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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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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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음악인
선우정아
(2014년)

이승환
(2015년)


딥플로우
(2016년)



이승환
Lee Seunghwan

파일:4AAFF35D-0417-4041-8ED3-88B4F6088F63.jpg
이름
이승환 (李承桓)
출생
1965년 12월 13일[1] (58세)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現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경주 이씨 (慶州 李氏)
가족
아버지 이현종[母]
누나 이정희, 남동생 이정환(1967년생)
신체
167cm, 63kg[2], B형
학력
서울혜화국민학교 (졸업)[3]
보성중학교 (졸업)
휘문고등학교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영어영문학 / 중퇴)[4][5]
종교
불교[6]무종교
병역
면제(우울증)[7]
소속사
드림팩토리클럽(1989년 ~ 2014년)[8]
〈오드뮤직〉 (2014년 ~ 2015년)
드림팩토리클럽(2015년 ~ 현재)[9]
데뷔
1989년 정규 1집 《B.C 603
(데뷔일로부터 12585일, 34주년)
별명
어린 왕자, 공연의 신, 공장장[10], 새벽고딩, 이철민[11], 아쟐[12], 라이브의 황제
MBTI
ENFJ
링크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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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데뷔 이전
2.2. 데뷔 과정
2.3. 자립과 독자적인 음악 활동
2.4. 채림과의 결혼과 이혼
3. 공연의 神
3.1. 콘서트
4. 이승환의 음악
4.1. 발라드와 록 사이
4.1.1. 록 가수로서의 이승환
4.1.2. 발라드 가수로서의 이승환
4.1.3. 장르에 따른 팬들의 호불호
4.2. 가창력
5. 음반 목록
5.1. 개별 문서가 있는 이승환의 노래
6. 수상 내역
7. 정치 성향
7.1. 명예 훼손 집단 고소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가수, 프로듀서. 1989년 10월 15일 1집 《B.C 603》으로 데뷔했으며, '어린 왕자'라는 별명[13]으로 유명하다.

1990년대의 대표적인 뮤지션 중 한 명[14]이었고, 그의 콘서트에 대한 열정, 생동감 넘치는 콘서트 등으로 '공연의 신'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한창 절정의 인기를 자랑하던 2~3집 시기(1990~1992년)에는 아이돌로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15]로 10대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받았었고 대학가에서 인기가 많았던 시기였다.


2. 생애[편집]



2.1. 데뷔 이전[편집]


1965년 12월 13일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에서 2남 1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장난감 공장장이어서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이후 국민학교 4학년 때인 1975년에 서울로 이사오면서 혜화국민학교로 전학왔고,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쭉 보냈다. 1년 재수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에 영어영문학과 85학번으로 입학했으나 데뷔 이후 학업을 중퇴했다.


2.2. 데뷔 과정[편집]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온갖 음반사를 다녔으나 데뷔는커녕 물만 먹고 다녔다. 음악을 하겠다고 부모님 속을 끓이다가, 결국 이승환은 아버지와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둔다는 약속을 하고 음반 제작비를 위해 미리 유산을 받았다.[16] 그 돈으로 이승환은 직접 앨범을 제작하였고, 그때까지도 부모님은 앨범 낸다면서 같이 다니는 친구랑 이승환을 보면서 외려 속만 더 끓었다는데[17] 결과는 1년 동안의 장기전 후에 대박이 났다. 지상파 방송 출연도 안 하고 100만 장 판매를 해버렸다. 같이 작업했던 친구는 바로 1990년대 초중반을 풍미한 작곡가 오태호다. 오태호가 명성을 얻은 것도 이승환 1집을 통해서였다.


2.3. 자립과 독자적인 음악 활동[편집]


가수 유재하 다음으로 가수 본인이 직접 자신의 음반을 제작한 가수이다. 1집을 제작한 '우리기획'은 이승환이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서 차린 회사다. 이후 1997년, 우리기획[18]을 확장시켜 '드림팩토리'라는 종합 연예기획사를 만들어 휘하에 국내 최초 공연 스탭 양성 학교 설립, 음반 녹음 스튜디오, 연예 매니지먼트 사업부, 캐릭터 디자인 사업 등을 하였으나 국내 음반 시장의 전체적인 부진과 더불어 순이익 추구보다 투자에 집중하다 보니 경영난 악화 등의 이유로 철수 혹은 분리하였고, 직접 매니지먼트하던 박신혜, 정성미, 김시후 등은 모두 다른 기획사로 이적하게 됐다.

이후로 드림팩토리에 본인만 남은 형태를 유지하고, 인디 뮤지션들에 대한 제작과 지원의 끈은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듯 했으나, 드림팩토리클럽은 잠정 휴업에 들어갔었다.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윤상과 같은 소속사였고, 이후 오드뮤직에서 나와 1인 기획사 형태로 드림팩토리를 운영한다.

2.4. 채림과의 결혼과 이혼[편집]


2003년 5월 24일 채림과 결혼식을 올렸으나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상태였고, 불과 2년 10개월 만인 2006년 3월, 부부의 결별이 공식으로 확인되었다. 둘 사이의 자녀는 없다.

