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근(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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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귀순까지
3. 재탈출 기도와 망명
4. 간첩 혐의
5. 간첩 혐의의 의문점들
6. 간첩 혐의 해소
7. 명예 회복
8. 여담


1. 개요[편집]


李穗根, 1924년 3월 3일 ~ 1969년 7월 3일 (향년 45세)

북한의 언론인이자 귀순자. 박정희 정부에 의해 판문점을 통하여 귀순하였으나 당시 남한 사회에 실망하고 제3국으로의 탈출을 꾀하다가 홍콩에서 꼬리가 잡혔고[1] 베트남에서 잡혀 남한으로 송환된 후 간첩으로 몰려 1969년 7월 3일 사형이 집행되었다.[2] 하지만 2018년 서울중앙지방법원재심을 통해 간첩이 아님이 확정되어 누명이 벗겨졌다.

2. 귀순까지[편집]


1924년 3월 3일 황해도 서흥군 구포면 운천리[3]에서 태어났다.# 1939년 구포보통학교를 졸업했고 1945년경 일본군에 입대하였다가 광복 후 귀환하였다. 1946년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이후 20년간 기자로서 승승장구하며 김일성 수행기자를 거치며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다가 1967년 2월 조선인민군 창건 기념식에서 김일성을 동행취재한 이수근은 북한 정권에 불만이 있었는지 김일성의 연설을 보도하지 않는 패기를 보여주었고 이 때문에 숙청 위기에 처했으나 3월 22일 판문점 정전위원회 242차 회의에 참석하여 정전위 유엔사 수석대표의 특별고문인 이문항(제임스 리)에게 남한으로 귀순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미군은 긴급 회의를 거친 끝에 이수근에게 회의가 끝나면 영국군 측 대표였던 밴 크로프트 준장의 차[4]에 뛰어들어 망명하라고 귀띔했다. 회의가 끝나자 이수근은 시키는 대로 차에 올라탔고 차는 북한군 경비초소를 돌파하여 귀순에 성공했다. 이 당시 판문점에서는 이 귀순사건 때문에 총격전까지 발생했었다. 당시 기사 내용[5]

이수근의 귀순은 당시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도 그럴 것이 북한의 국영 통신사 부사장이라는 중책에 있던 사람이니 황장엽 이전까지 가장 거물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래서 이수근은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심지어 당시 북한에서 귀순하는 인사들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과정인 보안검사[6]도 면제했을 정도. 그리고 정부의 지원 아래에서 거액의 정착금을 받고 결혼도 했다.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처조카인 배경옥씨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세간에선 이런 파격적인 조치의 배경에는 이수근과 동향이었던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형욱의 배려 덕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이수근은 점점 남한에도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고 북한 체제가 싫어서 망명했다는 사람이 북한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면서 두루뭉술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그래서인지 위장간첩이라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던 걸로 보인다.

1970년에 체포된 공작원 김진계는 이수근 망명이 북한 정치권에서도 큰 소동으로 이어졌으며 대남비서 겸 대남총국장 리효순김일성에게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아주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는 교육자료를 받았었다고 회고했다. 리효순은 이수근을 자신이 위장잠입시킨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김일성에겐 씨알도 안먹혔고 갑산파 숙청 사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3. 재탈출 기도와 망명[편집]


이수근은 자신을 체제선전용으로 이용하려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환멸과 더불어 더불어 중정 감찰실장 방준모의 집요한 괴롭힘을 이기지 못하고 제3국 망명을 기도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에 와서 알게 된 처조카 배경옥에게 부탁하여 위조여권을 만들었고 홍콩을 거쳐 스위스로 망명하려고 했다. 이수근은 홍콩에서 프놈펜으로, 베트남 주둔 미 1사단 기술자로 일하던 배경옥은 사이공으로 갈 계획이었으나 이수근의 도주를 눈치챈 중정은 이수근을 잡아오라고 지시했고 1969년 1월 30일 카이탁 국제공항에서 프놈펜행 비행기를 타려는 이수근을 영사 신분으로 위장한 중정요원들이 습격했다. 소동 끝에 중정 요원들과 이수근 모두 홍콩 경찰에 억류되었고 중정차장 이병두가 홍콩 총영사를 지낸 적이 있는 외무차관 진필식에게 이수근을 한국에 송환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외무부 측은 중정에서 사고친걸 외무부 보고 수습해 달라는 게 불쾌했으나 김형욱이 박정희를 독대하면서까지 아우성을 쳐서 결국 진필식이 홍콩에 파견되었다.

