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시인)

최근 편집일시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이상화 문서
이상화번 문단을
이상화#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attachment/Sanghwa.jpg
아호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1]
본관
경주 이씨[2]
출생
1901년 4월 5일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동산동
(현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2가)[3]
사망
1943년 4월 25일[4] (만 42세)
경상북도 대구부 명치정2정목
(현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84번지)[5]
학력
중앙학교 (중퇴)
주요작품
나의 침실로(1923)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attachment/20070321133119197236962.jpg
좌측부터 차례로 이상화, 권기옥, 이상정

대한민국시인,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파일:/image/001/2006/03/14/kp1_2060314g0769.jpg
대구광역시 수성구 수성못에 있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6]

이상화 주요 연보

이상화는 1901년 4월 5일 경상북도 대구군 서상면 동산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2가)에서 아버지 이시우(李時雨)와 어머니 김신자(金愼子)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독립운동가인 형 이상정이 있고, 아래로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인 이상백과 이상오(李相旿)가 있었다.

7살되던 1908년 아버지를 여의고 집안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14년 한문 수학을 마친 후 1년간 일본어·산술·박물 등의 신학문을 배우다가 이듬해인 1915년 상경하여 경성부 중앙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18년 자퇴하고 그해 7월 강원도 일대를 방랑하였다. 이때 그는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대구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친구 백기만(白基萬) 등과 함께 계성학교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3월 8일 서문 밖 장터에서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에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당시 모였던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미리 등사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거사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때 사전에 주동 인물들이 검속되자 경성부 박태원[7]의 하숙으로 피신하여 투옥을 면했다.

같은 해 10월 이상화는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의 강권으로 공주군 출신의 달성 서씨 서순애(徐順愛)와 결혼하였다.[8] 서순애는 공주 유지 서한보(徐漢輔)의 딸이었는데, 서한보는 1917년 1월 24일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에게 기념품을 기증하고#, 1918년 1월 30일에는 충청남도참사에 임명된 자#로서, 다소 친일 성향이 있는 사람이었다.[9]

1922년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白潮)> 동인이 되어 나도향·홍사용·박종화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창간호에 시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외국어전문학교인 '아테네 프랑세'에 입학하였고, 1923년 3월 수료하였다.

같은 해「나의 침실로」를 발표했는데, 그해 9월에 일어난 관동 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 대해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이듬해 3월 귀국하였으며, 경성부 가회동에 있는 취운정(翠雲亭)[10]에 머물면서 시 짓기에만 전념했다. 1924년 고향 친구 박태원이 죽자, 그를 추모하는「이중의 사망」이라는 시를 지었고, 같은 해 김기진 등과 무산계급 문예운동단체인 '파스큘라'를 결성하였다.

1925년 천도교기념관에서 '파스큘라'가 개최한 문예강연 및 시낭독회에 출연하여 시 「이별을 하느니」를 낭독하였고, 같은 해 8월 박영희·김기진 등과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시경향은 퇴폐주의에 해당하는 편이었는데, 1926년 잡지 <개벽>에 대표작「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으로 전환되는 경향을 보였다. 또 이 시기, 카프 기관지 <문예운동>의 주간이 되어 「조선병」, 「겨울마음」, 「지구 흑점의 노래」, 「문예의 시대적 변위와 작가의 의식적 태도론」 등의 시와 논저를 발표하기도 했다.

1928년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부 간사로 있던 중,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한 'ㄱ당 사건'에 연루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공갈미수 혐의로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그해 8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받았으며#, 곧 구류취소 처분을 받아 출옥하였다.# 이 시기 그는 서문로에 있던 자택 사랑방을 '담교장(談交莊)'이라 칭했는데, 수많은 항일독립운동 인사들이 출입하곤 했다.

1930년 잡지 별건곤에「대구행진곡」을 발표하였고, 1932년 자신의 생가이기도 한 서문로 자택을 처분하고 서천대천정(현 중구 장관동 50번지)로 이사하였다. 1933년 8월, 경상북도지사로부터 교남학교 강사 인가를 받고 근무를 시작했으며, 본 학교에서 조선어와 영어, 작문, 권투 등을 가르쳤으나, 이듬해 사직하였다. 한편, 이 시기「반딧불」과「농촌의 집」에 이어 두 번째 창작소설 「초동(初冬)」을 발표하였다.

1934년 친구들의 권유로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했으나 사업에 실패하였고, 대구부 남성정(현 중구 남성로 35번지)으로 이사하였다. 1935년 잡지 <시원>에 시 「역천」을, <조강>에「나는 해를 먹다」를 발표하였고, 그해 큰아버지인 이일우가 별세하였다.

1936년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베이징·상하이 등지를 3개월간 유람한 후 귀국하였다. 이때 형과 조국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했었는데, 귀국 후 이듬해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2개월간 구금당하며 심한 고문을 받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그해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교가를 작사하였고[11], 경정2정목(현 중구 종로2가 72번지)으로 이주하였다.

