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사모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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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사모라노의 역임 직책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하비에르 마르가스
(1995~1997)

이반 사모라노
(1997~2001)


마르셀로 살라스
(2001~2007)

이반 사모라노의 수상 이력



칠레의 前 축구선수

파일:사모라노.jpg
이름
이반 사모라노
Iván Zamorano
본명
이반 루이스 사모라노 사모라
Iván Luis Zamorano Zamora
출생
1967년 1월 18일 (57세)
칠레 산티아고
국적
[[칠레|

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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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

신체
178cm
직업
축구선수 (스트라이커 / 은퇴)
소속
유스
코브레살 (1983~1985)
선수
코브레살 (1985~1988)
코브레안디노 (1985~1986 / 임대)
FC 장크트갈렌 (1988~1990)
세비야 FC (1990~1992)
레알 마드리드 CF (1992~1996)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96~2001)
클루브 아메리카 (2001~2003)
콜로-콜로 (2003)
국가대표
파일:칠레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69경기 34골[1] (칠레 / 1987~2001)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경력
2.1. 클럽 경력
2.2. 국가대표 경력
3. 기록
3.1. 대회 기록
3.2. 개인 수상
4. 여담



1. 개요[편집]


칠레의 前 축구선수로 마르셀로 살라스와 함께 칠레를 대표하는 축구선수 하면 꼭 뽑히는 전설적인 스트라이커다.


2. 경력[편집]



2.1. 클럽 경력[편집]


사모라노는 트라산디노에서 축구를 시작하여 1985년 칠레의 CD 코브레살으로 이적하게 된다. 그리고 1988년에는 유럽으로 무대를 옮겨 스위스 슈퍼 리그FC 장크트갈렌으로 이적하여 56경기에 출장하여 34골을 넣었다. 라리가로 무대를 옮긴 그는 1991년에 세비야 FC 1군 경기에 출장하여 59경기 21골을 넣었다.

5백만 달러에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한 사모라노는 4시즌 동안 라리가 우승 1회, 코파 델 레이 우승 1회,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 1회를 하였다. 1995년 당시 감독이었던 호르헤 발다노의 지휘 아래 사모라노는 27골을 넣어 팀의 라리가 우승을 도왔으며[2] 사모라노 본인은 라리가 득점왕인 피치치를 수상하였다. 이 시즌엔 특히 플레이메이커였던 미카엘 라우드루프와의 호흡이 뛰어났으며, 1992-93, 1994-95 시즌엔 스페인의 EFE 통신사에서 이베리아 반도라틴아메리카 출신 축구선수들 중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이에게 주어지는 EFE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137경기에 출전, 77골을 넣었다.

스페인에서 5시즌을 보낸 후, 사모라노는 세리에 A인터밀란에서 1996년부터 2000년까지 통합 4시즌 동안 뛰었다. 그 당시 같이 뛰었던 선수들로는 유리 조르카에프, 디에고 시메오네, 하비에르 사네티, 호나우두가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팀내 첫 번째 스트라이커라는 뜻으로 등번호 9번을 배정받았으나, 노쇠화가 오기 시작하여 인테르 시절에는 단 한 시즌도 두 자리 수 득점을 기록하지 못하여 레알 마드리드 시절에 비해 부진하였고 결국 인테르 시절에는 리그에서 4시즌 동안 총 101경기에 출전해 26골만을 득점하며 결과적으로는 인테르 최악의 영입 중 한명이 되었다. 게다가 인테르는 사모라노를 영입하기 위해 레알 마드리드에게 호베르투 카를루스+현금까지 얹어서 트레이드를 했던지라 축구팬들 사이에서도 인테르의 실수라고 언급되곤 한다.[4]

1998년에 사모라노는 UEFA컵 결승전 SS 라치오전에서 선취골을 넣어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사모라노는 1997년 FC 샬케 04와의 UEFA컵 결승 2차전에서도 골을 넣어 승부차기까지 이끌었으나, 승부차기에선 첫 번째 키커로 나서 실축을 하여 팀이 패배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2001년에 멕시코의 클루브 아메리카로 이적한 사모라노는 두 시즌 동안 뛴 후, 2003년 고국으로 돌아와 콜로-콜로에서 은퇴하였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사모라노는 1987년 6월 19일에 페루와의 친선경기에서 20살의 나이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하여 칠레의 3-1 승리를 맛봤다.

1997년 4월 29일에는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5골을 넣어 팀의 6-0 승리를 이끌었으며,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에서도 칠레의 4경기에 전부 나왔으며,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마르셀로 살라스의 골을 어시스트했다.

2000 시드니 올림픽와일드카드로 참가해 미국과의 경기에서 골을 넣으며 2-0으로 이기게 하는 등, 칠레가 동메달을 따는데 기여했으며, 6골을 넣어 득점왕에도 올랐다.