영국 측은 이수근에겐 죄가 없으며 오히려 법을 어긴 것은 한국 정부가 아니냐며 불쾌감을 표시했으나 한국 측의 끈질긴 요청에 일단 이수근을 제3국으로 출국시키겠다고 물러섰다. 영국은 이수근을 원래 목적지인 프놈펜으로 가게 조처했으나 프놈펜 직항기를 운영하고 있는 에어 프랑스가 아니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경유해서 프놈펜으로 가는 캐세이퍼시픽 항공편을 타고 가게 했다. 이는 사실상 미국이 장악한 사이공에서 잡아가라는 무언의 표시나 다름없었고, 홍콩 정보경찰[7]은 한 술 더 떠 이수근이 사이공으로 간다고 CIA에 통보했다. CIA는 다시 중정에 이를 알렸고 이수근이 계속 홍콩에 있다는 보고만 받은 김형욱이 격노해서 이병두 차장에게 욕을 바가지로 퍼부었다고 한다.(...) 김형욱은 사이공의 이대용 공사에게 비행기를 지연시키라고 지시한 이후 중정 요원들을 보내 이수근을 체포해서 한국으로 압송하였다. 홍콩 정무총감[8]은 형식적인 기자회견을 열고 진필식 차관에게 협조할 수 없어 유감이라는 식으로 발언하여 영국이 이에 관여했음을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쇼를 했다.

하지만 영국이 도와준 줄 모르고 오로지 CIA 덕에 이수근을 잡은 줄로만 안 김형욱은 박정희에게 영국놈들이 외무차관까지 보냈는데 우리를 개똥으로 안다고 난리를 쳤고 박정희가 최규하 외무장관에게 영국에게 엄중항의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소동으로 이어졌다. 다행히도 진필식 차관이 다시 박정희를 만나 사실 영국에게 사의를 표할 일이라고 해명한 덕분에 넘어갈 수 있었다.

4. 간첩 혐의[편집]


당시 공안 당국이 설명한 이수근의 간첩 혐의는 다음과 같다.

이수근은 당시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조선로동당 대남사업총책 이효순으로부터 위장 월남 귀순하라는 지령을 받고,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를 취재하다가 오후 5시경 회의가 끝나자 재빨리 UN군 측 대표인 준장 밴 클러프트의 승용차에 뛰어올라 극적인 탈출에 성공함으로써 월남 귀순하였다.
그는 전국 순회 강연 및 TV·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북한 실정을 폭로하는 척하면서 한국의 각종 기밀을 수집하여 북한으로 보내려고 꾀하였다. 그의 여러 가지 행동이 점차 수상해지자 한국 정부의 정보 및 수사 당국에서는 그를 주시하고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더 이상 한국에 있을 수 없음을 눈치채고 조카 배경옥과 함께 위조 여권을 만들어 비행기로 탈출해 홍콩·방콕을 거쳐 사이공[9]에서 북한으로 귀환하려다 한국 정부의 정보 요원에 의하여 체포되어 군용기 편으로 압송되었다.

5. 간첩 혐의의 의문점들[편집]


1. 김일성에게 보낸 암호문?
당시 중정은 이수근이 위장간첩이란 근거로 1968년 5월에 김일성에게 비밀리에 암호문을 보냈다는 점을 제시했다. 이수근은 김일성 앞으로 보내는 메시지를 암호로 작성해 그것을 성경책에 숨긴뒤 조카 배경옥을 시켜 홍콩 구룡반도 나탄가에 있던 우체국에서 모스크바 교회로 부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중정의 이수근 수사기록과 법원의 확정판결문서에 나타난 암호문의 내용이 미묘하게 다르며 당시 재판기록에서 이 암호문이 담긴 성경을 모스크바의 교회로 보냈다는 근거자료도 첨부되지 않은 것으로로 드러났다. 문제는 홍콩 우편법상 배송된 우편물에 대해 1년 이내에 조회가 가능하기 때문에 당시 중정이 얼마든지 이수근의 암호문이 담긴 성경책의 모스크바 발송조회증명을 첨부할 수 있었지만 재판기록에는 단지 우체국의 주소만이 나와 있었는데 이는 중정이 실수를 했던지 아니면 애초에 암호문이 담긴 성경책을 발송한 사실 자체가 없던지 둘 중 하나란 결론이 나온다.[10]

