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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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호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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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A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11.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2017

파일: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로고.svg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은메달
2009





보유 기록
통산 최다 만루홈런
17개[1]


이범호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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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이글스 등번호 56번
이용섭
(1998~1999)

이범호
(2000~2001)


피코타
(2002~2003)
한화 이글스 등번호 31번
심재윤
(2000~2001)

이범호
(2002~2003)


송창식
(2004~2008)
한화 이글스 등번호 7번
백재호
(2000~2003)

이범호
(2004~2009)


송광민
(2010)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8번
에가와 토모아키
(2005~2009)

이범호
(2010)


윌리 모 페냐
(2012)
KIA 타이거즈 등번호 25번
고우석
(2010)

이범호
(2011~2019.7.13.)


박찬호
(2019.7.14.~2021)
KIA 타이거즈 등번호 71번
김상훈
(2019~2020)

이범호
(2021~)


현역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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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No.71
이범호
李杋浩 | Lee Bumho

출생
1981년 11월 25일 (42세)
경상북도 의성군[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대구수창초등학교 (졸업)
경운중학교 (졸업)
대구고등학교 (졸업)
목원대학교 (행정정보학 01[2] / 학사)
신체
183cm, 96kg, O형
포지션
3루수[3], 유격수[4], 2루수[5], 1루수[6], 우익수[7]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2000년 2차 1라운드 (전체 8번, 한화)
소속팀
한화 이글스 (2000~2009)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2010)
KIA 타이거즈 (2011~2019)
지도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연수코치 (2019)[8]
필라델피아 필리스 연수코치 (2020)[9]
KIA 타이거즈 2군 총괄코치 (2021)
KIA 타이거즈 1군 타격코치 (2022~)
프런트
KIA 타이거즈 스카우트 (2020)
병역
예술체육요원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3위)
등장곡
리쌍 - Yes. Ok (Feat. Double K)
응원가
한화 시절: 클론 - 발로차[10]
KIA 시절: 유정석 - 질풍가도[11][12]
- 열혈남아[13][14]
Gipsy Kings - Volare[15][16]
본관
전주 이씨
종교
불교
1. 개요
3. 플레이 스타일
4. 은퇴 이후
4.1. 프런트 경력
4.2. 지도자 경력
5. 여담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야구 선수. 現 KIA 타이거즈 타격코치.

현역 시절 포지션은 3루수이며 한화 이글스KIA 타이거즈의 간판 스타로 활약하였다. '꽃범호'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며, 리그에서 가장 많은 만루홈런을 기록[17]하여 '만루의 사나이'로도 불렸다.

2. 선수 경력[편집]


이범호의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편집]



이범호의 타격폼[18]

만루의 사나이임을 다시 한번 입증시키고 있는 이범호입니다!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3회 그랜드슬램을 날린 이후 MBC SPORTS+ 한명재 캐스터의 멘트.

잡아당기는 타격을 장기로 구사하며 공격적인 스윙을 한다. 타율은 평범하고 특히 병살타가 많은 편이지만[19] 평균 수치를 월등히 상회하는 장타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2004 시즌 이후에 꾸준히 20홈런 이상을 찍어주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특히 2017년 한국시리즈에서도 만루홈런을 치는 등, 중요한 경기에서 한 방을 쳐줄 수 있는 클러치 능력을 가지고 있어 많은 투수들이 두려워하는 선수다. 통산 최다 만루홈런(17개)는 물론, 준플레이오프 최다 홈런 기록 보유자(7개)이기도 하다.

수비는 본래 평범했지만 유승안 감독 시절 유격수로 구르면서 경험을 쌓아[20] 일취월장했다. 물론 그 리스크인지 2004년 3할을 찍긴 했으나 실책이 무려 30개로, 이는 2021년 김혜성의 34개, 1986년 유지훤의 31개에 이은 역대 3위 기록이다. 그래도 유격수를 볼 때나 실책이 많았지, 3루수로서는 어느 팀에서든 주전을 하기에는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21] 다만 3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슬슬 노쇠화 기미가 보이는지 3루 수비에서 허점을 드러내고 있다. 송구는 여전히 안정적이지만 기본적으로 발이 느려 수비범위가 좁았는데, 타구 반응속도가 현저히 떨어져 평범한 땅볼이나 직선타가 될 타구가 3루수 옆을 빠져나가는 안타로 연결되는 장면을 많이 보여주었다.[22] 다만 수비범위 내에서는 송구능력은 발군이었다. 송구동작이 화려하지 않음에도 빨랫줄처럼 1루로 송구하는 모습은 수준급의 3루수임을 보여주었다.