3. 공연의 神[편집]


데뷔 때부터 꽤 뜸했던 방송 출연[19]은, 본격적으로 발라드가 아닌 록 등의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게 된 5집 이후에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와 함께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기 또한 지나가버렸고, 결국 이승환은 대중 전반에 걸쳐 사랑받기보다는 매니악한 팬덤과 주로 소통하는 유형의 가수가 되었다.

라이브 밴드 출신임과 더불어, 오디오 매니아라는 점이 영향을 끼쳤는지 이승환의 라이브 무대에서 퍼포먼스와 음향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20] 따라서 이승환의 콘서트는 국내 대중음악계에서는 선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여러가지 새로운 기술적인 시도와 더불어 절대적인 횟수, 그리고 그 수준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국내 최초로 전국 공연 투어에 이름을 붙여 브랜드화했다. 99년 무적투어[21], 01-02년 SSEN CONCERT, 05년 이승환의 난 '亂李'투어 등. 최초의 용산 전쟁기념관에서의 대중음악 공연[22], 최초의 ABR(움직임 제어가 가능한 초대형 풍선 예술)의 공연도입, 국내 최초의 젠하이저 후원 가수, 게스트도 없이 9시간 30분의 공연 시간 등등의 많은 공연 관련 기록을 가지고 있다.[23] 공연 내용에서는 갖가지 이벤트가 풍성하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발라드 레퍼토리를 주로 하는 대형/연말 공연과, 록 넘버가 주가 되고 주로 스탠딩으로 열리는 중소형 공연이 나뉘어 지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입문하는 사람은 연말 공연 쪽을 도전해보는 것이 좋다.

공연 중간에 이벤트도 많은 편이며,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몇몇 공연 외주 업체에 십여년 이상 전담하다시피 외주를 주어 일관성 있는 수준을 뽑아내고 있다. 과거에는 더 뛰어다니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달고 점프 연습을 하기도 하였으며, 공연 도중에 맹장염이 나면 어쩌나 싶어서 병원에 가서 ''미리 잘라버리면 안 되나요' 하고 상담했다가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공연 기획부터 주최, 연출까지 직접 하다 보니 공연 도중에 자꾸 이런저런 손동작으로 엔지니어들과 대화하며 이런저런 것들을 조정하기도 한다. 공연장이나 라이브 영상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인터뷰에서 노래 부르는 것보다 "아... 왜 여기서 조명이랑 노래랑 타이밍이 안 맞지?" 이런 생각에 더 집중하기도 한다고 하기도 했다.

평소 성격은 잘 알려진 바가 없지만, 공연 전후로는 예민해져 스탭들에게는 까칠하다고 알려져 있다. 탁재훈, 신정환컨츄리꼬꼬와 무대도용에 대한 소송이 2008년 시작되어 2009년 여름에야 끝났다. 이승환은 지난 2007년 12월 22일부터 24일 3일간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콘서트 '슈퍼히어로'를 열었고 컨츄리꼬꼬는 12월 25일 같은 장소에서 콘서트 '불후의 명곡'을 펼쳤다. 문제는 컨츄리꼬꼬가 이승환이 사용했던 무대 설비와 특수효과 등을 철거 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승환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상의도 없이 자신의 무대를 도용한 컨츄리꼬꼬의 공연 기획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양측의 법정공방이 시작됐다.
정확히는 컨츄리꼬꼬의 공연 기획사와 이승환의 공연 기획사 간의 문제였고,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제12부(재판장 양재영 판사)는 2009년 2월 6일, "이승환 측의 저작권 침해나 소유권 침해 주장은 명시적 승낙은 없지만, 제반 사정에 의해 묵시적으로 승낙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를 기각하였으나, 컨츄리꼬꼬 측이 이승환의 명예를 훼손한 점은 인정하여 금 1,000만 원의 손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콘서트 때 모니터링 이어폰으로 B&O사의 오픈형 이어폰 A8을 주로 사용했었다. 보통 모니터링 이어폰은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커널형을 사용하는 것에 비추어 보면 의외스러운 일이기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곤 했다. 이승환이 홈페이지에서 밝힌 바로는 첫째로 커널형은 외부의 소리를 차단해서 콘서트 중 관객들의 반응을 들을 수 없고, 둘째로는 어떤 이어폰을 사용해도 귀에서 빠져나가버리기 때문에 귀 걸개가 있는 A8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격렬하게 움직이다 두 세 개씩 고장내기도 하고, 그 중에 알루미늄으로 된 이어폰에 귀가 긁혀 그 다친 곳을 만지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2015년 이후로는 DF가 쓰여진 노란색 커스텀 이어폰을 사용하고 있다. 2015년 9월 19일 빠데이공연 때 A8을 쓰지 않고 커스텀 이어폰으로 보이는 노란 이어폰을 사용했다. 그 후 Westone의 엔도서로 선정되어 동사의 um pro 50 에 이어 ES 60 이어폰을 사용하고 있다.

A8 이전에는 인이어를 절대 하지 않고(상기된 관객 반응 캐치의 이유) 거의 메인 스피커 만큼의 물량을 모니터에 투입했었다. 덕분에 드럼은 아크릴 벽에 갇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모니터 외에 공연시 주로 선호하는 스피커는 클레어브라더스, Adamson, 메이어사운드 등이며, 마이크는 SHURE 이승환 자체 커스터마이징 버전(젠하이저는 기간 만료)이고 마이크 스탠드는 특별 주문해 제작해 사용한다. 그리고 화려하게 마이크 스탠드를 돌리는 퍼포먼스는 이승환의 시그니처이기도 하다.