2. 떠나면서 김형욱에게 편지를 발송?
이수근씨의 다른 조카인 김세준의 증언에 따르면 이수근은 한국을 떠나면서 김세준씨에게 세 통의 편지를 부쳐 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편지를 보낸 대상은 8촌 누나 이신성, 자신의 운전기사 정낙춘, 그리고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었다. 자신이 탄 비행기가 한국을 이륙한 뒤에 우체통에 넣으라고 일러주었고 김세준씨는 그 지시대로 편지를 부쳤다는데 만약 이수근이 위장간첩이라면 8촌 누나나 운전기사까진 그렇다 쳐도 탈출해서 북한으로 도망가야 하는 판국에 중정부장 김형욱에게까지 편지를 부쳤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이는 거의 나 지금 도망친다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의 행동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북으로 돌아가야 하는 위장간첩이 맞다면 걸맞지 않은 행보다.

3. 왜 캄보디아로 갔나?
중정에 의하면 이수근은 원래 홍콩에서 조카 배경옥을 포섭해서 홍콩에서 배경옥을 먼저 북으로 들여보낸 뒤 자신은 캄보디아로 가서 북으로 들어가려 했다가 포섭공작을 포기하고 배경옥과 함께 캄보디아로 가서 월북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월북을 하려 했다면 굳이 캄보디아까지 갈 이유가 전혀 없단 사실이다. 이후 영화배우 최은희가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간 곳이 홍콩이었고 부인을 찾으러 홍콩에 갔던 영화감독 신상옥 또한 홍콩에서 납치되어 납북된 예에서 보이듯이 홍콩은 자유무역항이란 점 때문에 북한의 첩보원들이 활동하는 곳이었다. 얼마든지 이들과 접촉해서 손쉽게 북한으로 갈 수 있으며 그 외에도 홍콩에서 중국으로 넘어가서 북으로 가는 방법도 있고 마카오를 통해 가는 방법도 있었다. 그런데 이 모든 방법을 제쳐두고 캄보디아로 갔다가 결국 체포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행보다.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해석은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이 캄보디아였다고 하면 말이 된다.

4. 정말 위장간첩이었을까?
당시 중정에서는 이수근이 위장간첩이 아닌가라고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그 근거로 내세운 게 이수근이 탈출할 당시 북한 경비병들이 뒤늦게 허공에 대고 총을 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 당시 현장의 상황은 경비병들이 총을 빼들고 조준사격을 하기에는 판문점의 위치 자체가 매우 위험한 지역이었던 데다 이수근을 태운 차량이 이미 시야에서 벗어난 뒤에 경비병들이 총을 빼든 상황이라서 일부러 이수근을 쏘는 척하기만 했다는 해석은 합당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많다.

6. 간첩 혐의 해소[편집]


이수근이 간첩으로 몰린 이 사건에 대해 서울고등법원은 2008년 12월 29일에 이수근의 처조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검찰청이 상고를 포기함으로써 판결이 확정되었다. 이때 이수근의 탈출을 도운 죄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이수근의 처조카 배경옥도 무죄를 선고받았다.[11]

이수근의 간첩 혐의에 대해 최초로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다름아닌 조갑제(당시 조선일보 기자)다. 조갑제에게 이수근이 간첩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처음 알려준 사람은 이수근이 베트남에서 체포될 때 당시 베트남주재한국대사관 공사였던 이대용 장군이었다. 조갑제는 이수근의 간첩 혐의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것이 아니라 사형 판결에 대한 사법살인 의혹을 제기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 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제기한 월간조선의 일련의 기사[12]에서 이수근이 극적 탈출해서 귀순한 것도 맞고 기밀을 보낸 적도 없다는 것을 강조했다. 다만 논란이 되는 건 탈출죄의 이야기인데, 국가보안법상 탈출죄는 사형까지는 가지 않으니 이수근 자신도 적당히 감옥에서 살고 나오리라고 생각했다는 것.

다시 말해 작은 간첩 행위를 했는데 사법살인으로 처형당했는가아예 간첩이 아닌데 간첩 누명을 씌워서 처형했는가의 문제다. 조갑제는 전적으로 후자의 논리를 주장했다.

