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섭

덤프버전 :

분류

파일:국회휘장.svg
대한민국 국회의장

[ 펼치기 · 접기 ]
제헌
[[제2대 국회|{{{-2 {{{#FFF 제2대

전·후
]]
[[제3대 국회|{{{-2 {{{#FFF 제3대

전·후
]]
[[제4대 국회|{{{-2 {{{#FFF 제4대

]]
이승만 신익희
신익희
이기붕
이기붕 곽상훈
[[제4대 국회|{{{-2 {{{#FFF 제4대

]]
[[제5대 국회|{{{-2 {{{#FFF 제5대

]]
[[제5대 국회|{{{-2 {{{#FFF 제5대

]]
[[제6대 국회|{{{-2 {{{#FFF 제6대

전·후
]]·[[제7대 국회|{{{-2 {{{#FFF 제7대

전·후
]]
곽상훈
백낙준
이효상
제8대
[[제9대 국회|{{{-2 {{{#FFF 제9대

전·후
]]
제10대
[[제11대 국회|{{{-2 {{{#FFF 제11대

]]
백두진
정일권
백두진
정래혁
[[제11대 국회|{{{-2 {{{#FFF 제11대

]]
[[제12대 국회|{{{-2 {{{#FFF 제12대

전·후
]]
[[제13대 국회|{{{-2 {{{#FFF 제13대

]]
[[제13대 국회|{{{-2 {{{#FFF 제13대

]]
채문식
이재형
김재순
박준규
[[제14대 국회|{{{-2 {{{#FFF 제14대

]]
[[제14대 국회|{{{-2 {{{#FFF 제14대

]]
[[제15대 국회|{{{-2 {{{#FFF 제15대

]]
[[제15대 국회|{{{-2 {{{#FFF 제15대

]]
박준규 이만섭
황낙주
김수한
박준규
[[제16대 국회|{{{-2 {{{#FFF 제16대

]]
[[제16대 국회|{{{-2 {{{#FFF 제16대

]]
[[제17대 국회|{{{-2 {{{#000 제17대

]]
[[제17대 국회|{{{-2 {{{#000 제17대

]]
이만섭
박관용
김원기
임채정
[[제18대 국회|{{{-2 {{{#FFF 제18대

]]
[[제18대 국회|{{{-2 {{{#FFF 제18대

]]
[[제19대 국회|{{{-2 {{{#FFF 제19대

]]
[[제19대 국회|{{{-2 {{{#FFF 제19대

]]
김형오
박희태
강창희
정의화
[[제20대 국회|{{{-2 {{{#FFF 제20대

]]
[[제20대 국회|{{{-2 {{{#FFF 제20대

]]
[[제21대 국회|{{{-2 {{{#FFF 제21대

]]
[[제21대 국회|{{{-2 {{{#FFF 제21대

]]
정세균
문희상
박병석
김진표

국회부의장 · 임시의정원 의장




이만섭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파일:국회휘장(6대-7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북 제1선거구)[1]
제6대
송관수

제7대
이만섭


제8대
한병채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북 제1선거구)[2]
제9대
박찬
한병채

제10대
한병채
이만섭

선거구 개편
이만섭[A]
한병채[A]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북 제1선거구)[3]
선거구 개편
한병채[B]
이만섭[B]

제11대
이만섭

한병채

선거구 개편
유성환[C]
이만섭[C]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대구 제1선거구)[4]
선거구 개편
이만섭[D]
한병채[D]

제12대
유성환
이만섭

선거구 개편
유수호[E]
정호용[F]
최운지[G]



대한민국 제14·16대 전반기 국회의장
이만섭
李萬燮 | Lee Man-sup


파일:이만섭 전 국회의장.jpg

출생
1932년 2월 25일
경상북도 대구부 금정2정목
(現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3가)
사망
2015년 12월 14일 (향년 83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34호
본관
합천 이씨[1]

청강(靑江)
재임기간
제14대 전반기 국회의장
1993년 4월 27일 ~ 1994년 6월 28일
제16대 전반기 국회의장
2000년 6월 5일 ~ 2002년 5월 29일

