 선거에 지명하려고 했지만, 그는 대법원이 고위직의 단순한 발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겨 제안을 거절했고, 1888년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대법원에서 일했다.

2.4. 대통령 퇴임 후[편집]


그랜트는 2선 재임 기간 미국 역사상 첫 3연임 대통령을 하고 싶은 맘도 어느정도는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당 안팎의 여론 등을 고려해 1875년 대통령직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그랜트의 은퇴 후 1877년 대통령이 된 러더퍼드 B. 헤이스가 대선 이후 약속을 지키고 1880년 선거에 불출마를 선언하자, 지난 선거에서 진땀승을 한 공화당원들은 막후 실력자였던 Stalwarts 파벌의 상원 의원들을 주축으로 그랜트가 세계일주 여행을 통해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다시 한번 대선에 출마할 것을 제안하였고, 그랜트도 이를 받아들인다. 하지만 공화당내 다른 계파 등에서 3선에 대한 반발이 늘어나자[30] 세계일주에 동행했던 기자였던 존 러셀 영이 그랜트에게 대선 불출마를 권유하였고, 그랜트는 존 러셀 영 기자의 제안을 받아들여 공화당 전국위원회에 편지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하지만 공화당 전국위원회는 그랜트를 후보에서 제외하지 않았고, 본인이 부재한 상태에서 투표가 진행되었다. 이때 그랜트는 1위를 하긴 했으나 과반을 넘지 못하여 계속 다시 투표가 진행되었고, 결론을 내지 못한 공화당원들은 상대적으로 무명이었던 제임스 A. 가필드를 밀기로 하여 결국 가필드가 과반을 넘고 후보가 되었다. 당시 공화당은 두 파벌로 갈려 있었는데 1위 그랜트를 지지하는 Stalwarts와 2위 블레인을 지지하는 Half-Breeds가 합의로 만든 후보가 가필드였던 것. 그랜트도 이후 가필드를 지지하였고, 대선 결과 가필드가 당선되었다.

퇴임한 직후인 1877년부터 2년 동안 세계일주를 했다. 그가 방문한 곳은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 이집트, 예루살렘 성지, 태국, 버마, 청나라, 일본 제국 등이었다. 당시 방문한 베네치아를 두곤 "배수 시설이 안 돌아가는 도시(…)"라고 평하기도 했다. 또 그는 아시아, 아프리카와 중동을 방문한 첫 전직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의 명성은 외국에서도 유명했기에 접견을 원하는 인사도 많았는데, 영국윈저 궁에서 빅토리아 여왕을 접견했고, 교황 레오 13세, 이홍장[31], 메이지 덴노 등도 만났다.

군대에 별 호의를 못느낀 그의 성향 때문인지, 세계일주 당시 각국 군주들로부터 사열을 받게 될 때마다 "난 군대라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며 사열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가 큰 불만없이 사열하는 것을 받아들인 군대는 일본군 정도. 일본을 방문했을 때 류큐 왕국를 병합하려는 일본의 팽창 정책과 그에 반대한 중국의 입장 차이에 대해 류큐의 대부분을 일본이 차지하는 대신, 일부 남쪽 도서와 대만 섬을 중국이 가지는 방안을 제시하면서 전직 대통령으로서 조율 시도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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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부인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 참고로 이때 우에노공원에서 환영회가 열렸는데, 자신은 이 자리에 삼나무를 심었고 그의 부인은 목련을 심었다. 이 나무들은 현재도 살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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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를 방문했을 때는 당대 실권자 이홍장을 만났다. 그랜트는 "당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3명 꼽으라면 비스마르크, 글래드스턴, 그리고 이홍장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를 고평가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후로도 교류를 이어갔다.

그 뒤로 1880년에 쿠바를 거쳐 멕시코를 방문하는 등 그의 삶 목적을 가져왔다는 평을 내리기도 한다.

훗날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이를 영감받아 재임 중 호주의 해롤드 홀트 총리 장례식 참석하다가 태국, 남베트남, 파키스탄, 로마, 아일랜드를 겨쳐 돌아왔다.

2.5. 파산과 회고록[편집]


