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는 좋았다
덤프버전 :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
지옥으로 향하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서양 속담
1. 개요[편집]
XXX는 좋았다 류의 원형으로 주로 경제, 복지, 사회정책에서 쓰이며 그 외 창작물에서도 나온다.
2. 특징[편집]
멸망에 처한 세계나 인간들을 구해내거나 혹은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어떠한 장치를 만들거나 시스템, 계획 등이 나와 있지만 어떠한 이유로 의도와는 다르게 나아가 안 그래도 안 좋았던 세계를 더 막장으로 치닫게 하거나 자신들의 계획에 이용하는 등 안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다. 고의가 아니라는 것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크게 안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가능성을 염두에 둔 상태로 하는 것(주로 도박)과 꼭 좋아질 거라고 예상했는데 정작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안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으로 나눈다. 정반대로 크게 의도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결과는 좋은 경우도 있다 자세한 건 결과는 좋았다 문서로.
현실에서는 주로 높으신 분들의 안일한 탁상행정과 판단, 당연히 그렇게 논리가 이루어지겠다고 생각하며 'A를 하면 어떻게 되니까 당연히 B가 되겠지'라는 생각이 대부분이거나 이론적으로 볼 때 더없이 완벽할 것 같은 생각을 철저한 준비도 없이 이론만 믿고 바로 시작해버릴 때 쉽게 일어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너무나도 크기 때문. 그 외에는 해외에서 먼저 도입하여 성공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을 자국의 실정에 맞게 현지화하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들여오다가 실효는 별로 거두지 못하고 부작용만 커져서 오히려 없는 것이 더 나은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 앞의 두 경우 모두 의도는 좋았으나 과정이 안 좋은 경우에 해당하며, 사전적 의미의 설레발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와 1:1 대응은 아니지만 약간 비슷한 속담으로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도 있다. 탁상행정 사례에서는 계획한 사람이 욕을 먹어 피해를 보기도 한다.
누군가를 돕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경우가 꽤나 있는데,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을 중요시하는게 아니라 내가 남을 돕고 있다는 자기 만족감이 우선인 전후가 뒤바뀐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하는 일이 좋은 일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고 남이 거부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직접 악의를 뿌리는 사람보다 알아채기 힘들게 문제를 더 크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이 열심히 하면 할수록 주변 사람들은 에너지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런 경우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항상 계획에 어떤 불순한 의도가 섞이지 않았는지 자신을 살피면서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토론을 해야 하고, 폭넓은 시각으로 일을 검토해야 한다. 대부분 이렇게 의도는 좋았다라고 시행한 일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결과가 적지 않으며, 또한 그 결과물 또한 어마어마한 사회적 손실을 초래하며, 이후 되돌릴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이다.
3. 문제점[편집]
다만 인간이란 존재는 전지전능하지 않기에 계획 당시의 지성으론 생각할 수가 없는 부분[1] 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까지 의도는 좋았다 식으로 비난만 할 수는 없다. 또한 계획에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 어쩌냐를 따지는 것도 자칫하면 계획의 변수나 허점을 고민하고 이에 대한 대비나 복안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 계획을 제기한 주창자 자체에 대한 비난이라는 논리적인 오류, 나아가 의미 없고 소모적인 논쟁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점에서[2] 문제가 발생한다.
분명히 말해둘 것은 위키니트[3] 나 프로불편러처럼 정작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입으로만 비아냥거리고 이건 이래서 안 될 거다 이건 저래서 안 될 거다 라는 핑계만 수백, 수천 가지를 늘어놓으며 부조리한 현실이나 상황을 외면하고 거기에 안주하려는 인간들까지 이 '의도는 좋았다'를 들어서 옹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해당 항목에서는 "공부 및 이론에는 무쌍을 찍는 인간들의 특징이 의욕만 넘쳐서 일을 벌여놓는 습성이 강하고, 경험을 많이 한 사람들의 특징은 반대로 어떤 일을 할 때 조심스럽고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말도 지나치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나아가 '경험 많이 한' 사람들을 '책상에서 공부만 한 사람'과 대조시켜서 지나치게 어떤 '보수적'인 대처를 찬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경험을 많이 했기 때문에[4] 그 경험에 지나치게 의지한 나머지 어떠한 상황에 대한 개선을 거부하며 고인물이 되어 버리고 자칫 개선의 기회를 놓쳐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는 사례도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경험 항목에서도 소개되어 있기도 하고, 괜히 시사 경제 용어로 '경험의 함정'(Experience Trap)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5][6]