[ 펼치기 · 접기 ]
부모
아버지 이덕상, 어머니 박순금[1]
배우자
한윤복[2]
자녀
아들 이승민[3], 이승욱[4]
딸 이승희, 이승인[5]
학력
대구수창국민학교 (졸업 / 29회)
대륜중학교 (졸업)[6]
연희대학교 정법대학 (정치외교학 / 학사)
공군사관학교 (중퇴, 명예졸업)
병역
대한민국 공군 이병 전역
종교
천주교 (세례명: 요셉)
신체
178cm, 65kg, B형
의원 선수
8
의원 대수
6, 7, 10, 11, 12, 14, 15, 16
약력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동아일보 주일 특파원
동아일보 주미 특파원
민주공화당 당무위원
제6대 국회의원 (전국구 17번 / 민주공화당)
제7대 국회의원 (경북 제1선거구[7] / 민주공화당)
민주공화당 원내부총무
대한체육회 고문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제10대 국회의원 (경북 제1선거구[8] / 민주공화당)
한국국민당 정책위원회 의장
제11대 국회의원 (경북 제1선거구[9] / 한국국민당)
한국국민당 부총재
제12대 국회의원 (대구 제1선거구[10] / 한국국민당)
한국국민당 총재
제14대 국회의원 (전국구 6번 / 민주자유당)
제14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제15대 국회의원 (전국구 3번 / 신한국당)
신한국당 대표위원 서리
국민신당 총재
새정치국민회의 상임고문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제16대 국회의원 (전국구 4번 / 새천년민주당)
제16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상훈
헝가리 십자대훈장 수훈

1. 개요
2. 생애
2.2. 3연속 여당 전국구 의원, 두 번의 국회의장
2.3. 말년
3. 평가
4. 대중매체
5. 여담
6. 소속 정당
7. 선거 이력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정치인.


2. 생애[편집]



파일:external/dimg.donga.com/75364418.1.jpg

△ 이만섭의 30대 시절

1932년 일제강점기하 경상북도 대구부 금정2정목(現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3가)에서 이덕상(李德祥)[2]밀양 박씨 박곤(朴坤)의 딸[3] 박순금(朴順今)[4]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륜중학교 시절 잠시 면관을 당하여 체육교사로 부임했던 김재규(훗날 중앙정보부장)와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맺었다.[5]


파일:external/www.yonsei.ac.kr/xqchqoaofcaq.jpg

△ 연세대 학생증

대구수창국민학교(29회)와 대륜중학교(당시 6년제)를 졸업하고 1950년 연희대학교에 진학하였으나 당시 대학교는 6월 학기제였는데 입학한지 한 달도 안되어 6.25 전쟁이 발발하여 경상북도 선산군이 본가인 친구와 함께 피난행렬을 따라 대구로 돌아왔다.

한 달 뒤 부산 영도로 피난내려온 연세대학교에 복학하려고 학교에 갔지만 형편없는 학교에 실망하고 결국 1951년 공군사관학교 제3기에 입학했다. 그러나 3학년 때 대전에 주둔하던 항공병학교에서 전술 훈련을 받던 도중 어느 날 밤 인근에 주둔하던 행정장교후보생들이 임관 전날 밤 대전 시내에서 술에 취해 주둔지로 들어와 공군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시비를 걸고 패싸움을 벌여 부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지자 생도회장으로서 진압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책임자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영창에 구속되었다.

