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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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李產
생몰연도 불명

전연의 인물. 자는 자교(子喬). 유주(幽州) 범양군(范陽郡) 출신.


2. 생애[편집]


어려서부터 강직하고 의연한 성격을 지녔으며, 높은 포부와 고상한 품격을 갖추었다. 영가의 난으로 인해 중원이 큰 혼란에 빠지자, 이산은 당시 강남에서 무리를 거느리고 있던 동향 출신의 예주자사 조적에게 의지하여 스스로를 지켰다.

대흥 4년(321년) 10월, 조적이 사망하고 그 동생 조약원제 사마예의 조서를 받들어 그 무리를 대신 통솔하게 되었다. 조적과 달리 조약은 무리를 위무할 줄 전혀 몰랐기에 인심이 점점 떠나갔으며, 이를 본 이산은 조약에게 미래가 없다 생각해 친척들에게 말했다.

"내가 혼란한 북방을 떠나 이 먼 곳까지 온 이유는 종족을 보존하기 위함이었소. 지금 보건대 조약의 뜻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으니, 내가 친족의 목숨을 위탁받은 이상 일찌감치 상황을 판단하여 움직이지 않으면 결코 무사하지 못하고 불의(不義)한 처지에 놓이고 말 것이오. 그대들도 눈앞의 이익만 쫓다가 장대한 책략을 놓치지 말도록 하시오."

이산은 말을 마친 뒤에 자제 10여 명만 데리고 고향인 범양으로 돌아갔다. 이후 후조가 기주를 장악하자 이산은 범양태수에 임명되었다.

영화 6년(350년) 3월, 연왕 모용준이 계(薊)를 함락시키고 도읍을 삼자, 많은 중원의 유민들이 전연에 귀순하였다. 전연군이 마침내 범양에 당도하니, 고을 사람들은 모두 이산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으나 이산은 거부하며 말했다.

"무릇 다른 이의 녹을 받았으면 마땅히 그 안위를 함께 해야하오. 지금 만약 이러한 절개를 저버리고 살기를 도모한다면 의사(義士)들이 장차 나를 두고 무어라 이르겠소."

이후 이산은 전연군과 싸웠지만 궤멸당하여 결국 범양군 속현의 현령 8명을 거느리고 연왕 모용준 진영의 군문(軍門)으로 나아가 항복을 청하였다. 모용준은 이를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경은 석씨(石氏)의 총애와 신임을 받아 금의환향하였으나, 무슨 까닭으로 이 시대에서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도리어 몸을 맡기려는가? 열사(烈士)가 처신함에 있어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것이오?"

이산이 눈물을 흘리며 답했다.

"진실로 천명(天命)이 돌아갈 곳을 알았다면 신이 이와 같이 항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개와 말이 주인을 위해 어찌 정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고립되고 곤궁한 형세가 닥쳐 극복할 힘이 없다며 죽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진실된 성관(誠欵)이라 할 수 없습니다."

모용준은 그 강개함을 보고 좌우를 돌아보며

"이 자야말로 진실된 장자(長者)로다."

라 말하고는 이산을 다시 범양태수로 삼았다. 노구(魯口)를 지키던 후조의 정동장군 등항(鄧恒)은 이산의 투항 소식을 듣고 이산의 아들인 유주별가 이적(李績)을 죽이려 하였는데, 유주자사 왕오(王午)가 만류하여 그만두었다. 왕오는 이적을 전연으로 보내주었고, 연왕 모용준은 이적을 발탁하여 썼다.

굳세고 정직한 성격이었던 이산은 직언하기를 좋아하여 알현하는 자리에서 조정의 득실에 대해 논하지 않았던 때가 없었다. 이산의 동료들은 모두 그를 공경하면서도 꺼렸고, 모용준 역시 그의 학식과 우아한 풍모를 중히 여겼다. 이윽고 이산이 고령이 되어 복잡한 사무를 처리할 수 없다며 간곡히 사직을 청하니, 모용준은 그를 태자태보(太子太傅)로 옮겼다. 이산은 아들 이적에게 말했다.

"나의 재주로 여기까지 이른 것은 처음에 바라던 바를 이미 넘어선 것이다. 황혼기의 나이에 이르러 후대의 웃음거리로 될 수는 없다."

이후 굳게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가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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