3.1. 콘서트[편집]


위에서 언급했듯 공연에 대해 이승환에게는 늘 공연의 신(神), 공연천재, 살아있는 전설(Living Legend), 최초, 최고, 명불허전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는다. 그만큼 데뷔 이래 지치지 않는 열정, 끊임없는 노력과 투자로 한국 공연 문화를 선도해오고 있는 현재진행형 아티스트이기 때문이다.



4. 이승환의 음악[편집]



4.1. 발라드와 록 사이[편집]


결론적으로 초창기 시절부터 발라드 히트곡으로 유명해진 가수는 맞으나, 콘서트에서는 록 위주로 공연을 하는데다 예전 발라드 히트곡들도 록 버전으로 편곡해서 부르는 등 이제는 거의 록 가수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4.1.1. 록 가수로서의 이승환[편집]


스스로 음악의 출발점을 들국화로 꼽고 있으며, 한국외국어대학교 재학 시절 '아카시아', '셀프서비스[SS]' 등의 헤비메탈 밴드를 결성하는 등 이승환 음악의 시작점은 록 음악이다. 이후에도 오태호와 함께 파고다 극장 등 언더그라운드의 여러 밴드를 거쳤다.[24]

본인의 발언에 따르면 이 시기 가죽 자켓에 쇠사슬을 매달고 무대 위를 뛰어다녔다고 한다.[25][26] 이를테면 1집의 데뷔곡 <텅 빈 마음> [27]의 경우에도 분명 음악 장르적 분법으로는 발라드에 속하지만, 곡 진행과 사운드의 활용에 있어 록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정통 발라드스럽지만은 않고, 같은 앨범의 다른 트랙들, 특히 〈좋은 날〉이나 〈그냥 그런 이야기〉[28]는 아예 록적인 접근이 더 두드러진다. 그리고 데뷔 이후 계속된 음악 작업에서는 전통적인 문법에 따른 록 음악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런 록적인 본색은 본인 스스로도 《이오공감》의 앨범에서 많이 드러냈다고 고백을 한 적이 있고[29] 3집부터는 1, 2집에 비하면 록적인 접근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당시의 이승환 본인에게 있었던 일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3집부터 내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할 정도다. 그래서 3집의 타이틀이 《My Story》다.


4.1.2. 발라드 가수로서의 이승환[편집]


하지만 메이저 데뷔를 발라드로부터 시작했으며, 당시 큰 활약을 했던 오태호와의 콤비로 엄청난 대중성을 발휘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그 후 앨범에서도 록적인 요소가 가미된 곡이나 록 음악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앨범의 타이틀 곡은 발라드였으므로, 추구하는 장르가 어떻든지 대중은 이승환을 발라드 가수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이승환 본인의 말로는 록 보컬로는 자신의 음색에 강한 한계를 느껴서 결국 발라드와 록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이유로는 같은 무명 시절에 파고다 극장 무대에 선 김종서의 공연을 보고 '쟤 때문에 난 록은 안 되겠다'라고 느껴서 방향을 틀었다고 했고, 이문세의 〈소녀〉가 본인을 발라드로 전향하게 만든 곡이라고 했다.


4.1.3. 장르에 따른 팬들의 호불호[편집]


그래서 팬들도 발라드 가수 이승환을 좋아하는 팬들과, 록 음악을 하는 이승환까지 좋아하는 팬들로 나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난 이승환 옛날엔 좋았는데 요즘은 별로야'라면 전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다만 노래 중간중간에 나오는 메탈릭한 샤우트 보컬은 곡의 전개에 큰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기도 한다.[30]

이에 따라 4집 《Human》에서는 'Fire'와 'Water', 6집 《The War In Life》에서는 '정상'과 '비정상', 7집 《Egg(앨범)》에서는 'Sunny Side-Up'과 'Over Easy' 등으로 앨범을 이분하여 앞부분에는 발라드를 위시한 팝 적인 분위기의 곡들, 뒷부분에는 록 위주의 곡들을 수록하여 양쪽 모두의 팬들을 끌어들이려 하였지만 음악적 퀄리티와는 무관하게 그다지 성공한 시도로는 평가받지 못한다. 그래서 《Serious Day》라는 록 음악에 집중한 음반을, 《Monglong》이라는 발라드에 집중한 비정규 음반을 내기도 했다. 정규 9집과 10집은 락과 발라드를 잘 섞어서 한 장의 음반으로 발매했다. 또 발라드로만 구성되어있는 《His Ballad I》, 《His Ballad II》 앨범을 내기도 했다. 이 앨범들엔 주로 예전에 나온 노래를 다시 녹음하거나 새 곡을 넣었다.