세계일주도 하고 3선 도전도 끝내고 이젠 좀 느긋한 말년을 보내나 싶었지만, 그랜트는 지인이던 퍼디낸드 워드의 중개회사 보증을 잘못 서서 집안이 파산해버리는 불행을 겪게 된다. 전직 대통령도 파산시켜버리는 보증의 무서움. 자신은 이름만 빌려준 일종의 피라미드 사기에 당했다고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너무 좋은 나머지 자신의 이름만 믿고 돈을 빌려준 사람들에게 돈을 갚기 위해 자신의 집을 포함한 전 재산을 처분하려다, 절친한 친구이자 전직 대통령인 그랜트가 집마저 없는 빈털터리가 되지 않길 원했던 채권자의 거절로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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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에 빚 갚으려고 자서전 집필 중에 있는 그랜트.
이에 빚을 갚기 위해 작가이자 친구인 마크 트웨인을 고용해서 회고록을 집필, 생활비가 떨어져서 자신이 가진 모든 군 경력 및 대통령 시절의 기념품을 저당잡혀 돈을 빌려 생활하면서까지 필사적으로 회고록을 썼다.[32] 문제는 이때 후두암에 걸렸는데[33], 거의 치사량에 가까운 아편을 먹어가면서 고통을 참아가며 회고록을 구술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문학적으로도 남북전쟁 전반에 대해 다룬 꽤 괜찮은 회고록이기도 했고, 역사적으로도 남북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자의 회고록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잘 팔렸다. 그래서 이 회고록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50만 달러나 벌어들였기에 빚을 모두 갚고 가족들을 돈방석에 올려주었다고 한다. 본인이 사망한 후에. 실제로 그랜트는 초고 완성 4일 전인 1885년 7월 23일에 후두암이 악화되어 만 63세로 사망한다. 그래서 초고 수정과 출판 감독은 그랜트의 부인 줄리아가 했고, 최종적으론 마크 트웨인이 완성한다.

트웨인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회고록이 출판되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히 소개한 바 있는데, 그랜트는 파산하기 이전, 한참 사회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부터 회고록을 써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자신은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글을 쓰지 못할 것이다' 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런데 이후 사업 실패로 파산하여 생활비조차 마련하기 힘든 처지가 되자 호구지책 삼아 몇몇 신문사에 짧은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고, 크게 힘들이지 않고 쓸 수 있는 짧은 글로 생각보다 좋은 원고료를 받을 수 있었던 것[34]에 만족하여 본격적으로 회고록을 쓰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인세 15%를 조건으로 출판사와 계약을 준비하던 상황에서 마크 트웨인이 갑자기 끼어들어 '그랜트 장군이 받을 인세가 너무 적다'고 주장하며 해당 출판사와 계약하지 말라고 그랜트를 설득하기 시작한 것.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인세가 적당하겠느냐는 그랜트의 질문에[35] 대한 트웨인의 대답은 '75% 인세에 출판 및 홍보 비용까지 모두 출판사가 부담해야 하며, 이 경우 출판사는 큰 수익을 기대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랜트의 회고록을 출판함으로써 얻어지는 출판사의 명망 상승을 생각하면 공정한 거래다' 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대답을 들은 그랜트는 트웨인을 안쓰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최대한 트웨인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자네는 뛰어난 작가지만 사업가로서는 좀 지나치게 몽상적인 것 같다'고 타이르기 위해 고민하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트웨인의 거듭된 설득에 마음이 움직인 그랜트는 아들에게 '원고를 클레먼스(마크 트웨인)에게 주겠다'고 이야기했고, 트웨인은 원래 이 원고를 자신의 책을 출판하던 출판사에 가져갈 생각이었지만, 안 그래도 원고료 문제로 출판사와 감정이 심하게 상해있던 상태라 '지금까지 내 등을 실컷 쳤던 출판사 넘들에게 그랜트의 등까지 치게 해 줄 필요는 없다'고 판단, 직접 출판사를 차려 그랜트의 회고록을 출판하기로 결심한다.

물론 이 일화의 경우 마크 트웨인이 자서전에서 일방적으로 주장했을 뿐, 교차 검증이 이뤄진 바는 없어 공신력이 확실치 못한 것은 사실이나, 일단 트웨인이 그랜트에게 약속한 것은 '원고를 내게 넘겨주면 돈방석에 앉혀주겠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제대로 지켜 그랜트의 유족을 돈방석에 앉혀주었기 때문에[36] 상당히 신빙성 있는 일화로 받아들여지는 편이다.[37]

한편, 이 일화는 19세기 후반 미국의 문화사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사례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뭔 소린가 하면 트웨인이나 그랜트처럼 순수하게 '을 팔아서' 큰 돈을 번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당시 미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소비 여력이 있는 시민계층'이 충분한 규모로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인구 밀도가 낮은 미국 사회에서 이들 중산층이 비교적 쉽고 저렴하게 접할 수 있는 문화상품으로써 '책'이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산업 영역으로서의 출판시장이 자리잡은 증거라는 것이다. 또한, 트웨인이 그랜트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본래 그랜트의 회고록을 출판하려던 출판사가 소매 출판 전문 회사임을 지적하고 '그랜트 같은 유명인의 회고록은 소매 출판보다는 예약 출판으로 출판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라고 주장했던 것[38]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판매 형태 역시 고도화되기 시작했던 것을 알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그랜트의 이런 불우한 말년은 퇴임한 전직 대통령에게 연금을 지급하는 계기가 된다.

