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재(농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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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B 이광재 은퇴.jpg
이름
이광재(李光宰)
생년월일
1984년 4월 21일 (만 39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학교
용산고등학교 - 연세대학교
포지션
슈팅 가드
신체 사이즈
187cm, 82kg [1]
프로입단
2007년 드래프트 7번 (동부)
소속팀
원주 동부 프로미 (2007~2010, 2012~2014)
부산 kt 소닉붐 (2014~2018)
원주 DB 프로미 (2018~2019)
등번호
1번, 11번[2], 6번

KBL 챔피언결정전 우승 반지
2008

1. 개요
2. 행적
2.2. 부산 kt 시절
2.3. 제 2의 원주 DB 시절



1. 개요[편집]


부산 kt 소닉붐, 원주 DB 프로미 소속의 농구 선수였다. 한때 리그 최고의 슈팅 가드로 뽑혔으나 미스테리한 기량하락으로 몰락했다.


2. 행적[편집]



2.1. 원주 동부 시절[편집]


용산고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 입학해서 활약했다. 가족 전체가 농구 가족으로 유명한데, 부친인 이왕돈 씨는 삼성전자 농구단에서 활약했었고, 어머니 홍혜란 씨는 태평양 소속으로 뛰었던 국가대표 선수 출신. 그리고 여동생인 이유진은 부천 KEB하나은행 소속의 농구 선수였으나 2014-15 시즌이 끝난 후 임의탈퇴 형식으로 은퇴하였다. 아버지인 이왕돈은 안타깝게도 1991년뇌출혈로 쓰러지는 바람에 거동이 불편하다고.[3]

어쨌든 어린 시절부터 꾸준한 활약을 보이면서 연세대에서 양희종, 김태술과 함께 연세대를 이끌면서 선전했고, 좋은 루키들이 대거 데뷔한 2007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7번으로 동부에 입단하게 되었다. 참고로 감독인 전창진이 아버지 이왕돈 씨의 절친한 후배라서 엄청 굴렸다고 한다(...). 신인 시절에 가드진이 약한 동부의 주전 가드로 자리잡으면서 챔프전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며 신인 때 챔프진 반지를 차지했다.

그 뒤로는 그냥저냥 준수한 가드로서 활약하다가 2010년 상무에 입대했다. 2011-12 시즌 도중에 전역해 에 합류했다. 가드진의 선수층을 늘리는 정도가 되겠거니 했는데, 군 입대 전보다 향상된 슈팅 실력을 보여주면서 그렇지 않아도 강한 동부에게 날개를 달아줬다는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시즌인 2012-13 시즌에서는 부상으로 인한 떨어진 폼과 수비력에서 문제를 드러내며 부진했다. 결국 2013-14 시즌에도 부진이 이어지고 있어 새로 떠오르는 두경민이나, 삼성에서 임대된 박병우에 밀려 출전시간이 줄어들었다.


2.2. 부산 kt 시절[편집]


5년간 2억 7천만원의 FA계약을 맺은 뒤 부산 kt 소닉붐으로 트레이드되었다. 상대는 김현중김종범. 전창진이 감독으로 있는 kt에서 부활을 모색할거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대다수가 오버페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동부에서 보여주던 경기력 이하의 모습을 보여주며 바닥을 뚫을 기세로 못하고 있다. 팀에서 조성민의 부상 공백동안 슈터 역할을 메꾸기는커녕 3점 슛 확률이 13.6%라는 안습한 수치를 기록 중. 오죽하면 식스맨인 윤여권이 터지자 이광재의 비중이 매우 줄어들 정도니...


2.2.1. 2017-18 시즌[편집]




2.3. 제 2의 원주 DB 시절[편집]


파일:이광재 DB 마지막 시절.jpg

2018년 6월 1일 조건없이 친정팀 원주 DB 프로미로 친정팀에 4년만에 복귀했다. 외곽슈터의 모습을 확실히 보였으나 플레이오프 순위권에 들어가지 못했고, 시즌 종료 후, FA 신분이 되었다가 결국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이후, 이상범 감독과 은희석 감독의 도움으로 모교인 연세대에서 코치를 맡게 되었다. 2019년에는 이훈재 감독이 부천 KEB하나은행 감독으로 옮기면서 장창곤 코치가 감독으로 승격한 상무 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2019년 12월 22일에 본인이 현역 시절 뛰었던 두 팀인 DBkt원주 경기에서 은퇴식을 거행하였다.[4]

[1] 부산 kt 소닉붐 공식 프로필.[2] 2012-13시즌에만 동부에서 착용했다.[3] 동남아 전지훈련을 떠난 삼성 농구단을 지원하기 위해 출장을 갔다가 홍콩의 숙소에서 뇌출혈이 발병했다고 한다. 다행히 같은 방을 쓰던 후배이자 주무 전창진의 신속한 조치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4] 동시에 팀 창단 이후 24년 동안 팀을 위해 헌신한 박순진 체력코치 또한 은퇴 의사를 밝혀 같은 날에 은퇴식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