원래는 덩치에 비해 꽤 빨랐다. 2008년 12개로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하기도 했다. 무릎, 햄스트링, 종아리 등을 골고루 다치는 통에 주루툴이 감소한 것. 연속출장을 이어가면서 최태원의 최다연속 출장기록에 도전하고 있었지만, KIA 타이거즈/2008년/6월/4일전에서 선발 명단에 빠져 있다가 갑작스런 폭우로 교체출장할 틈도 없이 강우콜드 선언, 결국 어이없게도 615경기에서 연속출장을 마감해야 했다. 그래도 이 기록은 최태원, 김형석, 황재균에 이은 역대 4위 기록이다. 다만 연속출장을 이어갈 정도로 튼튼한 몸은 그 연속출장의 여파로 잔부상이 생기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2011년 8월 7일 SK전에서 허웅과 충돌하면서 발생한 고질적 햄스트링 부상으로 인해 옛말이 되었다. 또한 이 때문에 한화 시절에는 나쁘지는 않던 주루도 망해버려서 KBO 리그의 대표적인 발이 느린 주자가 되어버렸다.

프로 커리어의 초반과 중반부를 인조잔디인 대전과 무등에서 보냈다. 그래서 햄스트링 부상이 자주 찾아왔고, 다른 것도 아닌 이 점 때문에 체력보다 조금 일찍 선수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선수생활 후반부에는 시설이 좋은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에서 뛰었고, 덕분에 2016년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 이처럼 선수의 황혼기라 불리는 30대 중반에 타격성적이 대전[23]에 있을 때보다 좋은 성적을 찍었기에 매우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아 있다.


4. 은퇴 이후[편집]



4.1. 프런트 경력[편집]


제74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를 참관하였고, 자신의 현역시절 포지션과 같은 내야수를 중점적으로 찾아보겠다고 밝혔다. 그로 인해 데려온 내야수는 김원경, 장시현, 이준범이다.


4.2.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후 2019년 9월부터 10월까지 김성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카운셀러의 배려로 소프트뱅크 추계 캠프에서 코치 연수를 잠시 맡았다.

2020년부터는 KIA 타이거즈 스프링캠프가 열리는 플로리다주 클리어워터에 잠시 합류한 후, 시즌이 개막되면 필리스의 루키팀인 GCL 필리스에서 코치를 맡는다고 한다. 다행히 필리스에 한국인 직원이 있어서 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KIA 구단은 밝혔다. 여담으로 루키 리그는 월급도 없으며 식사, 교통비 그 모든 걸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데, KIA 구단에서 흔쾌히 전액을 지원해준다고 한다.

하지만 코로나바이러스-19가 세계로 대유행하며 리그가 열리지 않자, 결국 코치연수를 포기한 후 귀국하여 KIA 스카우트로 전업했다. 기사

2021 시즌 KIA 2군 총괄 코치로 선임되었다. 2021 시즌 KIA는 2군 감독 시스템을 폐지했고 그 대신 도입한 게 총괄 코치인데 맷 윌리엄스가 2군 감독까지 맡기엔 한계가 있으므로 사실상 유사 감독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되겠다.

2022 시즌부터 1군 타격코치를 맡는다. 부임 이후 선수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야구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한다. 이에 배팅볼을 잘 치는 쪽으로 던져줘 좋은 타구가 나와 텐션이 높아지도록 하는 등 장점을 부각시켜 자신감을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코칭을 하고 있다. # 2군 총괄 코치보단 타격 코치가 더 맞는 옷이라고 표현했다.#

시즌 초반 기아 타선이 작년에 비해 차원이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팬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걸맞게 팀의 공격 성적 또한 홈런수 제외 전부 탑3 안에 들고 있다. 결국 팀 타율-출루율-장타율, 득점, 안타 모두 리그 1위를 찍으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비록 후반기 홈런 수가 급감해 총 113개로 4위가 되긴 했으나, 바로 전 시즌 김기아라 불리며 역대 최악의 페이스를 달렸던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


5. 여담[편집]