사실 〈천 일 동안[31] 등의 히트 발라드곡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승환의 록 음악은 어느 수준 이상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사운드 측면에서 전통적인 문법에 따른 록 음악보다는 가스펠을 도입하고 Choir를 강조하는 등 변형된 록 음악을 추구하고 있기에 실제보다는 저평가받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싱어송라이터다. 데뷔 앨범만 하더라도 수록곡 10곡 중 7곡을 자작곡으로 넣을 정도며, 매 앨범마다 꾸준히 자작곡을 채우는 사람이다.[32]
공동 작사/작곡인 경우에는 엄밀히 말해서 일단 이승환이 먼저 곡을 쓰고 그것을 공동 작사/작곡으로 명시되는 뮤지션과 공동으로 수정, 보완하는 식으로 완성하는데 문제는 이게 그 공동 작곡가의 곡이라고만 알려진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본인도 "내가 곡을 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33]

4.2. 가창력[편집]


압도적인 고음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나, 자신의 음역대 내에서는 대단한 내구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승환의 음역대가 낮다는 소리가 아니다. 이승환의 음역대는 진성으로 0옥타브 파♯(F♯2)[34]에서 3옥타브 도(C5)[35]까지[36], 가성 애드리브로 4옥타브 도 (C6)[37]까지 올라가는 등 충분히 넓고 높은 음역대를 가졌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빠데이에서 6시간 반동안 66곡을 불러댔음에도 거의 목소리에 흔들림이 없었고, 그 다음주에 다른 공연 일정을 차질 없이 소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량도 큰데, 노래를 부를 때 종종 마이크를 단전에 갖다대고 노래를 부름에도 불구하고 밴드의 사운드와 어우러져 무대를 꽉 채우는 성량을 느낄 수 있다. 이런 퍼포먼스를 환갑을 앞둔 현재까지도 계속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놀랄 만한 일이다.[38]

확실히 과거에는 고음 샤우팅을 할 때를 제외하고는 아주 가늘듯 떨리는 미성을 주로 사용했는데 앨범이 점점 뒤로 가면서 조금조금씩 굵은 목소리의 사용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점점 비음 사용 빈도도 늘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과거의 노래를 듣고 현재의 이승환 라이브를 들으면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이는 음악 스타일의 변화가 매우 큰 것으로 보이는데, 1~4집 시절 불렀던 좋은 날, 악녀 탄생, 덩크 슛 등의 밝은 밴드 음악풍 곡들을 들어보면 현재 보이스, 창법과 거의 유사하다. 하지만 오태호식 발라드로 대표되던 초기 대표곡인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같은 곡들에서 보여준 목소리는 2010년 경 이후로는 들을 수 없는데, 이 활동 초기 발매곡들을 최근 콘서트에서는 바뀐 창법으로 부른다.

그렇다고 가창력이 줄어들었다는 평가는 거의 없다. 말 그대로 본인의 의사로 바꾼 것이고 기본적인 베이스에는 변화가 없다. 적지 않은 나이와 라이브 경력을 생각하면 괜히 억지로 목을 끌어쓰기보단 자기가 할 수 있는 선 안에서 최대한 힘을 쓰는 게 장기적으로 훨씬 유리하다. 라이브 콘서트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의 깔끔한 고음과 성량은 인터넷 상에서 떠받드는 본좌들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오히려 출발선 문제 때문에 또 그의 타고난 미성 때문에 상당히 저평가 되었을 뿐, 이승환은 최고의 발라드, 록 싱어이다.

5. 음반 목록[편집]


파일:ㅇㅅㅎ logo.png
[ 정규 음반 ]
파일:AB43A77F-0811-48E1-BA70-AFEE0DAD4AB0.jpg
파일:always.jpg
파일:mystory.jpg
정규 1집
}}}
B.C 603
1989.10.15
정규 2집
}}}
Always
1991.07.15
정규 3집
}}}
My Story
1993.09
파일:leeseunghwan_human.jpg
파일:external/1.bp.blogspot.com/leesh5th.jpg
파일:20E00EC3-0B76-4DBD-B8B8-58F0DC9EB8BC.jpg
정규 4집
}}}
Human
1995.06.29
정규 5집
}}}
Cycle
1997.01
정규 6집
}}}
The War In Life
1999.03.02
파일:external/image.genie.co.kr/15025256_1325654916118_1_600x600.jpg
파일:external/image.genie.co.kr/15028997_1389143853806_1_600x600.jpg
파일:external/image.genie.co.kr/43389087_1395649154084_1_600x600.jpg
정규 7집
}}}
Egg
2001.12.21
정규 8집
}}}
Karma
2004.10.08
정규 9집
}}}
Hwantastic
2006.11.11
파일:external/image.genie.co.kr/80143955_1_600x600.jpg
파일:이승환11집.jpg
파일:이승환12집.jpg
정규 10집
}}}
Dreamizer
2010.05.25
정규 11집
}}}
Fall To Fly 前
2014.03.28
정규 12집
}}}
Fall To Fly 後
2019.10.15
}}}
{{{#!wiki style="margin: 0px 10px; display:inline-block; color: #2E2E2E,#d1d1d1">
[ 비정규 음반 ]
파일:이오공감.jpg
파일:73B0CDD9-FED2-40A6-A8D9-A20ECF2CAC7C.jpg
파일:7DEB5C38-D859-49DC-9DA7-7DDB164C3BC2.jpg
이오공감 1집
}}}
이오공감 (25共感)
1992.06
라이브 앨범
}}}
The Show
1993.05
베스트 앨범
}}}
His Ballad
1997.10
파일:1F5A81CE-2551-44F6-A86A-8E1455F2A6CB.jpg
파일:DA1DC24D-03F6-4FB9-AFEB-5638BB2F1967.jpg
파일:459A587A-E4E4-403D-8997-FDCE1C1A1150.jpg
컴플레이션 앨범
}}}
유치뽕
1998.08
라이브 앨범
}}}
무적전설 (無敵傳設)
1999.11
컴플레이션 앨범
}}}
Serious Day
2002.10.30
파일:ㅂㄹㄷ.jpg
파일:ㅂㄹ.jpg
파일:말랑.jpg
베스트 앨범
}}}
His Ballad 2
2003.03.12
라이브 앨범
}}}
반란 (反亂)
2005.11.22
EP
}}}
Mallang (말랑)
2007.11.01
파일:몽롱.jpg
파일:ㅎㅌㅅㅌ.jpg
파일:3+3.jpg
리패키지 앨범
}}}
monglong (몽롱)
2008.04.21
20주년 기념 앨범
}}}
환타스틱 프렌즈 (Hwantastic Friends)
2009.10.27
EP
}}}
3+3
2015.10.01
파일:10억광년의신호.jpg
파일:그저다안녕.jpg
파일:돈의 신.jpg
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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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 광년의 신호
2016.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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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다 안녕
2016.10.07
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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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신
2017.08.24
파일:APRIL.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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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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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18.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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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들음 돼
2018.07.13
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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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히어로 (영화 엑시트 Ver.)
2019.07.31
파일:이승환어쩜.jpg
파일:이승환태양의노래.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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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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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2018.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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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노래
2019.07.31




