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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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강동구 갑)
제13대
김동규

제14-16대
이부영


제17-18대
김충환









대한민국 제14-16대 국회의원
이부영
李富榮 | Lee Boo-young


파일:이부영 전 의원.jpg

출생
1942년 9월 26일 (81세)
경기도 경성부 내수정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수동)
거주지
서울특별시 강동구 길동 삼익파크맨숀[1]
본관
전주 이씨

청우(靑牛)
배우자
손수향
자녀
1남 1녀
학력
서울당산국민학교 (졸업)
용산중학교 (졸업)
용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정치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전역
종교
가톨릭 (세례명: 이사도르)
소속 정당

[[무소속|
무소속
]]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4, 15, 16
경력
동아일보 기자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상임위원
민중민주운동협의회 공동대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민주당 부총재
제14대 국회의원 (서울 강동구 갑 / 민주당)
민주당 최고위원
민주개혁정치모임 의장
민주당 부총재
통합민주당 부총재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강동구 갑 / 통합민주당)
한나라당 당무위원
한나라당 원내총무
제16대 국회의원 (서울 강동구 갑 / 한나라당)
한나라당 부총재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
열린우리당 의장
민주당 상임고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민주당 상임고문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1. 개요
2. 생애
3. 여담
5. 선거 이력
6. 소속 정당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언론인, 정치인이다.


2. 생애[편집]


용산고등학교(12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였다. 1974년 동료 기자들과 함께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를 결성하여 유신 체제에 맞서 언론 자유를 수호하자는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였다가 1975년 해직되었다. 그리고 긴급조치 위반,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7년간 복역하였다. 출소 후에도 재야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였다.

1986년 5.3 인천 사태 주도 혐의로 체포되어 1988년 2월까지 복역하였다. 복역 중이던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 은폐되었다는 사실을 교도관으로부터 전달받고[2] 휴지에 관련 사실을 작성하여 김승훈 마티아 신부가 명동성당에서 이를 폭로하게 하였다.[3]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동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의원 이었던 민주자유당 김동규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95년 11월에 국가보안법위반 등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의원직을 상실했다(...) 다행히 그 직후 특별사면되면서 피선거권을 회복했고 약 2개월 뒤인 1996년 4월 11일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재선되었다. 여담으로 당시 서울지역에서 당선된 유일한 통합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이었다.[4]

1997년 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당하면서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으며, 1999년 1월에는 한 때 군사정권 학생운동, 민주화운동 동지였던 시절 당시 초선의원에 불과한 서울 은평구 을 지역 이재오[5]를 꺾고, 한나라당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3선 의원이 되었다.[6] 한나라당 원내총무 시절, 폐암으로 죽은 제정구 의원의 영결식 때 "제정구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 때문에 억장이 터져 DJ암으로 죽었다."라는 극언을 퍼부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때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이회창의 압승으로 끝났고, 이후 선대위 부위원장을 맡아 이회창을 도왔다. 이때 노무현을 향해서는 김대중 정권의 연장 선상에 있다는 것만 집중적으로 지적했을 뿐 큰 비난을 하지 않았으며, 참여정부 출범 전후로는 한나라당 내의 개혁소장파를 규합해 노무현 대통령과 개혁성으로 겨뤄보겠다는 발언을 하는 등 점차 참여정부 성향에 가까워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2003년 7월 김부겸, 안영근, 김영춘, 이우재 등과 함께 전격적으로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독수리 5형제라 불리면서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했다.[7] 이듬해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때에는 본회의장에서 끌려나가면서 격분한 목소리로 "이거 놔! 이거 쿠데타야!"라고 외쳤으며, 기자들에게도 "이건 완전히 쿠데타예요! 쿠데타…!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의원총회에서 탄핵을 가결했다는 거예요!"라면서 탄핵 주도세력을 맹렬히 비판했다.

2004년 1월 열린우리당 전당대회에서 당의장 선거에 출마해 정동영, 신기남에 이은 3위를 기록해 상임중앙위원에 당선되었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열린우리당 후보로 강동구 갑 지역구에 출마했지만 한나라당 김충환 후보에 패배하여 낙선했다.