그랜트가 1885년 7월 23일 숨이 끊어지는 순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단순한 단어였다. 유언은 다음과 같다.[39]

"Water…(…)"



3. 기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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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부 사이는 매우 좋았다. 자식들과도 마찬가지. 가족이 없으면 외로움을 많이 탔다고 하며 그랜트가 부인에게 심리적으로 많이 의지를 했다고 한다. 부인은 그랜트가 사업 실패를 연속해서 할 때도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완벽한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매우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하는데 한번은 계단을 올라가던 아들이 내려오던 그랜트와 마주치자 장난을 걸었다고 한다. 그러자 "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어린 친구에게 질 수 없지" 하면서 레슬링을 해서 아들이 이기게 해줬다고 한다. 가족에게 굉장히 따뜻했던 모양. 참고로 그랜트의 가족사진에 찍힌 그랜트의 부인은 정면이 아니라 옆으로 보는 포즈가 대부분이다. 심지어 백악관에서 사진을 찍을 때도 그런 포즈를 취했는데, 약간의 사시가 있어 본인이 그런 포즈를 고집했다고 한다.

  • 총각 시절 영부인이 되는 줄리아 덴트 그랜트와 연애할 무렵에 마차를 타고 가다가 비가 마구 쏟아지는 상황에서 개울을 건너야 했는데, 줄리아는 위험할까봐 두 손으로 그랜트의 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다리를 건너고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랜트는 대뜸 이런 말로 프러포즈를 했다.

"바라건대, 평생 내게 매달리면 어떻습니까?(I wonder if you would cling to me all my life?)"


  • 덥수룩한 수염, 꾀죄죄한 인상과 더불어 키에 비해 덩치도 제법 있는 편이라 좀 험상궂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람 좋고 순진하고 여린 성격이었던 듯 하다. 상기했듯 아내, 자녀들과 사이가 매우 좋았으며, 가족들이 곁에 없으면 그리움 때문에 술로(…) 날을 지새우기도 할 정도였다. 또 사람을 너무 잘 믿는 탓에 측근들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부패 스캔들로 뒤통수 맞은 적도 많다. 말년에도 이런 순진한 성품으로 인해 친구 보증을 잘못 섰다 빚더미에 올라 후두암 걸린 상태에서도 가족들을 위해 자서전 집필을 한 것을 보면 인상과는 상당히 다른 인품.

  • 친구 중에 이로쿼이 원주민인 엘리 파커가 있었다. 그래서 남북전쟁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참전이 거부되었지만 엘리 파커는 그랜트 덕에 보좌관으로 남북전쟁에 참가할 수 있었으며, 그랜트의 대통령 재임기간에 인디언국 국장으로 재임하며 원주민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윌리엄 테쿰세 셔먼과 아주 독특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랜트는 상기했듯 휘하에 인디언 부관을 둘만큼 반인종차별주의자면서 나쁘게 말하면 소심하고, 좋게 말하면 가족과 주변인들을 따뜻하게 대하는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반면, 셔먼은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면서 성격도 다혈질이고 무언가 배배꼬인 그야말로 사이코틱한 성격을 가진 양반이었다. 이처럼 둘은 완전히 상극인데도 불구하고 그랜트는 셔먼을 신뢰하며 그에게 서부전선의 전권을 맡겼으며 대통령 취임후에는 셔먼을 군고위직에 임명했다. 셔먼 역시 상관인 그랜트를 충실히 보필하여 서부전선을 그야말로 초토화시키며 그랜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고 그랜트가 대통령에서 퇴임할 때까지 그를 상관으로 모셨다.

  • 미국사의 주요 인물들이 그러하듯, 그의 평전도 나와있다. 아마존닷컴. 1,104쪽이라는 육중한 분량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그만큼 내용은 굉장히 충실하다.

  • 퇴임한 후 어떤 연회에 초청되어 길을 가고 있었는데 그날 비가 왔다. 우산을 쓰고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행인이 우산 없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우산을 씌워 주었다. 마침 그 행인도 그랜트가 초대받은 연회에 가던 사람이라 즐겁게 대화를 하며 연회장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같이 가는 사람이 그랜트인 것을 몰랐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나는 율리시스 그랜트 장군을 본 적이 없는데 오늘 그 연회에 가는 것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요. 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긴데 난 그랜트 장군이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하오." 그러자 그랜트는 화를 내기는커녕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웃어넘겼다.


  • 대단한 끽연가였고 도 좋아해서(그래도 군사작전 때는 마시지 않았다) 술주정뱅이로 찍히곤 했다. 실제 작전이 없을 때는 가족을 그리워하며 말 그대로 깡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남부연합이 승리하는 대체역사물에서는 주로 술주정뱅이로 일생을 마치는 역(…)으로 나온다.