평소 응원단장과 생도회장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이만섭 생도를 잘 알고 있던 당시 공군참모총장 겸 공군사관학교장 최용덕 장군이 이만섭 생도를 불러 "자네 같은 성격에 비행기를 타면 죽는다. 모든 뒷바라지는 내가 할 테니 대학에 복학하라"라고 권유하여 결국 퇴학처분 후 3학년까지 재학한 학력이 인정되어 이등병으로 전역하였다.[6] 그러나 최용덕 장군의 주선으로 완전히 민간인으로 쫓겨나지 않고 공군본부 서울분실에서 영어강사로 일하고 숙식도 해결하며 복학했다. 이만섭 의장의 증언

2006년 4월 2일 비록 퇴학은 당했지만 공군사관학교에서 당시 동기들이 참석한 가운데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한국경제


파일:external/www.yonsei.ac.kr/qexgzshubrmy.jpg

△ 연세대 응원단장 활동 모습

연세대 재학중 1956년 헝가리 혁명과 이를 저지하기 위해 소련군헝가리를 침공하는 사태가 터지자 다른 대학생 7명과 함께 "헝가리 자유수호 학도의용병"을 결성하여 헝가리 시민군측에 참전하려고 했으나, 해외출입국 자체가 통제되던 시기에 공산국가로 가는것이 당시 정권의 눈에는 그다지 좋게 보이지는 않은 모양이다. 참전 자체는 저지되었지만, 민주화 이후 헝가리 정부가 어찌 알았는지 공로를 인정받아 국회의장을 지내던 2002년 3월 헝가리 대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통신사 기자로 일하다가 1958년부터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4.19 혁명 뒤 자유당 내 3.15 부정선거 책임자 구속 동의안이 부결되자 기자석에 앉았던 이만섭이 화를 참지 못하고 '자유당 이 도둑놈들아!'라고 외친 적도 있는데, 이에 대해 국회부의장이 '이만섭 기자 조용하세요'라고 발언한 내용이 국회속기록에 남아있다.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으로는 최초로 국회속기록에 이름을 올린 사례라고 한다.


2.1. 민주공화당-한국국민당 시절[편집]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의 민정 이양과 관련된 기사로 잠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일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인연을 맺게 되어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공천을 받고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구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7]

제7대 국회의원 임기 중이던 1969년 정구영 등과 함께 3선 개헌에 반대하였다가, 정권 실세인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의 경질 등을 선행 조건으로 내걸고 찬성으로 선회하였다. 실제로 3선 개헌 이후 김형욱은 경질되었고, 이후락은 주일대사로 나가게 되었다. 이 때 김형욱과 이후락의 대처가 드러나는데, 김형욱은 단순무식 이미지답게 발끈하여 이만섭을 죽이려고 했었고 나중에 면전에서 “야, 이 의원! 나한테 이러기야?” 라고 큰소리친 반면에, 이후락은 감정을 최대한 자제하여 “이 의원님께서 나를 쫓아냈으니 불러들이는 것도 이 의원께서 책임지고 불러들여주세요” 라고 정치 고단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로 말미암아 이후락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7대 대선8대 총선을 앞두고 주일대사에서 중앙정보부장으로 복귀한 이후락은 이만섭을 낙선시키기 위해 다양한 공작을 펼친다. 총선을 앞두고 중구 선거구민들에게만 유독 과중한 세금고지서가 발부되지 않나, 선거 이후 옮겨가기로 한 버스터미널[8]이 선거를 앞두고 갑자기 옮겨가지를 않나, 선거운동기간 내내 중구에만 교통단속이 강화되지 않나;; 오죽했으면 선거운동 중 한밤중에 구청장이 찾아와 "의원님 죄송합니다. 위에서 꼭 떨어뜨리라는 지령이 내려왔습니다. 여당이지만 봐주지도 감싸주지도 말라고 합니다. 선거 당일 제가 대구에 없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미리 사과했을 정도였다. 결국 이만섭은 여당 공천으로 여당 텃밭에 출마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민당 한병채 후보에게 7천 여 표차로 밀리며 낙선하고 말았다.

8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 정치 낭인으로 지내야 했고, 10월 유신 이후 치러진 9대 총선에서는 박찬 변호사에 밀려 공천 탈락하면서 출마조차 하지 못했다. 그 뒤 같은 대구 출신이었던 이효상 당시 공화당 의장의 배려로 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상근부의장이라는 한직을 얻을 수 있었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다행히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아 대구 중구-서구-북구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9년 3월 국회 개원 때 여당 의원임에도 부가가치세 도입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정부를 비판하였다.[9]

전두환신군부가 집권하며 대한민국 제5공화국이 출범한 뒤 정치규제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대구 중구-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원내에서 당을 대표하는 부총재로 활약하였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김종철이 한국국민당 총재직을 사퇴하고 나서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최치환을 누르고 한국국민당 총재에 당선되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달서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한국국민당도 해산되었다.