2004년 8월 20일에 당시 당의장인 신기남[8] 의원의 부친 친일 의혹으로 사과 및 책임지고 당의장직을 사퇴해 당의장직이 승계되면서 취임하였지만 본인이 지난 2002년 한나라당 의원시절 한화그룹으로 부터 5000만원 뇌물수수와 지난 17대 총선 선거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게 되면서 전임인 신기남에 이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취임한지 5개월만인 2005년 1월 3일 사퇴하였다.[10]

2007년 12월 6일에 JU그룹으로부터 서해자원탐사, 방문판매업 개정 등의 청탁을 받고 2억여원의 돈을 받은 혐의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과 2억 1,070만원의 추징금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되었으나, 2008년 6월 항소심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아 풀려났다.

2010년 사면복권을 받았고,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의 공천을 받아 강동구 갑 지역구에 다시 출마하였으나, 민선 3-4기 강동구청장 출신 새누리당 신동우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11]

낙선 이후 야인으로 지내다가 2015년 2월 11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보통 정치인들이 정계 은퇴를 선언해도 당적을 유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부영의 경우 은퇴 선언과 동시에 새정치민주연합에 탈당계를 제출하면서 아예 당적까지 정리했다.

2022년 6월 26일, MBN 정운갑의 집중분석에 출연하여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더불어민주당의 연이은 선거 패배의 책임이 전적으로 지지자 관리만 하다 떠난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있다고 강도 높은 비판을 했다.#

2023년 4월 1일에 윤석열 대일 외교 비판 및 퇴진 집회에 참석해 발언대에서 연설을 하였다.#

이재명 대표의 단식 중에는 여러 번 이재명 대표를 방문하였다.

한나라당 원내대표와 열린우리당 당대표를 거쳐왔지만 현재는 '진보정치연합 원탁회의[12]'에 참여해 활동 중이다. 22대 총선에서 진보당이나 개혁연합신당과 함께 할 가능성이 있다.


3. 여담[편집]


  • 그의 비서를 지낸 사람 중 이해식은 전직 서울 강동구의원, 재선 서울특별시의원, 민선 4~6기 3선 강동구청장을 지냈고, 현 더불어민주당 강동구 을 국회의원이다.[13]



  • 동아일보 기자 시절이던 1971년에 북한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한필화의 진짜 오빠인 한필성을 찾아내 특종을 낸바 있다. 당시 한필화의 언니라고 말하는 한계화란 여성의 등장으로 시끌시끌한 상황에서 이부영의 기사로 한필성의 존재가 드러났고 한필화가 한필성이 오빠가 맞는거 같다고 하면서 아사히 신문 주선으로 통화가 이루어지게 되고 실제 상봉까지 추진되었지만 끝내 남북갈등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후에 이부영은 한계화의 정체에 대해 한필화를 흔들려던 중정의 공작이 의심된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2005년 방영된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이대로가 연기했다.[14]
  • 6월 민주항쟁을 다룬 영화 1987에서는 배우 김의성이 연기했다.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동 갑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49,646 (38.51%)
당선(1위)
초선[15]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42,872 (39.90%)
재선[16]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52,147 (52.51%)
3선[17]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50,693 (43.37%)
낙선(2위)
[18]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통합당|
파일:민주통합당 연두 로고타입.svg
]]

57,909 (47.46%)



6.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파일:민주당 1990년 글자.svg

1990 - 1991
정계 입문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1991 - 1995
합당[19]

파일:민주당(1991) 글자.svg

1995 - 1997
합당[20]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1997 - 2003
합당[21]

[[무소속|
무소속
]]

2003
탈당[22]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2003 - 2007
창당

[[무소속|
무소속
]]

2007
탈당[23]

[[대통합민주신당|
파일:대통합민주신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7 - 2008
창당

[[통합민주당(2008년)|
파일:통합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합당[24]

[[민주당(2008년)|
파일:민주당(2008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 2011
당명 변경

[[민주통합당|
파일:민주통합당 연두 로고타입.svg
]]

2011 - 2013
합당[25]

[[민주당(2013년)|
파일:민주당(2013년) 흰색 로고타입.svg
]]

2013 - 2014
당명 변경

[[새정치민주연합|
파일:새정치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2014 - 2015
합당[26]

[[무소속|
무소속
]]

2015 - 현재
탈당
정계 은퇴[27]


7. 관련 문서[편집]



8. 둘러보기[편집]