5.1. 개별 문서가 있는 이승환의 노래[편집]






6. 수상 내역[편집]


파일:KMAlogoblack1.jpg
올해의 음악인
선우정아
(2014년)

이승환
(2015년)


Deepflow
(2016년)


7. 정치 성향[편집]


  • 대표적인 '친민주당’ 연예인으로 2010년대 들어 촛불집회와 MBC 파업 콘서트 등 사회적인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정치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주저함이 없어 성향이 굉장히 잘 드러난다.

  • 후술하듯 2012년과 2014년 당시에는 정치사회에 목소리를 내기는 했어도 뚜렷한 정치색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는데 2015년 JTBC 인터뷰에서 반 이명박, 반 박근혜 성향을 대놓고 드러내더니 2016년 촛불집회 이후로는 적극적인 친문, 친민주당, 반 보수, 반 이명박, 반 박근혜 활동을 보이고 있다. 2017년 11월 16일 tvN인생술집〉에 주진우와 함께 출연했을 때는 '(블랙리스트에 없으니) 창피하기도 하고 잘못 살았나 싶기도 하다'라고 농담 섞인 말을 하였다.

  • 2012년 11월에 개봉한 《26년》의 제작에 10억 원을 투자하면서부터 정치사회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영화 제작 환경이 불확실했던 데다 드림팩토리의 사세가 낙관적이지 못한 것을 감안하면 어려운 결정을 내린 셈이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과거 《His Ballad II》 앨범에 수록되었던 곡 〈[39]이 삽입되었다.

  • 2014년 11집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헌정곡도 발표했다. 그 곡이 바로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이다. 도종환이 작사했고, 수익금은 백혈병 어린이 재단에 기부한다고 했다. 반대로 이승환이 그토록 증오하는 이명박에 대해서는 아예 대놓고 본인이 "가카께 헌정하는 노래"라며 2017년 <돈의 신>이라는 노래를 만들었고, 2019년 30주년 기념앨범이자 정규 12집 앨범에 넣기까지 했다.


파일:이승환 박근혜 하야하라.png
  • 2016년 11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항의해 박근혜 퇴진 운동에 동참하여 드림팩토리 건물에 박근혜는 하야하라 현수막을 내걸었다. 구청에서 문제삼자 변호사의 자문을 거쳐 '신고된 집회를 알리는 현수막은 합법' 규정을 이용해 2016년 11월 민중총궐기 참여 독려 문구를 추가하여 다시 현수막을 달았다. 촛불집회에서 공연도 하였는데, 〈덩크 슛〉을 부를 때는 일부러 가사를 "하야하라 박근혜 하야하라 박근혜", "하야하라 박근혜는 하야하라 하야하라"[40]로 바꿔서 불러 화제가 되었다. 참 재미있는 사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사람 중 한 명인 차은택은 이승환의 뮤직비디오 두 편(〈당부〉, 〈그대가, 그대를...〉)을 찍었으며, 이승환의 고등학교 후배이다. 우스갯소리로 이 덕분에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오르지 않았다고 하기도 한다. 실제로 차은택은 이승환과 상당히 절친했던 사이였고 차은택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연관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이승환은 차은택에게 자수하고 죄값을 받으라 했지만 차은택이 무시하자 연락을 끊었다고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밝혔다.(사실상 절교)

파일:이승환 블랙리스트1.png
파일:이승환 블랙리스트2.png
  • 상술된 대로 박근혜 정권 뿐만 아니라 2017년 9월에 밝혀진 이명박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도 명단이 오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승환은 '내 이름은 왜 빼냐 나도 넣어라 이놈들아.'라며 매우 섭섭해 했고, "MB 국정원 퇴출 리스트에도 없는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고 있다"라는 글을 SNS에 올리기도 했다. 사실 만든 세력에서도 이승환은 방송출연으로 먹고 사는 연예인이 아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방송출연을 막는 것을 주된 공격기법으로 하는 연예인 블랙리스트에서 실질적 손해가 거의 없다는 걸 계산했을 가능성이 있다. 소속사에 대한 압력도, 이승환은 1인 기획사로 본인이 직접 소속사를 운영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압력을 넣기가 힘든 상황이다.
2017년 11월 16일 tvN <인생술집>에 주진우와 함께 출연했을 때는 '(블랙리스트에 없으니) 창피하기도 하고 잘못 살았나 싶기도 하다'라고 농담을 하였다. 덧붙여서 <인생술집>에서 본인이 방송 출연을 거부하는 이유는 방송 PD들의 텃세가 심하기 때문에 방송 출연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고도 했다.