  • 조선과도 의외의 접점이 있는 인물인데, 바로 신미양요가 이 사람 재임기에 일어났다(1871년).

  • 자서전 집필을 통해 인연을 가진 마크 트웨인과는 다른 일화가 있다. 마크 트웨인이 무명 작가이던 시절 상원의원인 친구의 소개로 대통령직에 갓 취임한 상태의 그랜트와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트웨인은 상대가 대통령인데다 그랜트의 무뚝뚝한 대응에 지나치게 긴장해서 "어… 참으로 당황스럽네요."하며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다. 이후 1879년 그랜트가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는 것을 환영하는 시카고의 행사장에서 다시 트웨인과 그랜트가 만나게 되었는데, 인사 대신 그랜트가 한 말은 "저는 당황스럽지가 않는데, 지금 당신은 어떤가요?"였다. 트웨인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그대로 말해 놀려먹은 것. 그래서 트웨인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를 언급하면서 그랜트가 상당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 평상시에는 꾀죄죄한 행색으로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덕분에 잘 씻지도 않고 대충 기른 지저분한 수염에다가 에 절은 추레한 꼴을 많이 보였다고. 게다가 복장관리도 안하고 청결도 가뿐하게 무시해서 술에 취한 채 더러운 군복과 진흙투성이인 장화를 신고 그대로 쓰러져 자기도 했다. 작전 날이라고 다를 것은 없어서 술에 취하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똑같았다고 한다. 남북전쟁 당시의 라이벌이었던 명장 로버트 E. 리와도 멕시코 전쟁 시절에 만난 적이 있었으나 리는 그랜트를 그냥 술주정뱅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했던 것 같다. 혹은 이때 리가 그랜트의 복장불량을 지적했다는 역사가도 있다. 반면에 그랜트는 리와 만났던 날을 잊지 못할 순간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파일:external/1.bp.blogspot.com/lee+and+grant+shaking+hands.jpg 파일:attachment/Lee_and_Grant.jpg 파일:attachment/Grant-Lee-surrender-engraving.jpg 파일:external/4.bp.blogspot.com/appomattox-1.jpg 파일:attachment/Lee-and-Grant.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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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로버트 E. 리와 다시 만나 그로부터 항복을 받는 순간을 그려놓은 기록화도 여럿 있는데, 말끔히 차려입은 리와는 대조적으로 꾀죄죄하고 추레한 행색을 한 경우가 많아 그림만 보고 있으면 어느 쪽이 항복을 하고 있는 쪽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다만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봐도 크게 드문 일은 아닌데, 패전한 쪽에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복장이나 예법에 더 신경을 쓰고, 승전한 쪽에서는 패전한 쪽의 자존심을 꺾기 위해 어떤 경우는 고의적으로까지 복장이나 예법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생각보다 흔하다.[40] 물론 율리시스 그랜트의 경우엔 그의 성정상 고의적으로 꾀죄죄하고 입었을 가능성은 별로 없긴 하다. 사실 당시 그랜트는 전쟁 마무리 문제를 놓고 신경을 너무 쓴 나머지 심한 두통을 앓다가, 항복을 타전하는 리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급히 달려온 거라 군복을 갈아입을 틈도 없었다. 그리고 흙투성이 길을 말을 타고 달려왔으니 흙먼지를 뒤집어쓴 것은 당연한 노릇. 그 점 외에는 그림에서 보듯 육군중장의 정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예법을 어긴 것은 아니다. 사실은 리도 전쟁 중에 예복을 차려입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남군 장교들은 대부분 소매에 금줄을 수놓은 화려한 군복을 입었으나, 정작 총사령관인 리는 수수한 민간용 프록코트에 계급장만 달고 다녔기 때문에 종종 민간인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항복할 때만 정식으로 예복을 갖춰입었던 것.

  • 7대 대통령인 앤드루 잭슨이 퇴임한 1837년부터 34대 대통령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취임을 시작한 1953년까지 정상적인 경로로 대통령이 되고 재선에도 성공하고 임기도 건강하게 마친 인물은 그랜트 대통령이 유일하다. 일단 정상적으로 취임했지만 재선을 못한 대통령이 꽤 있고, 나머지도 에이브러햄 링컨은 재선 후 얼마 안 돼 암살당했고,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임기를 2번으로 나눴으며, 윌리엄 매킨리도 링컨처럼 재선 후 얼마 안 돼 암살당했다. 그리고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투표가 아닌 매킨리의 뒤를 이어서 대통령이 되었으며, 우드로 윌슨도 재임 후기에는 반신불수가 되어 아내인 이디스 윌슨이 직무를 대신 수행했다. 그리고 캘빈 쿨리지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워런 G. 하딩 사망 이후 그의 뒤를 이어서 대통령이 되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재선, 심지어 4선에도 성공은 했지만, 4선 이후 얼마 안 가 뇌출혈로 사망했고, 해리 트루먼도 그의 뒤를 이어서 대통령이 되었다.[41]

  •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M3 중형전차의 개량형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개량형 이전의 M3 전차의 명칭은 . 덧붙여 이 이름들은 모두 영국군이 부여한 명칭이다.