  • 별명은 '꽃보다 아름다운 범호(줄여서 꽃범호)', '한화의 매력남'[24], '월드추남'[25], KIA 시절에 새롭게 나온 별명으로는 2017년 6월 14일 마이데일리 이후광 기자의 오타에서 나온 별명인 "이봄허"[26], KIA의 주장을 3년간 역임한 탓에 꽃주장, 듀당, 그 외에 두더지 등[27]이 있다. 아무쪼록 개그 콘서트오지헌을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어 붙은 별명들. 본인도 컴플렉스를 느끼는 듯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꽃범호'라는 별명은 이범호를 놀리는 것이 아닌 팬의 애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웬만한 야빠들 사이에선 이라고만 해도 다 알아듣는다.

  • 이적생 출신으로는 최초로 타이거즈 주장을 맡았다. 2014 시즌부터 2016 시즌까지 3년간 주장을 맡았다. 3년차인 2016 시즌에는 후배들에게 넘겨주려 했으나, 김기태 감독의 요청으로 주장을 1년 더 하게 되었다.

  • 유독 다르빗슈 유에게 상당히 강했다. WBC 결승에서 연장까지 승부를 끌고 간 것도 이범호였고, 2010 시즌 중에서는 멀티히트까지 때려낸 적이 있었다.

  • 동시대에 리그를 지배했던 투수인 더스틴 니퍼트에게도 상당히 강했다. 연타석 홈런에 심지어 한국시리즈에서 빅게임피쳐에 무실점 기록을 세운 니퍼트를 상대로 만루홈런을 때려서 우승을 확정시킨적도 있다. 뿐만아니라, 유희관 노경은 등 두산 의 주축투수 상대로 대부분 쥐잡듯이 잡았다.

  • 리그 최고의 빅게임 클러치히터. 수많은 결승타를 때려냈으며, 국제대회의 여포 그리고 준플레이오프 최다홈런기록, 최다만루홈런기록 등등 찬스상황에 굉장히 강했다.

  • 햄스트링 부상 이후 주력이 크게 떨어져 굉장히 느리지만 고교 시절에는 100m를 12초대에 끊는 준족이었다.[28] 지명 당시 같은 팀 동료이자 친구인 김주찬과 유격수 최대어로 꼽혔다.


  • 인터뷰에서 "정치적 문제를 떠나서 전두환 대통령 덕분에 프로야구가 만들어졌잖아요. 야구선수들이 큰 은혜를 입은 거죠. 누군가 나서 돔구장을 짓는다면 선수들이나 팬들은 그분을 영원히 기억할 겁니다."라고 대답하기도 했다.[29]

  • 화장품 광고를 찍은 게 아닌가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런데 사실 이범호는 2008년에 강민호, 이용규와 함께 왁스 광고를 찍은 적이 있다.#

  • 소속팀 모기업 광고에 나오기도 했다. 2012년 기아자동차의 희생번트편에서 번트를 대는 선수로 나왔다. 목소리로 나오는 사람은 김상훈이 출연한 광고와 마찬가지로 베어스의 레전드 박철순. 그런데 이범호는 실제로 번트를 잘 대지 않는 선수라는게 에러.[30][31] 그래서 밑에 나오듯 사도스키가 번트 대는 걸 본 적이 없는데 희생이란 건 거짓말이라고 까기도 했다.

  • 파일:external/lh3.googleusercontent.com/sadowski.jpg

  • 2013년 마구마구에서 파워 79의 스페셜 카드를 부여 받았다. 그보다 적게 홈런을 친 강정호나지완이 레어를 받았는데 문제는 이들보다도 파워가 낮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2할4푼의 낮은 타율인 것 같다. 그러나 기올유저들은 환영하는 입장. 구름 속의 존재인 김상현(1980)과 플래툰이 가능하므로.

  • 2016년부터 티웨이항공 홍보모델이 되었는데 여기서도 꽃범호는 여전했다.[32]



  • 경기장에서 화를 잘 내지 않는 선수 중 하나인데 어느 정도냐면 화낸 순간을 팬들도 손에 꼽을 정도다. 일례로 2017년 6월 18일 경기서 임찬규가 전타석에 안치홍에게 사구를 낼 뻔한 것도 모자라 결국 헤드샷을 맞자 화를 냈다. 그것마저 득달같이 달려들 정도로 화내는 것은 아니고 심판의 제지에 문제는 크게 없었다. 임찬규는 규정에 따라 결국 퇴장당했다. 또한 2015년 5월에도 앞선타자 최희섭이 배영수에게 사구를 맞고 이에 본인도 배영수에게 2타자연속 사구를 맞자 살짝 화내는 모습도 있었다.