2.2. 3연속 여당 전국구 의원, 두 번의 국회의장[편집]


이후 야인으로 있다가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의 제안으로 민주자유당에 입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민자당 대통령 후보 결정 과정에서 김영삼을 지지하였고, 1993년 재산 공개 파동으로 박준규국회의장직을 사퇴하자 잔여 국회의장 임기를 수행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7년 8월 신한국당 대통령후보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를 앞두고 신한국당 대표위원 서리에 임명되어 20일 동안 경선을 관리했다. 이인제가 신한국당을 탈당하자 뒤따라 탈당하여 국민신당 총재가 되었다.[10][11] 1998년 국민신당이 새정치국민회의에 흡수되자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이 되었고, 1999년에는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으로 신당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3연속 여당에서만 비례대표 의원이라는 나름의 진기록. 개원과 함께 제16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투표에 참여한 272명 중 140표를 얻어 132표를 받은 한나라당 서청원 의원[12]을 단 8표차로 제치는 격전을 치렀다. 취임사에서 "나는 한 번은 여당을, 또 한 번은 야당을,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국민을 보고 양심의 의사봉을 친다."는 말을 남겼다.

2002년 3월 8일에는 국회의장의 중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이뤄진 국회법 개정에 따라 헌정 사상 처음으로 무당적 국회의장이 되었다.[13][14] 그 기간은 동년 5월 29일까지 3개월로 비교적 짧았으나, 본인의 강력한 의지로 의장 임기 중에 무당적 국회의장의 전례를 남기고 국회법으로 명문화 한 것은 엄연한 업적으로 남았다. 국회의장 임기가 끝나자 새천년민주당으로 복당하였으며, 2004년 8선을 마지막으로 정계를 은퇴하였다.


2.3. 말년[편집]



파일:external/pds.joins.com/NISI20151218_0006249769_web.jpg


2015년 12월 14일 사망하였다. 향년 83세. 12월 18일 국회의사당에서 국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했다.


3. 평가[편집]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5121514822641033.jpg


파란만장하던 군사정권과 3김시대에서 같이 활동했던 김대중, 김영삼 등과 비교해 인지도는 크지 않고, 한편으로는 사실상 여당 생활만 해 본 정치인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여당 전국구 의원만 4번을 했으며 야당으로 있을 때는 구 여당계 관제야당인 한국국민당의 총재였기 때문. 전국구-소선거구 1위-낙선-낙천-중대선거구 2위(2회)-낙선-전국구 3회로 임기를 마쳤기에 유권자들의 정치적 의사와 무관하게 당선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다만 눈에 띄는 철새 행각을 벌이거나 본인이 자부하듯 여당의 거수기로 활동하지 않았던 점, 청렴했던 점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의회주의자를 견지한 만큼 보스 중심 정치인 삼김정치에도 비판적이었으며, 특히 의회주의자를 자처하던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 후 국회에 각각 3회/1회만 방문했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파일:319157.jpg


또한 두 번의 국회의장 재임 중 여러 차례 의장 직권상정-여당 단독 처리, 즉 날치기 압박을 많이 받았음에도 이를 거부하여 입법부의 수호자 노릇 역시 톡톡히 수행한 정치인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2000년 자민련을 위한 교섭단체 완화 목적의 국회법 개정안의 날치기 사회를 거부하고 사회권 이양도 거부한 것이다. 이것이 그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남아 2001년에 출간된 <날치기는 없다>라는 서적도 있다.

