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하라 히로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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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정치인. 중의원으로, 이시하라 신타로의 삼남이자 이시하라 노부테루의 동생이다.
2. 생애[편집]
1964년 6월 19일, 가나가와현 즈시시에서 이시하라 신타로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게이오기주쿠 소학교[1] , 게이오기주쿠 중학교, 게이오기주쿠 고등학교를 거쳐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다. 2003 년,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자유민주당 공천을 받아 도쿄도 제3구에서 출마했으나 민주당의 마쓰바라 진에게 패배했다.
2005년의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바람의 영향으로 도쿄 3구에서 당선된다. 2006년 8월 15일에는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 2009년의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 바람의 영향으로 도쿄 3구에서 마쓰바라 진에게 패배했고, 더군다나 비례대표 중복 등록도 했으나 석패율제 구원도 못 받고 낙선했다.
2012년의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다시 도쿄 3구에서 자민당과 공명당 추천으로 출마해 2016표 차이로 당선된다. 2013년 9월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에서 외무대신 정무관으로 취임했고, 2014년 9월에 퇴임했다. 2013년 11월 25일 정무관 시절 이시바 시게루 간사장과 함께 태풍 26호의 피해를 받은 이즈 제도를 방문했다.
2014년 12월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마쓰바라 진을 꺾고 4270표 차로 3선한다.[2] 2016년 8월 5일, 내각부 부대신에 취임했다. 2017년 10월의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도 마쓰바라 진을 꺾고 4선한다. 2019년 환경부대신과 내각부 부대신에 취임했다.
2021년 치러진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이시하라 형제는 호된 심판을 받았다. 단 한 번도 지역구에서 낙선한 적 없던 형 이시하라 노부테루는 지역구에서 낙선 후 비례 부활도 못 하고 쫓겨났고 히로타카 역시 지역구에서 비토의 목소리가 강해 결국 마쓰바라 진에게 지역구를 뺏기고 비례로 부활했다.
형의 낙선 및 파벌 회장 은퇴 후 형의 파벌이었던 근미래정치연구회에서 탈퇴해 현재는 무파벌이다. 이후 12월 총재 파벌인 굉지회에 가입했다.
3. 정치적 성향[편집]
4. 기타[편집]
- 사이비 종교인 행복의 과학의 신도라고 한다.# 2008년 행복의 과학 도쿄도 남부 지부의 2층에서 신자가 되는 의식을 했다고 한다.
행복의 과학의 신자라면서 행복실현당엔 입당하지 않았다.
-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은 베니그노 아키노라고 한다. 베니그노 부자는 아버지는 일본 점령하에서 괴뢰정부의 실세로서 부역하고 아들은 자주 방일하여 이시하라 신타로 등 일본 극우세력과 끈끈한 연줄을 자랑하였는데 그 인연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 블로그 게시글 중에 "보육원 떨어진 일본 죽어라"라고 보육원에 떨어졌다고 불평했던 사건이 있었는데#, 2월 29일의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민주당의 야마오 시오리 의원이 이 블로그를 다룬 질의를 했을 때 이시하라를 비롯한 히라사와 가쓰에이, 이시다 마사토시, 스가와라 잇슈, 에토 세이시로, 시라스카 다카키, 세키 요시히로 7명의 자민당 의원이 "누가 쓴 거야" "익명이야 익명" "제대로 본인을 보여줘" "짜증나네" "그만둬, 그만둬"라고 야유한 적이 있다.[5]
- 같은 당 소속인 오치 다카오와 공통점이 많다. 둘 다 1964년생이며[6] , 정치인 가문에서 태어난 세습 정치인이라는 점, 중고일관제로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과에 진학한 점, 정계 입문 전에는 은행원으로 근무했던 점, 같은 도쿄 지역구 중의원 의원이라는 점, 둘 다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처음 당선된 점[7] , 의원 대수와 의원 선수가 같다는 점 등의 공통점들이 있다.
5. 둘러보기[편집]
[A] 석패율 비례대표[1] 기시 노부오가 이 학교 출신이다.[2] 마쓰바라는 석패율제로 구원받았다.[3] 전쟁 포기와 자위대, 긴급 사태 조항, 헌법 개정 절차[4]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5] 누군지도 모르는, 실제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인지도 모르는 사람 때문에 논의를 할 수는 없다는 취지이긴 했으나, 실제 많은 학부모의 공감을 사며 사회문제로 부상한 이슈에 대해 공식석상에서 의원이 질문하는데도 야유하는 건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 이 사건 1년 뒤 다시 '보육원 대란'이 발생하는 등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6] 다만 오치 다카오는 2월에 태어났기 때문에, 1963년생들과 같은 학년이다.[7] 심지어 둘 다 제4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이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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