  • 선수 생활을 위해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등 자기관리 면에서 철저한 면을 보이고 있다. 주장이 되어 선수들을 독려하는 자리가 되면서 술은 입에 대기 시작은 했지만, 잘 못 마신다고...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터뷰로서 능력도 훌륭한 편이다. 박용택 만큼의 달변은 아니지만 언변이 매우 뛰어난 편이고 재치도 상당하다. 굉장한 호평을 받았던 은퇴식 고별사도 원고 없이 즉석에서 뱉어난 것이라 한다. 나중에 말하길 원고가 있긴 했지만 노안 때문에 인해 글씨가 안 보였다고 한다.

  • 팀 내에서 나지완, 김민식과 더불어 팬 서비스가 안 좋기로 유명한 선수이다[33]. 하지만 잘해줄때는 또 잘해준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거나 은퇴 직전에는 팬 서비스가 좋아졌다는 이야기도 있어 평이 갈린다. 대표적으로 오키나와에서 김민식 싸인 받으려다 거절당해서 보다 못해 이범호 본인이 대신 싸인 해줬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 이름의 '범'에 쓰이는 한자가 일본에서 상용한자밖에 있다 보니 일본에서는 이범호를 李ボム浩라고 적는 경우가 많다. 이승엽의 '엽'(燁)을 가나로 대체해서 李承ヨプ라고 적는 것과 같은 방식인데, 그래서 야구 국가대표시절 일본과의 국제 대항전의 일본 기사를 번역기로 돌리면 이폭탄호라고 번역되었다.

  • 심정수, 마해영, 박경완에 이어 2개 팀에서 세자릿 수 홈런을 친 4번째의 선수지만, 기준을 150홈런으로 올리면 역대 최초의 선수이다.[34]


  • 프로농구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의 레전드인 양동근과는 1981년생 동갑내기로 절친한 친구 사이다.[35] 이범호가 한화 이글스에서 뛰던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는데, 이범호의 초등학교 동창인 이영수가 양동근과 한양대학교 같은 00학번이라 친분이 있었다 보니 이 둘을 연결시켜 줘 그 뒤로 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국가대표 한정으로 이 둘의 번호를 서로 바꿔 단 적도 있는데, 이범호는 2009년 WBC 때 양동근의 등번호 6번을, 양동근은 국가대표에서 이범호의 등번호 7번을 달고 뛰었다. 2011년 이범호가 KIA 타이거즈에 입단하면서 이범호와 양동근 둘 다 같은 현대자동차그룹 스포츠단 소속이 됐다. 2019년 7월 13일 열린 이범호의 은퇴식 때도 양동근이 참석해 꽃다발을 건네주기도 했다.

  • 해외 진출을 한 뒤 2011년 시즌을 앞두고 복귀할 때 이전 소속팀이 아닌 곳으로 돌아왔는데, KIA 타이거즈 출신으로 2006년 마이너리그로 진출했다가 이듬해 원소속팀이 아닌 롯데 자이언츠로 복귀한 최향남의 사례가 먼저 있긴 했지만, FA 자격을 제대로 얻고 진출한 선수들 중에서는 이범호가 최초. 이후 2017년까지 추가 사례가 없다가 황재균, 김현수 등이 뒤를 이었지만, 일본 진출을 했다가 다른 팀으로 복귀한 선수는 이범호가 여전히 유일하다. [36]