하지만 노무현 탄핵 정국 당시 날치기에 동조한 점은 의아한 점.[15] 실제로 열린우리당 해체 전에 이만섭은 모두까기 모드의 인터뷰를 하면서 노무현이 국민적 신뢰를 완전히 잃었기 때문에 정권 재창출을 위한 속임수 개편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정치자금 1/10 발언이나 대통령의 특정정당 지지발언 등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하며, "탄핵은 노 대통령이 자초한 것"이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박관용 국회의장의 경호권 발동은 문제라고 지적하는 모두까기 모드를 잊지 않았다. 탄핵 정국 직후 정계 은퇴를 했기 때문에 큰 과오로 기억되지는 않았다.


4. 대중매체[편집]





  •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119회에서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던 시절부터 등장한다. 작중 당대 언론계의 큰어른인 최동열이 인정할 정도로 유능한 인재. 고대생 습격 사건 때도 현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국회의원이 된 모습으로 재등장해 김두한국회 오물 투척 사건을 일으키기 전, 정부의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해 분노하여 질의 연설을 하던 중이었고, 그 후 이어지는 김대중의 질의 연설이 끝나자, 그 다음에 차례였던 김두한이 연설을 하다가 갖고온 똥물을 뿌려버린다. 나중에는 장내가 아수라장이 되자 김대중, 박순천과 함께 당황하여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배우는 태조 왕건에서 왕식렴, 제국의 아침에서 왕욱을 맡은 정국진. 외모가 실제 이만섭의 젊은 시절과 상당히 닮았다. 다만 이만섭 본인은 "(젊은 시절의) 나보다는 못생겼더라."고 아쉬워했다.



5. 여담[편집]



파일:external/www.yonsei.ac.kr/klzmdpmekbel.jpg


2009년 모교 연세대에서 연희관(사회과학대학 소재)의 401호실을 '이만섭 홀'로 명명하여 경의를 표했다.


파일:external/webc.sayclub.co.kr/%B1%E8%B5%CE%C7%D1%BB%E7%B8%C1%20%B9%CC%BD%BA%C5%CD%B8%AE%20%C7%AE.asf_001244724_resize_RESIZED.jpg
파일:external/webc.sayclub.co.kr/%B1%E8%B5%CE%C7%D1%BB%E7%B8%C1%20%B9%CC%BD%BA%C5%CD%B8%AE%20%C7%AE.asf_001249829_resize_RESIZED.jpg


김두한 얘기를 꺼낼 때, "입 바른 소리하는 훌륭한 사람인데 너무 일찍 죽어서 안타깝다" 고 털어놨다. 이만섭에게 김두한은 '재야 정치인 김두한'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불량배 김두한' 이 아니라는 얘기다. 실제로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꽤 났음에도[16] 친분이 깊었다고 한다.

#이만섭의 회고록에 의하면 과거 1969년 의원 총회에서 3선 개헌에 관한 발언을 하며 3선 개헌에 앞서 구체적인 선행 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밝히면서 조건을 늘어놓았는데 그 중에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이후락 비서실장의 퇴진이 들어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분노한 김형욱에 의해 암살당할뻔 했던 것을 김성곤 의원이 알아채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 사실을 알려 저지했다고 한다.

야구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마침 박용오 전 KBO 총재와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 국회의장 재임 당시 자신의 고향인 대구광역시에서 열린 2001년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를 맡기도 했다.


6.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1963 - 1980
창당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80 - 1981
정당 해산

[[한국국민당(1981년)|
파일:한국국민당(1981년) 글자.svg
]]

1981 - 1988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88 - 1992
정당 해산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2 - 1995
입당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7
당명 변경

[[무소속|
무소속
]]

1997
탈당[17]

[[국민신당(대한민국)|
파일:국민신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7 - 1998
창당

[[새정치국민회의|
파일:새정치국민회의 흰색 로고타입.svg
]]

1998 - 2000
합당[18]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0 - 2002
합당[19]

[[무소속|
무소속
]]

2002
탈당[20]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2 - 2005
복당
정계 은퇴

[[민주당(2005년)|
파일:민주당(2005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5 - 2006
당명 변경

[[무소속|
무소속
]]