  • 이러한 정치성향은 정치와 상관없는 분야에서도 거리낌없이 드러나오는데, 연예가중계에서 자신의 연애관과 이상형을 털어놓는 자리에서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여성은 절대 만날 수 없다고 할 정도였다. # 인생술집에서도 이상형을 만나 연애를 하고 싶다만 XXXX당을 지지하는 여자를 어떻게 만나냐며 이상형을 만날 때는 상대의 정치성향이 어떤지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고 밝혔다. #

  • 이재명 로봇 개 패대기 논란에서도 11월 2일 본인 SNS에서 본인의 반려견 지구, 구름이랑 같이 살면서 로봇개 백돌이에게 11년 동안 전기밥을 주지 않았다며 그럼 자신도 싸이코패스냐며 이재명을 옹호했다. #

  • 2022년 3월 5일 사전투표소 앞에서 파란 모자에 파란 마스크를 착용한 채로 인증샷을 찍어서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업로드했다. 또한 '유능한 사람으로'라는 언급을 덧붙였다.[41]#

  • 허나 이재명이 패배하고 나서는 2022년 말 들어서는 정치 관련 SNS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정치에 관심을 끊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정치보다는 공연에 집중하기로 한 것.


7.1. 명예 훼손 집단 고소[편집]


2019년 7월 2일 김반장[42]을 비롯한 악플러 50명을 모욕죄로 고소 고발했다. 이승환이 본인 페이스북에 오늘의 추천곡이라며 도시아이들의 노래인 〈가에서〉를 올렸는데,[43] 저격한 이를 주어가 없다며 누구를 향한 언급이냐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 후에 이승환은 페이지에 "경직된 사고로 폭력적 언사를 행하며 증오를 부추기고 편가르기를 하는 사람이 설마 너니?", "바보들. 풉. 찔리니?"[44], "정말 바보들이었어... 앜ㅋㅋㅋ 바보한테 바보라고 하면 안되는데... 막 또 쌍욕하고 그럴 텐데."라며 여전히 누구를 지칭하지 않은 채 조롱을 했으며, 이에 따라 이들의 비난도 거세졌다.

이승환은 이후, 자신의 팬들이 환창이라고 모욕을 당했단 내용과 팬까지 비난하는 것은 참지 못한다며 고소 예고글을 작성했다. 고소 예고글을 작성한 뒤에 가장 수위 높은 욕설을 했다며 김반장의 욕설을 캡쳐한 뒤론 김반장이란 트위터리안이 아닌 본명을 들어 꼬박꼬박 선진 군으로 부르며 9시간 반동안 93곡을 부르는 내 절제와 관리를 보고 용서를 구하려면 스스로 궁리를 구해라, 네 글을 읽는 게 고역인데 다음 주부터 녹음인데 감성 조절에 문제가 생긴다, 법정에서 나한테 발리지나 마라. 나는 운동하러 간다 같은 내용의 조롱을 했으며, 그 와중엔 밴드 드러머의 결혼식 기념 콘서트 홍보 포스터에 인생도 결혼도 실전이란 문구를 적고 김 선진 군에게 감사드린다는 과격한 멘션을 남기기도 했다.멘션을 정리한 스샷 이후 욕설을 한 사람들을 고발했단 내용을 기사화했고[45], 이후 소속사를 통해 명예훼손 고소를 밝히게 된다.###

1년이 지난 2020년 10월 15일 김반장에 대한 판결이 선고되었다. 검찰에서는 약식명령을 청구하여 벌금형을 구형하였으나, 법원에서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고 판단하여 공판절차에 회부하였고 징역형 집행유예와 상당 시간의 사회봉사를 명령했다.