  • 이범호 은퇴 후 관중석 인터뷰. 영상

  • 한화이글스 소속 노시환과 많은 것들이 닮았다. 이범호와 노시환은 경상도 토박이라는 점, 모두 한화이글스에서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드래프트 역시 2차 1라운더로 지명되었고, 당시 1차지명은 모두 북일고 선수였다. 또한 180중반의 키와 90키로가 넘는 육중한 몸매 및 두터운 하체를 보유하고 있고, 두 선수 모두 부상을 잘 당하지 않는 점 역시 닮아있다. 상당히 귀여운 외모 역시... 주 포지션은 3루이지만, 커리어 초반 유격수로도 출장을 하였으며, 잦은 실책과 아쉬운 수비를 보였지만 강력한 송구가 강점이라는 점도 비슷하고, 두사람 모두 이글스 프렌차이즈 스타였던 강석천송광민이 은퇴하는 시점에 등장한 3루수라는 점도 인상깊다(실제로 강석천송광민은 모두 15시즌을 이글스에서 뛰었으며, 타격 스타일이나 성적도 상당히 닮아있다). 플레이 스타일 역시 많이 닮아있는데, 모두 우투우타라는 점, 초창기 파워는 가공할만하나 변화구에 약점을 보여 삼진이 잦다는 점 역시 비슷한 점이다. 실제로 커리어 1~3년차 성적을 보면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6.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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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s://youtu.be/KDJJldxCmPQ 16분 50초 참고.[2] 2003년 1월 23일 충청투데이 기사에 따르면, 당시 불어불문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러나 2005년 2월 21일 디트뉴스24 기사에서 2005년 2월 22일 치러진 2004학년도 전기 학위수여식에서 행정정보학과(야간부) 행정학사를 수여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불어불문학과에 재학하다가 중간에 행정정보학과로 전과한 것으로 보인다.[3] 선수생활 대부분을 3루수로 보냈다. (KBO 통산 2001경기 중 1698경기, NPB 통산 48경기 중 14경기로 커리어 통산 2049경기 중 1712경기 출전)[4] 프로 초기인 02시즌과 04시즌에 유격수로 많이 출전하였다. 특히 04시즌은 23홈런을 기록했고 한시즌에 유격수로 이범호보다 더 많은 홈런을 기록한 선수는 장종훈, 이종범, 틸슨 브리또, 김하성, 강정호, 오지환이 전부다. 그러나 유격수 수비가 불안한 편이라 당시에도 주전은 맞지만 3루수로도 꽤 나오며 풀타임 유격수는 아니었다. 결국 05시즌부터 완전히 3루수로 전업하고 이후로는 딱 2번 유격수로 나오는데, KIA 타이거즈 이적 후 2011년 8월 4일 경기와 2015년 6월 18일 경기에서 유격수로 출장한 바 있다. (통산 145경기 출전)[5] 1군에 자리잡기 시작한 01시즌에 백업 2루수로 출전하였다. (통산 90경기 출전)[6] 2013시즌부터 가끔씩 1루수를 보고 있다. (KBO 통산 25경기, NPB 통산 3경기로 커리어 통산 28경기 출전)[7] 02시즌 1경기 출장한 바 있다. (커리어 통산 1경기 출전)[8] 2019년 9월~10월에 열린 소프트뱅크 추계 캠프에서 연수를 받았다. 팀 내 코치 카운셀러로 있던 김성근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9] 코로나 19로 인해 마이너 리그 시즌이 전체 취소되며 스프링캠프 후 귀국.[10] 이범호~(홈런!) 이범호~(홈런!) 한화의 이범호~[11] KIA의~ 이범호~ 파워히터 이범호~ 거친 파도에도 굴하지 않게~ (잘!생!겼!다!이!범!호!) KIA의~! 이범호~ 파워히터 이범호~ 꽃보다 멋진 너~ 이범호~[12] 이 응원가가 매우 많은 인기를 얻으면서, KIA 타이거즈 응원단이 이범호의 응원가가 아닌 질풍가도 원곡에 치어리딩을 해도 팬들은 잘 생 겼 다 이범호를 외친다. 심지어 2019년 중반 이후 이범호가 은퇴를 해서 이범호 응원가를 부를 일이 없지만 그 후에도 KIA 응원단이 질풍가도 치어리딩을 하면 어김없이 KIA 팬들은 잘 생 겼 다 이범호를 외친다. 종종 원곡에서 이범호 응원가 파트로 따온 부분을 이범호 응원가 가사로 부르는 팬도 있다.[13] KIA 이범호 뜨거운 힘이 솟아나 두려울 게 없어 KIA 이범호 KIA의 승리를 위해 파워히터 KIA 이범호~[14] 질풍가도와 열혈남아 모두 쾌걸 근육맨 2세 오프닝으로 쓰였던 음악이다. 