  • 그란티장수풍뎅이라는 장수풍뎅이 명칭도 본 문서의 대통령 이름에서 따왔다.[42]

  • 1865년 4월, 그랜트는 링컨과 동행하여 포드 극장에 가려고 했었으나, 아내인 줄리아 그랜트가 평이 안좋은 링컨의 아내 메리 토드 링컨을 싫어하여 그가 가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 바보로 유명했던 그랜트는 결국 가지 않기로 결정했는데, 이 이유를 대놓고 링컨에게 말할 순 없으니 "자식들 졸업식이 있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결국 그랜트의 자리는 육군 소령이었던 헨리 래스본 소령이 대신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미국을 뒤흔든 희대의 대사건이 발생했고, 링컨 대통령은 세상을 떠났으며, 본인의 자리를 대신한 래스본 소령은 평생 링컨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정신병에 걸려 자식과 아내를 칼로 찌르는 암담한 짓[43]을 한 후에 정신병원 독방에 30년 동안 갇혀있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그랜트로서는 그야말로 구사일생.

  • 묘지는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그랜트 장군 국립기념관(General Grant National Memorial)인데, 허드슨 강변에 위치한 뉴욕시의 랜드마크 중 하나이다. 그랜트는 죽은 후에 아내와 같이 묻히길 원했는데, 그 때문에 당시에는 여성을 묻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군사 묘지(웨스트포인트 같은)는 모두 후보에서 제외되었고, 당시 뉴욕 시장이었던 윌리엄 러셀 그레이스가 그랜트 부부의 유해를 뉴욕시에 안치하고 싶다고 타전한 것에 아내 줄리아 그랜트와 나머지 가족들이 동의했다. 착공 전까지 설계도 미비와 모금 달성에 어려움을 겪어 그랜트 사후 한참이 지난 1897년에야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완공되었는데, 외관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영묘의 형태를 기반으로 했다. 시신은 내부에 있는 프랑스 파리 앵발리드에 있는 나폴레옹의 관을 기반으로 한 붉은 화강암 석관에 안치되어있고, 아내 줄리아는 묘지 완공 5년 후인 1902년에 사망해서 그랜트 옆 형태가 동일한 석관에 안치되었다.

  • 역대 미국 대통령 인기순위를 보면, 옛날과 오늘날의 순위 차이가 꽤 많이 나는 대통령이다. 지폐 모델에 쓰일 정도로 업적을 인정받음에도 초기에는 피어스, 뷰캐넌, 앤드루 존슨,[44] 하딩 등과 함께 최하위권 단골일 정도로 인기가 없는 편이었으나, 이후 재평가되는 측면이 있어서인지 21세기부터는 순위가 많이 올라와서 중위권 수준에 머무르는 편이다. 쿨리지, 닉슨 등과 비슷한 케이스이다.


  • 1860년에 노튼대학 창립자인 호레이스 노튼에게 시가를 한 대 선물한 적이 있다. 노튼은 그 시가를 기념으로 보관했는데, 그 시가를 물려받은 손자 윈스테드가 1932년 노튼대학 동창회에서 조부와 그랜트의 교분을 강조하면서 시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 시가는 폭발했다(...)

4. 매체에서[편집]


영화 와일드 와일드 웨스트에서 그랜트 대통령이 등장하며, 미친 과학자에게 미합중국의 안전을 위협받는다.

죽은 자의 제국에서는 전직 미국 대통령으로 등장. 남북전쟁 때 미국에서 발전한 시병(屍兵) 기술을 각국에 판매하려는 목적 겸 '빅터의 수기'를 손에 넣기 위해 아달리 릴리스를 비서로 대동하고 해외를 순방한다. 애니메이션판에서는 시체 폭탄에 의해 폭사한다.



2012년 영화 링컨에서는 자레드 해리스가 열연한다. 주인공이 수정헌법 제13조를 통과시키기 위해 애를 쓰는 에이브러햄 링컨인만큼 어디까지나 조연이지만 남부연합에 무조건 항복을 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링컨 대통령에겐 빠른 종전을 건의하는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 미디어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애포머톡스에서 남부연합 북버지니아군 사령관 로버트 리에게 항복을 받는 모습도 나온다.

2018년 스티븐 스필버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그랜트 관련한 전기물 영화를 제작 준비 중이라는 기사가 떴다.# 이후 영화는 아니지만 2020년 디카프리오가 제작에 참여한 다큐 형식의 일대기가 히스토리 채널에서 방영되었다.