8. 여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이승환/여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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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민등록상 생일은 1966년 1월 13일이다. 데뷔 초에는 1967년 1월 13일 생으로 활동했었지만(1992년 일밤 몰래카메라 때 언급) 그건 매니저가 나이를 2살이나 속여 소개했기 때문이라고 TV 프로그램에서 밝힌 바 있다. 또 2007년 라디오스타 출연 당시 1965년생 김국진과 동갑이라고 밝힌 적이 있었고, SNS에서 12월 13일에 자기 생일을 보내는 모습을 공개하기도 한다.[母] 어머니 명광옥은 1993년 3집 제작 이전 사망. 3집에 어머니를 기리는 곡 '내 어머니'가 수록되어있다.수미옥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해를 이혼했던 2006년이 아닌 어머니를 여읜 1993년이라고 할 정도로 어머니를 여읜 것이 두고두고 충격이 컸다고 한다. [2] SBS TV 프로그램 고쇼에 출연했을 당시 자신이 직접 말한 키와 몸무게다.[3] 국민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상경하여 전학을 왔다. [4] 이승환이 재학하던 시절의 명칭으로, 당시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서울캠퍼스분교였다. 현재는 이원화캠퍼스로 전환하며 이름도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로 변경했다.[5] 그것도 졸업 직전인 4학년 때 중퇴했다. 1991년 2집 타이틀곡 너를 향한 마음 제작 비화를 소개할 때 한국외대 4학년이라고 소개되어 있다.[6] 5집인 Cycle도 불교의 윤회에서 따온 이름이고 8집인 Karma(이승환)도 불교 용어인 카르마(업보)에서 따왔다.[7] 과거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서 밝힌 바로는 우울증이 너무 심해서 통원치료도 받고 약도 처방받았다는 내용도 있고 힐링캠프 인터뷰에서도 대학 재학 시절 아버지가 가수가 되는 것을 반대한 이유 때문에 우울증이 심하게 와서 거의 두달간 두문불출했었다고도 했다. 출처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히길 병무청 징병검사에서 서류 몇 장 보더니 군대에 안 가도 된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승환이 20대였을 시기에는 합계출산율이 평균 4~5명이었기에 인구가 많아서 지금보다 기준이 느슨할 때라 면제되는 사람이 많았다.[8] '우리기획'으로 시작된 이승환의 1인 기획사로, 2014년 재정난으로 일단 문을 닫았다.[9] 오드뮤직과의 계약 만료로 다시 드림팩토리로 복귀했다. 현재는 매니저와 계산직공만 근무하고 있다.[10] 〈드림팩토리〉의 [11] 토이 3집과 5집에 객원 보컬로 참여할 당시에는 '이철민'이라는 가명으로 참여한 바 있다. 비슷한 예로 신경필이 있다.[12] 이승환이 DC인사이드 이승환 갤러리가 생겼을 때 인증글을 남겼던 유동닉 '아쟐랑께롱'에서 유래했다. 현재는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13] 2008년 12월 2일 타블로와 꿈꾸는 라디오의 코너 꿈꾸라이브에 출연하여, 고등학교 후배인 기자가 첫 인터뷰 때 쓸 말이 없어서 붙인 별명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본인은 이런 예명이 스스로에게 음악적인 면에서 족쇄가 된다고 생각해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14] 조규찬의 표현대로 한국 대중음악사의 황금기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그 시절은 TV 출연을 열심히 안 해도 라디오 방송 횟수와 공연, 입소문으로도 100만 장 판매가 가능한 음반들이 있던 시기였다.[15]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던 신승훈, 윤상, 신해철 등도 1990년대 초반엔 지금의 아이돌 포지션에 가까웠다. 이후 밴드, 프로듀싱 등에 전념하면서 이들을 아이돌로 보는 시선은 줄어들었다.[16] 정확히 말하면 계속 퇴짜를 맞다가 열일곱 번째로 갔던 서울음반(현 카카오M)에서 드디어 성사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획사에서 3년에 3장의 앨범을 내야 하고 매년 홍보비 2000만 원을 가지고 오라는 황당한 조건을 내밀었었다. 이에 이승환은 좀 아닌 것 같다 생각은 하면서도 여기에 응해서 녹음 시작을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영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아버지에게 상황이 이렇다는 것을 말한 후에 그때까지 소비한 녹음비 800만 원은 다 지불하고 계약을 파기했다. 결국 유산으로 받은 500만 원으로 본인이 직접 데뷔 앨범을 제작했다. 계산하면 1300만 원으로 데뷔 앨범을 제작한 셈이다.[17] 아버지의 반대가 엄청 심했다고 한다. 하지만 1집이 대성공을 거둔 다음에는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다고 한다. 아들이 가수인 것을 아버지 친구들이 모른다고 하면서 TV 활동은 안 하냐고 했다고. 수입 관리도 해줬을 정도니 나름 전략도 세워준 셈이다. 그래서 본인 명의의 도장과 통장은 39살에 처음 가졌다고 한다.[18] 불후의 명곡으로 알려진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을 제작했다. 이름을 감춘 이유는 그 당시 '가수가 왜 제작을 하느냐'는 주변의 눈총(그 시절에는 가수가 제작은 하는 것에 대해서 시선이 고운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때문에 숨긴 것이라고 밝혔다. 