1939년 6월 명치정2정목(현 중구 계산동2가 84번지)로 이사하였고, 교남학교 교가 가사 문제로 가택 수색을 당하여 자신의 시 원고를 비롯해 1929년 별세한 친구 이장희의 유고까지 압수당하였다. 1940년 김소운이 번역한 『조선시집』에 「나의 침실로」 등 3편이 수록되었으며, 1941년에는 잡지 <문장>에 시 「서러운 해조」를 발표하였다.

1943년 4월 25일 오전 8시 45분, 명치정2정목의 자택에서 부인과 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사후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슬하에 세 아들 용희(龍熙) 충희(忠熙) 태희(太熙)를 두었다.

3. 여담[편집]




  •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건데, 그의 무덤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산 13-1번지에 있다. 대구 도시철도 1호선 대곡역 3번 출구에서 200m 정도 올라가거나 대곡역 항목의 환승 가능한 시내버스 문단에 있는 버스들을 타고 대곡역 정류장에서 하차 후 10분 정도 걸으면 동쪽에 야산이 있다. 조금만 올라가면 월성 이씨 재실과 제각이 보이고 바로 뒷편으로 문중 묘소가 있다. 이 곳에 이상화를 포함해 이상화의 아버지 이시우, 큰아버지 이일우, 형 이상정, 동생 이상백의 무덤이 있다. 또한 달서3번이나 달서5번을 타고 정부대구지방합동청사에서 내려서 정부대구지방합동청사 뒷산을 타고 올라가도 나온다. 참고로 달서3번은 정부대구지방합동청사 정문에, 달서5번은 정부대구지방합동청사 후문에 정차한다. 아니면 836번, 달서1번, 달서4(-1)번, 성서1(-1)번, 급행7번을 타고 유천교 정류장에서 하차 후 15분 정도 걸어가면 나온다.

  •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은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오거리 인근에 매일신문사와 계산성당 뒷편, 계산성당에서 계명대학교 대구동산병원까지 이르는 골목길이 대구광역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대구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곳이 이 골목이기 때문이다. 당시 대구고등보통학교, 계성학교, 신명학교 학생들이 이 곳에서 3월 8일날 만세 운동을 시작한 곳이다. 대구광역시에서 근대골목체험 코스로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이 포함되어 있다.


  • 고택에 비하여 생가터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서성로의 대구산업공구골목 쪽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그 생가터 일부를 매입하여 라일락뜨락이란 카페가 지어져 있으며, 이 카페는 이상화 시인의 홍보를 겸하고 있다.


  • 일본에 쫓기느라 자택에 오는 날이 되게 드물었다고 한다.


4. 관련 문서[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3 23:43:10에 나무위키 이상화(시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2] 39세 상(相) 항렬.[3] 이상화시인 생가. 안채는 현재 라일락뜨락1956이라는 카페로 꾸며져 있다.[4] 공교롭게도 소설가 현진건과 같은 대구부 시내(현 중구)에서 태어나 같은 해의 같은 날에 사망했다. 거기다 두 사람 모두 일제강점기 말기에 붓을 꺾고 끝까지 친일로 전향하지 않은 점에서 굉장히 비슷한 삶을 살았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5] 이상화 고택으로 남아 있으며, 이상화시인 기념사업회 사무실이 이곳에 있다. 위 이상화시인 생가와는 다른 곳이다.[6] 시에 나오는 '들'의 실제 배경이 수성못 북쪽의 지금 지명으로, 수성구 상동, 중동, 두산동, 황금동 일대에 있던 너른 들이었다. 상동, 중동, 두산동을 지나는 길 이름도 이상화의 이름을 딴 상화로이며, 달서구 대곡동, 상인동에도 상화로가 있다.[7] 소설가 박태원과는 동명이인이다.[8] 이상화는 이후 일본 도쿄에 유학을 갔다가 관동 대지진 때 귀국하여 한동안 서울 가회동에 살았는데, 이 시기 도쿄에서 만난 함흥 출신의 유학생 유보화와 동거했었다. 그러나 동거 2년여만인 1926년 폐병으로 그녀를 떠나보내게 되는데, 이 밖에도 도쿄 유학시절 여러 여인과 염문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집안의 강요에 따라 원치 않는 결혼을 한 것에 대한 반발심이 컸던 모양이다.[9] 독립운동가 집안과 친일 유지 집안의 결합이라하면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보일 수 있는데, 강동원의 사례를 보면 그 당시엔 그런 사례가 그렇게 이상하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외증조부가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종만인 탓에 친일파 후손 논란이 있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외할머니는 독립유공자 노원필의 장손녀라는 사실. 즉, 독립운동가의 손녀가 친일파 집안에 시집을 갔다는 말이다.#[10] 현재도 남아있다.[11] 현재도 대륜고등학교에서 그가 작사한 교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