앤트맨과 와스프에서는 앤트맨이 비행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몸이 작을 때는 수개미를 타고 다니는데, 이때 그는 자신이 타고 다니는 개미 중 한 마리한테 율리스 S. 그래-앤트(영문판은 Ulysses S. Gr-Ant)라는 명칭을 지어준다. Grant(그랜트) 안에 Ant(개미)가 들어간 것을 이용한 것.

비디오 게임 폴아웃: 뉴 베가스최종보스율리시스의 이름은 이 사람에게서 따온 거다. 이 게임의 배경이 핵전쟁에서부터 200년 후인데도 남북전쟁과 율리시스 그랜트를 아는 걸 보면 이 사람이 얼마나 이전의 미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참고로 폴아웃: 뉴 베가스의 율리시스가 자신의 이름을 율리시스라 지은 이유는 그리스 고전의 오디세우스[45]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까지도 염두에 둔 것. 핵전쟁으로 문명이 사라지고 200년이나 지났는데 기원전의 고전과 19세기의 장군, 20세기의 문학작품을 기억하는 걸 보면 상당한 지식이다.

대체역사소설 효명세자와 함께하는 조선 생활에서는 남북전쟁이 일찍 끝나서 대통령 자리를 노릴 엄두를 못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전임 대통령으로 신미양요 사건에 대해 조선사절단에게 사과를 할정도로 인품이 높은 사람으로 등장한다. 군인으로서 희생을 높게 치는 사람이라 신미양요 당시 조선 군인들의 희생을 높게 산다. 원래 역사대로 2007년에 돌려주는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를 돌려주는데 협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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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때문에 자신의 선임자였던 맥클레런 총사령관이 보수적인 전술을 고집한 것과 달리, 최대한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큰 희생이 따르더라도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자신의 부하인 셔먼과 함께 공격적인 전술을 고집했다.[2] 이쪽 역시 (미래의) 처가쪽 친척이었다. 그랜트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3] 당시에는 아직 파나마 운하가 안 뚫린 상태라, 철도로 미국 동서부간의 수송을 위해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파나마 철도를 미국인들이 건설하고 있었다.[4] 그러한 이유로 남북전쟁 당시 미국에선 남북군을 통틀어서 장군의 상당수가 대위나 아무리 높아도 소령 정도로, 퇴역한 웨스트포인트 출신이었다. 남은 사람들도 진급이 어려워서 로버트 E. 리중령 진급 후 대령이 될 때까지 얼마나 남은지를 세다가 20년이 더 남았다는 결론이 나오자 진지하게 퇴역을 고민하였다고 한다. 그나마 리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대령이 되었다. 심지어 중간에 2년을 잠정 퇴역해서 농사를 지었는데도 진급된 것이니 행운이라 할 수 있다.[5] 현재도 미국은 대학등록금이 비싸기로 악명높다.[6] 행군도 엉망이어서 행군을 위한 군악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그랜트는 회고록에서 군악에 대해 "나에게 군악이란 양키 두들과 양키 두들이 아닌 것밖에 없다."라고 발언하기도 했다.[7] 아버지는 이전에 그가 처갓집 근처에서 농사를 시도했을 때도 반대했었다.[8] 더불어 '남북전쟁은 사실 이 전쟁(미국-멕시코 전쟁)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미국의 전횡에 대한 일종의 천벌'이라고 표현했다.[9] 참고로 그랜트는 육군 정규군에서 조지 워싱턴 다음으로 중장으로 진급했고, 1866년에는 미군 역사상 최초의 대장으로 진급한다. 4성 장군이지만 현대 기준으로는 General of the army, 육군 원수직에 상응하는 자리.[10] 여담으로 그랜트의 보좌관 중엔 아메리카 원주민 엘리 파커도 있었다.[11] 특히 1864년 6월 피터스버그 전투에서 1달 동안 118,000여명의 병력 중 45,000여명이 전사해 링컨 주변에서는 그랜트를 해임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12] 이런 링컨과 그랜트 사이를 신임과 존중의 관계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일화 중 하나로 링컨은 그랜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 "귀관이 수행하는 작전의 세부사항에 대해서 본인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소. 