소속 가수로 따지면 더 클래식이 바로 우리기획 소속 가수 1호다.[19] 초창기 시절의 TV 출연 영상을 보면 시선 처리를 엄청 못 한다. 본인 스스로도 TV에서 라이브는 공연 시보다 무척 못한다고 스스로 말하고 다닐 정도다. 하지만 TV 출연을 안 하면 영업이 불가능한 시대가 돼서 이전보다 TV에 자주 나오기는 한다.[20] 라디오스타에선 아예 "방송국 음향스태프를 믿지 못해서 방송국에선 라이브를 안 한다." 라고 하기도 했다. 항상 음향 엔지니어를 데리고 다니는데, 방송국에서도 그러면 스태프들이 싫어해서 그냥 방송국에선 립싱크를 한다고 한다.[21] 97~99년 사이의 투어를 3CD 형태로 99년 무적전설이란 타이틀로 발매했다. 이 앨범은 패키지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여러가지로 극찬을 받은 앨범이다.[22] 이 실황은 끝장 라이브로 DVD 발매되었다.[23] 국내 단독 공연 시간 기록 1~7위 모두 이승환이다. 03년 '끝장' 공연에서 5시간 33분 기록을 세웠고, 12년 '한번더 빠데이'에서 5시간 40분으로 경신, 15년 '빠데이 26년'에서 6시간 21분으로 경신, 16년 '빠데이 7' 에선 무려 8시간 27분으로 경신했다. 18년 '빠데이 X2 너만 오면 돼'는 8일은 6시간 2분, 9일에는 6시간 15분 공연했다. 마지막으로 2019년 6월 16일 '라스트 빠데이:괴물'에서 9시간 30분으로 이전 기록을 경신했으며, 이는 최장 공연 기록이다.[24] 이 시절 오태호는 기타리스트였다.[25] 이 시절 파고다 극장 공연에서 온몸에 쇠사슬을 감고 무대에 멋지게 등장했는데 제일 앞자리 여자 관객이 어머 여기는 중학생이 보컬인가 봐!라고 이야기하는 걸 듣고 좌절했다고 한다.[26] 또한 이 시절에 가수를 꿈꾸는 아들이 재능은 있는 건지 궁금한 아버지가 평소 알고 지내던 작곡가 길옥윤에게 평을 듣고자 밴드 공연에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당시 욕 들어간 외국 메탈곡을 한국화해야 한다며 걸쭉한 욕을 쩌렁쩌렁한 샤우팅으로 내뱉는 바람에 어르신들이 당황했다고 한다. 어찌 됐든 이 공연을 계기로 첫 음반을 위한 부친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27] 다만 본인은 이 앨범, 특히 이 당시 본인의 보컬톤을 상당히 부끄러워 하는 듯하다. 스스로 바람난 중딩이라면서 디스한다.[28] 그래서 라이브에서는 아예 록으로 싹 뒤엎어서 부른다.[29] 그래서 이오공감의 앨범은 오태호의 발라드 곡 때문에 많이 팔렸다고 스스로 인정했다.[30] 4집의 '너의 나라'와 6집의 '나의 영웅'을 들어보면 된다. 골수팬들이야 좋다고는 하지만 발라드 가수로만 아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4집에서 다수 수록된 록적인 트랙을 듣고 변절자라면서 돌아선 팬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1, 2집 시절의 이승환을 낯설어하는 사람들도 예상 외로 많은 편이다.[31]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김동률이 작사하고 작곡까지 한 노래로 알고 있는데 이 곡은 이승환이 가사를 쓰고 김동률이 멜로디를 쓴 곡이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9년 선후배 사이다. 김동률은 본인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당시 학교 가요제의 손님으로서 이승환을 본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천 일 동안〉은 김동률이 이승환 집에 놀러와서 피아노로 멜로디를 연주해줬을 때 이승환이 그 자리에서 〈다만〉이랑 함께 이 곡을 수록하겠다'고 바로 알려줬다고 한다.[32] 5집 이후부터 작곡 부분은 공동으로 하는 비중이 많이 늘고 있다.[33] 유희열의 인터뷰에 의하면 전체적인 아이디어의 대다수는 해당 뮤지션(이승환, 윤종신)이 하고 본인은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34] 〈꽃〉[35] 〈그냥 그런 이야기〉 라이브 버전[36] 나의 영웅과 변해가는 그대 라이브에서는 3옥타브 레(D5)도 올라가지만 샤우팅에 가깝게 부른다.[37] 〈천 일 동안〉 라이브 버전 마지막 애드리브 가성 한정[38] 2020년 《놀면 뭐하니?》 방구석 콘서트에서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를 부를 때는 아예 마지막 부분을 마이크 없이 부르면서 무대를 울리는 기량을 보여주기도 했다. 콘서트에서도 동일하게 자주 보여준다.[39] 이 곡 뮤비의 주인공이었던 박신혜의 연기 데뷔작으로 유명하다.[40] 원래 가사는 "야발라바히기야 야발라바히기야", "야발라바히기야모 하이마모하이루라"다.[41] 이재명 후보의 슬로건이 "위기에 강한 유능한 경제대통령"이었다.[42] 드러머 김반장이 아니라, 김반장의 극딜스테이션이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김선진을 뜻한다.[43] 나경원의 달창 해명이 뜬 날과 노래를 업로드한 날이 같다.(2019년 6월 20일) 후에 이승환이 나경원의 달창 해명으로 내놓은 문 발언이 우스웠단 이유였다고 밝혔다.[44] 두 게시물에 대해선 문파들을 향한 게시물이 아니라 팬 커뮤니티를 향한 게시물이라고 하나, 팬 커뮤니티를 제외한 이들에게는 이해되기 어려웠다.[45] 단, 이에 있어서 김반장이 맞고소를 하면 자연스레 연예면에 기사들이 나오므로 법무법인에 보도자료 내려던 걸 자신이 중지시켰단 언급을 남겼는데, 이미 소속사인 드림팩토리클럽이 SNS로 이를 고지하면서 기사화 되었기에 쓸모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후 이런 기사화에 대해서 법무법인과 소속사는 보도자료를 배포하지 않았다는 입장문을 공유하며 '매를 번다'며 조롱을 했으나 사실상 SNS에 이를 고지한 드림팩토리클럽이 보도자료를 간접적으로 내놓은 것이나 다름 없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