2006 - 2015
탈당
사망

7.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3,112,985 (33.47%)
당선 (17번)
초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1[21]
24,562 (50.62%)
당선 (1위)
재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20,265 (41.52%)
낙선 (2위)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1[22]
66,598 (24.83%)
당선 (2위)
3선[23]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1[24]

[[한국국민당(1981년)|
파일:한국국민당(1981년) 글자.svg
]]

74,176 (30.99%)
당선 (1위)
4선[25]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중·서
78,305 (23.42%)
당선 (2위)
5선[26]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달서
44,742 (33.04%)
낙선 (2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7,923,718 (38.49%)
당선 (6번)
6선[27]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6,783,730 (34.51%)
당선 (3번)
7선[28]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6,780,359 (35.86%)
당선 (4번)
8선[29]


8. 둘러보기[편집]
















[1] 첨사공파 34세손 ○기(基) 항렬. 족보에는 항렬자를 따라 흥기(興基)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본명인 만섭(萬燮)은 일명(一名)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2] 보명(譜名)은 이환상(李煥祥)이다.[3] 다음은 이하 출처 사진이다. 파일:이환상 족보.png[4] 출처 기사.[5] 김재규가 아낀 제자가 이만섭이라고 한다. [6] 이만섭이 공군사관학교를 퇴교하는 날 3기 동기생들과 문관들이 모두 나와 울면서 배웅했다고 한다[7] 제6대 국회의원 임기 중이던 1966년 삼성그룹사카린 밀수 사건을 비판하였다가 이 때 이병철이맹희에 의해 낙선할 뻔했다는 이야기가 있다.[8] 현 동대구역 터미널이 아닌 동부정류장 이야기다.[9] 이를 차지철 경호실장이 박정희에게 악의적으로 보고하여 박정희가 이만섭을 민주공화당에서 제명시키려 하였다가,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류혁인 정무수석비서관 등의 만류로 겨우 없던 일이 되었다.[10] 1994년 선거법 개정 이후로는 전국구 국회의원도 현재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처럼 탈당 시 의원직을 상실했기에, 이만섭도 이 때 의원직을 잃었다.[11] 사실 이 행보는 이만섭 의원의 정치 이력 가운데 가장 신기한 행보인데, 의외로 문민정부 청와대와의 교감이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방금 전까지 대표로 있던 사람이 의원직까지 포기하며 탈당을 한다는 자체부터가 이례적이기 때문. 이회창 후보 측에서 김영삼 대통령 지우기를 실행하며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고.[12] 지금도 8선의 보수계 최다선 원로지만 이 시기에도 5선의 중진의원이었다.[13] 14대 전반기 박준규 의장도 잠시 무당적이었으나, 이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YS의 외압으로 탈당한 케이스였다.[14] 이만섭 의장 역시 스스로 새천년민주당에 탈당계를 제출하여 탈당했다. 상술했듯 1994년 선거법 개정으로 그 후의 전국구 의원 또한 현재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처럼 탈당 시 의원직을 상실당하는 구조로 바뀌었기에, 국회의장 당적 금지 규정이 만들어질 당시 비례대표 국회의원의 탈당 시 의원직 상실 규정에 국회의장 선출로 인해 탈당해야 하는 경우에는 탈당해도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15] 물론 이때는 엄연히 새천년민주당에 복당한 상태였으니 당론을 따른 것이 된다.[16] 김두한은 1918년생으로 무려 14살이나 많다. [17] 국민신당 창당을 위한 탈당.[18] 새정치국민회의에 흡수 합당.[19]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20] 국회법 개정으로 인한 탈당.[21] 대구시 중구[22] 대구시 중구, 북구, 서구.[23] 무소속 한병채 후보와 동반 당선.[24] 대구시 서구, 중구.[25] 민주정의당 한병채 후보와 동반 당선.[26] 신한민주당 유성환 후보와 동반 당선.[27] 전반기 국회의장.[28] 1997.10.28. 의원직 상실(15대 대선 이인제 후보 지지, 신한국당 탈당).[29] 전반기 국회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