사실 조갑제의 일련의 기사 연재로 이수근이 간첩이 아닌 것이 확실해졌고 2008년의 고등법원 판결은 거의 요식행위라고 볼 수 있지만 조갑제가 그 기사를 냈을 때만 해도 상당한 파란을 몰고 왔을 정도였다. 조갑제가 이 사건의 유력한 증인으로 내세웠던 이대용 공사[13]도 이런 증언을 한 죄로 온갖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이수근을 수사한 중앙정보부 고위 관리 방준모의 수기 이수근은 간첩이 맞다[14] 류의 비화가 연재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수근이 위장간첩으로 조작되어서 처형당하게 된 배경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들 사이의 권력다툼에 이수근이 희생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김형욱이 이수근에게 파격적인 대접을 하면서 김형욱의 반대파들이 이를 빌미삼아서 김형욱의 실각을 노렸고[15] 결국 김형욱은 자신의 보신을 위해서 이수근을 희생시켰다는 것이다. 이수근이 처형되고 세달쯤 후에 김형욱이 중정부장에서 해임된 것을 보면 나름대로 일리 있는 주장.

북측도 이 사건을 흥미있게 본 모양이며 나중에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남북 정보기관 간에 통로가 트이자 북의 공작기관 책임자가 남측 관계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수근이를 남반부 정부가 처형한 건 우리 공화국의 배신자를 처단해준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말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배경옥씨의 인터뷰

7. 명예 회복[편집]


2018년 10월 1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3부(김태업 부장판사)는 이수근 사건의 재심을 통해 이수근의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혐의는 무죄이고, 공문서(여권) 위조 및 행사, 외국환거래법 위반 등 일부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음을 확정하였다.#

8. 여담[편집]


동명이인인 코미디언 이수근의 이름이 이 인물을 그대로 본따 지어졌다고 한다. 단 한자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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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래 중앙정보부 요원들과 충돌한 장소가 홍콩이었지만 홍콩 당국은 이수근과 중앙정보부 양측을 모두 체포한 뒤 정치적 망명을 요구하는 이수근 측을 다시 출국시켰다. 홍콩을 떠난 이수근은 캄보디아로 향하는 중간기착지인 베트남에서 잡혔다.[2] 사형 집행 당일 조선일보 기사 # [3] 성주 이씨 집성촌이다.[4] 외관으로 보아 1964년형 닷지 330으로 추정된다.[5] 당시 이같은 내용은 신문에 특종 보도되며 한국 사회의 큰 관심을 모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예능인 이수근의 아버지가 이 신문 보도를 보고 우리 아들도 저 사람처럼 용감하게 자라서 이름을 떨쳤으면 하는 뜻을 담아 한자는 다르지만 이수근의 이름을 아들 이름으로 붙여 줬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기엔 개그맨 이수근 태어났을때 북한 이수근은 이미 간첩혐의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6] 귀순을 위장해서 간첩을 파견할 수도 있다고 해서 중앙정보부에서 귀순한 사람들에게 시행한 절차. 그 절차는 기밀이라고 적힌 서류를 놓아 두고 그 서류를 어찌하는지 반응을 살펴보았다고 한다.[7] 영국령 시절 홍콩 정보경찰은 신분상으로만 경찰이었고 실제로는 MI5MI6의 홍콩 지부였다.[8] 정무총감은 홍콩 총독에 이은 의전서열 2위로 한국으로 치면 국무총리에 해당하며, 홍콩 행정부의 2인자다.[9] 현재의 호찌민시[10] 발송사실이 있다면 그 조회증명만 내밀어도 이수근의 간첩 혐의의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었지만 내밀지 못했다는 건 애초에 발송 사실이 없을 가능성에 무게를 더한다고 볼 수 있다.[11] 배경옥은 이미 1969년부터 1989년까지 21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서 출소했다.[12] 조갑제 닷컴에서 이 기사 모음집을 단행본으로 냈다.[13] 떤선녓 국제공항 비행기를 대통령 특명으로 세우고 현장에서 이수근의 멱살을 잡았던 중앙정보부 무관이었다. 이후 사이공 함락 때 탈출하지 못해서 몇 년간 억류 생활을 해야 했다.[14] 이수근의 수기나 관련 기사를 보면 정말로 천하의 개쌍놈이 따로 없을 정도로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심심하면 이수근을 연행해서 때리고 총을 겨누며 위협했다는 등, 심정적으로 그가 왜 남한에 실망하고 타국으로 다시 망명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참고로 이 자는 나중에 중앙정보부 내부의 정치 싸움에서 밀려나 몰락하고, 미국으로 도피해 세탁소나 전전하다가 2014년 5월에 죽었다.[15] 물론 측근들 외에도 김형욱이 물불 안가리는 스타일이라서인지 국민들 사이에서 여론이 좋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그 박정희가 국민 여론 눈치가 보여서 김형욱을 중정부장에서 자른 뒤 훨씬 온건한 성격인 김계원을 후임으로 앉혔을 정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