이후 사모라노는 34세의 나이로 2001년 9월 1일, 프랑스와의 친선경기에서 팀의 2:1 승리를 도우며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


3. 기록[편집]



3.1. 대회 기록[편집]


  • 코브레안디노
    • 칠레 세군다 디비시온: 1985




  • 클루브 아메리카
    • 멕시코 프리메라 디비시온: 2002 V[5]



3.2. 개인 수상[편집]


  • 스위스 슈퍼 리그 올해의 외국인 선수: 1989-90
  • 라리가 득점왕: 1994-95
  • 라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6]: 1994-95
  • 트로페오 EFE: 1992-93, 1994-95
  • 올림픽 남자 축구 득점왕: 2000
  • ESM 올해의 팀: 1994-95
  • FIFA 100: 2004


4. 여담[편집]


파일:사모라노 등번호.jpg
  • 이 사람의 가장 유명한 일화는 무엇보다도 호나우두와의 일화일 것이다. 사모라노는 등번호 9번의 주인이었고, 뒤늦게 입단한 호나우두는 10번을 달고 뛰고 있었다. 그러다 로베르토 바조까지 이적하고 바조가 구단에게 등번호 10번을 요구하자 호나우두는 10번을 바조에게 양보하였다. 그런데 나이키의 마케팅 팀에서 호나우두의 9번 마케팅을 반강제로 진행하기 시작하자 안 되겠다 싶었던 사모라노[7]는 호나우두에게 9번을 양보했다. 재배정된 배번인 18번에서 재치를 발휘해 1+8번을 달고 뛰었으며 계속 9번 스트라이커라고 여겨질 수 있었다. 호나우두는 사모라노가 먼저 9번을 양보해서 매우 고마웠다고 하고 둘의 사이는 급속도로 친해졌다고 한다. 이후 사모라노의 은퇴 경기 때 다른 일정을 다 미뤄두고 15시간 동안 잠도 안 자고 비행기를 타고 와서 사모라노의 은퇴경기에 참가했다. '그는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 멋진 선수'라는 말도 했다.
  • 1994년 9월 3일, 친정팀 세비야 FC를 상대로 12초만에 득점에 성공하였다.
  • 은퇴 후에는 고향 산티아고시의 새 교통 시스템 홍보대사가 되었으나 그 시스템에 하자가 많아서 본인의 신뢰도가 깎여나갈 수 있다는 우려가 일기도 했다.
  • 네임드 스타 플레이어였음에도 불구하고 문서2019년 9월 21일에야 처음으로 작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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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표팀 역대 득점 4위.[2] 이 중에는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넣은 4골도 있다.[3] 레프트백 저주 시절의 인테르의 레프트백들의 인테르 시절의 모습의 예시를 보여주자면 한국 맨유 팬들에게 익숙한 선수인 미카엘 실베스트르는 인테르에서 나름 괜찮은 활약을 했으나 한시즌 만에 맨유로 떠났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탈리아 국가대표로 뛰었고 한때 말디니의 후계자로 기대받던 프란체스코 코코의 경우에는 셰도로프와 트레이드딜로 인테르로 이적한 뒤에는 예전부터 있던 유리몸 기질이 인테르에서 제대로 발동되어 경기 자체를 못뛰며 완전히 망하고 말았으며 인테르에서 승격해서 써본 대표적인 유스 선수의 예시로는 한국의 세리에 팬들에게는 우디네세에서 전성기를 보낸 레프트백으로 기억에 남은 선수인 조반니 파스콸레가 있는데 파스콸레도 발전되는 모습이 없다보니 이후 임대를 다니다가 리보르노로 완전히 이적하였고 2시즌 뒤에는 리보르노를 떠나 우디네세로 이적하였다.[4] 특히 카를루스는 레알 마드리드 이적 이후 기량이 만개하며 세계적인 레프트백이자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급 선수로 자리잡게 되지만 이후 인테르는 카를로스가 떠난 뒤 영입하거나 유스에서 승격한 대체자들이 좀 괜찮다 싶으면 얼마 안가 다른 팀으로 이적한다거나 혹은 연달아 망하면서 믿고 맡길만한 전문 레프트백이 부재[3]하다는 레프트백 저주에 시달리고 말았던 바람에 사모라노의 영입은 인테르 팬들에게 더더욱 욕먹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인테르의 레프트백 저주는 파비오 그로소막스웰을 영입한 06-07시즌이 되어서야 겨우 끝나게 되었다.[5] Verano(베라노)[6] 돈 발롱 어워드[7] 원래 인테르의 스폰서는 엄브로였지만 호나우두의 스폰서였던 나이키로 변경되면서 나이키가 인테르에게 호나우두의 등번호 변경을 요구한 것으로 사모라노는 구단의 스폰서인 나이키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