귀관에게 어떠한 제한도 제약도 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무한 신뢰를 보내는 상관에게 그랜트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제가 원하거나 기대하는 만큼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면, 이는 각하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 밖에는 드릴 수 없습니다."[13] 이전에 무모한 공격을 감행하다가 큰 피해를 입는 것이 이유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14] 1860년대에 이미 전장에서 유선망을 이용한 통신을 이용 중이었다는 의미이다.[15] 참고로 당시 공격에 투입된 부대중 하나는 바로 흑인으로 구성된 유색인종 부대였다. 원래 흑인 부대가 선봉을 맡을 예정이었으나 정치적인 이유에 의해 작전 직전 제비뽑기로 뽑힌 백인 부대로 교체되었고, 작전에 맞춰 훈련받지 못한 이 부대는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이후 그랜트는 이 작전을 "남북전쟁에서 가장 슬픈 사건이었다"고 회고한다.[16] 당연히 본대는 리치먼드로 진군하지만, 정작 사령관이었던 그랜트는 리를 추격하는 부대에 합류하여 추격전을 지휘한다.[17] 남부의 항복이 아닌 리 장군 부대의 항복이다. 하지만 워낙 리와 북버지니아군의 상징성이 컸기에 이 순간을 보통 남북전쟁의 종전으로 친다.[18] 이 항복 장면은 문서 말미에 여러 삽화로도 표현되어 있는데, 리는 귀족 복식의 정복을 잘 차려입고 등장했지만 그랜트는 야전 복장으로 참석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그랜트도 사실은 장군의 정복을 입고 왔다. 애초에 19세기는 현대처럼 야전 전투복과 정복이 칼같이 구분되는 시대가 아니다. 다만 그랜트가 복장은 제대로 입었어도 좀 꾀죄죄했을 뿐. 또한 항복문서는 당시 그랜트 휘하의 엘리 파커 중령이 작성하는데, 훗날 그는 그랜트에 의해 명예 준장으로 승진한다. 이런 장면에서도 그랜트라는 사람의 됨됨이를 잘 알 수 있다. 이후 100여 년간 여전히 인종차별이 법적으로 당연시되는 시대가 지속되지만, 그랜트는 이미 당시에 흑인으로 구성된 부대를 만들고 실전에 투입했으며, 역시 유색인종인 아메리칸 인디언 출신의 장교를 측근으로 두고 있었다.[19] 2021년 현재로는 빌 클린턴과는 동갑으로 공동 3위이다. 그리고 버락 오바마 취임 당시보다도 어렸다.[20] 전임 육군 사령관은 모두 소장 또는 명예중장이었으며, 그랜트 이후론 20세기가 될 때까지도 정규군 중장은 남북전쟁 때의 영웅들 서너 명을 제외하면 거의 20여 년 동안 새로 탄생하지 않았다. 대장도 윌리엄 T. 셔먼이나 헨리 셰리든 같은 남북전쟁의 영웅들 뒤로 제1차 세계대전까지 계속 공석으로 남아있었다.[21] 북부민주당 스티븐 A. 더글러스가 남북전쟁이 터졌을 때 괜히 공화당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도와 20만 의용군을 모집한 게 아니다. 민주당 입장에서는 이렇게라도 안 하면 북부민주당까지 미국에서 발붙일 곳이 없어진다고 할 정도로 절박했다.[22] 원래는 공화당원으로 링컨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냈다. 남북전쟁 직전에는 미국 전역 민간에 있는 을 미국 재무부로 끌어모으고, 민간에는 그린백이라는 불환화폐를 발행하는 아이디어를 내서 남북전쟁에서 북부의 승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다 1868년 9월에 민주당에 입당한다.[23] 다만 후술되어있듯 이런 북부와 남부 민주당의 갈등은 1872년 대선에서 재현되고 결국 폭발하고 만다.[24] 선거 제도도 잘 숙지하지 못했는지, 그는 2차례 선거 때마다 매번 상대방 후보에게 표를 던진 것으로도 나름 유명했다(…).[25] 사실 상기된 그랜트의 스캔들도 공화당 급진파를 싫어한 남부 보수파들이 고소고발을 남발해 일을 키운 측면이 있었다.[26]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역시 재선에 성공했지만, 알다시피 얼마 안 가 링컨은 암살당한다.[27] 그랜트 대통령이 남부 일부 주를 군정에서 해제한 게 1869년이었기 때문에 남부민주당은 이때부터 정치 참여가 가능해졌다. 그러나 남부민주당은 빼박 전범정당이었기에 선거 출마가 어려웠고 북부민주당과 통합한 것. 여담으로 남부민주당은 20세기 중반 민주당의 진보 주류화 과정 속에서 미국 흑인 민권 운동 등을 거치며 북부민주당과 완전히 갈라서게 되고, 되레 당시 남부전략 등을 구사하며 보수화되던 100여년 전 원수 공화당과 통합하게 된다. 현대의 민주vs공화당 구도는 이때 완성된 것.[28] 그래도 그릴리가 여론을 조성했기 때문에 데이비스는 1868년 당시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 특별사면했다. 이후 데이비스는 공무원으로 재직하다 1878년 버니지아 주 상원의원으로 당선돼서 1884년까지 재직했다.[29] 이러한 남부 군정 통치는 공화당 온건파격인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 때 가서야 해제된다. 물론 이 과정도 알고 보면 롤러코스터긴 한데, 자세한건 항목 참조.