나윤승 응원단장 때 잠시 쓰이고 바로 폐지됐다.[15] 이범호~ 워어~ 이범호~ 워어어어~ 파워~히터 이범호~ (x4)[16] 최승환, 오재일의 두산 시절 응원가와 원곡이 같고 오재일은 넥센 시절에도 이 응원가를 썼다.. 이후 열혈남아 응원가가 나오면서 공식 폐기.[17] 통산 17개. 포스트시즌에서도 만루홈런을 기록하기도 했으며, 본인의 은퇴 경기, 은퇴 타석에서도 만루 상황이 만들어지며 묘한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18] 2018년 5월 6일 NC전 솔로홈런.[19] 2008 시즌은 18개로 병살 1위.[20] 이는 몇 안되는 명백한 유승안의 공이고, 김인식 시절에 2군이 황폐화되면서 오늘날의 암흑기를 잉태한 것도 사실인지라 한화 팬덤들은 암흑기의 시작을 놓고서 유승안 시절이 시작인지, 김인식 말년이 시작인지를 놓고서 종종 내전을 벌이곤 한다.[21] 2009년 WBC나 일본 진출을 통해 수비가 성장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단기전으로 숨 가쁘게 치러지는 국제전에서 실력이 향상된다는 근거가 없다. 이 때 이범호는 이미 완성된 선수였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에 진출했다가 실패해서 1년만에 리턴한게 끝이다.[22] 이걸 감안해서 2017 한국시리즈 5차전에는 양현종을 마무리로 올렸을 때 이범호를 빼고 대수비로 교체했다. 대신 들어온 선수가 김주형이라 문제지...[23] 대전구장이 잠실에 이어 리그에서 2번째로 큰 구장이 된 것은 김응용 감독 취임 이후이다. 이범호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그리운드 크기가 꽤나 작은 구장이었다.[24] 한화의 매력남이라는 별명은 이범호 전용 응원문구에서 따 온 별명이다.(한화의 매력남은 누구? 이범호!)[25]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입단 당시 언플에 실망한 한화팬이 지어준 별명.[26] 라인업 기사[27] 부상으로 1군에 왔다 2군에 갔다를 반복해서라는 썰과, 외모가 두더지같다는 썰, 둘 다라는 썰이 있다.[28] 한때 11초 대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범호 본인이 옐카3에 나와서 12초 1까지 나온 적 있었다고 밝혔다. 2008년에도 12도루로 두 자리 수 도루를 기록한 적이 있다.[29] 다만 발언 당시는 한화 소속이었고, 무엇보다 이범호 본인이 대구경북 출신이라 자연스럽게 이런 인식이 있을 수 있다.[30]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실제로 이범호는 기아 입단 후 2013년 4월 21일에 처음으로 번트를 댔다. 근 6년만에 댄 번트라고.[31] 한화에 있을 때는 그래도 간간히 희생번트를 댔던 편. 본격적으로 터지기 이전인 2001년에 7개, 2003년에 8개를 성공시켰으며, 번트 작전을 잘 쓰지 않는 김인식 때도 2007년엔 6개를 댔다. 한화에 있을 때 기록한 총 희생번트는 32개.[32] 이는 티웨이항공이 광주공항에 취항한 기념으로 광주광역시를 연고지로 삼고 있는 KIA 타이거즈의 선수 중 이범호를 홍보모델로 채택했고 비슷한 시기 대구국제공항에 취항하자 대구광역시를 연고지로 삼고 있는 삼성 라이온즈구자욱을 홍보모델로 채택한 바 있다. 참고로 이범호와 구자욱은 둘 다 대구고등학교 야구부 출신.[33] 사실 KIA는 팬 서비스가 가장 좋지 않은 구단 중 하나다.[34] 송지만도 트레이드는 한번밖에 되지 않았지만, 히어로즈가 현대의 역사를 버리면서 인정되지 않는다.[35] 사실 양동근은 야구를 상당히 좋아하는 걸로 유명하고, 이범호 외에도 손시헌, 이종욱 등과도 친분이 있다.[36] 이는 대체로 한국의 프로야구선수들이 해외로 진출할 때에는 원 소속구단의 동의 하에 진출한 뒤 임의탈퇴 신분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많고, FA 자격으로 진출했을 경우에도 원 소속구단과의 관계가 좋았을 경우에는 별 탈 없이 원 구단으로 복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 FA 자격을 얻고 해외에 진출한 뒤 복귀한 팀이 원 소속구단이 아닌 다른 구단일 경우에는 보상선수 관련 규정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도 한 몫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