[1] 정계에 입문하기 전인 1982년 해당 아파트가 완공됐을 때 입주했고, 지역구 국회의원을 역임할 때까지 계속 거주해 왔다.[2] 그 교도관은 민주화 운동에 대해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입장이었던 터라, 이부영을 비롯한 몇몇 민주화 운동 연루 수감자들의 편의를 최대한 봐줬다고 한다. 특히 이부영에게는 '선생님'이라는 명칭으로 깍듯이 대했으며, 근처 방에서 박종철 고문에 가담했던 조한경 경위가 울부짖는 것을 들은 이부영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조심스럽게 사건의 진상을 알려준 것.[3] 영화 1987에서는 이게 잡지로 바뀌어서 나온다.[4] 당시 같은 서울외에 경기, 인천 수도권 지역에 출마한 이철(성북구 갑), 유인태(도봉구 갑), 원혜영(부천시 오정구), 박계동(강서구 갑), 김종완(송파구 을)등은 연임에 실패하였고, 이부영외에 수도권 지역 당선자까지 넓혀봐도 제정구(시흥시), 이규택(여주군), 황규선(이천시) 밖에 없었다.[5] 다만 이재오는 이후 2001년, 2006년에 원내대표를 두 번이나 역임하게 된다.[6] 여담이지만 이 때 강동구 갑 지역구에 출마한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노관규 현 순천시장이다. 정계 입문 초반에는 강동구에서 활동하다가 이후 학창 시절을 보낸 순천시로 정치적 기반을 옮긴 뒤 3선 시장을 하게 된다.[7] 정식 창당 전의 가칭이었던 국민참여통합신당(약칭 통합신당) 결성에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8] 3달전인 2004년 5월에 본인 전임 당의장이 였던 정동영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통일부 장관에 입각하면서 전당대회에서 2위로 상임중앙위원으로 당선되었던 본인이 당의장직이 승계되면서 취임하였다.[9] 현 시점 정치자금법은 벌금 100만원 이상의 형을 선고받으면 피선거권을 잃어버리지만, 이부영의 건들은 정치자금법 개정 이전 시점에 있던 일들이고, 그 시절에는 정치자금법으로 금고형 이상의 형을 선고받아야 피선거권 상실이 되는 구조라 넘어갔다.[10] 이후 한화그룹 뇌물 수수 혐의는 벌금 3천만원형을 선고받았고,[9] 선거법에 대해서는 벌금 80만원형을 선고받아 이 부분들은 피선거권 상실 없이 넘어갔다.[11] 다만 출구조사에서는 이부영(49.8%)이 신동우(49.1%) 후보보다 0.7%p 근소하게 앞서는 걸로 나왔다. 사실 본인 인생 처음 낙선한 17대 총선에서도 이부영(46%)-김충환(41%)로 경합우세로 나왔었으나 최종 개표 결과는 반대로 접전패하였다.[12] 장영달, 이부영, 권영길, 천영세, 함세웅, 이우재 등 각개 진보계 원로로 구성[13] 여담으로 또 다른 측근은 민선 1~3기 강동구청장과, 17~18대 강동구 갑 지역에서 재선 국회의원을 역임한 김충환인데, 꼬마민주당 시절때 같이 정계입문을 했고, 한나라당 창당에 합류하면서 동업했으나, 2003년에 이부영이 열린우리당 창당때 당시 서울시의원이었던 이해식은 따라갔는데, 김충환은 따라가지 않고 잔류했으며, 선배인 이부영이 현역으로 있었던 강동구 갑 지역구를 노려 동업자에서 경쟁자가 되었고, 결국 이부영은 한때 후원해준 정치적 후배였던 김충환에게 패하였다.[14] 재미있는 점은, 해당 드라마가 방영 시점에서 18년 전을 다루고 있음에도 담당 배우의 나이가 이부영보다 3살이 많다.[15] 1995.11.03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16] 1997년 신한국당과 합당[17] 2003.7.7. 한나라당 탈당, 2003.10.27. 열린우리당에 입당[18] 4번의 선거 중 첫 낙선.[19]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20] 개혁신당과 신설 합당.[21] 신한국당과 신설 합당.[22]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23]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24] 민주당과 신설 합당.[25]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26]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27]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7406581?sid=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