그리고 최악의 결과가 왔는데도 의도는 좋았지 않느냐고 무작정 변호하는 것과 어차피 결과가 안 나올 게 뻔한데 의도만 좋아 봐야 아무 소용 없으니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말고 놔 둬라라고 손 놓는 것도 모자라 어떤 개선의 시도마저도 냉소주의의 잣대로 비아냥거리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이야기다. 앞에서 쓴 것처럼 사전에 그러한 결과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었는데 듣지 않아서 나온 결과라면 변호의 여지가 없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거는 저래서 안 되고..." 하는 식으로 무언가 어떤 사안에 대해 일방적으로 '안 된다'라는 부정적인 결과만을 전제하면서 단지 '예방'을 핑계로 어떤 부조리 또는 불편한 상황에 대해 그것을 뭔가 해결하거나 개선해 보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고 방기한 채로 어떤 개선의 시도조차도 찍어눌러 버리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위험 계산만 머릿속으로 굴리면서 아무 대책이나 계획도 세우지 않고 방기하는 것은 예방이 아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항목에서 지적하고 있듯 세상에는 예상조차 불가능하거나 예상을 하더라도 그 가능성이 너무도 희박하여 대비하는 것이 무의미하거나 대비 자체가 불가능 한 일 또한 많다. 대표적인 예시로 9.11 테러가 있다. 9.11 테러 이전에도 항공기 납치 사건은 매우 많았지만, 그때까지 대부분의 항공기 납치는 승객과 승무원들을 인질삼아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인질극 형태였지, 그 누구도 요구사항 하나 없이 자신들의 목숨까지 내던져가면서 항공기 자체를 테러의 수단으로 사용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고, 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일어나버렸고, 그 교훈으로 지금의 복잡하고 철저한 항공기 탑승수속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예상 밖의 사태는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예견할 수도 없고, 예견한다 하더라도 가능성이 너무도 희박하기에 배제되거나 재원의 한계 등의 이유로 다른 더 시급한 일에 우선순위가 밀리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처럼 실제로 인류의 역사는 소를 크게 잃고 나서야 다른 외양간들을 점검하고 고치면서 발전하였다. 오히려 소를 안 잃고 선제적으로 막은 사례는 인류 역사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이는 참사가 발생한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대대적인 개혁 및 수정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를 잃기 전에는 그런 방식으로 행동해서는 소를 잃는다는 교훈 또는 경험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심지어 미리 알더라도 다른 급하거나 중요한 일들에 밀려 우선순위가 뒤쳐지는 경우도 허다하다.[7][8] 대표적인 사례로 리스본 대지진 이후에 내진이 강화된 도시로 다시 태어난 포르투갈의 리스본이 있다. 비슷한 예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 전선이 종결되었기 때문에 전면적 핵전쟁이 방지되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모든 비행규정은 피로 쓰였다(All aviation regulations are written in Red blood)' 도 할 수 있는 항공 사건사고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역사 속에는 소를 한번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았다가 더 큰 참사를 부르는 경우들도 없지 않았다.
4. 철학적 관점에서[편집]
철학 사상마다 다를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론은 애초에 사람은 '나쁜 의도로' 무언가를 행한다는게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는 "선(善, 좋음)은 모든 것이 욕구하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근거로 삼는다. 언뜻 보면 모든 이가 선을 원한다는 말은 뜬금없어 보일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간음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데, 간음자가 원하는 것은 '쾌락'이며 쾌락은 그 자체로는 분명히 '좋은 것'이라는 점을 그는 지적한다. 간음을 저지르는 사람이 원하는 것은 '쾌락'이지 '죄과의 추악함'은 아닐 것이니까. 물론 '가정 파괴'나 '사회적 평판의 추락' 등도 아닐 것이다.
윤리학적으로 잘잘못을 살펴보자면 대표적으로 공리주의, 덕 윤리학,의무론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 공리주의는 결과론이기에 결과론적으로 재앙을 불러왔으니 틀렸다는 입장
- 덕 윤리는 그 사람은 선하니 비난할 수 없다는 입장
- 의무론이라면 결과를 떠나 그 행위 자체가 옳은 일인지를 따질 텐데, 사실 의무론도 일단 좋은 의도로 일을 하는게 중요하다고 여기고, 방법이 다른 상황에서 잘못된 결과를 이끄는게 아니라면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5. 관련 어록[편집]
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9]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유럽 속담[10]
지옥은 선의로 가득 차있거나 욕망으로 가득 차있다.
프랑스 신학자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에서 기원
The attempt to make heaven on earth invariably produces hell.
지상에 천국을 만드려는 시도는 지옥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2권[11]
[12][13]
Some of the worst things imaginable have been done with the best intentions.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것들 중 일부는 좋은 의도에서 생겨나지.
All bad precedents begin as justifiable measures.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고 해도 애초에 그 일을 시작한 동기는 선의였다.
모든 기예(技藝, techne)와 탐구(methodos), 또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좋음을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옳게 규정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 1.1-
“선(善, 좋음)의[15]
근거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욕구적 이유이며 악은 선에 반대 대립되기 때문에 어떤 악이 악인 한 자연적 욕구에 의해서도 동물적 욕구에 의해서도 의지인 지성적 욕구에 의해서도 욕구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악은 우유(偶有)적으로 욕구되는데 그것은 그런 악이 어떤 선을 수반하는 한에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은 어떤 욕구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 자연적 능동자가 박탈(결여)이나 부패(파괴)를 지향하지 않고 형상(形相, 이데아를 말함)을 지향한다. 이런 형상에는 다른 형상의 박탈이 결부된다. 그것은 또한 어떤 것의 출산을 지향하는데 이런 출산은 다른 것의 파멸인 것이다. 사자가 사슴을 죽이는 것도 음식을 지향하는 것인데 그 음식에 동물의 살해가 결부된다. 마찬가지로 간음자가 지향하는 것은 쾌락인데 그 쾌락에는 죄과(罪科)의 추악함이 결부된다.어떤 선에 결부되는 악은 다른 선의 박탈이다. 그러므로 악이 그것에 결부된 좋음(善)이 그 악에 의해 박탈되는 선 이상으로 욕구되는 것이 아니라면 악은 비록 우유적일지라도 요구될 수 없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1.19.9-
좋은 의도였다면 나쁜 결과를 가져왔어도 용서할 수 있지만, 좋은 목적을 가지고 나쁜 수단을 써서는 안된다.
토마스 아퀴나스, 이중결과의 원리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하지 말고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라.
칼 포퍼, 추측과 논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