[30]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지금처럼 3선 제한이 헌법에 명시되어있진 않았으나,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이 2선만 하고 물러난 선례를 바탕으로 으레 2선 또는 1선만 하고 물러나는게 관례였다.[31] 이때 그랜트는 당시 동아시아 해상구도에서 중요한 문제였던 류큐 군도의 분할 통치를 이홍장에게 제의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제국과의 류큐 분할 교섭도 그랜트가 중재를 섰다. 다만 이 제안은 일본 측은 숙고했지만 이홍장이 거절하여 성사되지 못했다.[32] 트웨인이 회고록에 쓴 내용에 따르면, 그랜트가 회고록을 헐값에 출판하려고 해서 도와줬다고 한다. 덕분에 회고록은 인세만 2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고.[33] 그랜트는 대단한 애연가에다 주당이었다. 게다가 안주 없이 술만 마실 정도로 알코올중독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34] 다만 트웨인은 그랜트의 이름값이나 당사자가 직접 쓴 원고의 가치와, 그랜트의 글을 게재함으로써 해당 신문사가 기대할 수 있는 판매량 증가 등의 기대 이익에 비교하면 이 당시 그랜트가 받았던 원고료가 오히려 너무 작았고, 전문 작가가 아니었기에 자신의 글을 '팔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던 그랜트가 원고료의 시세를 잘 모르는 것을 신문사들이 악용하여 지나치게 적은 원고료만을 지급했다고 주장했다.[35] 이 당시 트웨인은 이미 전미에 이름을 떨친 유명 작가였고, 따라서 당연히 자기 책을 출판해 본 경험 역시 풍부했다. 트웨인이 순수하게 책을 팔아서 부를 얻은 전업작가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그랜트의 입장에서는 해당 분야 전문가의 소중한 조언으로 여겨졌을 것이다.[36] 물론 상기했듯 그랜트 자신은 초고를 겨우 완성하고 죽었기에 자신이 부귀영화를 누리진 못했다. 하지만 트웨인이 자서전에서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회고록 구술에 전념하던 말년의 그랜트는 자신이 건강을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고, 회고록의 출판에 대해 트웨인과 의논할 때도 출판 수입으로 빚을 갚고 가족들에게 충분한 유산을 남겨줄 수 있을지를 가장 염려했다고 한다.[37] 그랜트 사후 유족이 회고록의 인세로 받은 돈이 20만 달러인데 이는 2022년 기준 4,000만 달러가 넘는 엄청난 금액이다. 참고로 남북전쟁때 북군이 사용한 전비는 약 3억 1,000만 달러인데 2011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약 600억 달러정도이다.[38] 간단히 말해서, 출간 계획만으로도 사람들의 큰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는 유명인의 회고록이라면 일반적인 출판을 거쳐 소매상을 통해 판매하기보다는 사전 예약을 받아(가능하면 선입금까지 받으면 더 좋다) 출판하고 판매하면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39] 흥미롭게도 이는 남군의 명장 토마스 잭슨의 유언과 동일하다.[40] 물론 패자 측이라도 예법에 신경 안쓰는 경우 역시 있긴 하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싱가포르 전투 당시 영국군의 항복 사절이 (엄연히 군복이긴 하지만) 반바지를 입고 유니언잭(영국 국기)도 어깨에 덜렁덜렁 메고 가는 사진이 찍히는 바람에 "국가적 망신"이라며 해당 사령관이 비판을 받은 적도 있다. 물론 동남아시아의 뜨거운 날씨를 고려하면 해당 부대는 좀 억울하기도 할테지만.[41] 게다가 나중에 나온 대통령들 중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임기를 마친 대통령은 버락 오바마가 유일하다. 왜냐면 린든 B. 존슨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이후 그 뒤를 이어서 대통령이 되었고, 리처드 닉슨은 2번째 임기 도중 물러났으며, 로널드 레이건은 임기 도중 암살미수를 겪어서 부통령인 조지 H. W. 부시가 잠시 대통령직을 맡은 적이 있었고, 빌 클린턴은 2번째 임기 도중 탄핵소추를 겪었고, 조지 W. 부시는 임기 도중 질식사고에 걸려서 부통령인 딕 체니가 잠시 대통령직을 맡은 적이 있었다. 나머지 언급되지 않은 대통령들은 모두 재선에 실패.[42] 정확히는 애리조나의 그랜트 요새에서 따온거지만 해당 요새 역시 본 문서의 대통령 이름에서 따온거니 사실상 본문서의 대통령 이름에서 따온거나 다름없다.[43] 그의 아내는 칼에 맞아 결국 사망했다.[44] 뷰캐넌과 존슨 사이에 미국역사상 최고의 대통령 링컨이 있어서 두 사람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45] 영어로는 Ulysses라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